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92권, 선조 30년 9월 8일 을미 4/4 기사 /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경상 우병사 김응서가 김해 부사 백사림을 구한 항왜 사백구의 포상을 건의하다
국역
경상 우병사 김응서(金應瑞)가 치계(馳啓)하기를,
"지금 항복한 왜인(倭人)이 지성으로 왜적을 토벌하는 것을 보니 지극히 가상합니다. 금년 3월에 가등청정(加藤淸正)의 부하로서 사백구(沙白𩿨)라고 부르는 왜인 1명이 신의 진중으로 투항하였었는데, 신은 저축한 재물이 없어 접제(接濟)하기가 어렵기에 김해 부사(金海府使) 백사림(白士霖)에게로 보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황석 산성(黃石山城)에서 패전할 때에 그는 조총(鳥銃)을 힘껏 쏘아 왜적 4명을 죽였는데, 뒤에 김해 사람들이 왜적과 내응하여 먼저 도주하였습니다. 그러자 쓸모없이 살만 찐 부사 백사림이 장차 흉악한 적의 칼날에 죽게 될 운명이었는데 사백구가 사림을 인도하여 그를 바위굴에 숨겨놓고 황석(黃石)으로 가리고 초목으로 덮어 왜적으로 하여금 그가 있는 줄을 모르게 하였습니다.
날이 새자 성 안으로 들어간 왜적이 사방 성문을 지켜 출입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러자 사백구는 또 꾀를 내어 사림을 결박하고 자신은 왜인의 모양으로 꾸며 사림을 여러 왜적들 가운데로 끌어내어 성문을 지키는 왜적들을 힐책하기를 ‘너희들은 성문을 어떻게 지켰느냐? 조선 도적이 성 안에 들어와 있는데 수색하여 체포하지 못하였으니 너희들의 죄는 죽어 마땅하다.’ 하면서 칼등으로 그들의 등을 내려치니, 성문을 지키는 왜적들이 반죽음이 되어 애걸하기를 ‘우리들이 멀리서 오느라 노곤하여 깊이 잠든 사이에 조선 도적이 함부로 성 안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죄가 크기는 하다. 그러나 상관(上官)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반드시 용서해 주지 않을 터이니, 상관은 우리들의 실수한 바를 보고하지 말아 목숨을 구제해 달라.’ 하고 성문을 열어 내보내 주었습니다.
그러자 사백구는 사림을 성 밖으로 인도해 나와 산 속에 숨겨둔 뒤에 까닭없이 나가더니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사(府使)는 마음 속으로 ‘이 자가 도로 왜적에게 투항하여 사실대로 말하고는 무리들을 이끌고 내가 있는 곳으로 와 참살(斬殺)하여 그 공을 취하려고 하는구나.’라고 생각하여 극도로 두려움에 사로잡혔으나 손발이 부르터 몸을 움직일 수 없었으므로 겨우 20여 걸음 옮기어 수풀 밑에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3경(三更)이 되자 사백구가 산에서 내려오면서 커다란 바가지에 쌀밥·간장·무우를 담고 냉수가 든 호로병과 쌀 한 말까지 가지고 오더니 부사가 제자리에 없는 것을 보고서는 발을 구르며 탄식하면서 가만히 부사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부사는 그제서야 그가 딴 마음이 없는 것을 알고 ‘아니 사백구인가.’ 하고 응답하니, 그는 바로 달려 들어와 부사의 허리를 껴안고서 말하기를 ‘상관께서 제 자리에 없기에 반드시 왜적에게 사로잡혀 간 것으로 여기었는데, 상관께서 무사히 여기에 계시니 달리 위로할 말이 없다. 상관께서 너무도 배고프고 목말라 하시기 때문에 내가 도로 왜인의 모양으로 꾸며 왜진(倭陣)으로 들어가 「나는 바로 안음(安陰)에 진을 치고 있는 왜장(倭將)의 부하인데, 양식이 벌써 떨어지고 날씨마저 추워 고향을 떠나온 사람이 장차 살 수 없게 되었다. 그대들이 성을 함락시킬 때에 노획한 물건을 내게 조금만 주어 쇠잔한 목숨하나 구제해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여러 왜적들이 불쌍하다고들 하면서 쌀 한 말과 밥·간장·유의(襦衣) 두 벌을 내어주기에 가지고 왔다.’ 하고서, 밥을 부사에게 주고 옷을 그 몸에 덮어주면서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부사 역시 좋은 말로 위로하고 밥을 덜어 그에게 주니 부사가 다 먹기를 기다린 뒤에야 비로소 먹었는데 이 때문에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 나라의 유식한 무리들도 가장(家長)이나 처자식을 구제하지 않고 있는데 무식한 오랑캐의 무리로서 지성스러운 마음이 이와 같았으니 사람으로서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사백구에게 특별히 중상(重賞)을 내려 그의 마음을 위로해 주소서. 항복한 왜인들이 몸을 보전하는 길을 알아 구원(久遠)한 계책을 위하여 성명(姓名)을 조선 사람과 똑같이 고쳐 부르고 싶다고 하니, 항복한 왜인에게 사성(賜姓)하는 일을 조정에서 속히 정탈(定奪)하여 내려 보내소서."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啓下)하였다.
