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65권, 선조 28년 7월 25일 병신 2/2 기사 / 1595년 명 만력(萬曆) 23년
평안 병사 신잡이 변경지역의 호인들의 동태에 대해 치계하다
국역
평안 병사 신잡(申磼)이 치계하기를,
"7월 5일 건주위(建州衛)의 호인(胡人) 90여 명이 만포(滿浦)에 도착하였으므로 잔치를 베풀어 주려고 하니 그들이 서계(書契)를 올렸습니다. 군관들이 거절하고 받지 않자 여러 호인들이 일시에 머리를 조아리고 잔치 음식을 먹지 않으므로 군관이 좋은 말로 알아듣도록 타일러 술과 음식을 먹였습니다. 술잔이 오고 갈 무렵 서계를 몰래 꺼내 등서하여 올려보냅니다. 서계의 뜻으로 보건대, 그들이 백성과 물자를 쇄환(刷還)한다는 것으로써 전후 서계를 올린 것은 필연코 우리 나라 국경에 마구 들어와 멋대로 산삼(山蔘)을 캐려는 계책입니다. 현재 강변(江邊)의 무기가 모두 상실되었고 군대의 수효가 모자라서 진영이 텅 비어 장래의 걱정이 없지 않으니, 삼을 캐도록 하는 한 가지 일은 마땅히 거절해야 할 것입니다. 대개 서계를 이미 받지 않고 잔치도 베풀지 않으면 저들이 분이 나서 반드시 화근을 만들 소지가 있으며, 후일 잔치를 베풀 때에도 또한 뜻밖에 변고가 발생할 요소가 있으므로, 이에 조방장(助防將) 변응규(邊應奎)를 별도로 영장(領將)으로 삼아 만포에 진을 치도록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비변사에 내렸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서쪽 지방의 일이 매우 염려되었는데 다만 남쪽 지방의 병란이 시급하므로 조치하지 못했습니다. 강변 일대의 군졸이 적고 약하며 용감한 토병(土兵)은 전쟁에서 많이 죽고 또 혹은 영남(嶺南)의 전투에 참가하였으므로 진영이 비록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방비할 계책은 일체 허술합니다. 북쪽 오랑캐가 허실을 엿보아 무슨 일이든 트집을 잡아 변고를 일으키려고 한 지가 참으로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지난해 군대를 출동하여 구원하려고 하자 그때 조정 의논이 또한 후환을 염려하여 요동(遼東)에 자문(咨文)을 보내 더욱 금지해 달라고 요청했었는데, 지금은 또 우리 백성을 쇄환한다는 일로 먼저 우리 나라에 들어와 허실을 시험해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낸 서계의 어투가 분명히 업신여기고 침략하려는 태도가 있으니 앞일이 매우 염려 됩니다. 다만 노가치(老可赤)는 세력이 한창 강성하니 만약 우리 나라 변방 장수의 말로서 엄중히 거절하면 그들의 흉포함을 금지시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후일 난처한 걱정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저 서쪽은 중국과 인접했으니 사체(事體)가 북쪽의 번호(藩胡)를 무마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지난 천순(天順)206) 년간에 우리 나라가 건주(建州) 달자(㺚子) 동(蕫)에게 중추(中樞)의 직함을 주었었는데, 그 임명장이 중국의 변방 장수에게 입수되어 명나라 조정에서 호되게 힐책하고 사신을 보내어 문책까지 하였으니 이로써 보면 변방의 가까운 오랑캐와 사적으로 왕래하는 것을 명조(明朝)에서 허락하지 않으며 법으로 금지함이 매우 엄격합니다. 지금 노가치가 그들의 강한(强悍)한 것을 믿고 여러 차례 이와 같이 하니, 이러한 상황을 불가불 그때그때 사유를 갖추어 요동(遼東)에 이자(移咨)하여 금지하는 명령이 명조에서 나오게 하면, 우리도 할 말이 있고 저들의 짐승 같은 마음도 꽤나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일의 관계가 매우 급하니, 승문원(承文院)으로 하여금 수 일내에 자문(咨文)을 마련토록 하여 사지 통사(事知通事)에게 부쳐 빨리 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 평안도의 무사로서 서울에 있는 자가 또한 많으니 우선 내려보내고, 본도(本道)에 있으면서 장차 남쪽 지방의 방어를 위해 가게 된 자는 우선 정지하여 그대로 본도에 머물러 병사(兵使)의 명령을 듣게 하소서.
