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92권, 선조 30년 9월 13일 경자 6/7 기사 /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도원수 권율을 인견하고 적의 형세에 관해 논의하다
국역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영의정 유성룡(柳成龍),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윤두수(尹斗壽), 좌의정 김응남(金應南), 도원수 권율(權慄)을 인견하였는데, 우승지 김신원(金信元), 가주서(假注書) 권진(權縉)·심집(沈諿), 검열(檢閱) 정홍익(鄭弘翼)·이필영(李必榮) 등이 입시(入侍)하였고,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이산해(李山海)는 뒤늦게 와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원수의 노고가 많다."
하니, 권율이 아뢰기를,
"임무를 받은 지 5년 동안에 공이 털끝만큼도 없으니 죄가 만 번 죽어도 마땅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적의 형세는 어떠한가. ?"
하니, 권율이 아뢰기를,
"왜적의 형세는 임진년에 미치지 못하지만 인심은 도리어 변란의 초기만도 못하게 붕괴되고 있습니다. 김응서(金應瑞)는 단지 2백여 명을 거느렸으나 몸소 사졸(士卒)보다 먼저 나아가 싸웠으므로 왜적의 대세를 꺾지는 못했어도 참획(斬獲)한 것이 조금 있습니다. 충청 병사(忠淸兵使) 이시언(李時言)은 당초에 2천여 명을 거느리고 영남(嶺南)으로 갔었는데, 호남(湖南)으로 돌아올 때쯤은 모두 도망가 흩어져 버리고 50여 명만이 남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쩌면 그렇게까지 궤산(潰散)되었단 말인가. 지금은 창의(倡義)하여 의병을 일으키는 사람이 없는가?"
하니, 권율이 아뢰기를,
"사람들의 생각에 왜적이 재차 쳐들어 왔으니 다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소신이 영남에 있을 적에 정인홍(鄭仁弘)에게 병사를 모집하도록 권고하였습니다. 그가 비록 늙고 병들었지만 본시 선비의 명망이 있어서 근방의 선비들을 모아 의병(義兵)을 일으켜 근왕(勤王)할 수 있으므로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도 그에게 권고하였습니다. 이밖에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른바 복수군(復讐軍)이라는 자들은 왜적을 한 번 만나보기도 전에 모조리 도망쳐 버렸습니다. 이시발(李時發)이 훈련시킨 군사 역시 5분의 1은 흩어져렸으며, 북군(北軍) 8백여 명은 이미 한명련(朝明璉)에게 넘겨주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명련은 어디에 있는가? 칼날에 오른 팔을 부상당하였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떠한가? 중상(重傷)은 아닌가? 그리고 북군은 현재 도망간 자가 없는가?"
하니, 권율이 아뢰기를,
"지금 동작진(銅雀津)에 있는데 그렇게 큰 중상은 아니어서 이미 완쾌되었습니다. 북군 중에 도망한 자는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신은 무엇 때문에 원수를 불러왔는가?"
하니, 응남이 아뢰기를,
"경리(經理)가 권율과 이시언은 어째서 오지 않느냐고 하였기 때문에 불러왔습니다."
하고, 성룡이 아뢰기를,
"당초 강을 파수시키려는 의도에서 불러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올라오라는 말은 서울로 들어오라는 말이 아니라, 한강(漢江)에 와 주둔하여 파수하라는 뜻이었다. 지금 원수가 들어왔기 때문에 인심이 더욱 흉흉한데, 비변사는 어찌하여 이와 같이 처리한단 말인가. 일마다 이 모양이니 어떻게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지금 강을 파수할 때를 당하여 만약 얕은 여울에만 주의를 집중할 경우, 왜적이 전날 임진강(臨津江)에서 했던 것처럼 배를 타고 바로 건너오면 어떻게 계획을 세워 대처할 것인가? 비변사는 반드시 상량(商量)하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삼전도(三田渡) 아래와 저자도(楮子島) 사이에서 강물이 양쪽으로 갈라져 둘이 되는데 거리가 몹시 좁습니다. 그곳에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이 있는데 수목이 대단히 무성하므로 배를 만들어 건널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적들이 장강(長江)의 험함을 우리와 함께 이용하는 것이 됩니다."
