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35권, 선조 26년 2월 24일 기유 1/9 기사 /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신경희가 권율의 행주 산성 대첩을 보고하자 인견하고 전투 상황을 상세히 묻다
국역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 권율(權慄)이 행주에서 왜적을 대파하고, 고산 현감(高山縣監) 신경희(申景禧)를 보내어 승첩(勝捷)을 아뢰었다. 상이 신경희에게 묻기를,
"적의 숫자는 얼마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3만에 불과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성산(城山)이란 곳은 지세가 싸움터로서 합당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일면은 강가이고, 삼면은 구릉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곳에 성이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먼저 녹각(鹿角)을 설치한 뒤에 토석성(土石城)을 쌓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은 기병이던가, 보병이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기병과 보병이 서로 섞였습니다. 11일에 정탐군을 보냈는데 무악재[母岳峴]에서 적을 만나 해를 당한 자가 8∼9명이나 됩니다. 그날 적 2개 진이 성산에 나와 진을 쳤는데 한 진의 수효는 거의 5∼6백 명에 이르렀습니다. 이튿날 적이 들판을 뒤덮으며 나왔는데 그 숫자를 알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위에서 무엇으로 방어했는가?"
하니, 경희가 아뢰기를,
"창이나 칼로 찌르기도 하고 돌을 던지기도 하였으며 혹은 화살을 난사하기도 했는데, 성중에서 와전(訛傳)되기를 ‘적이 이미 성 위에 올라 왔다.’고 하자 성중의 군졸이 장차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권율이 몸소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명령을 듣지 않는 자 몇 명을 베고 독전하기를 마지 않으니, 적군이 진격해 왔다 물러갔다 하기를 8∼9차례나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이 쏜 것 중에는 우리 나라 화살도 있었는가?"
하니, 경희가 아뢰기를,
"편전(片箭)에 맞은 자가 많았으니 적군 중에 필시 우리 나라 사람이 투입되어 전쟁을 돕는 것 같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여러 진의 장수들 중 구원하지 않은 자는 누구였는가?"
하니, 경희가 아뢰기를,
"양천(陽川) 건너 편에는 건의 부장(健義副將) 조대곤(曺大坤)이 있고, 심악(深嶽)에는 추의장(秋義將) 우성전(禹性傳)이 있었으나 모두 와서 구원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들의 형세가 와서 구원할 수 있었는가?"
하니, 경희가 아뢰기를,
"배를 타면 와서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하였다. 심희수(沈喜壽)가 아뢰기를,
"여러 장수들이 멀지 않은 곳에 있어 형세가 구원할 수 있었는데도 구원하지 않았으니 극히 통분합니다."
하고, 경희가 아뢰기를,
"그날 적이 물러갈 때에 마침 전라도 조운선 40여 척이 양천 포구를 뒤덮고 왔으니 그 성원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고, 심희수가 아뢰기를,
"대개 오늘의 일은 천행입니다. 여러 장수들이 서로 구원하지는 않았으나 역시 여러 장수들의 성세가 서로 의지되었기 때문에 중국군이 이미 물러갔는데도 적들은 그 유무를 알 수가 없으므로 이튿날 다시 오지 않은 것이니 이 또한 천행입니다. 전라도 군사가 비록 정예라고는 하지만 경계를 넘으면 힘써 싸우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특별히 죽기로써 싸웠으니, 이것은 반드시 장수가 독전한 공입니다."
하고, 경희가 아뢰기를,
"그날 묘시(卯時)로부터 신시(申時)에 이르도록 싸우느라 화살이 거의 떨어져 가는데 마침 충청 병사(忠淸兵使) 정걸(丁傑)이 화살을 운반해 와 위급을 구해주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의 용병(用兵)을 당할 만하던가?"
하니, 경희가 아뢰기를,
"이번의 전투에서는 적이 화살을 맞아 죽는 자가 줄을 잇는데도 오히려 진격만 하고 후퇴하지를 않았으니 이것이 감당하기 어려운 점이었습니다. 전투시에는 돌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데 그곳에서는 돌이 많았기 때문에 모든 군사들이 다투어 돌을 던져 싸움을 도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네가 거의 죽을 뻔했구나."
