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75권, 선조 29년 5월 7일 계유 1/1 기사 /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
《주역》을 강독한 후 민심과 부역, 쇄마의 폐단 등의 문제를 대신들과 의논하다
국역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주역(周易)》을 강독하였다. 강독이 끝나고서 상이 이르기를,
"왕 동지(王同知) 【왕이길(王㹫吉). 】 가 오늘 서울에 들어온다 하는데 어떠한 사람인가?"
하니, 김응남(金應南)이 아뢰기를,
"문신(文臣)이라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문과 급제자라면 다른 중국 사람과 같게 접대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무슨 일로 나온다 하는가?"
하니, 응남이 아뢰기를,
"그 패문(牌文)에는 무뢰배를 살펴서 금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들으니 일로(一路)의 군사와 식량을 점검하는 일로 부산(釜山)에 갈 것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동지라는 것은 어떤 벼슬인가?"
하니, 응남이 아뢰기를,
"외관(外官)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판관(判官)과 같은가?"
하니, 한효순(韓孝純)이 아뢰기를,
"곤주부(袞州府)의 아관(亞官)입니다."
하고, 이기(李墍)는 아뢰기를,
"부 동지(府同知)라는 것은 다 문과 급제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접대하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으니 접반(接伴)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 듯하다. 군사와 식량 따위의 일을 묻는다면 역관(譯官)들이 말을 잘못할 걱정이 없지 않으니, 이것도 염려스럽다."
하였다. 권희(權憘)가 아뢰기를,
"요즈음 상사(上使)가 영문(營門)에서 나갔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중외(中外)의 인심이 한결같이 소요합니다. 사대부까지도 다 먼저 동요하여 혹 다투어 배를 차지하거나 가족을 먼저 내보내고 짐을 나르는 등 백성이 바라보고 본받는 자의 풍조가 다 이러합니다. 자식이 있어도 그러한데 어떻게 어리석은 백성을 책망하겠습니까. 급변이 일어나면 토붕 와해(土崩瓦解)됨이 임진년 때보다 심할 것인데, 상께서는 계책을 어떻게 내실는지 모르겠습니다. 반드시 경성(京城)을 지킬 것이라면 중외에 일러서 백성이 경성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야 조치하여 대비할 수 있을 것이며, 지킬 수 없다면 요새지를 자리잡아 물러가 지킬 곳을 먼저 정하여 백성이 의지할 데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 무너져 흩어질 걱정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심이 안정되지 않으면 그 화(禍)가 적의 화보다 심하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경(三京)이 수복된 지 5년이 되었으나, 묘당(廟堂)의 계획과 장사(將士)가 하는 짓에 볼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인심이 갈수록 해이해지니, 이러고서 그 성공을 바라는 것은 또한 그르지 않겠습니까. 근일 외간에서는 유언에 모두 동요되어, 위에서 요동(遼東)으로 건너가려는 생각을 가지셨다 하여 사람들이 다 발돋움하여 기다리고 있는데, 이것은 다 성지(聖志)가 굳게 정해지지 않아서 그런 것이니, 위에서 참으로 중외에 일러서 그렇지 않다는 뜻을 보이신다면 인심이 믿는 바가 있어서 진정될 것입니다. 신민이 여기에 있고 종사(宗社)가 여기에 있으니 임금은 사직(社稷)을 위해 죽는다는 의리로 말하면 결코 요동으로 건너가서는 안 됩니다."
하고, 응남은 아뢰기를,
"대의(大義)는 돌볼 겨를이 없더라도 형세가 또한 요동으로 건너갈 수 없습니다. 일로에 식량이 없으니 한 번 도성(都城)의 문을 나서면 모든 관원이 굶어 죽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성을 지켜려면 수(守)자 하나만 써서는 안 될 것이다. 정예한 군사가 있더라도 곡식을 먹지 않을 수 없고 빈손으로 할 수도 없으니, 이것은 비변사가 시급히 조치해야 할 일이다."