그리고 잔치에 관한 일은 당초 김성보(金星報)가 잘못 처리하여 다음 기회로 약속하였으므로 일이 이렇게까지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잔치를 받는다 핑계하고 천 사람 백 사람이 떼를 지어 산에서 가득히 나오게 되면 우리 나라에서는 갑자기 오랑캐라고 해서 막을 수도 없고 또 멋대로 들어오도록 놓아둘 수도 없습니다. 분분하게 논란하는 사이에 뜻밖의 변고가 없지 않을 것이니, 이러한 사연을 십분 자세히 살펴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을 것은 강물이 얼지 않아 강변에 도착한 오랑캐들이 반드시 이쪽 편의 배를 기다려 탄 다음에야 건널 수 있는 것이니, 잔치를 지연시킬 수 없습니다. 얼음이 얼어 육지와 연결된다면 약속을 거절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잔치할 물건을 감사(監司)로 하여금 급히 독촉하여 들여보내게 하고 후일로 미루지 말게 하소서. 변응규(邊應奎)가 이미 조방장(助防將)이 되었으면 당연히 병사(兵使)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전에는 다만 군사 훈련시키는 일로 열읍을 순행하였으므로 순찰사(巡察使)의 통제를 받았지만, 지금은 강변에 있으니 병사가 통제해야 합니다. 그 밖의 강변에서 방어하는 일은 심상하게 보지 말고 마음을 다해 조치하여 후환을 끼치지 말게 해야 합니다.
노가치의 서계(書契)를 비록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이미 복속해 왔는데 만약 답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노여움이 더욱 심할 것이니 만포 첨사(滿浦僉使)로 하여금 답장을 하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대략 답장의 뜻은 ‘쇄환한 사람이 14명이나 되니, 후의를 가상히 여긴다. 그러므로 나온 사람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고 또 상품을 주어 보낸다. 다만 명나라 조정에서 법으로 금지하므로 우리 나라가 그대들과 국경이 서로 가깝지만 사적으로 왕래하지 못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지금 만약 명나라의 법을 어기고 전에 없었던 준례를 만들어 국경을 넘어 마음대로 삼을 캐도록 하면, 두 곳의 백성간에 사사로운 틈이 생겨 호의(好意)를 잃게 될 뿐만 아니라, 명조(明朝)에서도 반드시 옳지 않게 여길 것이다.’는 사연으로 명백히 개유(開諭)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누그러지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승문원으로 하여금 마련하여 보내도록 하소서. 그밖에 임기 응변하여 품의할 필요없이 처리할 것은 강계 부사(江界府使) 허욱(許頊)으로 하여금 편리한 대로 처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 [註 206] 천순(天順) : 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
원문
○平安兵使申磼馳啓: "七月初五日, 建州衛 胡人九十餘名, 來到滿浦, 宴享將設, 進以書契。 軍官等拒而不受, 諸胡一時叩頭, 不食宴享。 軍官善辭開諭, 饋以酒飯, 盃酒往來之際, 潛出書契, 謄書上送矣。 以書契之意觀之, 則其所以刷還民物, 前後書契者, 必是闌入我境, 恣意採蔘之計也。 目今江邊軍器, 盡爲蕩失, 軍額耗縮, 陣堡空虛, 不無將來之患, 採蔘一事, 所當牢拒。 大槪書契旣不受, 宴享亦不設, 渠輩懷憤, 必有構禍之端, 後日宴享之時, 亦不無意外之生變。 玆令助防將邊應奎, 別定領將, 結陣于滿浦矣。" 上下備邊司。 備邊司回啓曰: "西方之事, 極爲可憂, 只以南方兵變方急, 故未得措置。 