원문
○慶尙右兵使金應瑞馳啓曰: "今觀降倭之至誠討賊, 極爲嘉歎。 今年三月, 淸正管下倭人 沙白𩿨稱名倭一名, 投降臣陣, 臣無所儲之物, 接濟爲難, 金海府使(自士霖)〔白士霖〕 處移送矣。 今此黃石之敗, 力放鳥銃, 殺四倭後, 金海之人, 與賊內應, 先爲逃走。 府使白士霖, 則肥頓無用, 將未免兇鋒之至, 沙白𩿨引士霖, 藏身岩穴, 遮以黃石, 茂以草木, 使賊不知其存。 日又將明, 入城之倭, 守四門禁斷, 故沙白𩿨又爲出謀, 結縛士霖, 身作倭人之體, 引出衆賊中, 詰守門倭賊曰: ‘汝等守門何所事? 朝鮮盜賊, 入在城中, 而不得搜捕, 汝罪當斬。’ 劍背打其背, 則守門之倭, 半死哀乞曰: ‘我等遠來勞苦, 沈眠不覺, 遂爲朝鮮盜賊, 濫入城中, 罪則極矣。 上官若知此奇, 必不饒貸, 上官勿告我等之所失, 以救人命。’ 開門出送。 沙白𩿨引出城外, 山中潛置之後, 無緣出歸, 終不還來。 府使意以爲還投賊中, 實言事狀, 以其類, 引來我處斬殺, 欲取其功, 悚懼方極, 手足腁胝, 不得運身, 纔移二十餘步, 林下隱身, 則三更, 沙白𩿨自山下來,巨瓢盛稻食、鹽醬、菁根, 陶甁盛冷水, 又持米斗, 見府使無有本處, 頓足歎息, 潛呼府使。 府使方知其無異心, 答曰: ‘無乃沙白𩿨乎?’ 卽爲走入, 抱府使腰曰: ‘上官無本處, 必以爲賊擄去, 上官無事在此, 他無慰言。 上官飢渴已逼, 故我還作倭形, 入倭陣曰:「我是安陰結陣將倭卒下, 糧食旣乏, 日且寒冷, 離鄕之人, 將不得生。 君等陷城之時, 覓得之物, 小惠於我, 以救一殘命如何云」, 則衆賊曰: 「矜憐矜憐。」 米斗及飯、醬、襦衣兩件, 出給持來’ 云’, 以飯進於府使, 以衣加其身, 垂泣不絶。 府使亦以厚意慰言, 除飯而給之, 則待府使畢食後, 始乃食之, 以此得生云。 此時我國有識之輩,不救其家長、妻子。 以無識胡越之輩, 誠心如此, 人所可愧。 沙白𩿨, 特加重賞, 以慰其心。 降倭等已知保身之路, 欲爲久遠之計, 而姓名朝鮮一樣改號云。 降倭賜姓事, 朝廷斯速定奪下送事。" 啓下備邊司。
선조실록92권, 선조 30년 9월 8일 을미 4/4 기사 /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경상 우병사 김응서가 김해 부사 백사림을 구한 항왜 사백구의 포상을 건의하다
국역
경상 우병사 김응서(金應瑞)가 치계(馳啓)하기를,
"지금 항복한 왜인(倭人)이 지성으로 왜적을 토벌하는 것을 보니 지극히 가상합니다. 금년 3월에 가등청정(加藤淸正)의 부하로서 사백구(沙白𩿨)라고 부르는 왜인 1명이 신의 진중으로 투항하였었는데, 신은 저축한 재물이 없어 접제(接濟)하기가 어렵기에 김해 부사(金海府使) 백사림(白士霖)에게로 보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황석 산성(黃石山城)에서 패전할 때에 그는 조총(鳥銃)을 힘껏 쏘아 왜적 4명을 죽였는데, 뒤에 김해 사람들이 왜적과 내응하여 먼저 도주하였습니다. 그러자 쓸모없이 살만 찐 부사 백사림이 장차 흉악한 적의 칼날에 죽게 될 운명이었는데 사백구가 사림을 인도하여 그를 바위굴에 숨겨놓고 황석(黃石)으로 가리고 초목으로 덮어 왜적으로 하여금 그가 있는 줄을 모르게 하였습니다.