하였다. 이기가 아뢰기를,
"요새로는 경성보다 나은 데가 없는데, 이곳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처음부터 유의하여 조치하였다면, 이제는 터전이 마련되어 백성이 다 피난할 곳으로 믿어 근본이 점점 견고해지고 사방이 의지하는 것이 마치 뭇별이 북극성을 향하는 것과 같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전에 장순(張巡)·허원(許遠)이 강회(江淮)를 지켜 적의 군사가 깊이 들어오지 못하였으므로 명황(明皇)129) 이 무사히 촉(蜀)으로 갔으니, 이는 그 공로가 작지 않은 것입니다. 중신(重臣)을 정하여 마음을 다해서 경리(經理)하여 반드시 지킬 생각을 하고 버리고 떠나지 말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윤형(尹泂)은 아뢰기를,
"신이 충청도 남포(藍浦) 땅에 있을 때에 보니, 부역(賦役)이 많아서 백성이 편히 살지 못하였습니다. 쇄마(刷馬)의 대역(大役)은 말할 수도 없거니와 포수(砲手)·살수(殺手)를 뽑아내고 선봉(先鋒)을 가려 뽑아 보내는 따위의 여러 가지 일이 계속 몰리는데, 병사(兵使) 원균(元均)은 상당 산성(上黨山城)에서 성을 쌓을 때에 편의에 따라서 하지 않고서 잔폐(殘弊)한 고을이건 부성(富盛)한 고을이건 가리지 않고 각각 2∼3백 명을 내게 하여 부역을 독촉하므로 근착(根着)이 없는 자는 죄다 유이(流移)하고 겨우 남아 있는 자도 장차 보전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백성이 원망하고 배반한다면 성을 아무리 굳게 쌓았더라도 누구와 함께 지키겠습니까. 더구나 이 농사철에 분주히 명을 따르기에 지쳐 백성이 밭에 나가 농사짓지 못하므로 이 때문에 원망이 더욱 극도에 이르렀으니, 우선 농한기를 기다려서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빨리 비변사를 시켜 될 수 있는 대로 잘 처치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대개 원균의 하는 짓이 외람하므로 신이 논계(論啓)하려 하였으나, 원중(院中)이 일을 맡은 사람을 가벼이 논하여서는 안 된다 하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응남은 아뢰기를,
"윤형은 그 폐단을 보고 아뢰었으나 원균 같은 자는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대개 장수에는 보장(步將)·수장(水將)의 차이가 있는데, 예전 송(宋)나라 때에 장세걸(張世傑)은 보장으로서 수장이 되고 유사용(劉思用)은 수장으로서 보장이 되어 그 쓰임이 잘못되었으므로 공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원균은 수장의 재주를 지녔으나 이순신(李舜臣)과 서로 의견이 맞지 않으므로 할 수 없으니, 혹 경기 수사(京畿水使)를 제수하면 그 재주를 펼 수 있을 것입니다. 산성의 일은 신도 전일에 농한기에 할 것을 계청하였습니다."
하고, 이희득(李希得)은 아뢰기를,
"조정(趙挺)이 회양 부사(淮陽府使)로 있었을 때에 한 번의 쇄마 값을 거두어 모아 5∼6필의 말을 사서 관속(官屬)에게 주어 기르게 하여 이것을 사용하였으므로, 백성은 쇄마의 역(役)이 있는 줄을 몰랐습니다. 수령(守令)이 조금만 마음을 쓰면 백성이 그 혜택을 입을 것입니다."
하고, 응남은 아뢰기를,
"전 청주 목사(淸州牧使) 이암(李巖)은 벼슬살이를 잘하여 한두 해에 한 번 쇄마의 차례가 돌아오게 하였고, 그가 갈린 후에도 석 달 동안에 두세 차례가 돌아올 뿐이었다고 합니다."
