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실록7권, 숙종 4년 6월 12일 신사 2/3 기사 / 1678년 청 강희(康熙) 17년
윤휴의 인간성 등에 관한 판중추부사 민정중의 상소문
국역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민정중(閔鼎重)이 상소(上疏)하기를,
"신(臣)이 민신(閔愼)의 변례(變禮)의 물음에 대해 처음부터 이미 망답(妄答)하였으니, 그 죄가 송시열(宋時烈)이나 박세채(朴世采)와 본시 다를 것이 없는데, 지금에 와서는 죄가 같은 자의 문적(文籍)에 있으면서 다시 서용하라는 명(命)이 신의 몸에만 미치었으니, 이것은 실로 고인(古人)의 이른바, 의리상 감히 나오지 못할 자라고 하겠습니다. 신(臣)과 송시열·송준길(宋浚吉) 등은 모두 사우(師友)의 의리가 있음을 국인(國人)으로서 알지 못하는 자가 없습니다. 옛날 송(宋)나라 인종(仁宗) 때에, 윤수(尹洙)와 범중엄(范仲淹)은 우의(友誼)가 좋아서 범중엄이 언사(言事)로써 폄출(貶黜)되매, 윤수가 구양수(歐陽脩)·여정(余靖) 등과 상서(上書)하여 말하기를, ‘범중엄은 신의 사우이니, 원컨대 모두 폄출하게 하소서.’ 하여 드디어 폄출되었습니다. 이제 송준길은 이미 죽었는데 아직도 추적(追謫)을 입고 있으며, 송시열은 80 늙은이인데도 또한 천극(栫棘)에 갇혔거늘, 신(臣)만이 홀로 빠졌음은 이미 법을 잘못 쓴 것입니다. 그러니 또 어찌 안연(晏然)히 다시 진신(搢紳)의 반열에 끼일 수 있겠습니까? 신은 또 마음이 크게 불안한 것이 있습니다. 신이 젊었을 때에 윤휴(尹鑴)의 명망을 듣고 그와 교유(交遊)를 하여 정의(情義)가 돈독하였고 기허(期許)도 또한 깊어서 효묘(孝廟)에 천거하여 반드시 크게 써야 할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효묘께서 특별히 불러들이는 예를 더하니, 한때의 경재(卿宰)였던 이후원(李厚源)·김익희(金益熙)·이일상(李一相)·김좌명(金佐明) 등 여러 사람이 놀라면서 배척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뒤로 예론(禮論)이 일어나자 윤휴는 바로 강론(講論)하는 것 외에 위험(危險)한 말을 많이 하여 일세(一世)를 떠들썩하게 하여, 모두 좋지 못한 계략을 꾀하는 마음을 간직하였다고 지목하였으나, 신만은 홀로 그가 반드시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알았습니다. 윤휴가 성제(盛際)을 인연하여 갑자기 발탁(拔擢)되어 포의(布衣)를 벗고 국정(國政)을 잡게 되어서는 신(臣)이 비록 자취를 조정에서 멀리하여 이목(耳目)이 시사(時事)에 미치지 못하였다 하여도 나라 사랑의 말을 들으면 다 윤휴가 감히 은례(恩禮)와 총우(寵遇)의 융성함만을 믿고서 방자하게 굴며 아첨하여 영합한다고 합니다. 멋대로 하고 거리낌없는 형세를 가지고 벼슬을 얻지 못할까 근심하고 얻고 나서는 잃어버릴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일을 행하므로, 입에서 나오는 말은 거의 모두가 패륜(悖倫)하고 의리를 없애는 것이며, 일에 베푸는 것도 나라를 병들게 하고 백성을 해롭게 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그 밖에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농락하여 반드시 은혜와 원수를 따져 갚고, 재화(財貨)와 이익을 탐하여 염치(廉恥)를 상실한 것이 또한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원근(遠近)에서 시끄럽게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한결같이 신을 허물하여 ‘누가 이 사람을 천거하였느냐?’고 하니, 신은 진실로 매우 놀라와 어찌할 지 모르겠어서 걱정하고 괴로와 하였습니다. 신이 지난날 기대하던 것으로 오늘날 그가 하는 짓을 상고해 보면 앞뒤가 상반(相反)되어 판연히 두 사람인 듯합니다. 신(臣) 자신의 우둔한 소견(所見)으로 깊이 살피지 못한 것이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 효묘(孝廟)를 배알할 것이며 또한 무슨 말로 제신(諸臣)에게 스스로 해명하겠습니까? 신의 죄가 여기에 이르러 더욱 피할 길이 없습니다."
하니, 대답하기를,
"이번 한재(旱災)가 몹시 참혹하여 국사(國事)가 안정되지 않은 날을 당하여 삼가고 협동할 의리는 생각하지 아니하고, 오직 당(黨)을 한가지로 하여 다른 이를 벌죄(伐罪)하는 것으로 급선무를 삼으니 내가 실로 개탄스럽다."
