세자를 보호하자는 영의정 최석정의 상소문. 무녀의 아들 이수장 등을 친국하다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이 병을 핑계대고 국청(鞫廳)에 나오지 않았다. 이어서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궁정(宮廷)에서 변고(變故)가 일어났고, 신국(訊鞫)에 친림(親臨)하시니, 온 나라가 어지럽고 황급(遑急)합니다. 그저께 비망기(備忘記)를 내리시자 온 조정의 신료(臣僚)들이 놀라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는데, 곧 후사(喉司)의 청대(請對)로 인하여 즉시 반한(反汗)247) 하셨으니, 뜻을 바꾸어서 명령을 거두시는 미덕(美德)을 누구인들 흠모(欽慕)하고 우러러보지 않겠습니까? 신이 이번 옥사(獄事)의 요망스럽고 악한 것을 생각해 본즉 놀라움과 아픔이 살점을 도려내는 듯하였으며, 춘궁(春宮)의 사정을 생각해 본즉 아픈 마음이 무너지는 듯하였습니다. 신자(臣子)의 심정이 오히려 또 이와 같은데, 우러러 성념(聖念)을 생각하면, 마땅히 어떠한 마음이 드시겠습니까?
옛날 한(漢)나라 경제(景帝) 때 전숙(田叔)을 보내어 양왕(梁王)248) 사건을 안문(按問)하였는데, 태후(太后)가 이를 걱정하여 음식을 먹지 않고 밤낮으로 흐느껴 울었으므로 황제도 또한 근심하였습니다. 전숙이 양왕의 옥사(獄辭)를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빈손으로 와서 알현(謁見)하니, 황제가 ‘양왕의 사건은 증거가 있던가?’라고 묻자, 대답하기를, ‘죽을 만한 죄가 있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황제가 ‘그 사건의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황상(皇上)의 모후(母后)께서 양왕의 사건에 대해 물어보셨습니다. 지금 양왕이 복주(伏誅)되지 아니하면 이것은 한(漢)나라 법(法)이 행해지지 않는 것이며, 복주되면 태후(太后)께서 음식을 잡수셔도 맛을 느끼지 못하실 것이고 잠자리에 들어도 자리가 편안하지 못할 것이니, 어러한 근심이 폐하(陛下)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황제가 이를 매우 옳게 여기고 전숙으로 하여금 태후를 알현하게 하여 ‘양왕은 알지 못하였고, 이런 짓을 한 자들은 행신(幸臣)인 양승(羊勝)·공손궤(公孫詭)의 무리였으므로 삼가 이미 복주하였으며, 양왕은 무고(無故)합니다.’라고 하니, 태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밥을 먹었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서로 눈물을 흘리고 다시 옛날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주자(朱子)가 《통감강목(通鑑綱目)》에다 자세히 썼는데, 선유(先儒)의 사단(史斷)249) 에서도 또한 칭찬하기를, ‘태후가 눈물을 흘리면서 음식을 먹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황제도 진실로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이에 천리(天理)의 마음이 유연(油然)하였으니, 진실로 실형(失刑)하였다고 나무랄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아!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관계는 윤리 강상(綱常)에 아울러 나란하나, 은혜와 의리, 상경(常經)과 권도(權道) 때문에 서로 경중(輕重)이 있게 됩니다. 태후와 세자는 친속(親屬) 관계와 존비(尊卑) 지위에는 비록 차이가 있겠지만, 인군(人君)이 자애(慈愛)하고 효성(孝誠)하는 도리와 신자(臣子)의 복종하고 섬기는 의리는 진실로 다른 이치가 없는 것이며, 종사(宗社)의 대계(大計)에 관계되는 것이라면 또 얼마나 중대하겠습니까? 더욱이 지금 춘궁의 사정과 형편이 태후가 눈물을 흘리고 음식을 먹지 않던 것에 비길 정도이겠습니까? 대저 양왕은 하나의 번신(藩臣)이고 죽을 만한 죄가 분명히 있었으나, 특별히 태후의 아끼고 사랑하던 정으로 인하여 법을 어겨가면서 관대히 용서하였지만, 선유(先儒)는 오히려 또 이를 용납하였습니다.
