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실록1권, 인종 1년 1월 5일 기해 2/4 기사 / 1545년 명 가정(嘉靖) 24년
우의정 윤인경 등이 의논하여 시호를 정하다
국역
우의정 윤인경(尹仁鏡), 좌찬성 이기(李芑), 우찬성 성세창(成世昌), 이조 판서 신광한(申光漢), 호조 판서 임백령(林百齡), 예조 판서 임권(任權), 병조 판서 정옥형(丁玉亨), 공조 판서 유인숙(柳仁淑), 호조 참판 심연원(沈連源), 예조 참판 정만종(鄭萬鍾), 병조 참판 신영(申瑛), 형조 참판 윤개(尹漑), 공조 참판 강현(姜顯), 동지중추부사 정순붕(鄭順朋)이 명을 받고 예궐(詣闕)하였다. 윤인경이 아뢰기를,
"의시(議諡)하는 일 때문에 신들이 모두 와서 모였습니다마는 좌의정 홍언필(洪彦弼)이 병으로 오지 않았는데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내 생각에는 의시는 나라의 큰일이므로 복상(卜相)023) 하여 삼공(三公)을 갖춘 뒤에 의논하여 정하려 하였으나 그렇게 하면 일이 점점 늦어지겠으므로 경들을 시켜 오늘 모여서 의논하게 한 것이다. 좌의정은 병이 있어서 오지 않았더라도 조정(朝廷)이 이제 다 모였으니 경은 의논하라."
하였다. 그래서 함께 의논하여 시호(諡號)를 휘문 소무 흠인 성효(徽文昭武欽仁誠孝)로, 묘호(廟號)를 중종(中宗)으로, 능호(陵號)를 희(禧)로, 전호(殿號)를 영경(永慶)으로 정하고, 윤인경 등이 아뢰기를,
"폐조(廢朝)024) 의 혼란하던 때를 당하여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종사(宗社)025) 가 거의 위태롭게 되었을 적에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중흥하여 종사를 다시 편안하게 하였으므로 중종으로 하였으며, 능호는 조종(祖宗) 때에도 그대로 썼으므로 고치지 않았습니다."026)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의시할 때에 윤인경이 ‘좌의정 홍언필과 의논하였더니 인(仁)자를 쓰려고 했다.’ 하니, 성세창이 ‘인자도 마땅할 듯하나 종사를 다시 편안하게 하였으니 효(孝)자를 쓰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하고, 정순붕·신광한·임권은 ‘폐주(廢主)가 혼란하여 국가가 거의 망하여 장차 역성(易姓)의 화(禍)027) 가 있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들어와서 대통(大統)을 이어 종사가 다시 편안하게 하였으니, 강(康)자를 써야 마땅하다.’ 하고, 성세창은 ‘성왕(成王) 뒤에 강왕(康王)028) 이 있었는데 대행 대왕께서도 세대를 이은 임금이시므로 강(康)자는 마땅할 듯하나 인(仁)자로 말하면 미안할 듯하다. 전에 들으니 성종(成宗)의 의시 때에도 인자를 쓰려 하였으나 당시의 의논이 지나친 듯하다 하여 마침내 쓰지 않았다 한다.’ 하고, 신광한은 ‘한 선제(漢宣帝)가 창읍왕(昌邑王)029) 을 폐출(廢黜)하고 들어가 대통을 이은 것을 당시에 증흥이라 일컬었는데 이번 대행 대왕의 사적(事迹)도 선제와 비슷하니 이제 먼저 중흥인지의 여부를 정하고 나서 의시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이리하여 의논이 마침내 정해진 것이다.
- [註 023] 복상(卜相) : 세 의정(議政) 중에 빈 자리가 있을 경우 그 자리를 맡을 사람을 간택하는 것.
- [註 024] 폐조(廢朝) : 연산군 때를 가리킴.
- [註 025] 종사(宗社) :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으로 종묘는 임금의 조종(祖宗)을 모신 사당이고 사직은 토지(土地)·오곡(五穀)의 신(神)에게 제사하는 단(壇)이다. 나라가 있어야 종사가 이어지고 망하면 끊어지므로 종사를 국가의 뜻으로 쓴다. 왕성(王城)에는 동쪽에 종묘를 두고 서쪽에 사직을 두어 임금이 제주(祭主)가 된다. 조선의 종묘는 태조 3년(1394)에 한성부(漢城府) 동부(東部) 연화방(連花坊)에 터를 잡아 이듬해에 준공하였고 처음에는 계성전(啓聖殿)이라 불렀다. 사직단은 서부(西部) 인달방(仁達坊)에 종묘와 같은 해에 터잡고 준공하였는데, 그 위치는 현존하는 것과 같다.
