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실록24권, 중종 11년 3월 8일 기축 1/7 기사 / 1516년 명 정덕(正德) 11년
박세희·기준 등이 언로를 위해 박상 등을 용서해 줄 것 등을 청하다
국역
조강에 나아갔다. 장령 홍언필·정언 박세희가 전의 일을 아뢰고, 시강관 김굉은 기신재 및 장리의 일을 혁파할 것을 청하고, 참찬관 윤은보·지사 신용개·전경 기준 등도 기신재 혁파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박세희가 아뢰기를,
"김정·박상 등의 일을 대간이 용서하기를 청하였으되 중지한 것은, 생각건대 상께서 반드시 짐작해서 그리한 것입니다. 국가가 중히 여기는 것은 언로(言路)입니다.박원종(朴元宗) 등이 신씨(愼氏)를 폐한 일은 마땅히 만세(萬世)의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거니와, 장경 왕후(章敬王后)는 온 나라 신민(臣民)이 추앙(推仰)하는 바인데 박상 등이 어찌 감히 장경왕후는 가볍게 여기고 신씨는 중하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다만 초년에 신씨를 폐한 일은 잘못이었다고 한 것이니, 박상 등의 말에 어찌 정실이 있겠습니까? 빨리 소방(疏放)하여 언로를 열으소서."
하고, 홍언필은 아뢰기를,
"이 말이 지당합니다. 박상 등의 말을 받아들일 수는 없으나 그 사람이 죄를 받으면 언로에 방해가 됩니다."
하고, 기준은 아뢰기를,
"원컨대 속히 사면하여 인심(人心)을 쾌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서둘러 방면할 필요는 없다."
하매, 김굉도 청하였다. 기준이 아뢰기를,
"당초에 대간이 죄를 청하였으므로, 그 시비(是非)가 정해지지 못하였는데, 상의 뜻이 만약 시비를 정하였다면 반드시 시끄러운 폐단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 상이박상 등의 상소(上疏)를 정원에 머물러 두고서 거행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대간이 죄를 청한 것이니 속히 용서하소서."
하고, 박세희는 아뢰기를,
"근래에 시비가 시끄러우니 이는 국가의 큰일입니다. 시비가 이와 같이 뒤바뀌면 끝내는 사대부의 화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지금은 상의 춘추(春秋)가 왕성한 때이어서 정신과 기력이 바야으로 왕성하거니와, 만일 기력이 쇠해져서 소인이 틈을 타고 들어오면 예측하지 못할 화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시비가 정해지지 않은 것은 불가한 것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이 일은 과연 시비가 있으므로 그 때에 홍문관으로 하여금 그 시비를 말하게 하였는데, 홍문관은 당연히 그 시비를 말해야 할 것이로되 양시 양비(兩是兩非)의 말을 하였으니, 무릇 일에 어찌 둘 다 옳은 이치가 있겠는가? 대간을 자주 체직한 것은 모두 이 때문이다."
하매, 홍언필이 아뢰기를,
"천하에 어찌 둘 다 옳은 일이 있겠습니까? 그때에 홍문관이 의논드린 것은 지극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신도 아뢰는 자가 있었고 상교도 또한 어찌 양시 양비의 일이 있겠는가고 하셨으니, 이는 지당합니다. 신도 그때에 역시 홍문관에 있으면서 이와 같은 의논을 드렸으니 그 잘못이 큰데, 이제 말하는 책임을 맡았으니 지극히 미안합니다."
하고, 기준은 아뢰기를,
"당초 하문(下問)하실 때에는 창졸간이어서 양시 양비라고 대답을 하였는데, 이 말은 죽어도 죄가 남습니다. 근일 시비가 번거로운 것은 다 홍문관의 허물입니다. 그런데도 이와 같이 시종의 대열에 있으니 마음이 어찌 편안할 수 있습니까? 돌아보건대, 미관(微官)으로서 사직하지 못하였으니 신의 죄 또한 큽니다."