江邊一帶, 軍卒寡弱, 土兵之勇敢者, 多死於戰陣, 且或赴戰於嶺南, 鎭堡雖存, 而防備之計, 則一切虛踈。 北虜窺覘虛實, 欲因事生變者, 固非一日矣。 往年欲出兵相救, 而其時朝議, 亦慮後患, 移咨遼東, 請加禁絶, 而今則又以刷還我民之事, 先爲來試淺深, 而今此所送書契之辭, 明有凌侮侵突之狀, 前頭之事, 極爲可慮。 但老可赤勢力方强。 若但以我國邊將之言, 嚴辭拒絶, 則非徒不能禁止兇暴, 後日難處之患, 不可勝言。 大抵西方接連上國, 其事體與北方撫綏藩胡不同。 往在天順年間, 我國授建州 㺚子 董〈山〉中樞職名, 其告身爲中朝邊將所獲, 皇朝深加詰責, 至於遣使來問。 以此觀之, 中朝不許與邊境相近之胡, 私相往來, 法禁甚嚴。 今老可赤, 恃其强(惶)〔悍〕 , 屢屢如此, 此等事狀, 不可不登時具由, 移咨於遼東, 使禁止之令, 出於中朝, 則在我得以爲辭, 而彼之獸心, 頗亦可戢。 此事機關甚急, 請令承文院, 數日內磨鍊咨文, 付諸事知通事, 馳送爲當。 且平安道武士, 在京者亦多, 爲先下送, 而其在本道, 將爲赴防於南中者, 姑令停止, 仍留本道, 聽兵使調用, 而宴享之事, 當初金星報處置失宜, 約以後期, 而事之難處, 至於如此。 今托以受宴, 千百爲群, 漫山出來, 則我國旣不可遽以賊胡拒之, 又不可任其闌入。 紛挐論詰之際, 不無意外之變, 此等辭緣, 不得不十分詳審處之。 所賴長江未凍, 來胡至江邊者, 必待此邊船隻, 然後可渡, 其設宴, 不可遲延等待。 使至於合氷成陸, 則約束拒絶尤難也。 宴享之資, 令監司, 星火督促入送, 勿使後時。 邊應奎旣爲助防將, 則自當聽兵使節制。 前則只鍊兵之事, 巡行列邑, 故聽巡察使節制, 今在江邊, 則兵使自可節制。 其他江邊防備之事, 毋視尋常, 盡心措置, 勿貽後患。 老可赤書契, 雖云拒而不受, 旣已來投, 若不答, 則其怒尤甚, 不如令滿浦僉使答其書。 大意以爲: ‘刷還之人, 至於十四名, 厚意可嘉, 故出來之人, 設爲宴享, 且爲賞物而送。 但天朝法禁, 故我國與貴衛, 境土相近, 而不能私相往來, 其來已久。 今若違天朝之禁, 而開無前之例, 踰越邊境, 採蔘橫行, 則不但兩處之民, 私自開釁, 以敗好意, 而天朝亦必以爲不可’, 以此辭緣, 明白開諭, 使之自戢爲當。 令承文院, 磨鍊下送, 其他臨機處置, 不待報稟者, 使江界府使許頊, 隨便處置, 何如?" 上從之。
선조 28년 (1595) 7월 25일
선조실록65권, 선조 28년 7월 25일 병신 2/2 기사 / 1595년 명 만력(萬曆) 23년
평안 병사 신잡이 변경지역의 호인들의 동태에 대해 치계하다
국역
평안 병사 신잡(申磼)이 치계하기를,
"7월 5일 건주위(建州衛)의 호인(胡人) 90여 명이 만포(滿浦)에 도착하였으므로 잔치를 베풀어 주려고 하니 그들이 서계(書契)를 올렸습니다. 군관들이 거절하고 받지 않자 여러 호인들이 일시에 머리를 조아리고 잔치 음식을 먹지 않으므로 군관이 좋은 말로 알아듣도록 타일러 술과 음식을 먹였습니다. 술잔이 오고 갈 무렵 서계를 몰래 꺼내 등서하여 올려보냅니다. 서계의 뜻으로 보건대, 그들이 백성과 물자를 쇄환(刷還)한다는 것으로써 전후 서계를 올린 것은 필연코 우리 나라 국경에 마구 들어와 멋대로 산삼(山蔘)을 캐려는 계책입니다. 현재 강변(江邊)의 무기가 모두 상실되었고 군대의 수효가 모자라서 진영이 텅 비어 장래의 걱정이 없지 않으니, 삼을 캐도록 하는 한 가지 일은 마땅히 거절해야 할 것입니다. 대개 서계를 이미 받지 않고 잔치도 베풀지 않으면 저들이 분이 나서 반드시 화근을 만들 소지가 있으며, 후일 잔치를 베풀 때에도 또한 뜻밖에 변고가 발생할 요소가 있으므로, 이에 조방장(助防將) 변응규(邊應奎)를 별도로 영장(領將)으로 삼아 만포에 진을 치도록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비변사에 내렸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서쪽 지방의 일이 매우 염려되었는데 다만 남쪽 지방의 병란이 시급하므로 조치하지 못했습니다. 강변 일대의 군졸이 적고 약하며 용감한 토병(土兵)은 전쟁에서 많이 죽고 또 혹은 영남(嶺南)의 전투에 참가하였으므로 진영이 비록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방비할 계책은 일체 허술합니다. 