날이 새자 성 안으로 들어간 왜적이 사방 성문을 지켜 출입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러자 사백구는 또 꾀를 내어 사림을 결박하고 자신은 왜인의 모양으로 꾸며 사림을 여러 왜적들 가운데로 끌어내어 성문을 지키는 왜적들을 힐책하기를 ‘너희들은 성문을 어떻게 지켰느냐? 조선 도적이 성 안에 들어와 있는데 수색하여 체포하지 못하였으니 너희들의 죄는 죽어 마땅하다.’ 하면서 칼등으로 그들의 등을 내려치니, 성문을 지키는 왜적들이 반죽음이 되어 애걸하기를 ‘우리들이 멀리서 오느라 노곤하여 깊이 잠든 사이에 조선 도적이 함부로 성 안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죄가 크기는 하다. 그러나 상관(上官)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반드시 용서해 주지 않을 터이니, 상관은 우리들의 실수한 바를 보고하지 말아 목숨을 구제해 달라.’ 하고 성문을 열어 내보내 주었습니다.
그러자 사백구는 사림을 성 밖으로 인도해 나와 산 속에 숨겨둔 뒤에 까닭없이 나가더니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사(府使)는 마음 속으로 ‘이 자가 도로 왜적에게 투항하여 사실대로 말하고는 무리들을 이끌고 내가 있는 곳으로 와 참살(斬殺)하여 그 공을 취하려고 하는구나.’라고 생각하여 극도로 두려움에 사로잡혔으나 손발이 부르터 몸을 움직일 수 없었으므로 겨우 20여 걸음 옮기어 수풀 밑에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3경(三更)이 되자 사백구가 산에서 내려오면서 커다란 바가지에 쌀밥·간장·무우를 담고 냉수가 든 호로병과 쌀 한 말까지 가지고 오더니 부사가 제자리에 없는 것을 보고서는 발을 구르며 탄식하면서 가만히 부사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부사는 그제서야 그가 딴 마음이 없는 것을 알고 ‘아니 사백구인가.’ 하고 응답하니, 그는 바로 달려 들어와 부사의 허리를 껴안고서 말하기를 ‘상관께서 제 자리에 없기에 반드시 왜적에게 사로잡혀 간 것으로 여기었는데, 상관께서 무사히 여기에 계시니 달리 위로할 말이 없다. 상관께서 너무도 배고프고 목말라 하시기 때문에 내가 도로 왜인의 모양으로 꾸며 왜진(倭陣)으로 들어가 「나는 바로 안음(安陰)에 진을 치고 있는 왜장(倭將)의 부하인데, 양식이 벌써 떨어지고 날씨마저 추워 고향을 떠나온 사람이 장차 살 수 없게 되었다. 그대들이 성을 함락시킬 때에 노획한 물건을 내게 조금만 주어 쇠잔한 목숨하나 구제해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여러 왜적들이 불쌍하다고들 하면서 쌀 한 말과 밥·간장·유의(襦衣) 두 벌을 내어주기에 가지고 왔다.’ 하고서, 밥을 부사에게 주고 옷을 그 몸에 덮어주면서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부사 역시 좋은 말로 위로하고 밥을 덜어 그에게 주니 부사가 다 먹기를 기다린 뒤에야 비로소 먹었는데 이 때문에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 나라의 유식한 무리들도 가장(家長)이나 처자식을 구제하지 않고 있는데 무식한 오랑캐의 무리로서 지성스러운 마음이 이와 같았으니 사람으로서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사백구에게 특별히 중상(重賞)을 내려 그의 마음을 위로해 주소서. 항복한 왜인들이 몸을 보전하는 길을 알아 구원(久遠)한 계책을 위하여 성명(姓名)을 조선 사람과 똑같이 고쳐 부르고 싶다고 하니, 항복한 왜인에게 사성(賜姓)하는 일을 조정에서 속히 정탈(定奪)하여 내려 보내소서."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啓下)하였다.