하고, 박세희는 아뢰기를,
"신도 그 때에 또한 홍문관에 있었습니다만, 그 양시 양비라는 말은 본디 신의 뜻이 아니오며 홍언필도 신의 뜻을 압니다. 박상 등은 구언(求言)한 뒤에 진언(進言)하였으니, 대신된 자가 비록 죄를 다스리고자 하더라도 대간이 된 자는 마땅히 구원해야 하는데, 대간이 먼저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으니 이는 대간의 스스로 언로를 막은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또한 천하에 반드시 양시 양비의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양시(兩是)라는 의논이 자신의 뜻이 아니었다면 마땅히 그때에 자신의 뜻을 직언(直言)함이 가하거늘, 이미 그렇게 하지 못하고서 오늘에 와서야 비로소 나의 뜻은 본디 이와 같지 않았다고 하니, 어찌 가하다 할 수 있겠는가?"
하매, 박세희가 아뢰기를,
"그때에 신이 시종(侍從)으로서 자신의 뜻을 독계(獨啓)할 수가 없었으니 죽어도 죄가 남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본마음은 참으로 이렇지 않았는데 중론(衆論)이 통일되지 않았으므로 이같이 되었습니다. 모든 일의 시비는 반드시 귀일되는 것이니, 어찌 양시 양비의 일이 있겠습니까?"
하고, 영사 김응기는 아뢰기를,
"양시 양비라는 말은 진실로 홍문관에서 나왔습니다. 대간이 박상(朴祥) 등을 죄주라고 청한 때를 당하여 대원(臺員)의 의논이 통일되지 않았다는 것은 외부에서도 일찍이 들었습니다. 홍문관이 양시라는 의논을 한 것은 이미 잘못이고 대간이 박상을 죄주라고 청한 것도 역시 잘못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시종은 마땅히 동료와 더불어 의논하여 반드시 그 의논이 일치된 뒤에 아뢰어야 하는데, 처음에는 함께 의논하고서 뒤에는 그르다고 하는 것은 부당한 것 같다."
하매, 홍언필이 아뢰기를,
"상교(上敎)가 지당합니다. 다만 전에 대간으로 박상 등을 죄주라고 청한 자들도 이제 와서는 언로를 위하여 상 등의 죄를 변호합니다."
하고, 김응기는 아뢰기를,
"일시적 의논은 비록 같지 않더라도 그 의논의 옳은 것을 따라야 하는 것인데, 신이 그때에 또한 홍문관의 여러 의논이 같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박상 등이 죄에 저촉된 지가 이미 오래인데 지금까지 용서하지 않으니 인심이 쾌하지 못합니다. 속히 용서하소서."
하고, 홍언필은 아뢰기를,
"그때에 양시(兩是)라는 의논은 신은 지식이 없어 갈피를 못잡아 잘못 대답하였으니 신은 실로 못났습니다."
하고, 김응기는 아뢰기를,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말이 자신의 마음에 거스리거든 반드시 도(道)에 비추어 보고, 말이 자신의 마음에 순하거든 반드시 비도(非道)에 비추어 보라.’ 하였으니, 이같이 한다면 말을 듣고 일을 행하는 것이 모두 온당하게 될 것입니다. 상께서는 마땅히 마음을 바루고 몸을 닦아서 중정(中正)의 도(道)로 돌아가 일언 일동(一言一動)·일사 일물(一事一物)·시비 사정(是非邪正)이 거울에 물건을 비추는 것같이 되면 시비가 절로 정하여질 것이니, 큰 일을 처리하고 큰 의심을 결단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특진관 고형산이 아뢰기를,