하였다. 권율이 아뢰기를,
"서북(西北)의 군사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마병(馬兵)을 초출(抄出)하여 수원(水原) 근처로 보내 번갈아 서로 출입시킴으로써 왜적을 무찌르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매우 좋다."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지킬 수 없다고 하여 지키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키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강을 건너 서로 싸우다가 차질이 생기면 물러나 지켜야 된다는 말이다. 영상(領相)이 체찰사의 임무를 잘 해낼지 모르겠다. 강가에 포를 설치하는 등의 일을 미리 준비하여 배치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동안 산성(山城)에 대한 의논이 일어나 모두들 산성이 좋다고 하면서 시비(是非)하는 자가 없기에 형세를 가리지 않고 곳곳마다 산성을 수축하였었다. 그런데 하나의 산성이 함락당하자 인심이 놀라 선성도 지킬 수 없다고 하여, 이 때문에 더욱 무너지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나라의 일 처리가 아이들 장난과 같을 뿐이니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서울은 이구 동성으로 모두들 지킬 수 있다고 하는데, 지난번에 성을 순행할 때 처음으로 그 제도(制度)를 보고 나도 모르게 실소(失笑)하였다. 그렇게 하고서야 무슨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섭상(葉鱨)의 지시대로 성첩(城堞)을 쌓았는데도 활을 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적을 엿볼 수도 없으니, 이는 이른바 서시(西施)가 찡그리자 그를 따라서 찡그린 것과 같은 격이다. 의논만 해보았자 일에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자, 산해가 아뢰기를,
"지킬 수 없다고 하더라도 모쪼록 잘 정탐하고 나서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탐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는 중국 장수를 접견할 때에 통역(通譯)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언제나 혼선을 일으키는데 이러고서야 무슨 일을 하겠는가. 나 한 사람의 죄 때문에 장사(將士)들이 노천(露天)에서 거처하고 대신과 경사 대부들이 무척이나 고생하게 되는 결과를 빚었으니,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다."
하였다.
원문
○上御別殿, 引見領議政柳成龍、行判中樞府事尹斗壽、左議政金應南、都元帥權慄。 右承旨金信元、假注書權縉ㆍ沈諿、檢閱鄭弘翼ㆍ李必榮入侍, 領敦寧府事李山海追來入侍。 上曰: "元帥多勞苦。" 權慄曰: "受任五年, 功蔑涓埃, 罪合萬死。" 上曰: "大槪賊勢何如?" 慄曰: "賊勢不及壬辰,而人心崩潰, 反不如變初。 金應瑞只率二百餘人, 身先士卒進戰, 故雖不能挫賊大勢, 稍有斬獲。 忠淸兵使李時言,初領二千餘名, 往嶺南, 及還湖南, 亦盡逃散, 只有五十餘矣。" 上曰: "何如是潰散? 今則無倡義起兵者乎? 慄曰: "人心皆以爲賊鋒更來, 無復可爲而如是矣。 小臣曾在嶺南, 勸鄭仁弘募兵。 渠雖老病, 素有士望, 可以收聚傍近士子, 擧義勤王, 故都體察使李元翼, 亦勸之。 