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128권, 선조 33년 8월 25일 을미 5/6 기사 / 1600년 명 만력(萬曆) 28년
중국군 1천 명의 주둔 요청 문제에 대한 대신들의 논의
국역
여러 대신과 비변사 당상이 헌의 단자를 봉입(封入)하였다. 영의정 이항복(李恒福)과 지사(知事) 황진(黃璡)이 의논드리기를,
"1천의 병력을 청하는 것은 중국의 웃음거리만 더할 뿐 일은 마침내 성사되기가 어려우니 전과 같이 3천의 병력을 머물게 하고 아울러 식량까지 청하는 것이 더 합당 할 것 같습니다. 차자 중에 계책을 내어 적군의 침략을 늦추는 일은 병신년168) 에 이미 신이 헌의한 것으로서 이는 사실 온 나라 사람이 생각은 하고 있으나 말하지 못했던 것을 말한 것이니, 화를 늦추는 방법에 있어서 매우 타당한 것이었습니다."
하고, 해원 부원군(海原府院君) 윤두수(尹斗壽), 영돈녕부사 이원익(李元翼), 이조 판서 한응인(韓應寅), 동지사 변양걸(邊良傑)은 의논드리기를,
"한결같이 성상의 하교대로 1천의 병력을 머물게 해달라고 청하고 향은의 절반을 중국에 청해야만 하겠습니다. 기미하는 일은 사실 부득이한 조치로서 또한 나라를 보전하는 한 가지 길이 되겠습니다."
하고, 영중추부사 최흥원(崔興源), 우의정 김명원(金命元)은 의논드리기를,
"온 나라의 힘을 기울여서 1천의 병력을 머물게 해달라고 청하는 것은 마땅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향은의 절반을 다시 중국에 요청하는 것은 미안한 점이 있을 듯합니다. 이덕형의 차자 내용도 모두 일리가 있으니 비변사와 회의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고, 좌의정 이헌국(李憲國)은 의논드리기를,
"또 다시 1천 병력을 청하는 것은 들어줄 리가 만무합니다. 그리고 향은은 절반도 결코 마련하기가 어려우니 마땅히 주문(奏文) 한 통을 갖추어 우리 나라의 절박한 사정을 말하여 중국의 의혹을 풀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기미하는 일에 있어서는 요즈음 사람들이 크게 꺼리는 것인데 이덕형이 말하였으니, 나라를 근심하는 그의 충성심을 그로 인하여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하고, 지사(知事) 김수(金睟)는 의논드리기를,
"청병(請兵)의 일과 【좌상의 의논과 같다. 】 기미하는 일에 대해서는 시론(時論)의 일대 금기 사항이므로 신은 감히 의논드릴 수 없습니다."
하고, 호조 판서 이정구(李廷龜), 호군(護軍) 윤승길(尹承吉), 우윤(右尹) 심우승(沈友勝)은 의논드리기를,
"1천의 병력과 절반의 식량을 청한다고 하여 들어줄 리가 만무합니다. 마땅히 주문을 갖추어서 우리 나라의 절박한 사정을 간곡하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기미하는 일에 대해서는 과연 견해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렇게 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하고, 좌찬성 심희수(沈喜壽)는 의논드리기를,
"국내에서는 조금도 식량을 제공하지 못하겠다는 논의가 전후로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중국의 입장을 헤아려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1천의 병력도 오히려 스스로 먹여내지 못하면서 다시 식량 절반을 중국에 청한다면, 이는 청병은 더욱 적게 하면서 식량 요청은 그치지 않는다고 더욱 괴이하게 여길 것입니다. 현재의 계책으로서는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계책을 다 동원하여 전라도와 경상도의 세량(稅糧)과 노비 신공 등의 물자를 모두 투입하여 군대의 식량과 의복 대금으로 삼게 하는 한편 서둘러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이덕형이 제안한 기미하는 문제는 사실 어쩔 수 없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니, 대신에게 물어서 상의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고, 병조 판서 신잡(申磼)은 의논드리기를,