- [註 026] 능호는 조종(祖宗) 때에도 그대로 썼으므로 고치지 않았습니다." : 능호를 고치지 않았다 함은 장경 왕후(章敬王后:중종의 첫 계비 윤씨로 인종의 생모)의 능호인 희릉(禧陵)을 그대로 쓰기로 하고 개정(改正)하는 의논을 하지 않았다는 뜻.
- [註 027] 역성(易姓)의 화(禍) : 조대(朝代)가 바뀌는 화. 대대로 나라를 다스려 온 왕실이 망하고 다른 왕실이 들어서는 것.
- [註 028] 성왕(成王) 뒤에 강왕(康王) : 성왕은 중국 주(周)나라의 제2세 임금. 제1세 무왕(武王)의 아들로서 어려서 즉위하여 숙부인 주공(周公)의 도움을 받아 관숙(管叔)·채숙(蔡叔)과 무경(武庚)의 난을 평정하고 예악(禮樂)을 일으키고 제도(制度)를 세웠다. 강왕은 주나라 제 3세 임금. 문왕(文王)과 무왕의 사업을 이어 나라 안을 잘 다스리고 형벌을 쓰지 않아서 요순(堯舜)의 풍토가 있었다.
- [註 029] 창읍왕(昌邑王) : 한 무제(漢武帝)의 여섯째 아들인 유박(劉髆)의 아들 하(賀)의 봉호(封號)임. 무제의 뒤를 이은 소제(昭帝)에게 후사(後嗣)가 없자 대사마(大司馬) 곽광(霍光)이 창읍왕을 맞아들여 즉위하게 하였으나, 음란하기 이를 데 없었으므로 곽광이 태후(太后)에게 아뢰어 폐위하고 무제의 태자 거(據)의 손자인 병기(病己:뒤의 선제(宣帝)임)를 영립(迎立)하였다.
원문
○右議政尹仁鏡、左贊成李芑、右贊成成世昌、吏曹判書申光漢、戶曹判書林百齡、禮曹判書任權、兵曹判書丁玉亨、工曹判書柳仁淑、戶曹參判沈連源、禮曹參判鄭萬鍾、兵曹參判申瑛、刑曹參判尹漑、工曹參判姜顯、同知中樞府事鄭順朋, 承命詣闕。 仁鏡啓曰: "以議諡事, 臣等皆已來會。 但左議政洪彦弼, 以病不來, 何以爲之?" 答曰: "予意以爲議諡, 國之大事, 故欲卜相備三公後議定。 而如此則事漸稽緩, 故令卿等今日會議耳。 左議政雖有病不來, 朝廷今皆已會, 卿其議之。" 於是僉議而定諡號曰, 徽文昭武欽仁誠孝, 廟號曰中宗, 陵號曰禧, 殿號曰永慶。 仁鏡等啓曰: "當廢朝昏亂之時, 而生民塗炭, 宗社幾危, 大行大王中興, 而使宗社再安, 故曰中宗, 陵號則在祖宗朝, 亦爲仍用, 故不改焉。" 傳曰: "知道。"
【史臣曰: "當議諡時, 尹仁鏡曰: ‘與左議政洪彦弼嘗議之, 欲用仁字。’ 云, 成世昌曰: ‘仁字亦似爲當, 然使宗社再安, 用孝字似當。’ 鄭順朋、申光漢、任權曰: ‘廢主昏亂, 國家垂亡, 將有易姓之禍, 而入繼大統, 使宗社得爲再安, 宜用康字。’ 成世昌曰: ‘成王之後有康王, 大行大王亦繼世之君, 康字亦似宜當, 至於仁字, 似未安。 嘗聞成宗議諡時, 亦欲用仁字, 而時議以爲似過, 遂不用也。’ 光漢曰: ‘漢 宣帝廢昌邑王, 入承大統, 當時稱爲中興, 今此大行大王事迹, 與宣帝似同, 今當先定中興與否而後, 議諡可也。’ 於是議遂定。"】
인종실록1권, 인종 1년 1월 5일 기해 2/4 기사 / 1545년 명 가정(嘉靖) 24년
우의정 윤인경 등이 의논하여 시호를 정하다
국역
우의정 윤인경(尹仁鏡), 좌찬성 이기(李芑), 우찬성 성세창(成世昌), 이조 판서 신광한(申光漢), 호조 판서 임백령(林百齡), 예조 판서 임권(任權), 병조 판서 정옥형(丁玉亨), 공조 판서 유인숙(柳仁淑), 호조 참판 심연원(沈連源), 예조 참판 정만종(鄭萬鍾), 병조 참판 신영(申瑛), 형조 참판 윤개(尹漑), 공조 참판 강현(姜顯), 동지중추부사 정순붕(鄭順朋)이 명을 받고 예궐(詣闕)하였다. 윤인경이 아뢰기를,