此外未聞焉。 所謂復讎軍者, 一不見賊, 已盡逃潰。 李時發操鍊之軍, 亦散五分之一, 而北軍八百餘, 則已付於韓明璉矣。" 上曰: "韓明璉何在? 聞刃傷右臂, 今則何如? 無乃重傷乎? 北軍, 時無逃散者耶?" 慄曰: "今在銅雀而傷不至重, 今已瘳矣。 北軍, 尙無逃亡者耳。" 上曰: "大臣何爲而招元帥而來耶?" 應南曰: "經理以爲權慄、李時言何不來云, 故招來。" 成龍曰: "初意, 欲把守江面而召來矣。" 上曰: "上來之言, 非謂入京之言也, 來駐漢江把截之意也。 今者, 元帥入來, 故人心益洶。 備邊司何如是處〔理〕 乎? 事事若此, 何能有爲? 今當把截江面, 而若徒專意於淺灘, 則賊乘舟直渡,如前日臨津之爲, 則計將安出? 備邊司必有商量矣。" 成龍曰: "三田渡之下, 楮子島之間, 江水中分, 岐而爲二, 相去甚狹, 而那邊有宣、靖兩陵, 樹木廣茂, 可以造舟而渡。 若然則是長江之險, 與我共之。" 慄曰: "西北之軍, 未知其幾何, 抄出馬兵, 送于水原近處, 更出迭入, 勦殺賊鋒可也。" 上曰: "此言甚善。" 成龍曰: "不可謂不可守而不守也。" 上曰: "非謂不守也, 越江相戰, 蹉跌則可退守。 領相以體察使, 未知可以能成否。 江邊設砲等事, 可預排置。" 上曰: "一時山城之議起, 而皆曰: "山城好, 莫有是非。 不擇形勢, 處處修築, 故一山城敗, 而人心驚駭, 曰: ‘山城亦不可守’, 以此益致潰裂。 我國之事, 等兒戲耳, 誠可痛心。 京城萬口一談, 皆曰可守, 而頃日巡城時, 始見制度等事, 不覺失笑。 如彼處置, 做得何事? 城堞, 聽葉鱨指授而爲之, 非徒不能射, 亦不能窺賊, 是所謂西施顰, 而從之顰也。 徒爲論議, 何益於事?" 山海曰: "雖不能守,須善爲偵探, 然後庶可矣。" 上曰: "偵探不須言。 至於唐將接見時, 傳語亦不能詳, 每致倒曳如此, 而做何事? 以予一人之罪, 將士暴露, 大臣卿士大夫, 多致辛苦, 慙負無任。"
선조실록92권, 선조 30년 9월 13일 경자 6/7 기사 /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도원수 권율을 인견하고 적의 형세에 관해 논의하다
국역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영의정 유성룡(柳成龍),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윤두수(尹斗壽), 좌의정 김응남(金應南), 도원수 권율(權慄)을 인견하였는데, 우승지 김신원(金信元), 가주서(假注書) 권진(權縉)·심집(沈諿), 검열(檢閱) 정홍익(鄭弘翼)·이필영(李必榮) 등이 입시(入侍)하였고,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이산해(李山海)는 뒤늦게 와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원수의 노고가 많다."
하니, 권율이 아뢰기를,
"임무를 받은 지 5년 동안에 공이 털끝만큼도 없으니 죄가 만 번 죽어도 마땅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적의 형세는 어떠한가. ?"
하니, 권율이 아뢰기를,
"왜적의 형세는 임진년에 미치지 못하지만 인심은 도리어 변란의 초기만도 못하게 붕괴되고 있습니다. 김응서(金應瑞)는 단지 2백여 명을 거느렸으나 몸소 사졸(士卒)보다 먼저 나아가 싸웠으므로 왜적의 대세를 꺾지는 못했어도 참획(斬獲)한 것이 조금 있습니다. 충청 병사(忠淸兵使) 이시언(李時言)은 당초에 2천여 명을 거느리고 영남(嶺南)으로 갔었는데, 호남(湖南)으로 돌아올 때쯤은 모두 도망가 흩어져 버리고 50여 명만이 남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쩌면 그렇게까지 궤산(潰散)되었단 말인가. 지금은 창의(倡義)하여 의병을 일으키는 사람이 없는가?"