"마땅히 작은 나라의 정세를 간곡하게 말하여, 서울에는 장수 한 사람을 머물게 하고 또 한 부대의 병력을 부산(釜山)에 머물게 해달라고 청하고, 월색(月色)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노력하여 다른 물품으로 갖추어 주는 것도 무방하겠습니다. 부산에서 신서(信書)를 주고받는 것은 비록 기미하는 계책이라고는 하지만 우리가 먼저 그 길을 열 일은 아니니, 임기응변으로 적절히 대처하고 우선 중국이 강화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거절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호군(護軍) 한효순(韓孝純)은 의논드리기를,
"신이 남쪽에 있을 때 인심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모두 말하기를 ‘중국군이 오래 머물게 되면 백성에게 해가 되기는 하지만 하루아침에 다 철수하게 되면 우리들은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조정에서 식량 마련이 어렵다면 우리들이 분담하여 먹여줄 수 있게 하겠다. 대호(大戶)는 5호가 힘을 합쳐 한 병사의 식량을 제공하고, 중호(中戶)는 10호가 힘을 합쳐 한 병사의 식량을 제공하고 소호(小戶)는 20호가 힘을 합쳐 한 병사의 식량을 제공하기로 하여 하삼도(下三道)가 이렇게 하게 되면 수만 명의 병력이라도 머물게 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1천의 병력을 청하는 것은 그만둘 수가 없는 형편이고 월향(月餉)의 은자는 토산이 아니지만 지석(紙席)·주포(紬布)·도선(刀扇)·호피(虎皮)·표피(豹皮) 등 물품으로 수를 채워 바칠 수가 있습니다. 차자에 진술한 것은 신의 견해와 서로 부합합니다."
하였다.
- [註 168] 병신년 : 1596 선조 29년.
원문
○諸大臣及備邊司堂上, 獻議單子封入。 領議政李恒福、知事黃璡議: "千兵之請, 只益中朝之哂, 事終難成。 不如仍前請留三千, 竝其月餉爲當。 若箚中行計援兵, 丙申年間, 已獻賤議矣。 實所以發一國有懷未發之意, 深得紓禍之道矣。" 海原府院君 尹斗壽、領敦寧府事李元翼、吏曹判書韓應寅、同知事邊良傑議: "一依聖敎, 請留千兵, 餉銀一半, 請於天朝。 羈縻事, 實出於不得已, 亦是保國之一道也。" 領中樞府事崔興源、右議政金命元議: "竭一國之力, 請留千兵, 似爲宜當, 餉銀一半, 更煩天朝, 恐有所未安。 李德馨箚辭, 亦皆有理, 與備邊司, 會議施行。" 左議政李憲國議: "更請千兵, 萬無准許之理, 一半銀餉, 決難辦出。 當具一奏, 極陳我國悶迫事情, 以解天朝疑惑。 羈縻之事, 乃近日時, 人所大諱者, 而德馨能言之。 其憂國之誠, 據此可想。 知事金睟, 請兵事、 【如左相議。】 羈縻事, 方爲時議一大禁, 臣不敢容議。" 戶曹判書李廷龜、護軍尹承吉、右尹沈友勝議: "千兵及一半月餉, 萬無得請准許之理。 當具一奏, 痛陳我國悶迫之情。 羈縻之事, 果不無所見, 而爲之極難。" 左贊成沈喜壽議: "毫不內發之論, 前後非一, 揆以天朝事勢, 亦不得不然。 千兵猶不能自養, 更計月餉一半於天朝, 則尤怪請兵益少, 而請餉未已也。 今計莫若盡自振之策, 全抛全、慶稅糧及奴婢身貢等物, 以爲兵餉兵衣之資, 急急敎演訓鍊爲宜。 李德馨羈縻一款, 實出於迫不得已之計, 詢及大臣, 商議無妨。" 兵曹判書申磼議: "當極陳小邦之情勢, 請留一將於京中, 又留一技兵於釜山。 月色則多般拮据, 以他物備給, 亦何妨哉? 釜山信書之通, 則雖羈縻行計之策, 而非自我先開之道。 臨時處變, 姑以天朝, 拒之可也。" 護軍韓孝純議: "臣在南方, 熟察人情, 皆曰: ‘天兵久駐, 縱爲民害, 一朝盡撤, 我等何依? 朝廷若難於餉, 則我等當分授以饋, 如大戶則合五供一兵, 中戶則合十供一兵, 小戶則合二十供一兵, 下三道如是爲之, 則數萬之兵, 不難留。’ 云。 千兵之請, 在所不已。 月餉之銀, 雖非土産, 亦可以紙席紬布刀扇虎豹皮等物, 隨納充數矣。 箚辭所陳, 與臣所見相符。"
선조실록128권, 선조 33년 8월 25일 을미 5/6 기사 / 1600년 명 만력(萬曆) 28년
중국군 1천 명의 주둔 요청 문제에 대한 대신들의 논의
국역
여러 대신과 비변사 당상이 헌의 단자를 봉입(封入)하였다. 영의정 이항복(李恒福)과 지사(知事) 황진(黃璡)이 의논드리기를,
"1천의 병력을 청하는 것은 중국의 웃음거리만 더할 뿐 일은 마침내 성사되기가 어려우니 전과 같이 3천의 병력을 머물게 하고 아울러 식량까지 청하는 것이 더 합당 할 것 같습니다. 차자 중에 계책을 내어 적군의 침략을 늦추는 일은 병신년168) 에 이미 신이 헌의한 것으로서 이는 사실 온 나라 사람이 생각은 하고 있으나 말하지 못했던 것을 말한 것이니, 화를 늦추는 방법에 있어서 매우 타당한 것이었습니다."
