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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중초본] 43권, 광해 3년 7월 20일 정사 3번째기사 1611년 명 만력(萬曆) 39년

호조 판서 황신이 조도 관호의 치폐를 대신에게 의논시킬 것을 것을 청하다

호조 판서 황신(黃愼)이 아뢰기를,

"보잘것없는 신의 질병이 고통스러워 벼슬을 감당할 수 없으므로 죽음을 무릅쓰고 정고(呈告)하였는데, 윤허해주지 않으시고 특별히 규외(規外)의 은가(恩暇)를 내리시니, 신은 정말 황공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며칠 전에 삼가 성상의 비답을 받들건대 ‘분국(分局)의 얘기는 선대 조정에서 들어보지 못한 얘기이다. 본조에 가합하거든 사람을 골라 임명하도록 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재화를 관리하는 직임은 예로부터 어렵게 여겨 온 것입니다. 난리를 겪은 후 국가의 재용(財用)이 제모양을 갖추지 못하자, 지난 을사 연간에 비로소 공안(貢案)을 상정(詳定)하였으나 세입(歲入)이 평소에 비해 10분의 2, 3도 못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요사이 몇 년 동안에 크고 작은 수용(需用)이 점차 예전의 규모를 회복하여, 한 해에 바치는 공물이 한 해 용도를 지탱하기에 모자라, 반드시 별도로 조처하여 마련해야만 꾸려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부득이하여 이 조도(調度)의 관호(官號)058) 가 있게 된 것인데 몹시 구차한 것이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조도(調度) 일사(一事)는 나라의 체모에 방해로울 뿐, 단지 눈앞의 급한 것만 해결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수삼 년 기다렸다가 민력(民力)이 어느 정도 갖추어진 뒤에 가서, 다시금 실전(實田)을 조사하여 공안을 재정함으로써, 국가의 재용이 조금 지탱할 수 있도록 만든 다음에, 서서히 개혁을 의논했으면 합니다. 그러나 일에 닥쳐 군색하고 다급하게 시전(市廛)에서 근거도 없이 빼앗는 일에 비하면, 이 방법이 약간 낫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 각사가 한결같이 고갈되어 해당 관원은 단지 빈 창고만을 지키고 있으니, 만약 조도(調度)에서 조처하여 갖추는 것이 없다면, 어디에서 가져다 마련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대신의 계사로 인하여, 이미 본조에 합치고 정·좌랑(正佐郞) 각 1원(員)을 가설하여 그들로 하여금 맡아 다스리도록 하여, 이제는 분조(分曹)의 이름이 더이상 없습니다. 다만 조도의 직임이 오로지 이병(利柄)을 관장하는 만큼, 조금이라도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으면, 비방과 욕설이 뒤따르게 되니, 차라리 없애버리므로써 사람들의 입방아를 그치게 하고 체면을 보존하는 것이 낫습니다.

대체로 조도를 설치한 것은 애당초 대신의 계사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로 둘 것인지 없애버릴 것인지 아니면 변통을 할 것인지에 대한 계책을 대신으로 하여금 좋은 쪽으로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구임(久任)시켜 효과를 거두려고 경을 번거롭게 한다마는, 앞으로는 비록 질병이 있더라도 사직한다는 말을 하지 말고, 다시금 더욱 직무에 전념하라. 그리고 대신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라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79장 A면【국편영인본】 31책 641면
  • 【분류】
    재정-전세(田稅) / 재정-공물(貢物) / 재정-창고(倉庫)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사(人事)

  • [註 058]
    조도(調度)의 관호(官號) : 임진 왜란 이후 어려워진 국가 재정을 원활히 하기 위해, 광해군(光海君) 때에 조도관(調度官)·조도사(調度使) 등의 임시 직명(職名)을 두어 운영하였는데, 민간으로부터 부당하게 물자를 징발하는 등 폐해가 많았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23·《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직관고(職官考).

○戶曹判書黃愼啓曰: "賤疾方苦, 不堪從仕, 冒死呈告, 而未蒙許, 特賜規外恩暇, 臣誠惶恐, 不知所處。 頃日伏承聖批有曰: ‘分局之說, 先朝所未聞。 可合於本曹, 擇人而任之。’ 夫理財之任, 自古所難。 亂後國家財用, 不成模樣, 往在乙巳年間, 始爲詳定貢案, 歲入不及平時十分之二三。 近數年來, 大小需用, 漸復舊例, 一歲常貢, 不足以供一年之用, 必須別樣措備。 故不得已而有此調度之號, 苟且甚矣。 臣意以爲調度一事, 有妨國體, 只可救目前而已。 欲待數三年間, 民, 更爲覈出實田, 改定貢案, 使國用稍可支吾, 然後徐議革去。 然比之臨時窘急, 白奪市廛, 則此爲差勝耳。 今日各司一樣匱竭, 該官但守空庫, 若非調度所措備, 則未知取辦於何所也。 因大臣啓辭, 已合於本曹, 而加設正、佐郞各一員, 使之句管, 今則更無分曹之名矣。 但調度之任, 專管利柄, 少有不稱, 謗罵隨之, 無寧革去之可以止人言而存體面。 大槪調度之初出於大臣之啓, 或仍或罷, 及變通之策, 令大臣從長議處。" 答曰: "煩卿以久任責成之意, 今後雖有疾病, 勿爲控辭, 更加盡職。 令大臣議處事, 依啓。"


  •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79장 A면【국편영인본】 31책 641면
  • 【분류】
    재정-전세(田稅) / 재정-공물(貢物) / 재정-창고(倉庫)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사(人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