하니, 경희가 아뢰기를,
"권율이 직접 독전하며 진정시켰기 때문에 군사들은 모두 죽기로써 싸웠습니다. 장수가 먼저 동요했다면 군사들은 모두 물에 빠져 죽었을 것입니다. 또 남병에 우려할 만한 것이 있으니, 소모사(召募使) 변이중(邊以中)은 수레 만들기를 독촉, 백성들에게 소를 바치라고 다그치므로 백성들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민학(安敏學) 역시 소모한다고 하면서 오로지 자기 배 채우는 것만을 우선합니다. 김은휘(金殷輝)는 종사관으로서 군사를 징집할 때 형장(刑杖)을 남용하여 수령들은 조치를 그르치고 백성은 원망하는 자가 많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백성을 곤장치는 막대로 왜적을 때린다면 왜병 한 놈이라고 잡을 수 있을 것인데 일을 성공시키지는 못하고 한갓 폐단만을 끼치니 무슨 까닭인가?"
하니, 경희가 아뢰기를,
"이광(李洸)을 아직까지 죽이지 않았으니 혹시 후일 위급한 일이 있으면 기율이 엄하지 않아 어떻게 해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여기에서는 간혹 서용하자는 의논도 있으니 무슨 까닭인가?"
하니, 경희가 아뢰기를,
"광의 소행이 탐욕스럽고 더러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신이 들으니 대가(大駕)가 서천할 때에 2∼3천 병력으로 입경하여 호종하려 했으나 이광이 대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심대(沈岱)가 신에게 이르기를 ‘남방의 군사가 정예하고 강성하니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이광은 안된다. 윤두수(尹斗壽)가 전일 감사로 있을 때 그 직임을 잘 수행하였으니 만약 두수를 시킨다면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하고 행조(行朝)에 청하게 했으나 심대가 따르지 않았습니다. 또 부안 현감(扶安縣監) 김여회(金汝晦)가 먼저 도망치자 대군이 따라서 패했는데도 광은 그를 죄주지 않고 도리어 기생을 데리고 고부(古阜)에 있는 집에 가서 편안히 쉬었으니 필시 불측한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하고, 심희수가 아뢰기를,
"당초 이광을 잘못 등용했습니다. 이광이 호남의 정병을 가지고 용인(龍仁)에서 패한 뒤에 끝내 근왕(勤王)하지 않았으니 그 죄가 매우 중합니다. 그러나 그 위인이 본디 용렬해서 그런 것입니다. 불측한 마음을 가졌다고 한 경희의 말은 지나칩니다. 이점을 성명께서 참작하셔야 합니다. 유성룡(柳成龍)이 일찍이 이광은 책임자가 될 수 없다고 했는데 과연 그 말과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장검(內藏劎)을 권율에게 준 것은 명령을 어기는 자를 참하게 하려 한 것이다. 너는 돌아가거든 율에게 ‘군율을 어긴 자를 몇 사람이나 베었는가?’라고 내가 한 말로 말하라."
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군율에 해이하면서 사기를 진작시킬 수 없습니다. 이번 권율의 승첩은 실로 하늘이 도운 것으로 거의 전군이 함몰될 뻔하다가 끝내 대첩할 수 있었습니다. 구원하지 않는 여러 장수들은 마땅히 군율로써 처단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일 연안성(延安城)이 포위되었을 때 강화(江華)에 위급을 고하니 김천일(金千鎰)은 구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 군대에게 논상하려고 하였으니 이 무슨 도리인가?"
하니, 희수가 아뢰기를,
"군사를 거느리고 적에게 나아갔다면 경성 사람들의 기세가 오르고 적 또한 물리칠 수 있었는데 한 사람도 구원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권율이 이미 도순찰사(都巡察使)가 되었으니 병사 이하는 스스로 처단할 수가 있다."
하니, 희수가 아뢰기를,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군의 전사자는 묻어 두었는가?"
하니, 경희가 아뢰기를,
"거두어 장사지낼 사람이 있는 자는 거두어 장사지냈으나 없는 사람은 묻어 두고 나무를 꽂아 표를 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경희에게 묻기를,
"적은 도망갈 뜻이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경성에서 온 자들이 모두들 말하기를, ‘적들은 혹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있어도 형적을 드러내지는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적은 매우 교활하다."