"신이 근일 도시(都試)에서 취재(取才)한 무사를 보니, 궁력(弓力)이 있는 자가 거의 없고 또 모물(毛物)로 팔 등을 쌌으니, 이는 다름 아니라 육량(六兩) 【화살 이름이다.】 을 쏨으로 해서 팔뚝을 상하였기 때문입니다. 국가에서 육량의 원근(遠近)을 계산하여 무사를 뽑으므로 무사들이 자기의 궁력을 억지로 강하게 하여 멀리 가게 하려고 힘쓰기 때문에 원력(元力)이 부족한 자라도 모두 굳센 활을 억지로 당겨 그 힘을 더하게 되므로 마침내 팔뚝을 상하여 쓰이지 못하게 됩니다. 이순경(李舜卿)·성순동(成順仝)·황형(黃衡)·최한흥(崔漢洪) 등은 젊었을 때에는 궁력이 매우 강해서 사람들이 다 대각(大角)이라고 일컬었으나, 강한 것만을 너무 숭상하고 멀리 쏘기만을 힘썼으므로 팔의 힘이 많이 상하여 지금은 도리어 약한 활도 능히 당기지 못하며 순경은 이로 인하여 죽었으니 궁력을 숭상하지 못할 것이 이와 같습니다. 이지방(李之芳)·유담년(柳聃年) 같은 사람은 원기가 왕성하고 팔 힘이 비록 강하고, 궁력을 숭상하지 않았으므로 팔뚝이 상하지 않아 만년(晩年)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잘 쏩니다. 이로 보건대 만약 육량의 법으로 무사를 시험하면 한갓 팔뚝만 상하게 할 뿐이니, 이 법은 혁파하는 것이 또한 가합니다. 그러나 구법(舊法)을 갑자기 고칠 수는 없으니, 신의 생각에는 육량(六兩)의 원래 보수(步數) 80보 외에 20보나 30보 가량을 몰려서 쏘게 하여 한도를 넘은 것이 매우 멀더라도 그 점수를 계산하지 아니하면 《대전》의 법을 고치지 않아도 강한 활을 당겨 팔뚝을 상하게 하는 폐단을 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러한 폐단이 있으면 마땅히 대신과 더불어 의논하라."
하였다. 유순·정광필·김응기·신용개·남곤이 의논드리기를,
"무사가 강한 활을 당김으로 인하여 팔뚝을 상하는 것은 과연 고형산의 아룀과 같습니다. 육량의 원표(元標) 외에 20보를 더하여 표준을 삼고, 표준을 넘어간 화살의 보수(步數)를 점수에 넣지 않음으로써 그 폐단을 없애게 하소서."
하니, 상이 좇았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24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15책 149면
- 【분류】사법-탄핵(彈劾) / 왕실-비빈(妃嬪) / 왕실-경연(經筵) / 왕실-의식(儀式)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상-불교(佛敎) / 재정-상공(上供) / 금융-식리(殖利) / 인사-선발(選拔)
원문
○己丑/御朝講。 掌令洪彦弼、正言朴世熹啓前事; 侍講官金硡請罷(忌晨齋)〔忌辰齋〕 及長利事; 參贊官尹殷輔、知事申用漑、典 經奇遵等亦請罷(忌晨齋)〔忌辰齋〕 , 不允。 世熹曰: "金淨、朴祥等事, 臺諫請宥而中止者, 意上必斟酌而然矣。 國家所重者, 言路也。 朴元宗等廢愼氏事, 當不免萬世之斧鉞矣。 章敬王后乃一國臣民之所推仰, 朴祥等豈敢輕章敬而重愼氏乎? 但以初年廢愼氏之事爲失矣, 祥等之言豈有情乎? 願亟疏放, 以開言路。" 彦弼曰: "此言當矣。 祥等之言, 雖不可取實, 然其獲罪, 有妨言路矣。" 奇遵曰: "願速赦宥, 以快人心。" 上曰: "不須急急放之也。" 金硡亦請之。 奇遵曰: "當初臺諫請罪, 故其是非不定矣。 上意若定是非, 則必無紛擾之弊矣。 然其時, 上以祥等之疏留政院, 使不擧行, 而臺諫請罪耳, 請速宥之。" 世熹曰: "近來是非紛擾, 此國家大事也。 是非若此其顚倒, 恐終有士大夫之禍也。 今則上之春秋鼎盛, 精神氣力方盛矣。 若氣力少衰, 而小人乘間以入, 則恐有不測之禍也。" 