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초 남구만이 조정에 나갈 때 경계한 좌부승지 김창협의 상소
좌부승지 김창협(金昌協)이 상소하기를,
"신이 듣건대, ‘군자는 조정에 나간다면 반드시 뜻을 실행해야 하고 충신은 임금을 섬길 적에 마땅히 생명을 바쳐야 하는 법이니, 혹시라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벼슬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다. 만일 쳐다보고 내려다보며 이리저리 둘러대고 돌아 빠지면서 단지 구차하게 녹만 먹고 몸만 편하려고 한다면, 현명한 임금에게 버림받고 좋은 세상의 수치거리 되는 것이 이보다 심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신은 한 가지 의리에 있어 그윽이 전해 받은 바가 있습니다. 증조(曾祖) 신(臣) 김상헌(金尙憲)은 음양(陰陽)과 숙특(淑慝)455) 의 구분에 있어 가장 엄격하여, 선을 드러내고 악을 징계하는 논의를 시종 변함없이 극력 주장하다가 거의 죽을 뻔했는데 다행히 면하게 되었고, 선신(先臣) 김수항(金壽恒)은 경신년456) 의 개기(改紀) 때에 홀로 범순인(范純仁)457) 이 속으로 자신만 온전할 생각을 한 것을 경계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에 몸을 바치되 조금도 변함이 없다가 마침내 한없는 화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신(臣)은 항시 신하된 사람이 조정에 나가 임금을 섬길 적에는 오직 이러한 도리가 있어야 하고 이해와 화복은 돌아볼 것이 아니라고 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으기 조정의 의논과 사대부(士大夫)의 추향(趨向)을 보건대 이와는 크게 다른 듯합니다. 신이 이에 있어 가정에서 배운 것을 그 속에서 실행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장차 맞지 않고 모순(矛盾)되어 서로 합치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신이 전후로 진정(陳情)한 것이 상세했을 뿐만이 아닙니다. 필부(匹夫)의 뜻은 빼앗을 수 없는 것이니, 오직 전하께서 가엾이 여겨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즉각 체직하게 했다. 당초에 남구만(南九萬)이 조정에 나가게 될 적에 김창협이 글을 띄워 경계하기를,
"저으기 생각하건대 지금의 계책은 마땅히 사생(死生)과 화복은 한편에 치워 놓고, 안중(眼中)에 오직 하나의 도리(道理)만 보아 직절(直截)하고 분명하게 생명을 내놓고 해 나가되, 조금도 이리저리 돌아보며 이해와 화복을 따지는 사정이 그 사이에 끼이지 않게 한 다음에야 나라일을 해나갈 수 있고 사람들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소위 한 떼의 사류(士類)라는 사람들이 대저 모두가 잦은 풍상(風霜)과 벽력(霹靂)의 나머지에서 나와 기개가 좌절되고 의지가 소침(消沈)되어 넋이 나가고 마음이 죽어 버렸으므로, 다시는 정직하고 강예(剛銳)한 기운이 없는데다가, 또한 뒷날 다시 번복될까 하는 염려가 겹쳐 있기 때문에, 일을 의논하는 참에는 오로지 머뭇거리는 데만 힘써 간흉(奸兇)들의 보호를 능사(能事)로 삼고, 제 몸 제 집 아끼기를 장책(長策)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각(臺閣)에는 구차한 짓을 하는 풍조가 더욱 심하여, 무릇 토죄(討罪)하고 악을 징계하는 것에 관한 일을 모두 군상(君上)에게만 맡겨버리고 자신은 담당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내버려 두고 다스리지 않는 방법으로 다스려 장차 그들의 마음을 부끄럽게 만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공론에 몰려서 한두 사람이라도 내쫓으려고 논계(論啓)한다면, 또한 반드시 굽혀서 비호(庇護)하느라 구차하고 지리멸렬한 소리를 하여 거의 언의(言議)도 되지 않고 죄명(罪名)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수원(讎怨)이 자기에게 돌아올까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감히 공공연하게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나와 친한 사람인데 찬축(竄逐)한다면 애석하다.’