하고, 권회는 아뢰기를,
"강화 부사(江華府使) 심우정(沈友正)은 벼슬살이를 잘하여 백성이 다 사랑하고 추대하였으므로 농사철에 부역(赴役)시켜도 원망하는 백성이 없었습니다. 강화부는 둘레가 7식(息)130) 인데, 전조(前朝)의 만리성(萬里城) 옛터에 돈장(墩牆)을 쌓으려고, 먼저 마니산(摩尼山) 근처 40리에 온 부민(府民)을 닷새 동안 부역시켜 성을 쌓았으나 끝내지는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라가 어지러우면 어진 세상을 생각하거니와, 지금의 일은 묘당(廟堂)에서 구획하여 조치해야 한다. 수령을 가리는 일은 이조(吏曹)가 혹 살피지 못하더라도 대신(大臣)이 때때로 면책(面責)하여 경각시킬 수 있고, 대간(臺諫)도 서경(署經)하는 법이 있는데, 어찌하여 가리기 어려움을 걱정하는가. 나는 대신과 전조(銓曹)가 다 그르다고 생각한다."
하자, 응남이 아뢰기를,
"신처럼 나약하고 무능하며 본디부터 어리석은 자가 외람되게 정승 자리를 차지하여 소인으로서 군자의 자리에 있는 것이 몹시 두려운데, 어떻게 모든 공적을 밝히고 온갖 관원을 다스리겠습니까."
하였다. 효순이 아뢰기를,
"본조(本曹)가 지금 글을 잘하는 무사(武士)를 뽑아내어 병서(兵書)를 가르치려 하는데, 훈상(訓上)이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문관(文官) 가운데에는 원임(原任)이 긴요하지 않은 자가 적고, 차천로(車天輅)는 병가(兵家)의 뜻을 모르기는 하나 문장을 숭상하여 서사(書史)를 널리 본 자이니, 강습을 논의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아직 그 사람됨을 알지 못하지만 전에 들으니 글을 잘하기는 하나 경박하다고 하였다. 《장자(莊子)》 등의 글을 가르치는 것이라면 그래도 괜찮겠으나 손오(孫吳)131) 의 글이라면 어찌하여 반드시 차천로가 가르쳐야 하겠는가. 내 생각으로는 이 사람을 시킬 수 없겠는데, 영사(領事)의 생각에는 어떠한가?"
하자, 응남이 아뢰기를,
"안 되겠습니다."
하니, 효순이 아뢰기를,
"차천로는 원임이 한가하고 또한 글을 잘하므로 아뢰었을 뿐입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6책 75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704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외교-명(明) / 왕실-의식(儀式)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재정-역(役) / 인사-관리(管理) / 재정-잡세(雜稅)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출판-서책(書冊)
원문
○癸酉/上御別殿, 講《周易》。 講畢, 上曰: "王同知 【猷吉。】 今日入京云, 何如人耶?" 金應南曰: "文臣云矣。" 上曰: "若曰文進士, 則不可與他唐人一樣接待也。 以何事出來耶?" 應南曰: "其牌文以爲, 査禁無籍(棍)〔混〕 徒, 而今聞點視一路兵糧事, 將抵釜山云。" 上曰: "同知云者, 何樣官耶?" 應南曰: "是, 外官也。" 上曰: "如我國判官乎?" 孝純曰: "袞州府亞官也。" 李〈曁〉曰: "所謂府同知, 皆是文進士也。" 上曰: "然則接待之事, 不可尋常, 似當有接伴之人也。 若問兵糧等事, 則譯官輩, 不無失辭之患, 此亦可慮。" 權憘曰: "頃因上使出營之報, 中外人心, 一樣騷然。 至於士大夫, 亦皆先動, 或爭占船隻, 或先出家屬, 輸運卜物, 以(爲)〔失〕 民望者, 滔滔皆是。 有識尙然, 何責乎愚氓? 脫有警急, 士崩瓦解, 有甚於壬辰。 未委自上計將安出? 若曰必守京城,, 則通諭中外, 使民知京城之可守, 然後可以措備, 若曰不可守, 則先定據險退保之處, 使民知有依歸, 然後可免潰散之患。 人心靡定, 甚於賊禍, 可不懼哉? 三京收復, 五載于今, 廟堂規畫, 將士所爲, 無一可觀, 人心愈往而解怠。 