上曰: "是非不定, 此不可之大者也。 此事果有是非, 其時令弘文館, 言其是非, 則弘文館當言其是非, 而亦以兩是爲言, 凡事安有兩是之理乎? 臺諫之數易, 皆以是也。" 彦弼曰: "天下安有兩是之事乎? 其時弘文館之議, 至爲失矣。 故大臣亦有啓之者, 上敎亦以爲: ‘安有兩是之事?’, 此至當矣。 臣於其時, 亦忝弘文館, 而爲如是之議, 其失大矣。 今受言責, 至爲未安。" 奇遵曰: "當初下問之時, 倉卒之間, 以兩是爲對, 此事死有餘罪矣。 近日是非紛紜, 皆弘文館之過也。 如是而在侍從之列, 心豈得安乎? 顧以微官, 未得辭職, 臣之罪亦大矣。" 世熹曰: "臣於其時, 亦忝弘文館, 然其兩是之言, 本非臣意也, 彦弼亦知臣意矣。 朴祥等, 於求言後進言, 爲大臣者, 雖欲治罪, 爲臺諫者, 則當救之。 而臺諫先請治罪, 是, 臺諫自杜其言路也。" 上曰: "予亦以爲, 天下必無兩是兩非之事。 但兩是之議, 若非己意, 則當於其時, 直言己意可也。 旣不能然, 乃至於今日, 始曰予意本不如是, 豈可乎?" 世熹曰: "其時, 臣爲侍從, 而不能獨啓其意, 死有餘罪。 然其時本心, 實不如是, 而以衆議不一, 故如此。 凡事之是非, 必歸於一矣, 安有兩是兩非之事哉?" 領事金應箕曰: "兩是兩非之說, 固出於弘文館也。 當臺諫請罪祥等之時, 臺員所議不一, 外間嘗聞之矣。 弘文館爲兩是之議者旣非, 而臺諫之請罪祥等亦非也。" 上曰: "臺諫、侍從, 當與同僚議論, 必其議論歸一, 然後啓之也。 初旣同議, 而後則以爲非, 似不當矣。" 彦弼曰: "上敎至當。 但前臺諫之請罪祥等者, 至是亦爲言路, 而救解祥等之罪矣。" 應箕曰: "一時議論, 雖不一, 當從其議之是者也。 臣於其時, 亦聞弘文館諸議之不同也。 朴祥等, 抵罪已久, 至今不宥, 人心未快, 願速宥之。" 彦弼曰: "其時兩是之議, 臣無知識, 錯亂失對, 臣實無狀。" 應箕曰: "《書》云: ‘有言逆于汝心, 必求諸道; 有言遜于汝心, 必求諸非道?’ 如是則聽言行事, 皆得其當矣。 上當正心修身, 而歸於中正之道, 一言一動、一事一物、是非邪正, 如鑑之照物, 則是非自定, 處大事、決大疑, 有何難乎?" 特進官高荊山曰: "臣於近日都試, 見武士之取才者, 有弓力者蓋寡, 又皆以毛物裹其背, 此無他, 以射六兩, 【矢名也。】 傷臂之故也。 國家計六兩遠近取士, 故武士務欲强其弓力, 以致遠射, 雖元力不足者, 皆强彎勁弓, 以增其力, 而卒至於傷臂不用。 如李舜卿、成順仝、黃衡、崔漢洪等, 少時弓力至强, 人皆稱其大角。 但尙强太甚, 務欲遠射, 故臂力多傷, 至今反不能彎其弱弓, 舜卿則因此致死, 弓力之不足尙如此。 如李之芳、柳聃年, 則元氣雄健, 臂力雖强, 而不尙其弓力, 故其臂不傷, 雖至晩年, 尙能善射。 以此觀之, 若以六兩之法, 試武士, 則徒傷其臂而已, 此法雖革罷, 亦可也, 然舊法不可卒變。 臣意以爲, 六兩元步數八十步外, 量退二十步, 或三十步, 射過其限者, 雖極遠, 亦不計其畫數, 則雖不改《大典》之法, 而彎强傷臂之弊, 自無矣。" 上曰: "有如是之弊, 當與大臣議之。" 柳洵、鄭光弼、金應箕、申用漑、南袞議: "武士因彎强傷臂, 果如荊山所啓。 六兩元標外, 加二十步爲準, 不用過射步數, 以除其弊。" 上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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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24권, 중종 11년 3월 8일 기축 1/7 기사 / 1516년 명 정덕(正德) 11년
박세희·기준 등이 언로를 위해 박상 등을 용서해 줄 것 등을 청하다
국역
조강에 나아갔다. 장령 홍언필·정언 박세희가 전의 일을 아뢰고, 시강관 김굉은 기신재 및 장리의 일을 혁파할 것을 청하고, 참찬관 윤은보·지사 신용개·전경 기준 등도 기신재 혁파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박세희가 아뢰기를,