라고 하고, 또한 ‘이 일을 나는 하고 싶지 않다. 동료들의 의논이 강요한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흉도(兇徒)들에게 아첨해 앞날의 화를 면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내려다보다 쳐다보다 나섰다 물러났다 하여, 두려워서 겁내고 움츠리며 겸연쩍어하는 작태(作態)는 사람들을 낯이 뜨거워지게 만들고, 사람들을 분개하여 답답해지게 만들며, 또한 사람들을 애통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아, 사람들이 마음이 올바르지 못하고 사기(士氣)가 굳세지 못함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으니, 혹시 국가에 불행하게도 변고가 있게 된다면, 능히 몸을 내던져 국가에 바치며 절조(節操)를 지키고 의리를 위해 죽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는 우려가 토죄(討罪)를 엄중하게 하지 못한 데 있을 뿐만이 아닙니다. 또 토죄하는 의리로 말하더라도 저 군흉(群兇)들이 저들 스스로가 화를 만들었음이 진실로 이미 분명하게 온 세상 사람들의 이목에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더러 한두 사람이 형적을 감추고 흔적을 숨기며 수세(手勢)458) 에 걸리지 않도록 몰래 제 속셈을 부렸으나, 정상(情狀)이 드러나 저절로 엄폐할 수 없게 된 것을 항간(巷間)이나 먼 외방(外方)의 사람들까지 비록 부녀자나 주졸(走卒)이라 하더라도 팔을 휘두르며 서로 지탄(指彈)하고 마구 분개하고 욕하며 ‘기필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의 심정에 다 같이 분개하는 일은 곧 천토(天討)가 반드시 가해지는 법입니다. 《서경(書經)》에 ‘죄 있는 사람을 천토(天討)하게 되거든 오형(五刑)을 다섯 가지로 쓰라.’고 했습니다. 옛 성인들이 어찌 호생(好生)의 인(仁)과 불살(不殺)의 무(武)459) 가 부족해서이겠습니까? 오직 천토가 반드시 가해질 바에 있어서는 그대로 받들어 거행해야 하고, 감히 자신의 생각으로 낮추었다 높였다 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의리에 밝지 못하여, 죄악이 그득하고 저지른 죄가 지극히 무거운 사람에 있어서도 한결같이 관대하게 용서하고 포용하여 비호하며 되도록 가벼운 법으로만 하되, 겉으로는 스스로 ‘죄없는 죄를 죽일진대 차라리 법도를 잃어 실패한다.’는 의리를 핑계하여 속으로는 후환(後患)을 염려하는 사심을 쓰고 있습니다. 이는 옛적의 성인들이 천토(天討)를 받들어 거행하던 뜻과는 한결같이 어찌 이다지도 배반되는 것인지요? 이렇기 때문에 항간(巷間)이나 초야(草野) 사이의 인심이 분개하여 답답해 하고 공론이 들끓게 됨을 막을 수가 없고, 간흉한 무리들은 바야흐로 또한 손뼉을 쳐 축하하면서 속으로 기세를 키우고 있고,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마음이 없으니, 앞날의 환란이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
합하(閤下)께서 그 자리에 있지 않으신다면 말할 것이 없겠습니다만, 이미 나아와 묘당(廟堂)에 있으시기에, 중외(中外)와 사방 사람의 책망이 모두 합하께 돌아가고 있습니다. 합하께서 급급하게 바로잡을 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합하께서 전일한 마음과 정직한 도리로 의연(毅然)하게 주재(主宰)하시되, 오직 사마광(司馬光)이 말한 ‘하늘이 만일 송(宋)나라를 돕는다면 반드시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고 한 것을 마음에 두고, 주 부자(朱夫子)가 기롱한 ‘범충선(范忠宣)이 속으로 뒷날 자신만 온전할 계획을 했다.’고 한 것으로 경계를 삼는다면, 반드시 사대부(士大夫)들의 기개를 진작(振作)시켜 한결같이 빠져 들어갈 더러움을 씻고, 천토(天討)를 뜻대로 거행하여 간흉들이 모두 자신의 죄에 굴복하게 될 것이니, 세상의 도의와 국가의 사세가 거의 힘 입는 데가 있을 것입니다. 