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134권, 선조 34년 2월 10일 기묘 3/3 기사 / 1601년 명 만력(萬曆) 29년
대신 및 비변사 당상과 일본 침입에 대한 방비책을 상의하다
국역
사시에 상이 별전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춘신(春汛)이 임박하였으니 적변(賊變)이 언제 있을지 염려스럽다. 만약 전란(戰亂)이 일어나면 지난날과 같은 재앙이 없지 않을 것이니, 각자 방비책을 말해 보라. 비변사는 필시 묘안이 있을 줄로 안다. 이와 같은 일은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한다. 기타 논의야 오늘날 무엇이 중대하겠는가."
하니, 좌의정 이헌국(李憲國)이 아뢰기를,
"방비책은 별다른 것이 없고 정병을 수습하여 궁시(弓矢)를 연습시키며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기계를 준비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남방의 일은 비변사가 아무리 명을 내리고 당부하더라도 경상도 일대는 탕패하여 10여 고을이 모두 텅 비었으니, 이런 상황에서는 또한 손을 쓰기가 어렵습니다. 이덕형(李德馨)이 지금 내려갔는데, 이원익(李元翼)이 현재 얼마나 조치를 하였는지 모르겠으나 남방의 일이 극히 허술합니다. 전라도는 주사(舟師) 10여 척이 정박하고 있으니 방비를 할 수 있을 것이지만, 적이 만약 많은 병력으로 나온다면 과연 이 정도의 군사로 막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도저히 좋은 대책이 없어 밤이나 낮이나 걱정입니다. 영상이 남방의 도로와 요새지를 익히 아는데 요즘 병으로 출사하지 못해 논의하는 일에 있어서도 차질이 있습니다. 적이 전에 화친을 청한 뜻에 대하여는 지금 6∼7개월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우의정 김명원(金命元)은 아뢰기를,
"밑에 있는 사람으로 그 누군들 자기의 소견을 진달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다만 뛰어난 묘책이 없어 어떻게 조처해야 할지 모르고 있습니다. 대개는 물력이 모자라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다른 의논은 없는가. 만약 대적(大賊)이 다시 침략해 온다면 종사(宗社)의 존망에 관계된 일로 국가가 어찌될지 모를 일이다. 당병(唐兵)이 있으면 그들을 막을 수 있겠는가?"
하니, 이헌국이 아뢰기를,
"다른 일은 말할 것이 없고 오직 조석으로 변란에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고 북방 육진(六鎭)도 극히 위태로우니, 모든 일은 이쪽을 돌아보면 저쪽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북방은 조종(祖宗)께서 대업(大業)을 세우신 곳인데 이와 같이 허술하니 더욱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북방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연 모종의 대처를 취할 수 있으나, 남쪽의 적은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저 적들이 어찌 우리를 잊을 리가 있겠는가. 오늘날 적이 물러갔다고 말을 하는 자는 곧 남을 망치는 사람이다. 저 적들이 물러간 것은 결코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을 그만두려는 것이 아니다. 무슨 생각으로 물러갔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중국군이 전부 철수했다는 말을 들으면 다시 흉독을 부릴 것이다. 어찌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 병법에 ‘장차 취하고자 할 때는 반드시 먼저 주어라.’ 하였거니와, 그들이 물러간 것을 가지고 적세가 조금 약해졌다고 하는 것은 국사를 그르침이 큰 것이다. 송(宋)이 변경(汴京)에 도읍하고 있을 때 금인(金人)이 잠시 물러가자 기뻐서 서로 경하하였으나, 그 후에 금병(金兵)이 대거 침입하여 모두 속수무책으로 포박을 당하였으니, 매우 가소로운 일이었다."
하니, 이헌국이 아뢰기를,
"송나라 때는 문교(文敎)가 우세하고 무략(武略)이 부진하였는데 우리 나라도 그와 같습니다. 이제 무부(武夫)에게 의지하여 국가의 안전을 꾀하려고 하나 무부도 또한 무술을 좋아하지 않아 문무 관원이 안일에 젖어 전혀 일을 보지 않으니, 이 또한 천명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따금 시사(試射)를 보여 상격(賞格)을 시행하여도 특별히 인재가 배출되지 않습니다. 임진년 이후의 무변(武弁)들은 모두 신인들로서 대의(大義)를 몰라 수고롭고 힘든 일은 다 싫어하고 회피합니다. 국사가 이에 이르렀으니 염려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체로 이 적들은 우리 나라를 유린하여 저들 마음대로 소란을 피우다가 까닭없이 물러갔으니, 반드시 의도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금년에는 혹시 오지 않더라도 한번 결판을 내려고 할 것은 영리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강화를 청한 한 가지 일만 아니라 무역을 하는 일에 있어서도 그와 같이 신의를 잃고 있으니, 나의 생각에는 적이 반드시 다시 올 것으로 안다. 이제 마땅히 위아래가 한마음이 되어 이 적을 막은 다음에야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이헌국이 아뢰기를,
"대마도(對馬島) 사람들이 만약 전처럼 정성을 보인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습니까. 그들 나라에 사건이 있다고 한 것은 헛소리가 아닌 듯합니다. 어사(御史)를 보내 남쪽의 파종(播種)에 관한 실상과 주사(舟師)의 기계(機械)에 대한 실태를 적간하여 오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방어하는 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기강입니다. 기강이 서지 않으므로 군율이 해이해지니, 아무리 백만 정병이 있더라도 어디에 쓰겠습니까. 지금은 회복하는 초기이니, 반드시 공도(公道)를 신장시킨 연후에야 상벌이 분명해질 것이며 국가가 자연 유지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순신(李舜臣)이 승전한 뒤로 모두 주사(舟師)에 힘을 쏟고 있는데, 승패는 무상한 것이라 과연 주사에 주력하는 것이 필승의 계책이 될지 모르겠다. 그들이 만약 교전을 하지 않고 먼저 하륙(下陸)한다면 아무리 주사가 있더라도 해상에 떠 있기만 할 것이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주사에만 전력하고 육지의 방비는 하지 않는다면 속담에 이른바 화살이 떨어진 곳에 과녁을 세운다는 격이 될 것이니, 이는 원대한 생각이 아니다."
하니, 이헌국이 아뢰기를,
"대체로 힘이 수륙(水陸)의 방비에 부족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할 뿐인데, 만약 하륙한다면 사실 상의 하교와 같은 상황이 될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하륙할 곳이 매우 많고 바닷길이 널리 통하니, 만약 방비가 허술한 곳으로 온다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전조(前朝) 때 왜적이 다수 나왔지만 임진년 변란과는 달라 전조에서는 그때마다 기복병(奇伏兵)으로 포획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수백 년 동안 백성이 병란을 모르고 살았으니, 단번에 패하여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고, 김명원은 아뢰기를,
"이 왜적들은 기필코 우리 나라에 피해를 끼치려고 하였기 때문에 아무리 깊은 산골이라도 인가가 있는 곳은 모두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하였다. 이헌국이 아뢰기를,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죽은 것은 하늘이 도운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늘이 도운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또 다른 수길이 있는지 어찌 알겠는가."
하였다. 우참찬 홍진(洪進)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오로지 중국군만 믿고서 진관법(鎭管法)을 폐지하여 시행하지 않고 모든 진법이며 깃발을 중국군의 법대로 따르고 있으니, 태평무사할 때는 그래도 괜찮지만 지금은 중국식도 아니고 우리의 재래식도 아니어서 모양이 말이 아닙니다. 《기효신서(紀效新書)》는 형세상 그대로 따라 행하기 어려우니 평소에 시행해 온 진관법과 《제승방략(制勝方略)》의 법에 의하여 수령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각별히 훈련하게 하소서. 곡식을 바치는 일은 나라가 급박한 때를 당하면 간혹 사대부가 저장해 둔 곡식을 쓰면서 그들의 성명을 곡식을 바친 사람들 속에 함께 기록하기도 하는데,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가 곡식을 바친 일이 아니므로 모두 부끄럽게 생각하여 금고(禁錮) 처분을 받은 것처럼 여깁니다. 그리고 교생(校生)으로 곡식을 바친 자 중에 5품 이하는 모두 군역(軍役)에 충정하므로 원망이 많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각별히 조처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고, 이헌국은 아뢰기를,
"상께서 서행(西幸)하실 때 호가(扈駕)한 신하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사족(士族)은 각자 부모 처자를 위하여 초야에 물러가 있다가 상께서 환도(還都)하시자 각자 와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으니, 그들도 부끄러운 마음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나중에도 이와 같이 한다면 군신간의 의리를 잊어버릴 리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임진년 이후로 상기(喪紀)에 관한 일을 전폐하고 행하지 않아 극히 한심하니, 상례를 신명(申明)하고 교화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절의를 세운 사람을 정표(旌表)하는 일은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인데 예조는 전혀 초출(抄出)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대부의 집은 혹 정문을 한 곳이 있기는 하지만 깊은 산골에서 절의에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포숭(褒崇)하는 은전에 기록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예조도 임의대로 삭제하는 일이 있습니다. 대체로 이 일은 모두 강상(綱常)에 관계가 있으니 비록 나쁜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를 보면 감화를 받을 리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 병부의 자문에 ‘이번에 주둔을 요청한 일은 조선의 본의가 아니다.’ 하였는데 이는 무슨 뜻인가? 그 의도를 알 수 없으나 아마 사실 밖의 헛된 말이 나돌아 미편해 하는 뜻이 많이 있는 듯하니, 그 일은 필시 성사되지 않을 것이다. 끝부분에 또 신하에게 죄를 돌렸다고 하였으니, 그 때에 나의 생각은 신하에게 죄를 돌리려고 하지 않았는데 그 자문에 한 말이 이와 같다. 대체로 전일에 글을 짓는 일로 인하여 국운을 위태롭게 한다고 한 일도 있지만 시종 그 태도를 고치지 않고 그대로 하고 있다. 이는 승문원이 평소에 자문과 게첩에 관한 일을 자세히 살펴서 하지 않아 그런 것이다."
하니, 우찬성 심희수(沈喜壽)가 아뢰기를,
"전교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다만 그 말을 크게 부각시켜 보면 과연 놀라우나 보통으로 보아 넘기면 별로 문제될 것은 없으니, 비유한 말이 그다지 방해되지는 않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문장을 본디 잘 제술하지 못하니 중대한 자문은 잘 다듬은 뒤에 보내는 것이 옳았을 것인데 끝내 그렇게 하지 않아 일을 그르쳤다. 문서에 관한 일은 무엇보다도 자세히 살펴서 해야 한다."
하였다. 대사간 김상용(金尙容)이 아뢰기를,
"상께서 춘신(春汛)이 가까워지는 것을 근심하여 자주 비변사에 대책을 물으시니 성상의 생각이 깊으십니다. 그러나 신의 견해는 그 점에 있지 않습니다. 상께서 즉위하신 지 이제 40년이 다가오는데 특별히 직간을 하다가 죄를 얻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침묵을 지키는 것이 풍조가 되어 한 사람도 바른 말로 상달한 적이 없고 대소 관원이 그럭저럭 안일하게 날짜만 보냈는데, 그들이 어찌 모두 쓸모 없는 사람이겠습니까. 상께서 수용하시는 뜻을 보이신 뒤에 초야의 말이 위에까지 올라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상소하여 민간의 고통에 관한 실상을 갖추어 개진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저 해사(該司)에 내리기만 할 뿐 하나도 시행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저번에 천변(天變)으로 직언을 구하였지만 한 사람도 상소하여 직언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자만에 차있는 자세는 사람을 천리 밖에서 거절한다.’ 하였습니다. 소신의 생각에는, 오늘날의 근심은 언로(言路)가 두절된 데 있고 이들 왜적에 있지 않다고 봅니다. 이곳에 있는 대신이나 중신들이 모두 할 말을 다하여 충성을 바치지 않고 인견(引見)하실 때는 보통으로 진달하고 물러간 뒤에는 초기(草記)로 와서 바치니, 이와 같이 하고서도 적을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헌국이 아뢰기를,
"김상용의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요즘 경연에서 한 사람도 정성을 다하여 상달하는 자가 없고 국가의 일을 보통으로 보아 넘깁니다. 소신이냐 나이가 80이 가까우니 산릉(山陵)의 일이 끝난 뒤에는 물러갈 것입니다마는, 대체로 언로의 두절은 국가의 존망에 관계됩니다."