지금 희빈(禧嬪)이 설령 용서하기 어려운 죄가 있다고 할지라도, 춘궁을 낳아서 기른 은혜를 생각한다면, 춘궁이 걱정하고 마음 상할 것을 염려하여 조금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시어, 그 죄상을 끝까지 캐내어 세상에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게 하소서. 그러나 좌우의 불령(不逞)한 무리들은 율(律)에 의하여 대벽(大辟)250) 에 처하되 왕법(王法)을 옛날 양승(羊勝) 등의 일과 같이 시행하여 춘궁을 편안하게 한다면, 아마 금일의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에 어긋나지 아니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 우리 춘궁을 얻어서 주창(主鬯)251) 의 중임을 맡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 춘궁께서도 아름다운 자질을 타고나시어 명호(名號)가 일찍부터 정해졌고, 바야흐로 초츤(齠齔)의 나이에 곤전(坤殿)께서 취(取)하여 아들로 삼으시어 어머니의 깊은 자애(慈愛)와 아들의 돈독한 효성이 자기 친자식보았다 더한 감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소문이 날로 퍼져 나가자 사방에서 귀를 세우고 들었으니, 이것은 곧 종묘(宗廟) 신령(神靈)이 보호하고 도와주신 것이며, 실로 전하의 하늘과 같은 큰 복(福)입니다.
그러나 갑자기 뜻밖에도 나이 어린 몸으로 인륜(人倫)의 망극(罔極)한 변고(變故)를 당하고, 또 불안한 일이 있게 되었으니, 하늘이 무너질 듯한 놀라움과 괴로움이 마땅히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만약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고 미치도록 괴롭게 하여 스스로 그 성정(性情)을 보전할 수 없게 한다면, 비단 전하께서 지극히 자애하시는 은의(恩誼)를 거듭 상(傷)하게 할 뿐만 아니라, 종묘 사직에 대해서는 어떠하겠습니까? 신은 일의 방편(方便)에 따라서 세자를 보호하는 데 뜻을 기울이고 진정(鎭定) 보안(保安)하는 방도를 다하도록 힘쓰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노신(老臣)이 구구하게 바라는 지극한 간청(懇請)입니다. 금일 대신(大臣)과 육경(六卿)에게 순문(詢問)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병으로 경연에 나아가지 못합니다. 내리신 명령을 이미 거두었으니, 반드시 순문하실 것도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그대로 중지시키고 시행하지 마시며, 여러 신하들의 하정(下情)을 본받도록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서 장차 여러 죄수들을 친국(親鞫)하려고 하면서, 최석정의 차자를 내어 보이고 대신들을 돌아보면서 묻기를,
"이 차자의 말단(末端)에서 한 말이 어떠한가?"
하니, 판부사(判府事) 서문중(徐文重)이 말하기를,
"이번 일을 성상께서는 어찌 깊이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이것은 전대 역사에 없었던 일이고 관계되는 바가 너무나 중대하므로, 신자(臣子)들이 놀라고 가슴 아파하는 것이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오로지 성상께서 윤당(允當)하게 처분하시는 데 달려 있을 뿐이요, 신료(臣僚)들에게 순문하실 만한 것이 아닙니다. 영상(領相)의 뜻은 대개 세자를 위하여 깊이 염려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하고, 좌의정 이세백(李世白)은 말하기를,