대저 합하의 굳세고 바른 천품과 곧고 굳은 지조로는 이런 책임을 맡아 이런 일을 해 가기에 마땅히 어려울 것이 없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제가 일찍이 하집사(下執事)의 분부를 받들어 본 지도 오래이기에, 그윽이 생각해 보건대 사려(思慮)는 정상(精詳)과 신밀(愼密)이 지나치고 담론(談論)은 위곡(委曲)과 평장(平章)460) 을 주력하시기에, 오늘날에도 이대로 해 간다면 혹은 소침(消沈)된 사대부(士大夫)들의 기개를 크게 진작(振作)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그와 합류(合流)해 버리며, 뭇 소인들의 간흉(奸兇)한 죄를 징계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들의 기세만 돋구어 주게 될까 두렵습니다. 이는 창협이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바이기 때문에 그만 감히 외람된 것도 잊고 말을 다한 것입니다. 그러나 창협이 저들에게 지극한 원한과 깊은 원수가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 이렇게 되었고 보면, 비록 총명하신 집사(執事)지만 또한 혹은 한 개인의 사정(私情)에 나온 말이라고 여겨 꼼꼼히 살펴 주시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의 쌓인 죄악과 오랜 흉칙함이 만일 온 나라의 공론에 죄를 얻은 것도 아니고 삼척(三尺)의 국법을 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라면, 창협이 비록 자신의 사정을 가지고 보복(報復)하려고 한들 공론이 허락하지 않고 국법을 굽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하여 감히 구변(口辯)과 글발을 가지고 집사를 종용(慫慂)하며 다행히 심정을 풀 것을 바라겠습니까? 비록 그러하나 제 선인(先人)의 화(禍) 또한 어찌 홀로 한 가정의 일이겠습니까? 옛적부터 간흉들은 충신(忠臣)과 현자(賢者)를 해치고 국가의 명맥(命脈)을 손상시켰습니다. 기묘 사화(己卯士禍)의 남곤(南袞)·심정(沈貞)과 을사 사화(乙巳士禍)의 이기(李芑)·허자(許磁)·임백령(林百齡)의 무리에 있어서는 비록 천백 년 뒤라도 사람들이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마음 아파하여 그들의 가죽을 깔고 눕고 그들의 살을 씹으려고 하며 그 당시에 제대로 형벌하지 못한 것을 통탄하고 있으니, 이는 진실로 천하 만세의 공론이고 한 가정의 사사로운 원한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선인(先人)의 화를 논하는 사람들이 기묘 사화·을사 사화와 비교해서 어떠하다고 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만일 차이가 있어 똑같이 볼 수 없다고 한다면 진실로 말할 것이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오늘날의 흉도(兇徒)들이 어찌 옛적의 남곤·심정·이기·허자·임백령의 무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지난 시대의 것을 제대로 형벌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오늘날의 것을 감히 다스리지 않으려고 한다면, 이것이 과연 호오(好惡)가 올바르게 되고 천하 만세의 공론에 맞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명공(明公)께서 만일 우리 선인의 화는 스스로 취한 것이어서 기묘 사화나 을사 사화와 같이 볼 수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창협은 마땅히 물러가 궁벽한 산속에 살며 입을 꽉 다물고 은인(隱忍)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이 몸을 마쳐 버리고 다시 이 세상에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남곤·심정·허자·이기·임백령과 같은 죄를 다스릴 것인지 다스리지 않을 것인지는 곧 조정이 해야 할 일이자 명공(明公)의 책임입니다."
