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201권, 선조 39년 7월 22일 기축 3/4 기사 / 1606년 명 만력(萬曆) 34년
원접사와 반송사의 일기에 관해 연릉 부원군 이호민이 아뢰다
국역
연릉 부원군(延陵府院君) 이호민(李好閔)이 아뢰기를,
"전부터 원접사(遠接使)와 반송사(伴送使)의 일기는 일행의 종사관 1명을 뽑아서 맡아 수정하게 한 것이 통례입니다. 임인년에 신이 과분하게 원접사가 되었을 때에도 종사관 허균(許筠)을 뽑아 수정하게 하였는데, 복명(復命)한지 얼마 안 되어 허균이 문사 낭청(問事郞廳)으로 몇 달 동안 국청(鞫廳)에 참가하였기에 탈고(脫稿)할 여가가 없었습니다. 그때에 신이 마침 경연에 입시하여 삼가 ‘원접사와 반송사의 일기가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다.’라는 분부를 받고 그 일을 맡은 종사관이 연이어 문사 낭청에 차출되어 미처 수정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아뢰자, ‘경이 모르고 있을까 싶어서 말하였다. 알고 있으니 빠르고 늦음이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신이 삼가 분부를 듣고 황공하여 물러나와 허균에게 빨리 수정을 완료하라고 독촉하였더니, 허균이 왕복길의 일은 한 글자도 기록하지 않고 심지어 날씨의 흐림이나 맑음도 꼬박꼬박 기록하지 않은 채, 단지 신이 날마다 올렸던 장계의 초안을 가지고 수정해 내려고 하였는데, 그것조차 제때에 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허균이 수정해 놓은 것을 가져다 보았는데 장계의 초안에서 단지 이두(吏讀)만 빼었으므로 문맥이 끊어져 연결되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장계에 실린 일 이외에 기록할 만한 일들이 많이 있었는데도 전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상께 보여드릴 수가 없었으므로 신이 할 수 없이 스스로 초안을 잡았습니다.
장계의 초안에 기록된 것 및 신이 기억하는 것들을 가지고 참작하여 초고를 완성하기까지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그 가운데 꼭 기록해야 할 것이 있는데도 잊어버려 기록하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신이 이미 건망이 들어 주고받은 말이나 듣고 본 일을 눈깜짝할 사이에 잊어버렸고 담당 종사관도 한 마디의 말도 기록한 것이 없으니, 몹시 민망하였습니다. 그래서 일행의 하리(下吏)로 하여금 해조(該曹)가 소장하고 있는 문서를 찾아보라고 하여 소득이 있기를 바랐었는데, 해조의 문서 또한 몹시 소루하였고 기록한 것이 있었어도 찾아내기가 불편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자꾸 세월만 보내게 되어 항상 근심과 고민을 품었었는데, 삼가 원접사 유근(柳根)이 일행의 일기를 제출했다고 들었습니다. 신이 5년이 지난 뒤에도 아직 완성하여 올리지 못하였으니 신이 일을 회피하고 게을리하여 직분을 다하지 못한 것이 죽을 지라도 죄가 남을 것입니다. 신이 처음에는 하료(下僚)를 단속하지 못하여 기록을 빠뜨리는 폐단을 빚었고 끝내는 혼란을 두려워하여 그럭저럭 넘기다가 아직도 끝맺지 못하였으므로 황공하기 그지없어 대죄합니다.