북쪽 오랑캐가 허실을 엿보아 무슨 일이든 트집을 잡아 변고를 일으키려고 한 지가 참으로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지난해 군대를 출동하여 구원하려고 하자 그때 조정 의논이 또한 후환을 염려하여 요동(遼東)에 자문(咨文)을 보내 더욱 금지해 달라고 요청했었는데, 지금은 또 우리 백성을 쇄환한다는 일로 먼저 우리 나라에 들어와 허실을 시험해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낸 서계의 어투가 분명히 업신여기고 침략하려는 태도가 있으니 앞일이 매우 염려 됩니다. 다만 노가치(老可赤)는 세력이 한창 강성하니 만약 우리 나라 변방 장수의 말로서 엄중히 거절하면 그들의 흉포함을 금지시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후일 난처한 걱정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저 서쪽은 중국과 인접했으니 사체(事體)가 북쪽의 번호(藩胡)를 무마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지난 천순(天順)206) 년간에 우리 나라가 건주(建州) 달자(㺚子) 동(蕫)에게 중추(中樞)의 직함을 주었었는데, 그 임명장이 중국의 변방 장수에게 입수되어 명나라 조정에서 호되게 힐책하고 사신을 보내어 문책까지 하였으니 이로써 보면 변방의 가까운 오랑캐와 사적으로 왕래하는 것을 명조(明朝)에서 허락하지 않으며 법으로 금지함이 매우 엄격합니다. 지금 노가치가 그들의 강한(强悍)한 것을 믿고 여러 차례 이와 같이 하니, 이러한 상황을 불가불 그때그때 사유를 갖추어 요동(遼東)에 이자(移咨)하여 금지하는 명령이 명조에서 나오게 하면, 우리도 할 말이 있고 저들의 짐승 같은 마음도 꽤나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일의 관계가 매우 급하니, 승문원(承文院)으로 하여금 수 일내에 자문(咨文)을 마련토록 하여 사지 통사(事知通事)에게 부쳐 빨리 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 평안도의 무사로서 서울에 있는 자가 또한 많으니 우선 내려보내고, 본도(本道)에 있으면서 장차 남쪽 지방의 방어를 위해 가게 된 자는 우선 정지하여 그대로 본도에 머물러 병사(兵使)의 명령을 듣게 하소서.
그리고 잔치에 관한 일은 당초 김성보(金星報)가 잘못 처리하여 다음 기회로 약속하였으므로 일이 이렇게까지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잔치를 받는다 핑계하고 천 사람 백 사람이 떼를 지어 산에서 가득히 나오게 되면 우리 나라에서는 갑자기 오랑캐라고 해서 막을 수도 없고 또 멋대로 들어오도록 놓아둘 수도 없습니다. 분분하게 논란하는 사이에 뜻밖의 변고가 없지 않을 것이니, 이러한 사연을 십분 자세히 살펴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을 것은 강물이 얼지 않아 강변에 도착한 오랑캐들이 반드시 이쪽 편의 배를 기다려 탄 다음에야 건널 수 있는 것이니, 잔치를 지연시킬 수 없습니다. 얼음이 얼어 육지와 연결된다면 약속을 거절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잔치할 물건을 감사(監司)로 하여금 급히 독촉하여 들여보내게 하고 후일로 미루지 말게 하소서. 변응규(邊應奎)가 이미 조방장(助防將)이 되었으면 당연히 병사(兵使)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전에는 다만 군사 훈련시키는 일로 열읍을 순행하였으므로 순찰사(巡察使)의 통제를 받았지만, 지금은 강변에 있으니 병사가 통제해야 합니다. 그 밖의 강변에서 방어하는 일은 심상하게 보지 말고 마음을 다해 조치하여 후환을 끼치지 말게 해야 합니다.