"이번 일을 외신(外臣)들은 잘 알지 못합니다만, 그러나 전후의 비망기와 어제 하교(下敎)를 가지고 보건대, 일이 대행 왕비(大行王妃)와 관련되어 있으니, 아랫사람들이 어찌 감히 입을 놀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걱정하는 바는 세자께서 몹시 놀라 손상될 것은 형세상 반드시 그럴 것이니, 오직 성상께서 참작하고 헤아려서 처리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어찌 반드시 신하들에게 순문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고, 우의정 신완(申琓)도 또한 이세백의 말과 같았다.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이여(李畬)는 말하기를,
"금일에 당한 일은 실로 망극한 변고입니다. 신은 옥사(獄事)를 주장하는 관원으로 마땅히 옥사의 전말을 알아야 할 것인데, 어제의 처분은 실로 너무 급하게 서둔 것이니, 이번에는 마땅히 앞으로의 사정을 서서히 보아가면서 십분 참작하고 헤아려야 할 것이며, 결단코 서둘러 먼저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김창집(金昌集)은 말하기를,
"옥사를 끝까지 밝혀낸 뒤에 참작하여 처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이여가 말하기를,
"춘궁이 나이가 어린데, 놀라고 가슴 아파하였다가 크게 손상된다면, 마침내 성상의 자애하심에 어그러짐이 있을 것입니다. 오로지 참작하고 헤아려서 처리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양사(兩司)에서도 또한 진달(陳達)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차자를 양사에 보여 주었다. 장령 윤홍리(尹弘离)는 말하기를,
"옥사를 국문(鞫問)하여 끝까지 밝혀낸 뒤에 마땅히 조용하게 처리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고(前古)에 없던 변고이니, 신의 생각으로서는 2품 이상의 대신들에게 모두 순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헌납 어사휘(魚史徽)는 말하기를,
"대신의 차자는 실로 춘궁을 보호하려고 말한 것이니, 마땅히 옥사를 끝까지 밝혀내기를 기다렸다가 조용히 순문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여가 말하기를,
"문안(文案)에 있는 신당(神堂)의 사건은 중대한데, 죄인들은 버티면서 변명하며 자복(自服)하지 아니합니다. 모름지기 자복받기를 기다렸다가 결정해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어제 하교(下敎)를 받고 신민(臣民)들의 마음이 마땅히 다시 어떠하였겠습니까? 다만 저주(咀呪)의 옥사는 옛부터 밝히기가 어려웠으니, 전하께서는 마땅히 반드시 상세하게 심문하여 다시 후회가 없도록 하소서. 그러나 그러한 단서를 찾아내지 못한 채 서둘러 비망기를 내리시고, 곧 엄청난 처분을 내리셨으니, 실로 가볍고 갑작스런 처사입니다."
하고, 도승지 이돈(李墩)은 말하기를,
"전하께서 처분하신 것은 국가에서 일체(一切)로 다루는 법(法)이요, 대신이 차자로 진달한 것은 십분 선처(善處)하자는 뜻입니다. 세자를 위하여 생각한다면, 어머니가 비록 군부(君父)에 죄를 지었다고 하지만, 인자(人子)의 망극한 정리(情理)야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대신들이 증언(證言)하는 바가 비록 십분 꼭 들어맞거나 타당하지는 않더라도 그 말은 혈성(血誠)에서 나온 것이니, 마땅히 그 말에 따르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답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그 차자를 도로 올리게 하고, 드디어 비답(批答)을 내리기를,
"그대로 중지하고 시행하지 말라는 말이 대신에게서 나왔으니, 실로 미안(未安)한데 관계된다."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무녀(巫女) 【태자방(太子房)이다.】 의 아들 이수장(李壽長)을 잡아 와서 심문하니, 대답하기를,