하였다. 김상용이 아뢰기를,
"송나라 때 언로가 두절되었기 때문에 성문은 닫고 언로는 열어야 한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우리 나라의 일은 기강이 무너져 위급해진 지 오래인데 언로마저 막혀 있습니다. 《주역(周易)》 괘(卦)에 천지의 기운이 위아래가 서로 합하는 것이 태(泰)가 되고 합하지 않는 것은 비(否)가 되니, 위아래의 마음이 서로 통한 뒤에야 국사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옳기는 옳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이 말을 한다면 괜찮지만 언관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어찌 다른 사람을 끌어대는가. 지금 그 자리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의 일을 말하듯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자, 대사간 박홍로(朴弘老)가 아뢰기를,
"김상용이 진달한 일은 오늘을 두고 한 말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요즘의 풍조를 논한 것입니다. 상께서 어찌 그런 사실을 모르시겠습니까. 임금은 만인의 위에 위치하므로 크게 말하면 천하의 치란이 그 한 몸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요순 같은 성군이라도 혼자서 이루지는 못하고 반드시 뭇 신하들의 협조를 받은 뒤라야 태평 정치를 이룰 수 있었으니, 관직을 설치한 것은 쓸 데 없이 한 것이 아닙니다. 상께서 반드시 아랫사람의 마음이 서로 통해져 그 책무를 다하도록 한다면 국사를 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자신이 그 관직에 있으면서 일을 살피지 못하면 이는 그의 잘못입니다. 대신은 임금의 팔다리이며 심복이므로 기혈(氣血)이 유통하면 사지가 화평해지는데, 요즘 대신을 대우하는 도는 전일보다 못한 듯합니다."
하고, 김상용은 아뢰기를,
"연 소왕(燕昭王)이 악의(樂毅)를 얻어 원수를 갚는 일과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범여(范蠡)를 얻어 오(吳)를 멸망시킨 일과 촉(蜀) 선주(先主)가 제갈공명(諸葛孔明)을 대한 일과 송 태조(宋太祖)가 조보(越普)를 대한 것 등이 다 그런 경우입니다. 요즘 상께서 임무를 맡기고 그것을 완성하도록 독책하시는 뜻이 없기 때문에 그럭저럭 날짜만 보낼 뿐 실지로 힘쓰는 일을 볼 수 없으니, 이와 같이 하면서 복수를 하고 이로 인하여 적을 막는다는 것은 절대로 그렇게 될 리가 없습니다."
하였다. 박홍로가 아뢰기를,
"왜적이 국경에 있는 동안에는 우리 나라가 보존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인심으로 말하면 자손 만대를 두고 반드시 갚아야 할 원수이니, 반드시 이 원수를 갚고 난 다음에야 천지 사이에 떳떳이 설 수 있습니다. 방비하는 일은 더욱 잠시라도 잊을 수 없는데 다만 물력이 탕진되어 더이상 조치할 계책이 없습니다. 모든 방비에는 일을 다 중국군에만 믿고 있었는데, 중국군이 이미 철수하였으니 반드시 스스로 헤쳐나갈 계책을 수습해야 할 것입니다. 난리를 치른 이후로 생존한 군사가 적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병농(兵農)이 분리되지 않아 일반 백성을 군사로 쓰고 있으니, 비록 혹시 이름을 군적(軍籍)에 올려 어느 장수에게 소속시키더라도 다급한 일이 터지면 전혀 나라를 위할 마음이 없습니다. 이는 대체로 민력은 휴식을 시킨 뒤에 수습할 수가 있는 것인데 전후에 걸쳐 중국군에게 시달리고 또 국휼(國恤)까지 당하여 민생의 고혈이 여지없이 탕진되기 때문입니다. 조정이 깊이 생각하여 요역을 없애거나 공물을 감해주어 그들을 쉬도록 한다면 어찌 따르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저번에 백성의 부담을 견감한다는 명령이 한번 내리자 모두 감격하고 기뻐하였으나 그 뒤에 끝내 실지 혜택이 없기 때문에 도리어 군왕의 말을 부실하게 생각하니, 매우 한심합니다.
주사(舟師)의 일에 있어서는 안으로 묘당(廟堂)이 규획하고 밖으로 체찰(體察)이 경영하고 있으니 참으로 논의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이 저번에 남쪽으로 가서 직접 들어 보니, 정유년 이전에는 많은 수효의 주사와 판옥선(板屋船) 1백 척으로 삼도(三道)가 힘을 합쳐 함께 한산(閑山)에 머물러 있어 세력이 튼튼하였기 때문에 저 적들은 침범할 수 없는 형세였고 우리 나라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는데, 그 당시 패배한 이유는 주사에 있지 않고 지휘를 제대로 하지 못한 데에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주사가 많지 않아 삼도를 모두 합쳐 겨우 30여 척이니, 비록 한 곳에 모으더라도 방어될 리가 만무하고 또 각자 요해처에 분산되어 지키더라도 적이 나온다면 5∼6척의 주사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수찬(修撰) 홍서봉(洪瑞鳳)은 아뢰기를,
"요즘에 인심과 사습(士習)의 손상이 날로 심해지니 진작시키고 권장하는 방책이 없으면 안 되겠습니다. 난리가 일어난 이후 절의로 목숨을 바쳐 특별히 드러난 자는 문형(文衡)으로 하여금 《고려사(高麗史)》 절의전(節義傳)처럼 주전(主傳)을 찬집(撰集)하여 간행해서 반포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방비할 일에 대하여 비변사 여러 당상의 생각이 각자 있을 것이니, 오늘 탑전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다 말하라. 모책(謀策)이 혹 맞지 않더라도 남김없이 모두 말하면 대신(大臣)과 의논해 볼 수도 있다."
하니, 예조 판서 이정구가 아뢰기를,
"김상용이 계달한 언로가 막혀있다고 한 말은 참으로 오늘날의 병폐인데, 상께서 ‘그대가 지금 언관(言官)으로 있으니 다른 사람의 말을 기다릴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시니, 극히 감격스럽습니다. 이 말씀이 한번 나왔으니 대간(臺諫)이 그 누군들 할 말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난리가 일어난 지 10년인데 방비하는 일을 하나도 조치한 것이 없으니 신료(臣僚)들의 죄가 큽니다. 우리 나라의 병무(兵務)는 중국이나 왜국(倭國)과는 달라 평소에 호미를 쥐고 있던 백성을 갑자기 사변을 당하면 수령이 으레 하리(下吏)에게 되는 대로 그 수효만 채워 뽑아 보내게 하기 때문에 중도에 모두 도망가고 맙니다. 대체로 장수는 병사를 알고 병사는 장수를 안 뒤에야 적에 대응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장수가 병사를 모르고 병사가 장수를 모른다면 무슨 일을 이루겠습니까. 소신의 생각으로는, 각 고을이 병민(兵民)을 가려 뽑아 가령 한 고을에 1천명이 있다면 8백 명을 병사로 삼고 나머지는 농민으로 군량을 돕게 하며, 병사가 된 자는 궁시(弓矢)를 익히거나 조총(鳥銃)을 쏘게 하되 각도 별로 장부를 만들어 훈련 도감에다 소속시키고, 또 진관법(鎭管法)을 실시하여 위급한 일이 있으면 진관(鎭管)으로 하여금 먼저 거느리고 나오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훈련 도감의 군사는 상께서 친히 사열하시거나 글을 시험보여 상벌을 내리시고, 외방은 감사와 병사가 힘껏 교련시켜 몸이 팔을 움직이고 팔이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처럼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게 한다면 성취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좌찬성 한응인(韓應寅)은 아뢰기를,
"적들의 정황을 이곳에서 살펴볼 수는 없으나 사세로 볼 때 다시 침범할 우려가 없지 않은데, 우리 나라 수륙(水陸)의 방비책은 모두 갖추기가 어려운 형편이니 만약 대신을 보내 주사(舟師)를 요리하게 한다면 육병(陸兵)도 허술해질 것입니다. 오늘의 사세는 민력(民力)을 휴양시키는 것이 곧 근본인데 사실 김상용이 아뢴 말처럼 한 사람도 국사에 마음을 다하는 자가 없고 그럭저럭 날짜만 보내고 있으니, 이는 대체로 기습(氣習)이 고질화된 데다가 안일한 것이 풍조가 되어 일을 담당하여 봉행하는 자가 없어서 그런 것일 뿐입니다. 이를 전환시키는 일은 임금께서 언로를 열어 보고 듣는 길을 넓히며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 할 말을 다하게 하는 데에 있으니, 이는 곧 오늘의 급선무입니다."
하였다. 김상용이 아뢰기를,
"요즘 항간에서 소민(小民)들이 떠드는 말에, 궁금(宮禁)이 엄하지 않아 연줄을 타는 길이 매우 많다고 합니다. 성대(聖代)에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겠습니까마는 그 말을 들을 때 매우 불안하였습니다. 모든 근본이 되는 곳을 먼저 단속하지 않으면 안되니, 국가의 기강과 인심의 향배가 다 여기에 근본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떠도는 말을 신이 직접 들었기에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혹시 있을 수 있는 말이다. 무슨 일을 두고 한 말인가?"
하자, 김상용이 아뢰기를,
"낱낱이 들어 진달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정사(政事)와 형옥(刑獄) 사이에 밖의 말이 많이 있는 듯하니, 성명(聖明)의 오점이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그런 일이 없는데 그와 같은 말도 있던가. 들은 것이 있으면 말하도록 하라."
하니, 김상용이 아뢰기를,
"전일에 윤홍(尹宖)이 이해(李海)를 사주하여 상소한 뒤에 즉시 계하되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윤홍이 ‘오래도록 계하되지 않으니 필시 길조가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 일이 마침내 왕옥(王獄)022) 으로 돌아갔으니, 바깥 사람들은 다 윤홍이 은밀히 상의 의향을 탐지하고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윤홍이 궁금(宮禁)의 연줄을 탔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말했단 말인가?"
하니, 김상용이 아뢰기를,
"외간에 그와 같은 말이 나돕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때 나도 그 글을 보았다. 오래도록 계하되지 않아 필시 길조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그의 생각에 내가 반드시 그 말을 믿고 대간의 말을 의심한 것으로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말은 이와 같이 보는 것이 옳으니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김상용이 아뢰기를,
"회령 부사(會寧府使) 이수(李璲)가 회령에 제수되기 전에 꼭 될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마침내 그 자리를 얻으니 이 또한 외간의 말이 없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또한 그렇지 않다. 이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이곳에 와 있으므로 내 생각에 이제 만약 교체한다면 군사가 쉽게 흩어질 것이기에 우연히 말을 한 것이니, 이런 일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
하자, 김상용이 아뢰기를,
"이는 천만부당한 일이나 언관의 자리에 있으므로 들은 것을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김명원이 아뢰기를,
"김상용이 아뢴 말은 감히 반드시 이와 같은 일이 있다고 한 말이 아니고 외간에 들리는 말을 모두 진달하려는 뜻에서 그렇게 아뢴 것입니다. 옛사람의 말에 ‘그런 사실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 노력한다.’ 하였으니, 상께서 각별히 유념하소서."
하고, 이헌국은 아뢰기를,
"이런 말이 외간에 전파된 지 오래인데 김상용이 이와 같이 계달하니, 비록 봉명조양(鳳鳴朝陽)023) 이라 말해도 좋겠습니다. 군신간에 서로 경계하는 말은 요순의 시대에도 없지 않았습니다."
하고, 박홍로는 아뢰기를,
"난리 이후 궁궐이 여염 가운데에 있어 엄중하지 못하고 밖으로 드러나서 그런 것입니다. 왕자의 제택(第宅)은 더욱 드러나 비록 왕자가 모르는 일이 있더라도 중간의 무지한 사람이 왕자를 빙자하여 폐단을 일으키며, 심지어 그 노자(奴子)의 집에 출입하는 자도 궁노(宮奴)라고 자칭하고 경중(京中)의 강시(江市)는 물론 외방에까지 다 침학하는 일이 있으므로 소민(小民)이 매우 원망하여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왕자를 보양(輔養)하는 일을 난리 뒤에 전폐하였기 때문에 간혹 사리를 모르고 잘못 움직이는 때가 있으니, 각별히 학문을 권장하여 경계하고 조심하는 방도를 보이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와 같은 폐단이 있으면 법사(法司)가 금해야 하니, 이는 헌부의 책임이다."