하니, 권율이 아뢰기를,
"사람들의 생각에 왜적이 재차 쳐들어 왔으니 다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소신이 영남에 있을 적에 정인홍(鄭仁弘)에게 병사를 모집하도록 권고하였습니다. 그가 비록 늙고 병들었지만 본시 선비의 명망이 있어서 근방의 선비들을 모아 의병(義兵)을 일으켜 근왕(勤王)할 수 있으므로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도 그에게 권고하였습니다. 이밖에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른바 복수군(復讐軍)이라는 자들은 왜적을 한 번 만나보기도 전에 모조리 도망쳐 버렸습니다. 이시발(李時發)이 훈련시킨 군사 역시 5분의 1은 흩어져렸으며, 북군(北軍) 8백여 명은 이미 한명련(朝明璉)에게 넘겨주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명련은 어디에 있는가? 칼날에 오른 팔을 부상당하였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떠한가? 중상(重傷)은 아닌가? 그리고 북군은 현재 도망간 자가 없는가?"
하니, 권율이 아뢰기를,
"지금 동작진(銅雀津)에 있는데 그렇게 큰 중상은 아니어서 이미 완쾌되었습니다. 북군 중에 도망한 자는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신은 무엇 때문에 원수를 불러왔는가?"
하니, 응남이 아뢰기를,
"경리(經理)가 권율과 이시언은 어째서 오지 않느냐고 하였기 때문에 불러왔습니다."
하고, 성룡이 아뢰기를,
"당초 강을 파수시키려는 의도에서 불러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올라오라는 말은 서울로 들어오라는 말이 아니라, 한강(漢江)에 와 주둔하여 파수하라는 뜻이었다. 지금 원수가 들어왔기 때문에 인심이 더욱 흉흉한데, 비변사는 어찌하여 이와 같이 처리한단 말인가. 일마다 이 모양이니 어떻게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지금 강을 파수할 때를 당하여 만약 얕은 여울에만 주의를 집중할 경우, 왜적이 전날 임진강(臨津江)에서 했던 것처럼 배를 타고 바로 건너오면 어떻게 계획을 세워 대처할 것인가? 비변사는 반드시 상량(商量)하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삼전도(三田渡) 아래와 저자도(楮子島) 사이에서 강물이 양쪽으로 갈라져 둘이 되는데 거리가 몹시 좁습니다. 그곳에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이 있는데 수목이 대단히 무성하므로 배를 만들어 건널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적들이 장강(長江)의 험함을 우리와 함께 이용하는 것이 됩니다."
하였다. 권율이 아뢰기를,
"서북(西北)의 군사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마병(馬兵)을 초출(抄出)하여 수원(水原) 근처로 보내 번갈아 서로 출입시킴으로써 왜적을 무찌르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매우 좋다."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지킬 수 없다고 하여 지키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키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강을 건너 서로 싸우다가 차질이 생기면 물러나 지켜야 된다는 말이다. 영상(領相)이 체찰사의 임무를 잘 해낼지 모르겠다. 강가에 포를 설치하는 등의 일을 미리 준비하여 배치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동안 산성(山城)에 대한 의논이 일어나 모두들 산성이 좋다고 하면서 시비(是非)하는 자가 없기에 형세를 가리지 않고 곳곳마다 산성을 수축하였었다. 그런데 하나의 산성이 함락당하자 인심이 놀라 선성도 지킬 수 없다고 하여, 이 때문에 더욱 무너지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나라의 일 처리가 아이들 장난과 같을 뿐이니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서울은 이구 동성으로 모두들 지킬 수 있다고 하는데, 지난번에 성을 순행할 때 처음으로 그 제도(制度)를 보고 나도 모르게 실소(失笑)하였다. 그렇게 하고서야 무슨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섭상(葉鱨)의 지시대로 성첩(城堞)을 쌓았는데도 활을 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적을 엿볼 수도 없으니, 이는 이른바 서시(西施)가 찡그리자 그를 따라서 찡그린 것과 같은 격이다. 의논만 해보았자 일에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자, 산해가 아뢰기를,
"지킬 수 없다고 하더라도 모쪼록 잘 정탐하고 나서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탐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는 중국 장수를 접견할 때에 통역(通譯)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언제나 혼선을 일으키는데 이러고서야 무슨 일을 하겠는가. 나 한 사람의 죄 때문에 장사(將士)들이 노천(露天)에서 거처하고 대신과 경사 대부들이 무척이나 고생하게 되는 결과를 빚었으니,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다."
