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96권, 선조 31년 1월 6일 임진 4/8 기사 / 1598년 명 만력(萬曆) 26년
접반사 이덕형·권율이 울산에서의 전투 상황을 보고하다
국역
경리(經理)의 접반사인 이조 판서 이덕형과 도원수 권율이 치계하였다.
"울산에서 승첩을 거둔 날 경리와 제독이 군영(軍營)으로 돌아와 신을 불러 말하기를 ‘조선군이 현재 도착한 자는 단지 3천 5백에 불과하니, 이여매(李如梅)와 이방춘(李芳春)에게 분속시키는 것이 좋겠다.’ 하였습니다. 마침 그때 흰 운기가 펼쳐진 부채처럼 군영 위에 있자 경리가 그것을 쳐다보면서 ‘이 운기를 보니 매우 기쁘다.’ 하였습니다. 경리가 제독(提督)과 함께 묘시(卯時)에 삼협(三協)을 재촉하여 진군시키고 함께 가서 독전(督戰), 서낭당(城隍堂)의 토굴(土窟)을 공격했습니다. 성 안에 있는 집들과 강변에 있던 왜선(倭船) 2척이 불화살을 맞고 타느라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뒤덮었습니다. 중국군이 소리 지르면서 성을 함락시키자, 여러 왜적들이 도산(島山)에 있는 토굴 속으로 도망쳐 들어갔습니다. 중국군이 추격하여 많은 적을 참획하였고 경리와 제독은 그 맞은 편에 있는 봉우리에 올라가 독전하니 모든 군사들이 일제히 분발하여 성의 동쪽으로 진격하여 갔습니다. 중국군 10명이 성 위로 올라갔으나 싸우다가 나오지 못했고 나머지 군사들도 성을 무너뜨리지 못한 채 올라갔습니다. 왜선 40여 척이 태화강(太和江)의 하류인 남강(藍江)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경리가 절병(浙兵)011) 2천 명과 기병(騎兵) 1천 명으로 강안(江岸)을 방비하게 하였습니다.
해가 진 뒤 경리가 왜적 5∼6인이 성을 나와 도주한다는 말을 듣고 몸소 추격하였습니다. 제장(諸將)들을 불러 다시 상의하고 긴 나무와 마른 섶을 준비하여 다음날 화공(火攻)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항복한 왜적과 포로가 되었던 사람들을 심문하였더니, 모두들 ‘청정(淸正)이 23일 밤중에 서생포에서 말을 타고 왔는데, 휘하 장수 5∼6인과 함께 토굴 속에 모여 있다.’ 하였습니다. 왜적의 수효는 2천 명 정도인 듯한데 석축(石築)이 깍아지른 듯하고 토굴이 마치 벌집과 같은데 중국군이 쳐다보며 공격하기 때문에 형세가 쉽지 않았습니다. 어제 적의 목을 벤 것이 매우 많았는데, 경리는 성을 함락시키기 전에는 실수(實數)를 조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또한 우리 편의 사상자 수도 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 [註 011] 절병(浙兵) : 절강성의 병사.
원문
〔○〕 經理接伴使吏曹判書李德馨、都元帥權慄馳啓曰: "蔚山勝捷日, 經理與提督還營, 招臣謂曰: ‘朝鮮兵見到者, 但三千五百, 分屬李如梅、李芳春可也。’ 適有白氣, 如開扇在營上, 經理仰見曰: ‘此氣極可喜。’ 經理與提督, 卯時催三協進兵, 同行督戰, 進攻城隍堂土窟。 城裏房舍及江邊倭船二隻, 爲火箭觸燹, 烟焰漲天。 天兵鼓譟陷城, 諸賊遁入島山土窟。 天兵進薄, 斬獲甚衆。 經理、提督, 上其對峯督戰, 諸軍齊奮薄城東面。 天兵十人已上城, 而賊防備甚密, 勢又堅險, 上城天兵, 相與厮殺不得出, 餘軍不得毁城而退。 倭船四十餘隻, 泊于太和江下流藍江, 經理令浙兵二千騎, 兵一千, 防守江岸。 日落後, 經理聞倭人五六名, 山城逃走, 挺身追之。 招諸將再與商議, 備長木乾柴, 明日欲爲火攻。 降倭及被擄人盤問, 則皆云: ‘淸正自西生, 二十三日夜半馳來, 諸將五六俱聚此窟云。’ 賊衆之數, 似二千餘名, 而石築如削, 穴如蜂窠, 天兵仰攻, 其勢不易。 昨日斬級甚多, 經理以爲未陷城之前, 不許見驗, 亦勿言死傷云。"
선조실록96권, 선조 31년 1월 6일 임진 4/8 기사 / 1598년 명 만력(萬曆) 26년
접반사 이덕형·권율이 울산에서의 전투 상황을 보고하다
국역
경리(經理)의 접반사인 이조 판서 이덕형과 도원수 권율이 치계하였다.