若此望其成功, 不亦左乎? 近日, 外間訛言胥動, 以爲自上有渡遼之計, 人皆(翹)〔頓〕 足(以待)〔失望〕 , 此皆聖志不爲堅定而然也。 自上, 誠能曉諭中外, 以示不然之意, 則人心庶有所恃而鎭定矣。 臣民在此, 宗社在此, 以國君死社稷之義言之, 決不宜渡遼。" 應南曰: "大義, 雖不暇顧, 勢亦不可渡遼。 一路無糧, 一出國門, 百官俄死矣。" 上曰: "如欲守京城, 則不可徒書一守字而已。 雖有精兵, 不可辟穀, 亦不可空奉而爲之。 此則備邊司刻期措置之事也。" 李墍曰: "險塞無愈於京城, 舍此而將安之? 自初留意措置, 則今可就緖, 而民皆恃以爲避亂之所, 根本漸固, 四方仰之如衆星拱北辰。 昔者, 張巡ㆍ許遠, 保障江淮, 而賊兵不能長驅, 明皇無事幸蜀, 此其功不細也。 宜定重臣, 悉心經理, 以爲必守之計, 母使委而去之。" 尹泂曰: "臣在忠淸道ㆍ藍浦地見之, 賦後煩重, 民不聊生矣。 刷馬大役, 已不可言, 砲ㆍ殺括出, 選鋒抄發等, 諸般之役, 沓至疊出, 而兵使元均, 於上黨山城築城之際, 不以便宜爲之, 不分邑之殘盛, 各出二三百名, 催督赴役, 無根着者, 盡爲流移, 其僅存者, 亦將不保。 民苟怨叛, 城雖堅築, 將誰與守之? 況此農月, 疲於奔命, 民不得荷鋤而緣南畝, 以是怨咨尤極, 姑待農隙爲之宜當。 亟令備邊司, 某條處之, 如何? 大槪元均所爲泛濫, 臣欲爲論啓, 而院中以爲, 當事之人, 不可輕論, 不得爲之矣。" 應南曰: "尹泂見其弊而啓之, 如元均者, 不可易得。 大槪, 將有步將ㆍ水將之不同, 昔者宋時, 張世傑, 以步將爲水將; 劉思用, 以水將爲步將, 其用之也誤, 故功不得就。 元均, 乃水將之才, 而與舜臣相激, 故不得爲之, 或除京畿水使, 則可以展其才矣。 山城事, 臣亦於前日, 啓請農隙爲之矣。" 希得曰: "趙挺爲淮陽府使時, 收合一番刷馬之價, 貿得五六匹馬, 付諸官屬而喂養, 以此使用, 民不知有刷馬之役。 守令稍爲盡心, 則民蒙其澤也。" 應南曰: "前淸州牧使李巖善居官, 一二年一周刷馬, 而遞來三月, 只過數三巡云。" 權憘曰: "江華府使沈友正, 善居官, 民皆愛戴, 故雖於農月赴役, 民無怨咨。 江華一府, 周廻七息, 欲於前朝, 萬里城舊址, 設築墩墻, 而先於摩尼山近處四十里, 用一府之民, 五日赴役, 築城而未畢矣。" 上曰: "國亂思良相, 當今之事, 可自廟堂, 區畫處之。 如擇守令一款事, 吏曹雖或不察; 大臣有時面責而警覺之, 臺諫亦有(暑)〔署〕 經之法, 何患乎難擇? 予以大臣及銓曹, 皆非矣。" 應南曰: "如臣渡軟無能, 庸愚有素者, 忝據鼎軸, 懼切負乘, 何能熙庶績而釐百工乎?" 孝純曰: "本曹, 方欲抄出能文武士, 敎以兵書, 而不可無訓上。 文官中原任不緊者少, 車天閣, 雖未知兵家意思, 崇尙文章, 慱覽書史者, 使之論議講習, 何如?" 上曰: "子未見其爲人。 前聞, 雖能文而輕薄云。 若敎以《莊子》等書, 猶之可也: 《孫》ㆍ《吳》則何必以天輅敎之? 予意, 此子莫可使, 於領事意, 如何?" 應南曰: "不可爲也。" 孝純曰: "天輅, 原任等閑, 而渠亦能文, 故啓之耳。"
- 【태백산사고본】 46책 75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704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외교-명(明) / 왕실-의식(儀式)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재정-역(役) / 인사-관리(管理) / 재정-잡세(雜稅)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출판-서책(書冊)
선조 29년 (1596) 5월 7일
선조실록75권, 선조 29년 5월 7일 계유 1/1 기사 /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
《주역》을 강독한 후 민심과 부역, 쇄마의 폐단 등의 문제를 대신들과 의논하다
국역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주역(周易)》을 강독하였다. 강독이 끝나고서 상이 이르기를,
"왕 동지(王同知) 【왕이길(王㹫吉). 】 가 오늘 서울에 들어온다 하는데 어떠한 사람인가?"