하였다. 경희가 아뢰기를,
"김천일이 군사 3백 명을 거느리고 온 것을 사람들이 모두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고, 심희수가 아뢰기를,
"김천일이 다만 외로운 섬에 들어가서 일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당초 국가가 위태로운 중에 군사를 이끌고 멀리 왔으니 뜻만은 가상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의 뜻은 칭찬할 만하나 장수의 재능이 없다. 고경명(高敬命)은 적의 간첩에게 죽었다 하는데 그런가?"
하니, 경희가 아뢰기를,
"경명이 뜻은 강개하나 지모(智謀)가 모자랍니다. 금산(錦山)에는 싸울 만한 장수가 없는데 형세를 몰라서 끝내 패하고 말았습니다."
하였다. 신경희가 드디어 하직을 고하고 나갔다. 【이광은 여러 차례 총애를 받아 방백(方伯)으로 발탁되었는데 국가가 변란을 당하였어도 근왕(勤王)할 뜻이 없었으니 죄는 실로 용서받기 어렵다. 그러나 불측한 마음이 있다고 지목한 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김천일은 의병을 일으켜 천리 길을 달려 임전하였으니 그 뜻은 가상하다. 그러나 고도(孤島)에서 해를 넘기면서 적을 제압할 방책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재능을 어찌 일컬을 수 있겠는가?】
원문
○己酉/全羅道觀察使兼巡察使權慄, 大破倭賊於幸州, 使高山縣監申景禧奏捷。 上問申景禧曰: "賊數幾何?" 對曰: "不過三萬矣。" 上曰: "所謂城山, 其地勢合於戰場乎?" 對曰: "一面江濱, 三面丘陵也。" 上曰: "其處有城乎?" 對曰: "先設鹿角後, 築土石城矣。" 上曰: "賊騎兵乎? 步兵乎?" 對曰: "騎步相雜矣。 十一日遣人哨探于毋岳峴, 遇賊被害者八九人。 其日賊二陣, 出屯於城山, 一陣之數, 幾至五六百。 翌日, 賊蔽野出來, 不知其數。" 上曰: "城上, 以何物防禦乎?" 景禧曰: "或剌以槍劍, 或投以石, 或以弓矢亂射, 而城中或有訛言曰: ‘賊已攀登城上云。’ 城中軍卒, 將至潰散。 權慄親冒矢石, 斬不用令者數人, 督戰不已, 賊進退者八九次矣。" 上曰: "賊所射, 有我國箭乎?" 景禧曰: "多中片箭者, 賊中必有我國之人, 投入助戰也。" 上曰: "諸陣將不救者誰耶?" 景禧曰: "陽川越邊, 則有健義副將曹大坤, 深獄則有秋義將禹性傳, 而皆不來救矣。" 上曰: "其勢可以來救乎?" 景禧曰: "乘船, 則可來救也。" 沈喜壽曰: "諸將在不遠地, 其勢可救而不救, 極爲痛憤。" 景禧曰: "其日賊退時, 適有全羅道漕船四十餘隻, 蔽陽川浦口而來, 其爲聲援, 非偶然也。" 沈喜壽曰: "大槪今日之事, 天幸也。 諸將不相救, 而亦有諸將聲勢相倚, 故天兵已退, 而賊不能知其有無。 其翌日賊不復來, 此亦天幸也。 全羅兵雖曰精銳, 越境則不爲力戰, 而今則殊死戰, 此則必將帥督戰之功也。" 景禧曰: "其日自卯至申相戰, 矢幾垂盡, 而適忠淸兵使丁傑, 運箭以濟其急。" 上曰: "賊之用兵, 其可當乎?" 景禧曰: "今此之戰, 賊逢箭而死者, 相繼曳出, 而猶進不退, 此難當處也。 戰時, 用石最善, 其地多石, 故諸軍爭投以石, 以助戰。" 上曰: "汝幾乎死矣。" 景禧曰: "權慄親爲督戰鎭定, 故士皆殊死戰。 將若先動, 則軍皆溺死於水矣。 且南方有可憂者, 召募使邊以中, 督造車轝, 責民納牛, 民不堪苦。 安敏學亦稱召募, 專以自已供奉爲先。 金殷輝以從事官, 括軍之際, 濫用刑杖, 守令失措, 民多怨咨。" 上曰: "以杖民之杖, 杖倭, 則可捕一倭, 而不能濟事, 徒爲貽弊, 何耶?" 景禧曰: "李洸至今不誅, 脫有後日緩急, 紀律不嚴, 無可爲矣。" 上曰: "此處或有敍用之議, 何哉?" 景禧曰: "洸之素行貪汚, 不可勝言。 臣聞大駕西遷, 欲將二三千兵, 入京扈從, 而洸不答。 且沈岱謂臣曰: ‘南兵精强, 可以恢復。’ 臣答曰: ‘李洸則不可爲。 尹斗壽前爲監司, 善於其職, 若以斗壽爲之, 則庶乎其可矣。’ 使請於行朝, 而岱不從。 且扶安縣監金汝晦先爲遁去, 大軍仍敗, 而洸不之罪, 反自携妓偃息於古阜之家, 必有不測之心矣。" 沈喜壽曰: "當初過用李洸。 