이어 삼가 생각건대, 이미 지나가버린 일은 갈수록 더욱더 희미해집니다. 지금 근거할 만한 자취를 찾아낼 길도 없습니다. 차라리 신이 이미 이루어 놓은 초고에다 빠뜨려진 것은 빼놓고, 남아 있는 것은 기록한다면 비록 매우 소략하고 미비하지만 또한 대강을 추고(追考)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초고에 따라 일행의 담당 서사인(書寫人) 이해룡(李海龍)·송효남(宋孝男)·이자관(李自寬)으로 하여금 빠른 시일 안에 정서하고 제본하여 올리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윤허한다.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원문
○延陵府院君 李好閔啓曰: "自前遠接、伴送使日記, 差一行從事官一員, 使之次知修正, 例也。 壬寅年, 臣忝冒遠接使時, 亦差從官許筠, 使之修正, 而復命未久, 許筠, 以問事郞廳, 連月參鞫, 無暇脫稿。 伊時, 臣適入侍經筵伏承遠接、伴送, 當有《日記》之敎, 以次知從事官, 連差問事郞廳, 未及修正之意啓達, 則上敎以爲: ‘慮卿不知, 故言之。 旣知之則早晩何關乎?’ 臣謹聞命, 惶恐而退, 促許筠撰完, 則筠於道路往來之間, 一事一字不爲修錄, 至於日之陰晴, 亦不課記, 只取臣之所爲逐日狀啓草, 將爲點化, 而亦不趁時爲之。 臣取筠所已點化者, 見之則就狀啓草, 只去吏讀, 非但文字間, 斷不成倫緖, 狀啓之外, 亦有許多可錄之事, 而全然闕之。 不可以此, 上塵睿覽, 臣不得已自爲出草, 將狀啓草所記及臣所得省錄者, 參酌成稿, 積有年歲, 而其中亦有不可不錄, 而迷忘不可記者。 臣旣健忘, 凡言語聞見, 轉眄昏失, 而次知從事, 亦無一言之記, 不勝絶悶。 使一行下吏, 尋討該曹所(莊)〔藏〕 文書, 冀有所得, 而該曹文書, 亦極踈漏, 雖有所記, 亦不便討得。 以此, 卒卒年歲, 恒懷憂悶而已。 伏聞, 遠接使柳根已爲投進一行《日記》云。 臣於五年之後, 尙未完進, 臣之逋慢不職之狀, 死有餘辜。 臣始之不能檢飭下僚, 致有闕錄之弊; 終之畏亂因循, 尙無處置, 不勝惶恐待罪。 仍竊惟念, 凡已往之事, 愈往愈迷。 今無尋討可据之迹, 寧就臣已成草稿, 若闕者闕之; 所存者錄之, 則雖甚疏缺, 亦可追考梗槪。 請依此稿, 令一行次知書字人李海龍、宋孝男、李自寬, 尅日繕寫, 粧䌙投進何如?" 答曰: "允。 勿待罪。"
선조실록201권, 선조 39년 7월 22일 기축 3/4 기사 / 1606년 명 만력(萬曆) 34년
원접사와 반송사의 일기에 관해 연릉 부원군 이호민이 아뢰다
국역
연릉 부원군(延陵府院君) 이호민(李好閔)이 아뢰기를,
"전부터 원접사(遠接使)와 반송사(伴送使)의 일기는 일행의 종사관 1명을 뽑아서 맡아 수정하게 한 것이 통례입니다. 임인년에 신이 과분하게 원접사가 되었을 때에도 종사관 허균(許筠)을 뽑아 수정하게 하였는데, 복명(復命)한지 얼마 안 되어 허균이 문사 낭청(問事郞廳)으로 몇 달 동안 국청(鞫廳)에 참가하였기에 탈고(脫稿)할 여가가 없었습니다. 그때에 신이 마침 경연에 입시하여 삼가 ‘원접사와 반송사의 일기가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다.’라는 분부를 받고 그 일을 맡은 종사관이 연이어 문사 낭청에 차출되어 미처 수정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아뢰자, ‘경이 모르고 있을까 싶어서 말하였다. 알고 있으니 빠르고 늦음이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신이 삼가 분부를 듣고 황공하여 물러나와 허균에게 빨리 수정을 완료하라고 독촉하였더니, 허균이 왕복길의 일은 한 글자도 기록하지 않고 심지어 날씨의 흐림이나 맑음도 꼬박꼬박 기록하지 않은 채, 단지 신이 날마다 올렸던 장계의 초안을 가지고 수정해 내려고 하였는데, 그것조차 제때에 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허균이 수정해 놓은 것을 가져다 보았는데 장계의 초안에서 단지 이두(吏讀)만 빼었으므로 문맥이 끊어져 연결되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장계에 실린 일 이외에 기록할 만한 일들이 많이 있었는데도 전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상께 보여드릴 수가 없었으므로 신이 할 수 없이 스스로 초안을 잡았습니다.