하였다. 박홍로가 아뢰기를,
"아무리 그렇기는 하나 그때마다 금할 수는 없습니다. 사지 노자(事知奴子)는 혹 잘못을 깨닫게 할 수는 있겠지만 이 역시 말단의 일이고 왕자에 대하여는 교양시키는 도리가 따로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순화군(順和君)의 일은 소신의 생각에 국가에서도 잘못 대우하여 이렇게 되었다고 봅니다. 혈기가 충만하기 전에 오랫동안 적중(賊中)에 있어 필시 실성(失性)하였기 때문에 일을 처리하는 사이에 간혹 모르고 잘못 행하는 것입니다. 상께서는 비록 법을 중시하지만 왕자가 그곳에서 이따금 반성해볼 때 뉘우치는 일이 없지 않을 것인데, 이제 실성한 사람을 담장 속에 가두고 빗장을 단단히 걸어 출입하지 못하게 하면 원망하는 생각을 일으킬까 염려됩니다. 상께서 성 안으로 불러 들여 족속이나 궁궐 안의 절친한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깨어 있고 조용히 있는 때를 틈타 잡기(雜技)나 혹은 술자리를 통하여 곁에서 가르쳐 기어코 깨닫도록 하시면 스스로 뉘우칠 것이니, 은의(恩義)가 다 온전할 뿐 아니라 외방의 백성도 보전할 길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일체 법으로만 단속하게 하면 그저 그 실성만 더 유발시켜 은의의 사이에 아마도 어긋나는 일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김상용은 아뢰기를,
"박홍로의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신도 장계(狀啓) 속의 사건을 보았는데 필시 크게 놀란 나머지 실성한 소치이니, 평상적인 사람으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곳에서 인민을 구타하여 죽은 자가 있기도 하니, 어리석은 백성의 마음은 임금까지도 나를 보살펴주면 임금이고 나를 학대하면 원수라고 말하는데 하물며 왕자에게 어찌 뜻밖의 변고가 없겠습니까. 만약 서울로 옮겨 담장을 쌓고 주식(酒食)을 넉넉히 주면 비록 갇혀 있더라도 감격하는 마음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김명원은 아뢰기를,
"당초에 신들이 서울로 옮기자고 계달한 말도 이 뜻입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그곳에 난처한 일이 많다고 합니다. 박홍로와 김상용의 말이 매우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그 일을 말하기가 미안하고 또 부끄러우나 사체로 말하면 어찌 서울에 둘 수 있겠는가. 옛날에 양녕 대군(讓寧大君)이 매우 광패(狂悖)하였으므로 외방에 두었으나 제어하지 못하였다. 예전에도 광패한 기질이 있는 자가 한두 사람이 아니었지만 이번 경우는 너무도 특별하다."
하였다. 박홍로가 아뢰기를,
"소신의 뜻은 서울에서는 담장을 높이 쌓아 출입을 막을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금부 도사가 그 전에 왕자를 조용히 모시고 이야기를 해 보았는데, 사리의 이해와 경중을 모르는 것이 없었고 가끔 심기가 고르지 못할 때만 그와 같이 발작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말하는 것은 미안하긴 하나 내가 만약 말하지 않으면 조정이 어떻게 알겠는가. 그의 성기(性氣)는 극히 이상하여 어릴 때부터 천성적으로 잔인하였다. 이제 저곳에서 하는 일이 모두 사람을 때려 죽이는 짓으로 잔혹하기 그지없으니, 더욱 괴롭기만 하다. 비록 주색잡기(酒色雜技)와 같은 것에 광패(狂悖)한 사람이라면 그래도 괜찮겠으나 이 사람은 그렇지 않다. 어릴 때부터 새나 짐승일지라도 반드시 잔인하게 상해시켜야 만족해 하였다. 대체로 이 또한 나 때문이니, 조정 대신과 얼굴을 마주하고 말할 수가 없다."
하였다. 김명원이 아뢰기를,
"대마도 사람이 만약 이번에 나온다면 접대할 대책을 어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접대할 대책을 논의하자는 것인가. 만약 대화로 협상을 하자고 나오면 접대할 수 있으나 무기를 가지고 나오면 어떻게 접대할 수 있겠는가. 이 적은 불과 수천 명이 바다를 건너 와도 하삼도(下三道)를 쓸어버릴 수 있는데, 어찌 꼭 구차하게 강화를 하여 개시(開市)하려는 이유 때문에 우리 나라에 고개를 숙이겠는가. 그럴 리는 만무하다."
하자, 김상용이 아뢰기를,
"대체로 팔도가 쑥밭이 된 지금 오늘 계책을 세워 내일 방어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반드시 언로를 개방해서 많은 사람의 계책을 수집하여야 하는데, 초야의 말이라도 오활하다고 하여 소홀히 하지 않으면 언로가 열려 좋은 계책이 들어올 것입니다. 그리하여 채택할 만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시행하되 대신에게 위임하여 진심으로 성공하길 권면함으로써 각기 자신의 직임을 다하게 해야 합니다. 군사를 조련하고 군량을 저축하는 일까지도 다 대신에게 맡겨 한(漢)나라 때 소하(蕭何)는 군량을 관장하고, 장양(張良)은 계책을 짜내고, 한신(韓信)은 군대를 지휘했던 것처럼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오랜 시일을 두고 성공하기를 면려한다면 복수할 수 있는 바탕이 또한 여기에 있게 될 것입니다. 상께서 마음을 바르고 맑게 하여 기강을 세우고 군율을 닦으신다면 국력이 커지는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미시(未時)에 자리를 파하고 나갔다.
- 【태백산사고본】 82책 134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24책 195면
- 【분류】외교-왜(倭) / 외교-명(明) / 인사-관리(管理) / 윤리-강상(綱常) / 정론-정론(政論) / 출판-서책(書冊) / 왕실-종친(宗親)
- [註 022] 왕옥(王獄) : 의금부.
- [註 023] 봉명조양(鳳鳴朝陽) : 봉황새가 아침 해가 떠오르는 동쪽 산의 오동나무에서 운다는 것으로 세상에 보기 드문 길조를 말한다. 《시경(詩經)》 대아 권아(大雅卷阿).
원문
○巳時, 上御別殿, 大臣及備邊司堂上引見。 上曰: "春汛已迫, 賊變朝夕可虞。 若有風塵之警, 不無如前之禍。 各陳防備之策。 備邊司必有長算, 如此之事, 在所當先。 他餘論議, 今日何關?" 左議政李憲國曰: "防備之策無他, 收集精兵, 鍊習弓矢, 修城池、備器械, 此爲上策。 南方之事, 備邊司, 雖三令五申, 如慶尙一帶, 蕩敗十餘邑, 盡爲空虛。 到此地頭, 亦難下手。 李德馨。 今已下去。 李元翼時未知幾許措置, 南方之事, 至爲踈闊。 全羅道舟師, 十餘隻來泊, 則亦可以爲備, 而賊若多數出來, 則未知以此抵當。 莫得善策, 日夜憂憫。 領相熟知南方道路要險, 而近以病不出, 至於議得, 亦爲妨礙。 觀賊向日請和之意, 則今已六七月, 而迄無消息。 未知有何意慮。" 右議政金命元曰: "在下之人, 孰不欲陳達所見? 但無表表長策, 亦不知當處之如何。 大槪物力不足, 亦不得如意矣。" 上曰: "更無他議。 設若大賊復熾, 則宗社存亡之攸係, 國家未知稅駕於何也。 有唐兵可以禦之乎?" 憲國曰: "他事則不須言也, 但當朝夕待變而已。 不獨此也, 北方六鎭, 極爲孤危。 凡事慮此則生。 彼北方乃祖宗建業之地, 如此虛踈, 尤爲可慮。" 上曰: "北方雖如此, 自然以某條爲之, 南賊不可不慮。 彼賊豈有忘我之理哉? 今以賊退爲言者, 此乃誤人之人。 彼賊之退, 非棄我國, 而不顧也。 不知以何心退去, 若聞天兵盡撤, 則再肆凶毒, 安保其無? 兵法曰: ‘將欲取之, 必復與之。’ 以退去, 爲賊勢稍緩者, 誤國事甚矣。 宋 汴京時, 金人纔退, 動色相慶。 其後金兵大擧, 皆束手就縛, 甚爲可笑。" 憲國曰: "宋時文勝, 武略不競。 我國亦如此矣。 今欲倚恃武夫, 以爲長城, 而武夫亦不好射。 文恬武嬉, 專不事事, 此亦天爲之耶? 有時試射, 以爲賞格, 別無人才輩出。 壬辰年後, 武弁等, 皆是新人, 不識大義, 勞憊之事, 皆懷厭避。 國事至此, 極可慮也。" 上曰: "大槪此賊, 蹂躪我國, 任意作挐, 無端退去, 必有其意。 今年雖或不來, 一遭決局, 雖非智者, 可以知之。 非徒講和一事, 至於興販, 失本如是, 予意以爲, 賊必復來。 今當上下一心, 以防此賊, 然後大小之事, 皆可爲之。" 憲國曰: "對馬島之人, 若如前納款, 未知何以待之? 渠之國中有事云者, 恐非虛言。 大槪發遣御史, 南方付種形勢及舟師器械, 摘奸而來宜當。 防禦之事, 所恃者紀綱, 紀綱不立, 故軍律解弛。 雖有百萬精兵, 何以用之? 今當恢復之初, 必恢張公道, 然後賞罰分明, 國家自然可以維持矣。" 上曰: "李舜臣戰勝之後, 皆致力於舟師, 勝敗無常。 未知舟師, 爲必勝之道。 渠若不爲交鋒, 先爲下陸, 則雖舟師浮於海, 何益之有? 徒爲專力於舟師, 不爲陸備, 則如方言所謂, ‘矢落處立貫革。’ 此非遠慮。" 憲國曰: "大槪力不足於水陸, 故如是耳。 若使下陸, 則果如上敎。 我國下陸之地甚多, 海道通闊。 若來於防備虛疏之處, 則未知何以爲之? 前朝, 倭雖多數出來, 未若壬辰之變。 前朝。 則皆以奇伏捕獲, 而我國, 則數百年民不知兵, 宜乎一敗潰散矣。" 命元曰: "此賊必欲貽害於我國, 故雖深山窮谷, 有人家處, 皆作賊矣。" 憲國曰: "秀吉之死, 天似助之。" 上曰: "不可以天助信之。 安知不有他秀吉乎?" 右參贊洪進曰: "我國專恃唐兵, 鎭管之法, 廢而不行。 凡陣法旗幟, 一依唐兵之制, 在平時, 猶之可也, 今則非唐非鄕, 不成模樣。 《紀效新書》, 勢難遵行。 請依平時鎭管制勝方略之法, 守令親自領率, 各別訓鍊。 納粟之事, 當其急迫之時, 或用士大夫所藏之穀, 仍書姓名於納粟之類, 渠等非自己納粟之事, 故皆以爲羞, 有若禁錮之爲。 且校生納粟者, 五品以下, 則皆定軍役, 多有怨心。 如此之事, 別樣處置爲當。" 憲國曰: "自上西幸之時, 扈行臣僚若干人, 而其時士族, 各爲父母妻子, 退伏草野, 及其還都, 各自來仕。 渠亦不無靦面之事, 後樣如此, 則君臣之義, 不無相忘之理矣。 壬辰之後, 喪紀一事, 專廢不行, 極爲寒心。 