以湖南精兵之衆, 敗軍於龍仁之後, 終不能勤王, 其罪甚重。 然顧其爲人, 本自庸劣而然矣。 至有不測之心, 則景禧之言過矣。 此聖明所當斟酌。 柳成龍嘗以洸爲不可當事, 果若其言。" 上曰: "以內藏劍, 賜權慄者, 欲其斬違令者也。 爾歸問慄曰: ‘斬失律者幾人乎?’ 以予言言之。" 沈喜壽曰: "軍律解弛, 不能振肅。 今此權栗之捷, 天實助之, 幾陷全軍, 終能大捷。 其不救諸將, 當以軍律斷之。" 上曰: "前日延安圍城之時, 告急於江華, 則金千鎰不唯不救, 欲論賞其軍, 是何道也?" 喜壽曰: "領軍赴敵, 則京城之人, 必爲增氣, 賊亦可退, 而無一人救焉。" 上曰: "權慄旣爲都巡察使, 則兵使以下, 可以自斷矣。" 喜壽曰: "可爲也。" 上曰: "我軍戰死者, 埋置乎?" 景禧曰: "有收葬者則收葬, 無則埋置, 而植木以識之。" 上問景禧曰: "賊有遁去之意乎?" 對曰: "自京來者, 皆言賊雖或有欲去之意, 必不示其形迹。" 上曰: "賊甚狡黠。" 景禧曰: "金千鎰領兵三百而來, 人皆貴之。" 沈喜壽曰: "金千鎰, 只入孤島, 不能成事, 而當初板蕩之中, 領兵遠來, 志則可嘉。" 上曰: "此人, 其志可嘉, 而無將才。 高敬命, 因賊諜而死云, 然乎?" 景禧曰: "敬命志則慷慨, 而謀多脫踈, 錦山無戰場, 而不知形勢, 終至於敗。" 申景禧, 遂辭出。 【李洸屢被寵擢, 身爲方伯, 當國喪亂, 無意勤王, 罪固難貰。 指以不測, 恐非其情。 金千鎰倡義興師, 千里赴難, 志有可嘉。 經年孤島, 制敵無策, 才何足稱?】
선조 26년 (1593) 2월 24일
- 신경희가 권율의 행주 산성 대첩을 보고하자 인견하고 전투 상황을 상세히 묻다
- 권율이 접전할 때 구원하지 않은 장수를 조사하여 추고하라고 전교하다
- 비변사가 긴요하지 않은 관원을 덜어서 검약에 보탬이 되게 하라고 청하다
- 심희수가 홍세공으로 하여금 북도의 안무를 맡기자는 비변사의 의견을 아뢰다
- 구름이 끼어 객성을 소재를 알 수 없었고 안개도 끼다
- 평양 수복 후에 여러 장수가 경성으로 모인 일과 행주 산성의 대첩에 대한 기록
- 호조가 이 제독과 3대장 등에게 봄옷감을 나누어주는 일을 아뢰다
- 도체찰사 심수경이 운신할 수 없다며 해직을 청하다
- 함경북도 평사 정문부가 왜적을 소탕한 일을 치계하다
선조실록35권, 선조 26년 2월 24일 기유 1/9 기사 /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신경희가 권율의 행주 산성 대첩을 보고하자 인견하고 전투 상황을 상세히 묻다
국역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 권율(權慄)이 행주에서 왜적을 대파하고, 고산 현감(高山縣監) 신경희(申景禧)를 보내어 승첩(勝捷)을 아뢰었다. 상이 신경희에게 묻기를,
"적의 숫자는 얼마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3만에 불과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성산(城山)이란 곳은 지세가 싸움터로서 합당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일면은 강가이고, 삼면은 구릉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곳에 성이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먼저 녹각(鹿角)을 설치한 뒤에 토석성(土石城)을 쌓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은 기병이던가, 보병이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기병과 보병이 서로 섞였습니다. 11일에 정탐군을 보냈는데 무악재[母岳峴]에서 적을 만나 해를 당한 자가 8∼9명이나 됩니다. 그날 적 2개 진이 성산에 나와 진을 쳤는데 한 진의 수효는 거의 5∼6백 명에 이르렀습니다. 이튿날 적이 들판을 뒤덮으며 나왔는데 그 숫자를 알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위에서 무엇으로 방어했는가?"