"김정·박상 등의 일을 대간이 용서하기를 청하였으되 중지한 것은, 생각건대 상께서 반드시 짐작해서 그리한 것입니다. 국가가 중히 여기는 것은 언로(言路)입니다.박원종(朴元宗) 등이 신씨(愼氏)를 폐한 일은 마땅히 만세(萬世)의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거니와, 장경 왕후(章敬王后)는 온 나라 신민(臣民)이 추앙(推仰)하는 바인데 박상 등이 어찌 감히 장경왕후는 가볍게 여기고 신씨는 중하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다만 초년에 신씨를 폐한 일은 잘못이었다고 한 것이니, 박상 등의 말에 어찌 정실이 있겠습니까? 빨리 소방(疏放)하여 언로를 열으소서."
하고, 홍언필은 아뢰기를,
"이 말이 지당합니다. 박상 등의 말을 받아들일 수는 없으나 그 사람이 죄를 받으면 언로에 방해가 됩니다."
하고, 기준은 아뢰기를,
"원컨대 속히 사면하여 인심(人心)을 쾌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서둘러 방면할 필요는 없다."
하매, 김굉도 청하였다. 기준이 아뢰기를,
"당초에 대간이 죄를 청하였으므로, 그 시비(是非)가 정해지지 못하였는데, 상의 뜻이 만약 시비를 정하였다면 반드시 시끄러운 폐단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 상이박상 등의 상소(上疏)를 정원에 머물러 두고서 거행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대간이 죄를 청한 것이니 속히 용서하소서."
하고, 박세희는 아뢰기를,
"근래에 시비가 시끄러우니 이는 국가의 큰일입니다. 시비가 이와 같이 뒤바뀌면 끝내는 사대부의 화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지금은 상의 춘추(春秋)가 왕성한 때이어서 정신과 기력이 바야으로 왕성하거니와, 만일 기력이 쇠해져서 소인이 틈을 타고 들어오면 예측하지 못할 화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시비가 정해지지 않은 것은 불가한 것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이 일은 과연 시비가 있으므로 그 때에 홍문관으로 하여금 그 시비를 말하게 하였는데, 홍문관은 당연히 그 시비를 말해야 할 것이로되 양시 양비(兩是兩非)의 말을 하였으니, 무릇 일에 어찌 둘 다 옳은 이치가 있겠는가? 대간을 자주 체직한 것은 모두 이 때문이다."
하매, 홍언필이 아뢰기를,
"천하에 어찌 둘 다 옳은 일이 있겠습니까? 그때에 홍문관이 의논드린 것은 지극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신도 아뢰는 자가 있었고 상교도 또한 어찌 양시 양비의 일이 있겠는가고 하셨으니, 이는 지당합니다. 신도 그때에 역시 홍문관에 있으면서 이와 같은 의논을 드렸으니 그 잘못이 큰데, 이제 말하는 책임을 맡았으니 지극히 미안합니다."
하고, 기준은 아뢰기를,
"당초 하문(下問)하실 때에는 창졸간이어서 양시 양비라고 대답을 하였는데, 이 말은 죽어도 죄가 남습니다. 근일 시비가 번거로운 것은 다 홍문관의 허물입니다. 그런데도 이와 같이 시종의 대열에 있으니 마음이 어찌 편안할 수 있습니까? 돌아보건대, 미관(微官)으로서 사직하지 못하였으니 신의 죄 또한 큽니다."
