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171권, 선조 37년 2월 20일 신축 3/6 기사 / 1604년 명 만력(萬曆) 32년
별전에서 이덕형·이항복·윤승훈·유영경 등과 녹훈 문제를 토론하다
국역
임금이 별전(別殿)에서 영의정 이덕형, 오성 부원군 이항복, 좌의정 윤승훈, 우의정 유영경 등 대신(大臣)을 인견하였는데 승지(承旨) 윤휘(尹暈), 기사관(記事官) 이호신(李好信)·정호관(丁好寬)·오익(吳翊)이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병 때문에 오래 접견하지 못하였다."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근래 성후(聖候)가 오래 회복되지 않아 천안(天顔)을 우러러 뵙지 못하였으니 뭇 신하들의 안타까운 염려가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날씨가 음산하고 바람이 차가운데 조섭을 잘하지 못하면 혹 다치는 일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내의원 제조(內醫院提調)가 문안하는 일과 약을 의논하는 일은 밖에서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만, 약을 자주 바꾸면 진기(眞氣)를 손상시키게 될까 염려됩니다. 옛사람이 ‘병은 활물(活物)인 중심(中心)의 변화에서 오는 것이므로 중심이 답답하면 이로 인하여 혹 병이 생기기도 한다.’ 하였고, 손진인(孫眞人)은 ‘고의(古醫)는 마음을 다스렸으나 속의(俗醫)는 병을 다스린다. 그러므로 명의(名醫)가 병을 고침에 있어서는 심중(心中)의 사려(私慮)를 일체 다 없앤 뒤에 내 심지(心智)의 생각과 합치되게 하므로 약을 입에 넣지 않더라도 병이 나을 수 있다.’ 하였고, 성인(聖人)은 ‘삼가야 할 것은 병이다.’ 하였고, 주자(朱子)는 ‘본심을 간직하고 본성을 배양하는 것이 병을 고치는 요체이다.’ 하였습니다. 지금 위에서는 번거로운 만기(萬機)에 수작(酬酢)하고 응변(應變)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다 의관(醫官)도 자주 입시하지 못하여 약을 바꾸는 것만으로 잡되게 치료하고 있으니, 구구하고 민망한 마음 죄다 아뢸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중사(中使)를 시켜 공신 단자(功臣單子)를 내어 보이고 이르기를,
"당초에 청병(請兵)한 사람은 끼지 못하였고 뒤에 청병한 사람은 참여하였는데, 당초는 신점(申點)이고 뒤는 정기원(鄭期遠)인가? 최흥원(崔興源)은 어찌하여 삭제하였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당초 대가(大駕)가 도성(都城)을 나갈 때 최흥원은 명을 받들고 나갔으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호종(扈從)한 유(類)가 아니기 때문에 참여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억기(李億祺)도 감하(減下)하였는데, 이는 어찌하여 감하하였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지난해 비망기(備忘記)에 전교하신 말씀이 있었고 또 대간(臺諫)의 계사로 인하여 이억기는 들지 못하였습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이것도 온당하지 못하다."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대개 이 공신은 신축년021) 에 이항복(李恒福)이 정승으로 있을 때 정곤수(鄭崑壽)와 함께 거의 다 마감한 것인데 지난해 대간의 계사가 있어서 이제까지 마련하지 못하였으니, 매우 미안합니다. 이 가운데에서 부황(付黃)022) 한 곳도 그대로 둔 것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체로 이 일에 대해 어찌 공론이 없겠는가. 이쯤에서 빨리 마감하라."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성종조(成宗朝)에서도 좌리 공신(佐理功臣)을 마감할 때 위에서 재정(裁定)하신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한때 국가에 봉사하여 공로가 있는 자와 없는 자에 대해서 이미 예감(睿鑑)에 비추어 알고 계실 것이니, 어찌 조금이라도 속일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도 위에서 재정하시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여기에 대한 가부를 말하여 누구는 그대로 두고 누구는 줄일 것인지 결단하는 것은 대신이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녹훈하는 일에 대해서는 본디 공론이 있는 것으로, 전에 마감한 것이 반드시 죄다 지극히 공정하여 사사로움이 없는 데에서 나왔다고 할 수 없으므로 대간의 논계(論啓)와 국인(國人)의 비평이 어지러이 일어나 정해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내 위에서 가부를 재정하라고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대신의 책임을 다한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덕형이 말을 잘못한 것이 심하다. 】 윤승훈이 아뢰기를,
"근래 상후(上候)가 오랫동안 조섭중에 계시므로 경연(經筵)을 열지 못하여 청광(淸光)을 우러러 뵙지 못한 지 이미 반년이 되었으니, 뭇 신하들의 안타깝고 절박한 심정을 어찌 다 아뢸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젊어서부터 병이 많았는데 더구나 이제는 노쇠하였으니 어찌 병이 없겠는가. 또 평소에 담음증(痰飮症)이 있어왔는데 이 증세가 발하면 수삼일간 죽(粥)을 먹고 조리해야 낫는다. 이제는 이미 고질이 되었다."