不可不申明敎化, 至於旌表節義之人, 在所當先, 禮曹專不抄出。 士大夫家, 則或有旌門之處, 而深山窮谷, 伏節死義之人, 非但不得載錄於褒崇之典, 禮曹亦有任意刪去者。 大槪此事, 皆是有關於綱常, 雖有惡心之人, 見此不無感化之理矣。" 上曰: "今番兵部咨文以爲: ‘今請留之事, 非朝鮮之本意云。’ 此何意耶? 未知所指, 恐有情外之虛言, 多有未安之意。 其事則必不成矣, 末又以歸罪於臣下云。 其時予意, 則不欲歸罪於臣下, 而其咨所云如此。 大槪前日作文之事, 以促大命云, 終始執此而爲之, 此承文院常時咨揭之事, 不爲詳察而然也。" 右贊成沈嘉壽曰: "傳敎之言至矣。 第其言, 表出而觀之, 則果爲驚怪, 無端看過, 則別無所害。 譬喩之言, 不至甚妨。" 上曰: "我國於文, 本不能製。 不小咨文, 摩度然後爲之可也, 而卒以此誤事。 文書之事, 最可詳察。" 大司諫金尙容曰: "自上以春汛將迫爲憂, 屢問於備邊司, 聖慮至矣, 愚臣所見, 則不在於此。 自上卽位, 于今四十年將迫, 別無以言獲罪之人, 循默成風, 無一人以直言上達。 大官悠悠, 小官泛泛, 豈皆無用之人乎? 自上示以容受之意, 然後草野之言, 可以上聞。 或有上疏, 備陳民間疾苦之狀, 而只下該司, 一無施爲之事, 故頃日以天變求言, 而無一人抗章直言者。 孟子曰: ‘訑訑之色, 拒人於千里之外。’ 小臣之意, 以爲今日之憂, 在於言路杜絶, 而不在於此賊也。 在此大臣, 重臣皆不能盡言竭忠, 引見之時, 泛然陳達, 退去之後, 以草記來呈。 如此而賊可退乎?" 憲國曰: "金尙容之言, 誠是矣。 近來筵中, 無一人竭誠上達, 國家之事, 置之尋常。 小臣年近八十, 山陵事完後, 自當退去。 大槪言路杜絶, 存亡攸係。" 尙容曰: "宋時言路杜絶, 故有城門閉、言路開之語。 我國之事, 紀綱頹廢, 危亡日久, 而言路猶塞。 《易》卦有天地之氣, 上下交合爲《泰》, 不交爲《否》。 上下之情相通, 然後國事可爲矣。" 上曰: "此言是則是矣。 他人言則可也, 旣在言地, 何必假於他人? 方在其地, 如言他人之事何也?" 大司憲朴弘老曰: "金尙容所達之事, 非今日之謂也。 泛論近來時習, 自上豈不知之? 人君居萬人之上, 大言則天下治亂, 係於一身。 雖堯、舜, 亦不能獨成, 必待群下之協贊, 然後可以致治。 設官置位, 非爲虛名。 自上必使下情相通, 俾盡其責, 則國事可爲。 若身在其職, 不能察事, 則渠之過矣。 大臣, 乃股肱心膂, 氣血流通, 則四支和平。 近日待大臣之道, 恐不如前日也。" 尙容曰: "燕昭王, 得樂毅而復讎, 越王句踐, 得范蠡而滅吳。 蜀 先主之於孔明、宋 太祖之於趙普, 皆是也。 近日自上, 無委任責成之意, 故悠泛度日, 未見着實之事。 如此而復讎, 因是而禦敵, 萬無其理。" 弘老曰: "倭賊在境之日, 則我國不可謂保存也。 以人心言之, 則萬世必報之讎。 必報此讎, 然後可以立於天地間。 防備之事, 尤不可一刻暫忘。 第物力蕩竭, 更無措置之策。 凡備禦之事, 皆恃天兵, 天兵已撤, 則必須收拾, 可爲自振之計, 而經亂以後, 軍士生存, 亦爲不少, 兵農不分, 以民爲兵。 雖或籍名, 屬於某將, 一有緩急, 頓無爲國之心。 大槪民力休息, 然後可以收拾, 而前後天兵, 又遭國恤, 生民膏血, 竭盡無餘。 朝廷若能軫念, 或除徭役、或減貢物, 使之休養, 則豈有不從之理? 頃日蠲除之令一下, 而百姓皆感激懽悅, 其後竟無實惠, 故反以王言爲不實, 極爲寒心。 舟師之事, 內而廟堂規畫, 外而體察經營, 固無容議, 臣頃往南方, 親自聞見, 則丁酉以前, 舟師多數, 板屋百隻, 三道合力, 同住閑山, 而聲勢完固, 故彼賊無來犯之勢, 我國無畏懼之心。 其時之敗, 不在舟師, 而在於指揮之失策。 今則舟師不多, 合三道僅三十餘隻。 雖聚一處, 萬無防禦之理, 又各分把要害, 賊若出來, 則以五六隻舟師, 可以禦之乎?" 修撰洪瑞鳳曰: "近來人心士習, 壞敗日甚, 不可無振作勸勵之方。 亂離以後, 以節義亡身, 章章可見者, 令文衡, 撰集主傳, 如《麗史節義傳》, 刊行頒布爲當。" 上曰: "防禦之事, 備邊諸堂上之意, 各有所在。 今日榻前, 悉陳所懷。 謀策雖或不中, 盡言不諱, 則或與大臣議之。" 禮曹判書李廷龜曰: "金尙容啓達, 言路杜塞之言, 眞當今病痛。 自上以爲, 旣在言地, 何待他人之敎, 極爲感激。 此言一出, 臺諫孰不盡言? 亂後十年防備之具, 無一措置, 臣僚之罪大矣。 我國兵(判)〔制〕 , 與天朝與倭國皆異, 常時荷鋤之民, 卒遇事變, 則守令例使下吏, 苟充其數而抄送, 故中路皆逃。 大槪將知其兵, 兵知其將, 然後可以應敵。 若將不知兵, 兵不知將, 則何事可成? 小臣之意以爲, 各官別出兵民, 假使一郡, 有一千名, 則八百爲兵。 以農民助兵糧, 爲兵者則或習弓矢, 或放鳥銃, 各道成冊, 統屬於訓鍊都監, 且爲鎭管之法, 有急則使鎭管, 先率而出之, 且訓鍊都監之軍, 自上或親閱武, 或講書以爲賞罰, 外方則監、兵使, 專意敎鍊, 如身使臂, 如臂使指, 惟其運動, 則庶有成就矣。" 左贊成韓應寅曰: "賊中情形, 在此雖不能詗察, 以事勢觀之, 不無再肆之患。 我國水陸之具, 勢難俱備。 若遣大臣, 料理舟師, 則陸兵亦爲虛疏, 今日事勢, 休養民力, 乃爲根本, 而果如金尙容所 啓之辭, 無一人盡心國事, 悠泛度日。 大槪氣習已痼, 偸靡成風, 無擔當奉行者而然耳。 轉移之機, 在於君上, 開言路而廣聰明, 使之各得盡言, 則此乃今日之急務也。" 尙容曰: "近來閭巷間小民, 喧傳宮禁不嚴, 夤緣之路甚多云。 聖代豈有如此之事乎? 聞之甚爲未安。 本源之地, 不可不先。 國家紀綱、人心向背, 皆本於此。 傳播之言, 臣所親聞, 不敢不達。" 上曰: "容或有之。 何事云乎?" 尙容曰: "不可歷數而陳達矣。 或政事刑獄之間, 多有外言。 聖明之累, 無大於此。" 上曰: "予則無是事。 或有如此之言耶? 有所聞, 則言之可也。" 尙容曰: "頃日尹宖, 指嗾李海, 上疏之後, 其時趁不下, 故宖曰: ‘久不下, 必有吉兆云, 而其事竟歸於王獄。 外人則皆以爲, 尹宖陰伺上意而云然矣。" 上曰: "然則以爲, 尹宖攀緣宮禁, 而爲之云乎?" 尙容曰: "外間有如此之言矣。" 上曰: "其時予亦見其文矣。 久不下, 必有吉兆云者, 渠以爲, 予必信其言, 而疑臺諫之言也。 其言, 如此見之可也, 不可如是言之。" 尙容曰: "會寧府使李璲, 未拜會寧之前, 亦以爲俺當爲之云, 而終乃得之, 此亦不無外言。" 上曰: "此亦不然矣。 李璲領軍來此, 予以爲, 今若遞易, 則軍士易散, 故偶然言之。 如此之事, 大不然。" 尙容曰: "此千萬無理之事, 旣在言地, 所聞不敢不達。" 命元曰: "金尙容所啓之言, 非敢謂必有如此之事, 外間所聞, 盡爲陳達之意也。 古人曰: ‘有則改之, 無則加勉。’ 自上別爲留念。" 憲國曰: "如此之言, 外間傳播久矣。 尙容如是啓達, 雖謂之鳳鳴朝陽可矣。 君臣之間, 交戒之言, 雖堯、舜之時, 亦不可無矣。" 弘老曰: "亂後, 宮闕在閭閻之中, 不能謹密, 淺露而然矣。 至於王子第宅, 尤爲淺露, 雖有王子不知之事, 中間無知之人, 憑藉作弊, 出入其奴子之家者, 亦稱宮奴, 京中江市, 至於外方, 皆有侵虐之事, 小民不勝冤苦。 且王子輔養之具, 亂後專廢, 故或有不知, 而妄作之時, 別爲勸學, 以示戒飭之方宜當。" 上曰: "有如此弊端之事, 法司禁之, 此憲府之責也。" 弘老曰: "雖如此, 不可每每爲之, 而事知奴子, 雖或警覺, 此亦末(年)〔矣〕 。 敎養之方, 自有道理。 且順和君事, 小臣之意以爲: ‘國家亦待之失宜, 致有此也。’ 血氣未盛, 久在賊中, 必是失性, 故作事之際, 或有不知而妄作。 自上雖以法爲重, 而王子在彼, 有時省念, 不無悔悟。 今使失性之人, 處於圜墻之中, 而嚴其扄鑰, 俾不得出入, 恐致怨懟之意。 自上招入城中, 或令族屬及宮闈親切之人, 因其醒心靜處之時, 或因雜技、或因酒盞, 從傍敎誨, 期於省覺, 則自(誨)〔悔〕 。 非徒恩義兩全, 外方之民, 亦有保全之路矣。 若令一切繩之以法, 則適足以增其失性, 而其於恩義之間, 恐不無卒戾之事。" 尙容曰: "朴弘老之言, 誠是矣。 臣亦觀其狀啓之事, 必是驚愕之餘, 失性所致, 不可待以平常之人。 在彼(歐)〔敺〕 打人民, 或有死者。 愚氓之心, 至於人君, 亦曰: ‘撫我則后, 虐我則讎。’ 況於王子, 豈無意外之變乎? 若使移置京城, 高其墻垣、優其酒食, 則雖在幽囚之中, 不無感激之心矣。" 命元曰: "當初, 臣等 啓達, 移來京城之言, 亦此意也。 聞其處, 多有難處之事云。 朴弘老、金尙容之言, 至爲宜當。" 上曰: "予言之未安, 亦多羞愧。 以事體言之, 豈有置在京中之理? 古時讓寧大君, 最爲狂悖, 故置在外方, 而不能制禦。 前此有狂悖之氣者, 非一, 此則極爲殊常。" 弘老曰: "小臣之意, 京中不必峻其墻垣, 以防出入。 禁府都事曾與王子, 從容侍話, 則利害輕重, 無不知之, 而有時氣不平, 則發作如是矣。" 上曰: "予言之雖未安, 予若不言, 朝廷何以知之? 其爲性氣, 極爲殊常, 自少時殘忍成性。 今在彼處, 所爲之事, 皆打殺人物, 極其殘酷, 尤可悶也。 雖雜技酒色, 爲他狂悖之人, 則猶之可也, 此則不如此, 自少雖於禽獸, 必殘傷, 然後快於心矣。 大槪此亦予之故也。 不可對面, 說與朝廷。" 命元曰: "對馬島之人, 今若出來, 則接待之策, 何以爲之?" 上曰: "此時接待之策, 議之乎? 若以言語來之, 則可以接待, 若以干戈來之, 則何以爲之? 此賊雖數千渡海, 可以掃盡下三道。 何必區區之和, 以開市之故, 俛首於我國? 萬萬無理矣。" 尙容曰: "大槪八路蕩然, 今日設策, 明日禦之, 萬無其理。 必須開言路集群策, 雖草野之言, 勿以疏遠而忽之, 則言路開, 而好謀來矣。 如有可採, 必施於事。 委任大臣, 推誠責成, 使之各盡其器, 至於鍊兵儲糧, 各付大臣, 如漢時蕭何管糧、張良運籌、韓信用兵, 久久責成, 則此乃根本復讎之道, 亦在此, 而自上端本淸源, 立紀綱、修軍律, 則國勢張旺, 可以見效矣。" 未時罷黜。
- 【태백산사고본】 82책 134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24책 195면
- 【분류】외교-왜(倭) / 외교-명(明) / 인사-관리(管理) / 윤리-강상(綱常) / 정론-정론(政論) / 출판-서책(書冊) / 왕실-종친(宗親)
선조 34년 (1601) 2월 10일
선조실록134권, 선조 34년 2월 10일 기묘 3/3 기사 / 1601년 명 만력(萬曆) 29년
대신 및 비변사 당상과 일본 침입에 대한 방비책을 상의하다
국역
사시에 상이 별전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춘신(春汛)이 임박하였으니 적변(賊變)이 언제 있을지 염려스럽다. 만약 전란(戰亂)이 일어나면 지난날과 같은 재앙이 없지 않을 것이니, 각자 방비책을 말해 보라. 비변사는 필시 묘안이 있을 줄로 안다. 이와 같은 일은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한다. 기타 논의야 오늘날 무엇이 중대하겠는가."