"의시(議諡)하는 일 때문에 신들이 모두 와서 모였습니다마는 좌의정 홍언필(洪彦弼)이 병으로 오지 않았는데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내 생각에는 의시는 나라의 큰일이므로 복상(卜相)023) 하여 삼공(三公)을 갖춘 뒤에 의논하여 정하려 하였으나 그렇게 하면 일이 점점 늦어지겠으므로 경들을 시켜 오늘 모여서 의논하게 한 것이다. 좌의정은 병이 있어서 오지 않았더라도 조정(朝廷)이 이제 다 모였으니 경은 의논하라."
하였다. 그래서 함께 의논하여 시호(諡號)를 휘문 소무 흠인 성효(徽文昭武欽仁誠孝)로, 묘호(廟號)를 중종(中宗)으로, 능호(陵號)를 희(禧)로, 전호(殿號)를 영경(永慶)으로 정하고, 윤인경 등이 아뢰기를,
"폐조(廢朝)024) 의 혼란하던 때를 당하여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종사(宗社)025) 가 거의 위태롭게 되었을 적에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중흥하여 종사를 다시 편안하게 하였으므로 중종으로 하였으며, 능호는 조종(祖宗) 때에도 그대로 썼으므로 고치지 않았습니다."026)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의시할 때에 윤인경이 ‘좌의정 홍언필과 의논하였더니 인(仁)자를 쓰려고 했다.’ 하니, 성세창이 ‘인자도 마땅할 듯하나 종사를 다시 편안하게 하였으니 효(孝)자를 쓰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하고, 정순붕·신광한·임권은 ‘폐주(廢主)가 혼란하여 국가가 거의 망하여 장차 역성(易姓)의 화(禍)027) 가 있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들어와서 대통(大統)을 이어 종사가 다시 편안하게 하였으니, 강(康)자를 써야 마땅하다.’ 하고, 성세창은 ‘성왕(成王) 뒤에 강왕(康王)028) 이 있었는데 대행 대왕께서도 세대를 이은 임금이시므로 강(康)자는 마땅할 듯하나 인(仁)자로 말하면 미안할 듯하다. 전에 들으니 성종(成宗)의 의시 때에도 인자를 쓰려 하였으나 당시의 의논이 지나친 듯하다 하여 마침내 쓰지 않았다 한다.’ 하고, 신광한은 ‘한 선제(漢宣帝)가 창읍왕(昌邑王)029) 을 폐출(廢黜)하고 들어가 대통을 이은 것을 당시에 증흥이라 일컬었는데 이번 대행 대왕의 사적(事迹)도 선제와 비슷하니 이제 먼저 중흥인지의 여부를 정하고 나서 의시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이리하여 의논이 마침내 정해진 것이다.
- [註 023] 복상(卜相) : 세 의정(議政) 중에 빈 자리가 있을 경우 그 자리를 맡을 사람을 간택하는 것.
- [註 024] 폐조(廢朝) : 연산군 때를 가리킴.
- [註 025] 종사(宗社) :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으로 종묘는 임금의 조종(祖宗)을 모신 사당이고 사직은 토지(土地)·오곡(五穀)의 신(神)에게 제사하는 단(壇)이다. 나라가 있어야 종사가 이어지고 망하면 끊어지므로 종사를 국가의 뜻으로 쓴다. 왕성(王城)에는 동쪽에 종묘를 두고 서쪽에 사직을 두어 임금이 제주(祭主)가 된다. 조선의 종묘는 태조 3년(1394)에 한성부(漢城府) 동부(東部) 연화방(連花坊)에 터를 잡아 이듬해에 준공하였고 처음에는 계성전(啓聖殿)이라 불렀다. 사직단은 서부(西部) 인달방(仁達坊)에 종묘와 같은 해에 터잡고 준공하였는데, 그 위치는 현존하는 것과 같다.
