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실록25권, 숙종 19년 2월 4일 무인 2/2 기사 / 1693년 청 강희(康熙) 32년
정사를 다스리는 덕목에 대해 장령 최항제가 상소하다
국역
장령(掌令) 최항제(崔恒齊)가 상소(上疏)하여 일을 논하였는데, 첫째는 ‘충성스럽고 정직한 사람을 선발하여 동궁(東宮)을 보필하도록 하자’는 것이며, 둘째는 ‘언로(言路)를 열어서 충성스럽게 간(諫)하는 사람을 오도록 하자’는 것이며, 셋째는 ‘공도(公道)를 넓혀서 인심(人心)을 얻자’는 것이며, 넷째는 ‘사전(祀典)021) 을 바로잡아 사문(斯文)022) 을 중하게 여기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 ‘언로(言路)를 열자’는 조목에 이르기를,
"목릉(穆陵)023) 의 능행(陵行)을 이달 20일로 정하였는데, 농사가 크게 흉년이 든 것은 팔도가 마찬가지지만 기내(畿內)가 더욱 심합니다. 이러한 즈음에 능행을 거행하게 되면, 폐해를 끼치는 것이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원컨대 내리신 명령을 정지시켜 오는 가을로 미루도록 하소서. 지난해 봄에 이현일(李玄逸)이 능행을 정지하자는 뜻을 진달(陳達)하였으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미편한 전교(傳敎)를 내리셨으며, 가을에 권중경(權重經)이 간략하게 몇마디 말로서 주상의 고문(顧問)하시는 데에 우러러 대답하자, 싫어하고 냉대하는 뜻을 드러나게 보이셨습니다. 이 뒤로부터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것을 경계로 삼아 입을 다물고 물러나 움추리고서, 감히 할 말을 다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신은 아마도 전하께서 이렇게 계도(啓導)하셨다고 여깁니다."
하고, 그 ‘공도(公道)를 넓히자’는 조목에서는 맨 먼저 경신년의 화(禍)024) 를 논하고, 또 아뢰기를,
"오늘날의 조치(措置)가 과연 모두 공정한 데서 나왔으며 조금도 비평할 만한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조정 안에서 사사로운 뜻이 혹은 공정한 것을 이기기도 하며, 사람을 임용할 즈음엔 색목(色目)025) 에 구애되어 관방(官方)026) 이 문란해지고, 조경(躁競)027) 이 풍속을 이루는데, 이것이 남과 함께 목욕하면서 남을 벌거숭이라고 비웃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오직 그 색목(色目)이 비록 피차(彼此)의 구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하(殿下)께서 그들을 보실 적에는 국왕(國王)의 신하 아닌 이가 없습니다. 비록 내쫓았다 하더라도 만약 대단한 죄과(罪過)가 없는 자는 아울러 거두어 채용하여, 고치고 새롭게 하는 정사에 함께 참여시켜 피차로 하여금 감정을 억누르고 원수진 것을 풀어서, 같이 화평(和平)한 곳에 이르게 하여, 각자가 스스로 나라의 일에 마음을 다하도록 한다면, 장차 재능을 가지고 기량이 있는 자가 모두 조정에서 벼슬하기를 원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국가의 다행이며, 또한 오늘날 여러 신하들의 복입니다."
하고, 그 ‘사전(祀典)을 바로잡자’는 조목에서 문묘(文廟)에서 출향(黜享)된 사람 공백료(公伯寮) 등 10사람을 복향(復享)하는 일을 논(論)하기를,
"명나라 홍치(弘治)028) 때 장구공(張九功)이 처음으로 이 의논을 주창하자, 정민정(程敏政)이 지나치게 새롭고 기이한 의논이라고 여겨 이에 화답하였으며, 가정(嘉靖)029) 때에 이르러 의례신(議禮臣) 장총(張璁)이 새로 국정(國政)을 잡고서, 자기의 의견을 세우고자 하여 정민정의 서론(緖論)을 주워 모아 마침내 개정(改正)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유문(儒文)030) 의 시비(是非)와 칭찬·폄론(貶論)은 주자(朱子)031) 에 이르러 크게 정해졌으나, 나머지 아홉 사람의 언행(言行)을 혹은 논평하여 의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종사(從祀)032) 하는 1절(一節)의 경우라면, 주자가 유독 폄의(貶議)한 것이 없었으니, 어찌 은미한 뜻이 그 사이에 없겠습니까? 명종(明宗) 말엽과 선조(宣祖) 초년(初年)에 조정의 의논이 중국 조정의 사례에 의하여 문선왕(文宣王) 위호(位號)를 없애버리고 단지 지성선사(至聖先師) 네 자(字)만을 쓰려고 하자,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이 말하기를 ‘왕호(王號)를 쓴 것은 역대(歷代)에서 준용(遵用)하여 그 내력이 이미 오래 되었으니, 지금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의논이 마침내 정지되었으니, 이것도 또한 단안(斷案)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하고, 인해서 옛날처럼 종향(從享)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27책 25권 2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274면
- 【분류】왕실-행행(行幸) / 왕실-종친(宗親) / 정론-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021] 사전(祀典) : 제사(祭祀) 의식.
