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수정실록27권, 선조 26년 2월 1일 병술 6/15 기사 /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제독 이여송이 도로 평양에 머물다
국역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도로 평양에 머물렀다.
제독이 오래도록 개성에 머물면서 군량이 떨어져 가는데도 전진할 생각은 없이 자주 사람을 경략(經略)에게 보냈는데, 이는 대개 전일의 화의(和議)를 계속해 보려는 것이었다. 때마침 와언(訛言)이 있어 ‘적장 청정이 장차 안변에서 서쪽으로 평양을 침범하려 한다.’ 하자 제독은 이를 인하여 큰소리치기를,
"돌아가 평양을 구제하려 한다."
하고는 드디어 군사를 인솔하여 서쪽으로 돌아가고 왕필적(王必迪)을 개성에 머물려 두었다.
이때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이 고양(高陽)의 행주(幸州)에 진주(進住)하고, 이빈(李薲)은 파주(坡州)에, 고언백(高彦伯)과 이시언(李時言)은 해유령(蟹踰嶺)에, 김명원(金命元)은 임진(臨津)에 있었다. 제독이 접반사(接伴使) 이덕형(李德馨)에게 말하기를,
"조선의 군사는 형세가 고단하고 원군(援軍)이 없으니, 다 강북(江北)으로 돌아가 적의 공격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였다. 유성룡이 종사관(從事官) 신경진(辛慶晉)으로 하여금 달려가 제독을 보고 퇴군(退軍)해서는 아니될 다섯 가지의 이유를 진술하게 하였으니, 그것은 첫째, 선왕(先王)의 묘소가 모두 기전(畿甸)에 있어 적의 소굴 속에 빠져 있으니 차마 버리고 갈 수 없고, 둘째, 경기 이남의 유민(遺民)들이 날마다 왕사(王師)를 바라고 있는데, 물러갔다는 소식을 갑자기 들으면 기대할 데가 없어져 서로들 적에게 돌아갈 것이고, 셋째, 우리 나라 국토는 한 치라도 쉽게 버릴 수 없는 것이고, 넷째, 우리 나라의 장사(將士)가 힘은 약하지만 바야흐로 의지하여 함께 전진할 것을 도모하려고 하고 있는데 철수해 후퇴하라는 명령을 한번 들으면 필시 모두가 분하여 흩어질 것이고, 다섯째, 한번 후퇴하여 적이 그 뒤를 따라 붙으면 임진강 이북이라 하더라도 보전할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제독은 아무 말없이 떠나버렸다.
원문
○提督李如松還住平壤。 提督久留開城, 糧運垂乏, 無意進取, 數使人經略, 蓋尋前日和議也。 適有訛言: "賊將淸正將自安邊, 西犯平壤。" 提督因此聲言: "欲還救平壤。" 遂擧軍西還, 留王必迪于開城。 是時, 全羅巡察使權慄進住高陽 幸州, 李薲在坡州, 高彦伯、李時言在蟹踰嶺, 金命元在臨津。 提督謂接伴使李德馨曰: "朝鮮之軍勢孤無援, 宜悉還江北, 毋爲賊所乘。" 柳成龍使從事官辛慶晋, 馳見提督, 陳不可退軍者五, 先王墳墓, 皆在畿甸, 淪於賊藪, 不忍棄去, 一也。 京畿以南遺民, 日望王師, 忽聞退去, 無復固志, 相率而歸賊, 二也。 我國境土尺寸, 不可容易棄之, 三也。 我國將士雖力弱, 方欲倚仗, 共圖進取, 一聞撤退之令, 必皆怨憤離散, 四也。 一退而賊乘其後, 則雖臨津以北, 亦不可保, 五也。 提督默然而去。
선조 26년 (1593) 2월 1일
- 상이 정주에 머물다
- 중외의 군병에게 조총을 익히게 하고 과거에서도 조총에 능한 자를 뽑게 하다
- 요동 도사가 배로 운반해 온 군량이 관서에 이르다
- 북로의 관령에 대한 방비를 하지 않은 정희현을 삭직하고 결장하다
- 신흠을 이조 좌랑으로 삼다
- 제독 이여송이 도로 평양에 머물다
- 적장 청정이 안변에서 철군하여 경성에 돌아오다
- 전라도 순찰사 권율이 적병을 행주에서 격파하다
- 권율의 품계를 자헌으로 올리고 무장 조경 등에게 차등 있게 직책을 주다
- 관군의 공격으로 기세가 꺾인 적을 치고자 하였으나 제독이 따르지 않다
- 굶주려서 죽은 경기 사민의 시체가 길에 쌓이다
- 소모사 변이중이 죽산의 적둔을 공격하다가 크게 패하다
- 감군 산서포정사 우포정 한취선과 주유한이 연달아 나오다
- 세자와 중궁을 두고 정주에서 숙천부를 거쳐 영유현으로 이주하다
- 경력 송응창이 의주에 나왔다가 안주에 진주하니 제독이 와서 일을 의논하다
선조수정실록27권, 선조 26년 2월 1일 병술 6/15 기사 /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제독 이여송이 도로 평양에 머물다
국역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도로 평양에 머물렀다.