원문
○慶尙右兵使金應瑞馳啓曰: "今觀降倭之至誠討賊, 極爲嘉歎。 今年三月, 淸正管下倭人 沙白𩿨稱名倭一名, 投降臣陣, 臣無所儲之物, 接濟爲難, 金海府使(自士霖)〔白士霖〕 處移送矣。 今此黃石之敗, 力放鳥銃, 殺四倭後, 金海之人, 與賊內應, 先爲逃走。 府使白士霖, 則肥頓無用, 將未免兇鋒之至, 沙白𩿨引士霖, 藏身岩穴, 遮以黃石, 茂以草木, 使賊不知其存。 日又將明, 入城之倭, 守四門禁斷, 故沙白𩿨又爲出謀, 結縛士霖, 身作倭人之體, 引出衆賊中, 詰守門倭賊曰: ‘汝等守門何所事? 朝鮮盜賊, 入在城中, 而不得搜捕, 汝罪當斬。’ 劍背打其背, 則守門之倭, 半死哀乞曰: ‘我等遠來勞苦, 沈眠不覺, 遂爲朝鮮盜賊, 濫入城中, 罪則極矣。 上官若知此奇, 必不饒貸, 上官勿告我等之所失, 以救人命。’ 開門出送。 沙白𩿨引出城外, 山中潛置之後, 無緣出歸, 終不還來。 府使意以爲還投賊中, 實言事狀, 以其類, 引來我處斬殺, 欲取其功, 悚懼方極, 手足腁胝, 不得運身, 纔移二十餘步, 林下隱身, 則三更, 沙白𩿨自山下來,巨瓢盛稻食、鹽醬、菁根, 陶甁盛冷水, 又持米斗, 見府使無有本處, 頓足歎息, 潛呼府使。 府使方知其無異心, 答曰: ‘無乃沙白𩿨乎?’ 卽爲走入, 抱府使腰曰: ‘上官無本處, 必以爲賊擄去, 上官無事在此, 他無慰言。 上官飢渴已逼, 故我還作倭形, 入倭陣曰:「我是安陰結陣將倭卒下, 糧食旣乏, 日且寒冷, 離鄕之人, 將不得生。 君等陷城之時, 覓得之物, 小惠於我, 以救一殘命如何云」, 則衆賊曰: 「矜憐矜憐。」 米斗及飯、醬、襦衣兩件, 出給持來’ 云’, 以飯進於府使, 以衣加其身, 垂泣不絶。 府使亦以厚意慰言, 除飯而給之, 則待府使畢食後, 始乃食之, 以此得生云。 此時我國有識之輩,不救其家長、妻子。 以無識胡越之輩, 誠心如此, 人所可愧。 沙白𩿨, 特加重賞, 以慰其心。 降倭等已知保身之路, 欲爲久遠之計, 而姓名朝鮮一樣改號云。 降倭賜姓事, 朝廷斯速定奪下送事。" 啓下備邊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