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146권, 선조 35년 2월 6일 기사 4/5 기사 / 1602년 명 만력(萬曆) 30년
헌부가 최영경의 일 등을 아뢰다
국역
헌부가 아뢰기를,
"선을 표창하고 악을 벌주는 것은 군주가 세상을 다스리는 큰 권한입니다. 이미 간인과 붕당을 지어 정인(正人)을 해친 죄를 알면서도 그 자를 배척하여 끊어버리지 아니하면 선을 권장할 수 없게 되고 악을 징계할 수 없게 되어 나라가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춘추 시대에 곽공(郭公)이 망하고 중항씨(中行氏)가 망하게 된 까닭이니 어찌 심히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성명(聖明)께서 최영경에게 전에는 석방하라는 명이 계셨고, 뒤에는 포증(褒贈)하는 은전을 거행하셨으니, 무죄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처사(處士)를 구휼하시는 뜻이 지극하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법을 남용하여 얽어 죽인 자에 대해서는 견책을 시행하지 아니하여 그들로 하여금 버젓이 나다니고 아직까지 관작을 보전하게 하고 있으니, 이것이 하늘이 죄있는 자를 토벌하고 간사한 사람을 물리치는 의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남몰래 소근소근 참소하며 화를 다행으로 여기고 어진이를 해친 죄는 결코 용서하기 어려우니, 그때 재차 국문하기를 계청한 대간을 모두 삭직하도록 명하소서.
국고의 저축이 탕갈되고 민심이 원고(怨苦)하니 후일의 근심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조사(詔使)를 영접하는 일이 중하고 대혼(大婚)의 예가 성대하기는 하지만 번거로움을 피하지 아니하고 당장의 위급함을 구제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받아들여 가례(嘉禮)에 관한 한 가지 일은 특별히 윤허하시었으니, 보고 들은 자들이 누구인들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당초 잡물(雜物)을 마련할 때에 책임을 맡은 신하가 물력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목전의 계책으로 마련하여, 혹 평시의 등록(謄錄)을 핑계하기도 하고 혹은 하인의 구전을 근거로 삼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20두(斗)의 칠(漆)과 6두의 꿀을 과람하게 징수를 책임지워 한없이 많게 하였습니다.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백성을 해롭게 한 죄는 나타나는 대로 징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례 도감의 전칠(全漆)을 담당한 낭청과 영접 도감의 조과(造果)를 담당한 낭청을 아울러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소서.
요즘 인심이 적이 물러간 것에 안심하여 와신 상담의 뜻이 해이해지고 형식적인 제도를 태평한 때와 같이 하려고 하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지금 황조(皇朝)가 성대한 은혜로 명복(命服)을 새로 내렸으니 실로 상하가 함께 경사로 여길 일입니다. 다만 온 조정의 제신(諸臣)이 모두 조복(朝服)을 입는 일에 있어서는 높은 갓에 옥소리를 울리고 의장(儀章)을 성대히 꾸미는 것은 시세를 헤아려 보면 실로 마땅하지 못합니다. 더구나 지금 사가(私家)의 물력도 갑자기 준비하기가 심히 어려운 데이겠습니까. 비록 마련하도록 독촉하더라도 반드시 모양을 이루지 못하여 중국 사신이 보기에 도리어 미안할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다시 참작하여 의정(議定)하게 하소서.
적이 물러난 뒤에 안락한 탐함이 날로 심해져서 기강이 점차 해이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춘신(春汛)이 이미 박두하여 남쪽 변경의 근심이 심히 급한데 근일 서쪽 변경의 경보 또한 더욱 긴급합니다. 조사(詔使)가 당도하게 되면 감사·수령이 역참(驛站)에 분주하느라 다른 일은 돌볼 겨를이 없을 것인데 원수(元帥)와 대신은 마침 병으로 일을 거의 살피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국사의 불행으로서 심히 근심스럽습니다. 비변사의 계책을 조금도 늦출 수 없는데, 관례에 따라 복계(覆啓)하는 이외에 일제히 모여 의논하고 계획하여 가부를 결정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매우 한심합니다. 앞으로는 비변사의 좌기(坐起)는 정해진 날짜에 구애되지 말고 자주 회의하며, 위에서도 제신(諸臣)을 인대(引對)하여 여러 의논을 널리 채집해서, 책응(策應)해야 할 모든 일을 급급히 처치함으로써 경급(警急)해서 미치지 못하는 후회가 없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간원에 답한 것과 같다. 낭청은 파직한 다음 추고할 수 없다. 조복에 관한 일은 일찍이 말하지 않았던가. 지금 말할 만한 것이 없다. 비변사에 회의하는 일과 내가 군신을 인대하는 일은 윤허한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8책 146권 6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340면