하고, 해원 부원군(海原府院君) 윤두수(尹斗壽), 영돈녕부사 이원익(李元翼), 이조 판서 한응인(韓應寅), 동지사 변양걸(邊良傑)은 의논드리기를,
"한결같이 성상의 하교대로 1천의 병력을 머물게 해달라고 청하고 향은의 절반을 중국에 청해야만 하겠습니다. 기미하는 일은 사실 부득이한 조치로서 또한 나라를 보전하는 한 가지 길이 되겠습니다."
하고, 영중추부사 최흥원(崔興源), 우의정 김명원(金命元)은 의논드리기를,
"온 나라의 힘을 기울여서 1천의 병력을 머물게 해달라고 청하는 것은 마땅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향은의 절반을 다시 중국에 요청하는 것은 미안한 점이 있을 듯합니다. 이덕형의 차자 내용도 모두 일리가 있으니 비변사와 회의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고, 좌의정 이헌국(李憲國)은 의논드리기를,
"또 다시 1천 병력을 청하는 것은 들어줄 리가 만무합니다. 그리고 향은은 절반도 결코 마련하기가 어려우니 마땅히 주문(奏文) 한 통을 갖추어 우리 나라의 절박한 사정을 말하여 중국의 의혹을 풀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기미하는 일에 있어서는 요즈음 사람들이 크게 꺼리는 것인데 이덕형이 말하였으니, 나라를 근심하는 그의 충성심을 그로 인하여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하고, 지사(知事) 김수(金睟)는 의논드리기를,
"청병(請兵)의 일과 【좌상의 의논과 같다. 】 기미하는 일에 대해서는 시론(時論)의 일대 금기 사항이므로 신은 감히 의논드릴 수 없습니다."
하고, 호조 판서 이정구(李廷龜), 호군(護軍) 윤승길(尹承吉), 우윤(右尹) 심우승(沈友勝)은 의논드리기를,
"1천의 병력과 절반의 식량을 청한다고 하여 들어줄 리가 만무합니다. 마땅히 주문을 갖추어서 우리 나라의 절박한 사정을 간곡하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기미하는 일에 대해서는 과연 견해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렇게 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하고, 좌찬성 심희수(沈喜壽)는 의논드리기를,
"국내에서는 조금도 식량을 제공하지 못하겠다는 논의가 전후로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중국의 입장을 헤아려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1천의 병력도 오히려 스스로 먹여내지 못하면서 다시 식량 절반을 중국에 청한다면, 이는 청병은 더욱 적게 하면서 식량 요청은 그치지 않는다고 더욱 괴이하게 여길 것입니다. 현재의 계책으로서는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계책을 다 동원하여 전라도와 경상도의 세량(稅糧)과 노비 신공 등의 물자를 모두 투입하여 군대의 식량과 의복 대금으로 삼게 하는 한편 서둘러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이덕형이 제안한 기미하는 문제는 사실 어쩔 수 없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니, 대신에게 물어서 상의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고, 병조 판서 신잡(申磼)은 의논드리기를,