하였다. 윤승훈이 아뢰기를,
"최흥원은 당초 임진년 4월 26일∼27 사이에 황해도 순찰사(黃海道巡察使)로 나갔다가 중도에서 대가를 맞이하였는데, 대간의 계사에 ‘하루 이틀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모두 참입(參入)시킬 수 없다.’ 하였습니다. 최흥원은 그때 마침 명을 받고 나갔다가 미처 호종하지 못하였습니다. 서울에 있었다면 어찌 대가를 수행하지 않았겠습니까. 이원익(李元翼)도 당초 평안도 순찰사로 미리 나갔었는데 그때 또한 힘쓴 공로가 많이 있었고, 이덕형도 당초 적진(賊陣)에 갔었으므로 대가를 수행하지 못하였다가 뒤미처 평양(平壤)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문에 다들 참입하지 못하였습니다만 자신들의 사사로운 일 때문이 아니었으니 소신(小臣)은 매우 온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대간의 계사도 이들을 모록(冒錄)이라 여겨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당초 ‘종시호종(終始扈從)’이라 명칭하였으므로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익운(翊運)’이라 명칭하였으니, 어찌 참입할 수 없을 리가 있겠습니까. 이는 신의 생각이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매우 온당치 못하다. 이억기·김시민(金時敏)·이정암(李廷馣)의 일도 온당하지 못하다. 대개 종시호종이라 이름하였으므로 이런 의논이 제기되어 그런 것이지만, 이정암 등을 어찌 삭제할 수 있겠는가. 이 일은 절로 공론이 있을 것이니, 반드시 모두 공론에 따라 이쯤에서 빨리 정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정암은 일개 서생(書生)으로서 연안(廷安)의 외로운 한 성을 지키면서 날로 증가되는 백만의 적을 항복시키고 관서(關西)·해서(海西)의 진로를 차단하여 마침내 서로(西路)를 열었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누구의 공인가. 공론으로 말하면 이정암의 공이 제신(諸臣)과 군장(群將) 중에서 으뜸인데, 이제 호종이 아니라 지칭하여 삭제하고 논하지 않았다. 대저 녹훈이란 공로를 보답하기 위한 법인데 정암처럼 세상에 드문 공로가 있는 자는 도리어 훈적(勳籍)에서 제외되고 성을 버리고 목숨을 건진 무리와 가노(家奴)·시역(廝役)같은 천한 자들을 공신(功臣)의 명부에 나열시켰으니, 이것이 과연 공론이겠는가. 통탄스럽다. 】 이덕형이 아뢰기를,
"위의 분부가 마땅합니다. 또 무장(武將)들은 대진(對陣)하여 적봉(賊鋒)을 꺾은 일이 없더라도 대저 지금까지 10여 년 동안 근로한 공이 있으니, 삭제할 만한 사람은 삭제하되 그 가운데에서 뛰어난 자는 그대로 두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삭제하려는 자는 누구인가?"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편비(褊裨)와 주장(主將)은 차이가 있으니, 편비 중에는 의논하여 삭제시킬 만한 자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누구인가?"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김응함(金應緘)·김태허(金太虛)·이수일(李守一) 등을 빼야 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왕자(王子) 등 젊은 무리에게 무슨 공로가 있는가. 전일에도 여러번 일렀지만 지금 또 바로 말하겠는데 나는 다른 뜻이 없다. 장사(將士)는 하루의 공로가 있더라도 참여시킬 수 있으면 참여시키는 것이 옳은데 이들은 참여시키지 않고, 왕자를 참여시키는 것은 매우 미안하다. 장사는 적봉을 꺾은 공로가 없더라도 장사는 참여될 수 있으나 왕자는 참여될 수 없다."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임금께서는 반드시 ‘신료(臣僚)들이 나라 일이 황급할 때에 혹 임금을 위하여 말고삐를 잡은 노고가 있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녹공(錄功)은 실로 성상께서 공로를 보답하시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아랫사람에 있어서 무슨 기록될 만한 공로가 있겠습니까. 중국의 허다한 수천만의 군량과 천하의 병마(兵馬)가 함께 만고에 없던 적을 쳐서 옛 강토를 재조(再造)한 것은 모두 성상의 지극한 정성 때문이었습니다. 신의 이 말은 소신만의 말이 아니라 온 나라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예전에 선왕께서 세자였을 때 왕자가 모두 참여되었었는데, 더구나 오늘의 일은 다 성의(聖意)에서 나온 데이겠습니까. 왕자가 참록(參錄)되지 않는다면 여기에 있는 이항복 또한 원훈(元勳)에 들어 있는데 그 또한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전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은 할 수 없다."
하였다. 유영경이 아뢰기를,
"임금의 분부가 지극히 마땅합니다마는 평시 선왕조 때에는 왕자도 다 참여되었습니다. 신의 뜻은 무장(武將)의 녹공은 넓게 두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하고, 윤승훈이 아뢰기를,
"위에서 분부하신 것이 지극히 마땅합니다마는 왕자가 호종하지 않았다면 녹공하지 않더라도 괜찮겠습니다. 그러나 왕자가 이미 호종하였으니 어찌 참여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항복은 아뢰기를,
"외방에 있던 조신(朝臣)도 어찌 뚜렷한 공로가 있었겠습니까. 다만 호종한 한 가지 일로 참여된 자도 있습니다."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오래 전좌(殿坐)하셨으므로 혹 옥후(玉候)에 손상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매우 미안하니 신들이 물러가 계사(啓辭)로 들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참시 머물러 있으라."
하였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지금 남방은 춘신(春汛)이 급박한데 방비에 대한 제반 일이 얼마나 정제(整齊)되었는가? 비변사는 일신(一新)시켜 사변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마땅히 신칙해야겠습니다만 모든 일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사(舟師)도 하삼도(下三道)의 물력(物力)을 다 끌어대어 조처하고 있지만 아직도 여전할 뿐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육지에서 조련(操練)하는 일은 조금 모양을 이루었지만 어찌 이것만을 믿고 급할 때에 쓸 수 있겠습니까."
하고, 유영경은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믿는 것은 주사입니다. 적(賊)이 경상도를 넘어서 먼저 전라도에 이르는 일은 없을 듯하니, 소신의 생각으로는 전라도의 주사를 경상도로 옮겨서 급할 때에 쓸 수 있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이덕형은 아뢰기를,
"그러하기 때문에 경상도의 주사는 병선(兵船) 65척을 장만하였는데 전년에 비하면 많은 듯합니다. 대개 주사는 격군(擊軍)이 일정하지 않으면 적이 오기 전에 먼저 지칩니다. 군사 1천을 양성하면 10척에 승선시킬 수 있고 군사 2천을 배양하면 20척에 승선시킬 수 있고 군사 3천을 배양하면 30척에 승선시킬 수 있는데, 내지(內地) 백성들에게 쌀·베를 거두어 이것으로 군사를 배양하여 늘 머물러 사변에 대비하게 한다면 군사를 배양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본디 군사를 배양하는 본말(本末)을 모르므로 중국군이 물러가자 변경이 드디어 형세가 없게 되었습니다. 전일 이원익(李元翼)이 내려갈 때에 임금께서 ‘변경에는 6천의 군사를 수합(收合)해야 한다. 그러면 절로 양식을 대어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전교하셨으므로, 이원익이 감격하여 힘을 다해 하려고는 하였으나 사세가 용이하지 않아서 마침내 성취하지 못하고 왔습니다. 소신이 그곳에 갔을 때 겨우 1천의 군사를 얻었을 뿐인데 지금도 두서가 잡히지 않고 있으니, 우리 나라가 본디 군사를 배양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만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의주 목사(義州牧使)와 판관(判官)에 대해서는 어찌해야겠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황진(黃璡) 등입니까? 이들은 호종한 유는 아닐지라도 대가가 머물러 있을 때 어찌 공로가 없었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밖의 의논은 빼려 하는가, 그대로 두려 하는가? 이것은 물어보는 말일뿐이다."
하였다. 윤승훈이 아뢰기를,
"황진·권탁(權晫)은 그때 지응(支應)한 공로가 많이 있으므로 다른 지방의 신하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또 대가가 의주에서 환도(還都)하였으니 이것으로 말하면 의주는 근본의 땅인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다른 지방의 신하와는 과연 다르다."
하였다. 유영경이 아뢰기를,
"사알(司謁) 정경신(鄭景信)도 회의하는 곳에 와서 호소하였는데, 그가 하는 말을 들으니, 의주에 호종하였으나 가사알(假司謁)이라 하여 참입되지 못하였으므로 매우 원통하다고 했습니다. 이도 참여시켜야 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사실을 헤아려 참여시키는 것이 옳다."
