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실록19권, 현종 12년 9월 9일 정사 1/2 기사 / 1671년 청 강희(康熙) 10년
적곡에 대해 의논하다
국역
집의 신정(申晸), 장령 정화제(鄭華齊), 지평 오두헌(吳斗憲)·이수만(李壽曼)이 아뢰기를,
"지금 가을 농사는 이미 끝났으나 서울의 굶주림은 갈수록 더욱 심하여 여염의 백성들이 조석을 보전하지 못할 지경입니다. 그런데 전후로 대여한 곡식을 이제 한꺼번에 거두어들일 것이고, 또 진휼청에서는 한결같이 본색(本色)으로 거두어들이기 때문에 시장 쌀값이 갑자기 올라서 백성들이 황급해 어찌할 바를 모른다 하니 국가가 염려하고 돌보는 도리에 있어서 변통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니 해청(該廳)을 시켜 녹을 먹는 조정 인사의 집 이외는 모두 경기의 환자[還上] 예에 따라 반만 거두어들이게 하거나 은(銀)이나 베로 값을 쳐서 장만하여 바치게 하여 매우 다급한 도성 백성들의 형편을 늦추어 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을 시켜 품처하게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도성 백성들에게 전후로 대여한 국곡이 무려 2만 6천 5백여 석이나 되는데 만일 빨리 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점점 더 포탈이 늘어나 그 폐단이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또 모곡(耗穀) 2천 6백여 석을 특별히 명하여 감면하게 하셨으므로 도성 백성들이 입은 혜택이 또한 많습니다. 그러므로 반만 거두어들인다는 것은 일의 형세상 시행하기 어렵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끝내 쌀로 장만하여 바치기 어려운 자는 혹 은과 베로 값을 쳐서 대납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헌부가 또 아뢰기를,
"지난해의 흉년은 예전에 없던 것이어서 굶주리고 떠돌아 다니다가 죽은 자가 태반이나 됩니다. 팔도 가운데 삼남(三南)이 더욱 심하여 살아남은 백성이 의지하여 살아갈 수 없어, 마치 죽어가는 사람의 실오라기 같은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것과 같으므로 제때에 어루만져 주더라도 부지하기를 바라기가 어려운데, 더구나 여러 가지 역(役)이 여느 해에 비해 준 것이 없는데다 두 해의 세금을 한꺼번에 아울러 거두고 있으니, 이와 같은 거조는 이미 백성의 신망을 잃은 것입니다. 그런데, 대여했던 곡식을 이제 또 줄이지 않고 받아들인다면 고혈(膏血)이 이미 다하여 살길이 끊어질 것입니다. 경기에 대여해 준 곡식은 이미 반으로 감해 주었는데, 삼남만 달리하는 것은 차이를 두지 않고 똑같이 다스리는 왕자(王者)의 정사가 아닙니다. 삼남의 환자(還上)도 한결같이 경기의 예에 따라 절반만 거두어들이소서."
하니, 상이 또 묘당을 시켜 품처하게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경기에 나누어 준 것은 무려 22만여 석이나 되어 원수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형세이기 때문에 특별히 절반만 받아들이게 하였습니다만, 다른 도는 이를 예로 삼을 수 없겠습니다."
하였다. 그뒤 등대 때에 정치화(鄭致和)가 또 시행하기 어렵다는 뜻을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의 계사도 옳지 않은 것은 아니나, 형세에 차이가 있으니 어찌 반드시 시행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원문
○丁巳/執義申晸、掌令鄭華齊、持平吳斗憲ㆍ李壽曼啓曰: "卽今秋事已成, 而都下阻飢, 愈往愈甚, 閭巷小民, 莫保朝夕。 而前後所糴, 今將一時徵捧, 且聞賑廳, 一以本色收納, 故市廛之上, 米直頓高, 民情遑遑, 罔知攸措。 其在朝家軫恤之道, 不可無變通之擧。 請令該廳, 朝士食祿家外,一依畿甸還上例, 一半收捧, 或以銀布折價備納, 以紓都民燃眉之急。" 上令廟臺稟處。 備邊司啓曰: "都民前後所糶,多至二萬六千五百餘石, 若不趁時還捧, 則轉成逋欠, 其弊益甚。 且耗穀二千六百五十餘石, 特命減除, 都民蒙惠, 亦已多矣。 一半收捧, 勢難施行。 其中終難以米備納者, 或以銀布拆價, 代捧宜當。" 上從之。 憲府又啓曰: "去歲凶歉, 前古所無, 饑饉流離, 死亡殆半。 八路之中, 三南尤甚,孑遺之民, 無以資活, 比如垂亡之人, 一線未絶, 雖及時撫摩, 尙難望其支保, 況諸般之役, 無減於恒歲, 兩年之稅, 竝徵於一時, 似此擧措, 已失民望。 而糶糴之捧, 今又不減, 膏血已竭, 生理將絶。 畿甸之糴, 旣已減半, 則獨於三南, 有所異同, 殊非王者一視之義。 請三南還上, 一依京畿例, 折半收捧。" 上又令廟堂稟處。 備邊司啓曰: "畿內分給,多至二十二萬餘石, 勢難准捧, 故特令折半, 他道不可視此爲例。" 及後登對, 鄭致和又陳其難施之意, 上曰: "臺啓亦非不可, 而形勢有異, 豈可必施乎。"
현종 12년 (1671) 9월 9일
