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선조실록 42권, 선조 26년 9월 6일 정사 8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유성룡이 남쪽의 군량 공급 사정과 대책, 유희선 처형 사실을 보고하다

도체찰사(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 【8월 22일. 】 치계하기를,

"이번에 독운 어사(督運御史) 윤경립(尹敬立)의 첩정(牒呈)을 보건대 ‘유 총병(劉總兵)오 유격(吳遊擊)의 두 군대가 모두 상주(尙州)에 왔는데 오래 주둔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한다. 상주에는 군량이 이미 다 떨어졌으므로 유 총병이 하인(下人)에게 스스로 창고에 남아 있는 곡식을 봉폐(封閉)하게 하였고, 또 견탄참(犬灘站)에 저축해 둔 쌀과 콩을 모두 가져갔다. 이에 오 유격의 군대에게는 지급할 것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그 군대로 하여금 문경참(聞慶站)에 남아 있는 쌀과 콩을 가져오게 하였으나 먼 곳에서 운반하기 때문에 제때에 도착시킬 수가 없다. 그리고 두 곳의 참(站)에 남아 있는 쌀과 콩은 그 수가 매우 적어서 며칠이 못 가서 다 떨어지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낙 참장(駱參將)의 패문(牌文)을 보건대 ‘호남(湖南)에서 와서 상주·조령(鳥嶺) 등지에 주둔하고 있으니 본도(本道)로 하여금 식량을 속히 수송하게 하여 떨어지는 일이 없게 하라.’ 하였습니다.

신(臣)이 원주(原州)에서 내려올 적에 충주(忠州)·문경(聞慶)·견탄(犬灘) 세 참(站)의 곡식을 차례로 보았는데 문경에만 겨우 1천여 섬의 쌀이 있었고 견탄에는 쌀 6백여 섬이 있을 뿐이며 충주에는 저축이 더욱 적었습니다. 만약 대군(大軍)이 모두 이곳으로 몰려오게 된다면 겨우 7∼8일 먹을 것밖에 지급할 수 없는 실정인데 사방을 둘러보아도 다시 더 수송해 올 곳이 없으니, 절박한 사정이 이보다 더할 수가 없습니다. 대저 경상도의 좌도(左道)·우도(右道) 중에 아직 분탕을 겪지 않은 고을로 좌도에는 영천(榮川)·풍기(豐基)·봉화(奉化)·청송(靑松)·진보(眞寶)·영해(盈海)·영덕(盈德)·청하(淸河)·영일(迎日) 등 아홉 고을인데, 전후 각참(各站)에 내놓은 곡식은 모두 그 고을들에서 마련해 온 것으로 지금까지 끊기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도에는 거창(居昌)·안음(安陰)·산음(山陰)·함양(咸陽)·진주(晉州)가 약간 완전하였었는데 진주가 함몰된 뒤에는 제장(諸將)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후퇴하면서 지나는 곳마다 공사(公私) 간에 모두 다 없애버렸습니다. 함창(咸昌) 같은 경우는 저축된 곡식이 가장 많았었고 또 호서(湖西)에서 수송해 온 곡식까지 있었는데, 군사들을 풀어 관고(官庫)를 부수어버리고 남김없이 흩어버렸으며 심지어는 관사(官舍)까지 모두 불태웠는데 왜적의 화(禍)도 그 정도까지 이르지는 않았었습니다. 이리하여 온 도(道)의 재력(財力)이 한꺼번에 모두 바닥이 났습니다. 아직도 적병은 해상(海上)에 주둔하고 있는데 그들의 흉계를 예측하기가 어렵습니다. 믿는 것이라곤 오직 중국군뿐인데, 군량은 날이 갈수록 바닥이 나서 다시는 앞으로 잘해 낼 대책이 없어 절통하기만 할 뿐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옛부터 군사를 일으킬 때에는 반드시 양식을 우선으로 다루었으므로, 그 계획과 경리(經理)에 있어 반드시 치밀하고 곡진하게 하여 치수(錙銖)만큼도 계획에서 빠진 것이 없은 다음에야 모자라지 않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점이 바로 군량을 공급함에 있어 양도(糧道)를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어려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난해 난리가 난 이후 중외(中外)의 군량은 전적으로 충청도전라도에 의지하고 있었는데 당초 어느 한 사람 이를 맡아 관리하는 이가 없었으므로 그 많던 공사(公私)의 저축을 모두 관군(官軍)과 의병(義兵)들이 절도 없이 먹어치우고 함부로 낭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국군이 영남(嶺南)으로 내려온 다음에는 이를 수송하는 조치와 나누어주는 일들에 모두 두서가 없어 절반 이상이 산실(散失)되고 있어서 조도(調度)의 중대한 일이 마치 아이들 장난같이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게다가 호조 판서 이성중(李誠中)이 또 죽게 되자 이를 주관할 사람이 없습니다. 독운 어사(督運御史) 윤경립(尹敬立)이 힘을 다해 분주하고 있으나 길이 멀고 일은 많은데 어떻게 능히 골고루 미칠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이미 늦기는 했으나 조정(朝廷)에서 반드시 계획성이 있고 국사에 성심을 다할 자로서 조도(調度)에 능한 중신(重臣) 한 사람을 급히 파견해서 그 일을 전담시켜 이쪽과 저쪽에 있는 식량의 많고 적음을 자세하게 살펴 미리 헤아려 옮기게 하소서. 그리고 금년 가을 곡식이 익어가고 있으니 약간이라도 풍년이 든 곳에는 공명 고신첩(空名告身帖)과 면역첩(免役帖)을 많이 보내되 섬[石]수를 약간 감해주어 사람들이 즐겨 호응할 수 있게 함으로써 수만 섬의 곡식을 마련해 내야만 큰일을 성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주시기를 밤낮으로 바랍니다.