하였다. 【유영경의 말은 비루하다. 사알은 일개 가노(家奴)로서 분부를 전하는 자일 뿐이다. 한때의 하찮은 노고가 있더라도 명주나 베로 상을 주는 것에 불과할 뿐인데, 어찌 단서 철권(丹書鐵卷)에 수록하고 삽혈 동맹(歃血同盟)하는 사이에 끼게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정경신은 가사알로 말을 전했을 뿐이니 이는 직분상 당연한 것이다. 또한 어찌 그가 호소한 말을 가지고 기록할 것인지 뺄 것인지의 경중을 논할 수 있겠는가. 유영경이 이 일에는 본시 공론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닐 터인데도 감히 면대한 자리에서 버젓이 아뢰었는데, 이것이 어찌 대신이 논할 만한 것이겠는가. 】 유영경이 아뢰기를,
"송언신(宋言愼)은 마련한 가운데에서 빠졌는데, 이 사람도 어찌 공로가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당초에 승전(承傳)한 일이 있으니 이에 따라 부표(付標)하여 들이고 짐작하여 정하는 것이 옳다. 대개 어쩔 수 없는 자 이외에는 그대로 두는 것이 마땅한데, 종시호종이라 하였으므로 공이 있는 자가 부표한 가운데에 들어 있기도 하니, 대신이 헤아려서 조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윤승훈이 아뢰기를,
"해풍군(海豊郡) 부자(父子)를 3등으로 마련하였는데 공론이 다들 3등은 애매하다고 합니다. 해풍군 부자는 묘사(廟社)의 신주를 받들고 가다가 개성부(開城府)에 묻어두려 하였는데, 그때 순녕군(順寧君)이 묘사에 신주를 묻어두는 것은 미안하다 하였으므로 해풍군이 끝내 받들고 갔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도 참입시킬 만하다. 당시 다른 종실(宗室)들은 다 떠나갔었는데 그만이 위험을 피하지 않고 묘사의 신주를 받들고 갔으니, 다른 사람에게 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당하게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신들의 생각으로는, 단자(單子)를 마련할 때 원훈(元勳)과 이미 의논하여 정하였으므로 이제 다른 의견이 없을 듯합니다. 단, 외간에 한 가지 의논이 있는데 당초 창의(倡義)한 자로서 참여될 만한데도 참여되지 않은 자가 있다 합니다. 그는 바로 김천일(金千鎰)인데 그를 위하여 소장을 올린 사람도 있습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김천일은 절의는 포장할 만합니다만 적봉을 꺾은 일은 없습니다. 처음 강화(江華)에 이르러 드디어 서로(西路)를 뚫었으니 이 점에 대해서는 공이 없다고 할 수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신들이 헤아려서 조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유영경이 아뢰기를,
"김천일은 절의를 포장하는 것은 괜찮겠으나 녹훈(錄勳)하는 데 있어서는 괜찮을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이덕형은 아뢰기를,
"홍계남(洪季男)도 수고하기는 하였지만 별로 뚜렷한 공이 없으므로 처음에는 참여되지 않았는데, 외간에서는 다들 다른 사람을 참여시킨다면 이 사람도 참여시키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이외에는 참여될 만한 자가 없는가. 공이 있는 자가 혹 녹공에 들지 못할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는 예외로 하는 말인데 생존자는 승직(陞職)시키기도 하고 사망자는 증직(贈職)시키기도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이는 평소에 생각했던 것이므로 감히 언급한다. 오늘 반드시 마감하여 빨리 정하라."
하였다. 잠시 뒤에 파하였다.
원문
○上〔御〕 別殿, 引見大臣。 領議政李德馨、鰲城府院君 李恒福、左議政尹承勳、右議政柳永慶、承旨尹暉、記事官李好信ㆍ丁好寬ㆍ吳翊入侍。 上曰: "以病久未相見。" 德馨曰: "近來, 聖候久未差復, 不得望見天顔, 群下憫慮, 何可量也? 日氣陰曀, 風勢淒冷, 若不能善調, 恐或有忝傷之事也。 內醫院提調問安及議藥之事, 則自外雖得聞知, 而藥之爲物, 頻數換易, 則恐有損傷眞氣。 古人云: ‘病中, 心爲活物, 若鬱則因或致病。’ 孫眞人云: ‘古醫治心, 俗醫治病。 故名醫之治病, 心中私慮, 一切盡去之後, 在我心智所思者合, 藥雖不入口, 而病可愈矣。 聖人曰: ‘所愼者疾。’ 朱子曰: ‘存心養性, 乃治病之要。’ 今自上萬機之煩, 酬酢應變, 非一事也。 醫官亦未得頻數入侍, 只以換藥而雜治, 區區憫慮之意, 有難盡達矣。" 上命中使, 出示功臣單子曰: "當初請兵之人, 不得爲之, 後頭請兵之人爲之。 當初則乃申點, 而後頭則乃鄭期遠耶? 崔興源, 何以削去乎? 德馨曰: "當初大駕出都城時, 興源奉命出去, 非如終始扈從之類, 故不得參矣。" 上曰: "(李億棋)〔李億祺〕 亦減下。 此則何以減下耶?" 德馨曰: "上年備忘記中, 有傳敎之言, 而且因臺諫 啓辭, 李億祺不得入矣。" 上曰: "此亦未穩。" 德馨曰: "大槪此功臣, 辛丑年李恒福爲政丞時,與鄭崑壽, 幾盡磨勘, 而去年有臺諫啓辭, 至今不得磨鍊, 極爲未安。 此中付黃處, 亦有仍存者矣。" 上曰: "大槪此事, 豈不有公論哉? 在此可以速爲磨勘。" 德馨曰: "在昔 成廟朝, 磨勘佐理功臣時, 自上多有裁定之事, 而其一時宣力有功勞, 可爲與不可爲者, 已在於睿鑑中, 豈有錙銖可逃者乎? 今亦自上裁定, 則似爲便當。" 上曰: "不然。 在此可否, 某留某減, 決斷之事, 大臣爲之可矣。" 【錄勳一事,自有公論, 而曾所磨勘者, 未必盡出於至公無私之道, 致有臺諫之論啓, 國人之譏議, 紛紜未定, 而終至於自上裁定可否, 是果謂大臣之責乎? 