"울산에서 승첩을 거둔 날 경리와 제독이 군영(軍營)으로 돌아와 신을 불러 말하기를 ‘조선군이 현재 도착한 자는 단지 3천 5백에 불과하니, 이여매(李如梅)와 이방춘(李芳春)에게 분속시키는 것이 좋겠다.’ 하였습니다. 마침 그때 흰 운기가 펼쳐진 부채처럼 군영 위에 있자 경리가 그것을 쳐다보면서 ‘이 운기를 보니 매우 기쁘다.’ 하였습니다. 경리가 제독(提督)과 함께 묘시(卯時)에 삼협(三協)을 재촉하여 진군시키고 함께 가서 독전(督戰), 서낭당(城隍堂)의 토굴(土窟)을 공격했습니다. 성 안에 있는 집들과 강변에 있던 왜선(倭船) 2척이 불화살을 맞고 타느라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뒤덮었습니다. 중국군이 소리 지르면서 성을 함락시키자, 여러 왜적들이 도산(島山)에 있는 토굴 속으로 도망쳐 들어갔습니다. 중국군이 추격하여 많은 적을 참획하였고 경리와 제독은 그 맞은 편에 있는 봉우리에 올라가 독전하니 모든 군사들이 일제히 분발하여 성의 동쪽으로 진격하여 갔습니다. 중국군 10명이 성 위로 올라갔으나 싸우다가 나오지 못했고 나머지 군사들도 성을 무너뜨리지 못한 채 올라갔습니다. 왜선 40여 척이 태화강(太和江)의 하류인 남강(藍江)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경리가 절병(浙兵)011) 2천 명과 기병(騎兵) 1천 명으로 강안(江岸)을 방비하게 하였습니다.
해가 진 뒤 경리가 왜적 5∼6인이 성을 나와 도주한다는 말을 듣고 몸소 추격하였습니다. 제장(諸將)들을 불러 다시 상의하고 긴 나무와 마른 섶을 준비하여 다음날 화공(火攻)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항복한 왜적과 포로가 되었던 사람들을 심문하였더니, 모두들 ‘청정(淸正)이 23일 밤중에 서생포에서 말을 타고 왔는데, 휘하 장수 5∼6인과 함께 토굴 속에 모여 있다.’ 하였습니다. 왜적의 수효는 2천 명 정도인 듯한데 석축(石築)이 깍아지른 듯하고 토굴이 마치 벌집과 같은데 중국군이 쳐다보며 공격하기 때문에 형세가 쉽지 않았습니다. 어제 적의 목을 벤 것이 매우 많았는데, 경리는 성을 함락시키기 전에는 실수(實數)를 조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또한 우리 편의 사상자 수도 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 [註 011] 절병(浙兵) : 절강성의 병사.
원문
〔○〕 經理接伴使吏曹判書李德馨、都元帥權慄馳啓曰: "蔚山勝捷日, 經理與提督還營, 招臣謂曰: ‘朝鮮兵見到者, 但三千五百, 分屬李如梅、李芳春可也。’ 適有白氣, 如開扇在營上, 經理仰見曰: ‘此氣極可喜。’ 經理與提督, 卯時催三協進兵, 同行督戰, 進攻城隍堂土窟。 城裏房舍及江邊倭船二隻, 爲火箭觸燹, 烟焰漲天。 天兵鼓譟陷城, 諸賊遁入島山土窟。 天兵進薄, 斬獲甚衆。 經理、提督, 上其對峯督戰, 諸軍齊奮薄城東面。 天兵十人已上城, 而賊防備甚密, 勢又堅險, 上城天兵, 相與厮殺不得出, 餘軍不得毁城而退。 倭船四十餘隻, 泊于太和江下流藍江, 經理令浙兵二千騎, 兵一千, 防守江岸。 日落後, 經理聞倭人五六名, 山城逃走, 挺身追之。 招諸將再與商議, 備長木乾柴, 明日欲爲火攻。 降倭及被擄人盤問, 則皆云: ‘淸正自西生, 二十三日夜半馳來, 諸將五六俱聚此窟云。’ 賊衆之數, 似二千餘名, 而石築如削, 穴如蜂窠, 天兵仰攻, 其勢不易。 昨日斬級甚多, 經理以爲未陷城之前, 不許見驗, 亦勿言死傷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