원문
○憲府啓曰: "彰善癉惡, 人主馭世之大柄。 旣知朋奸毒正之罪, 而不爲之斥絶, 則善無所勸, 惡無所懲, 而國隨以殆矣。 此郭公之所以亡, 中行之所以滅, 豈非可懼之甚乎? 聖明之於永慶, 前有開釋之命, 後擧褒贈之典, 哀矜不辜, 隱恤處士之意, 可謂至矣, 獨於文致搆殺者之身, 而不加譴責, 使之揚揚自如, 尙保命德之具, 是可謂天討有罪, 而難壬人之義乎? 其緝緝翩翩, 幸禍戕賢之罪, 決難容貸。 請其時啓請再鞫諫官, 竝命削職。 國儲蕩竭, 民情怨苦, 日後之憂, 不可勝言, 故雖知迎接事重, 大婚禮盛, 而不避煩籲, 欲救燃眉之急矣。 聖量容受, 嘉禮一事, 特許允兪, 凡在瞻聆, 孰不感激? 第於當初雜物磨鍊之時, 句管之臣, 不量物力, 取辦目前, 或諉平時謄錄, 或憑下人口傳, 二十斗之漆, 六斗之蜜, 濫觴責徵, 靡有紀極。 其不職病民之罪, 不可不隨現懲治。 請嘉禮都監全漆次知郞廳, 迎接都監造果次知郞廳, 幷命先罷後推。 近日人心, 狃於賊退, 薪膽之志漸懈, 而文爲制度之末, 或比於平日, 誠可寒心。 今者皇朝霈恩, 命服新降, 固爲上下之同慶, 至於擧朝諸臣, 皆服朝服, 則峩冠鳴玉, 賁飾儀章, 揆之時勢, 實非所宜。 況今私家物力, 猝備甚難, 雖使督辦, 而必不成貌樣, 華使所見, 反爲未安。 請令該曹, 更爲參酌議定。 賊退之後, 玩愒日甚, 漸至解體。 春汛已迫, 南邊朝夕之虞甚急, 而近日西邊之報, 尤爲緊急。 詔使臨到, 監司守令, 奔走站上, 不遑餘事, 元戎、大臣, 適又傷病, 殆至不省。 此實國事之不幸, 而甚可憂者。 廟堂籌畫, 不可少緩, 而循例覆啓之外, 未聞有齊會詢謀, 規畫可否之事, 極爲寒心。 今後備邊司之坐, 勿拘定日, 頻數會議, 自上亦引對諸臣, 博採群議, 凡干策應之事, 汲汲處置, 俾無警急未及之悔。" 答曰: "答院同。 郞廳不可罷推。 朝服事, 曾不云乎? 今無可議。 會議引對之事, 允。"
- 【태백산사고본】 88책 146권 6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340면
선조실록146권, 선조 35년 2월 6일 기사 4/5 기사 / 1602년 명 만력(萬曆) 30년
헌부가 최영경의 일 등을 아뢰다
국역
헌부가 아뢰기를,
"선을 표창하고 악을 벌주는 것은 군주가 세상을 다스리는 큰 권한입니다. 이미 간인과 붕당을 지어 정인(正人)을 해친 죄를 알면서도 그 자를 배척하여 끊어버리지 아니하면 선을 권장할 수 없게 되고 악을 징계할 수 없게 되어 나라가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춘추 시대에 곽공(郭公)이 망하고 중항씨(中行氏)가 망하게 된 까닭이니 어찌 심히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성명(聖明)께서 최영경에게 전에는 석방하라는 명이 계셨고, 뒤에는 포증(褒贈)하는 은전을 거행하셨으니, 무죄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처사(處士)를 구휼하시는 뜻이 지극하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법을 남용하여 얽어 죽인 자에 대해서는 견책을 시행하지 아니하여 그들로 하여금 버젓이 나다니고 아직까지 관작을 보전하게 하고 있으니, 이것이 하늘이 죄있는 자를 토벌하고 간사한 사람을 물리치는 의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남몰래 소근소근 참소하며 화를 다행으로 여기고 어진이를 해친 죄는 결코 용서하기 어려우니, 그때 재차 국문하기를 계청한 대간을 모두 삭직하도록 명하소서.
국고의 저축이 탕갈되고 민심이 원고(怨苦)하니 후일의 근심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조사(詔使)를 영접하는 일이 중하고 대혼(大婚)의 예가 성대하기는 하지만 번거로움을 피하지 아니하고 당장의 위급함을 구제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받아들여 가례(嘉禮)에 관한 한 가지 일은 특별히 윤허하시었으니, 보고 들은 자들이 누구인들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당초 잡물(雜物)을 마련할 때에 책임을 맡은 신하가 물력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목전의 계책으로 마련하여, 혹 평시의 등록(謄錄)을 핑계하기도 하고 혹은 하인의 구전을 근거로 삼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20두(斗)의 칠(漆)과 6두의 꿀을 과람하게 징수를 책임지워 한없이 많게 하였습니다.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백성을 해롭게 한 죄는 나타나는 대로 징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례 도감의 전칠(全漆)을 담당한 낭청과 영접 도감의 조과(造果)를 담당한 낭청을 아울러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소서.