하니, 김응남(金應南)이 아뢰기를,
"문신(文臣)이라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문과 급제자라면 다른 중국 사람과 같게 접대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무슨 일로 나온다 하는가?"
하니, 응남이 아뢰기를,
"그 패문(牌文)에는 무뢰배를 살펴서 금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들으니 일로(一路)의 군사와 식량을 점검하는 일로 부산(釜山)에 갈 것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동지라는 것은 어떤 벼슬인가?"
하니, 응남이 아뢰기를,
"외관(外官)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판관(判官)과 같은가?"
하니, 한효순(韓孝純)이 아뢰기를,
"곤주부(袞州府)의 아관(亞官)입니다."
하고, 이기(李墍)는 아뢰기를,
"부 동지(府同知)라는 것은 다 문과 급제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접대하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으니 접반(接伴)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 듯하다. 군사와 식량 따위의 일을 묻는다면 역관(譯官)들이 말을 잘못할 걱정이 없지 않으니, 이것도 염려스럽다."
하였다. 권희(權憘)가 아뢰기를,
"요즈음 상사(上使)가 영문(營門)에서 나갔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중외(中外)의 인심이 한결같이 소요합니다. 사대부까지도 다 먼저 동요하여 혹 다투어 배를 차지하거나 가족을 먼저 내보내고 짐을 나르는 등 백성이 바라보고 본받는 자의 풍조가 다 이러합니다. 자식이 있어도 그러한데 어떻게 어리석은 백성을 책망하겠습니까. 급변이 일어나면 토붕 와해(土崩瓦解)됨이 임진년 때보다 심할 것인데, 상께서는 계책을 어떻게 내실는지 모르겠습니다. 반드시 경성(京城)을 지킬 것이라면 중외에 일러서 백성이 경성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야 조치하여 대비할 수 있을 것이며, 지킬 수 없다면 요새지를 자리잡아 물러가 지킬 곳을 먼저 정하여 백성이 의지할 데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 무너져 흩어질 걱정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심이 안정되지 않으면 그 화(禍)가 적의 화보다 심하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경(三京)이 수복된 지 5년이 되었으나, 묘당(廟堂)의 계획과 장사(將士)가 하는 짓에 볼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인심이 갈수록 해이해지니, 이러고서 그 성공을 바라는 것은 또한 그르지 않겠습니까. 근일 외간에서는 유언에 모두 동요되어, 위에서 요동(遼東)으로 건너가려는 생각을 가지셨다 하여 사람들이 다 발돋움하여 기다리고 있는데, 이것은 다 성지(聖志)가 굳게 정해지지 않아서 그런 것이니, 위에서 참으로 중외에 일러서 그렇지 않다는 뜻을 보이신다면 인심이 믿는 바가 있어서 진정될 것입니다. 신민이 여기에 있고 종사(宗社)가 여기에 있으니 임금은 사직(社稷)을 위해 죽는다는 의리로 말하면 결코 요동으로 건너가서는 안 됩니다."
하고, 응남은 아뢰기를,
"대의(大義)는 돌볼 겨를이 없더라도 형세가 또한 요동으로 건너갈 수 없습니다. 일로에 식량이 없으니 한 번 도성(都城)의 문을 나서면 모든 관원이 굶어 죽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성을 지켜려면 수(守)자 하나만 써서는 안 될 것이다. 정예한 군사가 있더라도 곡식을 먹지 않을 수 없고 빈손으로 할 수도 없으니, 이것은 비변사가 시급히 조치해야 할 일이다."