하니, 경희가 아뢰기를,
"창이나 칼로 찌르기도 하고 돌을 던지기도 하였으며 혹은 화살을 난사하기도 했는데, 성중에서 와전(訛傳)되기를 ‘적이 이미 성 위에 올라 왔다.’고 하자 성중의 군졸이 장차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권율이 몸소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명령을 듣지 않는 자 몇 명을 베고 독전하기를 마지 않으니, 적군이 진격해 왔다 물러갔다 하기를 8∼9차례나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이 쏜 것 중에는 우리 나라 화살도 있었는가?"
하니, 경희가 아뢰기를,
"편전(片箭)에 맞은 자가 많았으니 적군 중에 필시 우리 나라 사람이 투입되어 전쟁을 돕는 것 같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여러 진의 장수들 중 구원하지 않은 자는 누구였는가?"
하니, 경희가 아뢰기를,
"양천(陽川) 건너 편에는 건의 부장(健義副將) 조대곤(曺大坤)이 있고, 심악(深嶽)에는 추의장(秋義將) 우성전(禹性傳)이 있었으나 모두 와서 구원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들의 형세가 와서 구원할 수 있었는가?"
하니, 경희가 아뢰기를,
"배를 타면 와서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하였다. 심희수(沈喜壽)가 아뢰기를,
"여러 장수들이 멀지 않은 곳에 있어 형세가 구원할 수 있었는데도 구원하지 않았으니 극히 통분합니다."
하고, 경희가 아뢰기를,
"그날 적이 물러갈 때에 마침 전라도 조운선 40여 척이 양천 포구를 뒤덮고 왔으니 그 성원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고, 심희수가 아뢰기를,
"대개 오늘의 일은 천행입니다. 여러 장수들이 서로 구원하지는 않았으나 역시 여러 장수들의 성세가 서로 의지되었기 때문에 중국군이 이미 물러갔는데도 적들은 그 유무를 알 수가 없으므로 이튿날 다시 오지 않은 것이니 이 또한 천행입니다. 전라도 군사가 비록 정예라고는 하지만 경계를 넘으면 힘써 싸우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특별히 죽기로써 싸웠으니, 이것은 반드시 장수가 독전한 공입니다."
하고, 경희가 아뢰기를,
"그날 묘시(卯時)로부터 신시(申時)에 이르도록 싸우느라 화살이 거의 떨어져 가는데 마침 충청 병사(忠淸兵使) 정걸(丁傑)이 화살을 운반해 와 위급을 구해주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의 용병(用兵)을 당할 만하던가?"
하니, 경희가 아뢰기를,
"이번의 전투에서는 적이 화살을 맞아 죽는 자가 줄을 잇는데도 오히려 진격만 하고 후퇴하지를 않았으니 이것이 감당하기 어려운 점이었습니다. 전투시에는 돌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데 그곳에서는 돌이 많았기 때문에 모든 군사들이 다투어 돌을 던져 싸움을 도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네가 거의 죽을 뻔했구나."