요즘 인심이 적이 물러간 것에 안심하여 와신 상담의 뜻이 해이해지고 형식적인 제도를 태평한 때와 같이 하려고 하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지금 황조(皇朝)가 성대한 은혜로 명복(命服)을 새로 내렸으니 실로 상하가 함께 경사로 여길 일입니다. 다만 온 조정의 제신(諸臣)이 모두 조복(朝服)을 입는 일에 있어서는 높은 갓에 옥소리를 울리고 의장(儀章)을 성대히 꾸미는 것은 시세를 헤아려 보면 실로 마땅하지 못합니다. 더구나 지금 사가(私家)의 물력도 갑자기 준비하기가 심히 어려운 데이겠습니까. 비록 마련하도록 독촉하더라도 반드시 모양을 이루지 못하여 중국 사신이 보기에 도리어 미안할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다시 참작하여 의정(議定)하게 하소서.
적이 물러난 뒤에 안락한 탐함이 날로 심해져서 기강이 점차 해이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춘신(春汛)이 이미 박두하여 남쪽 변경의 근심이 심히 급한데 근일 서쪽 변경의 경보 또한 더욱 긴급합니다. 조사(詔使)가 당도하게 되면 감사·수령이 역참(驛站)에 분주하느라 다른 일은 돌볼 겨를이 없을 것인데 원수(元帥)와 대신은 마침 병으로 일을 거의 살피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국사의 불행으로서 심히 근심스럽습니다. 비변사의 계책을 조금도 늦출 수 없는데, 관례에 따라 복계(覆啓)하는 이외에 일제히 모여 의논하고 계획하여 가부를 결정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매우 한심합니다. 앞으로는 비변사의 좌기(坐起)는 정해진 날짜에 구애되지 말고 자주 회의하며, 위에서도 제신(諸臣)을 인대(引對)하여 여러 의논을 널리 채집해서, 책응(策應)해야 할 모든 일을 급급히 처치함으로써 경급(警急)해서 미치지 못하는 후회가 없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간원에 답한 것과 같다. 낭청은 파직한 다음 추고할 수 없다. 조복에 관한 일은 일찍이 말하지 않았던가. 지금 말할 만한 것이 없다. 비변사에 회의하는 일과 내가 군신을 인대하는 일은 윤허한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8책 146권 6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340면
원문
○憲府啓曰: "彰善癉惡, 人主馭世之大柄。 旣知朋奸毒正之罪, 而不爲之斥絶, 則善無所勸, 惡無所懲, 而國隨以殆矣。 此郭公之所以亡, 中行之所以滅, 豈非可懼之甚乎? 聖明之於永慶, 前有開釋之命, 後擧褒贈之典, 哀矜不辜, 隱恤處士之意, 可謂至矣, 獨於文致搆殺者之身, 而不加譴責, 使之揚揚自如, 尙保命德之具, 是可謂天討有罪, 而難壬人之義乎? 其緝緝翩翩, 幸禍戕賢之罪, 決難容貸。 請其時啓請再鞫諫官, 竝命削職。 國儲蕩竭, 民情怨苦, 日後之憂, 不可勝言, 故雖知迎接事重, 大婚禮盛, 而不避煩籲, 欲救燃眉之急矣。 聖量容受, 嘉禮一事, 特許允兪, 凡在瞻聆, 孰不感激? 第於當初雜物磨鍊之時, 句管之臣, 不量物力, 取辦目前, 或諉平時謄錄, 或憑下人口傳, 二十斗之漆, 六斗之蜜, 濫觴責徵, 靡有紀極。 其不職病民之罪, 不可不隨現懲治。 請嘉禮都監全漆次知郞廳, 迎接都監造果次知郞廳, 幷命先罷後推。 近日人心, 狃於賊退, 薪膽之志漸懈, 而文爲制度之末, 或比於平日, 誠可寒心。 今者皇朝霈恩, 命服新降, 固爲上下之同慶, 至於擧朝諸臣, 皆服朝服, 則峩冠鳴玉, 賁飾儀章, 揆之時勢, 實非所宜。 況今私家物力, 猝備甚難, 雖使督辦, 而必不成貌樣, 華使所見, 反爲未安。 請令該曹, 更爲參酌議定。 賊退之後, 玩愒日甚, 漸至解體。 春汛已迫, 南邊朝夕之虞甚急, 而近日西邊之報, 尤爲緊急。 詔使臨到, 監司守令, 奔走站上, 不遑餘事, 元戎、大臣, 適又傷病, 殆至不省。 此實國事之不幸, 而甚可憂者。 廟堂籌畫, 不可少緩, 而循例覆啓之外, 未聞有齊會詢謀, 規畫可否之事, 極爲寒心。 今後備邊司之坐, 勿拘定日, 頻數會議, 自上亦引對諸臣, 博採群議, 凡干策應之事, 汲汲處置, 俾無警急未及之悔。" 答曰: "答院同。 郞廳不可罷推。 朝服事, 曾不云乎? 今無可議。 會議引對之事, 允。"
- 【태백산사고본】 88책 146권 6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34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