하였다. 이기가 아뢰기를,
"요새로는 경성보다 나은 데가 없는데, 이곳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처음부터 유의하여 조치하였다면, 이제는 터전이 마련되어 백성이 다 피난할 곳으로 믿어 근본이 점점 견고해지고 사방이 의지하는 것이 마치 뭇별이 북극성을 향하는 것과 같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전에 장순(張巡)·허원(許遠)이 강회(江淮)를 지켜 적의 군사가 깊이 들어오지 못하였으므로 명황(明皇)129) 이 무사히 촉(蜀)으로 갔으니, 이는 그 공로가 작지 않은 것입니다. 중신(重臣)을 정하여 마음을 다해서 경리(經理)하여 반드시 지킬 생각을 하고 버리고 떠나지 말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윤형(尹泂)은 아뢰기를,
"신이 충청도 남포(藍浦) 땅에 있을 때에 보니, 부역(賦役)이 많아서 백성이 편히 살지 못하였습니다. 쇄마(刷馬)의 대역(大役)은 말할 수도 없거니와 포수(砲手)·살수(殺手)를 뽑아내고 선봉(先鋒)을 가려 뽑아 보내는 따위의 여러 가지 일이 계속 몰리는데, 병사(兵使) 원균(元均)은 상당 산성(上黨山城)에서 성을 쌓을 때에 편의에 따라서 하지 않고서 잔폐(殘弊)한 고을이건 부성(富盛)한 고을이건 가리지 않고 각각 2∼3백 명을 내게 하여 부역을 독촉하므로 근착(根着)이 없는 자는 죄다 유이(流移)하고 겨우 남아 있는 자도 장차 보전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백성이 원망하고 배반한다면 성을 아무리 굳게 쌓았더라도 누구와 함께 지키겠습니까. 더구나 이 농사철에 분주히 명을 따르기에 지쳐 백성이 밭에 나가 농사짓지 못하므로 이 때문에 원망이 더욱 극도에 이르렀으니, 우선 농한기를 기다려서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빨리 비변사를 시켜 될 수 있는 대로 잘 처치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대개 원균의 하는 짓이 외람하므로 신이 논계(論啓)하려 하였으나, 원중(院中)이 일을 맡은 사람을 가벼이 논하여서는 안 된다 하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응남은 아뢰기를,
"윤형은 그 폐단을 보고 아뢰었으나 원균 같은 자는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대개 장수에는 보장(步將)·수장(水將)의 차이가 있는데, 예전 송(宋)나라 때에 장세걸(張世傑)은 보장으로서 수장이 되고 유사용(劉思用)은 수장으로서 보장이 되어 그 쓰임이 잘못되었으므로 공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원균은 수장의 재주를 지녔으나 이순신(李舜臣)과 서로 의견이 맞지 않으므로 할 수 없으니, 혹 경기 수사(京畿水使)를 제수하면 그 재주를 펼 수 있을 것입니다. 산성의 일은 신도 전일에 농한기에 할 것을 계청하였습니다."
하고, 이희득(李希得)은 아뢰기를,
"조정(趙挺)이 회양 부사(淮陽府使)로 있었을 때에 한 번의 쇄마 값을 거두어 모아 5∼6필의 말을 사서 관속(官屬)에게 주어 기르게 하여 이것을 사용하였으므로, 백성은 쇄마의 역(役)이 있는 줄을 몰랐습니다. 수령(守令)이 조금만 마음을 쓰면 백성이 그 혜택을 입을 것입니다."
하고, 응남은 아뢰기를,
"전 청주 목사(淸州牧使) 이암(李巖)은 벼슬살이를 잘하여 한두 해에 한 번 쇄마의 차례가 돌아오게 하였고, 그가 갈린 후에도 석 달 동안에 두세 차례가 돌아올 뿐이었다고 합니다."
