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일기[중초본]25권, 광해 2년 2월 8일 갑인 6/7 기사 / 1610년 명 만력(萬曆) 38년
정각·이귀·민덕남·유경종·유희분·오억령·최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국역
정각(鄭殼)을 평산 부사(平山府使)로, 【정각은 임인년에 대간이 되어 힘을 다해서 성혼(成渾)을 공격하고 당여(黨與)를 모아 들인다고 지적하였는데 자기편 사람 중에서도 그를 그르게 여기는 자가 있자 글이 짧아 실언을 하였다는 이유로 피혐하였다. 】 이귀(李貴)를 숙천 부사(肅川府使)로, 【이귀는 뜻이 크고 말이 곧았으며 성질이 우직했다. 이이와 성혼을 스승으로 높이고 이 두 사람이 무함당한 것을 분하게 여겨 글을 올려 분소(分疏)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인홍이 대사헌이 되었을 때 이귀가 소를 올려 인홍의 잘못과 악행을 곧바로 지척하여 조금도 돌아보는 바 없이 하니 사람들이 그를 소마(疏魔)로 지목하였다. 또 나라일을 담당하면서 견해가 있으면 말을 하였으며, 공무를 수행할 때는 법을 받들어 흔들리지 않았고 이해를 돌아보지 않았으며, 강포한 무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돌하고 과감하며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감정대로 행동하였다. 이 때문에 세상의 비방을 사서 가는 곳마다 낭패를 보았다. 】 민덕남(閔德男)을 사간으로, 【덕남의 사람됨은 용렬한데 유영경 때는 오랫동안 청반(淸班)에 있었고 지금은 유희분에게 빌붙어 시망(時望)이 더욱 중해졌다. 】 유경종(柳慶宗)을 집의로, 【유경종은 전에 간관이 되었을 때 허준(許浚)의 일을 논하려 하다가 김대래(金大來) 등에게 배척당하였는데 이번에 다시 청반의 대열에 들게 되었다. 】 유희분(柳希奮)을 이조 참판으로, 【유영경 때부터 늘 청반에 있었는데 상이 즉위하자 그 권세가 막강해졌다. 그러나 정창연(鄭昌衍)이 전조(銓曹)의 장이고, 각각 당여를 두고 있으므로 희분이 누차 요직을 사양해 오다가 이때에 이르러 아전(亞銓)이 되자 다시 사양하지 않으니, 〈권세가 다 그 사람에게로 돌아 갔다.〉 대저 왕이 즉위한 뒤에 전조는 정창연 부자와 유희분 형제가 서로 주고받는 자리가 되었으나 왕이 둘 다 용인해 주었으니 〈시정을 알 만하다.〉 . 】 오억령(吳億齡)을 병조 참판으로, 【사람됨이 온화하고 단정하며 지조와 행실에 오점이 없었다. 〈평소 거칠고 사나운 얼굴빛과 욕하고 꾸짖는 소리가 없어 그를 대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야비한 마음과 인색한 마음이 저절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항상 부드러운 말씨로 경계하였으며 면전에서 거절하거나 조정에서 다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비록 사론이 둘로 갈라졌어도 늘 청아한 명망을 보존하고 있었다. 말년에는 이이첨에게 거슬림을 당하여 개성 유수가 되어 〈잠시 해서(海西)를 안찰한 적이 있었다. 나중에는 늑장을 부리며 잠자코 따르기만 하고 관록을 유지하기 위하여 비굴하게 굴었다는 기롱을 면치 못했으니 애석하다.〉 】 최현(崔晛)을 지평으로, 유희량(柳希亮)을 전적으로 삼았다. 【유희량은 유희분의 아우이다. 출신(出身)이 된 지 얼마 후에 한림원의 설서와 정언을 거쳐 곧바로 전랑(銓郞)이 되니 그때 사람들이 서둘러 천거하고 이끌어서 아첨으로 척리(戚里)에 붙으면서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 듯이 하고 있었는데 〈청론(淸論)을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희량도 사론을 칭탁하여 잘난 체하였으니 희분과는 조금 달랐다. 윤승훈(尹承勳)·허성(許筬) 등 문하의 명사들이 다 그를 허여하여 호를 청척리(淸戚里)라고 하였는데 실은 모두가 탁란(濁亂)을 야기시키는 장본인들이었다. 그러나 왕은 유희분처럼 그를 대우하지는 않았다. 】
