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84권, 선조 30년 1월 21일 임자 2/7 기사 /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왕이 경상도 방어사 동지중추부사 고언백을 인견하다
국역
사시(巳時)에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경상도 방어사(慶尙道防禦使) 동지중추부사 고언백(高彦伯)을 【고언백은 연리(椽吏)에서 발신(發身)하여 힘껏 적을 토벌하여 치돌하면서 적을 벤 공은 없지 않으나 명기(名器)를 함부로 제수받아 교만함이 이미 싹터서 심지어 내구마(內廐馬)를 제명(題名)하여 타고 나갔다. 자고로 무공(武功)이 있는 자로 끝을 잘 마치는 사람이 드문 것이 당연하다. 】 인견하였다. 상이 승지와 사관에게 이르기를,
"모두 앞으로 나오라."
하니, 승지 등이 나아갔다. 상이 또 고언백에게 이르기를,
"경도 앞으로 나오라."
하고는, 상이 고언백에게 이르기를,
"왜적의 소식이 이러한데 어떻게 막아야 하는가?"
하니, 고언백이 아뢰기를,
"군사의 일은 멀리서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오직 임기(臨機)하여 처리함에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이끌고 남하(南下)하는 것은 어떤 군사인가?"
하니, 고언백이 아뢰기를,
"신이 처음 양주 목사(楊州牧使)가 되었을 때 밤에 공격하기 위하여 3천 7백 명과 승군(僧軍) 4백 명을 모집했었는데 모두 역질로 죽고 남은 자는 단지 1백여 명인데 신이 이번에 점열(點閱)하여 거느리고 갈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 왜적과 싸울 때에 왜적과 아군 어느 쪽이 나았는가?"
하니, 고언백이 아뢰기를,
"신은 작은 싸움을 40전(戰), 큰 싸움은 1백여 전을 하였는데, 아군은 훈련이 되지 않아 으레 겁을 먹고 도망하기 때문에 항상 이기지는 못하였습니다. 신이 임진년에는 매양 소수의 적을 상대로 기회를 틈타 전후를 쳤기 때문에 5백 명이나 되는 많은 적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거느린 군사는 모두 궁시(弓矢)를 가졌는가?"
하니, 고언백이 아뢰기를,
"대략 호시(弧矢)를 가지고 갑니다. 다만 지난 임진년 8월에 이 병력을 거느리고 20여 번을 싸웠으나 아직껏 상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의 마음이 실망하여 허물을 저에게 돌리고 있으니,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평소에 몇 곳의 변장(邊將)을 지냈는가?"
하니, 고언백이 아뢰기를,
"처음에는 북병사(北兵使)의 군관(軍官)이 되었고 또 평안 병사(平安兵使)의 군관이 되었으며 사신을 따라 북경(北京)에 8 번을 갔었습니다. 그후에는 청성 만호(靑城萬戶)를 거쳐 선공감 주부(繕工監主簿)로 전보되었습니다. 임진년에 척후장(斥候將)으로 신립(申砬)을 따라 경상도에 갔다가 달천(達川)에서 군사가 패하고 장수가 죽은 뒤에는 신이 외로운 군사 50명과 함께 양주(楊州)와 연천(漣川)사이를 출입하면서 장정을 불러모으고 있을 때 왜구는 이미 경성에 들어왔습니다. 신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누원(樓院)에 이르러 길에서 적을 만나 속희동(俗稀洞)까지 추격해 40명을 목베고 신 역시 6∼7군데 창상을 입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이 남쪽에 내려가거든 다시 노력하여 후세에 이름을 남기라."
하였다. 고언백이 배사하고 나가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잠시 앉아 있으라."
하고, 소환(小宦)에게 명하여 술을 내렸다. 다 마시고 언백이 물러가기를 고하니, 상이 마장(馬粧) 1부를 내렸다.