甚矣, 德馨之謬言也!】 承勳曰: "近來上候, 久在調攝中, 不爲開筵, 未得望見淸光, 已半年矣。 群情悶迫, 何可盡達!" 上曰: "予自少多病。 況今衰老, 豈無疾病? 且素有痰飮之證, 若遇此證, 則數三日食粥飮調理, 然後乃差。 今則已爲痼疾矣。" 承勳曰: "崔興源, 當初壬辰四月二十六七日間, 爲黃海道巡察使出去, 中路迎駕, 而臺諫啓辭中, 有差池一兩日, 皆不得參入云。 興源其時, 適受命出去, 故未及扈從。 若在京, 則豈不隨駕? 李元翼, 亦當初爲平安道巡察使, 前期出去, 其時亦多有宣力之功勞。 李德馨, 亦當初往于賊陣, 故不得隨駕,追至于平壤。 以此皆不得參入, 非渠私故也。 小臣, 則極以爲未穩。 臺諫啓辭, 亦非以彼人等, 爲冒錄而然也。 當初名曰終始扈從, 故如是爲之, 而今則翊運爲名, 豈有不可參之理乎? 此乃臣之所懷, 故敢達。" 上曰: "最爲未穩也。李億祺、金時敏、李廷馣事, 亦未穩。 大槪名曰終始扈從, 故發此議論而然, 李廷馣等, 何可削去! 此事, 自有公論。 須一從公論, 在此速定可矣。" 【李廷馣, 以一介書生, 守延安一片孤城, 降百萬日滋之賊, 蔽遮關海, 終開西路。 國之不亡, 其誰之功? 若以公論言之, 則廷馣之功, 爲諸臣群將之最, 而今指以爲非扈從, 而削之不論。 夫錄勳, 爲其酬勞賞功之典, 而如廷馣不世之功者, 反外勳籍。 是將棄城偸生之輩, 家奴廝役之賤, 羅列於丹書之府, 是可謂公論乎? 痛哉!】 德馨曰: "上敎允當。 且武將等, 雖無對陣摧鋒之事, 而大抵今至十餘年, 有勤勞之功。 可削之人, 則雖可削去, 而其中表表者, 仍存似當。" 上曰: "所欲減者,誰也?" 德馨曰: "褊裨, 與主將有異。 褊裨中可以議削。" 上曰: "何人?" 德馨曰: "金應鍼、金太虛、李守一等, 似減之。" 上曰: "王子等, 年少輩, 有何功勞乎? 前日亦累言之, 而今且直言之, 予無他意。 將士雖有一日之功勞, 可爲者, 則爲之可矣, 而此等不爲, 王子則爲之, 甚爲未安。 將士雖無摧鋒之功, 將士則可爲, 而王子則不可爲矣。" 德馨曰: "自上。 必以爲臣僚等, 當國事倉黃之際, 或有羈靮之勞, 故今此錄功, 實出於聖上酬勞之意, 而但在下之人, 豈有可錄之功乎? 以天朝許多累千萬軍糧及天下兵馬, 共討千萬古所無之賊, 再造舊土者, 皆由於聖上至誠。 臣之此言, 非小臣之言, 乃擧國之情也。 在昔先王世子之時, 王子不參之, 況今日之事, 皆出聖意。 王子若不參錄, 則李恒福今方在此, 而亦在元勳中, 渠亦安心乎?" 上曰: "前例則未得知之, 而今則不可爲也。"永慶曰: "上敎極爲允當, 而平時, 先王朝王子, 亦皆參之。 但臣意, 則武將之錄, 廣存可也。" 承勳曰: "上敎至當, 而但王子若不扈從, 則雖不爲錄功, 猶之可也, 王子旣已扈從, 寧有不參之理乎?" 恒福曰: "在外朝臣, 亦豈有表表之功勞乎? 只以扈徒一事, 有參之者矣。" 德馨曰: "允爲殿坐, 恐或玉候致傷, 臣等極爲未安。 請退出, 而啓辭以入。" 上曰: "姑且留之。" 上又曰: "卽今南方, 春汛正急。 防備諸事, 幾何整齊乎? 備邊司當一新待變可矣。" 德馨曰: "當爲申飭, 而凡事未易成就。 舟師亦竭盡下三道物力以措, 而時尙如前, 無加減矣。 陸地操鍊之事, 雖暫成形, 豈可以此, 倚以爲緩急之用乎?" 永慶曰: "我國所恃者, 舟師也。 此賊似無越慶尙, 而先到全羅。 小臣之意, 則全羅道舟師, 移於慶尙, 以爲緩急之用, 爲當。" 德馨曰: "如是, 故慶尙舟師, 措備六十五隻。 比之前年, 則似優。 大槪舟師, 擊軍不齊, 賊未來到, 而率先疲殘。 若養兵一千, 則可入十艘, 養兵二千, 則可入二十艘, 養兵三千, 則可入三十艘, 而收合內地人米布, 用此養兵, 恒留待變, 則可以養兵, 而我國本不知養兵本末, 天兵纔退, 而邊上遂爲無形。 前日李元翼下去時, 自上有傳敎, 須於邊上, 收合六千兵, 則自當給糧云, 故元翼感激,雖欲竭力爲之, 而事勢未易, 終不得成就而來矣。 小臣到彼時, 僅得一千兵, 而至今未成頭緖。 我國之本不能養兵,可知矣。" 上曰: "義州牧使、判官, 何以爲之?" 德馨曰: "黃璡等(乎)〔矣〕 。 此人等, 雖非扈從之類, 當大駕留駐時,豈無功勞乎?" 上曰: "然則外論, 欲減之耶? 欲存之耶? 此則第問之之語耳。" 承勳曰:"黃璡、權晫, 其時多有支應之功勞。 與他地方之臣, 有異矣。 且大駕, 自義州還都。 若以此言之, 則似根本之地矣。" 上曰: "與他地方臣, 果異矣。" 永慶曰: "司謁鄭景信, 亦訴於會議處。 聞渠所言,則雖扈從於義州, 而以假司謁, 不得參入, 極爲冤痛云。 此亦似可爲之。" 上曰: "量其事實爲之可矣。" 【陋矣, 永慶之言也! 司謁, 一家奴, 而只令傳言者也。 雖有一時之微勞, 不過賞以紬布而已。 豈可收錄於丹書鐵券, 歃血同盟之間哉? 況鄭景信, 以假司謁, 只傳言語, 是乃職分所爲。 亦豈可以渠之訴言, 爲可錄可減之輕重也? 永慶非不知此事, 自有公論, 而敢於面對之時, 公然開說。 是豈大臣所可論者哉?】 永慶曰: "宋言愼, 出磨鍊中。 此人亦豈無功勞乎?" 上曰: "當初有承傳之事, 緣此付標以入。 斟酌以定可矣。 大槪不得已者外, 仍存爲當。 名曰終始扈從,故有功者, 或入於付標中。 大臣可量處。" 承勳曰: "海豐君父子, 磨鍊三等, 而公論皆以爲三等曖昧云。 海豐君父子,奉廟社主以行, 將埋置於開城府時, 順寧君, 以埋置廟社主爲未安, 故海豐, 終始奉行矣。" 上曰: "此亦可爲。 當其時, 他宗室, 皆不在, 而此獨不避危險, 奉行廟社主, 非他人之可比也。 然至當爲之可矣。" 德馨曰: "臣等之意, 磨鍊單(字)〔子〕 時, 與元勳, 已爲議定, 今無他意, 但以外間, 有一種議論, 謂當初倡義者, 有可爲而不爲者。 此乃金千鎰也。 爲此亦有上章之人。 臣等之意, 千鎰, 節則可, 無摧鋒之事。 但初到江華, 遂通西路。 此則不可謂無功也。" 上曰: "大臣等可量處。" 永慶曰: "千鎰, 褒節則可, 而至於錄勳,則未知其可也。" 德馨曰: "洪季男亦有勤勞, 而別無表表之功, 故初不爲之, 外間皆謂, 若爲他人, 則此人不可不爲云矣。" 上曰: "然則此外亦無可爲者乎? 且有功者, 雖或未入於錄功之中, 若以規外言之, 則生者或升職, 死者或贈職似當。 此乃平日所思之言, 故敢及之。 今日須磨勘速定。" 須臾罷黜。
선조실록171권, 선조 37년 2월 20일 신축 3/6 기사 / 1604년 명 만력(萬曆) 32년
별전에서 이덕형·이항복·윤승훈·유영경 등과 녹훈 문제를 토론하다
국역