하니, 좌의정 이헌국(李憲國)이 아뢰기를,
"방비책은 별다른 것이 없고 정병을 수습하여 궁시(弓矢)를 연습시키며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기계를 준비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남방의 일은 비변사가 아무리 명을 내리고 당부하더라도 경상도 일대는 탕패하여 10여 고을이 모두 텅 비었으니, 이런 상황에서는 또한 손을 쓰기가 어렵습니다. 이덕형(李德馨)이 지금 내려갔는데, 이원익(李元翼)이 현재 얼마나 조치를 하였는지 모르겠으나 남방의 일이 극히 허술합니다. 전라도는 주사(舟師) 10여 척이 정박하고 있으니 방비를 할 수 있을 것이지만, 적이 만약 많은 병력으로 나온다면 과연 이 정도의 군사로 막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도저히 좋은 대책이 없어 밤이나 낮이나 걱정입니다. 영상이 남방의 도로와 요새지를 익히 아는데 요즘 병으로 출사하지 못해 논의하는 일에 있어서도 차질이 있습니다. 적이 전에 화친을 청한 뜻에 대하여는 지금 6∼7개월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우의정 김명원(金命元)은 아뢰기를,
"밑에 있는 사람으로 그 누군들 자기의 소견을 진달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다만 뛰어난 묘책이 없어 어떻게 조처해야 할지 모르고 있습니다. 대개는 물력이 모자라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다른 의논은 없는가. 만약 대적(大賊)이 다시 침략해 온다면 종사(宗社)의 존망에 관계된 일로 국가가 어찌될지 모를 일이다. 당병(唐兵)이 있으면 그들을 막을 수 있겠는가?"
하니, 이헌국이 아뢰기를,
"다른 일은 말할 것이 없고 오직 조석으로 변란에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고 북방 육진(六鎭)도 극히 위태로우니, 모든 일은 이쪽을 돌아보면 저쪽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북방은 조종(祖宗)께서 대업(大業)을 세우신 곳인데 이와 같이 허술하니 더욱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북방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연 모종의 대처를 취할 수 있으나, 남쪽의 적은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저 적들이 어찌 우리를 잊을 리가 있겠는가. 오늘날 적이 물러갔다고 말을 하는 자는 곧 남을 망치는 사람이다. 저 적들이 물러간 것은 결코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을 그만두려는 것이 아니다. 무슨 생각으로 물러갔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중국군이 전부 철수했다는 말을 들으면 다시 흉독을 부릴 것이다. 어찌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 병법에 ‘장차 취하고자 할 때는 반드시 먼저 주어라.’ 하였거니와, 그들이 물러간 것을 가지고 적세가 조금 약해졌다고 하는 것은 국사를 그르침이 큰 것이다. 송(宋)이 변경(汴京)에 도읍하고 있을 때 금인(金人)이 잠시 물러가자 기뻐서 서로 경하하였으나, 그 후에 금병(金兵)이 대거 침입하여 모두 속수무책으로 포박을 당하였으니, 매우 가소로운 일이었다."
하니, 이헌국이 아뢰기를,
"송나라 때는 문교(文敎)가 우세하고 무략(武略)이 부진하였는데 우리 나라도 그와 같습니다. 이제 무부(武夫)에게 의지하여 국가의 안전을 꾀하려고 하나 무부도 또한 무술을 좋아하지 않아 문무 관원이 안일에 젖어 전혀 일을 보지 않으니, 이 또한 천명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따금 시사(試射)를 보여 상격(賞格)을 시행하여도 특별히 인재가 배출되지 않습니다. 임진년 이후의 무변(武弁)들은 모두 신인들로서 대의(大義)를 몰라 수고롭고 힘든 일은 다 싫어하고 회피합니다. 국사가 이에 이르렀으니 염려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체로 이 적들은 우리 나라를 유린하여 저들 마음대로 소란을 피우다가 까닭없이 물러갔으니, 반드시 의도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금년에는 혹시 오지 않더라도 한번 결판을 내려고 할 것은 영리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강화를 청한 한 가지 일만 아니라 무역을 하는 일에 있어서도 그와 같이 신의를 잃고 있으니, 나의 생각에는 적이 반드시 다시 올 것으로 안다. 이제 마땅히 위아래가 한마음이 되어 이 적을 막은 다음에야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이헌국이 아뢰기를,
"대마도(對馬島) 사람들이 만약 전처럼 정성을 보인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습니까. 그들 나라에 사건이 있다고 한 것은 헛소리가 아닌 듯합니다. 어사(御史)를 보내 남쪽의 파종(播種)에 관한 실상과 주사(舟師)의 기계(機械)에 대한 실태를 적간하여 오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방어하는 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기강입니다. 기강이 서지 않으므로 군율이 해이해지니, 아무리 백만 정병이 있더라도 어디에 쓰겠습니까. 지금은 회복하는 초기이니, 반드시 공도(公道)를 신장시킨 연후에야 상벌이 분명해질 것이며 국가가 자연 유지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순신(李舜臣)이 승전한 뒤로 모두 주사(舟師)에 힘을 쏟고 있는데, 승패는 무상한 것이라 과연 주사에 주력하는 것이 필승의 계책이 될지 모르겠다. 그들이 만약 교전을 하지 않고 먼저 하륙(下陸)한다면 아무리 주사가 있더라도 해상에 떠 있기만 할 것이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주사에만 전력하고 육지의 방비는 하지 않는다면 속담에 이른바 화살이 떨어진 곳에 과녁을 세운다는 격이 될 것이니, 이는 원대한 생각이 아니다."
하니, 이헌국이 아뢰기를,
"대체로 힘이 수륙(水陸)의 방비에 부족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할 뿐인데, 만약 하륙한다면 사실 상의 하교와 같은 상황이 될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하륙할 곳이 매우 많고 바닷길이 널리 통하니, 만약 방비가 허술한 곳으로 온다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전조(前朝) 때 왜적이 다수 나왔지만 임진년 변란과는 달라 전조에서는 그때마다 기복병(奇伏兵)으로 포획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수백 년 동안 백성이 병란을 모르고 살았으니, 단번에 패하여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고, 김명원은 아뢰기를,
"이 왜적들은 기필코 우리 나라에 피해를 끼치려고 하였기 때문에 아무리 깊은 산골이라도 인가가 있는 곳은 모두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하였다. 이헌국이 아뢰기를,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죽은 것은 하늘이 도운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늘이 도운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또 다른 수길이 있는지 어찌 알겠는가."
하였다. 우참찬 홍진(洪進)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오로지 중국군만 믿고서 진관법(鎭管法)을 폐지하여 시행하지 않고 모든 진법이며 깃발을 중국군의 법대로 따르고 있으니, 태평무사할 때는 그래도 괜찮지만 지금은 중국식도 아니고 우리의 재래식도 아니어서 모양이 말이 아닙니다. 《기효신서(紀效新書)》는 형세상 그대로 따라 행하기 어려우니 평소에 시행해 온 진관법과 《제승방략(制勝方略)》의 법에 의하여 수령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각별히 훈련하게 하소서. 곡식을 바치는 일은 나라가 급박한 때를 당하면 간혹 사대부가 저장해 둔 곡식을 쓰면서 그들의 성명을 곡식을 바친 사람들 속에 함께 기록하기도 하는데,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가 곡식을 바친 일이 아니므로 모두 부끄럽게 생각하여 금고(禁錮) 처분을 받은 것처럼 여깁니다. 그리고 교생(校生)으로 곡식을 바친 자 중에 5품 이하는 모두 군역(軍役)에 충정하므로 원망이 많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각별히 조처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고, 이헌국은 아뢰기를,
"상께서 서행(西幸)하실 때 호가(扈駕)한 신하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사족(士族)은 각자 부모 처자를 위하여 초야에 물러가 있다가 상께서 환도(還都)하시자 각자 와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으니, 그들도 부끄러운 마음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나중에도 이와 같이 한다면 군신간의 의리를 잊어버릴 리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임진년 이후로 상기(喪紀)에 관한 일을 전폐하고 행하지 않아 극히 한심하니, 상례를 신명(申明)하고 교화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절의를 세운 사람을 정표(旌表)하는 일은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인데 예조는 전혀 초출(抄出)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대부의 집은 혹 정문을 한 곳이 있기는 하지만 깊은 산골에서 절의에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포숭(褒崇)하는 은전에 기록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예조도 임의대로 삭제하는 일이 있습니다. 대체로 이 일은 모두 강상(綱常)에 관계가 있으니 비록 나쁜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를 보면 감화를 받을 리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 병부의 자문에 ‘이번에 주둔을 요청한 일은 조선의 본의가 아니다.’ 하였는데 이는 무슨 뜻인가? 그 의도를 알 수 없으나 아마 사실 밖의 헛된 말이 나돌아 미편해 하는 뜻이 많이 있는 듯하니, 그 일은 필시 성사되지 않을 것이다. 끝부분에 또 신하에게 죄를 돌렸다고 하였으니, 그 때에 나의 생각은 신하에게 죄를 돌리려고 하지 않았는데 그 자문에 한 말이 이와 같다. 대체로 전일에 글을 짓는 일로 인하여 국운을 위태롭게 한다고 한 일도 있지만 시종 그 태도를 고치지 않고 그대로 하고 있다. 이는 승문원이 평소에 자문과 게첩에 관한 일을 자세히 살펴서 하지 않아 그런 것이다."
하니, 우찬성 심희수(沈喜壽)가 아뢰기를,
"전교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다만 그 말을 크게 부각시켜 보면 과연 놀라우나 보통으로 보아 넘기면 별로 문제될 것은 없으니, 비유한 말이 그다지 방해되지는 않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문장을 본디 잘 제술하지 못하니 중대한 자문은 잘 다듬은 뒤에 보내는 것이 옳았을 것인데 끝내 그렇게 하지 않아 일을 그르쳤다. 문서에 관한 일은 무엇보다도 자세히 살펴서 해야 한다."
하였다. 대사간 김상용(金尙容)이 아뢰기를,
"상께서 춘신(春汛)이 가까워지는 것을 근심하여 자주 비변사에 대책을 물으시니 성상의 생각이 깊으십니다. 그러나 신의 견해는 그 점에 있지 않습니다. 상께서 즉위하신 지 이제 40년이 다가오는데 특별히 직간을 하다가 죄를 얻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침묵을 지키는 것이 풍조가 되어 한 사람도 바른 말로 상달한 적이 없고 대소 관원이 그럭저럭 안일하게 날짜만 보냈는데, 그들이 어찌 모두 쓸모 없는 사람이겠습니까. 상께서 수용하시는 뜻을 보이신 뒤에 초야의 말이 위에까지 올라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상소하여 민간의 고통에 관한 실상을 갖추어 개진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저 해사(該司)에 내리기만 할 뿐 하나도 시행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저번에 천변(天變)으로 직언을 구하였지만 한 사람도 상소하여 직언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자만에 차있는 자세는 사람을 천리 밖에서 거절한다.’ 하였습니다. 소신의 생각에는, 오늘날의 근심은 언로(言路)가 두절된 데 있고 이들 왜적에 있지 않다고 봅니다. 이곳에 있는 대신이나 중신들이 모두 할 말을 다하여 충성을 바치지 않고 인견(引見)하실 때는 보통으로 진달하고 물러간 뒤에는 초기(草記)로 와서 바치니, 이와 같이 하고서도 적을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헌국이 아뢰기를,
"김상용의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요즘 경연에서 한 사람도 정성을 다하여 상달하는 자가 없고 국가의 일을 보통으로 보아 넘깁니다. 소신이냐 나이가 80이 가까우니 산릉(山陵)의 일이 끝난 뒤에는 물러갈 것입니다마는, 대체로 언로의 두절은 국가의 존망에 관계됩니다."