하였으나, 남구만이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무릇 토죄(討罪)와 정법(正法)에 관한 논의가 한결같이 김창협이 한 말과 상반되므로, 조신(朝臣) 중에 남구만을 보고 거취(去就)를 하는 사람들이 확 따랐다. 이에 앞서 경신년461) 의 경화(更化)뒤에 젊은 무리들이 화복(禍福)에 흔들리어, 처음에는 이미 오시수(吳始壽)에게 기치(旗幟)를 내세웠다가, 중간에는 또한 민암(閔黯)·유명견(柳命堅)을 위해 원수를 보복(報復)하면서 이정(李楨)을 신구(伸救)하자는 말이 그 당(黨) 입에서 나오게 되었고, 끝에는 또한 속으로 이항(李杭)과 표리(表裏)가 되어 곤극(坤極)462) 이 무너지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흉당(凶黨)들이 뜻을 얻게 된 뒤에는 폐후(廢后)의 번역(飜逆)은 마치 건령(建瓴)463) 하기와 같았던 것이니, 처음에 시작이 이미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에 뒷날 손 대기가 쉬웠던 것이다. 박세채(朴世采)는 처음에 젊은 사람들을 청론(淸論)으로 여겨 허여했다가 나중의 귀취(歸趣)가 매우 선명(鮮明)하지 못한 것을 보고서는 자못 의심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송시열(宋時烈)이 화를 입었을 적에는 너무나 슬퍼하여 그를 위해 가마(加麻)464) 했는데, 윤증(尹拯)이 듣고서 글을 띄워 욕을 하고 책망하므로 이로 인해 두 문호(門戶)가 서로 불편하게 되었다. 이에 이르러 남구만이 당국(當國)하여 오로지 장씨(張氏)를 붙잡아 돕는 것만을 일삼고, 윤증이 또한 의견이 어긋나고 잘못되어 옛적의 좌우황후(左右皇后)의 예를 인용하여 둘 다 높이고 똑같이 부르므로 듣는 사람들이 해괴하게 여겼다. 남구만이 ‘복위(復位)는 기쁘지만 강위(降位)는 슬프다.’고 한 말은 또한 그가 곤성(坤聖)에게 두 가지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이에 박세채가 문객(門客) 중에서 조금이라도 공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비로소 크게 등지고 나서 사류(士類)들과 합쳐 하나가 되어, 남구만·윤증의 당과 대립하게 되었는데, 남구만이 이미 장희재(張希載)를 이모저모로 비호(庇護)했고 또한 범죄가 현저한 뭇 간흉(奸兇)들에 있어서도 대개 모두 용납하여 덮어주고 징계와 토죄(討罪)하기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창협의 말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대개 남구만과 한 떼가 된 사람들이 간흉들을 보호하여 키워주며 추궁하여 핵실(覈實)하지 않으려고 한 것은, 단지 남인(南人)들에게 아첨하려고 한 것만이 아니라, 또한 깊은 뜻을 둔 데가 있었던 것이다.