하였다.
원문
○判中樞府事閔鼎重上疏曰:
臣於閔愼變禮之問, 初旣妄答, 則其罪與宋時烈、朴世采, 本無異同。 及今同罪者在籍, 而敍復之命, 獨及於臣身, 是誠古人所謂義不敢出者也。 臣與宋時烈、宋浚吉等, 俱有師友之義, 國人無不知者。 昔宋 仁宗時, 尹洙與范仲淹友善, 仲淹以言事貶, 洙與(歐陽脩)〔歐陽修〕 、余靖等上書言: "仲淹, 臣之師友, 願得俱貶。" 遂至坐貶。 今浚吉已死, 而尙被追謫, 時烈耄老而亦幽栫棘, 臣之獨逭, 已是枉法。 又安得晏然復廁於搢紳之列乎? 臣又有大不安於心者。 臣於少時, 聞尹鑴之名, 與之交遊, 情義寢篤, 期許亦深, 薦聞於孝廟, 以爲必可大用。 由是, 孝廟特加招延之禮, 一時卿宰如李厚源、金益熙、李一相、金佐明諸人, 無不爲之駭斥。 其後禮論之發, 鑴乃於所講之外, 多用危險之語。 一世譁然, 皆以包藏禍心目之, 臣獨明其必不至此。 及鑴夤緣盛際, 驟蒙拔擢, 釋布衣秉國政。 臣雖遠跡朝端, 耳目不及時事, 而竊聽國人之言, 咸以爲, 鑴敢恃恩禮、寵遇之隆, 得逞夸肆諛侫之態, 挾其縱恣無忌之勢, 濟以患得患失之心。 出諸口者, 率皆悖倫而蔑義; 施諸事者, 無非病國而害民。 其他擅弄威福, 必報恩怨; 貪饕貨利, 都喪廉恥者, 亦不可一二計。 遠近喧傳, 一辭咎臣曰: "誰爲薦此人者?" 臣實愕然失圖, 蹙然內疚。 以臣向時所期許, 夷考今日所爲, 則前後相反, 判若二人。 臣自愧昏蔽之見, 不能深察, 將何顔面, 歸拜於孝廟, 亦何辭自 解於諸臣乎? 臣罪至此, 益無所逭。
答曰: "當此旱災孔慘, 國事岌嶪之日, 不思寅協之義, 惟以黨同伐異爲急務, 予實慨然也。"
숙종 4년 (1678) 6월 12일
숙종실록7권, 숙종 4년 6월 12일 신사 2/3 기사 / 1678년 청 강희(康熙) 17년
윤휴의 인간성 등에 관한 판중추부사 민정중의 상소문
국역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민정중(閔鼎重)이 상소(上疏)하기를,
"신(臣)이 민신(閔愼)의 변례(變禮)의 물음에 대해 처음부터 이미 망답(妄答)하였으니, 그 죄가 송시열(宋時烈)이나 박세채(朴世采)와 본시 다를 것이 없는데, 지금에 와서는 죄가 같은 자의 문적(文籍)에 있으면서 다시 서용하라는 명(命)이 신의 몸에만 미치었으니, 이것은 실로 고인(古人)의 이른바, 의리상 감히 나오지 못할 자라고 하겠습니다. 신(臣)과 송시열·송준길(宋浚吉) 등은 모두 사우(師友)의 의리가 있음을 국인(國人)으로서 알지 못하는 자가 없습니다. 옛날 송(宋)나라 인종(仁宗) 때에, 윤수(尹洙)와 범중엄(范仲淹)은 우의(友誼)가 좋아서 범중엄이 언사(言事)로써 폄출(貶黜)되매, 윤수가 구양수(歐陽脩)·여정(余靖) 등과 상서(上書)하여 말하기를, ‘범중엄은 신의 사우이니, 원컨대 모두 폄출하게 하소서.’ 하여 드디어 폄출되었습니다. 이제 송준길은 이미 죽었는데 아직도 추적(追謫)을 입고 있으며, 송시열은 80 늙은이인데도 또한 천극(栫棘)에 갇혔거늘, 신(臣)만이 홀로 빠졌음은 이미 법을 잘못 쓴 것입니다. 그러니 또 어찌 안연(晏然)히 다시 진신(搢紳)의 반열에 끼일 수 있겠습니까? 신은 또 마음이 크게 불안한 것이 있습니다. 신이 젊었을 때에 윤휴(尹鑴)의 명망을 듣고 그와 교유(交遊)를 하여 정의(情義)가 돈독하였고 기허(期許)도 또한 깊어서 효묘(孝廟)에 천거하여 반드시 크게 써야 할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효묘께서 특별히 불러들이는 예를 더하니, 한때의 경재(卿宰)였던 이후원(李厚源)·김익희(金益熙)·이일상(李一相)·김좌명(金佐明) 등 여러 사람이 놀라면서 배척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뒤로 예론(禮論)이 일어나자 윤휴는 바로 강론(講論)하는 것 외에 위험(危險)한 말을 많이 하여 일세(一世)를 떠들썩하게 하여, 모두 좋지 못한 계략을 꾀하는 마음을 간직하였다고 지목하였으나, 신만은 홀로 그가 반드시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알았습니다. 