- [註 022] 사문(斯文) : 유교(儒敎)를 가리킴.
- [註 023] 목릉(穆陵) : 선조(宣祖)와 비(妃)인 의인 왕후(懿仁王后) 및 계비(繼妃) 인목 왕후(仁穆王后)의 능.
- [註 024] 경신년의 화(禍) : 1680 숙종 6년. 허견(許堅)의 역모(逆謀) 사건으로, 남인(南人)의 허적(許積)·윤휴(尹鑴) 등에게 사사(賜死)한 일.
- [註 025] 색목(色目) : 사색 당파(四色黨派).
- [註 026] 관방(官方) : 관리가 지켜야 할 규율.
- [註 027] 조경(躁競) : 분경(奔競).
- [註 028] 홍치(弘治) : 명나라 효종(孝宗)의 연호.
- [註 029] 가정(嘉靖) : 명나라 세종(世宗)의 연호.
- [註 030] 유문(儒文) : 유가(儒家).
- [註 031] 주자(朱子) : 주희(朱熹).
- [註 032] 종사(從祀) : 향사(享祀).
원문
○掌令崔恒齊上疏論事, 一曰, 選忠正以輔東宮。 二曰, 開言路以來忠諫。 三曰, 恢公道以得人心。 四曰, 正祀典以重斯文。 其開言路之條曰: "穆陵陵幸, 定於今二十日, 年事大侵, 八路同然。 而畿內尤甚, 此際有陵幸之擧, 則貽弊不貲, 願寢成命, 退以來秋。 頃年春李玄逸, 以停寢陵幸之意陳達, 而語未及卒, 遽下未安之敎。 秋間權重經, 略將數語, 仰對顧問, 而顯示厭薄之意。 自是厥後, 人多以此爲戒, 緘口退縮, 莫敢盡言, 臣恐殿下, 有以啓之也。 其恢公道之條, 首論庚申之禍。" 又曰: "今日擧措, 果可謂盡出於公, 而少無可議者耶? 朝廷之上, 私意或勝。 用舍之際, 色目是拘。 官方紊亂, 躁競成風, 是何異於同浴而譏裸哉? 惟其科目, 雖有彼此之分, 而自殿下視之, 莫非王臣也。 雖在屛黜, 如無大段罪過者, 竝爲收錄, 與之更始, 俾令彼此, 平憾釋仇, 同底和平之域, 而各自盡心於國事, 則將見懷才抱器者, 率皆願立於朝。 此實國家之幸, 而亦今日諸臣之福也。" 其正祀典之條, 論文廟黜享人公伯寮等十人復享事曰: "皇明 弘治 張九功始倡此論, 程敏政過爲新奇之論而和之。 至嘉靖, 議禮臣張璁, 新秉國政, 欲立已見, 掇拾敏政之緖論, 竟至改正。 儒門之是非褒貶, 至朱子而大定。 九人之言行, 雖或評議, 而若夫從祀一節, 朱子獨無貶議者, 豈無微意於其間耶? 明廟末宣廟初年朝議欲依中朝例, 革去文宣王位號, 只書以至聖先師四字, 先正臣李滉以爲: ‘書以王號, 歷代遵用, 其來已久, 今不可輕議。’ 由是議遂寢。 此亦足爲斷案也。" 仍請如舊從享。 上竝不納。
- 【태백산사고본】 27책 25권 2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274면
- 【분류】왕실-행행(行幸) / 왕실-종친(宗親) / 정론-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숙종 19년 (1693) 2월 4일
숙종실록25권, 숙종 19년 2월 4일 무인 2/2 기사 / 1693년 청 강희(康熙) 32년
정사를 다스리는 덕목에 대해 장령 최항제가 상소하다
국역
장령(掌令) 최항제(崔恒齊)가 상소(上疏)하여 일을 논하였는데, 첫째는 ‘충성스럽고 정직한 사람을 선발하여 동궁(東宮)을 보필하도록 하자’는 것이며, 둘째는 ‘언로(言路)를 열어서 충성스럽게 간(諫)하는 사람을 오도록 하자’는 것이며, 셋째는 ‘공도(公道)를 넓혀서 인심(人心)을 얻자’는 것이며, 넷째는 ‘사전(祀典)021) 을 바로잡아 사문(斯文)022) 을 중하게 여기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 ‘언로(言路)를 열자’는 조목에 이르기를,
"목릉(穆陵)023) 의 능행(陵行)을 이달 20일로 정하였는데, 농사가 크게 흉년이 든 것은 팔도가 마찬가지지만 기내(畿內)가 더욱 심합니다. 이러한 즈음에 능행을 거행하게 되면, 폐해를 끼치는 것이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원컨대 내리신 명령을 정지시켜 오는 가을로 미루도록 하소서. 지난해 봄에 이현일(李玄逸)이 능행을 정지하자는 뜻을 진달(陳達)하였으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미편한 전교(傳敎)를 내리셨으며, 가을에 권중경(權重經)이 간략하게 몇마디 말로서 주상의 고문(顧問)하시는 데에 우러러 대답하자, 싫어하고 냉대하는 뜻을 드러나게 보이셨습니다. 이 뒤로부터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것을 경계로 삼아 입을 다물고 물러나 움추리고서, 감히 할 말을 다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신은 아마도 전하께서 이렇게 계도(啓導)하셨다고 여깁니다."