하였다. 김상용이 아뢰기를,
"송나라 때 언로가 두절되었기 때문에 성문은 닫고 언로는 열어야 한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우리 나라의 일은 기강이 무너져 위급해진 지 오래인데 언로마저 막혀 있습니다. 《주역(周易)》 괘(卦)에 천지의 기운이 위아래가 서로 합하는 것이 태(泰)가 되고 합하지 않는 것은 비(否)가 되니, 위아래의 마음이 서로 통한 뒤에야 국사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옳기는 옳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이 말을 한다면 괜찮지만 언관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어찌 다른 사람을 끌어대는가. 지금 그 자리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의 일을 말하듯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자, 대사간 박홍로(朴弘老)가 아뢰기를,
"김상용이 진달한 일은 오늘을 두고 한 말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요즘의 풍조를 논한 것입니다. 상께서 어찌 그런 사실을 모르시겠습니까. 임금은 만인의 위에 위치하므로 크게 말하면 천하의 치란이 그 한 몸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요순 같은 성군이라도 혼자서 이루지는 못하고 반드시 뭇 신하들의 협조를 받은 뒤라야 태평 정치를 이룰 수 있었으니, 관직을 설치한 것은 쓸 데 없이 한 것이 아닙니다. 상께서 반드시 아랫사람의 마음이 서로 통해져 그 책무를 다하도록 한다면 국사를 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자신이 그 관직에 있으면서 일을 살피지 못하면 이는 그의 잘못입니다. 대신은 임금의 팔다리이며 심복이므로 기혈(氣血)이 유통하면 사지가 화평해지는데, 요즘 대신을 대우하는 도는 전일보다 못한 듯합니다."
하고, 김상용은 아뢰기를,
"연 소왕(燕昭王)이 악의(樂毅)를 얻어 원수를 갚는 일과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범여(范蠡)를 얻어 오(吳)를 멸망시킨 일과 촉(蜀) 선주(先主)가 제갈공명(諸葛孔明)을 대한 일과 송 태조(宋太祖)가 조보(越普)를 대한 것 등이 다 그런 경우입니다. 요즘 상께서 임무를 맡기고 그것을 완성하도록 독책하시는 뜻이 없기 때문에 그럭저럭 날짜만 보낼 뿐 실지로 힘쓰는 일을 볼 수 없으니, 이와 같이 하면서 복수를 하고 이로 인하여 적을 막는다는 것은 절대로 그렇게 될 리가 없습니다."
하였다. 박홍로가 아뢰기를,
"왜적이 국경에 있는 동안에는 우리 나라가 보존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인심으로 말하면 자손 만대를 두고 반드시 갚아야 할 원수이니, 반드시 이 원수를 갚고 난 다음에야 천지 사이에 떳떳이 설 수 있습니다. 방비하는 일은 더욱 잠시라도 잊을 수 없는데 다만 물력이 탕진되어 더이상 조치할 계책이 없습니다. 모든 방비에는 일을 다 중국군에만 믿고 있었는데, 중국군이 이미 철수하였으니 반드시 스스로 헤쳐나갈 계책을 수습해야 할 것입니다. 난리를 치른 이후로 생존한 군사가 적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병농(兵農)이 분리되지 않아 일반 백성을 군사로 쓰고 있으니, 비록 혹시 이름을 군적(軍籍)에 올려 어느 장수에게 소속시키더라도 다급한 일이 터지면 전혀 나라를 위할 마음이 없습니다. 이는 대체로 민력은 휴식을 시킨 뒤에 수습할 수가 있는 것인데 전후에 걸쳐 중국군에게 시달리고 또 국휼(國恤)까지 당하여 민생의 고혈이 여지없이 탕진되기 때문입니다. 조정이 깊이 생각하여 요역을 없애거나 공물을 감해주어 그들을 쉬도록 한다면 어찌 따르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저번에 백성의 부담을 견감한다는 명령이 한번 내리자 모두 감격하고 기뻐하였으나 그 뒤에 끝내 실지 혜택이 없기 때문에 도리어 군왕의 말을 부실하게 생각하니, 매우 한심합니다.
주사(舟師)의 일에 있어서는 안으로 묘당(廟堂)이 규획하고 밖으로 체찰(體察)이 경영하고 있으니 참으로 논의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이 저번에 남쪽으로 가서 직접 들어 보니, 정유년 이전에는 많은 수효의 주사와 판옥선(板屋船) 1백 척으로 삼도(三道)가 힘을 합쳐 함께 한산(閑山)에 머물러 있어 세력이 튼튼하였기 때문에 저 적들은 침범할 수 없는 형세였고 우리 나라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는데, 그 당시 패배한 이유는 주사에 있지 않고 지휘를 제대로 하지 못한 데에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주사가 많지 않아 삼도를 모두 합쳐 겨우 30여 척이니, 비록 한 곳에 모으더라도 방어될 리가 만무하고 또 각자 요해처에 분산되어 지키더라도 적이 나온다면 5∼6척의 주사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수찬(修撰) 홍서봉(洪瑞鳳)은 아뢰기를,
"요즘에 인심과 사습(士習)의 손상이 날로 심해지니 진작시키고 권장하는 방책이 없으면 안 되겠습니다. 난리가 일어난 이후 절의로 목숨을 바쳐 특별히 드러난 자는 문형(文衡)으로 하여금 《고려사(高麗史)》 절의전(節義傳)처럼 주전(主傳)을 찬집(撰集)하여 간행해서 반포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방비할 일에 대하여 비변사 여러 당상의 생각이 각자 있을 것이니, 오늘 탑전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다 말하라. 모책(謀策)이 혹 맞지 않더라도 남김없이 모두 말하면 대신(大臣)과 의논해 볼 수도 있다."
하니, 예조 판서 이정구가 아뢰기를,
"김상용이 계달한 언로가 막혀있다고 한 말은 참으로 오늘날의 병폐인데, 상께서 ‘그대가 지금 언관(言官)으로 있으니 다른 사람의 말을 기다릴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시니, 극히 감격스럽습니다. 이 말씀이 한번 나왔으니 대간(臺諫)이 그 누군들 할 말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난리가 일어난 지 10년인데 방비하는 일을 하나도 조치한 것이 없으니 신료(臣僚)들의 죄가 큽니다. 우리 나라의 병무(兵務)는 중국이나 왜국(倭國)과는 달라 평소에 호미를 쥐고 있던 백성을 갑자기 사변을 당하면 수령이 으레 하리(下吏)에게 되는 대로 그 수효만 채워 뽑아 보내게 하기 때문에 중도에 모두 도망가고 맙니다. 대체로 장수는 병사를 알고 병사는 장수를 안 뒤에야 적에 대응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장수가 병사를 모르고 병사가 장수를 모른다면 무슨 일을 이루겠습니까. 소신의 생각으로는, 각 고을이 병민(兵民)을 가려 뽑아 가령 한 고을에 1천명이 있다면 8백 명을 병사로 삼고 나머지는 농민으로 군량을 돕게 하며, 병사가 된 자는 궁시(弓矢)를 익히거나 조총(鳥銃)을 쏘게 하되 각도 별로 장부를 만들어 훈련 도감에다 소속시키고, 또 진관법(鎭管法)을 실시하여 위급한 일이 있으면 진관(鎭管)으로 하여금 먼저 거느리고 나오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훈련 도감의 군사는 상께서 친히 사열하시거나 글을 시험보여 상벌을 내리시고, 외방은 감사와 병사가 힘껏 교련시켜 몸이 팔을 움직이고 팔이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처럼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게 한다면 성취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좌찬성 한응인(韓應寅)은 아뢰기를,
"적들의 정황을 이곳에서 살펴볼 수는 없으나 사세로 볼 때 다시 침범할 우려가 없지 않은데, 우리 나라 수륙(水陸)의 방비책은 모두 갖추기가 어려운 형편이니 만약 대신을 보내 주사(舟師)를 요리하게 한다면 육병(陸兵)도 허술해질 것입니다. 오늘의 사세는 민력(民力)을 휴양시키는 것이 곧 근본인데 사실 김상용이 아뢴 말처럼 한 사람도 국사에 마음을 다하는 자가 없고 그럭저럭 날짜만 보내고 있으니, 이는 대체로 기습(氣習)이 고질화된 데다가 안일한 것이 풍조가 되어 일을 담당하여 봉행하는 자가 없어서 그런 것일 뿐입니다. 이를 전환시키는 일은 임금께서 언로를 열어 보고 듣는 길을 넓히며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 할 말을 다하게 하는 데에 있으니, 이는 곧 오늘의 급선무입니다."
하였다. 김상용이 아뢰기를,
"요즘 항간에서 소민(小民)들이 떠드는 말에, 궁금(宮禁)이 엄하지 않아 연줄을 타는 길이 매우 많다고 합니다. 성대(聖代)에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겠습니까마는 그 말을 들을 때 매우 불안하였습니다. 모든 근본이 되는 곳을 먼저 단속하지 않으면 안되니, 국가의 기강과 인심의 향배가 다 여기에 근본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떠도는 말을 신이 직접 들었기에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혹시 있을 수 있는 말이다. 무슨 일을 두고 한 말인가?"
하자, 김상용이 아뢰기를,
"낱낱이 들어 진달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정사(政事)와 형옥(刑獄) 사이에 밖의 말이 많이 있는 듯하니, 성명(聖明)의 오점이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그런 일이 없는데 그와 같은 말도 있던가. 들은 것이 있으면 말하도록 하라."
하니, 김상용이 아뢰기를,
"전일에 윤홍(尹宖)이 이해(李海)를 사주하여 상소한 뒤에 즉시 계하되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윤홍이 ‘오래도록 계하되지 않으니 필시 길조가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 일이 마침내 왕옥(王獄)022) 으로 돌아갔으니, 바깥 사람들은 다 윤홍이 은밀히 상의 의향을 탐지하고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윤홍이 궁금(宮禁)의 연줄을 탔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말했단 말인가?"
하니, 김상용이 아뢰기를,
"외간에 그와 같은 말이 나돕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때 나도 그 글을 보았다. 오래도록 계하되지 않아 필시 길조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그의 생각에 내가 반드시 그 말을 믿고 대간의 말을 의심한 것으로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말은 이와 같이 보는 것이 옳으니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김상용이 아뢰기를,
"회령 부사(會寧府使) 이수(李璲)가 회령에 제수되기 전에 꼭 될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마침내 그 자리를 얻으니 이 또한 외간의 말이 없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또한 그렇지 않다. 이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이곳에 와 있으므로 내 생각에 이제 만약 교체한다면 군사가 쉽게 흩어질 것이기에 우연히 말을 한 것이니, 이런 일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
하자, 김상용이 아뢰기를,
"이는 천만부당한 일이나 언관의 자리에 있으므로 들은 것을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김명원이 아뢰기를,
"김상용이 아뢴 말은 감히 반드시 이와 같은 일이 있다고 한 말이 아니고 외간에 들리는 말을 모두 진달하려는 뜻에서 그렇게 아뢴 것입니다. 옛사람의 말에 ‘그런 사실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 노력한다.’ 하였으니, 상께서 각별히 유념하소서."
하고, 이헌국은 아뢰기를,
"이런 말이 외간에 전파된 지 오래인데 김상용이 이와 같이 계달하니, 비록 봉명조양(鳳鳴朝陽)023) 이라 말해도 좋겠습니다. 군신간에 서로 경계하는 말은 요순의 시대에도 없지 않았습니다."
하고, 박홍로는 아뢰기를,
"난리 이후 궁궐이 여염 가운데에 있어 엄중하지 못하고 밖으로 드러나서 그런 것입니다. 왕자의 제택(第宅)은 더욱 드러나 비록 왕자가 모르는 일이 있더라도 중간의 무지한 사람이 왕자를 빙자하여 폐단을 일으키며, 심지어 그 노자(奴子)의 집에 출입하는 자도 궁노(宮奴)라고 자칭하고 경중(京中)의 강시(江市)는 물론 외방에까지 다 침학하는 일이 있으므로 소민(小民)이 매우 원망하여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왕자를 보양(輔養)하는 일을 난리 뒤에 전폐하였기 때문에 간혹 사리를 모르고 잘못 움직이는 때가 있으니, 각별히 학문을 권장하여 경계하고 조심하는 방도를 보이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와 같은 폐단이 있으면 법사(法司)가 금해야 하니, 이는 헌부의 책임이다."
