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일기[중초본]36권, 광해 2년 12월 26일 정유 9/18 기사 / 1610년 명 만력(萬曆) 38년
포로가 되었던 승려 육혜가 일본인과 함께 부산에 도착하다
국역
〈포로가 되었던 진주(晉州)의 승려 육혜(六惠)가 대마도에서 출발하여 두왜(頭倭) 1명, 격왜(格倭) 7명과 함께 이달 18일에 부산에 도착하니, 대마 도주(對馬島主) 평의지(平義智)가 보낸 것이었다. 의지가 동래부 부산진에 글을 올리니, 대개 귤왜(橘倭)가 지체하며 돌아오지 않는 것을 탓하는 내용이었다. 육혜는 진주인(晉州人)이다. 그가 말하기를,
"나이 12세에 정유 재란을 만나 심안돈(沈安頓) 수하의 장수에게 사로잡히는 바람에 바다를 건너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보강사(寶江寺)에 머무르다가 지금 비로소 떠나오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사정에 대해서는 살마주(薩摩州)에 있던 때에 들은 적이 있습니다. 원수충(源秀忠)이 유구국(琉球國)을 습격하여 왕과 왕의 동생을 사로잡아 왔는데, 가강(家康)에게 압송하는 도중에 국왕의 동생은 길에서 죽고 국왕만 적도(賊都)에 가 억류되어 있다 합니다. 원수충이 심안돈과 상의하기를 ‘중원의 복건(福建)·창주(昌州) 등지는 가서 침범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중간에 가다산군(可多山郡)이 있으니, 반드시 먼저 그 군을 공격하여 황금을 전부 차지해야 한다.’ 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다투었다 합니다. 이른바 살마주는 원수충과 심안돈이 군무를 주관하는 장수로 있는 곳인데, 심안돈의 군대가 더 강하고 잘 싸운다고 합니다."
하였는데 본도 감사 이정신(李廷臣)이 조정에 보고하였다.〉
원문
○(被虜晉州僧六惠, 自對馬島出來, 今月十八日, 與頭倭一人、格倭七人, 來泊于釜山。 對馬島主平義智送之也。 義智上書于東萊 釜山, 蓋責以橘倭之遲延不還也。 六惠, 晉州人也。 其言曰: "年十二, 値丁酉之變, 被虜於沈安頓手下將, 因渡海削髮爲僧, 住在寶江寺, 今始出來。 日本事情則在薩摩州時, 聞‘(原秀忠)[源秀忠] 往襲琉球國, 虜王及弟來, 送于家康之際, 國王弟路死, 唯國王往縶于賊都矣’。 (原秀忠)[源秀忠] 與沈安頓相議曰: ‘中原 福建、昌州等地, 當往犯, 而中有可多山郡, 必先擊其郡, 全用黃金。 故以此爭之’云。 所謂薩摩州, (原秀忠)[源秀忠] 、沈安頓爲主兵之將, 而沈安頓兵强善戰"云。本道監司李廷臣, 以聞于朝。)
광해 2년 (1610) 12월 26일
- 도목 정사를 행하다
- 사헌부가 간성 군수를 문관으로 하기를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다
- 송순·조희일·이경탁·남이준이 인피하고 물러나다
- 송순·조희일 등이 호패법 중지의 논의가 받아들여 지지 않자 連名하여 인피하다
- 역관을 보내 황제의 환후가 어떤지를 알아보려다 그치다
- 지평 이홍망이 병으로 인해 직이 갈리다
- 해주 목사 이신의와 전 은율 현감 이창정에게 통정 대부를 가자하다
- 전 종부시 정 강절에게 통정의 계급을 가자하다
- 포로가 되었던 승려 육혜가 일본인과 함께 부산에 도착하다
- 평안도 절도사 유형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허락하지 않다
- 병사 박엽의 계문에 따라 연안 부사 윤수민을 파직하다
- 운봉현과 화순현을 다시 설치하다
- 이항복을 봉성릉 도감의 도제조로 삼아 감독하게 하다
- 침의 김영국을 경기도의 수령에 제수하게 하다
- 왕이 동서 전관에 명하여 은전을 거행하되 신중히 하라고 하다
- 이조가 도목정사에 삼사와 강원의 관원은 상피해야 할 자도 아울러 의망하다
- 조정을 지사로 삼았다