현종실록19권, 현종 12년 9월 9일 정사 1/2 기사 / 1671년 청 강희(康熙) 10년
적곡에 대해 의논하다
국역
집의 신정(申晸), 장령 정화제(鄭華齊), 지평 오두헌(吳斗憲)·이수만(李壽曼)이 아뢰기를,
"지금 가을 농사는 이미 끝났으나 서울의 굶주림은 갈수록 더욱 심하여 여염의 백성들이 조석을 보전하지 못할 지경입니다. 그런데 전후로 대여한 곡식을 이제 한꺼번에 거두어들일 것이고, 또 진휼청에서는 한결같이 본색(本色)으로 거두어들이기 때문에 시장 쌀값이 갑자기 올라서 백성들이 황급해 어찌할 바를 모른다 하니 국가가 염려하고 돌보는 도리에 있어서 변통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니 해청(該廳)을 시켜 녹을 먹는 조정 인사의 집 이외는 모두 경기의 환자[還上] 예에 따라 반만 거두어들이게 하거나 은(銀)이나 베로 값을 쳐서 장만하여 바치게 하여 매우 다급한 도성 백성들의 형편을 늦추어 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을 시켜 품처하게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도성 백성들에게 전후로 대여한 국곡이 무려 2만 6천 5백여 석이나 되는데 만일 빨리 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점점 더 포탈이 늘어나 그 폐단이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또 모곡(耗穀) 2천 6백여 석을 특별히 명하여 감면하게 하셨으므로 도성 백성들이 입은 혜택이 또한 많습니다. 그러므로 반만 거두어들인다는 것은 일의 형세상 시행하기 어렵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끝내 쌀로 장만하여 바치기 어려운 자는 혹 은과 베로 값을 쳐서 대납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헌부가 또 아뢰기를,
"지난해의 흉년은 예전에 없던 것이어서 굶주리고 떠돌아 다니다가 죽은 자가 태반이나 됩니다. 팔도 가운데 삼남(三南)이 더욱 심하여 살아남은 백성이 의지하여 살아갈 수 없어, 마치 죽어가는 사람의 실오라기 같은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것과 같으므로 제때에 어루만져 주더라도 부지하기를 바라기가 어려운데, 더구나 여러 가지 역(役)이 여느 해에 비해 준 것이 없는데다 두 해의 세금을 한꺼번에 아울러 거두고 있으니, 이와 같은 거조는 이미 백성의 신망을 잃은 것입니다. 그런데, 대여했던 곡식을 이제 또 줄이지 않고 받아들인다면 고혈(膏血)이 이미 다하여 살길이 끊어질 것입니다. 경기에 대여해 준 곡식은 이미 반으로 감해 주었는데, 삼남만 달리하는 것은 차이를 두지 않고 똑같이 다스리는 왕자(王者)의 정사가 아닙니다. 삼남의 환자(還上)도 한결같이 경기의 예에 따라 절반만 거두어들이소서."
하니, 상이 또 묘당을 시켜 품처하게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경기에 나누어 준 것은 무려 22만여 석이나 되어 원수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형세이기 때문에 특별히 절반만 받아들이게 하였습니다만, 다른 도는 이를 예로 삼을 수 없겠습니다."
하였다. 그뒤 등대 때에 정치화(鄭致和)가 또 시행하기 어렵다는 뜻을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의 계사도 옳지 않은 것은 아니나, 형세에 차이가 있으니 어찌 반드시 시행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원문
○丁巳/執義申晸、掌令鄭華齊、持平吳斗憲ㆍ李壽曼啓曰: "卽今秋事已成, 而都下阻飢, 愈往愈甚, 閭巷小民, 莫保朝夕。 而前後所糴, 今將一時徵捧, 且聞賑廳, 一以本色收納, 故市廛之上, 米直頓高, 民情遑遑, 罔知攸措。 其在朝家軫恤之道, 不可無變通之擧。 請令該廳, 朝士食祿家外,一依畿甸還上例, 一半收捧, 或以銀布折價備納, 以紓都民燃眉之急。" 上令廟臺稟處。 備邊司啓曰: "都民前後所糶,多至二萬六千五百餘石, 若不趁時還捧, 則轉成逋欠, 其弊益甚。 且耗穀二千六百五十餘石, 特命減除, 都民蒙惠, 亦已多矣。 一半收捧, 勢難施行。 其中終難以米備納者, 或以銀布拆價, 代捧宜當。" 上從之。 憲府又啓曰: "去歲凶歉, 前古所無, 饑饉流離, 死亡殆半。 八路之中, 三南尤甚,孑遺之民, 無以資活, 比如垂亡之人, 一線未絶, 雖及時撫摩, 尙難望其支保, 況諸般之役, 無減於恒歲, 兩年之稅, 竝徵於一時, 似此擧措, 已失民望。 而糶糴之捧, 今又不減, 膏血已竭, 生理將絶。 畿甸之糴, 旣已減半, 則獨於三南, 有所異同, 殊非王者一視之義。 請三南還上, 一依京畿例, 折半收捧。" 上又令廟堂稟處。 備邊司啓曰: "畿內分給,多至二十二萬餘石, 勢難准捧, 故特令折半, 他道不可視此爲例。" 及後登對, 鄭致和又陳其難施之意, 上曰: "臺啓亦非不可, 而形勢有異, 豈可必施乎。"
원본
현종 12년 (1671) 9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