임금이 별전(別殿)에서 영의정 이덕형, 오성 부원군 이항복, 좌의정 윤승훈, 우의정 유영경 등 대신(大臣)을 인견하였는데 승지(承旨) 윤휘(尹暈), 기사관(記事官) 이호신(李好信)·정호관(丁好寬)·오익(吳翊)이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병 때문에 오래 접견하지 못하였다."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근래 성후(聖候)가 오래 회복되지 않아 천안(天顔)을 우러러 뵙지 못하였으니 뭇 신하들의 안타까운 염려가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날씨가 음산하고 바람이 차가운데 조섭을 잘하지 못하면 혹 다치는 일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내의원 제조(內醫院提調)가 문안하는 일과 약을 의논하는 일은 밖에서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만, 약을 자주 바꾸면 진기(眞氣)를 손상시키게 될까 염려됩니다. 옛사람이 ‘병은 활물(活物)인 중심(中心)의 변화에서 오는 것이므로 중심이 답답하면 이로 인하여 혹 병이 생기기도 한다.’ 하였고, 손진인(孫眞人)은 ‘고의(古醫)는 마음을 다스렸으나 속의(俗醫)는 병을 다스린다. 그러므로 명의(名醫)가 병을 고침에 있어서는 심중(心中)의 사려(私慮)를 일체 다 없앤 뒤에 내 심지(心智)의 생각과 합치되게 하므로 약을 입에 넣지 않더라도 병이 나을 수 있다.’ 하였고, 성인(聖人)은 ‘삼가야 할 것은 병이다.’ 하였고, 주자(朱子)는 ‘본심을 간직하고 본성을 배양하는 것이 병을 고치는 요체이다.’ 하였습니다. 지금 위에서는 번거로운 만기(萬機)에 수작(酬酢)하고 응변(應變)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다 의관(醫官)도 자주 입시하지 못하여 약을 바꾸는 것만으로 잡되게 치료하고 있으니, 구구하고 민망한 마음 죄다 아뢸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중사(中使)를 시켜 공신 단자(功臣單子)를 내어 보이고 이르기를,
"당초에 청병(請兵)한 사람은 끼지 못하였고 뒤에 청병한 사람은 참여하였는데, 당초는 신점(申點)이고 뒤는 정기원(鄭期遠)인가? 최흥원(崔興源)은 어찌하여 삭제하였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당초 대가(大駕)가 도성(都城)을 나갈 때 최흥원은 명을 받들고 나갔으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호종(扈從)한 유(類)가 아니기 때문에 참여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억기(李億祺)도 감하(減下)하였는데, 이는 어찌하여 감하하였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지난해 비망기(備忘記)에 전교하신 말씀이 있었고 또 대간(臺諫)의 계사로 인하여 이억기는 들지 못하였습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이것도 온당하지 못하다."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대개 이 공신은 신축년021) 에 이항복(李恒福)이 정승으로 있을 때 정곤수(鄭崑壽)와 함께 거의 다 마감한 것인데 지난해 대간의 계사가 있어서 이제까지 마련하지 못하였으니, 매우 미안합니다. 이 가운데에서 부황(付黃)022) 한 곳도 그대로 둔 것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체로 이 일에 대해 어찌 공론이 없겠는가. 이쯤에서 빨리 마감하라."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성종조(成宗朝)에서도 좌리 공신(佐理功臣)을 마감할 때 위에서 재정(裁定)하신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한때 국가에 봉사하여 공로가 있는 자와 없는 자에 대해서 이미 예감(睿鑑)에 비추어 알고 계실 것이니, 어찌 조금이라도 속일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도 위에서 재정하시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여기에 대한 가부를 말하여 누구는 그대로 두고 누구는 줄일 것인지 결단하는 것은 대신이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녹훈하는 일에 대해서는 본디 공론이 있는 것으로, 전에 마감한 것이 반드시 죄다 지극히 공정하여 사사로움이 없는 데에서 나왔다고 할 수 없으므로 대간의 논계(論啓)와 국인(國人)의 비평이 어지러이 일어나 정해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내 위에서 가부를 재정하라고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대신의 책임을 다한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덕형이 말을 잘못한 것이 심하다. 】 윤승훈이 아뢰기를,
"근래 상후(上候)가 오랫동안 조섭중에 계시므로 경연(經筵)을 열지 못하여 청광(淸光)을 우러러 뵙지 못한 지 이미 반년이 되었으니, 뭇 신하들의 안타깝고 절박한 심정을 어찌 다 아뢸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젊어서부터 병이 많았는데 더구나 이제는 노쇠하였으니 어찌 병이 없겠는가. 또 평소에 담음증(痰飮症)이 있어왔는데 이 증세가 발하면 수삼일간 죽(粥)을 먹고 조리해야 낫는다. 이제는 이미 고질이 되었다."
