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66권, 선조 28년 8월 10일 경술 2/2 기사 / 1595년 명 만력(萬曆) 23년
학교건립, 왜적에 대한 복수설치, 제향, 공사천 과거응시, 시무 등에 대한 태학생 정감 등의 상소
국역
태학생(太學生) 정감(鄭鑑)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옛날 성제(聖帝)와 명왕(明王)이 천하와 국가를 다스릴 때에는 모두 학교를 존숭하고 풍화(風化)의 근본을 돈독히 하고 존비(尊卑)를 분별하여 상하(上下)의 분수를 정하였는데, 이는 진실로 학교가 높아지지 않으면 도학을 밝히고 인심을 착하게 하여 진작시키는 효과를 거둘 수 없고,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등위(等威)를 분변하고 백성의 뜻을 정하여 유신(維新)의 교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국학(國學)은 삼대(三代)가 명칭을 같이 하였으니 다 인륜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인륜이 위에서 밝혀지면 소민이 아래에서 친목하게 된다.’ 하였으며, 위(衛)나라 임금이 공자(孔子)를 모시고 정사를 하려 할 때, 공자는 먼저 명분을 바루고자 하여 말하기를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하지 않고 말이 순하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국가의 흥체(興替)와 정치의 득실이 어찌 학교가 높아지느냐 높아지지 않느냐와 명분이 바르냐 바르지 않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할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한번 굽어 살펴보아 주소서.
신들이 생각하건대, 옛날 우리 동방이 궁벽한 오랑캐 지방에 처해 있어서 백성은 예양(禮讓)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은사(殷師)가 분봉(分封)209) 하여 동하(東夏)210) 를 다스리게 되어서야 비로소 8조의 가름침을 세워 인현(仁賢)의 교화를 크게 밝히되, 먼저 학교를 세워 교양함이 방도가 있었고 다음으로 노비(奴婢)를 정하여 귀천이 문란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문교(文敎)가 성대히 일어나고 예속(禮俗)이 도야되어 우리 삼한(三韓)의 백성이 옷을 입은 짐승처럼 야만인에 이르지 않게 되었으니, 이는 곧 누구의 덕택입니까. 우리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 하늘의 밝은 명을 받아 크나큰 기업을 창건하실 때에도 신묘한 꾀와 지혜로운 계책을 깊은 속마음에서 재정(裁定)하시고 좋은 법과 아름다운 규정을 후세에 남겨 주셨습니다. 중외(中外)에 관학(館學)과 향교를 세우니 온 천하가 편안해지는 덕화가 크게 떨치었고, 노비를 두고 도감(都監)을 정하니 존비(尊卑)의 분수가 엄절(嚴截)하게 되어, 2백 년 동안 부식(扶植)되고 유지(維持)된 것이 지극하였습니다.
지난번 국운이 태평을 한껏 누리던 끝에 도이(島夷)211) 가 독을 부리자 한 번 싸워 영남을 함락하고 두 번 싸워 호남(湖南)을 짓밟으며 사나운 기세로 쳐들어와서 멋대로 죽이고 노략질하였는데도 안으로는 정승으로서 제갈양(諸葛亮) 같이 유악(帷幄)에서 힘을 다해 계책을 내는 이가 없었고, 밖으로는 장수로서 강회(江淮)에서 방어하던 장순(張巡)이나 허원(許遠)같은212) 이가 없었습니다. 민심이 한번 떠나가자 국세가 흩어지고 도성이 지켜지지 못하자 종사가 빈터가 되었으며 더러운 욕이 능침(陵寢)에까지 미치고213) 건물이 불타는 재앙이 학궁(學宮)에까지 미치어 예악 문물(禮樂文物)이 적의 손에서 없어져 버렸으니, 통분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유림(儒林)이 창의(倡義)하여 사민(士民)을 거느리고 요해지에 웅거하여 곳곳에서 적의 목을 벤 덕으로 비록 수길(秀吉)의 머리를 효수(梟首)하고 청정(淸正)의 목을 자르지는 못하였지만, 여신(餘燼)214) 을 수합하여 우리 나라 전역이 끝내 비린내나는 오랑캐들의 소굴로 함락되지 않게 되었으니, 그 어느 것이 의병(義兵)들이 먼저 창도하고 우리 조종(祖宗)께서 유학을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어 사기를 배양한 소치가 아니겠습니까.
지금 중국 군사가 왜적을 쓸어버리고 삼경(三京)215) 을 수복하니 어가(御駕)가 환도하시어 옛 문물 제도(文物制度)가 다시 밝아졌습니다. 그러나 적은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아직도 변경을 점거하고 있으며, 속으로는 몰래 교활한 계책을 품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화친하는 의사를 보이면서 손아귀에 넣고 조종하여 이랬다 저랬다하는 것이 무상하니, 혈기를 가진 모든 사람이 그 누가 마음 아파하고 골머리를 앓으면서 목숨바쳐 복수하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이야말로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밤낮으로 경리(經理)하여 회복(恢復)할 계책을 강구해야 할 때인데 어찌하여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와신 상담(臥薪嘗膽)을 생각지 않고 감히 동진(東晉) 임금의 일시적인 안락을 취하던 일216) 만을 행하여, 나약하고 고식적인 것이 평일과 같아 요행으로 흉적이 스스로 물러가기만을 바라고 어찌 복수의 대의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사설(邪說)이 범람하여 사람이 마음을 무너뜨리고 화의가 성행하여 국시(國是)를 그르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먼저 주창하자 백 사람이 호응하는데 대신은 그 그름을 말하지 아니하고 대간(臺諫)도 그 잘못을 배척하지 않아 수치와 욕을 참고서 즐거운 마음으로 원수를 섬기려 하여 그럭저럭 하루하루만을 보내고 있으니, 아,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신들은 초야에 묻혀 있으므로 이 일을 누가 계획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이 화의(和議)의 주장이 이루어지면 사기가 저상(沮喪)되어 앞으로 나라를 저버리고 임금을 파는 무리가 잇따라 나오게 되고, 아래에는 윗사람을 친애하고 관장(官長)위해 죽는 기풍이 끊어져서 실날처럼 붙어있는 우리 국가의 명맥이 다시 떨쳐질 수 없고, 삼군(三軍)의 군사들은 싸우지 않고서도 기가 저절로 막히게 될까 염려됩니다. 이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학교가 쇠퇴하고 도학(道學)이 밝지 못하여 민심이 무지해서 방향이 정해지지 않아 온 나라 사람들이 금수의 영역에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니 화의가 성행하고 사기가 저상된 것이 무엇이 괴이할 게 있습니까. 이같은 사기로써 광복(匡復)의 거사를 도모하려 한다면 이는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으니, 또한 어려울 것입니다. 옛날 송(宋)나라 진회(秦檜)217) 는 음흉하고 교활한 성품으로 간사하고 아첨하는 술책을 부려 ‘쥐에게 물건을 던져 잡고 싶으나 옆에 있는 그릇이 깨질까 두렵다. [投鼠忌器]’는 말을 들어 적을 토벌하여 원수 갚으려는 계책을 막았으니, 오늘날까지 충의로운 선비가 송조(宋朝)에 대해 격분해 하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만약 호전(胡銓)218) 이 오늘날 다시 태어난다면 그 강개하고 분개해 하는 뜻으로 보아 어찌 다만 동해에 빠져 죽는 것219) 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아, 선성(先聖)의 사당은 병화(兵火)로 잿더미가 되고 학교의 뜰은 황폐하여 잡초만이 무성하여 선비들은 학업을 익힐 곳이 없고 선사(先師)에게는 제향(祭享)드리는 의식이 없어졌습니다. 조두(俎豆)를 강구하지 않고 궤석(几席)이 황량하여, 읍양(揖讓)하는 의식을 볼 수 없고 글 읽는 소리가 적막하니 이것이 바로 유식한 선비들이 통곡하여 피눈물을 흘리는 까닭입니다. 옛날 한(漢)나라 고조(高祖)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 하여 시서(詩書)를 일삼지 않고 선비를 업신여겨 선비의 갓에 오줌을 깔기기까지 하였으니, 그가 우리의 도(道)를 봄이 마치 모난 자루와 둥근 구멍이 서로 맞지 않는 것같은 정도일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으로 어수선한던 때에 노(魯)나라를 지나다가 공자(孔子) 사당에 제사지낸 것을 볼 수 있으니, 금도(金刀)220) 의 4백 년 정신 명맥(精神命脈)의 기초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학문을 숭상하여 우리 도(道)의 본원(本源)을 배양하는 것이 오늘날에 있어서 더욱 급히 서둘러야 할 일인데, 아직까지 시학(視學)하는 예의를 행하지 않고 문묘에 제향(祭享)하는 전례(典禮)를 오랫동안 지체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사원을 폐하고 무학(武學)을 일으켜야 한다.’고 하교(下敎)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전교가 한번 내리자 선비들이 실망하고 있으니, 이 어찌 사문(斯文)의 큰 불행이 아니겠습니까.