"어미가 살아 있을 때인 을해년252) 에 장희재(張希載)의 첩 숙정(淑正)과 시상 무수리[市上水賜]라고 일컫는 자가 같이 와서, 면주(綿紬)와 쌀로 신당(神堂)에 기도하였습니다. 이 뒤로부터 해마다 절일(節日)에는 밥을 차리고 기도하였는데, 정축년253) 이후로는 매달 밥을 차렸습니다. 기묘년254) 정월에 어미가 죽자, 어떤 무녀(巫女) 하나가 성인방(聖人房)이라고 일컬으며 서강(西江)에서부터 우리 집에 와서 거처하였는데, 그 이름은 정말 알지 못하며, 그 아들의 이름은 순흥(順興)입니다. 희빈방(禧嬪房)에서 우리들 형제를 내쫓고 그 무녀가 신당을 두 곳에 설치하였는데, 하나는 스스로 주관하였고, 다른 하나는 희빈방에서 설치하였으며, 장희재의 첩과 그 무녀가 같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무녀 【태자방이다.】 의 딸 정(貞) 【외자 이름이다.】 에게 물으니, 대답한 내용이 대략 이수장과 같았다. 시영(時英)이 한 말을 가지고 일렬(一烈)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상탁(床卓) 등의 물건들을 제가 과연 무녀의 집에 가져갔었는데, 이는 희빈이 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제게 고질병(痼疾病)이 있었기 때문에 그 기도에 응감(應感)이 있기를 바랐을 뿐이고,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하였다. 그때 숙정은 이미 내사(內司)의 옥(獄)에 갇혀 있었는데, 이수장이 말한 것을 가지고 숙정을 잡아 와서 물으니, 대답하기를,
"설향(雪香)이 저더러 태자방에 내왕하기를 요구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른바 태자방은 희빈을 위하여 액(厄)을 물리칠 것을 빌었는데, 혹은 신사(神祀)를 설치하기도 하고 혹은 등(燈)을 밝히기도 하였으며, 축생(丑生)은 언제나 왔습니다. 무인년255) 가을에 성상의 환후가 미령(未寧)하자, 희빈이 명은(命銀) 【은(銀)을 가지고 목숨[命]을 빌기 때문에 ‘명은(命銀)’이라고 한다.】 으로 기도하였으며, 태자방이 죽자 전에 배설(排設)한 물건들을 많이 불태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만명 제석(萬命帝釋) 【만명 제석은 무녀들이 기축(祈祝)하던 신(神)의 호(號)이다.】 은 희빈의 본궁(本宮)에다 옮겼으며, 다른 무녀 【이른바 순흥(順興)의 어미이다.】 가 신사를 행하였는데, 희빈방에서 은(銀) 1백 냥을 태자방의 지아비 【이준일(李俊一).】 에게 주어 그 집을 팔게 하고 다른 무녀를 거처하게 하였으며, 빼앗아서 준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무녀 오례(五禮)를 잡아 와서 심문하라 명하였는데, 곧 이수장이 말한 순흥(順興)의 어미였다. 대답하기를,
"본래 서강(西江) 뱃사람의 아낙이었는데, 지아비가 죽자 의탁할 곳이 없어서 태자방에 가서 살았고, 지난해 6월에 한번 신사(神祀)를 행하였을 뿐입니다. 장희재의 첩이 비록 간혹 왕래하였으나 이미 그 얼굴도 알지 못했는데, 어찌 그와 서로 알고 지냈겠습니까? 기도한 한 가지 일도 또한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므로, 곧 오례를 숙정·이수장과 대변(對辨)시키라 명하니, 숙정·이수장이 모두 말하기를,
"오례가 실제로 기도하는 일을 주관하였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형신(刑訊)하니, 오례가 그제서야 말하기를,
"갑술년256) 부터 장희재의 첩이 큰 무수리[大水賜] 두백(頭白)한 자와 함께 신사(神祀)를 행하였고, 매 시절(時節)마다 또한 기도하였으나, 국가의 태평(太平)을 바라는 데에 지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들과 더불어 일을 함께 한 자는 현수(絃手) 【세속에서 무녀를 도와서 신사(神祀)를 하는 자를 현수라고 한다.】 자근녀(者斤女) 【한 사람의 이름이다.】 이며, 이른바 신선방(神仙房) 【무녀(巫女)의 호(號)이다.】 이란 자가 바야흐로 기도하는 일을 주관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장희재의 첩과 자근례(者斤禮)와 더불어 일찍이 장 대장(張大將)의 누이가 중전(中殿)이 되도록 축원(祝願)하였습니다."