"마땅히 작은 나라의 정세를 간곡하게 말하여, 서울에는 장수 한 사람을 머물게 하고 또 한 부대의 병력을 부산(釜山)에 머물게 해달라고 청하고, 월색(月色)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노력하여 다른 물품으로 갖추어 주는 것도 무방하겠습니다. 부산에서 신서(信書)를 주고받는 것은 비록 기미하는 계책이라고는 하지만 우리가 먼저 그 길을 열 일은 아니니, 임기응변으로 적절히 대처하고 우선 중국이 강화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거절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호군(護軍) 한효순(韓孝純)은 의논드리기를,
"신이 남쪽에 있을 때 인심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모두 말하기를 ‘중국군이 오래 머물게 되면 백성에게 해가 되기는 하지만 하루아침에 다 철수하게 되면 우리들은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조정에서 식량 마련이 어렵다면 우리들이 분담하여 먹여줄 수 있게 하겠다. 대호(大戶)는 5호가 힘을 합쳐 한 병사의 식량을 제공하고, 중호(中戶)는 10호가 힘을 합쳐 한 병사의 식량을 제공하고 소호(小戶)는 20호가 힘을 합쳐 한 병사의 식량을 제공하기로 하여 하삼도(下三道)가 이렇게 하게 되면 수만 명의 병력이라도 머물게 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1천의 병력을 청하는 것은 그만둘 수가 없는 형편이고 월향(月餉)의 은자는 토산이 아니지만 지석(紙席)·주포(紬布)·도선(刀扇)·호피(虎皮)·표피(豹皮) 등 물품으로 수를 채워 바칠 수가 있습니다. 차자에 진술한 것은 신의 견해와 서로 부합합니다."
하였다.
- [註 168] 병신년 : 1596 선조 29년.
원문
○諸大臣及備邊司堂上, 獻議單子封入。 領議政李恒福、知事黃璡議: "千兵之請, 只益中朝之哂, 事終難成。 不如仍前請留三千, 竝其月餉爲當。 若箚中行計援兵, 丙申年間, 已獻賤議矣。 實所以發一國有懷未發之意, 深得紓禍之道矣。" 海原府院君 尹斗壽、領敦寧府事李元翼、吏曹判書韓應寅、同知事邊良傑議: "一依聖敎, 請留千兵, 餉銀一半, 請於天朝。 羈縻事, 實出於不得已, 亦是保國之一道也。" 領中樞府事崔興源、右議政金命元議: "竭一國之力, 請留千兵, 似爲宜當, 餉銀一半, 更煩天朝, 恐有所未安。 李德馨箚辭, 亦皆有理, 與備邊司, 會議施行。" 左議政李憲國議: "更請千兵, 萬無准許之理, 一半銀餉, 決難辦出。 當具一奏, 極陳我國悶迫事情, 以解天朝疑惑。 羈縻之事, 乃近日時, 人所大諱者, 而德馨能言之。 其憂國之誠, 據此可想。 知事金睟, 請兵事、 【如左相議。】 羈縻事, 方爲時議一大禁, 臣不敢容議。" 戶曹判書李廷龜、護軍尹承吉、右尹沈友勝議: "千兵及一半月餉, 萬無得請准許之理。 當具一奏, 痛陳我國悶迫之情。 羈縻之事, 果不無所見, 而爲之極難。" 左贊成沈喜壽議: "毫不內發之論, 前後非一, 揆以天朝事勢, 亦不得不然。 千兵猶不能自養, 更計月餉一半於天朝, 則尤怪請兵益少, 而請餉未已也。 今計莫若盡自振之策, 全抛全、慶稅糧及奴婢身貢等物, 以爲兵餉兵衣之資, 急急敎演訓鍊爲宜。 李德馨羈縻一款, 實出於迫不得已之計, 詢及大臣, 商議無妨。" 兵曹判書申磼議: "當極陳小邦之情勢, 請留一將於京中, 又留一技兵於釜山。 月色則多般拮据, 以他物備給, 亦何妨哉? 釜山信書之通, 則雖羈縻行計之策, 而非自我先開之道。 臨時處變, 姑以天朝, 拒之可也。" 護軍韓孝純議: "臣在南方, 熟察人情, 皆曰: ‘天兵久駐, 縱爲民害, 一朝盡撤, 我等何依? 朝廷若難於餉, 則我等當分授以饋, 如大戶則合五供一兵, 中戶則合十供一兵, 小戶則合二十供一兵, 下三道如是爲之, 則數萬之兵, 不難留。’ 云。 千兵之請, 在所不已。 月餉之銀, 雖非土産, 亦可以紙席紬布刀扇虎豹皮等物, 隨納充數矣。 箚辭所陳, 與臣所見相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