옛날 진 원제(晉元帝)는 오호(五胡)가 분란을 일으키고 강동(江東)이 초창되던 때를 당하여서도 오히려 먼저 현사(賢士)의 학궁(學宮)을 세우고 몸소 석채(釋菜)의 예를 행하여 도를 독실히 믿고 선비를 높여 교화를 면려(勉勵)하였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서울을 회복하였으므로 강동(江東)에서 고식적인 안락을 영위하던 동진(東晉)과는 다른데, 갑자기 문교(文敎)의 폐단에 대한 분부를 내리여 흥기하는 선비들의 마음을 저지시켜서야 되겠습니까. 예악(禮樂)이 무너져 도학(道學)이 밝아지지 않고 문교(文敎)가 없어져 선비의 추향(趨向)이 날로 낮아지니 신들은 이미 불이 꺼진 차가운 재에 다시 불을 살릴 수 없고 이미 거꾸로 흐르는 성난 물결을 되돌릴 수가 없어서 마침내 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아! 문왕(文王)이 역(易)을 서차할 적에 건괘(乾卦)와 곤괘(坤卦)를 으뜸으로 삼았는데 공자(孔子)가 계사(繫辭)하기를 ‘하늘이 높고 땅이 낮으니 건(乾)과 곤(坤)의 위치가 정해지고, 낮음과 높음으로써 진열하니 귀와 천의 자리가 정해진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종과 주인에 관한 법은 그 명분이 매우 엄절(嚴截)하고 상하의 질서가 정연하여 변역될 수 없으니, 부사(父師)221) 가 법규를 세우고 제도를 창제하여 만세의 법으로 삼게 한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근년 이래로 기강이 쓸어낸듯이 없어졌고 명분이 문란해져서 존비의 위치가 바뀌고 상하의 분수가 도치되어 귀한 사람을 비방하는 풍조가 날로 더해가고 높은 사람을 업신여기는 버릇이 점차 자라나, 섬기던 사람에게 칼을 내미는 자가 대다수이고 성의를 다하여 주인을 구원하는 자가 거의 없으니, 마땅히 등급을 엄히 밝혀 간사한 자를 꾸짖고 교활한 자를 징치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요즘 현인이 진출하는 길이 넓지 않음을 염려하여 드디어 천례(賤隷)가 출신하는 과목(科目)을 설치하고, 비천한 사람이 스스로 새롭게 하는 길을 열어서 국가가 위급할 때의 소용에 대비하였습니다. 신들도 국가의 무사(武事)가 급하여 이것이 부득이한 일임을 압니다만, 명기(名器)222) 와 조정에 욕이 되는 것은 어찌하겠습니까. 신들이 듣건대 ‘예는 분수보다 더 큰 것이 없고 분수는 명의보다 더 큰 것이 없다. 명의가 아니면 나타내지 못하고 분수가 아니면 엄해지지 않는다. 진실로 명분이 어지러워지면 위아래가 서로 유지될 수 없고, 기강도 스스로 확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옛날 원(元)나라 말엽에 활리길사(闊里吉思)가 우리 나라 노비법(奴婢法)을 혁파(革罷)하려 하자, 고려 충열왕(忠烈王)이 ‘옛날 우리 시조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천류(賤類)들은 그 종자가 유별나서 만일 종량(從良)을 허락하면 뒤에는 반드시 벼슬길을 터서 국가를 어지럽게 할 것이다. 」 하였다.’고 사유를 갖추어 표문(表文)으로 문계(聞啓)하였더니, 중국 조정의 의논이 드디어 중지되었습니다. 고려초 충숙왕(忠肅王) 12년(1325)에 원(元)나라 조정에서 우리 나라 노비법을 혁파하려 하자, 우리 나라 정승 최유엄(崔有渰)이 중서성(中書省)에 나아가 옛날 제도대로 따르기를 청하니, 나라 사람들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울면서 ‘우리 삼한(三韓)을 보존한 이는 최시중(崔侍中)이다.’ 하였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비록 충열왕 같은 혼암한 임금과 최유엄 같은 못난 정승으로서도 명분은 어지럽힐 수 없고 전장(典章)은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성상같은 예지(叡智)로 옛날 전장(典章)을 따르면서 곧 이런 구차한 일을 거행하여 만세토록 바꿀 수 없는 법을 무너뜨릴 줄이야 생각인들 하였겠습니까.
이 법이 행해진다면 신들은 구구(區區)한 명분마저 다시 지킬 수 없어 명분을 범하는 무리가 장차 이로부터 일어날까 염려됩니다. 더구나 우리 나라가 임진년(1592) 난리에 적을 막아내지 못하여 도성을 버리고 떠났던 것은 성이 높지 않고 못이 깊지 않으며 병기가 견고하고 예리하지 않아서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백성들은 관장을 위해 죽는 도리를 깨치지 못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친애하는 의리를 알지 못하였는데 게다가 기율이 엄하지 않고 상벌이 법도가 없으며 다스리는 데에 그 도리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근래 과거를 허락하는 명이 내려지자마자, 천한 무리들이 서로 경하하며 존귀한 자가 하루아침에 몰락하면 자신들도 그에게 모욕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을 익히 알아서 복종하여 섬기는 노고를 꺼리고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방자히 부리는데, 어찌 임금에게 충성하고 적에게 분개하는 의리를 주인을 배반하는 무리에게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 계묘년223) 연간에 서자(庶子)와 천산(賤産)을 허통(許通)시키는 것도 식자들이 오히려 부끄럽게 여겼었는데, 하물며 지금 천한 하인들에게까지 과거를 허락해서야 되겠습니까. 오늘 과거를 허락하면 내일 명분이 문란해지고, 내일 명분이 문란해지면 후일의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반드시 뒤를 이어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대신은 왕의 뜻을 받들어 따르기만 할 뿐 구제하지 않고 제 몸만을 보전하며, 대간(臺諫)은 입을 다문 채 말하지 않고 오직 벼슬을 잃을까만을 근심하고 있으니, 임금의 국사가 장차 날로 잘못되어 갈 것입니다. 매우 애석합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사리를 깊이 연구하여 마음을 바르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몸을 닦으소서. 그리하여 교육을 공경히 힘쓰고 학문을 권면하기를 위 문공(衛文公)처럼224) 하시고, 명기(名器)를 아끼기를 주 양왕(周襄王)처럼 하시며225) , 한제(漢帝)가 삼로(三老)에게 절한 것226) 을 몸소 행하여 스승을 높이는 성의를 다하시고, 석작(石碏)의 6역(六逆)의 경계227) 를 체득하여 귀천의 분수를 엄히 하소서. 백성을 인애로써 교화시키고 백성을 의리로써 면려(勉勵)하시며, 백성을 정사로써 인도하시고 형벌로써 가지런하게 하시며, 장정은 여가에 효제 충신(孝悌忠信)을 닦게 하시면 인심이 착해지고 도학(道學)이 밝아지며 기강이 확립되고 명분이 엄해져서,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시키는 것이 부형이 자제를 시키는 것과 같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는 것도 자제가 부형을 보위하는 것과 같아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원수인들 갚지 못하겠으며 무슨 적인들 꺾지 못하겠습니까. 월자(越子)는 10년 동안의 교훈으로 오(吳)나라의 왕성을 못[沼]으로 만들었고228) 하(夏)나라 소강(少康)은 1여(旅)의 군대로 우(禹)임금의 업적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229)
아! 신들이 또한 듣건대, 《주역(周易)》 곤괘(坤卦) 초륙(初六)에 ‘서리를 밟으면 굳은 얼음이 이른다. [履霜堅氷至]’ 하였는데, 상사(象辭)에 ‘서리를 밟으면 굳은 얼음이 이르는 것은 음(陰)이 비로소 엉김이니, 음이 점점 성해져서 굳은 얼음이 어는 것이다.’ 하였으니, 조짐을 자라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오늘날 근심할 만한 조짐이 한 두 가지에 그치지 않으나, 우선 그 중에 큰 것만을 추려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관작을 팔면 부정한 길로 진출하는 조짐이 근심스럽고, 뇌물이 잇달으면 재상이 탐욕하는 조짐이 근심스러우며, 요고(堯鼓)230) 가 밝지 않으면 언로(言路)가 막히는 조짐이 근심스럽고, 순문(舜門)231) 이 열리지 않으면 현재(賢才)가 유일(遺佚)되는 조짐이 근심스러우며, 변방이 허술하면 서방의 적이 침범하는 조짐이 근심스럽고, 군율이 해이하면 하상(河上)에서 군사가 허물어지는 조짐이 근심스럽습니다. 상벌이 공정하지 않으면 삼군(三軍)이 해체될 조짐이 근심스럽지 않겠으며, 수령이 순량(循良)하지 않으면 백성의 마음이 이반할 조짐이 근심스럽지 않겠으며, 도적떼가 서로 불러 모이면 황지(潢池)에서 병기를 희롱할 조짐이 근심스럽지 않겠으며, 승도(僧徒)가 외람되이 벼슬하면 이단(異端)이 흥행할 조짐이 근심스럽지 않겠습니까. 무릇 이 몇 가지는 어느 것이나 학교가 폐하고 명분이 어지러워진 소치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신들이 지위를 벗어난 일을 경계해야 함을 모르는 바가 아니나,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하찮은 성의는 초야에 있다 하여 스스로 그만둘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신들의 광망(狂妄)하고 참람됨을 용서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진소(陳疏)한 성의가 가상하니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고, 비변사에 내렸다. 회계(回啓)하기를,
"정감(鄭鑑) 등이 소장(疏章)을 올려 일을 논하되 학교를 숭상하고 명분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 말을 하고, 화의(和議)의 잘못을 극력 비방하였으니 더할 수 없이 대의가 늠늠합니다. 이 왜적은 곧 우리 나라가 만세토록 반드시 갚아야 할 원수이니, 누구인들 일거(一擧)에 쳐부수어 귀신과 사람의 분을 씻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태평을 누린 지 수백 년 만에 갑자기 사나운 적을 만나 한번 패한 뒤로 자강(自强)할 계책이 없어서, 위엄으로 두려워하게 하건 기미(羈縻)로 은혜를 베풀건 간에 오직 중국 조정에서 하는 대로 따르기만 하는데 이것이 비록 욕을 참고 준양(遵養)하여 복수를 도모하기 위한 계책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사론(士論)이 분개해 하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성묘(聖廟)232) 가 변란을 겪어 풀이 무성하게 자라나고 향화(香火)가 오래도록 끊기었으니, 전알(展謁)하는 전례(典禮)를 거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난리 중에 태묘(太廟)의 제향(祭享)도 친히 행하지 못하셨으니, 우선 사변이 조금 평성되기를 기다려 차례로 거행함이 마땅하겠습니다.