하였다. 오례의 말을 가지고 이수장을 형신하였는데, 한 차례가 채 되기도 전에 이수장이 말하기를,
"지난해 7, 8월 사이에 순흥의 어미가 한 상궁(韓尙宮) 【한시영(韓時英)이다.】 과 차씨(車氏) 성의 궁인(宮人) 【차축생(車丑生)이다.】 과 함께 자주 신사를 설행하였는데, 매번 신사 때마다 순흥의 어미가 활과 화살을 차고 풍악을 울리며 ‘내가 장차 민 중전(閔中殿)을 잡아서 쇠 그물 속에 넣겠다.’라고 하고, 이어서 화살을 마구 쏘면서 벽력(霹靂) 같은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내가 민 중전(閔中殿)을 쏘아서 이미 우물 가운데 던져 넣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장 중전(張中殿)이 미구에 복위(復位)할 것이고 사도(使道)도 미구에 바다를 건너서 올 것이다.’ 하였는데, 이른바 사도란 곧 장희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 ‘이달 그믐 사이에 중전을 죽이지 못하면 다음달 그믐 사이에는 반드시 죽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장씨(張氏) 집 종 가운데 옥씨(玉氏) 성과 이씨(李氏) 성을 가진 자와 정월(正月) 【계집종의 이름이다.】 의 어미와 서귀산(徐龜山) 【사내종의 이름이다.】 의 누이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헌납(獻納) 어사휘(魚史徽)가 논하기를,
"영숙(英淑)의 정형(正刑)은 특교(特敎)에서 나왔는데, 다만 그 결단한 문안(文案)에서는 겨우 ‘조금도 징계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등의 몇 마디 말뿐이었으니, 옥사(獄事)의 체통에 있어서 지극히 소루(疏漏)한 것이었으나, 왕명(王命)을 출납(出納)하는 자리에 있는 자들이 이미 계품(啓稟)한 일도 없었고, 우사(有司)의 신하들도 또한 샅샅이 심문하여 실정(實情)을 캐내지도 못하였습니다. 다만 비망기의 문자만을 가지고 대충대충 취초(取招)하여, 중죄(重罪)를 결안(結案)하는 체모를 몹시 잃었으니, 청컨대, 해당 승지와 형조의 당상관(堂上官)을 모조리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40책 35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613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궁관(宮官) / 정론-정론(政論) /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역사-고사(故事)
- [註 247]반한(反汗) : 임금이 앞서 내린 명령을 취소하거나 고치는 것.
- [註 248]
양왕(梁王) : 양왕(梁王)은 경제(景帝)의 동모제(同母弟)인데, 양왕의 반역 음모가 발각되어 전숙(田叔)을 보내어 조사하였더니, 전숙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양왕의 일은 묻지 마소서. 바른 대로 말하면 처단하여야겠고, 처단하면 태후(太后)의 마음이 상할 것입니다." 하여, 양왕의 신하 몇 사람에게만 죄를 돌려 처단한 일이 있음.- [註 249]