인조(仁祖) 말년에 역신(逆臣) 김자점(金自點)이 조적(趙賊)에 의지하여 죄악을 저지를 적에 효종(孝宗)이 저위(儲位)465) 에 있는데도 온갖 계책을 써서 요동시켜 조 귀인(趙貴人)이 낳은 왕자(王子)를 세우려고 도모하므로, 내외(內外)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권세를 떨쳤고, 일종(一種)의 이득만 즐기는 염치없는 무리들이 모두 따라 붙었으니, 곧 소위 낙당(洛黨)인 것이다. 효종(孝宗)이 즉위할 때에 김상헌(金尙憲)·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 제현(諸賢)이 조정에 있어서 함께 청의(淸議)를 주장하여 김자점을 배척하여 물리치고, 그 당여(黨與)들을 차등이 있게 탄핵하여 다스리므로, 그 당들이 원망을 품고서 김상헌 등을 오랑캐에게 고소(告訴)하여 드디어 여덟 칙사가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466) 얼마 안되어 김자점과 조적(趙賊)이 반역을 모의하다가 복주(伏誅)되고, 당(黨)의 괴수 신면(申冕)이 또한 형장(刑杖)에 죽으매, 여당(餘黨)들이 모두 몰락하여 흩어져 개두 환면(改頭換面)467) 하고 사류(士類)들에게 아첨했는데, 사류들이 대우하는 것이 차이가 없지 않았으므로 마음속으로 자못 달갑지 않게 여겼다. 그러다가 이윤(尼尹)468) 이 틈이 생기게 된 때를 맞이하여 의지할 수 있는 연수(淵藪)로 생각하고는 드디어 이에 투입(投入)하여 한편의 당파가 이루어졌다. 지금의 소위 소론(少論)이 이것인데, 대저 낙당(洛黨)의 혼이 되살아난 것이다. 또 이항(李杭)은 곧 위에 말한 세우려고 도모했던 왕자(王子)의 아들인데 평소에 바라서는 안될 소망을 가졌고, 소론이 이미 그의 원조로 진출(進出)하게 되었으며, 중궁(中宮)이 물러나게 되었던 것도 또한 그의 농간 때문이었다. 복위(復位)한 다음에 끝까지 다스린다면, 이항이 반역한 상황과 그 무리들이 속으로 결탁한 사실이 장차 모두 남김없이 드러나게 될 것이니, 소론들이 어찌 법대로 다하려 하겠는가? 이는 사리로나 사세로나 필연(必然)의 일이다. 하물며 김창협은 곧 김상헌의 증손이고, 그의 아버지 김수항(金壽恒)이 젊은 무리들에게 미움을 받게 된데다가, 겸하여 또한 김상헌에게 원한을 품었기 때문이고 보면, 김창협의 말이 더욱 어떻게 그들의 터럭 하나라도 움직일 수 있었겠는가? 그 원류(源流)의 내력이 본시 은휘(隱諱)할 수 없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29책 27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351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역사-전사(前史)
- [註 455]숙특(淑慝) : 선악.
- [註 456]
경신년 : 1680 숙종 6년.- [註 457]
범순인(范純仁) : 송 철종(宋哲宗) 무렵의 명신.- [註 458]
수세(手勢) : 손놀림.- [註 459]
호생(好生)의 인(仁)과 불살(不殺)의 무(武) : 호생(好生)의 인(仁)은 측은한 마음이 많아 살생(殺生)하기를 꺼리는 덕. 불살(不殺)의 무(武)는 신명(神明)과 같은 무덕(武德)이 있어 죽이지 않고도 다스려 가는 것.- [註 460]
평장(平章) : 공평.- [註 461]
경신년 : 1680 숙종 6년.- [註 462]
곤극(坤極) : 왕후.- [註 463]
건령(建瓴) : 옥상에서 물동이의 물을 쏟는 것처럼 아주 쉬움.- [註 464]
가마(加麻) : 소렴(小斂) 때 상제가 수질(首絰)을 쓰는 일.- [註 465]
저위(儲位) : 세자의 자리.- [註 466]