공사천(公私賤)을 위한 과거 설치는 임시로 거행하는 것이나, 그 실상은 취재(取才)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라고 이름하였으므로 보고 듣는 이가 놀라서 여러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으며, 태학생이 소를 올리기까지 한 데에는 소견이 없지 않으니 성명(成命)을 도로 중지하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소의 끝에 간절하게 열 가지 조짐[十漸]으로 경계한 것은 실로 임금을 사랑하는 성의에서 나온 것이니 을야(乙夜)의 사이에 때때로 보시어 경성(警省)의 자료로 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40책 66권 5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544면
- 【분류】신분-천인(賤人) / 인사-임면(任免) / 정론-정론(政論)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註 209] 은사(殷師)가 분봉(分封) : 은사(殷師)는 기자(箕子)를 말한다. 은(殷)의 기자(箕子)가 동래(東萊)하여 8교(八敎)를 전했다 한다.
- [註 210] 동하(東夏) : 동방의 중하(中夏)라는 뜻으로 우리 나라를 이른 말임.
- [註 211] 도이(島夷) : 왜적.
- [註 212] 강회(江淮)에서 방어하던 장순(張巡)이나 허원(許遠)같은 : 장순(張巡)·허원(許遠)은 당 현종(唐玄宗) 때의 명장. 안녹산(安祿山)의 난리 때 수양성(睢陽城)을 방어하였는데 중과 부적에다가 외원(外援)이 오지 않아서 결국 성의 함락으로 사로잡혔으나 굽히지 않고 죽었다. 《당서(唐書)》 권193.
- [註 213] 더러운 욕이 능침(陵寢)에까지 미치고 : 임진 왜란 때 왜적이 성종(成宗)의 능인 선릉(宣陵)과 중종(中宗)의 능인 정릉(靖陵)을 파해친 일을 말한다.
- [註 214] 여신(餘燼) : 난리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
- [註 215] 삼경(三京) : 경주·개성·평양.
- [註 216] 동진(東晉) 임금의 일시적인 안락을 취하던 일 : 동진의 원제 때 당시 북방은 제족(諸族)이 할거(割據)하고 동진은 겨우 강남(江南) 일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제는 안일만을 추구하고 국토 수복에는 뜻이 없었다. 《통감절요(通鑑節要)》 진기(晉紀) 원황제(元皇帝).
- [註 217] 진회(秦檜) : 송 고종(宋高宗) 때의 간신. 화의를 주장하고 금(金)에 복수하려는 명장 악비(岳飛)를 무고하여 죽이고, 뒤에 19년 동안 정승으로 있으면서 충신과 양장을 다 죽였다. 《송사(宋史)》 권473.
- [註 218] 호전(胡銓) : 송 고종(宋高宗) 때의 문신이며 학자. 추밀원 편수관(樞密院編修官)으로 있을 때 상소하여 왕윤(王倫)·진회(秦檜) 등 소인의 목을 베어 고가(藁街)에 매달아 두기를 청하였다. 《송사(宋史)》 권374.
- [註 219] 동해에 빠져 죽는 것 : 전국(戰國) 때 위(魏)의 장군 신원연(新垣衍)이 조왕(趙王)을 달래어 함께 진(秦)나라를 높여 제(帝)로 삼고자 하자, 제(齊)의 고사(高士) 노중련(魯仲連)이 신원연을 보고 진나라를 제(帝)로 삼는 것의 부당함을 역설하고, 그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 진의 백성이 되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통감범요(通鑑汎要)》 주기(周紀) 난용하(赧王下) 갑진(甲辰). 여기서는 왜적과 싸워 복수해야 하고 강화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호전 같은 사람이 있다면 죽음로써 복수하려 할 것이라는 뜻이다.
- [註 220] 금도(金刀) : 한(漢)나라 화폐(貨幣)의 이름인데, 여기서는 한나라를 말한다.
- [註 221] 부사(父師) : 기자(箕子).
- [註 222] 명기(名器) : 벼슬.
- [註 223] 계묘년 : 1543 중종 38년.
- [註 224] 교육을 공경히 힘쓰고 학문을 권면하기를 위 문공(衛文公)처럼 : 위 문공(衛文公)이 검소한 옷을 입고 농업을 장려하며, 상업을 유통시키고 교육을 공경히 힘쓰며 권면하니, 즉위한 원년에 혁거(革車) 30대이던 것이 마지막에는 3백 대로 늘어났다 한다. 《좌전(左傳)》 민공(閔公) 2년.
- [註 225] 명기(名器)를 아끼기를 주 양왕(周襄王)처럼 하시며 : 명기는 작호(爵號)와 거복(車服). 진 문공(晉文公)이 주(周)나라 왕실에 큰 공로가 있어 양왕에게 천자(天子)의 장례(葬禮)에만 할 수 있는 수도(隨道)로 하기를 청하자, 양왕이 이를 거절하였다.
- [註 226] 한제(漢帝)가 삼로(三老)에게 절한 것 : 삼로(三老)는 한대(漢代) 때 향(鄕)의 장로(長老)로서 교화를 맡은 사람. 한 명제(漢明帝)가 태학(太學)에 가서 삼로에게 절을 하였다 한다. 《논어(論語)》 자로(子路) 기부의우하가언 주(旣富矣又何加焉註).
- [註 227] 석작(石碏)의 6역(六逆)의 경계 : 석작(石碏)은 춘추(春秋) 시대 위(衛)의 대부(大夫). 위 장공(衛莊公)의 공자(公子) 주우(州吁)가 장공의 총애를 믿고 싸움을 좋아하는데도 장공이 금지하지 않으니, 석작이 ‘육역(六逆) 즉 여섯 가지 배역(背逆)의 행위를 배우면 화를 부르게 된다.’고 간언(諫言)하였다. 육역(六逆)은 비참한 사람이 고귀한 사람을 헤치는 것, 연소한 사람이 연장의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 소원한 사람이 친밀한 사람을 이간질하는 것, 새로운 사람이 옛사람을 이간질하는 것, 소국이 대국을 침략하는 것, 음란한 것이 정의를 허물어뜨리는 것이다. 《좌전(左傳)》 은공(隱公) 3년.
- [註 228] 월자(越子)는 10년 동안의 교훈으로 오(吳)나라의 왕성을 못[沼]으로 만들었고 : 월자(越子)는 월왕(越王) 구천(句踐).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포로된 월왕(越王)의 화친을 허락하려 하자, 오원(伍員)이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오원은 월(越)나라가 10년간 백성을 기르고 재물을 모으며 10년간 백성을 교훈하면 20년 이후에 오나라는 못으로 변할 것이다.’ 하였는데, 그 뒤 월왕 구천이 오를 멸망하였다. 《좌전(左傳)》 애공(哀公) 원년, 《사기(史記)》 월왕 구천 세가(越王句踐世家).
- [註 229] 하(夏)나라 소강(少康)은 1여(旅)의 군대로 우(禹)임금의 업적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 소강(少康)은 하(夏)나라 우왕(禹王)의 6세손으로 제상(帝相)의 아들. 요(澆)가 제상(帝相)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라 하(夏)의 왕통(王統)이 끊어진 지 40년이었는데, 소강(少康)이 토지 1성(成) 즉 10리와 군사 1여(旅) 즉 5백 명으로 그 덕을 선포하고 계책을 세워 하우(夏禹)의 왕업을 회복하였다. 《좌전(左傳)》 애공(哀公) 원년, 《사기(史記)》 하본기(夏本紀).
- [註 230] 요고(堯鼓) : 간언(諫言)을 잘 받아들인다는 말. 요(堯)임금이 간고(諫鼓)를 설치하여 간언(諫言)을 받아들였다. 《회남자(淮南子)》 주술훈(主術訓).
- [註 231] 순문(舜門) : 어진 사람을 놓치지 않고 등용한다는 말. 순(舜)임금이 사방의 문을 열어 놓고 현자(賢者)를 맞아들였다 한다. 《서경(書經)》 순전(舜典).
- [註 232] 성묘(聖廟) : 문묘(文廟).