사단(史斷) : 사론(史論).- [註 250]
대벽(大辟) : 사형(死刑).- [註 251]
주창(主鬯) : 울창주(鬱鬯酒)를 맡았다는 뜻으로, 울창주는 종묘(宗廟)에 제사지낼 때 태자(太子)가 올리게 되어 있음. 곧 태자를 의미하거나 임금의 후사(後嗣)를 이었음을 뜻함.- [註 252]
을해년 : 1695 숙종 21년.- [註 253]
정축년 : 1697 숙종 23년.- [註 254]
○領議政崔錫鼎, 稱病不赴鞫, 仍上箚曰:
國家不幸, 宮庭有變, 親臨訊鞫, 擧國奔遑。 再昨備忘之下, 滿廷臣僚, 惶駭錯愕, 罔知所處, 旋因喉司請對, 卽命反汗, 轉環之美, 孰不欽仰? 臣念獄事之妖惡, 驚痛切膚, 想春宮之情事, 衋傷崩心。 臣子之情, 尙且如此, 仰惟聖念, 當作何懷? 昔漢 景帝, 遣田叔按問梁事, 太后憂之不食, 日夜啼泣, 帝亦患之。 田叔盡燒梁獄辭, 空手來謁, 帝問之曰: "梁事有之乎?" 對曰: "死罪有之。" 帝曰: "其事安在?" 對曰: "上母以梁事爲問也。 今梁王不伏誅, 是漢法不行也, 伏誅而太后食不甘味, 寢不安席, 此憂在陛下也。" 帝大然之, 使叔謁太后曰: "梁王不知也, 爲之者, 幸臣羊勝、公孫詭之屬, 謹已伏誅, 梁王無恙。" 太后立起坐餐。 帝大喜, 相泣復如故。 朱子具書之綱目, 而先儒史斷, 亦美之曰: "太后至爲涕泣不食, 則帝誠有所不忍矣。 於是而天理之心油然, 固不得以失刑病之也。" 噫! 君臣、父子, 竝列倫常, 恩義經權, 互爲輕重。 太后與世子, 雖有親屬、尊卑之殊, 人君慈孝之道, 臣子服事之義, 固無異致, 而宗社大計之所關係, 又如何重也? 況今春宮情境, 其可比倫於涕泣不食而已乎? 夫梁王, 一藩臣也, 明有死罪, 而特因太后愛少之情, 撓法曲貰, 先儒猶且許之。 今禧嬪設有難赦之罪, 念春宮誕育之恩, 爲春宮憂傷之慮, 少賜寬貸, 不至於窮竟暴揚, 而左右不逞之徒, 則依律致辟, 以伸王法, 如羊勝等之事, 以安春宮, 恐不悖於今日處變之道。 惟我殿下, 得我春宮, 托以主鬯之重。 惟我春宮, 美質天成, 名號早定, 年方齠齔, 坤聖取而子之, 深慈篤孝, 有踰己出。 令聞日播, 四方聳聽, 此乃宗廟神靈之擁佑, 而寔殿下如天之洪福也。 乃於倉卒意慮之外, 遽遭人倫罔極之變, 以稚弱之年, 又有不安之節, 震驚崩迫, 當復如何? 若使之摧剝隕穫, 有不得自全其情性, 則非但重傷殿下止慈之恩, 其於宗社何? 臣願隨事方便, 着意調護, 勉盡鎭定保安之道。 此老臣區區之至懇也。 今日大臣、六卿, 有詢問之命, 而病未登筵, 成命已收, 不須詢問。 伏乞仍寢勿行, 以體群下之情。
上御仁政門, 將親鞫諸囚, 出示錫鼎箚, 顧問大臣曰: "此箚末端措語何如?" 判府事徐文重曰: "此事聖上豈不深思耶? 是前史所無, 而關係甚重, 臣子驚痛當如何? 唯在自上處分允當, 非可以詢問臣僚者。 領相之意, 蓋出於爲世子深慮也。" 左議政李世白曰: "此事外臣所不知, 而以前後備忘、昨日下敎觀之, 事關大行王妃, 自下何敢容喙, 而第所憂者, 世子驚慟傷損, 勢所必至, 唯望自上參量而處之。 何必詢問乎?" 右議政申琓, 亦如世白言。 判義禁李畬曰: "今日所遭, 實是罔極之變。 臣則主獄之官, 當觀獄事顚末, 而日昨處分, 實爲急遽。 此宜徐觀前頭, 十分參量, 決不可徑先爲之。" 知義禁金昌集曰: "獄事究竟之後, 參酌處分可也。" 畬曰: "春宮沖年, 驚隕痛迫, 大加傷損, 則終有乖於聖慈。 唯望參量處之。" 上曰: "兩司亦陳之", 仍以箚子, 示兩司。 掌令尹弘离曰: "鞫獄究竟後, 宜從容處之, 而此前古所無之變, 臣意二品以上, 盡爲詢問可也。" 獻納魚史徽曰: "大臣之箚, 實以保護春宮爲言, 宜待獄事究竟, 從容詢問。" 畬曰: "文案中神堂事爲重, 而罪人抵賴不肯服。 