하고, 그 ‘공도(公道)를 넓히자’는 조목에서는 맨 먼저 경신년의 화(禍)024) 를 논하고, 또 아뢰기를,
"오늘날의 조치(措置)가 과연 모두 공정한 데서 나왔으며 조금도 비평할 만한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조정 안에서 사사로운 뜻이 혹은 공정한 것을 이기기도 하며, 사람을 임용할 즈음엔 색목(色目)025) 에 구애되어 관방(官方)026) 이 문란해지고, 조경(躁競)027) 이 풍속을 이루는데, 이것이 남과 함께 목욕하면서 남을 벌거숭이라고 비웃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오직 그 색목(色目)이 비록 피차(彼此)의 구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하(殿下)께서 그들을 보실 적에는 국왕(國王)의 신하 아닌 이가 없습니다. 비록 내쫓았다 하더라도 만약 대단한 죄과(罪過)가 없는 자는 아울러 거두어 채용하여, 고치고 새롭게 하는 정사에 함께 참여시켜 피차로 하여금 감정을 억누르고 원수진 것을 풀어서, 같이 화평(和平)한 곳에 이르게 하여, 각자가 스스로 나라의 일에 마음을 다하도록 한다면, 장차 재능을 가지고 기량이 있는 자가 모두 조정에서 벼슬하기를 원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국가의 다행이며, 또한 오늘날 여러 신하들의 복입니다."
하고, 그 ‘사전(祀典)을 바로잡자’는 조목에서 문묘(文廟)에서 출향(黜享)된 사람 공백료(公伯寮) 등 10사람을 복향(復享)하는 일을 논(論)하기를,
"명나라 홍치(弘治)028) 때 장구공(張九功)이 처음으로 이 의논을 주창하자, 정민정(程敏政)이 지나치게 새롭고 기이한 의논이라고 여겨 이에 화답하였으며, 가정(嘉靖)029) 때에 이르러 의례신(議禮臣) 장총(張璁)이 새로 국정(國政)을 잡고서, 자기의 의견을 세우고자 하여 정민정의 서론(緖論)을 주워 모아 마침내 개정(改正)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유문(儒文)030) 의 시비(是非)와 칭찬·폄론(貶論)은 주자(朱子)031) 에 이르러 크게 정해졌으나, 나머지 아홉 사람의 언행(言行)을 혹은 논평하여 의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종사(從祀)032) 하는 1절(一節)의 경우라면, 주자가 유독 폄의(貶議)한 것이 없었으니, 어찌 은미한 뜻이 그 사이에 없겠습니까? 명종(明宗) 말엽과 선조(宣祖) 초년(初年)에 조정의 의논이 중국 조정의 사례에 의하여 문선왕(文宣王) 위호(位號)를 없애버리고 단지 지성선사(至聖先師) 네 자(字)만을 쓰려고 하자,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이 말하기를 ‘왕호(王號)를 쓴 것은 역대(歷代)에서 준용(遵用)하여 그 내력이 이미 오래 되었으니, 지금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의논이 마침내 정지되었으니, 이것도 또한 단안(斷案)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하고, 인해서 옛날처럼 종향(從享)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27책 25권 2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274면
- 【분류】왕실-행행(行幸) / 왕실-종친(宗親) / 정론-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021] 사전(祀典) : 제사(祭祀) 의식.