원문
○(大)〔太〕 學生鄭鑑等上疏曰:
伏以, 古昔聖帝、明王之治天下國家也, 莫不尊崇學校, 以敦風化之本, 辨別尊卑, 以定上(心)〔下〕 之分, 誠以學校不崇, 則無以明道學、淑人心, 而收振作之效; 名分不正, 則無以辨等威定民志, 而致惟新之化。 是以, 孟子曰: "學則三代共之, 皆所以明人倫也。" 人倫明於上, 小民親於下。 衛君待孔子而爲政, 孔子欲先正名, 以爲: "名不正則, 言不順, 言不順, 則事不成。" 然則國家之興替, 政治之得失, 豈不係於學校之崇與不崇, 名分之正與不正, 如何乎? 伏願殿下, 試垂覽焉。 臣等竊伏惟念, 昔我東方, 僻陋在夷, 民不知禮讓之爲何事, 而逮乎殷師分茅, 尹玆東夏, 始立八條之敎, 丕闡仁賢之化, 首建學校, 而敎養有方, 次定臧獲, 而貴賤不紊。 文敎蔚興, 禮俗陶甄, 使我三韓之赤子, 不至於牛馬之襟裾者, 是誰之賜乎? 至於我太祖康獻大王, 受天明命, 肇創鴻業, 神謨睿算, 裁自淵衷, 良法美規, 貽厥後世。 立中外館學、鄕校, 而以寧之化大振, 設奴婢定都監, 而尊卑之分有截, 二百年扶植維持者至矣。 頃値國運泰極, (梟)〔島〕 夷肆毒, 一戰而陷嶺南, 再戰而蹴湖西, 長驅直擣, 恣意殺掠, 而內無諸葛之相, 盡瘁於帷幄, 外乏巡、遠之將, 保障於江、淮。 民心一離, 國勢渙散, 都城不守, 宗社爲墟, 汚衊之辱, 及乎陵寢, 池魚之禍, 延及學宮, 禮樂文物, 淪沒於賊手, 可勝痛哉? 幸賴儒林倡義, 奬率士民, 分據要害, 在處斬級, 雖未能(梟)秀吉之首, 折淸正之馘, 而其所以收合餘燼, 使靑丘一域, 卒不全陷於腥膻之窟者, 孰非義旅之先倡, 而我祖宗, 崇儒重道, 培養士氣之所致也哉? 今者天兵迅掃, 收復三京, 鑾輿旋軫, 舊物克甄, 而賊未悔禍, 尙據邊封, 陰懷狙獪之謀, 陽示和好之意, 伸縮在手, 反覆無常, 則凡有血氣者, 孰不爲之痛心疾首, 思欲捐軀而復讐乎? 此正君臣上下, 宵(肝)〔旰〕 經理, 講求恢復之策, 而奈何罔念越膽之嘗, 敢偸晋帝之安, 委靡姑息, 有若平日, 僥倖兇賊之自退, 不思復讐之大義耶? 邪說橫流, 壞人心術, 和議興行, 唯誤國是。 一雄先唱, 百雌繼和, 大臣不言其非, 臺諫者不斥其失, 含垢(思)〔忍〕 辱, 甘心事讐, 悠悠汎汎, 一復一日。 吁! 此何等事耶? 臣等伏在草野, 未知誰爲畫此計者, 而竊恐此說若售, 士氣沮喪, 負國賣君之徒, 接迹於後, 親上死長之風, 杜絶於下, 我國家不絶如綫之脈, 將無以復振, 而三軍之士, 不戰而氣自塞矣。 此則無他。 學校凌夷, 道學不明, 貿貿人心, 趨向不定, 擧一國之人, 而如在禽獸之域, 則何怪夫和議之興行, 而士氣之沮喪乎? 以如此之士氣, 欲圖匡復之擧, 則是猶緣木求魚, 亦難矣。 昔宋之秦檜, 以陰狡之性, 濟邪侫之術, 擧投鼠忌器之說, 沮討賊復讐之計, 至今忠義之士, 未嘗不扼腕於宋朝也。 若使胡銓, 復生於今日, 則其慷慨憤惋之志, 豈特蹈東海而止哉? 嗚呼! 聖廟經火, 蕩爲灰燼, 學庭蕪沒, 鞠爲茂草, 多士無肄業之所, 先師闕奠祭之儀。 俎豆不講, 几席荒涼, 揖讓無聞, 絃誦寂寞, 此有識之士, 所以痛哭而繼之以血者也。 昔, 漢之高祖, 以馬上得天下, 不事詩書, 嫚罵溲溺, 其視吾道, 不啻若枘鑿之不相入, 而過魯一祀, 乃見於兵戈(槍)〔搶〕 攘之日, 金刀四百年精神命脈, 肇基於此, 則崇學右文, 以培吾道之本源者, 在今日尤急, 而尙闕視學之禮, 久稽割牲之典, 至以廢書院興武學爲敎, 綸言一下, 章甫缺望, 則豈非斯文之大不幸乎? 昔, 晋 元帝, 當五胡雲擾之日, 際江東草創之秋, 猶且首立賢士之關, 躬行舍菜之禮, 篤道崇儒, 以勵風化。 況今克復京都, 非偸安江左之比, 而遽下文弊之敎, 沮多士作興之心, 臣等竊恐禮壞樂崩, 而道學不明, 文喪敎熄, 而士趨日卑, 將無以噓已死之寒灰, 回旣倒之狂瀾, 而終至於國不國矣。 嗚呼! 文王序《易》, 以乾坤爲首, 孔子繫之曰: "天尊地卑, 乾坤定矣; 卑高以陳, 貴賤位矣。"我國奴主之法, 其名甚嚴, 其分甚截,上下秩然, 不可移易, 則父師之立規創制, 爲萬世法者, 豈偶然哉? 比年以來, 綱紀掃地, 名分紊舛, 冠屨易置, 首足倒懸, 妨貴之風日滋, 蔑尊之習漸長, 推刃所事者滔滔, 竭誠救主者蔑蔑, 則所當嚴明等級, 詰姦懲猾之日, 而頃者慮其賢路之不恢, 遂設賤隷之科目, 開寒畯自新之路, 備國家緩急之用。 臣等亦知國家之急於詰戎, 爲此不得已之擧, 而奈辱名器何, 奈辱朝廷何? 臣等竊嘗聞之, 禮莫大於分, 分莫大於名。 非名不著, 非分不嚴。 誠以名分旣亂, 則上下無以相維, 而紀綱無以自立故也。 昔, 胡元末, 濶里吉思欲革本國奴婢之法, 高麗 忠烈王上奏表曰: "昔我始祖云: ‘凡我賤類, 其種有別, 若許從良, 後必通仕, 謀亂國家。’ 具由聞啓, 廷議遂寢。 麗朝忠肅王十二年, 元朝欲革本國奴婢之法, 本國政丞崔有渰, 詣中書請舊制, 國人擧手加額而泣曰: "存我三韓者, 崔侍中也。" 以此觀之, 雖以忠烈王之昏主, 崔有渰之庸相, 亦知名分之不可亂, 典章之不可改如此。 曾謂聖上之睿智, 率由舊章, 而乃爲此苟且之擧, 壞萬世不易之法乎? 此法若行, 則臣等直恐區區之名分, 復不能守, 而干名犯分之輩, 將自此而濫觴矣。 況我國家, 壬辰之亂, 不得捍禦, 而委而去之者, 城非不高也, 池非不深也, 兵革非不堅利也。 特因民不曉死長之道, 下不識親上之義, 加以紀律不嚴, 賞罰無章, 御之不得其道故也。 近者許科之命纔下, 厮役之徒相慶, 習知尊貴者之一朝, 吾亦乃可以加此也。 憚其服事之勞, 肆厥侮上之心, 則豈可以忠君敵愾之義, 責之於叛主之人乎? 頃在癸卯年間, 孽子賤産之許通, 識者猶且恥之。 況今輿臺之賤, 其又可以許科乎? 今日許科, 而明日名分紊, 明日名分紊, 而後日之亂臣賊子, 必將繼踵而起矣。 大臣將順而不救, 但保其身, 臺諫含糊而不言, 惟思患失, 君之國事, 將日非矣, 可勝惜哉! 伏願殿下, 窮理而正心, 正心而修身, 敬敎勸學, 如衛之文公; 愛惜名器, 若周之襄王; 躬漢帝三老之拜, 而罄隆師之誠; 體石碏六逆之戒, 而嚴貴賤之分。 漸民以仁, 摩民以義, 導民以政, 齊民以刑, 壯者以暇日, 修其孝悌忠信, 則人心淑, 而道學明, 紀綱立, 而名分嚴, 上之使下, 猶父兄之使子弟; 下之事上, 猶子弟之衛父兄。 然則何讐而不復, 何敵而不摧? 越子十年之訓, 可以沼吳; 夏 康一旅之衆, 可以復禹矣。 噫! 臣等抑又聞之, 《易》坤之初六曰: "履霜堅氷至。" (義)〔象〕 曰: "履霜堅氷, 陰始凝也。 馴致其道, 至堅氷也。" 漸之不可長也, 如是。 夫當今可憂之漸, 非止一二, 而姑撮其大者而言之。 嗚呼! 鬻賣官爵, 則曲逕鑽進之漸, 可憂也; 苞苴絡繹, 則宰相貪墨之漸, 可憂也。 堯鼓不明, 則言路杜絶之漸, 可憂也; 舜門不闢, 則賢才遺佚之漸, 可憂也。 邊鄙踈虞, 則西賊侵凌之漸, 可憂也; 軍律解弛, 則河上潰師之漸, 可憂也。 賞罰不公, 則三軍解體之漸, 其不憂乎, 守宰不良, 則百姓離心之漸, 其不憂乎? 盜賊嘯聚, 則潢池弄兵之漸, 其不憂乎, 僧徒濫爵, 則異端興行之漸, 其不憂乎? 凡此數者, 何莫非學校之廢, 名分之紊之所致也哉? 臣等非不知出位之可戒, 而區區憂國愛君之誠, 不以畎畝而自沮也。 伏願殿下, 恕其狂僭焉。
答曰: "陳疏之誠可嘉。 當議處。" 下備邊司。 回啓曰: "鄭鑑等抗章論事, 以崇學校、正名分爲言, 力詆和議之非, 大義澟澟, 蔑以加矣。 此賊, 乃我國萬世必報之讐, 孰不欲一擧勦滅, 以雪神人之憤哉? 第以昇平數百年, 猝遇劇賊, 一敗之後, 無計自强, 震以威惕, 恩以羈縻, 惟天朝所爲是從, 雖出於忍辱遵養, 以圖復讐之計, 而士論之慨惋, 無足怪矣。 聖廟經變, (鞫)〔鞠〕 爲茂草, 香火久冷, 宜擧展謁之典, 而(槍)〔搶〕 攘中, 太廟之享, 尙未親行, 姑待事變稍定, 次第擧行宜當。 公、私賤設科, 亦是權時之擧, 而其實與取才無異。 但名以科擧, 聞見駭異, 衆情不悅, 至於(大)〔太〕 學生陳疏, 不無所見, 還寢成命, 恐或無妨。 疏末眷眷, 以十漸爲戒, 實出愛君之誠, 乙夜之間, 時賜睿覽, 以資警省, 何如?" 上從之。
- 【태백산사고본】 40책 66권 5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544면
- 【분류】신분-천인(賤人) / 인사-임면(任免) / 정론-정론(政論)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선조실록66권, 선조 28년 8월 10일 경술 2/2 기사 / 1595년 명 만력(萬曆) 23년
학교건립, 왜적에 대한 복수설치, 제향, 공사천 과거응시, 시무 등에 대한 태학생 정감 등의 상소
국역
태학생(太學生) 정감(鄭鑑)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옛날 성제(聖帝)와 명왕(明王)이 천하와 국가를 다스릴 때에는 모두 학교를 존숭하고 풍화(風化)의 근본을 돈독히 하고 존비(尊卑)를 분별하여 상하(上下)의 분수를 정하였는데, 이는 진실로 학교가 높아지지 않으면 도학을 밝히고 인심을 착하게 하여 진작시키는 효과를 거둘 수 없고,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등위(等威)를 분변하고 백성의 뜻을 정하여 유신(維新)의 교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국학(國學)은 삼대(三代)가 명칭을 같이 하였으니 다 인륜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인륜이 위에서 밝혀지면 소민이 아래에서 친목하게 된다.’ 하였으며, 위(衛)나라 임금이 공자(孔子)를 모시고 정사를 하려 할 때, 공자는 먼저 명분을 바루고자 하여 말하기를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하지 않고 말이 순하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국가의 흥체(興替)와 정치의 득실이 어찌 학교가 높아지느냐 높아지지 않느냐와 명분이 바르냐 바르지 않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할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한번 굽어 살펴보아 주소서.