하고, 박세희는 아뢰기를,
"신도 그 때에 또한 홍문관에 있었습니다만, 그 양시 양비라는 말은 본디 신의 뜻이 아니오며 홍언필도 신의 뜻을 압니다. 박상 등은 구언(求言)한 뒤에 진언(進言)하였으니, 대신된 자가 비록 죄를 다스리고자 하더라도 대간이 된 자는 마땅히 구원해야 하는데, 대간이 먼저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으니 이는 대간의 스스로 언로를 막은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또한 천하에 반드시 양시 양비의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양시(兩是)라는 의논이 자신의 뜻이 아니었다면 마땅히 그때에 자신의 뜻을 직언(直言)함이 가하거늘, 이미 그렇게 하지 못하고서 오늘에 와서야 비로소 나의 뜻은 본디 이와 같지 않았다고 하니, 어찌 가하다 할 수 있겠는가?"
하매, 박세희가 아뢰기를,
"그때에 신이 시종(侍從)으로서 자신의 뜻을 독계(獨啓)할 수가 없었으니 죽어도 죄가 남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본마음은 참으로 이렇지 않았는데 중론(衆論)이 통일되지 않았으므로 이같이 되었습니다. 모든 일의 시비는 반드시 귀일되는 것이니, 어찌 양시 양비의 일이 있겠습니까?"
하고, 영사 김응기는 아뢰기를,
"양시 양비라는 말은 진실로 홍문관에서 나왔습니다. 대간이 박상(朴祥) 등을 죄주라고 청한 때를 당하여 대원(臺員)의 의논이 통일되지 않았다는 것은 외부에서도 일찍이 들었습니다. 홍문관이 양시라는 의논을 한 것은 이미 잘못이고 대간이 박상을 죄주라고 청한 것도 역시 잘못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시종은 마땅히 동료와 더불어 의논하여 반드시 그 의논이 일치된 뒤에 아뢰어야 하는데, 처음에는 함께 의논하고서 뒤에는 그르다고 하는 것은 부당한 것 같다."
하매, 홍언필이 아뢰기를,
"상교(上敎)가 지당합니다. 다만 전에 대간으로 박상 등을 죄주라고 청한 자들도 이제 와서는 언로를 위하여 상 등의 죄를 변호합니다."
하고, 김응기는 아뢰기를,
"일시적 의논은 비록 같지 않더라도 그 의논의 옳은 것을 따라야 하는 것인데, 신이 그때에 또한 홍문관의 여러 의논이 같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박상 등이 죄에 저촉된 지가 이미 오래인데 지금까지 용서하지 않으니 인심이 쾌하지 못합니다. 속히 용서하소서."
하고, 홍언필은 아뢰기를,
"그때에 양시(兩是)라는 의논은 신은 지식이 없어 갈피를 못잡아 잘못 대답하였으니 신은 실로 못났습니다."