그리고 신이 다시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가 기율(紀律)이 해이해지고 인심이 방자하게 된 데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신이 듣기로는 진주성(晉州城)이 함락되었을 때에 전라도 복병장(伏兵將)인 장흥 부사(長興府使) 유희선(柳希先)두치진(豆恥津)을 지키고 있었는데, 적병이 처음 그 나루를 건너지 않았을 적엔 나루의 물이 바다에 잇닿도록 넓었으므로 배가 없이는 백만의 적병이라고 하더라도 건널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희선은 소문만 듣고 도망가면서 광양(光陽)·순천(順天) 지경을 지날 적에 적병이 온다고 크게 외쳤으므로 광양·순천이 일시에 무너져 흩어졌고 난민(亂民)들이 이로 인해 창고를 불지르고 노략질하여 남아난 것이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낙안(樂安)·강진(康津)·구례(求禮)·곡성(谷城)까지도 하나같이 동요되어서 백년 보장(保障)으로 웅부(雄富)하던 지역을 까닭없이 잿더미가 되게 만들었으니 저만 살려고 도망하면서 무리를 현혹시킨 죄는 만번 죽어도 속죄(贖罪)하기가 어렵습니다. 요즈음 장수들이 이미 중병(重兵)을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진주(晉州)의 위급함을 구제하는 데 단 한 명의 군졸도 동원하지 않았고 도리어 적병의 선구(先驅)가 되어 인심을 동요시켜서 양남(兩南)의 10여 고을을 단번에 쓸쓸하게 만들었습니다. 군량(軍糧)을 수송하는 데 있어 다시 더 조처해 볼 방법이 없게 되어 국사가 더욱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유희선의 죄상(罪狀)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신이 이미 원수(元帥)에게 이문(移文)하여 율(律)에 따라 시행해서 그 나머지 사람들을 경책(警責)하게 하였습니다. 조정에서도 오늘의 위급한 형편을 깊이 유념하여 기강(紀綱)을 진기시켜 지방관(地方官)으로 하여금 국사에 마음을 다하게 하고 군사를 거느린 신하에게 사수(死綏)450) 의 뜻을 갖게 한 다음에야 국사가 만에 하나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신의 구구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어서 망령되이 어리석은 견해를 진달합니다."


  • 【태백산사고본】 24책 42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94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군사-전쟁(戰爭) / 군사-병참(兵站) / 군사-군역(軍役) / 외교-왜(倭) / 인사-임면(任免)

  • [註 450]
    사수(死綏) : 군사가 패하면 장수는 마땅히 죽어야 함을 뜻하는 말. 《좌전(左傳)》 문공(文公) 12년에 "사마법(司馬法)에 장군은 수레에 오르는 끈을 잡고 죽는다. [死綏]" 하였는데, 여기서 온 말임.