신들이 생각하건대, 옛날 우리 동방이 궁벽한 오랑캐 지방에 처해 있어서 백성은 예양(禮讓)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은사(殷師)가 분봉(分封)209) 하여 동하(東夏)210) 를 다스리게 되어서야 비로소 8조의 가름침을 세워 인현(仁賢)의 교화를 크게 밝히되, 먼저 학교를 세워 교양함이 방도가 있었고 다음으로 노비(奴婢)를 정하여 귀천이 문란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문교(文敎)가 성대히 일어나고 예속(禮俗)이 도야되어 우리 삼한(三韓)의 백성이 옷을 입은 짐승처럼 야만인에 이르지 않게 되었으니, 이는 곧 누구의 덕택입니까. 우리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 하늘의 밝은 명을 받아 크나큰 기업을 창건하실 때에도 신묘한 꾀와 지혜로운 계책을 깊은 속마음에서 재정(裁定)하시고 좋은 법과 아름다운 규정을 후세에 남겨 주셨습니다. 중외(中外)에 관학(館學)과 향교를 세우니 온 천하가 편안해지는 덕화가 크게 떨치었고, 노비를 두고 도감(都監)을 정하니 존비(尊卑)의 분수가 엄절(嚴截)하게 되어, 2백 년 동안 부식(扶植)되고 유지(維持)된 것이 지극하였습니다.
지난번 국운이 태평을 한껏 누리던 끝에 도이(島夷)211) 가 독을 부리자 한 번 싸워 영남을 함락하고 두 번 싸워 호남(湖南)을 짓밟으며 사나운 기세로 쳐들어와서 멋대로 죽이고 노략질하였는데도 안으로는 정승으로서 제갈양(諸葛亮) 같이 유악(帷幄)에서 힘을 다해 계책을 내는 이가 없었고, 밖으로는 장수로서 강회(江淮)에서 방어하던 장순(張巡)이나 허원(許遠)같은212) 이가 없었습니다. 민심이 한번 떠나가자 국세가 흩어지고 도성이 지켜지지 못하자 종사가 빈터가 되었으며 더러운 욕이 능침(陵寢)에까지 미치고213) 건물이 불타는 재앙이 학궁(學宮)에까지 미치어 예악 문물(禮樂文物)이 적의 손에서 없어져 버렸으니, 통분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유림(儒林)이 창의(倡義)하여 사민(士民)을 거느리고 요해지에 웅거하여 곳곳에서 적의 목을 벤 덕으로 비록 수길(秀吉)의 머리를 효수(梟首)하고 청정(淸正)의 목을 자르지는 못하였지만, 여신(餘燼)214) 을 수합하여 우리 나라 전역이 끝내 비린내나는 오랑캐들의 소굴로 함락되지 않게 되었으니, 그 어느 것이 의병(義兵)들이 먼저 창도하고 우리 조종(祖宗)께서 유학을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어 사기를 배양한 소치가 아니겠습니까.
지금 중국 군사가 왜적을 쓸어버리고 삼경(三京)215) 을 수복하니 어가(御駕)가 환도하시어 옛 문물 제도(文物制度)가 다시 밝아졌습니다. 그러나 적은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아직도 변경을 점거하고 있으며, 속으로는 몰래 교활한 계책을 품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화친하는 의사를 보이면서 손아귀에 넣고 조종하여 이랬다 저랬다하는 것이 무상하니, 혈기를 가진 모든 사람이 그 누가 마음 아파하고 골머리를 앓으면서 목숨바쳐 복수하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이야말로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밤낮으로 경리(經理)하여 회복(恢復)할 계책을 강구해야 할 때인데 어찌하여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와신 상담(臥薪嘗膽)을 생각지 않고 감히 동진(東晉) 임금의 일시적인 안락을 취하던 일216) 만을 행하여, 나약하고 고식적인 것이 평일과 같아 요행으로 흉적이 스스로 물러가기만을 바라고 어찌 복수의 대의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사설(邪說)이 범람하여 사람이 마음을 무너뜨리고 화의가 성행하여 국시(國是)를 그르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먼저 주창하자 백 사람이 호응하는데 대신은 그 그름을 말하지 아니하고 대간(臺諫)도 그 잘못을 배척하지 않아 수치와 욕을 참고서 즐거운 마음으로 원수를 섬기려 하여 그럭저럭 하루하루만을 보내고 있으니, 아,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신들은 초야에 묻혀 있으므로 이 일을 누가 계획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이 화의(和議)의 주장이 이루어지면 사기가 저상(沮喪)되어 앞으로 나라를 저버리고 임금을 파는 무리가 잇따라 나오게 되고, 아래에는 윗사람을 친애하고 관장(官長)위해 죽는 기풍이 끊어져서 실날처럼 붙어있는 우리 국가의 명맥이 다시 떨쳐질 수 없고, 삼군(三軍)의 군사들은 싸우지 않고서도 기가 저절로 막히게 될까 염려됩니다. 이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학교가 쇠퇴하고 도학(道學)이 밝지 못하여 민심이 무지해서 방향이 정해지지 않아 온 나라 사람들이 금수의 영역에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니 화의가 성행하고 사기가 저상된 것이 무엇이 괴이할 게 있습니까. 이같은 사기로써 광복(匡復)의 거사를 도모하려 한다면 이는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으니, 또한 어려울 것입니다. 옛날 송(宋)나라 진회(秦檜)217) 는 음흉하고 교활한 성품으로 간사하고 아첨하는 술책을 부려 ‘쥐에게 물건을 던져 잡고 싶으나 옆에 있는 그릇이 깨질까 두렵다. [投鼠忌器]’는 말을 들어 적을 토벌하여 원수 갚으려는 계책을 막았으니, 오늘날까지 충의로운 선비가 송조(宋朝)에 대해 격분해 하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만약 호전(胡銓)218) 이 오늘날 다시 태어난다면 그 강개하고 분개해 하는 뜻으로 보아 어찌 다만 동해에 빠져 죽는 것219) 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아, 선성(先聖)의 사당은 병화(兵火)로 잿더미가 되고 학교의 뜰은 황폐하여 잡초만이 무성하여 선비들은 학업을 익힐 곳이 없고 선사(先師)에게는 제향(祭享)드리는 의식이 없어졌습니다. 조두(俎豆)를 강구하지 않고 궤석(几席)이 황량하여, 읍양(揖讓)하는 의식을 볼 수 없고 글 읽는 소리가 적막하니 이것이 바로 유식한 선비들이 통곡하여 피눈물을 흘리는 까닭입니다. 옛날 한(漢)나라 고조(高祖)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 하여 시서(詩書)를 일삼지 않고 선비를 업신여겨 선비의 갓에 오줌을 깔기기까지 하였으니, 그가 우리의 도(道)를 봄이 마치 모난 자루와 둥근 구멍이 서로 맞지 않는 것같은 정도일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으로 어수선한던 때에 노(魯)나라를 지나다가 공자(孔子) 사당에 제사지낸 것을 볼 수 있으니, 금도(金刀)220) 의 4백 년 정신 명맥(精神命脈)의 기초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학문을 숭상하여 우리 도(道)의 본원(本源)을 배양하는 것이 오늘날에 있어서 더욱 급히 서둘러야 할 일인데, 아직까지 시학(視學)하는 예의를 행하지 않고 문묘에 제향(祭享)하는 전례(典禮)를 오랫동안 지체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사원을 폐하고 무학(武學)을 일으켜야 한다.’고 하교(下敎)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전교가 한번 내리자 선비들이 실망하고 있으니, 이 어찌 사문(斯文)의 큰 불행이 아니겠습니까.