- 【태백산사고본】 53책 84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148면
-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왕실-국왕(國王) / 왕실-사급(賜給) / 외교-왜(倭) / 사상-불교(佛敎)
원문
○巳時, 上御別殿, 引見慶尙道防禦使同知中樞府事高彦伯。 【起於掾吏, 力於討賊, 其馳突斬馘, 不無功勞, 而名器濫授, 驕亢已萌, 至於內廐題名出騎。 自古武功之人, 鮮得善終, 宜矣。】 上謂承旨、史官曰: "皆前進。" 承旨等進, 上又謂彦伯曰: "卿亦進前。" 上謂彦伯曰: "倭賊聲息如此, 何以防之?" 彦伯曰: "兵難遙度, 唯在臨機處之如何。" 上曰: "今之所領而南下者, 何兵也?" 彦伯曰: "臣初爲楊州牧, 因夜擊, 募得三千七百名、僧軍四百名, 而皆死於疾疫, 餘存者只百餘名矣。 臣今點閱而行。" 上曰: "前者與賊相戰, 倭賊與我軍孰勝?" 彦伯曰: "臣小者四十戰, 多者百餘戰, 而我軍不敎之兵, 例爲怯遁, 故不得常勝矣。 臣於壬辰, 每乘賊小, 勦截前後, 故捕得五百之多。" 上曰: "今所領兵, 皆持弓矢否?" 彦伯曰: "略將弧矢而去矣。 第臣昔在壬辰八月, 率此兵力, 戰二十數, 而尙皆未蒙顯賞。 由是群情缺望, 歸咎於臣, 不敢不達。" 上曰: "卿在平昔, 經幾處邊將。" 彦伯曰: "初爲北兵使軍官, 又爲平安兵使軍官, 隨使臣赴京者八。 厥後由靑城萬戶, 轉繕工監主簿。 壬辰以斥堠將, 隨申砬往慶尙道, 自達川兵敗將死之後, 臣與孤軍五十, 出入楊州、漣川之間, 召募丁(狀)〔壯〕 時, 倭寇已入京都矣。 臣率餘兵, 到樓院, 遇賊於路, 追至俗稀洞, 捕得四十馘, 臣亦被六七創。" 上曰: "卿下南中, 更爲努力, 垂名後世。" 彦伯辭出, 上曰: "姑在座。" 命小宦賜酒訖, 彦伯告退, 上賜馬粧一部。
- 【태백산사고본】 53책 84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148면
-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왕실-국왕(國王) / 왕실-사급(賜給) / 외교-왜(倭) / 사상-불교(佛敎)
선조실록84권, 선조 30년 1월 21일 임자 2/7 기사 /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왕이 경상도 방어사 동지중추부사 고언백을 인견하다
국역
사시(巳時)에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경상도 방어사(慶尙道防禦使) 동지중추부사 고언백(高彦伯)을 【고언백은 연리(椽吏)에서 발신(發身)하여 힘껏 적을 토벌하여 치돌하면서 적을 벤 공은 없지 않으나 명기(名器)를 함부로 제수받아 교만함이 이미 싹터서 심지어 내구마(內廐馬)를 제명(題名)하여 타고 나갔다. 자고로 무공(武功)이 있는 자로 끝을 잘 마치는 사람이 드문 것이 당연하다. 】 인견하였다. 상이 승지와 사관에게 이르기를,
"모두 앞으로 나오라."
하니, 승지 등이 나아갔다. 상이 또 고언백에게 이르기를,
"경도 앞으로 나오라."
하고는, 상이 고언백에게 이르기를,
"왜적의 소식이 이러한데 어떻게 막아야 하는가?"
하니, 고언백이 아뢰기를,
"군사의 일은 멀리서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오직 임기(臨機)하여 처리함에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이끌고 남하(南下)하는 것은 어떤 군사인가?"
하니, 고언백이 아뢰기를,
"신이 처음 양주 목사(楊州牧使)가 되었을 때 밤에 공격하기 위하여 3천 7백 명과 승군(僧軍) 4백 명을 모집했었는데 모두 역질로 죽고 남은 자는 단지 1백여 명인데 신이 이번에 점열(點閱)하여 거느리고 갈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 왜적과 싸울 때에 왜적과 아군 어느 쪽이 나았는가?"
하니, 고언백이 아뢰기를,
"신은 작은 싸움을 40전(戰), 큰 싸움은 1백여 전을 하였는데, 아군은 훈련이 되지 않아 으레 겁을 먹고 도망하기 때문에 항상 이기지는 못하였습니다. 신이 임진년에는 매양 소수의 적을 상대로 기회를 틈타 전후를 쳤기 때문에 5백 명이나 되는 많은 적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거느린 군사는 모두 궁시(弓矢)를 가졌는가?"