- [註 026] 능호는 조종(祖宗) 때에도 그대로 썼으므로 고치지 않았습니다." : 능호를 고치지 않았다 함은 장경 왕후(章敬王后:중종의 첫 계비 윤씨로 인종의 생모)의 능호인 희릉(禧陵)을 그대로 쓰기로 하고 개정(改正)하는 의논을 하지 않았다는 뜻.
- [註 027] 역성(易姓)의 화(禍) : 조대(朝代)가 바뀌는 화. 대대로 나라를 다스려 온 왕실이 망하고 다른 왕실이 들어서는 것.
- [註 028] 성왕(成王) 뒤에 강왕(康王) : 성왕은 중국 주(周)나라의 제2세 임금. 제1세 무왕(武王)의 아들로서 어려서 즉위하여 숙부인 주공(周公)의 도움을 받아 관숙(管叔)·채숙(蔡叔)과 무경(武庚)의 난을 평정하고 예악(禮樂)을 일으키고 제도(制度)를 세웠다. 강왕은 주나라 제 3세 임금. 문왕(文王)과 무왕의 사업을 이어 나라 안을 잘 다스리고 형벌을 쓰지 않아서 요순(堯舜)의 풍토가 있었다.
- [註 029] 창읍왕(昌邑王) : 한 무제(漢武帝)의 여섯째 아들인 유박(劉髆)의 아들 하(賀)의 봉호(封號)임. 무제의 뒤를 이은 소제(昭帝)에게 후사(後嗣)가 없자 대사마(大司馬) 곽광(霍光)이 창읍왕을 맞아들여 즉위하게 하였으나, 음란하기 이를 데 없었으므로 곽광이 태후(太后)에게 아뢰어 폐위하고 무제의 태자 거(據)의 손자인 병기(病己:뒤의 선제(宣帝)임)를 영립(迎立)하였다.
원문
○右議政尹仁鏡、左贊成李芑、右贊成成世昌、吏曹判書申光漢、戶曹判書林百齡、禮曹判書任權、兵曹判書丁玉亨、工曹判書柳仁淑、戶曹參判沈連源、禮曹參判鄭萬鍾、兵曹參判申瑛、刑曹參判尹漑、工曹參判姜顯、同知中樞府事鄭順朋, 承命詣闕。 仁鏡啓曰: "以議諡事, 臣等皆已來會。 但左議政洪彦弼, 以病不來, 何以爲之?" 答曰: "予意以爲議諡, 國之大事, 故欲卜相備三公後議定。 而如此則事漸稽緩, 故令卿等今日會議耳。 左議政雖有病不來, 朝廷今皆已會, 卿其議之。" 於是僉議而定諡號曰, 徽文昭武欽仁誠孝, 廟號曰中宗, 陵號曰禧, 殿號曰永慶。 仁鏡等啓曰: "當廢朝昏亂之時, 而生民塗炭, 宗社幾危, 大行大王中興, 而使宗社再安, 故曰中宗, 陵號則在祖宗朝, 亦爲仍用, 故不改焉。" 傳曰: "知道。"
【史臣曰: "當議諡時, 尹仁鏡曰: ‘與左議政洪彦弼嘗議之, 欲用仁字。’ 云, 成世昌曰: ‘仁字亦似爲當, 然使宗社再安, 用孝字似當。’ 鄭順朋、申光漢、任權曰: ‘廢主昏亂, 國家垂亡, 將有易姓之禍, 而入繼大統, 使宗社得爲再安, 宜用康字。’ 成世昌曰: ‘成王之後有康王, 大行大王亦繼世之君, 康字亦似宜當, 至於仁字, 似未安。 嘗聞成宗議諡時, 亦欲用仁字, 而時議以爲似過, 遂不用也。’ 光漢曰: ‘漢 宣帝廢昌邑王, 入承大統, 當時稱爲中興, 今此大行大王事迹, 與宣帝似同, 今當先定中興與否而後, 議諡可也。’ 於是議遂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