하였다. 박홍로가 아뢰기를,
"아무리 그렇기는 하나 그때마다 금할 수는 없습니다. 사지 노자(事知奴子)는 혹 잘못을 깨닫게 할 수는 있겠지만 이 역시 말단의 일이고 왕자에 대하여는 교양시키는 도리가 따로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순화군(順和君)의 일은 소신의 생각에 국가에서도 잘못 대우하여 이렇게 되었다고 봅니다. 혈기가 충만하기 전에 오랫동안 적중(賊中)에 있어 필시 실성(失性)하였기 때문에 일을 처리하는 사이에 간혹 모르고 잘못 행하는 것입니다. 상께서는 비록 법을 중시하지만 왕자가 그곳에서 이따금 반성해볼 때 뉘우치는 일이 없지 않을 것인데, 이제 실성한 사람을 담장 속에 가두고 빗장을 단단히 걸어 출입하지 못하게 하면 원망하는 생각을 일으킬까 염려됩니다. 상께서 성 안으로 불러 들여 족속이나 궁궐 안의 절친한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깨어 있고 조용히 있는 때를 틈타 잡기(雜技)나 혹은 술자리를 통하여 곁에서 가르쳐 기어코 깨닫도록 하시면 스스로 뉘우칠 것이니, 은의(恩義)가 다 온전할 뿐 아니라 외방의 백성도 보전할 길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일체 법으로만 단속하게 하면 그저 그 실성만 더 유발시켜 은의의 사이에 아마도 어긋나는 일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김상용은 아뢰기를,
"박홍로의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신도 장계(狀啓) 속의 사건을 보았는데 필시 크게 놀란 나머지 실성한 소치이니, 평상적인 사람으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곳에서 인민을 구타하여 죽은 자가 있기도 하니, 어리석은 백성의 마음은 임금까지도 나를 보살펴주면 임금이고 나를 학대하면 원수라고 말하는데 하물며 왕자에게 어찌 뜻밖의 변고가 없겠습니까. 만약 서울로 옮겨 담장을 쌓고 주식(酒食)을 넉넉히 주면 비록 갇혀 있더라도 감격하는 마음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김명원은 아뢰기를,
"당초에 신들이 서울로 옮기자고 계달한 말도 이 뜻입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그곳에 난처한 일이 많다고 합니다. 박홍로와 김상용의 말이 매우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그 일을 말하기가 미안하고 또 부끄러우나 사체로 말하면 어찌 서울에 둘 수 있겠는가. 옛날에 양녕 대군(讓寧大君)이 매우 광패(狂悖)하였으므로 외방에 두었으나 제어하지 못하였다. 예전에도 광패한 기질이 있는 자가 한두 사람이 아니었지만 이번 경우는 너무도 특별하다."
하였다. 박홍로가 아뢰기를,
"소신의 뜻은 서울에서는 담장을 높이 쌓아 출입을 막을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금부 도사가 그 전에 왕자를 조용히 모시고 이야기를 해 보았는데, 사리의 이해와 경중을 모르는 것이 없었고 가끔 심기가 고르지 못할 때만 그와 같이 발작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말하는 것은 미안하긴 하나 내가 만약 말하지 않으면 조정이 어떻게 알겠는가. 그의 성기(性氣)는 극히 이상하여 어릴 때부터 천성적으로 잔인하였다. 이제 저곳에서 하는 일이 모두 사람을 때려 죽이는 짓으로 잔혹하기 그지없으니, 더욱 괴롭기만 하다. 비록 주색잡기(酒色雜技)와 같은 것에 광패(狂悖)한 사람이라면 그래도 괜찮겠으나 이 사람은 그렇지 않다. 어릴 때부터 새나 짐승일지라도 반드시 잔인하게 상해시켜야 만족해 하였다. 대체로 이 또한 나 때문이니, 조정 대신과 얼굴을 마주하고 말할 수가 없다."
하였다. 김명원이 아뢰기를,
"대마도 사람이 만약 이번에 나온다면 접대할 대책을 어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접대할 대책을 논의하자는 것인가. 만약 대화로 협상을 하자고 나오면 접대할 수 있으나 무기를 가지고 나오면 어떻게 접대할 수 있겠는가. 이 적은 불과 수천 명이 바다를 건너 와도 하삼도(下三道)를 쓸어버릴 수 있는데, 어찌 꼭 구차하게 강화를 하여 개시(開市)하려는 이유 때문에 우리 나라에 고개를 숙이겠는가. 그럴 리는 만무하다."
하자, 김상용이 아뢰기를,
"대체로 팔도가 쑥밭이 된 지금 오늘 계책을 세워 내일 방어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반드시 언로를 개방해서 많은 사람의 계책을 수집하여야 하는데, 초야의 말이라도 오활하다고 하여 소홀히 하지 않으면 언로가 열려 좋은 계책이 들어올 것입니다. 그리하여 채택할 만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시행하되 대신에게 위임하여 진심으로 성공하길 권면함으로써 각기 자신의 직임을 다하게 해야 합니다. 군사를 조련하고 군량을 저축하는 일까지도 다 대신에게 맡겨 한(漢)나라 때 소하(蕭何)는 군량을 관장하고, 장양(張良)은 계책을 짜내고, 한신(韓信)은 군대를 지휘했던 것처럼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오랜 시일을 두고 성공하기를 면려한다면 복수할 수 있는 바탕이 또한 여기에 있게 될 것입니다. 상께서 마음을 바르고 맑게 하여 기강을 세우고 군율을 닦으신다면 국력이 커지는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미시(未時)에 자리를 파하고 나갔다.
- 【태백산사고본】 82책 134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24책 195면
- 【분류】외교-왜(倭) / 외교-명(明) / 인사-관리(管理) / 윤리-강상(綱常) / 정론-정론(政論) / 출판-서책(書冊) / 왕실-종친(宗親)
- [註 022] 왕옥(王獄) : 의금부.
- [註 023] 봉명조양(鳳鳴朝陽) : 봉황새가 아침 해가 떠오르는 동쪽 산의 오동나무에서 운다는 것으로 세상에 보기 드문 길조를 말한다. 《시경(詩經)》 대아 권아(大雅卷阿).
원문
○巳時, 上御別殿, 大臣及備邊司堂上引見。 上曰: "春汛已迫, 賊變朝夕可虞。 若有風塵之警, 不無如前之禍。 各陳防備之策。 備邊司必有長算, 如此之事, 在所當先。 他餘論議, 今日何關?" 左議政李憲國曰: "防備之策無他, 收集精兵, 鍊習弓矢, 修城池、備器械, 此爲上策。 南方之事, 備邊司, 雖三令五申, 如慶尙一帶, 蕩敗十餘邑, 盡爲空虛。 到此地頭, 亦難下手。 李德馨。 今已下去。 李元翼時未知幾許措置, 南方之事, 至爲踈闊。 全羅道舟師, 十餘隻來泊, 則亦可以爲備, 而賊若多數出來, 則未知以此抵當。 莫得善策, 日夜憂憫。 領相熟知南方道路要險, 而近以病不出, 至於議得, 亦爲妨礙。 觀賊向日請和之意, 則今已六七月, 而迄無消息。 未知有何意慮。" 右議政金命元曰: "在下之人, 孰不欲陳達所見? 但無表表長策, 亦不知當處之如何。 大槪物力不足, 亦不得如意矣。" 上曰: "更無他議。 設若大賊復熾, 則宗社存亡之攸係, 國家未知稅駕於何也。 有唐兵可以禦之乎?" 憲國曰: "他事則不須言也, 但當朝夕待變而已。 不獨此也, 北方六鎭, 極爲孤危。 凡事慮此則生。 彼北方乃祖宗建業之地, 如此虛踈, 尤爲可慮。" 上曰: "北方雖如此, 自然以某條爲之, 南賊不可不慮。 彼賊豈有忘我之理哉? 今以賊退爲言者, 此乃誤人之人。 彼賊之退, 非棄我國, 而不顧也。 不知以何心退去, 若聞天兵盡撤, 則再肆凶毒, 安保其無? 兵法曰: ‘將欲取之, 必復與之。’ 以退去, 爲賊勢稍緩者, 誤國事甚矣。 宋 汴京時, 金人纔退, 動色相慶。 其後金兵大擧, 皆束手就縛, 甚爲可笑。" 憲國曰: "宋時文勝, 武略不競。 我國亦如此矣。 今欲倚恃武夫, 以爲長城, 而武夫亦不好射。 文恬武嬉, 專不事事, 此亦天爲之耶? 有時試射, 以爲賞格, 別無人才輩出。 壬辰年後, 武弁等, 皆是新人, 不識大義, 勞憊之事, 皆懷厭避。 國事至此, 極可慮也。" 上曰: "大槪此賊, 蹂躪我國, 任意作挐, 無端退去, 必有其意。 今年雖或不來, 一遭決局, 雖非智者, 可以知之。 非徒講和一事, 至於興販, 失本如是, 予意以爲, 賊必復來。 今當上下一心, 以防此賊, 然後大小之事, 皆可爲之。" 憲國曰: "對馬島之人, 若如前納款, 未知何以待之? 渠之國中有事云者, 恐非虛言。 大槪發遣御史, 南方付種形勢及舟師器械, 摘奸而來宜當。 防禦之事, 所恃者紀綱, 紀綱不立, 故軍律解弛。 雖有百萬精兵, 何以用之? 今當恢復之初, 必恢張公道, 然後賞罰分明, 國家自然可以維持矣。" 上曰: "李舜臣戰勝之後, 皆致力於舟師, 勝敗無常。 未知舟師, 爲必勝之道。 渠若不爲交鋒, 先爲下陸, 則雖舟師浮於海, 何益之有? 徒爲專力於舟師, 不爲陸備, 則如方言所謂, ‘矢落處立貫革。’ 此非遠慮。" 憲國曰: "大槪力不足於水陸, 故如是耳。 若使下陸, 則果如上敎。 我國下陸之地甚多, 海道通闊。 若來於防備虛疏之處, 則未知何以爲之? 前朝, 倭雖多數出來, 未若壬辰之變。 前朝。 則皆以奇伏捕獲, 而我國, 則數百年民不知兵, 宜乎一敗潰散矣。" 命元曰: "此賊必欲貽害於我國, 故雖深山窮谷, 有人家處, 皆作賊矣。" 憲國曰: "秀吉之死, 天似助之。" 上曰: "不可以天助信之。 安知不有他秀吉乎?" 右參贊洪進曰: "我國專恃唐兵, 鎭管之法, 廢而不行。 凡陣法旗幟, 一依唐兵之制, 在平時, 猶之可也, 今則非唐非鄕, 不成模樣。 《紀效新書》, 勢難遵行。 請依平時鎭管制勝方略之法, 守令親自領率, 各別訓鍊。 納粟之事, 當其急迫之時, 或用士大夫所藏之穀, 仍書姓名於納粟之類, 渠等非自己納粟之事, 故皆以爲羞, 有若禁錮之爲。 