- 【태백산사고본】 9책 9권 96장 A면【국편영인본】 31책 493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원문
○有政。以鄭殼 爲平山府使【 殼 壬寅年間爲臺諫, 攻成渾甚力, 指以嘯聚黨類, 自中亦有非之者, 乃以文短失語避嫌。】, 李貴爲肅川府使【貴狂讜愚直, 能尊師李珥、成渾, 痛二人之被誣, 上章分疏, 非一非再。 至於鄭仁弘爲大憲時, 貴乃上疏, 直斥其過惡, 無所顧藉, 人以疏魔目之。 且當國事, 有見輒言, 凡居官莅職, 奉法不撓, 不顧利害, 不畏强禦, 唐突果敢, 徑情直行。 以此爲世謗囮, 到處見敗。】, 閔德男爲司諫【德男爲人凡庸, 永慶時, 長在淸班, 及今依附希奮, 時望尤重, 人以爲怪。】, 柳慶宗爲執義【慶宗 時 前爲諫官, 欲論許浚之事, 爲金大來等所斥, 至是復入淸路。】, 柳希奮爲吏曹參判【自永慶時, 常在淸班, 及上卽位, 權勢隆赫。 然鄭昌衍方秉銓, 各有黨與, 希奮屢辭名宦, 至是爲亞銓, 亦不復辭, (權皆歸焉。) 大抵王卽位後, 銓曹爲昌衍父子、希奮兄弟迭相授受之地, 王兩容之, (時政可知)。】, 吳億齡爲兵曹參判【溫良端潔, 操履無玷。 (平生無麤厲之色、罵詈之聲, 對之令人鄙吝自消。 然而立朝事君, 蔑謇諤之風。) 常雍容規諷, 不肯面折廷爭, 雖士論携貳, 長保淸名。 只嘗 末年見忤爾瞻, 出爲開城留守 (暫按海西而已。 未免循默巽懶、持祿苟容之譏, 惜哉!)】, 崔晛爲持平, 柳希亮爲典籍【希奮之弟也。 出身未幾, 歷翰苑說書、正言, 旋拜銓郞, 時人汲汲薦引, 以諂付戚里, 猶恐不及, (淸論掃地盡矣。) 希亮又託士論以自高, 稍與希奮 異。 如尹承勳、許筬等門下名士, 皆許之, 號爲淸戚里, 其實同歸濁亂而已。 然王待之不及希奮。】
- 【태백산사고본】 9책 9권 96장 A면【국편영인본】 31책 493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광해군일기[중초본]25권, 광해 2년 2월 8일 갑인 6/7 기사 / 1610년 명 만력(萬曆) 38년
정각·이귀·민덕남·유경종·유희분·오억령·최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국역
정각(鄭殼)을 평산 부사(平山府使)로, 【정각은 임인년에 대간이 되어 힘을 다해서 성혼(成渾)을 공격하고 당여(黨與)를 모아 들인다고 지적하였는데 자기편 사람 중에서도 그를 그르게 여기는 자가 있자 글이 짧아 실언을 하였다는 이유로 피혐하였다. 】 이귀(李貴)를 숙천 부사(肅川府使)로, 【이귀는 뜻이 크고 말이 곧았으며 성질이 우직했다. 이이와 성혼을 스승으로 높이고 이 두 사람이 무함당한 것을 분하게 여겨 글을 올려 분소(分疏)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인홍이 대사헌이 되었을 때 이귀가 소를 올려 인홍의 잘못과 악행을 곧바로 지척하여 조금도 돌아보는 바 없이 하니 사람들이 그를 소마(疏魔)로 지목하였다. 또 나라일을 담당하면서 견해가 있으면 말을 하였으며, 공무를 수행할 때는 법을 받들어 흔들리지 않았고 이해를 돌아보지 않았으며, 강포한 무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돌하고 과감하며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감정대로 행동하였다. 이 때문에 세상의 비방을 사서 가는 곳마다 낭패를 보았다. 】 민덕남(閔德男)을 사간으로, 【덕남의 사람됨은 용렬한데 유영경 때는 오랫동안 청반(淸班)에 있었고 지금은 유희분에게 빌붙어 시망(時望)이 더욱 중해졌다. 】 유경종(柳慶宗)을 집의로, 【유경종은 전에 간관이 되었을 때 허준(許浚)의 일을 논하려 하다가 김대래(金大來) 등에게 배척당하였는데 이번에 다시 청반의 대열에 들게 되었다. 】 유희분(柳希奮)을 이조 참판으로, 【유영경 때부터 늘 청반에 있었는데 상이 즉위하자 그 권세가 막강해졌다. 