하니, 경희가 아뢰기를,
"권율이 직접 독전하며 진정시켰기 때문에 군사들은 모두 죽기로써 싸웠습니다. 장수가 먼저 동요했다면 군사들은 모두 물에 빠져 죽었을 것입니다. 또 남병에 우려할 만한 것이 있으니, 소모사(召募使) 변이중(邊以中)은 수레 만들기를 독촉, 백성들에게 소를 바치라고 다그치므로 백성들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민학(安敏學) 역시 소모한다고 하면서 오로지 자기 배 채우는 것만을 우선합니다. 김은휘(金殷輝)는 종사관으로서 군사를 징집할 때 형장(刑杖)을 남용하여 수령들은 조치를 그르치고 백성은 원망하는 자가 많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백성을 곤장치는 막대로 왜적을 때린다면 왜병 한 놈이라고 잡을 수 있을 것인데 일을 성공시키지는 못하고 한갓 폐단만을 끼치니 무슨 까닭인가?"
하니, 경희가 아뢰기를,
"이광(李洸)을 아직까지 죽이지 않았으니 혹시 후일 위급한 일이 있으면 기율이 엄하지 않아 어떻게 해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여기에서는 간혹 서용하자는 의논도 있으니 무슨 까닭인가?"
하니, 경희가 아뢰기를,
"광의 소행이 탐욕스럽고 더러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신이 들으니 대가(大駕)가 서천할 때에 2∼3천 병력으로 입경하여 호종하려 했으나 이광이 대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심대(沈岱)가 신에게 이르기를 ‘남방의 군사가 정예하고 강성하니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이광은 안된다. 윤두수(尹斗壽)가 전일 감사로 있을 때 그 직임을 잘 수행하였으니 만약 두수를 시킨다면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하고 행조(行朝)에 청하게 했으나 심대가 따르지 않았습니다. 또 부안 현감(扶安縣監) 김여회(金汝晦)가 먼저 도망치자 대군이 따라서 패했는데도 광은 그를 죄주지 않고 도리어 기생을 데리고 고부(古阜)에 있는 집에 가서 편안히 쉬었으니 필시 불측한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하고, 심희수가 아뢰기를,
"당초 이광을 잘못 등용했습니다. 이광이 호남의 정병을 가지고 용인(龍仁)에서 패한 뒤에 끝내 근왕(勤王)하지 않았으니 그 죄가 매우 중합니다. 그러나 그 위인이 본디 용렬해서 그런 것입니다. 불측한 마음을 가졌다고 한 경희의 말은 지나칩니다. 이점을 성명께서 참작하셔야 합니다. 유성룡(柳成龍)이 일찍이 이광은 책임자가 될 수 없다고 했는데 과연 그 말과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장검(內藏劎)을 권율에게 준 것은 명령을 어기는 자를 참하게 하려 한 것이다. 너는 돌아가거든 율에게 ‘군율을 어긴 자를 몇 사람이나 베었는가?’라고 내가 한 말로 말하라."
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군율에 해이하면서 사기를 진작시킬 수 없습니다. 이번 권율의 승첩은 실로 하늘이 도운 것으로 거의 전군이 함몰될 뻔하다가 끝내 대첩할 수 있었습니다. 구원하지 않는 여러 장수들은 마땅히 군율로써 처단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일 연안성(延安城)이 포위되었을 때 강화(江華)에 위급을 고하니 김천일(金千鎰)은 구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 군대에게 논상하려고 하였으니 이 무슨 도리인가?"
하니, 희수가 아뢰기를,
"군사를 거느리고 적에게 나아갔다면 경성 사람들의 기세가 오르고 적 또한 물리칠 수 있었는데 한 사람도 구원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권율이 이미 도순찰사(都巡察使)가 되었으니 병사 이하는 스스로 처단할 수가 있다."
하니, 희수가 아뢰기를,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군의 전사자는 묻어 두었는가?"
하니, 경희가 아뢰기를,
"거두어 장사지낼 사람이 있는 자는 거두어 장사지냈으나 없는 사람은 묻어 두고 나무를 꽂아 표를 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경희에게 묻기를,
"적은 도망갈 뜻이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경성에서 온 자들이 모두들 말하기를, ‘적들은 혹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있어도 형적을 드러내지는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적은 매우 교활하다."