且校生納粟者, 五品以下, 則皆定軍役, 多有怨心。 如此之事, 別樣處置爲當。" 憲國曰: "自上西幸之時, 扈行臣僚若干人, 而其時士族, 各爲父母妻子, 退伏草野, 及其還都, 各自來仕。 渠亦不無靦面之事, 後樣如此, 則君臣之義, 不無相忘之理矣。 壬辰之後, 喪紀一事, 專廢不行, 極爲寒心。 不可不申明敎化, 至於旌表節義之人, 在所當先, 禮曹專不抄出。 士大夫家, 則或有旌門之處, 而深山窮谷, 伏節死義之人, 非但不得載錄於褒崇之典, 禮曹亦有任意刪去者。 大槪此事, 皆是有關於綱常, 雖有惡心之人, 見此不無感化之理矣。" 上曰: "今番兵部咨文以爲: ‘今請留之事, 非朝鮮之本意云。’ 此何意耶? 未知所指, 恐有情外之虛言, 多有未安之意。 其事則必不成矣, 末又以歸罪於臣下云。 其時予意, 則不欲歸罪於臣下, 而其咨所云如此。 大槪前日作文之事, 以促大命云, 終始執此而爲之, 此承文院常時咨揭之事, 不爲詳察而然也。" 右贊成沈嘉壽曰: "傳敎之言至矣。 第其言, 表出而觀之, 則果爲驚怪, 無端看過, 則別無所害。 譬喩之言, 不至甚妨。" 上曰: "我國於文, 本不能製。 不小咨文, 摩度然後爲之可也, 而卒以此誤事。 文書之事, 最可詳察。" 大司諫金尙容曰: "自上以春汛將迫爲憂, 屢問於備邊司, 聖慮至矣, 愚臣所見, 則不在於此。 自上卽位, 于今四十年將迫, 別無以言獲罪之人, 循默成風, 無一人以直言上達。 大官悠悠, 小官泛泛, 豈皆無用之人乎? 自上示以容受之意, 然後草野之言, 可以上聞。 或有上疏, 備陳民間疾苦之狀, 而只下該司, 一無施爲之事, 故頃日以天變求言, 而無一人抗章直言者。 孟子曰: ‘訑訑之色, 拒人於千里之外。’ 小臣之意, 以爲今日之憂, 在於言路杜絶, 而不在於此賊也。 在此大臣, 重臣皆不能盡言竭忠, 引見之時, 泛然陳達, 退去之後, 以草記來呈。 如此而賊可退乎?" 憲國曰: "金尙容之言, 誠是矣。 近來筵中, 無一人竭誠上達, 國家之事, 置之尋常。 小臣年近八十, 山陵事完後, 自當退去。 大槪言路杜絶, 存亡攸係。" 尙容曰: "宋時言路杜絶, 故有城門閉、言路開之語。 我國之事, 紀綱頹廢, 危亡日久, 而言路猶塞。 《易》卦有天地之氣, 上下交合爲《泰》, 不交爲《否》。 上下之情相通, 然後國事可爲矣。" 上曰: "此言是則是矣。 他人言則可也, 旣在言地, 何必假於他人? 方在其地, 如言他人之事何也?" 大司憲朴弘老曰: "金尙容所達之事, 非今日之謂也。 泛論近來時習, 自上豈不知之? 人君居萬人之上, 大言則天下治亂, 係於一身。 雖堯、舜, 亦不能獨成, 必待群下之協贊, 然後可以致治。 設官置位, 非爲虛名。 自上必使下情相通, 俾盡其責, 則國事可爲。 若身在其職, 不能察事, 則渠之過矣。 大臣, 乃股肱心膂, 氣血流通, 則四支和平。 近日待大臣之道, 恐不如前日也。" 尙容曰: "燕昭王, 得樂毅而復讎, 越王句踐, 得范蠡而滅吳。 蜀 先主之於孔明、宋 太祖之於趙普, 皆是也。 近日自上, 無委任責成之意, 故悠泛度日, 未見着實之事。 如此而復讎, 因是而禦敵, 萬無其理。" 弘老曰: "倭賊在境之日, 則我國不可謂保存也。 以人心言之, 則萬世必報之讎。 必報此讎, 然後可以立於天地間。 防備之事, 尤不可一刻暫忘。 第物力蕩竭, 更無措置之策。 凡備禦之事, 皆恃天兵, 天兵已撤, 則必須收拾, 可爲自振之計, 而經亂以後, 軍士生存, 亦爲不少, 兵農不分, 以民爲兵。 雖或籍名, 屬於某將, 一有緩急, 頓無爲國之心。 大槪民力休息, 然後可以收拾, 而前後天兵, 又遭國恤, 生民膏血, 竭盡無餘。 朝廷若能軫念, 或除徭役、或減貢物, 使之休養, 則豈有不從之理? 頃日蠲除之令一下, 而百姓皆感激懽悅, 其後竟無實惠, 故反以王言爲不實, 極爲寒心。 舟師之事, 內而廟堂規畫, 外而體察經營, 固無容議, 臣頃往南方, 親自聞見, 則丁酉以前, 舟師多數, 板屋百隻, 三道合力, 同住閑山, 而聲勢完固, 故彼賊無來犯之勢, 我國無畏懼之心。 其時之敗, 不在舟師, 而在於指揮之失策。 今則舟師不多, 合三道僅三十餘隻。 雖聚一處, 萬無防禦之理, 又各分把要害, 賊若出來, 則以五六隻舟師, 可以禦之乎?" 修撰洪瑞鳳曰: "近來人心士習, 壞敗日甚, 不可無振作勸勵之方。 亂離以後, 以節義亡身, 章章可見者, 令文衡, 撰集主傳, 如《麗史節義傳》, 刊行頒布爲當。" 上曰: "防禦之事, 備邊諸堂上之意, 各有所在。 今日榻前, 悉陳所懷。 謀策雖或不中, 盡言不諱, 則或與大臣議之。" 禮曹判書李廷龜曰: "金尙容啓達, 言路杜塞之言, 眞當今病痛。 自上以爲, 旣在言地, 何待他人之敎, 極爲感激。 此言一出, 臺諫孰不盡言? 亂後十年防備之具, 無一措置, 臣僚之罪大矣。 我國兵(判)〔制〕 , 與天朝與倭國皆異, 常時荷鋤之民, 卒遇事變, 則守令例使下吏, 苟充其數而抄送, 故中路皆逃。 大槪將知其兵, 兵知其將, 然後可以應敵。 若將不知兵, 兵不知將, 則何事可成? 小臣之意以爲, 各官別出兵民, 假使一郡, 有一千名, 則八百爲兵。 以農民助兵糧, 爲兵者則或習弓矢, 或放鳥銃, 各道成冊, 統屬於訓鍊都監, 且爲鎭管之法, 有急則使鎭管, 先率而出之, 且訓鍊都監之軍, 自上或親閱武, 或講書以爲賞罰, 外方則監、兵使, 專意敎鍊, 如身使臂, 如臂使指, 惟其運動, 則庶有成就矣。" 左贊成韓應寅曰: "賊中情形, 在此雖不能詗察, 以事勢觀之, 不無再肆之患。 我國水陸之具, 勢難俱備。 若遣大臣, 料理舟師, 則陸兵亦爲虛疏, 今日事勢, 休養民力, 乃爲根本, 而果如金尙容所 啓之辭, 無一人盡心國事, 悠泛度日。 大槪氣習已痼, 偸靡成風, 無擔當奉行者而然耳。 轉移之機, 在於君上, 開言路而廣聰明, 使之各得盡言, 則此乃今日之急務也。" 尙容曰: "近來閭巷間小民, 喧傳宮禁不嚴, 夤緣之路甚多云。 聖代豈有如此之事乎? 聞之甚爲未安。 本源之地, 不可不先。 國家紀綱、人心向背, 皆本於此。 傳播之言, 臣所親聞, 不敢不達。" 上曰: "容或有之。 何事云乎?" 尙容曰: "不可歷數而陳達矣。 或政事刑獄之間, 多有外言。 聖明之累, 無大於此。" 上曰: "予則無是事。 或有如此之言耶? 有所聞, 則言之可也。" 尙容曰: "頃日尹宖, 指嗾李海, 上疏之後, 其時趁不下, 故宖曰: ‘久不下, 必有吉兆云, 而其事竟歸於王獄。 外人則皆以爲, 尹宖陰伺上意而云然矣。" 上曰: "然則以爲, 尹宖攀緣宮禁, 而爲之云乎?" 尙容曰: "外間有如此之言矣。" 上曰: "其時予亦見其文矣。 久不下, 必有吉兆云者, 渠以爲, 予必信其言, 而疑臺諫之言也。 其言, 如此見之可也, 不可如是言之。" 尙容曰: "會寧府使李璲, 未拜會寧之前, 亦以爲俺當爲之云, 而終乃得之, 此亦不無外言。" 上曰: "此亦不然矣。 李璲領軍來此, 予以爲, 今若遞易, 則軍士易散, 故偶然言之。 如此之事, 大不然。" 尙容曰: "此千萬無理之事, 旣在言地, 所聞不敢不達。" 命元曰: "金尙容所啓之言, 非敢謂必有如此之事, 外間所聞, 盡爲陳達之意也。 古人曰: ‘有則改之, 無則加勉。’ 自上別爲留念。" 憲國曰: "如此之言, 外間傳播久矣。 尙容如是啓達, 雖謂之鳳鳴朝陽可矣。 君臣之間, 交戒之言, 雖堯、舜之時, 亦不可無矣。" 弘老曰: "亂後, 宮闕在閭閻之中, 不能謹密, 淺露而然矣。 至於王子第宅, 尤爲淺露, 雖有王子不知之事, 中間無知之人, 憑藉作弊, 出入其奴子之家者, 亦稱宮奴, 京中江市, 至於外方, 皆有侵虐之事, 小民不勝冤苦。 且王子輔養之具, 亂後專廢, 故或有不知, 而妄作之時, 別爲勸學, 以示戒飭之方宜當。" 上曰: "有如此弊端之事, 法司禁之, 此憲府之責也。" 弘老曰: "雖如此, 不可每每爲之, 而事知奴子, 雖或警覺, 此亦末(年)〔矣〕 。 敎養之方, 自有道理。 且順和君事, 小臣之意以爲: ‘國家亦待之失宜, 致有此也。’ 血氣未盛, 久在賊中, 必是失性, 故作事之際, 或有不知而妄作。 自上雖以法爲重, 而王子在彼, 有時省念, 不無悔悟。 今使失性之人, 處於圜墻之中, 而嚴其扄鑰, 俾不得出入, 恐致怨懟之意。 自上招入城中, 或令族屬及宮闈親切之人, 因其醒心靜處之時, 或因雜技、或因酒盞, 從傍敎誨, 期於省覺, 則自(誨)〔悔〕 。 非徒恩義兩全, 外方之民, 亦有保全之路矣。 若令一切繩之以法, 則適足以增其失性, 而其於恩義之間, 恐不無卒戾之事。" 尙容曰: "朴弘老之言, 誠是矣。 臣亦觀其狀啓之事, 必是驚愕之餘, 失性所致, 不可待以平常之人。 在彼(歐)〔敺〕 打人民, 或有死者。 愚氓之心, 至於人君, 亦曰: ‘撫我則后, 虐我則讎。’ 況於王子, 豈無意外之變乎? 若使移置京城, 高其墻垣、優其酒食, 則雖在幽囚之中, 不無感激之心矣。" 命元曰: "當初, 臣等 啓達, 移來京城之言, 亦此意也。 聞其處, 多有難處之事云。 朴弘老、金尙容之言, 至爲宜當。" 上曰: "予言之未安, 亦多羞愧。 以事體言之, 豈有置在京中之理? 古時讓寧大君, 最爲狂悖, 故置在外方, 而不能制禦。 前此有狂悖之氣者, 非一, 此則極爲殊常。" 弘老曰: "小臣之意, 京中不必峻其墻垣, 以防出入。 禁府都事曾與王子, 從容侍話, 則利害輕重, 無不知之, 而有時氣不平, 則發作如是矣。" 上曰: "予言之雖未安, 予若不言, 朝廷何以知之? 其爲性氣, 極爲殊常, 自少時殘忍成性。 今在彼處, 所爲之事, 皆打殺人物, 極其殘酷, 尤可悶也。 雖雜技酒色, 爲他狂悖之人, 則猶之可也, 此則不如此, 自少雖於禽獸, 必殘傷, 然後快於心矣。 大槪此亦予之故也。 不可對面, 說與朝廷。" 命元曰: "對馬島之人, 今若出來, 則接待之策, 何以爲之?" 上曰: "此時接待之策, 議之乎? 若以言語來之, 則可以接待, 若以干戈來之, 則何以爲之? 此賊雖數千渡海, 可以掃盡下三道。 何必區區之和, 以開市之故, 俛首於我國? 萬萬無理矣。" 尙容曰: "大槪八路蕩然, 今日設策, 明日禦之, 萬無其理。 必須開言路集群策, 雖草野之言, 勿以疏遠而忽之, 則言路開, 而好謀來矣。 如有可採, 必施於事。 委任大臣, 推誠責成, 使之各盡其器, 至於鍊兵儲糧, 各付大臣, 如漢時蕭何管糧、張良運籌、韓信用兵, 久久責成, 則此乃根本復讎之道, 亦在此, 而自上端本淸源, 立紀綱、修軍律, 則國勢張旺, 可以見效矣。" 未時罷黜。
- 【태백산사고본】 82책 134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24책 195면
- 【분류】외교-왜(倭) / 외교-명(明) / 인사-관리(管理) / 윤리-강상(綱常) / 정론-정론(政論) / 출판-서책(書冊) / 왕실-종친(宗親)
원본
선조 34년 (1601) 2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