그러나 정창연(鄭昌衍)이 전조(銓曹)의 장이고, 각각 당여를 두고 있으므로 희분이 누차 요직을 사양해 오다가 이때에 이르러 아전(亞銓)이 되자 다시 사양하지 않으니, 〈권세가 다 그 사람에게로 돌아 갔다.〉 대저 왕이 즉위한 뒤에 전조는 정창연 부자와 유희분 형제가 서로 주고받는 자리가 되었으나 왕이 둘 다 용인해 주었으니 〈시정을 알 만하다.〉 . 】 오억령(吳億齡)을 병조 참판으로, 【사람됨이 온화하고 단정하며 지조와 행실에 오점이 없었다. 〈평소 거칠고 사나운 얼굴빛과 욕하고 꾸짖는 소리가 없어 그를 대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야비한 마음과 인색한 마음이 저절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항상 부드러운 말씨로 경계하였으며 면전에서 거절하거나 조정에서 다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비록 사론이 둘로 갈라졌어도 늘 청아한 명망을 보존하고 있었다. 말년에는 이이첨에게 거슬림을 당하여 개성 유수가 되어 〈잠시 해서(海西)를 안찰한 적이 있었다. 나중에는 늑장을 부리며 잠자코 따르기만 하고 관록을 유지하기 위하여 비굴하게 굴었다는 기롱을 면치 못했으니 애석하다.〉 】 최현(崔晛)을 지평으로, 유희량(柳希亮)을 전적으로 삼았다. 【유희량은 유희분의 아우이다. 출신(出身)이 된 지 얼마 후에 한림원의 설서와 정언을 거쳐 곧바로 전랑(銓郞)이 되니 그때 사람들이 서둘러 천거하고 이끌어서 아첨으로 척리(戚里)에 붙으면서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 듯이 하고 있었는데 〈청론(淸論)을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희량도 사론을 칭탁하여 잘난 체하였으니 희분과는 조금 달랐다. 윤승훈(尹承勳)·허성(許筬) 등 문하의 명사들이 다 그를 허여하여 호를 청척리(淸戚里)라고 하였는데 실은 모두가 탁란(濁亂)을 야기시키는 장본인들이었다. 그러나 왕은 유희분처럼 그를 대우하지는 않았다. 】
- 【태백산사고본】 9책 9권 96장 A면【국편영인본】 31책 493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원문
○有政。以鄭殼 爲平山府使【 殼 壬寅年間爲臺諫, 攻成渾甚力, 指以嘯聚黨類, 自中亦有非之者, 乃以文短失語避嫌。】, 李貴爲肅川府使【貴狂讜愚直, 能尊師李珥、成渾, 痛二人之被誣, 上章分疏, 非一非再。 至於鄭仁弘爲大憲時, 貴乃上疏, 直斥其過惡, 無所顧藉, 人以疏魔目之。 且當國事, 有見輒言, 凡居官莅職, 奉法不撓, 不顧利害, 不畏强禦, 唐突果敢, 徑情直行。 以此爲世謗囮, 到處見敗。】, 閔德男爲司諫【德男爲人凡庸, 永慶時, 長在淸班, 及今依附希奮, 時望尤重, 人以爲怪。】, 柳慶宗爲執義【慶宗 時 前爲諫官, 欲論許浚之事, 爲金大來等所斥, 至是復入淸路。】, 柳希奮爲吏曹參判【自永慶時, 常在淸班, 及上卽位, 權勢隆赫。 然鄭昌衍方秉銓, 各有黨與, 希奮屢辭名宦, 至是爲亞銓, 亦不復辭, (權皆歸焉。) 大抵王卽位後, 銓曹爲昌衍父子、希奮兄弟迭相授受之地, 王兩容之, (時政可知)。】, 吳億齡爲兵曹參判【溫良端潔, 操履無玷。 (平生無麤厲之色、罵詈之聲, 對之令人鄙吝自消。 然而立朝事君, 蔑謇諤之風。) 常雍容規諷, 不肯面折廷爭, 雖士論携貳, 長保淸名。 只嘗 末年見忤爾瞻, 出爲開城留守 (暫按海西而已。 未免循默巽懶、持祿苟容之譏, 惜哉!)】, 崔晛爲持平, 柳希亮爲典籍【希奮之弟也。 出身未幾, 歷翰苑說書、正言, 旋拜銓郞, 時人汲汲薦引, 以諂付戚里, 猶恐不及, (淸論掃地盡矣。) 希亮又託士論以自高, 稍與希奮 異。 如尹承勳、許筬等門下名士, 皆許之, 號爲淸戚里, 其實同歸濁亂而已。 然王待之不及希奮。】
- 【태백산사고본】 9책 9권 96장 A면【국편영인본】 31책 493면
- 【분류】인사-임면(任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