제독이 오래도록 개성에 머물면서 군량이 떨어져 가는데도 전진할 생각은 없이 자주 사람을 경략(經略)에게 보냈는데, 이는 대개 전일의 화의(和議)를 계속해 보려는 것이었다. 때마침 와언(訛言)이 있어 ‘적장 청정이 장차 안변에서 서쪽으로 평양을 침범하려 한다.’ 하자 제독은 이를 인하여 큰소리치기를,
"돌아가 평양을 구제하려 한다."
하고는 드디어 군사를 인솔하여 서쪽으로 돌아가고 왕필적(王必迪)을 개성에 머물려 두었다.
이때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이 고양(高陽)의 행주(幸州)에 진주(進住)하고, 이빈(李薲)은 파주(坡州)에, 고언백(高彦伯)과 이시언(李時言)은 해유령(蟹踰嶺)에, 김명원(金命元)은 임진(臨津)에 있었다. 제독이 접반사(接伴使) 이덕형(李德馨)에게 말하기를,
"조선의 군사는 형세가 고단하고 원군(援軍)이 없으니, 다 강북(江北)으로 돌아가 적의 공격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였다. 유성룡이 종사관(從事官) 신경진(辛慶晉)으로 하여금 달려가 제독을 보고 퇴군(退軍)해서는 아니될 다섯 가지의 이유를 진술하게 하였으니, 그것은 첫째, 선왕(先王)의 묘소가 모두 기전(畿甸)에 있어 적의 소굴 속에 빠져 있으니 차마 버리고 갈 수 없고, 둘째, 경기 이남의 유민(遺民)들이 날마다 왕사(王師)를 바라고 있는데, 물러갔다는 소식을 갑자기 들으면 기대할 데가 없어져 서로들 적에게 돌아갈 것이고, 셋째, 우리 나라 국토는 한 치라도 쉽게 버릴 수 없는 것이고, 넷째, 우리 나라의 장사(將士)가 힘은 약하지만 바야흐로 의지하여 함께 전진할 것을 도모하려고 하고 있는데 철수해 후퇴하라는 명령을 한번 들으면 필시 모두가 분하여 흩어질 것이고, 다섯째, 한번 후퇴하여 적이 그 뒤를 따라 붙으면 임진강 이북이라 하더라도 보전할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제독은 아무 말없이 떠나버렸다.
원문
○提督李如松還住平壤。 提督久留開城, 糧運垂乏, 無意進取, 數使人經略, 蓋尋前日和議也。 適有訛言: "賊將淸正將自安邊, 西犯平壤。" 提督因此聲言: "欲還救平壤。" 遂擧軍西還, 留王必迪于開城。 是時, 全羅巡察使權慄進住高陽 幸州, 李薲在坡州, 高彦伯、李時言在蟹踰嶺, 金命元在臨津。 提督謂接伴使李德馨曰: "朝鮮之軍勢孤無援, 宜悉還江北, 毋爲賊所乘。" 柳成龍使從事官辛慶晋, 馳見提督, 陳不可退軍者五, 先王墳墓, 皆在畿甸, 淪於賊藪, 不忍棄去, 一也。 京畿以南遺民, 日望王師, 忽聞退去, 無復固志, 相率而歸賊, 二也。 我國境土尺寸, 不可容易棄之, 三也。 我國將士雖力弱, 方欲倚仗, 共圖進取, 一聞撤退之令, 必皆怨憤離散, 四也。 一退而賊乘其後, 則雖臨津以北, 亦不可保, 五也。 提督默然而去。
원본
선조 26년 (1593) 2월 1일
- 상이 정주에 머물다
- 중외의 군병에게 조총을 익히게 하고 과거에서도 조총에 능한 자를 뽑게 하다
- 요동 도사가 배로 운반해 온 군량이 관서에 이르다
- 북로의 관령에 대한 방비를 하지 않은 정희현을 삭직하고 결장하다
- 신흠을 이조 좌랑으로 삼다
- 제독 이여송이 도로 평양에 머물다
- 적장 청정이 안변에서 철군하여 경성에 돌아오다
- 전라도 순찰사 권율이 적병을 행주에서 격파하다
- 권율의 품계를 자헌으로 올리고 무장 조경 등에게 차등 있게 직책을 주다
- 관군의 공격으로 기세가 꺾인 적을 치고자 하였으나 제독이 따르지 않다
- 굶주려서 죽은 경기 사민의 시체가 길에 쌓이다
- 소모사 변이중이 죽산의 적둔을 공격하다가 크게 패하다
- 감군 산서포정사 우포정 한취선과 주유한이 연달아 나오다
- 세자와 중궁을 두고 정주에서 숙천부를 거쳐 영유현으로 이주하다
- 경력 송응창이 의주에 나왔다가 안주에 진주하니 제독이 와서 일을 의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