하고, 권회는 아뢰기를,
"강화 부사(江華府使) 심우정(沈友正)은 벼슬살이를 잘하여 백성이 다 사랑하고 추대하였으므로 농사철에 부역(赴役)시켜도 원망하는 백성이 없었습니다. 강화부는 둘레가 7식(息)130) 인데, 전조(前朝)의 만리성(萬里城) 옛터에 돈장(墩牆)을 쌓으려고, 먼저 마니산(摩尼山) 근처 40리에 온 부민(府民)을 닷새 동안 부역시켜 성을 쌓았으나 끝내지는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라가 어지러우면 어진 세상을 생각하거니와, 지금의 일은 묘당(廟堂)에서 구획하여 조치해야 한다. 수령을 가리는 일은 이조(吏曹)가 혹 살피지 못하더라도 대신(大臣)이 때때로 면책(面責)하여 경각시킬 수 있고, 대간(臺諫)도 서경(署經)하는 법이 있는데, 어찌하여 가리기 어려움을 걱정하는가. 나는 대신과 전조(銓曹)가 다 그르다고 생각한다."
하자, 응남이 아뢰기를,
"신처럼 나약하고 무능하며 본디부터 어리석은 자가 외람되게 정승 자리를 차지하여 소인으로서 군자의 자리에 있는 것이 몹시 두려운데, 어떻게 모든 공적을 밝히고 온갖 관원을 다스리겠습니까."
하였다. 효순이 아뢰기를,
"본조(本曹)가 지금 글을 잘하는 무사(武士)를 뽑아내어 병서(兵書)를 가르치려 하는데, 훈상(訓上)이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문관(文官) 가운데에는 원임(原任)이 긴요하지 않은 자가 적고, 차천로(車天輅)는 병가(兵家)의 뜻을 모르기는 하나 문장을 숭상하여 서사(書史)를 널리 본 자이니, 강습을 논의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아직 그 사람됨을 알지 못하지만 전에 들으니 글을 잘하기는 하나 경박하다고 하였다. 《장자(莊子)》 등의 글을 가르치는 것이라면 그래도 괜찮겠으나 손오(孫吳)131) 의 글이라면 어찌하여 반드시 차천로가 가르쳐야 하겠는가. 내 생각으로는 이 사람을 시킬 수 없겠는데, 영사(領事)의 생각에는 어떠한가?"
하자, 응남이 아뢰기를,
"안 되겠습니다."
하니, 효순이 아뢰기를,
"차천로는 원임이 한가하고 또한 글을 잘하므로 아뢰었을 뿐입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6책 75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704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외교-명(明) / 왕실-의식(儀式)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재정-역(役) / 인사-관리(管理) / 재정-잡세(雜稅)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출판-서책(書冊)
원문
○癸酉/上御別殿, 講《周易》。 講畢, 上曰: "王同知 【猷吉。】 今日入京云, 何如人耶?" 金應南曰: "文臣云矣。" 上曰: "若曰文進士, 則不可與他唐人一樣接待也。 以何事出來耶?" 應南曰: "其牌文以爲, 査禁無籍(棍)〔混〕 徒, 而今聞點視一路兵糧事, 將抵釜山云。" 上曰: "同知云者, 何樣官耶?" 應南曰: "是, 外官也。" 上曰: "如我國判官乎?" 孝純曰: "袞州府亞官也。" 李〈曁〉曰: "所謂府同知, 皆是文進士也。" 上曰: "然則接待之事, 不可尋常, 似當有接伴之人也。 若問兵糧等事, 則譯官輩, 不無失辭之患, 此亦可慮。" 權憘曰: "頃因上使出營之報, 中外人心, 一樣騷然。 至於士大夫, 亦皆先動, 或爭占船隻, 或先出家屬, 輸運卜物, 以(爲)〔失〕 民望者, 滔滔皆是。 