여덟 칙사가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 효종(孝宗) 초년에 김자점(金自點)이 역관(譯官) 이형장(李馨長)을 사주하여 청나라에 ‘새 임금이 즉위한 뒤 옛 신하를 내쫓고 산림(山林)을 등용하여 청나라에 복수하려 한다.’고 참언(讒言)하게 하였는데, 이로 인해 청나라에서 계속해서 칙사(勅使)를 보내 사실 여부를 조사한 사건을 말함.- [註 467]
개두 환면(改頭換面) : 마음은 고치지 않고 겉만 달라진 것.- [註 468]
이윤(尼尹) : 윤증(尹拯).○左副承旨金昌協上疏曰:
臣聞君子立朝, 必行其志, 忠臣事君, 當致其命, 如其未也, 則如勿仕, 若乃俯仰瞻顧, 屈曲趨避, 只爲苟祿而便身, 則其爲明主之棄而治世之羞也, 無甚焉矣。 臣於此一義, 竊有所受, 曾祖臣尙憲, 最嚴陰陽淑慝之辨, 力主彰善癉惡之論, 終始不變, 幾死幸免。 先臣壽恒, 當庚申改紀, 獨以范純仁陰爲自全之計者爲戒, 一心循國, 無少回撓, 卒陷於極禍, 故臣常謂人臣立朝事君, 惟有此道理, 利害禍福非所顧問矣。 乃今竊觀於朝廷論議士夫趨向, 則似與大異, 臣於是時, 欲以家庭所學, 行於其間, 則必將枘鑿矛盾而不相合矣。 況臣前後陳情, 不啻詳悉? 匹夫之志, 有不可奪, 惟冀殿下哀矜。" 上卽遞之。 初南九萬之赴朝也, 昌協移書戒之曰: "竊謂爲今之計者, 當以死生禍福, 倚閣一邊, 目中惟見得一箇道理, 直截分明, 捨命做去, 無毫髮顧瞻計較之私, 參錯於其間然後, 國事可做, 人心可服矣。 今則不然, 所謂一隊士類者, 大抵皆出於風霜霆霹之餘, 摧剝銷鑠, 魄奪心死, 無復有正直剛銳之氣, 而又重以日後反復之慮, 故論議之間, 專務媕婀, 以保養奸凶, 爲能事, 以愛惜身家, 爲長策, 而臺閣之上, 媮靡尤甚,凡係討罪懲惡之擧, 皆欲委之於君上, 而不肯以身擔當而爲之說曰: ‘治之以不治, 將以愧其心也。’ 其或迫於公議而論逐一二人, 則亦必委曲回互, 苟且滅裂, 殆不成言議, 殆不成罪名, 而猶懼讎怨之歸已也, 則輒敢公誦於人曰: ‘此人, 吾所親也, 竄逐可惜。’ 又曰: ‘此事吾不欲, 而僚議强之也。’ 欲以是自媚於凶徒, 而覬免於異日之禍, 其俯仰前却, 畏怯縮恧之態, 令人羞愧, 令人憤懣, 亦令人哀痛, 嗚呼! 人心之不正, 士氣之不競, 至於此極, 脫國家不幸有變故, 則其有能捐軀循國, 伏節而死義者乎? 此其憂, 不但在於討罪之不嚴而已。 且以討罪之義言之, 彼群凶輩, 自作之孽, 固已昭布於一世人之耳目, 而其間或有一二藏形匿影, 不犯手勢, 陰逞其胸臆, 而情狀透露, 自不可掩者。 閭巷遠方之人, 雖婦孺走卒, 莫不戟手相指, 肆口憤罵, 以爲必不可赦。 蓋人情之所同憤, 卽天討之所必加也。 書曰: ‘天討有罪, 五刑五用哉。’ 古之聖人, 豈其不足於好生之仁, 不殺之武哉? 惟天討之所必加, 奉而行之, 不敢以已意, 有所輕重焉耳。 今也不明此義, 而於其罪惡之貫盈, 負犯之至重者, 一切寬恕容護, 務從輕典, 外自託於失不經之義, 而陰以濟其慮後患之私, 此與古聖人奉行天討之意, 一何背盭之甚哉? 以此街巷草野之間, 人心憤鬱, 公議沸騰, 不可沮遏。 而奸凶之徒, 方且拊手稱慶, 陰長其氣勢而無復有畏憚之心, 他日之患, 庸有極哉? 閤下不在其位則已, 旣已進而立乎廟堂之上, 則中外四方之責, 皆歸於閤下, 閤下其可不汲汲焉思所以救之乎? 愚願閤下, 一心直道, 毅然主持, 惟以司馬公所謂: ‘天若祚宋, 必無是事者爲心。’ 而朱夫子所譏范忠宣陰爲後日自全之計者, 爲至戒, 則必能有以振起士大夫之氣, 一洗其陷溺之汚, 而天討得以肆行, 奸凶咸伏其辜, 而世道國事, 庶乎其有賴矣。 夫以閤下剛方之資, 貞固之操, 其於任此責辦此事, 宜無難者, 而抑愚嘗得奉敎於下執事久矣。 