○都體察使柳成龍 【八月二十二日】 馳啓曰: "今見督運御史尹敬立牒呈: ‘劉摠兵吳遊擊兩軍, 皆來尙州, 有久駐之計。 尙州軍糧, 已爲蕩竭, 摠兵令下人, 自爲封閉倉中餘在之穀, 又令盡取犬灘站所儲米豆。 吳遊擊之軍, 則無所支給, 不得已使其軍, 移來聞慶站餘在米太以去, 而遠處轉運, 未能及時。 且兩站所餘米豆, 其數甚少, 不過數日而將盡云云。 又見駱參將牌文言: ‘自湖南, 來駐尙州 鳥嶺等處, 令本道催運糧餉, 毋使缺乏云云。’ 臣自原州下來時, 歷見忠州聞慶犬灘三站之穀, 惟聞慶僅有米千餘石, 犬灘有米六百餘石, 忠州所儲尤少。 若使大軍, 俱聚于此處, 僅支七八日之食, 而四顧無可灌輸之處, 事之悶迫, 無過於此。 大抵慶尙左、右道中, 未經焚蕩之邑, 左道則有榮川豐基奉化靑松眞寶寧海盈德淸河迎日九邑, 而前後出站之穀, 皆倚辦於此, 至今不絶。 右道則居昌安陰山陰咸陽晋州稍完, 及晋州陷沒之後, 諸將等率軍退北, 所經之處, 公私蕩竭。 如咸昌則儲穀最多, 且有湖西運來之穀, 而縱其士卒, 打破官庫, 散盡無餘, 至於官舍, 盡皆焚燒。 倭賊之禍, 不至於此, 而道內財力, 一時俱竭, 尙今賊兵, 屯據海上, 兇謀難測。 所恃者, 惟在天兵, 而軍糧日益(饋)〔匱〕 竭, 更無善後之策, 徒切痛悶, 罔知所措。 自古軍興之際, 必以糧食爲先, 其所區畫經理, 必也纖悉曲盡, 不遺錙銖, 然後可以無乏。 此所以給饋餉, 不絶糧道, 爲最難也。 自前年變生以後, 中外軍餉, 專倚於忠淸全羅, 而初無一人主掌經理之員, 許多公私之畜, 盡歸於官軍、義兵冗食耗欠之中。 及天兵下嶺之後, 轉運措置, 支散俵給, 皆無頭緖, 散失太半。 調度重事, 有同兒戲, 而戶曹判書李誠中, 又復身死, 無人主管, 雖有督運御史尹敬立, 竭力奔走, 道遠事多, 何能遍及? 今雖已晩, 朝廷必須急遣有心計, 誠心國事, 善於調度重臣一員, 專掌其事, 詳察彼此糧餉多寡之數, 而預先推移。 且今秋禾穀向熟, 亦於稍稔之處, 多送空名告身、免役帖, 稍減石數, 使人樂趨, 辦出數萬石之穀, 然後大事庶幾可濟。 日夜懇望。 且臣又有一說, 國事之所以至此者, 專由於紀律解弛, 人心縱恣之致。 臣聞晋州陷城時, 全羅道伏兵將長興府使柳希先, 守豆恥津, 賊兵初未渡津, 且津水達海, 廣闊無船, 雖有百萬之賊, 不可飛渡, 而希先聞聲逃走, 經過光陽順天, 之境, 大呼賊至, 光陽順天一時潰散, 亂民因之焚掠, 倉穀蕩無遺存。 以及樂安康津求禮谷城, 一樣騷動, 百年保障雄富之地, 無故灰燼。 其逃生惑衆之罪, 萬死難贖。 近日諸將等, 旣按重兵, 不能出一卒, 以救晋州之急, 顧乃爲賊先驅, 駭動人心, 使兩南十餘邑, 一擧蕭然。 軍糧轉運, 更無措辦之勢, 國事益至於無可奈何之, 地而希先罪狀, 尤爲駭愕。 臣已移文元帥, 使之按律施行, 以警其餘, 朝廷亦爲痛念今日危急之勢, 振肅紀綱, 使守土之臣, 以死官爲心, 將兵之臣, 以死綏爲意, 然後國事庶幾有望於萬一。 臣不勝區區, 妄陳愚見。"


  • 【태백산사고본】 24책 42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94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군사-전쟁(戰爭) / 군사-병참(兵站) / 군사-군역(軍役) / 외교-왜(倭) / 인사-임면(任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