옛날 진 원제(晉元帝)는 오호(五胡)가 분란을 일으키고 강동(江東)이 초창되던 때를 당하여서도 오히려 먼저 현사(賢士)의 학궁(學宮)을 세우고 몸소 석채(釋菜)의 예를 행하여 도를 독실히 믿고 선비를 높여 교화를 면려(勉勵)하였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서울을 회복하였으므로 강동(江東)에서 고식적인 안락을 영위하던 동진(東晉)과는 다른데, 갑자기 문교(文敎)의 폐단에 대한 분부를 내리여 흥기하는 선비들의 마음을 저지시켜서야 되겠습니까. 예악(禮樂)이 무너져 도학(道學)이 밝아지지 않고 문교(文敎)가 없어져 선비의 추향(趨向)이 날로 낮아지니 신들은 이미 불이 꺼진 차가운 재에 다시 불을 살릴 수 없고 이미 거꾸로 흐르는 성난 물결을 되돌릴 수가 없어서 마침내 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아! 문왕(文王)이 역(易)을 서차할 적에 건괘(乾卦)와 곤괘(坤卦)를 으뜸으로 삼았는데 공자(孔子)가 계사(繫辭)하기를 ‘하늘이 높고 땅이 낮으니 건(乾)과 곤(坤)의 위치가 정해지고, 낮음과 높음으로써 진열하니 귀와 천의 자리가 정해진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종과 주인에 관한 법은 그 명분이 매우 엄절(嚴截)하고 상하의 질서가 정연하여 변역될 수 없으니, 부사(父師)221) 가 법규를 세우고 제도를 창제하여 만세의 법으로 삼게 한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근년 이래로 기강이 쓸어낸듯이 없어졌고 명분이 문란해져서 존비의 위치가 바뀌고 상하의 분수가 도치되어 귀한 사람을 비방하는 풍조가 날로 더해가고 높은 사람을 업신여기는 버릇이 점차 자라나, 섬기던 사람에게 칼을 내미는 자가 대다수이고 성의를 다하여 주인을 구원하는 자가 거의 없으니, 마땅히 등급을 엄히 밝혀 간사한 자를 꾸짖고 교활한 자를 징치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요즘 현인이 진출하는 길이 넓지 않음을 염려하여 드디어 천례(賤隷)가 출신하는 과목(科目)을 설치하고, 비천한 사람이 스스로 새롭게 하는 길을 열어서 국가가 위급할 때의 소용에 대비하였습니다. 신들도 국가의 무사(武事)가 급하여 이것이 부득이한 일임을 압니다만, 명기(名器)222) 와 조정에 욕이 되는 것은 어찌하겠습니까. 신들이 듣건대 ‘예는 분수보다 더 큰 것이 없고 분수는 명의보다 더 큰 것이 없다. 명의가 아니면 나타내지 못하고 분수가 아니면 엄해지지 않는다. 진실로 명분이 어지러워지면 위아래가 서로 유지될 수 없고, 기강도 스스로 확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옛날 원(元)나라 말엽에 활리길사(闊里吉思)가 우리 나라 노비법(奴婢法)을 혁파(革罷)하려 하자, 고려 충열왕(忠烈王)이 ‘옛날 우리 시조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천류(賤類)들은 그 종자가 유별나서 만일 종량(從良)을 허락하면 뒤에는 반드시 벼슬길을 터서 국가를 어지럽게 할 것이다. 」 하였다.’고 사유를 갖추어 표문(表文)으로 문계(聞啓)하였더니, 중국 조정의 의논이 드디어 중지되었습니다. 고려초 충숙왕(忠肅王) 12년(1325)에 원(元)나라 조정에서 우리 나라 노비법을 혁파하려 하자, 우리 나라 정승 최유엄(崔有渰)이 중서성(中書省)에 나아가 옛날 제도대로 따르기를 청하니, 나라 사람들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울면서 ‘우리 삼한(三韓)을 보존한 이는 최시중(崔侍中)이다.’ 하였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비록 충열왕 같은 혼암한 임금과 최유엄 같은 못난 정승으로서도 명분은 어지럽힐 수 없고 전장(典章)은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성상같은 예지(叡智)로 옛날 전장(典章)을 따르면서 곧 이런 구차한 일을 거행하여 만세토록 바꿀 수 없는 법을 무너뜨릴 줄이야 생각인들 하였겠습니까.
이 법이 행해진다면 신들은 구구(區區)한 명분마저 다시 지킬 수 없어 명분을 범하는 무리가 장차 이로부터 일어날까 염려됩니다. 더구나 우리 나라가 임진년(1592) 난리에 적을 막아내지 못하여 도성을 버리고 떠났던 것은 성이 높지 않고 못이 깊지 않으며 병기가 견고하고 예리하지 않아서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백성들은 관장을 위해 죽는 도리를 깨치지 못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친애하는 의리를 알지 못하였는데 게다가 기율이 엄하지 않고 상벌이 법도가 없으며 다스리는 데에 그 도리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근래 과거를 허락하는 명이 내려지자마자, 천한 무리들이 서로 경하하며 존귀한 자가 하루아침에 몰락하면 자신들도 그에게 모욕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을 익히 알아서 복종하여 섬기는 노고를 꺼리고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방자히 부리는데, 어찌 임금에게 충성하고 적에게 분개하는 의리를 주인을 배반하는 무리에게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 계묘년223) 연간에 서자(庶子)와 천산(賤産)을 허통(許通)시키는 것도 식자들이 오히려 부끄럽게 여겼었는데, 하물며 지금 천한 하인들에게까지 과거를 허락해서야 되겠습니까. 오늘 과거를 허락하면 내일 명분이 문란해지고, 내일 명분이 문란해지면 후일의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반드시 뒤를 이어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대신은 왕의 뜻을 받들어 따르기만 할 뿐 구제하지 않고 제 몸만을 보전하며, 대간(臺諫)은 입을 다문 채 말하지 않고 오직 벼슬을 잃을까만을 근심하고 있으니, 임금의 국사가 장차 날로 잘못되어 갈 것입니다. 매우 애석합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사리를 깊이 연구하여 마음을 바르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몸을 닦으소서. 그리하여 교육을 공경히 힘쓰고 학문을 권면하기를 위 문공(衛文公)처럼224) 하시고, 명기(名器)를 아끼기를 주 양왕(周襄王)처럼 하시며225) , 한제(漢帝)가 삼로(三老)에게 절한 것226) 을 몸소 행하여 스승을 높이는 성의를 다하시고, 석작(石碏)의 6역(六逆)의 경계227) 를 체득하여 귀천의 분수를 엄히 하소서. 백성을 인애로써 교화시키고 백성을 의리로써 면려(勉勵)하시며, 백성을 정사로써 인도하시고 형벌로써 가지런하게 하시며, 장정은 여가에 효제 충신(孝悌忠信)을 닦게 하시면 인심이 착해지고 도학(道學)이 밝아지며 기강이 확립되고 명분이 엄해져서,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시키는 것이 부형이 자제를 시키는 것과 같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는 것도 자제가 부형을 보위하는 것과 같아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원수인들 갚지 못하겠으며 무슨 적인들 꺾지 못하겠습니까. 월자(越子)는 10년 동안의 교훈으로 오(吳)나라의 왕성을 못[沼]으로 만들었고228) 하(夏)나라 소강(少康)은 1여(旅)의 군대로 우(禹)임금의 업적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229)
아! 신들이 또한 듣건대, 《주역(周易)》 곤괘(坤卦) 초륙(初六)에 ‘서리를 밟으면 굳은 얼음이 이른다. [履霜堅氷至]’ 하였는데, 상사(象辭)에 ‘서리를 밟으면 굳은 얼음이 이르는 것은 음(陰)이 비로소 엉김이니, 음이 점점 성해져서 굳은 얼음이 어는 것이다.’ 하였으니, 조짐을 자라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오늘날 근심할 만한 조짐이 한 두 가지에 그치지 않으나, 우선 그 중에 큰 것만을 추려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관작을 팔면 부정한 길로 진출하는 조짐이 근심스럽고, 뇌물이 잇달으면 재상이 탐욕하는 조짐이 근심스러우며, 요고(堯鼓)230) 가 밝지 않으면 언로(言路)가 막히는 조짐이 근심스럽고, 순문(舜門)231) 이 열리지 않으면 현재(賢才)가 유일(遺佚)되는 조짐이 근심스러우며, 변방이 허술하면 서방의 적이 침범하는 조짐이 근심스럽고, 군율이 해이하면 하상(河上)에서 군사가 허물어지는 조짐이 근심스럽습니다. 상벌이 공정하지 않으면 삼군(三軍)이 해체될 조짐이 근심스럽지 않겠으며, 수령이 순량(循良)하지 않으면 백성의 마음이 이반할 조짐이 근심스럽지 않겠으며, 도적떼가 서로 불러 모이면 황지(潢池)에서 병기를 희롱할 조짐이 근심스럽지 않겠으며, 승도(僧徒)가 외람되이 벼슬하면 이단(異端)이 흥행할 조짐이 근심스럽지 않겠습니까. 무릇 이 몇 가지는 어느 것이나 학교가 폐하고 명분이 어지러워진 소치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신들이 지위를 벗어난 일을 경계해야 함을 모르는 바가 아니나,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하찮은 성의는 초야에 있다 하여 스스로 그만둘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신들의 광망(狂妄)하고 참람됨을 용서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진소(陳疏)한 성의가 가상하니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고, 비변사에 내렸다. 회계(回啓)하기를,
"정감(鄭鑑) 등이 소장(疏章)을 올려 일을 논하되 학교를 숭상하고 명분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 말을 하고, 화의(和議)의 잘못을 극력 비방하였으니 더할 수 없이 대의가 늠늠합니다. 이 왜적은 곧 우리 나라가 만세토록 반드시 갚아야 할 원수이니, 누구인들 일거(一擧)에 쳐부수어 귀신과 사람의 분을 씻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태평을 누린 지 수백 년 만에 갑자기 사나운 적을 만나 한번 패한 뒤로 자강(自强)할 계책이 없어서, 위엄으로 두려워하게 하건 기미(羈縻)로 은혜를 베풀건 간에 오직 중국 조정에서 하는 대로 따르기만 하는데 이것이 비록 욕을 참고 준양(遵養)하여 복수를 도모하기 위한 계책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사론(士論)이 분개해 하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성묘(聖廟)232) 가 변란을 겪어 풀이 무성하게 자라나고 향화(香火)가 오래도록 끊기었으니, 전알(展謁)하는 전례(典禮)를 거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난리 중에 태묘(太廟)의 제향(祭享)도 친히 행하지 못하셨으니, 우선 사변이 조금 평성되기를 기다려 차례로 거행함이 마땅하겠습니다.