하였다. 윤승훈이 아뢰기를,
"최흥원은 당초 임진년 4월 26일∼27 사이에 황해도 순찰사(黃海道巡察使)로 나갔다가 중도에서 대가를 맞이하였는데, 대간의 계사에 ‘하루 이틀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모두 참입(參入)시킬 수 없다.’ 하였습니다. 최흥원은 그때 마침 명을 받고 나갔다가 미처 호종하지 못하였습니다. 서울에 있었다면 어찌 대가를 수행하지 않았겠습니까. 이원익(李元翼)도 당초 평안도 순찰사로 미리 나갔었는데 그때 또한 힘쓴 공로가 많이 있었고, 이덕형도 당초 적진(賊陣)에 갔었으므로 대가를 수행하지 못하였다가 뒤미처 평양(平壤)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문에 다들 참입하지 못하였습니다만 자신들의 사사로운 일 때문이 아니었으니 소신(小臣)은 매우 온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대간의 계사도 이들을 모록(冒錄)이라 여겨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당초 ‘종시호종(終始扈從)’이라 명칭하였으므로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익운(翊運)’이라 명칭하였으니, 어찌 참입할 수 없을 리가 있겠습니까. 이는 신의 생각이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매우 온당치 못하다. 이억기·김시민(金時敏)·이정암(李廷馣)의 일도 온당하지 못하다. 대개 종시호종이라 이름하였으므로 이런 의논이 제기되어 그런 것이지만, 이정암 등을 어찌 삭제할 수 있겠는가. 이 일은 절로 공론이 있을 것이니, 반드시 모두 공론에 따라 이쯤에서 빨리 정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정암은 일개 서생(書生)으로서 연안(廷安)의 외로운 한 성을 지키면서 날로 증가되는 백만의 적을 항복시키고 관서(關西)·해서(海西)의 진로를 차단하여 마침내 서로(西路)를 열었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누구의 공인가. 공론으로 말하면 이정암의 공이 제신(諸臣)과 군장(群將) 중에서 으뜸인데, 이제 호종이 아니라 지칭하여 삭제하고 논하지 않았다. 대저 녹훈이란 공로를 보답하기 위한 법인데 정암처럼 세상에 드문 공로가 있는 자는 도리어 훈적(勳籍)에서 제외되고 성을 버리고 목숨을 건진 무리와 가노(家奴)·시역(廝役)같은 천한 자들을 공신(功臣)의 명부에 나열시켰으니, 이것이 과연 공론이겠는가. 통탄스럽다. 】 이덕형이 아뢰기를,
"위의 분부가 마땅합니다. 또 무장(武將)들은 대진(對陣)하여 적봉(賊鋒)을 꺾은 일이 없더라도 대저 지금까지 10여 년 동안 근로한 공이 있으니, 삭제할 만한 사람은 삭제하되 그 가운데에서 뛰어난 자는 그대로 두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삭제하려는 자는 누구인가?"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편비(褊裨)와 주장(主將)은 차이가 있으니, 편비 중에는 의논하여 삭제시킬 만한 자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누구인가?"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김응함(金應緘)·김태허(金太虛)·이수일(李守一) 등을 빼야 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왕자(王子) 등 젊은 무리에게 무슨 공로가 있는가. 전일에도 여러번 일렀지만 지금 또 바로 말하겠는데 나는 다른 뜻이 없다. 장사(將士)는 하루의 공로가 있더라도 참여시킬 수 있으면 참여시키는 것이 옳은데 이들은 참여시키지 않고, 왕자를 참여시키는 것은 매우 미안하다. 장사는 적봉을 꺾은 공로가 없더라도 장사는 참여될 수 있으나 왕자는 참여될 수 없다."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임금께서는 반드시 ‘신료(臣僚)들이 나라 일이 황급할 때에 혹 임금을 위하여 말고삐를 잡은 노고가 있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녹공(錄功)은 실로 성상께서 공로를 보답하시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아랫사람에 있어서 무슨 기록될 만한 공로가 있겠습니까. 중국의 허다한 수천만의 군량과 천하의 병마(兵馬)가 함께 만고에 없던 적을 쳐서 옛 강토를 재조(再造)한 것은 모두 성상의 지극한 정성 때문이었습니다. 신의 이 말은 소신만의 말이 아니라 온 나라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예전에 선왕께서 세자였을 때 왕자가 모두 참여되었었는데, 더구나 오늘의 일은 다 성의(聖意)에서 나온 데이겠습니까. 왕자가 참록(參錄)되지 않는다면 여기에 있는 이항복 또한 원훈(元勳)에 들어 있는데 그 또한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전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은 할 수 없다."
하였다. 유영경이 아뢰기를,
"임금의 분부가 지극히 마땅합니다마는 평시 선왕조 때에는 왕자도 다 참여되었습니다. 신의 뜻은 무장(武將)의 녹공은 넓게 두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하고, 윤승훈이 아뢰기를,
"위에서 분부하신 것이 지극히 마땅합니다마는 왕자가 호종하지 않았다면 녹공하지 않더라도 괜찮겠습니다. 그러나 왕자가 이미 호종하였으니 어찌 참여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항복은 아뢰기를,
"외방에 있던 조신(朝臣)도 어찌 뚜렷한 공로가 있었겠습니까. 다만 호종한 한 가지 일로 참여된 자도 있습니다."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오래 전좌(殿坐)하셨으므로 혹 옥후(玉候)에 손상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매우 미안하니 신들이 물러가 계사(啓辭)로 들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참시 머물러 있으라."
하였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지금 남방은 춘신(春汛)이 급박한데 방비에 대한 제반 일이 얼마나 정제(整齊)되었는가? 비변사는 일신(一新)시켜 사변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마땅히 신칙해야겠습니다만 모든 일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사(舟師)도 하삼도(下三道)의 물력(物力)을 다 끌어대어 조처하고 있지만 아직도 여전할 뿐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육지에서 조련(操練)하는 일은 조금 모양을 이루었지만 어찌 이것만을 믿고 급할 때에 쓸 수 있겠습니까."
하고, 유영경은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믿는 것은 주사입니다. 적(賊)이 경상도를 넘어서 먼저 전라도에 이르는 일은 없을 듯하니, 소신의 생각으로는 전라도의 주사를 경상도로 옮겨서 급할 때에 쓸 수 있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이덕형은 아뢰기를,
"그러하기 때문에 경상도의 주사는 병선(兵船) 65척을 장만하였는데 전년에 비하면 많은 듯합니다. 대개 주사는 격군(擊軍)이 일정하지 않으면 적이 오기 전에 먼저 지칩니다. 군사 1천을 양성하면 10척에 승선시킬 수 있고 군사 2천을 배양하면 20척에 승선시킬 수 있고 군사 3천을 배양하면 30척에 승선시킬 수 있는데, 내지(內地) 백성들에게 쌀·베를 거두어 이것으로 군사를 배양하여 늘 머물러 사변에 대비하게 한다면 군사를 배양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본디 군사를 배양하는 본말(本末)을 모르므로 중국군이 물러가자 변경이 드디어 형세가 없게 되었습니다. 전일 이원익(李元翼)이 내려갈 때에 임금께서 ‘변경에는 6천의 군사를 수합(收合)해야 한다. 그러면 절로 양식을 대어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전교하셨으므로, 이원익이 감격하여 힘을 다해 하려고는 하였으나 사세가 용이하지 않아서 마침내 성취하지 못하고 왔습니다. 소신이 그곳에 갔을 때 겨우 1천의 군사를 얻었을 뿐인데 지금도 두서가 잡히지 않고 있으니, 우리 나라가 본디 군사를 배양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만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의주 목사(義州牧使)와 판관(判官)에 대해서는 어찌해야겠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황진(黃璡) 등입니까? 이들은 호종한 유는 아닐지라도 대가가 머물러 있을 때 어찌 공로가 없었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밖의 의논은 빼려 하는가, 그대로 두려 하는가? 이것은 물어보는 말일뿐이다."
하였다. 윤승훈이 아뢰기를,
"황진·권탁(權晫)은 그때 지응(支應)한 공로가 많이 있으므로 다른 지방의 신하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또 대가가 의주에서 환도(還都)하였으니 이것으로 말하면 의주는 근본의 땅인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다른 지방의 신하와는 과연 다르다."
하였다. 유영경이 아뢰기를,
"사알(司謁) 정경신(鄭景信)도 회의하는 곳에 와서 호소하였는데, 그가 하는 말을 들으니, 의주에 호종하였으나 가사알(假司謁)이라 하여 참입되지 못하였으므로 매우 원통하다고 했습니다. 이도 참여시켜야 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사실을 헤아려 참여시키는 것이 옳다."