竊恐思慮過於精詳愼密, 論議主於委曲平章, 以此而施之今日, 或者未有以大振士大夫消沮之氣, 而反與之同流, 未有以痛懲群小人奸凶之罪, 而反有以增其氣, 此昌協之所不能無慮者, 故輒敢忘其潛越而畢其說焉。 然以昌協之有至怨深讎於彼, 而其說如此, 則雖以執事之明, 亦或意其出於一己之私而未甚見察也。 然彼輩之積惡稔凶, 如非得罪於一國之公議而莫逃於三尺之王法, 則昌協雖欲以己之私, 逞其報復, 其如公議之不允, 王法之難骫, 何哉? 而乃敢以頰舌文字, 慫慂執事, 而冀幸其得售乎? 雖然先人之禍, 亦豈獨一家之事哉? 自古奸凶之戕害忠賢, 椓傷國脈, 如己卯之袞ㆍ貞, 乙巳之芑 磁 百齡輩, 雖千百載之下, 人皆扼腕痛心, 思欲寢皮而食肉, 痛恨於當時之失刑, 此實天下萬世之公議, 而非止一家之私怨也。 今此先人之禍, 不識論者, 以爲與己卯。 乙巳何如? 而若以爲有所差殊, 不可比同, 則固無可言者。 不然, 則今日凶徒, 豈非昔日之袞ㆍ貞ㆍ芑ㆍ磁ㆍ百齡輩? 而在前代則恨其失刑, 在今日則不欲深治, 此果可謂得夫好惡之正而合於天下萬世之公議乎? 明公若以先人之禍, 爲有以自取而不可與己卯。 乙巳比, 則昌協當屛伏窮山, 緘口結舌, 隱忍泯默, 以沒其身, 而不復有望於當世矣。 不然, 則袞ㆍ貞ㆍ芑ㆍ磁ㆍ百齡之罪, 其治與不治, 此朝廷之事, 明公之責也。" 九萬不肯聽。 凡於討罪正法之論, 一與昌協之言相反。 朝臣之視九萬爲去就者, 靡然從之。 先是, 庚申更化之後, 年少之輩, 爲禍福所撓奪, 始旣立幟於始壽, 中又爲黯命堅報仇, 至於伸楨之言, 發於其黨之口, 其終也, 又陰與杭表裏, 以致坤極之傾圮, 是以, 凶黨得志之後, 廢后翻逆, 如建瓴然, 由其造始已郞當, 故後之犯手爲易也。 朴世采初以少輩爲淸論而許之, 及見其末後歸趣, 甚不光鮮, 頗懷持貳之意。 宋時烈之被禍也, 哀傷甚至, 爲之加麻。 尹拯聞之, 以書詬責, 因此兩門, 相與不平。 至是, 九萬當國, 專事扶翼張氏。 拯又意見乖謬, 引古左右皇后例, 兩尊而竝稱之, 聞者駭之。 九萬之復位爲欣, 降位爲戚之言, 亦可見其懷二心於坤聖也。 於是, 世采門客之稍有公心者, 始大背貳, 合士類爲一, 而與九萬ㆍ拯黨角立, 九萬旣曲護希載, 而又於群凶之罪犯彰著者, 率皆容覆, 不思所以懲討, 故昌協之言如此。 蓋九萬一隊人之保養凶醜, 不欲窮覈者, 非特媚悅南人, 亦有深意在焉。 當仁祖末年, 逆臣自點, 倚趙賊爲惡, 孝廟雖在儲位, 百計搖撼, 謀欲立趙出王子, 內外翕赩, 權勢鴟張, 一種嗜利無恥之徒, 皆附之, 卽所謂洛黨也。 及孝廟嗣服, 金尙憲、金集、宋時烈、宋浚吉諸賢當朝, 共張淸議, 斥退自點, 彈治其黨與有差, 其黨怨之訴尙憲等于虜, 遂有八勑之來, 未幾, 自點與趙賊, 謀逆伏法。 黨魁申冕, 亦杖死。 餘黨皆散落, 改換頭面, 以媚於士類。 士類待之, 不能無間, 頗內不自得, 及有尼尹之隙, 以爲淵藪可依, 遂投入於此, 打成一片, 今之所謂少論, 大抵洛黨還魂也。 且杭卽上所云謀欲立者之子, 素懷非望, 而少論旣爲其援, 進中闈之遜, 又由其作弄復位之後, 若窮極治之, 則杭之逆狀, 與渠輩陰結之事, 將畢露無餘, 少論安得以盡其法乎? 此其理勢之所必然也。 況昌協, 卽尙憲之曾孫也? 其父壽恒之見嫉少輩, 兼亦以嗛尙憲之故, 則昌協之言, 尤何以動其一毛乎? 其源流來歷, 自有不可諱者矣。
- 【태백산사고본】 29책 27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351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역사-전사(前史)
- [註 4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