노가치의 서계(書契)를 비록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이미 복속해 왔는데 만약 답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노여움이 더욱 심할 것이니 만포 첨사(滿浦僉使)로 하여금 답장을 하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대략 답장의 뜻은 ‘쇄환한 사람이 14명이나 되니, 후의를 가상히 여긴다. 그러므로 나온 사람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고 또 상품을 주어 보낸다. 다만 명나라 조정에서 법으로 금지하므로 우리 나라가 그대들과 국경이 서로 가깝지만 사적으로 왕래하지 못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지금 만약 명나라의 법을 어기고 전에 없었던 준례를 만들어 국경을 넘어 마음대로 삼을 캐도록 하면, 두 곳의 백성간에 사사로운 틈이 생겨 호의(好意)를 잃게 될 뿐만 아니라, 명조(明朝)에서도 반드시 옳지 않게 여길 것이다.’는 사연으로 명백히 개유(開諭)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누그러지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승문원으로 하여금 마련하여 보내도록 하소서. 그밖에 임기 응변하여 품의할 필요없이 처리할 것은 강계 부사(江界府使) 허욱(許頊)으로 하여금 편리한 대로 처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 [註 206] 천순(天順) : 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
원문
○平安兵使申磼馳啓: "七月初五日, 建州衛 胡人九十餘名, 來到滿浦, 宴享將設, 進以書契。 軍官等拒而不受, 諸胡一時叩頭, 不食宴享。 軍官善辭開諭, 饋以酒飯, 盃酒往來之際, 潛出書契, 謄書上送矣。 以書契之意觀之, 則其所以刷還民物, 前後書契者, 必是闌入我境, 恣意採蔘之計也。 目今江邊軍器, 盡爲蕩失, 軍額耗縮, 陣堡空虛, 不無將來之患, 採蔘一事, 所當牢拒。 大槪書契旣不受, 宴享亦不設, 渠輩懷憤, 必有構禍之端, 後日宴享之時, 亦不無意外之生變。 玆令助防將邊應奎, 別定領將, 結陣于滿浦矣。" 上下備邊司。 備邊司回啓曰: "西方之事, 極爲可憂, 只以南方兵變方急, 故未得措置。 江邊一帶, 軍卒寡弱, 土兵之勇敢者, 多死於戰陣, 且或赴戰於嶺南, 鎭堡雖存, 而防備之計, 則一切虛踈。 北虜窺覘虛實, 欲因事生變者, 固非一日矣。 往年欲出兵相救, 而其時朝議, 亦慮後患, 移咨遼東, 請加禁絶, 而今則又以刷還我民之事, 先爲來試淺深, 而今此所送書契之辭, 明有凌侮侵突之狀, 前頭之事, 極爲可慮。 但老可赤勢力方强。 若但以我國邊將之言, 嚴辭拒絶, 則非徒不能禁止兇暴, 後日難處之患, 不可勝言。 大抵西方接連上國, 其事體與北方撫綏藩胡不同。 往在天順年間, 我國授建州 㺚子 董〈山〉中樞職名, 其告身爲中朝邊將所獲, 皇朝深加詰責, 至於遣使來問。 以此觀之, 中朝不許與邊境相近之胡, 私相往來, 法禁甚嚴。 今老可赤, 恃其强(惶)〔悍〕 , 屢屢如此, 此等事狀, 不可不登時具由, 移咨於遼東, 使禁止之令, 出於中朝, 則在我得以爲辭, 而彼之獸心, 頗亦可戢。 此事機關甚急, 請令承文院, 數日內磨鍊咨文, 付諸事知通事, 馳送爲當。 且平安道武士, 在京者亦多, 爲先下送, 而其在本道, 將爲赴防於南中者, 姑令停止, 仍留本道, 聽兵使調用, 而宴享之事, 當初金星報處置失宜, 約以後期, 而事之難處, 至於如此。 今托以受宴, 千百爲群, 漫山出來, 則我國旣不可遽以賊胡拒之, 又不可任其闌入。 紛挐論詰之際, 不無意外之變, 此等辭緣, 不得不十分詳審處之。 所賴長江未凍, 來胡至江邊者, 必待此邊船隻, 然後可渡, 其設宴, 不可遲延等待。 使至於合氷成陸, 則約束拒絶尤難也。 宴享之資, 令監司, 星火督促入送, 勿使後時。 邊應奎旣爲助防將, 則自當聽兵使節制。 前則只鍊兵之事, 巡行列邑, 故聽巡察使節制, 今在江邊, 則兵使自可節制。 其他江邊防備之事, 毋視尋常, 盡心措置, 勿貽後患。 老可赤書契, 雖云拒而不受, 旣已來投, 若不答, 則其怒尤甚, 不如令滿浦僉使答其書。 大意以爲: ‘刷還之人, 至於十四名, 厚意可嘉, 故出來之人, 設爲宴享, 且爲賞物而送。 但天朝法禁, 故我國與貴衛, 境土相近, 而不能私相往來, 其來已久。 今若違天朝之禁, 而開無前之例, 踰越邊境, 採蔘橫行, 則不但兩處之民, 私自開釁, 以敗好意, 而天朝亦必以爲不可’, 以此辭緣, 明白開諭, 使之自戢爲當。 令承文院, 磨鍊下送, 其他臨機處置, 不待報稟者, 使江界府使許頊, 隨便處置, 何如?" 上從之。
원본
선조 28년 (1595) 7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