공사천(公私賤)을 위한 과거 설치는 임시로 거행하는 것이나, 그 실상은 취재(取才)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라고 이름하였으므로 보고 듣는 이가 놀라서 여러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으며, 태학생이 소를 올리기까지 한 데에는 소견이 없지 않으니 성명(成命)을 도로 중지하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소의 끝에 간절하게 열 가지 조짐[十漸]으로 경계한 것은 실로 임금을 사랑하는 성의에서 나온 것이니 을야(乙夜)의 사이에 때때로 보시어 경성(警省)의 자료로 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40책 66권 5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544면
- 【분류】신분-천인(賤人) / 인사-임면(任免) / 정론-정론(政論)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註 209] 은사(殷師)가 분봉(分封) : 은사(殷師)는 기자(箕子)를 말한다. 은(殷)의 기자(箕子)가 동래(東萊)하여 8교(八敎)를 전했다 한다.
- [註 210] 동하(東夏) : 동방의 중하(中夏)라는 뜻으로 우리 나라를 이른 말임.
- [註 211] 도이(島夷) : 왜적.
- [註 212] 강회(江淮)에서 방어하던 장순(張巡)이나 허원(許遠)같은 : 장순(張巡)·허원(許遠)은 당 현종(唐玄宗) 때의 명장. 안녹산(安祿山)의 난리 때 수양성(睢陽城)을 방어하였는데 중과 부적에다가 외원(外援)이 오지 않아서 결국 성의 함락으로 사로잡혔으나 굽히지 않고 죽었다. 《당서(唐書)》 권193.
- [註 213] 더러운 욕이 능침(陵寢)에까지 미치고 : 임진 왜란 때 왜적이 성종(成宗)의 능인 선릉(宣陵)과 중종(中宗)의 능인 정릉(靖陵)을 파해친 일을 말한다.
- [註 214] 여신(餘燼) : 난리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
- [註 215] 삼경(三京) : 경주·개성·평양.
- [註 216] 동진(東晉) 임금의 일시적인 안락을 취하던 일 : 동진의 원제 때 당시 북방은 제족(諸族)이 할거(割據)하고 동진은 겨우 강남(江南) 일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제는 안일만을 추구하고 국토 수복에는 뜻이 없었다. 《통감절요(通鑑節要)》 진기(晉紀) 원황제(元皇帝).
- [註 217] 진회(秦檜) : 송 고종(宋高宗) 때의 간신. 화의를 주장하고 금(金)에 복수하려는 명장 악비(岳飛)를 무고하여 죽이고, 뒤에 19년 동안 정승으로 있으면서 충신과 양장을 다 죽였다. 《송사(宋史)》 권473.
- [註 218] 호전(胡銓) : 송 고종(宋高宗) 때의 문신이며 학자. 추밀원 편수관(樞密院編修官)으로 있을 때 상소하여 왕윤(王倫)·진회(秦檜) 등 소인의 목을 베어 고가(藁街)에 매달아 두기를 청하였다. 《송사(宋史)》 권374.
- [註 219] 동해에 빠져 죽는 것 : 전국(戰國) 때 위(魏)의 장군 신원연(新垣衍)이 조왕(趙王)을 달래어 함께 진(秦)나라를 높여 제(帝)로 삼고자 하자, 제(齊)의 고사(高士) 노중련(魯仲連)이 신원연을 보고 진나라를 제(帝)로 삼는 것의 부당함을 역설하고, 그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 진의 백성이 되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통감범요(通鑑汎要)》 주기(周紀) 난용하(赧王下) 갑진(甲辰). 여기서는 왜적과 싸워 복수해야 하고 강화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호전 같은 사람이 있다면 죽음로써 복수하려 할 것이라는 뜻이다.
- [註 220] 금도(金刀) : 한(漢)나라 화폐(貨幣)의 이름인데, 여기서는 한나라를 말한다.
- [註 221] 부사(父師) : 기자(箕子).
- [註 222] 명기(名器) : 벼슬.
- [註 223] 계묘년 : 1543 중종 38년.
- [註 224] 교육을 공경히 힘쓰고 학문을 권면하기를 위 문공(衛文公)처럼 : 위 문공(衛文公)이 검소한 옷을 입고 농업을 장려하며, 상업을 유통시키고 교육을 공경히 힘쓰며 권면하니, 즉위한 원년에 혁거(革車) 30대이던 것이 마지막에는 3백 대로 늘어났다 한다. 《좌전(左傳)》 민공(閔公) 2년.
- [註 225] 명기(名器)를 아끼기를 주 양왕(周襄王)처럼 하시며 : 명기는 작호(爵號)와 거복(車服). 진 문공(晉文公)이 주(周)나라 왕실에 큰 공로가 있어 양왕에게 천자(天子)의 장례(葬禮)에만 할 수 있는 수도(隨道)로 하기를 청하자, 양왕이 이를 거절하였다.
- [註 226] 한제(漢帝)가 삼로(三老)에게 절한 것 : 삼로(三老)는 한대(漢代) 때 향(鄕)의 장로(長老)로서 교화를 맡은 사람. 한 명제(漢明帝)가 태학(太學)에 가서 삼로에게 절을 하였다 한다. 《논어(論語)》 자로(子路) 기부의우하가언 주(旣富矣又何加焉註).
- [註 227] 석작(石碏)의 6역(六逆)의 경계 : 석작(石碏)은 춘추(春秋) 시대 위(衛)의 대부(大夫). 위 장공(衛莊公)의 공자(公子) 주우(州吁)가 장공의 총애를 믿고 싸움을 좋아하는데도 장공이 금지하지 않으니, 석작이 ‘육역(六逆) 즉 여섯 가지 배역(背逆)의 행위를 배우면 화를 부르게 된다.’고 간언(諫言)하였다. 육역(六逆)은 비참한 사람이 고귀한 사람을 헤치는 것, 연소한 사람이 연장의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 소원한 사람이 친밀한 사람을 이간질하는 것, 새로운 사람이 옛사람을 이간질하는 것, 소국이 대국을 침략하는 것, 음란한 것이 정의를 허물어뜨리는 것이다. 《좌전(左傳)》 은공(隱公) 3년.
- [註 228] 월자(越子)는 10년 동안의 교훈으로 오(吳)나라의 왕성을 못[沼]으로 만들었고 : 월자(越子)는 월왕(越王) 구천(句踐).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포로된 월왕(越王)의 화친을 허락하려 하자, 오원(伍員)이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오원은 월(越)나라가 10년간 백성을 기르고 재물을 모으며 10년간 백성을 교훈하면 20년 이후에 오나라는 못으로 변할 것이다.’ 하였는데, 그 뒤 월왕 구천이 오를 멸망하였다. 《좌전(左傳)》 애공(哀公) 원년, 《사기(史記)》 월왕 구천 세가(越王句踐世家).
- [註 229] 하(夏)나라 소강(少康)은 1여(旅)의 군대로 우(禹)임금의 업적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 소강(少康)은 하(夏)나라 우왕(禹王)의 6세손으로 제상(帝相)의 아들. 요(澆)가 제상(帝相)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라 하(夏)의 왕통(王統)이 끊어진 지 40년이었는데, 소강(少康)이 토지 1성(成) 즉 10리와 군사 1여(旅) 즉 5백 명으로 그 덕을 선포하고 계책을 세워 하우(夏禹)의 왕업을 회복하였다. 《좌전(左傳)》 애공(哀公) 원년, 《사기(史記)》 하본기(夏本紀).
- [註 230] 요고(堯鼓) : 간언(諫言)을 잘 받아들인다는 말. 요(堯)임금이 간고(諫鼓)를 설치하여 간언(諫言)을 받아들였다. 《회남자(淮南子)》 주술훈(主術訓).
- [註 231] 순문(舜門) : 어진 사람을 놓치지 않고 등용한다는 말. 순(舜)임금이 사방의 문을 열어 놓고 현자(賢者)를 맞아들였다 한다. 《서경(書經)》 순전(舜典).
- [註 232] 성묘(聖廟) : 문묘(文廟).