하였다. 경희가 아뢰기를,
"김천일이 군사 3백 명을 거느리고 온 것을 사람들이 모두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고, 심희수가 아뢰기를,
"김천일이 다만 외로운 섬에 들어가서 일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당초 국가가 위태로운 중에 군사를 이끌고 멀리 왔으니 뜻만은 가상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의 뜻은 칭찬할 만하나 장수의 재능이 없다. 고경명(高敬命)은 적의 간첩에게 죽었다 하는데 그런가?"
하니, 경희가 아뢰기를,
"경명이 뜻은 강개하나 지모(智謀)가 모자랍니다. 금산(錦山)에는 싸울 만한 장수가 없는데 형세를 몰라서 끝내 패하고 말았습니다."
하였다. 신경희가 드디어 하직을 고하고 나갔다. 【이광은 여러 차례 총애를 받아 방백(方伯)으로 발탁되었는데 국가가 변란을 당하였어도 근왕(勤王)할 뜻이 없었으니 죄는 실로 용서받기 어렵다. 그러나 불측한 마음이 있다고 지목한 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김천일은 의병을 일으켜 천리 길을 달려 임전하였으니 그 뜻은 가상하다. 그러나 고도(孤島)에서 해를 넘기면서 적을 제압할 방책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재능을 어찌 일컬을 수 있겠는가?】
원문
○己酉/全羅道觀察使兼巡察使權慄, 大破倭賊於幸州, 使高山縣監申景禧奏捷。 上問申景禧曰: "賊數幾何?" 對曰: "不過三萬矣。" 上曰: "所謂城山, 其地勢合於戰場乎?" 對曰: "一面江濱, 三面丘陵也。" 上曰: "其處有城乎?" 對曰: "先設鹿角後, 築土石城矣。" 上曰: "賊騎兵乎? 步兵乎?" 對曰: "騎步相雜矣。 十一日遣人哨探于毋岳峴, 遇賊被害者八九人。 其日賊二陣, 出屯於城山, 一陣之數, 幾至五六百。 翌日, 賊蔽野出來, 不知其數。" 上曰: "城上, 以何物防禦乎?" 景禧曰: "或剌以槍劍, 或投以石, 或以弓矢亂射, 而城中或有訛言曰: ‘賊已攀登城上云。’ 城中軍卒, 將至潰散。 權慄親冒矢石, 斬不用令者數人, 督戰不已, 賊進退者八九次矣。" 上曰: "賊所射, 有我國箭乎?" 景禧曰: "多中片箭者, 賊中必有我國之人, 投入助戰也。" 上曰: "諸陣將不救者誰耶?" 景禧曰: "陽川越邊, 則有健義副將曹大坤, 深獄則有秋義將禹性傳, 而皆不來救矣。" 上曰: "其勢可以來救乎?" 景禧曰: "乘船, 則可來救也。" 沈喜壽曰: "諸將在不遠地, 其勢可救而不救, 極爲痛憤。" 景禧曰: "其日賊退時, 適有全羅道漕船四十餘隻, 蔽陽川浦口而來, 其爲聲援, 非偶然也。" 沈喜壽曰: "大槪今日之事, 天幸也。 諸將不相救, 而亦有諸將聲勢相倚, 故天兵已退, 而賊不能知其有無。 其翌日賊不復來, 此亦天幸也。 全羅兵雖曰精銳, 越境則不爲力戰, 而今則殊死戰, 此則必將帥督戰之功也。" 景禧曰: "其日自卯至申相戰, 矢幾垂盡, 而適忠淸兵使丁傑, 運箭以濟其急。" 上曰: "賊之用兵, 其可當乎?" 景禧曰: "今此之戰, 賊逢箭而死者, 相繼曳出, 而猶進不退, 此難當處也。 戰時, 用石最善, 其地多石, 故諸軍爭投以石, 以助戰。" 