하였다. 【유영경의 말은 비루하다. 사알은 일개 가노(家奴)로서 분부를 전하는 자일 뿐이다. 한때의 하찮은 노고가 있더라도 명주나 베로 상을 주는 것에 불과할 뿐인데, 어찌 단서 철권(丹書鐵卷)에 수록하고 삽혈 동맹(歃血同盟)하는 사이에 끼게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정경신은 가사알로 말을 전했을 뿐이니 이는 직분상 당연한 것이다. 또한 어찌 그가 호소한 말을 가지고 기록할 것인지 뺄 것인지의 경중을 논할 수 있겠는가. 유영경이 이 일에는 본시 공론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닐 터인데도 감히 면대한 자리에서 버젓이 아뢰었는데, 이것이 어찌 대신이 논할 만한 것이겠는가. 】 유영경이 아뢰기를,
"송언신(宋言愼)은 마련한 가운데에서 빠졌는데, 이 사람도 어찌 공로가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당초에 승전(承傳)한 일이 있으니 이에 따라 부표(付標)하여 들이고 짐작하여 정하는 것이 옳다. 대개 어쩔 수 없는 자 이외에는 그대로 두는 것이 마땅한데, 종시호종이라 하였으므로 공이 있는 자가 부표한 가운데에 들어 있기도 하니, 대신이 헤아려서 조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윤승훈이 아뢰기를,
"해풍군(海豊郡) 부자(父子)를 3등으로 마련하였는데 공론이 다들 3등은 애매하다고 합니다. 해풍군 부자는 묘사(廟社)의 신주를 받들고 가다가 개성부(開城府)에 묻어두려 하였는데, 그때 순녕군(順寧君)이 묘사에 신주를 묻어두는 것은 미안하다 하였으므로 해풍군이 끝내 받들고 갔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도 참입시킬 만하다. 당시 다른 종실(宗室)들은 다 떠나갔었는데 그만이 위험을 피하지 않고 묘사의 신주를 받들고 갔으니, 다른 사람에게 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당하게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신들의 생각으로는, 단자(單子)를 마련할 때 원훈(元勳)과 이미 의논하여 정하였으므로 이제 다른 의견이 없을 듯합니다. 단, 외간에 한 가지 의논이 있는데 당초 창의(倡義)한 자로서 참여될 만한데도 참여되지 않은 자가 있다 합니다. 그는 바로 김천일(金千鎰)인데 그를 위하여 소장을 올린 사람도 있습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김천일은 절의는 포장할 만합니다만 적봉을 꺾은 일은 없습니다. 처음 강화(江華)에 이르러 드디어 서로(西路)를 뚫었으니 이 점에 대해서는 공이 없다고 할 수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신들이 헤아려서 조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유영경이 아뢰기를,
"김천일은 절의를 포장하는 것은 괜찮겠으나 녹훈(錄勳)하는 데 있어서는 괜찮을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이덕형은 아뢰기를,
"홍계남(洪季男)도 수고하기는 하였지만 별로 뚜렷한 공이 없으므로 처음에는 참여되지 않았는데, 외간에서는 다들 다른 사람을 참여시킨다면 이 사람도 참여시키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이외에는 참여될 만한 자가 없는가. 공이 있는 자가 혹 녹공에 들지 못할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는 예외로 하는 말인데 생존자는 승직(陞職)시키기도 하고 사망자는 증직(贈職)시키기도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이는 평소에 생각했던 것이므로 감히 언급한다. 오늘 반드시 마감하여 빨리 정하라."
하였다. 잠시 뒤에 파하였다.
원문
○上〔御〕 別殿, 引見大臣。 領議政李德馨、鰲城府院君 李恒福、左議政尹承勳、右議政柳永慶、承旨尹暉、記事官李好信ㆍ丁好寬ㆍ吳翊入侍。 上曰: "以病久未相見。" 德馨曰: "近來, 聖候久未差復, 不得望見天顔, 群下憫慮, 何可量也? 日氣陰曀, 風勢淒冷, 若不能善調, 恐或有忝傷之事也。 內醫院提調問安及議藥之事, 則自外雖得聞知, 而藥之爲物, 頻數換易, 則恐有損傷眞氣。 古人云: ‘病中, 心爲活物, 若鬱則因或致病。’ 孫眞人云: ‘古醫治心, 俗醫治病。 故名醫之治病, 心中私慮, 一切盡去之後, 在我心智所思者合, 藥雖不入口, 而病可愈矣。 聖人曰: ‘所愼者疾。’ 朱子曰: ‘存心養性, 乃治病之要。’ 今自上萬機之煩, 酬酢應變, 非一事也。 醫官亦未得頻數入侍, 只以換藥而雜治, 區區憫慮之意, 有難盡達矣。" 上命中使, 出示功臣單子曰: "當初請兵之人, 不得爲之, 後頭請兵之人爲之。 當初則乃申點, 而後頭則乃鄭期遠耶? 崔興源, 何以削去乎? 德馨曰: "當初大駕出都城時, 興源奉命出去, 非如終始扈從之類, 故不得參矣。" 上曰: "(李億棋)〔李億祺〕 亦減下。 此則何以減下耶?" 德馨曰: "上年備忘記中, 有傳敎之言, 而且因臺諫 啓辭, 李億祺不得入矣。" 上曰: "此亦未穩。" 德馨曰: "大槪此功臣, 辛丑年李恒福爲政丞時,與鄭崑壽, 幾盡磨勘, 而去年有臺諫啓辭, 至今不得磨鍊, 極爲未安。 此中付黃處, 亦有仍存者矣。" 上曰: "大槪此事, 豈不有公論哉? 在此可以速爲磨勘。" 德馨曰: "在昔 成廟朝, 磨勘佐理功臣時, 自上多有裁定之事, 而其一時宣力有功勞, 可爲與不可爲者, 已在於睿鑑中, 豈有錙銖可逃者乎? 今亦自上裁定, 則似爲便當。" 上曰: "不然。 在此可否, 某留某減, 決斷之事, 大臣爲之可矣。" 