윤휴가 성제(盛際)을 인연하여 갑자기 발탁(拔擢)되어 포의(布衣)를 벗고 국정(國政)을 잡게 되어서는 신(臣)이 비록 자취를 조정에서 멀리하여 이목(耳目)이 시사(時事)에 미치지 못하였다 하여도 나라 사랑의 말을 들으면 다 윤휴가 감히 은례(恩禮)와 총우(寵遇)의 융성함만을 믿고서 방자하게 굴며 아첨하여 영합한다고 합니다. 멋대로 하고 거리낌없는 형세를 가지고 벼슬을 얻지 못할까 근심하고 얻고 나서는 잃어버릴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일을 행하므로, 입에서 나오는 말은 거의 모두가 패륜(悖倫)하고 의리를 없애는 것이며, 일에 베푸는 것도 나라를 병들게 하고 백성을 해롭게 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그 밖에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농락하여 반드시 은혜와 원수를 따져 갚고, 재화(財貨)와 이익을 탐하여 염치(廉恥)를 상실한 것이 또한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원근(遠近)에서 시끄럽게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한결같이 신을 허물하여 ‘누가 이 사람을 천거하였느냐?’고 하니, 신은 진실로 매우 놀라와 어찌할 지 모르겠어서 걱정하고 괴로와 하였습니다. 신이 지난날 기대하던 것으로 오늘날 그가 하는 짓을 상고해 보면 앞뒤가 상반(相反)되어 판연히 두 사람인 듯합니다. 신(臣) 자신의 우둔한 소견(所見)으로 깊이 살피지 못한 것이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 효묘(孝廟)를 배알할 것이며 또한 무슨 말로 제신(諸臣)에게 스스로 해명하겠습니까? 신의 죄가 여기에 이르러 더욱 피할 길이 없습니다."
하니, 대답하기를,
"이번 한재(旱災)가 몹시 참혹하여 국사(國事)가 안정되지 않은 날을 당하여 삼가고 협동할 의리는 생각하지 아니하고, 오직 당(黨)을 한가지로 하여 다른 이를 벌죄(伐罪)하는 것으로 급선무를 삼으니 내가 실로 개탄스럽다."
하였다.
원문
○判中樞府事閔鼎重上疏曰:
臣於閔愼變禮之問, 初旣妄答, 則其罪與宋時烈、朴世采, 本無異同。 及今同罪者在籍, 而敍復之命, 獨及於臣身, 是誠古人所謂義不敢出者也。 臣與宋時烈、宋浚吉等, 俱有師友之義, 國人無不知者。 昔宋 仁宗時, 尹洙與范仲淹友善, 仲淹以言事貶, 洙與(歐陽脩)〔歐陽修〕 、余靖等上書言: "仲淹, 臣之師友, 願得俱貶。" 遂至坐貶。 今浚吉已死, 而尙被追謫, 時烈耄老而亦幽栫棘, 臣之獨逭, 已是枉法。 又安得晏然復廁於搢紳之列乎? 臣又有大不安於心者。 臣於少時, 聞尹鑴之名, 與之交遊, 情義寢篤, 期許亦深, 薦聞於孝廟, 以爲必可大用。 由是, 孝廟特加招延之禮, 一時卿宰如李厚源、金益熙、李一相、金佐明諸人, 無不爲之駭斥。 其後禮論之發, 鑴乃於所講之外, 多用危險之語。 一世譁然, 皆以包藏禍心目之, 臣獨明其必不至此。 及鑴夤緣盛際, 驟蒙拔擢, 釋布衣秉國政。 臣雖遠跡朝端, 耳目不及時事, 而竊聽國人之言, 咸以爲, 鑴敢恃恩禮、寵遇之隆, 得逞夸肆諛侫之態, 挾其縱恣無忌之勢, 濟以患得患失之心。 出諸口者, 率皆悖倫而蔑義; 施諸事者, 無非病國而害民。 其他擅弄威福, 必報恩怨; 貪饕貨利, 都喪廉恥者, 亦不可一二計。 遠近喧傳, 一辭咎臣曰: "誰爲薦此人者?" 臣實愕然失圖, 蹙然內疚。 以臣向時所期許, 夷考今日所爲, 則前後相反, 判若二人。 臣自愧昏蔽之見, 不能深察, 將何顔面, 歸拜於孝廟, 亦何辭自 解於諸臣乎? 臣罪至此, 益無所逭。
答曰: "當此旱災孔慘, 國事岌嶪之日, 不思寅協之義, 惟以黨同伐異爲急務, 予實慨然也。"
원본
숙종 4년 (1678) 6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