上曰: "汝幾乎死矣。" 景禧曰: "權慄親爲督戰鎭定, 故士皆殊死戰。 將若先動, 則軍皆溺死於水矣。 且南方有可憂者, 召募使邊以中, 督造車轝, 責民納牛, 民不堪苦。 安敏學亦稱召募, 專以自已供奉爲先。 金殷輝以從事官, 括軍之際, 濫用刑杖, 守令失措, 民多怨咨。" 上曰: "以杖民之杖, 杖倭, 則可捕一倭, 而不能濟事, 徒爲貽弊, 何耶?" 景禧曰: "李洸至今不誅, 脫有後日緩急, 紀律不嚴, 無可爲矣。" 上曰: "此處或有敍用之議, 何哉?" 景禧曰: "洸之素行貪汚, 不可勝言。 臣聞大駕西遷, 欲將二三千兵, 入京扈從, 而洸不答。 且沈岱謂臣曰: ‘南兵精强, 可以恢復。’ 臣答曰: ‘李洸則不可爲。 尹斗壽前爲監司, 善於其職, 若以斗壽爲之, 則庶乎其可矣。’ 使請於行朝, 而岱不從。 且扶安縣監金汝晦先爲遁去, 大軍仍敗, 而洸不之罪, 反自携妓偃息於古阜之家, 必有不測之心矣。" 沈喜壽曰: "當初過用李洸。 以湖南精兵之衆, 敗軍於龍仁之後, 終不能勤王, 其罪甚重。 然顧其爲人, 本自庸劣而然矣。 至有不測之心, 則景禧之言過矣。 此聖明所當斟酌。 柳成龍嘗以洸爲不可當事, 果若其言。" 上曰: "以內藏劍, 賜權慄者, 欲其斬違令者也。 爾歸問慄曰: ‘斬失律者幾人乎?’ 以予言言之。" 沈喜壽曰: "軍律解弛, 不能振肅。 今此權栗之捷, 天實助之, 幾陷全軍, 終能大捷。 其不救諸將, 當以軍律斷之。" 上曰: "前日延安圍城之時, 告急於江華, 則金千鎰不唯不救, 欲論賞其軍, 是何道也?" 喜壽曰: "領軍赴敵, 則京城之人, 必爲增氣, 賊亦可退, 而無一人救焉。" 上曰: "權慄旣爲都巡察使, 則兵使以下, 可以自斷矣。" 喜壽曰: "可爲也。" 上曰: "我軍戰死者, 埋置乎?" 景禧曰: "有收葬者則收葬, 無則埋置, 而植木以識之。" 上問景禧曰: "賊有遁去之意乎?" 對曰: "自京來者, 皆言賊雖或有欲去之意, 必不示其形迹。" 上曰: "賊甚狡黠。" 景禧曰: "金千鎰領兵三百而來, 人皆貴之。" 沈喜壽曰: "金千鎰, 只入孤島, 不能成事, 而當初板蕩之中, 領兵遠來, 志則可嘉。" 上曰: "此人, 其志可嘉, 而無將才。 高敬命, 因賊諜而死云, 然乎?" 景禧曰: "敬命志則慷慨, 而謀多脫踈, 錦山無戰場, 而不知形勢, 終至於敗。" 申景禧, 遂辭出。 【李洸屢被寵擢, 身爲方伯, 當國喪亂, 無意勤王, 罪固難貰。 指以不測, 恐非其情。 金千鎰倡義興師, 千里赴難, 志有可嘉。 經年孤島, 制敵無策, 才何足稱?】
원본
선조 26년 (1593) 2월 24일
- 신경희가 권율의 행주 산성 대첩을 보고하자 인견하고 전투 상황을 상세히 묻다
- 권율이 접전할 때 구원하지 않은 장수를 조사하여 추고하라고 전교하다
- 비변사가 긴요하지 않은 관원을 덜어서 검약에 보탬이 되게 하라고 청하다
- 심희수가 홍세공으로 하여금 북도의 안무를 맡기자는 비변사의 의견을 아뢰다
- 구름이 끼어 객성을 소재를 알 수 없었고 안개도 끼다
- 평양 수복 후에 여러 장수가 경성으로 모인 일과 행주 산성의 대첩에 대한 기록
- 호조가 이 제독과 3대장 등에게 봄옷감을 나누어주는 일을 아뢰다
- 도체찰사 심수경이 운신할 수 없다며 해직을 청하다
- 함경북도 평사 정문부가 왜적을 소탕한 일을 치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