장계의 초안에 기록된 것 및 신이 기억하는 것들을 가지고 참작하여 초고를 완성하기까지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그 가운데 꼭 기록해야 할 것이 있는데도 잊어버려 기록하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신이 이미 건망이 들어 주고받은 말이나 듣고 본 일을 눈깜짝할 사이에 잊어버렸고 담당 종사관도 한 마디의 말도 기록한 것이 없으니, 몹시 민망하였습니다. 그래서 일행의 하리(下吏)로 하여금 해조(該曹)가 소장하고 있는 문서를 찾아보라고 하여 소득이 있기를 바랐었는데, 해조의 문서 또한 몹시 소루하였고 기록한 것이 있었어도 찾아내기가 불편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자꾸 세월만 보내게 되어 항상 근심과 고민을 품었었는데, 삼가 원접사 유근(柳根)이 일행의 일기를 제출했다고 들었습니다. 신이 5년이 지난 뒤에도 아직 완성하여 올리지 못하였으니 신이 일을 회피하고 게을리하여 직분을 다하지 못한 것이 죽을 지라도 죄가 남을 것입니다. 신이 처음에는 하료(下僚)를 단속하지 못하여 기록을 빠뜨리는 폐단을 빚었고 끝내는 혼란을 두려워하여 그럭저럭 넘기다가 아직도 끝맺지 못하였으므로 황공하기 그지없어 대죄합니다.
이어 삼가 생각건대, 이미 지나가버린 일은 갈수록 더욱더 희미해집니다. 지금 근거할 만한 자취를 찾아낼 길도 없습니다. 차라리 신이 이미 이루어 놓은 초고에다 빠뜨려진 것은 빼놓고, 남아 있는 것은 기록한다면 비록 매우 소략하고 미비하지만 또한 대강을 추고(追考)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초고에 따라 일행의 담당 서사인(書寫人) 이해룡(李海龍)·송효남(宋孝男)·이자관(李自寬)으로 하여금 빠른 시일 안에 정서하고 제본하여 올리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윤허한다.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원문
○延陵府院君 李好閔啓曰: "自前遠接、伴送使日記, 差一行從事官一員, 使之次知修正, 例也。 壬寅年, 臣忝冒遠接使時, 亦差從官許筠, 使之修正, 而復命未久, 許筠, 以問事郞廳, 連月參鞫, 無暇脫稿。 伊時, 臣適入侍經筵伏承遠接、伴送, 當有《日記》之敎, 以次知從事官, 連差問事郞廳, 未及修正之意啓達, 則上敎以爲: ‘慮卿不知, 故言之。 旣知之則早晩何關乎?’ 臣謹聞命, 惶恐而退, 促許筠撰完, 則筠於道路往來之間, 一事一字不爲修錄, 至於日之陰晴, 亦不課記, 只取臣之所爲逐日狀啓草, 將爲點化, 而亦不趁時爲之。 臣取筠所已點化者, 見之則就狀啓草, 只去吏讀, 非但文字間, 斷不成倫緖, 狀啓之外, 亦有許多可錄之事, 而全然闕之。 不可以此, 上塵睿覽, 臣不得已自爲出草, 將狀啓草所記及臣所得省錄者, 參酌成稿, 積有年歲, 而其中亦有不可不錄, 而迷忘不可記者。 臣旣健忘, 凡言語聞見, 轉眄昏失, 而次知從事, 亦無一言之記, 不勝絶悶。 使一行下吏, 尋討該曹所(莊)〔藏〕 文書, 冀有所得, 而該曹文書, 亦極踈漏, 雖有所記, 亦不便討得。 以此, 卒卒年歲, 恒懷憂悶而已。 伏聞, 遠接使柳根已爲投進一行《日記》云。 臣於五年之後, 尙未完進, 臣之逋慢不職之狀, 死有餘辜。 臣始之不能檢飭下僚, 致有闕錄之弊; 終之畏亂因循, 尙無處置, 不勝惶恐待罪。 仍竊惟念, 凡已往之事, 愈往愈迷。 今無尋討可据之迹, 寧就臣已成草稿, 若闕者闕之; 所存者錄之, 則雖甚疏缺, 亦可追考梗槪。 請依此稿, 令一行次知書字人李海龍、宋孝男、李自寬, 尅日繕寫, 粧䌙投進何如?" 答曰: "允。 勿待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