하였다.
원문
○上御別殿, 引見領議政柳成龍、行判中樞府事尹斗壽、左議政金應南、都元帥權慄。 右承旨金信元、假注書權縉ㆍ沈諿、檢閱鄭弘翼ㆍ李必榮入侍, 領敦寧府事李山海追來入侍。 上曰: "元帥多勞苦。" 權慄曰: "受任五年, 功蔑涓埃, 罪合萬死。" 上曰: "大槪賊勢何如?" 慄曰: "賊勢不及壬辰,而人心崩潰, 反不如變初。 金應瑞只率二百餘人, 身先士卒進戰, 故雖不能挫賊大勢, 稍有斬獲。 忠淸兵使李時言,初領二千餘名, 往嶺南, 及還湖南, 亦盡逃散, 只有五十餘矣。" 上曰: "何如是潰散? 今則無倡義起兵者乎? 慄曰: "人心皆以爲賊鋒更來, 無復可爲而如是矣。 小臣曾在嶺南, 勸鄭仁弘募兵。 渠雖老病, 素有士望, 可以收聚傍近士子, 擧義勤王, 故都體察使李元翼, 亦勸之。 此外未聞焉。 所謂復讎軍者, 一不見賊, 已盡逃潰。 李時發操鍊之軍, 亦散五分之一, 而北軍八百餘, 則已付於韓明璉矣。" 上曰: "韓明璉何在? 聞刃傷右臂, 今則何如? 無乃重傷乎? 北軍, 時無逃散者耶?" 慄曰: "今在銅雀而傷不至重, 今已瘳矣。 北軍, 尙無逃亡者耳。" 上曰: "大臣何爲而招元帥而來耶?" 應南曰: "經理以爲權慄、李時言何不來云, 故招來。" 成龍曰: "初意, 欲把守江面而召來矣。" 上曰: "上來之言, 非謂入京之言也, 來駐漢江把截之意也。 今者, 元帥入來, 故人心益洶。 備邊司何如是處〔理〕 乎? 事事若此, 何能有爲? 今當把截江面, 而若徒專意於淺灘, 則賊乘舟直渡,如前日臨津之爲, 則計將安出? 備邊司必有商量矣。" 成龍曰: "三田渡之下, 楮子島之間, 江水中分, 岐而爲二, 相去甚狹, 而那邊有宣、靖兩陵, 樹木廣茂, 可以造舟而渡。 若然則是長江之險, 與我共之。" 慄曰: "西北之軍, 未知其幾何, 抄出馬兵, 送于水原近處, 更出迭入, 勦殺賊鋒可也。" 上曰: "此言甚善。" 成龍曰: "不可謂不可守而不守也。" 上曰: "非謂不守也, 越江相戰, 蹉跌則可退守。 領相以體察使, 未知可以能成否。 江邊設砲等事, 可預排置。" 上曰: "一時山城之議起, 而皆曰: "山城好, 莫有是非。 不擇形勢, 處處修築, 故一山城敗, 而人心驚駭, 曰: ‘山城亦不可守’, 以此益致潰裂。 我國之事, 等兒戲耳, 誠可痛心。 京城萬口一談, 皆曰可守, 而頃日巡城時, 始見制度等事, 不覺失笑。 如彼處置, 做得何事? 城堞, 聽葉鱨指授而爲之, 非徒不能射, 亦不能窺賊, 是所謂西施顰, 而從之顰也。 徒爲論議, 何益於事?" 山海曰: "雖不能守,須善爲偵探, 然後庶可矣。" 上曰: "偵探不須言。 至於唐將接見時, 傳語亦不能詳, 每致倒曳如此, 而做何事? 以予一人之罪, 將士暴露, 大臣卿士大夫, 多致辛苦, 慙負無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