須待取服, 可以決處, 而昨承下敎, 臣民之心, 當復如何? 第咀呪之獄, 自古難明, 殿下必當詳審, 俾無復悔, 而不見其端緖, 徑下備忘, 乃有莫大之處分, 實爲輕遽耳。" 都承旨李墪曰: "殿下處分, 國家一切之法也, 大臣箚陳, 十分善處之意也。 爲世子而思之, 則母雖得罪於君父, 人子情理之罔極, 當如何也? 大臣所證, 雖不十分襯當, 其言出於血誠, 宜從之。" 上竝不答。 以其箚還上, 遂賜批曰: "仍寢勿行之說, 出於大臣, 實涉未安。" 上命拿巫女 【太子房。】 子壽長以至問之, 對以: "母生時, 乙亥年張希載妾淑正及稱以市上水賜者同來, 以綿紬及米, 禱于神堂。 是後每歲節日, 以飯祈之, 丁丑以後, 每月設飯。 己卯正月母死, 有一巫, 稱以聖人房, 自西江來處俺家, 其名固不知, 其子名順興也。 自禧嬪房驅逐俺等兄弟, 而厥巫設神堂兩處, 一則所自主, 一則禧嬪房所設, 而希載妾與厥巫同在焉。" 問巫女 【太子房。】 之女貞, 【一字名。】 所對略與壽長同。 以時英言, 問一烈, 對曰: "床卓等物, 俺果持往于巫女所。 此禧嬪所使, 而只以俺有沈痼之疾, 故冀其祈禱有應, 非有他意也。" 時淑正已囚于內司獄, 以壽長所言者, 拿而問之, 對曰: "雪香要使俺往來太子房, 故從之。 所謂太子房, 爲禧嬪禳厄, 或設神祀, 或燃燈, 丑生嘗至焉。 戊寅秋, 上候未寧, 禧嬪以命銀 【以銀祈禱命故曰命銀。】 禱之, 及太子房死, 前所排設之物, 多火之。 所謂萬命帝釋, 【萬命帝釋, 巫女所祝神號。】 移于禧嬪本宮, 而他巫 【所謂順興之母。】 行神祀, 禧嬪房以銀百兩, 與太子房之夫, 而賣其家處他巫, 非奪而與之也。" 命拿巫女五禮以問之, 卽壽長所謂順興之母也。 對曰: "本以西江船人之妻, 夫死無所依, 往接太子房, 前年六月, 一行神祀而已。 希載妾, 雖或往來, 旣不熟其面, 寧與之相知, 而祈禱一事, 亦所不知也。" 乃命五禮與淑正、壽長對辨, 淑正、壽長皆曰: "五禮實主祈禱。" 遂刑訊, 五禮乃曰: "自甲戌, 希載妾與大水賜頭白者, 同行神祀, 每時節亦禱之, 不過冀國家太平。 所與共事者, 絃手 【俗以助巫女爲神祀者爲絃手。】 者斤女, 【一人名。】 所謂神仙房 【巫女之號。】 者, 方主祈禱。 此人與希載妾及者斤禮, 嘗祝張大將妹爲中殿矣。" 以五禮言, 刑訊壽長, 未準一次, 壽長曰: "上年七八月間, 順興之母, 與韓尙宮 【時英。】 車姓宮人, 【丑生。】 設新祀甚頻, 每祀, 順興之母, 爲佩弓矢, 作樂而言曰: ‘吾將持閔中殿, 入于鐵網中。’ 仍以矢亂射, 大呼如霹靂曰: ‘吾射閔中殿, 已投井中。’ 仍言: ‘張中殿, 不久復位, 使道匪久越海而來。’ 所謂使道, 卽指希載也。 又曰: ‘今月晦間, 不殺中殿, 來月晦間, 必殺之。’ 張家奴玉姓、李姓者及正月 【婢名。】 之母龜山 【奴名。】 之妹, 皆知之。" 獻納魚史徽論曰: "英淑正刑, 出於特敎, 而第其斷案, 只是不少懲畏等數句語而已, 其在獄體, 極爲疎漏, 居出納之地者, 旣無啓稟之擧, 有司之臣, 亦不鉤問得情。 只以備忘文字, 草草取招, 殊失重辟結案之體, 請當該承旨及刑曹堂上, 竝從重推考。" 從之。
- 【태백산사고본】 40책 35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613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궁관(宮官) / 정론-정론(政論) /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역사-고사(故事)
- [註 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