- [註 022] 사문(斯文) : 유교(儒敎)를 가리킴.
- [註 023] 목릉(穆陵) : 선조(宣祖)와 비(妃)인 의인 왕후(懿仁王后) 및 계비(繼妃) 인목 왕후(仁穆王后)의 능.
- [註 024] 경신년의 화(禍) : 1680 숙종 6년. 허견(許堅)의 역모(逆謀) 사건으로, 남인(南人)의 허적(許積)·윤휴(尹鑴) 등에게 사사(賜死)한 일.
- [註 025] 색목(色目) : 사색 당파(四色黨派).
- [註 026] 관방(官方) : 관리가 지켜야 할 규율.
- [註 027] 조경(躁競) : 분경(奔競).
- [註 028] 홍치(弘治) : 명나라 효종(孝宗)의 연호.
- [註 029] 가정(嘉靖) : 명나라 세종(世宗)의 연호.
- [註 030] 유문(儒文) : 유가(儒家).
- [註 031] 주자(朱子) : 주희(朱熹).
- [註 032] 종사(從祀) : 향사(享祀).
원문
○掌令崔恒齊上疏論事, 一曰, 選忠正以輔東宮。 二曰, 開言路以來忠諫。 三曰, 恢公道以得人心。 四曰, 正祀典以重斯文。 其開言路之條曰: "穆陵陵幸, 定於今二十日, 年事大侵, 八路同然。 而畿內尤甚, 此際有陵幸之擧, 則貽弊不貲, 願寢成命, 退以來秋。 頃年春李玄逸, 以停寢陵幸之意陳達, 而語未及卒, 遽下未安之敎。 秋間權重經, 略將數語, 仰對顧問, 而顯示厭薄之意。 自是厥後, 人多以此爲戒, 緘口退縮, 莫敢盡言, 臣恐殿下, 有以啓之也。 其恢公道之條, 首論庚申之禍。" 又曰: "今日擧措, 果可謂盡出於公, 而少無可議者耶? 朝廷之上, 私意或勝。 用舍之際, 色目是拘。 官方紊亂, 躁競成風, 是何異於同浴而譏裸哉? 惟其科目, 雖有彼此之分, 而自殿下視之, 莫非王臣也。 雖在屛黜, 如無大段罪過者, 竝爲收錄, 與之更始, 俾令彼此, 平憾釋仇, 同底和平之域, 而各自盡心於國事, 則將見懷才抱器者, 率皆願立於朝。 此實國家之幸, 而亦今日諸臣之福也。" 其正祀典之條, 論文廟黜享人公伯寮等十人復享事曰: "皇明 弘治 張九功始倡此論, 程敏政過爲新奇之論而和之。 至嘉靖, 議禮臣張璁, 新秉國政, 欲立已見, 掇拾敏政之緖論, 竟至改正。 儒門之是非褒貶, 至朱子而大定。 九人之言行, 雖或評議, 而若夫從祀一節, 朱子獨無貶議者, 豈無微意於其間耶? 明廟末宣廟初年朝議欲依中朝例, 革去文宣王位號, 只書以至聖先師四字, 先正臣李滉以爲: ‘書以王號, 歷代遵用, 其來已久, 今不可輕議。’ 由是議遂寢。 此亦足爲斷案也。" 仍請如舊從享。 上竝不納。
- 【태백산사고본】 27책 25권 2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274면
- 【분류】왕실-행행(行幸) / 왕실-종친(宗親) / 정론-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원본
숙종 19년 (1693) 2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