【錄勳一事,自有公論, 而曾所磨勘者, 未必盡出於至公無私之道, 致有臺諫之論啓, 國人之譏議, 紛紜未定, 而終至於自上裁定可否, 是果謂大臣之責乎? 甚矣, 德馨之謬言也!】 承勳曰: "近來上候, 久在調攝中, 不爲開筵, 未得望見淸光, 已半年矣。 群情悶迫, 何可盡達!" 上曰: "予自少多病。 況今衰老, 豈無疾病? 且素有痰飮之證, 若遇此證, 則數三日食粥飮調理, 然後乃差。 今則已爲痼疾矣。" 承勳曰: "崔興源, 當初壬辰四月二十六七日間, 爲黃海道巡察使出去, 中路迎駕, 而臺諫啓辭中, 有差池一兩日, 皆不得參入云。 興源其時, 適受命出去, 故未及扈從。 若在京, 則豈不隨駕? 李元翼, 亦當初爲平安道巡察使, 前期出去, 其時亦多有宣力之功勞。 李德馨, 亦當初往于賊陣, 故不得隨駕,追至于平壤。 以此皆不得參入, 非渠私故也。 小臣, 則極以爲未穩。 臺諫啓辭, 亦非以彼人等, 爲冒錄而然也。 當初名曰終始扈從, 故如是爲之, 而今則翊運爲名, 豈有不可參之理乎? 此乃臣之所懷, 故敢達。" 上曰: "最爲未穩也。李億祺、金時敏、李廷馣事, 亦未穩。 大槪名曰終始扈從, 故發此議論而然, 李廷馣等, 何可削去! 此事, 自有公論。 須一從公論, 在此速定可矣。" 【李廷馣, 以一介書生, 守延安一片孤城, 降百萬日滋之賊, 蔽遮關海, 終開西路。 國之不亡, 其誰之功? 若以公論言之, 則廷馣之功, 爲諸臣群將之最, 而今指以爲非扈從, 而削之不論。 夫錄勳, 爲其酬勞賞功之典, 而如廷馣不世之功者, 反外勳籍。 是將棄城偸生之輩, 家奴廝役之賤, 羅列於丹書之府, 是可謂公論乎? 痛哉!】 德馨曰: "上敎允當。 且武將等, 雖無對陣摧鋒之事, 而大抵今至十餘年, 有勤勞之功。 可削之人, 則雖可削去, 而其中表表者, 仍存似當。" 上曰: "所欲減者,誰也?" 德馨曰: "褊裨, 與主將有異。 褊裨中可以議削。" 上曰: "何人?" 德馨曰: "金應鍼、金太虛、李守一等, 似減之。" 上曰: "王子等, 年少輩, 有何功勞乎? 前日亦累言之, 而今且直言之, 予無他意。 將士雖有一日之功勞, 可爲者, 則爲之可矣, 而此等不爲, 王子則爲之, 甚爲未安。 將士雖無摧鋒之功, 將士則可爲, 而王子則不可爲矣。" 德馨曰: "自上。 必以爲臣僚等, 當國事倉黃之際, 或有羈靮之勞, 故今此錄功, 實出於聖上酬勞之意, 而但在下之人, 豈有可錄之功乎? 以天朝許多累千萬軍糧及天下兵馬, 共討千萬古所無之賊, 再造舊土者, 皆由於聖上至誠。 臣之此言, 非小臣之言, 乃擧國之情也。 在昔先王世子之時, 王子不參之, 況今日之事, 皆出聖意。 王子若不參錄, 則李恒福今方在此, 而亦在元勳中, 渠亦安心乎?" 上曰: "前例則未得知之, 而今則不可爲也。"永慶曰: "上敎極爲允當, 而平時, 先王朝王子, 亦皆參之。 但臣意, 則武將之錄, 廣存可也。" 承勳曰: "上敎至當, 而但王子若不扈從, 則雖不爲錄功, 猶之可也, 王子旣已扈從, 寧有不參之理乎?" 恒福曰: "在外朝臣, 亦豈有表表之功勞乎? 只以扈徒一事, 有參之者矣。" 德馨曰: "允爲殿坐, 恐或玉候致傷, 臣等極爲未安。 請退出, 而啓辭以入。" 上曰: "姑且留之。" 上又曰: "卽今南方, 春汛正急。 防備諸事, 幾何整齊乎? 備邊司當一新待變可矣。" 德馨曰: "當爲申飭, 而凡事未易成就。 舟師亦竭盡下三道物力以措, 而時尙如前, 無加減矣。 陸地操鍊之事, 雖暫成形, 豈可以此, 倚以爲緩急之用乎?" 永慶曰: "我國所恃者, 舟師也。 此賊似無越慶尙, 而先到全羅。 小臣之意, 則全羅道舟師, 移於慶尙, 以爲緩急之用, 爲當。" 德馨曰: "如是, 故慶尙舟師, 措備六十五隻。 比之前年, 則似優。 大槪舟師, 擊軍不齊, 賊未來到, 而率先疲殘。 若養兵一千, 則可入十艘, 養兵二千, 則可入二十艘, 養兵三千, 則可入三十艘, 而收合內地人米布, 用此養兵, 恒留待變, 則可以養兵, 而我國本不知養兵本末, 天兵纔退, 而邊上遂爲無形。 前日李元翼下去時, 自上有傳敎, 須於邊上, 收合六千兵, 則自當給糧云, 故元翼感激,雖欲竭力爲之, 而事勢未易, 終不得成就而來矣。 小臣到彼時, 僅得一千兵, 而至今未成頭緖。 我國之本不能養兵,可知矣。" 上曰: "義州牧使、判官, 何以爲之?" 德馨曰: "黃璡等(乎)〔矣〕 。 此人等, 雖非扈從之類, 當大駕留駐時,豈無功勞乎?" 上曰: "然則外論, 欲減之耶? 欲存之耶? 此則第問之之語耳。" 承勳曰:"黃璡、權晫, 其時多有支應之功勞。 與他地方之臣, 有異矣。 且大駕, 自義州還都。 若以此言之, 則似根本之地矣。" 上曰: "與他地方臣, 果異矣。" 永慶曰: "司謁鄭景信, 亦訴於會議處。 聞渠所言,則雖扈從於義州, 而以假司謁, 不得參入, 極爲冤痛云。 此亦似可爲之。" 上曰: "量其事實爲之可矣。" 【陋矣, 永慶之言也! 司謁, 一家奴, 而只令傳言者也。 雖有一時之微勞, 不過賞以紬布而已。 豈可收錄於丹書鐵券, 歃血同盟之間哉? 況鄭景信, 以假司謁, 只傳言語, 是乃職分所爲。 亦豈可以渠之訴言, 爲可錄可減之輕重也? 永慶非不知此事, 自有公論, 而敢於面對之時, 公然開說。 是豈大臣所可論者哉?】 永慶曰: "宋言愼, 出磨鍊中。 此人亦豈無功勞乎?" 上曰: "當初有承傳之事, 緣此付標以入。 斟酌以定可矣。 大槪不得已者外, 仍存爲當。 名曰終始扈從,故有功者, 或入於付標中。 大臣可量處。" 承勳曰: "海豐君父子, 磨鍊三等, 而公論皆以爲三等曖昧云。 海豐君父子,奉廟社主以行, 將埋置於開城府時, 順寧君, 以埋置廟社主爲未安, 故海豐, 終始奉行矣。" 上曰: "此亦可爲。 當其時, 他宗室, 皆不在, 而此獨不避危險, 奉行廟社主, 非他人之可比也。 然至當爲之可矣。" 德馨曰: "臣等之意, 磨鍊單(字)〔子〕 時, 與元勳, 已爲議定, 今無他意, 但以外間, 有一種議論, 謂當初倡義者, 有可爲而不爲者。 此乃金千鎰也。 爲此亦有上章之人。 臣等之意, 千鎰, 節則可, 無摧鋒之事。 但初到江華, 遂通西路。 此則不可謂無功也。" 上曰: "大臣等可量處。" 永慶曰: "千鎰, 褒節則可, 而至於錄勳,則未知其可也。" 德馨曰: "洪季男亦有勤勞, 而別無表表之功, 故初不爲之, 外間皆謂, 若爲他人, 則此人不可不爲云矣。" 上曰: "然則此外亦無可爲者乎? 且有功者, 雖或未入於錄功之中, 若以規外言之, 則生者或升職, 死者或贈職似當。 此乃平日所思之言, 故敢及之。 今日須磨勘速定。" 須臾罷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