하니, 고언백이 아뢰기를,
"대략 호시(弧矢)를 가지고 갑니다. 다만 지난 임진년 8월에 이 병력을 거느리고 20여 번을 싸웠으나 아직껏 상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의 마음이 실망하여 허물을 저에게 돌리고 있으니,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평소에 몇 곳의 변장(邊將)을 지냈는가?"
하니, 고언백이 아뢰기를,
"처음에는 북병사(北兵使)의 군관(軍官)이 되었고 또 평안 병사(平安兵使)의 군관이 되었으며 사신을 따라 북경(北京)에 8 번을 갔었습니다. 그후에는 청성 만호(靑城萬戶)를 거쳐 선공감 주부(繕工監主簿)로 전보되었습니다. 임진년에 척후장(斥候將)으로 신립(申砬)을 따라 경상도에 갔다가 달천(達川)에서 군사가 패하고 장수가 죽은 뒤에는 신이 외로운 군사 50명과 함께 양주(楊州)와 연천(漣川)사이를 출입하면서 장정을 불러모으고 있을 때 왜구는 이미 경성에 들어왔습니다. 신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누원(樓院)에 이르러 길에서 적을 만나 속희동(俗稀洞)까지 추격해 40명을 목베고 신 역시 6∼7군데 창상을 입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이 남쪽에 내려가거든 다시 노력하여 후세에 이름을 남기라."
하였다. 고언백이 배사하고 나가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잠시 앉아 있으라."
하고, 소환(小宦)에게 명하여 술을 내렸다. 다 마시고 언백이 물러가기를 고하니, 상이 마장(馬粧) 1부를 내렸다.
- 【태백산사고본】 53책 84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148면
-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왕실-국왕(國王) / 왕실-사급(賜給) / 외교-왜(倭) / 사상-불교(佛敎)
원문
○巳時, 上御別殿, 引見慶尙道防禦使同知中樞府事高彦伯。 【起於掾吏, 力於討賊, 其馳突斬馘, 不無功勞, 而名器濫授, 驕亢已萌, 至於內廐題名出騎。 自古武功之人, 鮮得善終, 宜矣。】 上謂承旨、史官曰: "皆前進。" 承旨等進, 上又謂彦伯曰: "卿亦進前。" 上謂彦伯曰: "倭賊聲息如此, 何以防之?" 彦伯曰: "兵難遙度, 唯在臨機處之如何。" 上曰: "今之所領而南下者, 何兵也?" 彦伯曰: "臣初爲楊州牧, 因夜擊, 募得三千七百名、僧軍四百名, 而皆死於疾疫, 餘存者只百餘名矣。 臣今點閱而行。" 上曰: "前者與賊相戰, 倭賊與我軍孰勝?" 彦伯曰: "臣小者四十戰, 多者百餘戰, 而我軍不敎之兵, 例爲怯遁, 故不得常勝矣。 臣於壬辰, 每乘賊小, 勦截前後, 故捕得五百之多。" 上曰: "今所領兵, 皆持弓矢否?" 彦伯曰: "略將弧矢而去矣。 第臣昔在壬辰八月, 率此兵力, 戰二十數, 而尙皆未蒙顯賞。 由是群情缺望, 歸咎於臣, 不敢不達。" 上曰: "卿在平昔, 經幾處邊將。" 彦伯曰: "初爲北兵使軍官, 又爲平安兵使軍官, 隨使臣赴京者八。 厥後由靑城萬戶, 轉繕工監主簿。 壬辰以斥堠將, 隨申砬往慶尙道, 自達川兵敗將死之後, 臣與孤軍五十, 出入楊州、漣川之間, 召募丁(狀)〔壯〕 時, 倭寇已入京都矣。 臣率餘兵, 到樓院, 遇賊於路, 追至俗稀洞, 捕得四十馘, 臣亦被六七創。" 上曰: "卿下南中, 更爲努力, 垂名後世。" 彦伯辭出, 上曰: "姑在座。" 命小宦賜酒訖, 彦伯告退, 上賜馬粧一部。
- 【태백산사고본】 53책 84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148면
-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왕실-국왕(國王) / 왕실-사급(賜給) / 외교-왜(倭) / 사상-불교(佛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