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유학 여이진이 전팽령과 곽시의 사우를 다시 세워 제향케 할 것을 청하다
옥천(沃川)의 유학(幼學) 여이진(呂以振)이 상소하기를,
"융경(隆慶)신미년811) 에 군수(郡守) 서희려(徐希呂)가 서원(書院)을 고을 남쪽 쌍봉(雙峯) 밑에 창건하고, 고을 사람인 목사(牧使) 전팽령(全彭齡)과 정자(正字) 곽시(郭詩)를 제향(祭享)하기로 의논하였으나, 천연하고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임진년812) 에 이르러 원사(院舍)가 왜적(倭賊)에게 불태워졌으므로, 천계(天啓)신유년813) 에 고을 사람들이 서원을 삼계(三溪)에 다시 세우고, 전팽령과 곽시를 합향(合享)할 때에 증(贈) 판서(判書) 조헌(趙憲)을 배향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참봉(參奉) 곽현(郭鉉)이 일가(一家)의 췌객(贅客)인 송갑조(宋甲祚)와 더불어 그 선조 곽은(郭垠)을 배향할 만하다는 말을 주창하니, 사론(士論)이 모순(矛盾)되었습니다. 송시열(宋時烈)은 바로 송갑조의 아들로서, 그 무리를 부추겨 도리어 이미 배향한 두 현인(賢人)을 공격하여, 조헌의 어짊이 전(全)·곽(郭)보다 나은데도 위(位)가 그 밑에 있다는 것으로 핑계대고는 조헌의 위판(位版)을 몰래 빼내어 따로 사우(祠宇)를 세우니, 삼계 서원(三溪書院)의 유생(儒生)들이 물러가 예전 서원을 지키고 이들과 더불어 같이 일을 하지 않습니다. 송시열 등이 또 삼계의 사우(祠宇)를 훼철(毁撤)하고 삼계의 전토를 탈취하고자 하므로, 응교(應敎) 민정중(閔鼎重)이 이에 연중(筵中)에서 전팽령·곽시·정개청(鄭介淸)의 일을 논하였는데,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 정개청·곽시·전팽령의 사람됨을 물으니, 송준길(宋浚吉)이 먼저 정개청을 배척하고, 다음으로 곽시를 배척하기를, ‘나이 20여 살에 등과(登科)하고, 시골에 내려가서 소주(燒酒)를 마시고 관문(官門)에서 죽었습니다. 전팽령의 허물은 은특(隱慝)814) 에 관계되므로, 더러워서 감히 진달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하니, 도신(道臣) 서필달(徐必達)이 풍지(風旨)를 받들어서 여러 고을에 글을 보내어 서원(書院)을 사문(査問)하여 망령되게 두 신하의 위판(位版)을 이미 묻고 장문(狀聞)하여 서원을 훼철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조금 재량해 살피셔서 다시 제향(祭享)하도록 허락하소서."
하였다. 상소를 예조(禮曹)에 내리니, 판서(判書) 홍우원(洪宇遠) 등이 아뢰기를,
"전팽령은 기묘년815) 의 사류(士類)이고, 곽시는 나이 어려 등과하여 학문이 통명(通明)하므로, 한 고을에서 이 두 사람을 위하여 사우(祠宇)를 창건하였으니, 바로 죽어서 사당(祠堂)에 제사지내는 뜻인데, 송시열 등이 반드시 훼철하기에 이른 것은 진실로 놀랄 만합니다. 마땅히 많은 선비의 청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보다 앞서 충청 감사(忠淸監司) 서필원(徐必遠)이 도내(道內)에 서원(書院)이 너무 많다 하여 서원의 여러 현인(賢人)의 성명을 열서(列書)하여 조정에 계문(啓聞)하고, 골라서 없애기를 청하였는데, 그때 민정중(閔鼎重)이 차자(箚子)로 서필원을 배척하였고, 송준길(宋浚吉)은 순문(詢問)으로 인하여 정개청(鄭介淸) 및 전팽령(全彭齡)·곽시(郭詩)를 향사(享祠)하는 것이 합당하지 못함을 진달해 아뢰어 이를 폐지한 것인데, 여이진(呂以振)은 이에 ‘폐지할 것을 청한 뒤에 서필원이 풍지(風旨)를 받들어서 이 사문(査問)이 있었다.’는 것으로써 말하였으니, 모두 속이는 말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3책 4권 52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305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811]신미년 : 1571 선조 4년.
- [註 812]
임진년 : 1592 선조 25년.- [註 813]
○沃川幼學呂以振上疏曰:
隆慶辛未, 郡守徐希呂創立書院于郡南雙峰之下, 議以郡人牧使全彭齡、正字郭詩享之, 遷延未果, 至壬辰, 院舍爲倭寇所焚。 天啓辛酉, 鄕人重建書院于三溪, 以彭齡、詩合享時, 有以贈判書趙憲配享之議, 參奉郭鉉與其一家贅客宋甲祚, 倡爲其先祖郭垠可享之說, 士論矛盾。 時烈卽甲祚之子也, 嗾其黨, 反攻已享之賢, 托以趙憲之賢, 優於全、郭, 而位在其下, 潛抽憲位版, 別建祠宇, 三溪院儒, 退守舊院, 不與同事。 時列等又欲毁撤三溪之祠, 奪取三溪之田, 應敎閔鼎重乃於筵中, 論彭齡、詩、鄭介淸事, 孝宗大王問介淸、詩、彭齡之爲人, 浚吉先斥介淸, 次斥詩曰: "年二十餘登第, 下鄕飮燒酒, 死官門。 彭齡之疵, 係是隱慝, 醜不敢達。" 云, 而道臣徐必遠承望風旨, 行文列邑, 査問書院, 妄以兩臣位版, 皆已埋置狀聞, 至於毁撤書院。 伏願少賜裁察, 許以復享。
疏下禮曹。 判書洪宇遠等啓曰: "彭齡, 己卯士類, 詩, 年少登科, 學問通明。 一鄕之爲此兩人, 創立祠宇, 卽沒而祭社之意, 而時烈等之必至毁撤者, 誠爲可駭。 宜從多士之請。" 從之。 先是, 忠淸監司徐必遠以道內書院太多, 列書書院諸賢姓名, 聞于朝, 請揀罷, 其時閔鼎重箚斥必遠。 宋浚吉因詢問, 陳白介淸及彭齡、詩不合享祠而罷之。 以振乃以請罷後, 必遠承望風旨, 有此査問爲言, 皆誣辭也。
- 【태백산사고본】 3책 4권 52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305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