원문
○(大)〔太〕 學生鄭鑑等上疏曰:
伏以, 古昔聖帝、明王之治天下國家也, 莫不尊崇學校, 以敦風化之本, 辨別尊卑, 以定上(心)〔下〕 之分, 誠以學校不崇, 則無以明道學、淑人心, 而收振作之效; 名分不正, 則無以辨等威定民志, 而致惟新之化。 是以, 孟子曰: "學則三代共之, 皆所以明人倫也。" 人倫明於上, 小民親於下。 衛君待孔子而爲政, 孔子欲先正名, 以爲: "名不正則, 言不順, 言不順, 則事不成。" 然則國家之興替, 政治之得失, 豈不係於學校之崇與不崇, 名分之正與不正, 如何乎? 伏願殿下, 試垂覽焉。 臣等竊伏惟念, 昔我東方, 僻陋在夷, 民不知禮讓之爲何事, 而逮乎殷師分茅, 尹玆東夏, 始立八條之敎, 丕闡仁賢之化, 首建學校, 而敎養有方, 次定臧獲, 而貴賤不紊。 文敎蔚興, 禮俗陶甄, 使我三韓之赤子, 不至於牛馬之襟裾者, 是誰之賜乎? 至於我太祖康獻大王, 受天明命, 肇創鴻業, 神謨睿算, 裁自淵衷, 良法美規, 貽厥後世。 立中外館學、鄕校, 而以寧之化大振, 設奴婢定都監, 而尊卑之分有截, 二百年扶植維持者至矣。 頃値國運泰極, (梟)〔島〕 夷肆毒, 一戰而陷嶺南, 再戰而蹴湖西, 長驅直擣, 恣意殺掠, 而內無諸葛之相, 盡瘁於帷幄, 外乏巡、遠之將, 保障於江、淮。 民心一離, 國勢渙散, 都城不守, 宗社爲墟, 汚衊之辱, 及乎陵寢, 池魚之禍, 延及學宮, 禮樂文物, 淪沒於賊手, 可勝痛哉? 幸賴儒林倡義, 奬率士民, 分據要害, 在處斬級, 雖未能(梟)秀吉之首, 折淸正之馘, 而其所以收合餘燼, 使靑丘一域, 卒不全陷於腥膻之窟者, 孰非義旅之先倡, 而我祖宗, 崇儒重道, 培養士氣之所致也哉? 今者天兵迅掃, 收復三京, 鑾輿旋軫, 舊物克甄, 而賊未悔禍, 尙據邊封, 陰懷狙獪之謀, 陽示和好之意, 伸縮在手, 反覆無常, 則凡有血氣者, 孰不爲之痛心疾首, 思欲捐軀而復讐乎? 此正君臣上下, 宵(肝)〔旰〕 經理, 講求恢復之策, 而奈何罔念越膽之嘗, 敢偸晋帝之安, 委靡姑息, 有若平日, 僥倖兇賊之自退, 不思復讐之大義耶? 邪說橫流, 壞人心術, 和議興行, 唯誤國是。 一雄先唱, 百雌繼和, 大臣不言其非, 臺諫者不斥其失, 含垢(思)〔忍〕 辱, 甘心事讐, 悠悠汎汎, 一復一日。 吁! 此何等事耶? 臣等伏在草野, 未知誰爲畫此計者, 而竊恐此說若售, 士氣沮喪, 負國賣君之徒, 接迹於後, 親上死長之風, 杜絶於下, 我國家不絶如綫之脈, 將無以復振, 而三軍之士, 不戰而氣自塞矣。 此則無他。 學校凌夷, 道學不明, 貿貿人心, 趨向不定, 擧一國之人, 而如在禽獸之域, 則何怪夫和議之興行, 而士氣之沮喪乎? 以如此之士氣, 欲圖匡復之擧, 則是猶緣木求魚, 亦難矣。 昔宋之秦檜, 以陰狡之性, 濟邪侫之術, 擧投鼠忌器之說, 沮討賊復讐之計, 至今忠義之士, 未嘗不扼腕於宋朝也。 若使胡銓, 復生於今日, 則其慷慨憤惋之志, 豈特蹈東海而止哉? 嗚呼! 聖廟經火, 蕩爲灰燼, 學庭蕪沒, 鞠爲茂草, 多士無肄業之所, 先師闕奠祭之儀。 俎豆不講, 几席荒涼, 揖讓無聞, 絃誦寂寞, 此有識之士, 所以痛哭而繼之以血者也。 昔, 漢之高祖, 以馬上得天下, 不事詩書, 嫚罵溲溺, 其視吾道, 不啻若枘鑿之不相入, 而過魯一祀, 乃見於兵戈(槍)〔搶〕 攘之日, 金刀四百年精神命脈, 肇基於此, 則崇學右文, 以培吾道之本源者, 在今日尤急, 而尙闕視學之禮, 久稽割牲之典, 至以廢書院興武學爲敎, 綸言一下, 章甫缺望, 則豈非斯文之大不幸乎? 昔, 晋 元帝, 當五胡雲擾之日, 際江東草創之秋, 猶且首立賢士之關, 躬行舍菜之禮, 篤道崇儒, 以勵風化。 況今克復京都, 非偸安江左之比, 而遽下文弊之敎, 沮多士作興之心, 臣等竊恐禮壞樂崩, 而道學不明, 文喪敎熄, 而士趨日卑, 將無以噓已死之寒灰, 回旣倒之狂瀾, 而終至於國不國矣。 嗚呼! 文王序《易》, 以乾坤爲首, 孔子繫之曰: "天尊地卑, 乾坤定矣; 卑高以陳, 貴賤位矣。"我國奴主之法, 其名甚嚴, 其分甚截,上下秩然, 不可移易, 則父師之立規創制, 爲萬世法者, 豈偶然哉? 比年以來, 綱紀掃地, 名分紊舛, 冠屨易置, 首足倒懸, 妨貴之風日滋, 蔑尊之習漸長, 推刃所事者滔滔, 竭誠救主者蔑蔑, 則所當嚴明等級, 詰姦懲猾之日, 而頃者慮其賢路之不恢, 遂設賤隷之科目, 開寒畯自新之路, 備國家緩急之用。 臣等亦知國家之急於詰戎, 爲此不得已之擧, 而奈辱名器何, 奈辱朝廷何? 臣等竊嘗聞之, 禮莫大於分, 分莫大於名。 非名不著, 非分不嚴。 誠以名分旣亂, 則上下無以相維, 而紀綱無以自立故也。 昔, 胡元末, 濶里吉思欲革本國奴婢之法, 高麗 忠烈王上奏表曰: "昔我始祖云: ‘凡我賤類, 其種有別, 若許從良, 後必通仕, 謀亂國家。’ 具由聞啓, 廷議遂寢。 麗朝忠肅王十二年, 元朝欲革本國奴婢之法, 本國政丞崔有渰, 詣中書請舊制, 國人擧手加額而泣曰: "存我三韓者, 崔侍中也。" 以此觀之, 雖以忠烈王之昏主, 崔有渰之庸相, 亦知名分之不可亂, 典章之不可改如此。 曾謂聖上之睿智, 率由舊章, 而乃爲此苟且之擧, 壞萬世不易之法乎? 此法若行, 則臣等直恐區區之名分, 復不能守, 而干名犯分之輩, 將自此而濫觴矣。 況我國家, 壬辰之亂, 不得捍禦, 而委而去之者, 城非不高也, 池非不深也, 兵革非不堅利也。 特因民不曉死長之道, 下不識親上之義, 加以紀律不嚴, 賞罰無章, 御之不得其道故也。 近者許科之命纔下, 厮役之徒相慶, 習知尊貴者之一朝, 吾亦乃可以加此也。 憚其服事之勞, 肆厥侮上之心, 則豈可以忠君敵愾之義, 責之於叛主之人乎? 頃在癸卯年間, 孽子賤産之許通, 識者猶且恥之。 況今輿臺之賤, 其又可以許科乎? 今日許科, 而明日名分紊, 明日名分紊, 而後日之亂臣賊子, 必將繼踵而起矣。 大臣將順而不救, 但保其身, 臺諫含糊而不言, 惟思患失, 君之國事, 將日非矣, 可勝惜哉! 伏願殿下, 窮理而正心, 正心而修身, 敬敎勸學, 如衛之文公; 愛惜名器, 若周之襄王; 躬漢帝三老之拜, 而罄隆師之誠; 體石碏六逆之戒, 而嚴貴賤之分。 漸民以仁, 摩民以義, 導民以政, 齊民以刑, 壯者以暇日, 修其孝悌忠信, 則人心淑, 而道學明, 紀綱立, 而名分嚴, 上之使下, 猶父兄之使子弟; 下之事上, 猶子弟之衛父兄。 然則何讐而不復, 何敵而不摧? 越子十年之訓, 可以沼吳; 夏 康一旅之衆, 可以復禹矣。 噫! 臣等抑又聞之, 《易》坤之初六曰: "履霜堅氷至。" (義)〔象〕 曰: "履霜堅氷, 陰始凝也。 馴致其道, 至堅氷也。" 漸之不可長也, 如是。 夫當今可憂之漸, 非止一二, 而姑撮其大者而言之。 嗚呼! 鬻賣官爵, 則曲逕鑽進之漸, 可憂也; 苞苴絡繹, 則宰相貪墨之漸, 可憂也。 堯鼓不明, 則言路杜絶之漸, 可憂也; 舜門不闢, 則賢才遺佚之漸, 可憂也。 邊鄙踈虞, 則西賊侵凌之漸, 可憂也; 軍律解弛, 則河上潰師之漸, 可憂也。 賞罰不公, 則三軍解體之漸, 其不憂乎, 守宰不良, 則百姓離心之漸, 其不憂乎? 盜賊嘯聚, 則潢池弄兵之漸, 其不憂乎, 僧徒濫爵, 則異端興行之漸, 其不憂乎? 凡此數者, 何莫非學校之廢, 名分之紊之所致也哉? 臣等非不知出位之可戒, 而區區憂國愛君之誠, 不以畎畝而自沮也。 伏願殿下, 恕其狂僭焉。
答曰: "陳疏之誠可嘉。 當議處。" 下備邊司。 回啓曰: "鄭鑑等抗章論事, 以崇學校、正名分爲言, 力詆和議之非, 大義澟澟, 蔑以加矣。 此賊, 乃我國萬世必報之讐, 孰不欲一擧勦滅, 以雪神人之憤哉? 第以昇平數百年, 猝遇劇賊, 一敗之後, 無計自强, 震以威惕, 恩以羈縻, 惟天朝所爲是從, 雖出於忍辱遵養, 以圖復讐之計, 而士論之慨惋, 無足怪矣。 聖廟經變, (鞫)〔鞠〕 爲茂草, 香火久冷, 宜擧展謁之典, 而(槍)〔搶〕 攘中, 太廟之享, 尙未親行, 姑待事變稍定, 次第擧行宜當。 公、私賤設科, 亦是權時之擧, 而其實與取才無異。 但名以科擧, 聞見駭異, 衆情不悅, 至於(大)〔太〕 學生陳疏, 不無所見, 還寢成命, 恐或無妨。 疏末眷眷, 以十漸爲戒, 實出愛君之誠, 乙夜之間, 時賜睿覽, 以資警省, 何如?" 上從之。
- 【태백산사고본】 40책 66권 5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54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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