有識尙然, 何責乎愚氓? 脫有警急, 士崩瓦解, 有甚於壬辰。 未委自上計將安出? 若曰必守京城,, 則通諭中外, 使民知京城之可守, 然後可以措備, 若曰不可守, 則先定據險退保之處, 使民知有依歸, 然後可免潰散之患。 人心靡定, 甚於賊禍, 可不懼哉? 三京收復, 五載于今, 廟堂規畫, 將士所爲, 無一可觀, 人心愈往而解怠。 若此望其成功, 不亦左乎? 近日, 外間訛言胥動, 以爲自上有渡遼之計, 人皆(翹)〔頓〕 足(以待)〔失望〕 , 此皆聖志不爲堅定而然也。 自上, 誠能曉諭中外, 以示不然之意, 則人心庶有所恃而鎭定矣。 臣民在此, 宗社在此, 以國君死社稷之義言之, 決不宜渡遼。" 應南曰: "大義, 雖不暇顧, 勢亦不可渡遼。 一路無糧, 一出國門, 百官俄死矣。" 上曰: "如欲守京城, 則不可徒書一守字而已。 雖有精兵, 不可辟穀, 亦不可空奉而爲之。 此則備邊司刻期措置之事也。" 李墍曰: "險塞無愈於京城, 舍此而將安之? 自初留意措置, 則今可就緖, 而民皆恃以爲避亂之所, 根本漸固, 四方仰之如衆星拱北辰。 昔者, 張巡ㆍ許遠, 保障江淮, 而賊兵不能長驅, 明皇無事幸蜀, 此其功不細也。 宜定重臣, 悉心經理, 以爲必守之計, 母使委而去之。" 尹泂曰: "臣在忠淸道ㆍ藍浦地見之, 賦後煩重, 民不聊生矣。 刷馬大役, 已不可言, 砲ㆍ殺括出, 選鋒抄發等, 諸般之役, 沓至疊出, 而兵使元均, 於上黨山城築城之際, 不以便宜爲之, 不分邑之殘盛, 各出二三百名, 催督赴役, 無根着者, 盡爲流移, 其僅存者, 亦將不保。 民苟怨叛, 城雖堅築, 將誰與守之? 況此農月, 疲於奔命, 民不得荷鋤而緣南畝, 以是怨咨尤極, 姑待農隙爲之宜當。 亟令備邊司, 某條處之, 如何? 大槪元均所爲泛濫, 臣欲爲論啓, 而院中以爲, 當事之人, 不可輕論, 不得爲之矣。" 應南曰: "尹泂見其弊而啓之, 如元均者, 不可易得。 大槪, 將有步將ㆍ水將之不同, 昔者宋時, 張世傑, 以步將爲水將; 劉思用, 以水將爲步將, 其用之也誤, 故功不得就。 元均, 乃水將之才, 而與舜臣相激, 故不得爲之, 或除京畿水使, 則可以展其才矣。 山城事, 臣亦於前日, 啓請農隙爲之矣。" 希得曰: "趙挺爲淮陽府使時, 收合一番刷馬之價, 貿得五六匹馬, 付諸官屬而喂養, 以此使用, 民不知有刷馬之役。 守令稍爲盡心, 則民蒙其澤也。" 應南曰: "前淸州牧使李巖善居官, 一二年一周刷馬, 而遞來三月, 只過數三巡云。" 權憘曰: "江華府使沈友正, 善居官, 民皆愛戴, 故雖於農月赴役, 民無怨咨。 江華一府, 周廻七息, 欲於前朝, 萬里城舊址, 設築墩墻, 而先於摩尼山近處四十里, 用一府之民, 五日赴役, 築城而未畢矣。" 上曰: "國亂思良相, 當今之事, 可自廟堂, 區畫處之。 如擇守令一款事, 吏曹雖或不察; 大臣有時面責而警覺之, 臺諫亦有(暑)〔署〕 經之法, 何患乎難擇? 予以大臣及銓曹, 皆非矣。" 應南曰: "如臣渡軟無能, 庸愚有素者, 忝據鼎軸, 懼切負乘, 何能熙庶績而釐百工乎?" 孝純曰: "本曹, 方欲抄出能文武士, 敎以兵書, 而不可無訓上。 文官中原任不緊者少, 車天閣, 雖未知兵家意思, 崇尙文章, 慱覽書史者, 使之論議講習, 何如?" 上曰: "子未見其爲人。 前聞, 雖能文而輕薄云。 若敎以《莊子》等書, 猶之可也: 《孫》ㆍ《吳》則何必以天輅敎之? 予意, 此子莫可使, 於領事意, 如何?" 應南曰: "不可爲也。" 孝純曰: "天輅, 原任等閑, 而渠亦能文, 故啓之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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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선조 29년 (1596) 5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