- 유경종·조탁·이호신·김상헌·박증현·유희량·민덕남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광해군일기[중초본]36권, 광해 2년 12월 26일 정유 9/18 기사 / 1610년 명 만력(萬曆) 38년
포로가 되었던 승려 육혜가 일본인과 함께 부산에 도착하다
국역
〈포로가 되었던 진주(晉州)의 승려 육혜(六惠)가 대마도에서 출발하여 두왜(頭倭) 1명, 격왜(格倭) 7명과 함께 이달 18일에 부산에 도착하니, 대마 도주(對馬島主) 평의지(平義智)가 보낸 것이었다. 의지가 동래부 부산진에 글을 올리니, 대개 귤왜(橘倭)가 지체하며 돌아오지 않는 것을 탓하는 내용이었다. 육혜는 진주인(晉州人)이다. 그가 말하기를,
"나이 12세에 정유 재란을 만나 심안돈(沈安頓) 수하의 장수에게 사로잡히는 바람에 바다를 건너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보강사(寶江寺)에 머무르다가 지금 비로소 떠나오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사정에 대해서는 살마주(薩摩州)에 있던 때에 들은 적이 있습니다. 원수충(源秀忠)이 유구국(琉球國)을 습격하여 왕과 왕의 동생을 사로잡아 왔는데, 가강(家康)에게 압송하는 도중에 국왕의 동생은 길에서 죽고 국왕만 적도(賊都)에 가 억류되어 있다 합니다. 원수충이 심안돈과 상의하기를 ‘중원의 복건(福建)·창주(昌州) 등지는 가서 침범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중간에 가다산군(可多山郡)이 있으니, 반드시 먼저 그 군을 공격하여 황금을 전부 차지해야 한다.’ 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다투었다 합니다. 이른바 살마주는 원수충과 심안돈이 군무를 주관하는 장수로 있는 곳인데, 심안돈의 군대가 더 강하고 잘 싸운다고 합니다."
하였는데 본도 감사 이정신(李廷臣)이 조정에 보고하였다.〉
원문
○(被虜晉州僧六惠, 自對馬島出來, 今月十八日, 與頭倭一人、格倭七人, 來泊于釜山。 對馬島主平義智送之也。 義智上書于東萊 釜山, 蓋責以橘倭之遲延不還也。 六惠, 晉州人也。 其言曰: "年十二, 値丁酉之變, 被虜於沈安頓手下將, 因渡海削髮爲僧, 住在寶江寺, 今始出來。 日本事情則在薩摩州時, 聞‘(原秀忠)[源秀忠] 往襲琉球國, 虜王及弟來, 送于家康之際, 國王弟路死, 唯國王往縶于賊都矣’。 (原秀忠)[源秀忠] 與沈安頓相議曰: ‘中原 福建、昌州等地, 當往犯, 而中有可多山郡, 必先擊其郡, 全用黃金。 故以此爭之’云。 所謂薩摩州, (原秀忠)[源秀忠] 、沈安頓爲主兵之將, 而沈安頓兵强善戰"云。本道監司李廷臣, 以聞于朝。)
원본
광해 2년 (1610) 12월 26일
- 도목 정사를 행하다
- 사헌부가 간성 군수를 문관으로 하기를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다
- 송순·조희일·이경탁·남이준이 인피하고 물러나다
- 송순·조희일 등이 호패법 중지의 논의가 받아들여 지지 않자 連名하여 인피하다
- 역관을 보내 황제의 환후가 어떤지를 알아보려다 그치다
- 지평 이홍망이 병으로 인해 직이 갈리다
- 해주 목사 이신의와 전 은율 현감 이창정에게 통정 대부를 가자하다
- 전 종부시 정 강절에게 통정의 계급을 가자하다
- 포로가 되었던 승려 육혜가 일본인과 함께 부산에 도착하다
- 평안도 절도사 유형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허락하지 않다
- 병사 박엽의 계문에 따라 연안 부사 윤수민을 파직하다
- 운봉현과 화순현을 다시 설치하다
- 이항복을 봉성릉 도감의 도제조로 삼아 감독하게 하다
- 침의 김영국을 경기도의 수령에 제수하게 하다
- 왕이 동서 전관에 명하여 은전을 거행하되 신중히 하라고 하다
- 이조가 도목정사에 삼사와 강원의 관원은 상피해야 할 자도 아울러 의망하다
- 조정을 지사로 삼았다
- 유경종·조탁·이호신·김상헌·박증현·유희량·민덕남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