하고, 김응기는 아뢰기를,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말이 자신의 마음에 거스리거든 반드시 도(道)에 비추어 보고, 말이 자신의 마음에 순하거든 반드시 비도(非道)에 비추어 보라.’ 하였으니, 이같이 한다면 말을 듣고 일을 행하는 것이 모두 온당하게 될 것입니다. 상께서는 마땅히 마음을 바루고 몸을 닦아서 중정(中正)의 도(道)로 돌아가 일언 일동(一言一動)·일사 일물(一事一物)·시비 사정(是非邪正)이 거울에 물건을 비추는 것같이 되면 시비가 절로 정하여질 것이니, 큰 일을 처리하고 큰 의심을 결단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특진관 고형산이 아뢰기를,
"신이 근일 도시(都試)에서 취재(取才)한 무사를 보니, 궁력(弓力)이 있는 자가 거의 없고 또 모물(毛物)로 팔 등을 쌌으니, 이는 다름 아니라 육량(六兩) 【화살 이름이다.】 을 쏨으로 해서 팔뚝을 상하였기 때문입니다. 국가에서 육량의 원근(遠近)을 계산하여 무사를 뽑으므로 무사들이 자기의 궁력을 억지로 강하게 하여 멀리 가게 하려고 힘쓰기 때문에 원력(元力)이 부족한 자라도 모두 굳센 활을 억지로 당겨 그 힘을 더하게 되므로 마침내 팔뚝을 상하여 쓰이지 못하게 됩니다. 이순경(李舜卿)·성순동(成順仝)·황형(黃衡)·최한흥(崔漢洪) 등은 젊었을 때에는 궁력이 매우 강해서 사람들이 다 대각(大角)이라고 일컬었으나, 강한 것만을 너무 숭상하고 멀리 쏘기만을 힘썼으므로 팔의 힘이 많이 상하여 지금은 도리어 약한 활도 능히 당기지 못하며 순경은 이로 인하여 죽었으니 궁력을 숭상하지 못할 것이 이와 같습니다. 이지방(李之芳)·유담년(柳聃年) 같은 사람은 원기가 왕성하고 팔 힘이 비록 강하고, 궁력을 숭상하지 않았으므로 팔뚝이 상하지 않아 만년(晩年)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잘 쏩니다. 이로 보건대 만약 육량의 법으로 무사를 시험하면 한갓 팔뚝만 상하게 할 뿐이니, 이 법은 혁파하는 것이 또한 가합니다. 그러나 구법(舊法)을 갑자기 고칠 수는 없으니, 신의 생각에는 육량(六兩)의 원래 보수(步數) 80보 외에 20보나 30보 가량을 몰려서 쏘게 하여 한도를 넘은 것이 매우 멀더라도 그 점수를 계산하지 아니하면 《대전》의 법을 고치지 않아도 강한 활을 당겨 팔뚝을 상하게 하는 폐단을 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러한 폐단이 있으면 마땅히 대신과 더불어 의논하라."
하였다. 유순·정광필·김응기·신용개·남곤이 의논드리기를,
"무사가 강한 활을 당김으로 인하여 팔뚝을 상하는 것은 과연 고형산의 아룀과 같습니다. 육량의 원표(元標) 외에 20보를 더하여 표준을 삼고, 표준을 넘어간 화살의 보수(步數)를 점수에 넣지 않음으로써 그 폐단을 없애게 하소서."
하니, 상이 좇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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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丑/御朝講。 掌令洪彦弼、正言朴世熹啓前事; 侍講官金硡請罷(忌晨齋)〔忌辰齋〕 及長利事; 參贊官尹殷輔、知事申用漑、典 經奇遵等亦請罷(忌晨齋)〔忌辰齋〕 , 不允。 世熹曰: "金淨、朴祥等事, 臺諫請宥而中止者, 意上必斟酌而然矣。 國家所重者, 言路也。 朴元宗等廢愼氏事, 當不免萬世之斧鉞矣。 章敬王后乃一國臣民之所推仰, 朴祥等豈敢輕章敬而重愼氏乎? 但以初年廢愼氏之事爲失矣, 祥等之言豈有情乎? 願亟疏放, 以開言路。" 彦弼曰: "此言當矣。 祥等之言, 雖不可取實, 然其獲罪, 有妨言路矣。" 奇遵曰: "願速赦宥, 以快人心。" 上曰: "不須急急放之也。" 金硡亦請之。 奇遵曰: "當初臺諫請罪, 故其是非不定矣。 上意若定是非, 則必無紛擾之弊矣。 然其時, 上以祥等之疏留政院, 使不擧行, 而臺諫請罪耳, 請速宥之。" 世熹曰: "近來是非紛擾, 此國家大事也。 是非若此其顚倒, 恐終有士大夫之禍也。 今則上之春秋鼎盛, 精神氣力方盛矣。 若氣力少衰, 而小人乘間以入, 則恐有不測之禍也。" 上曰: "是非不定, 此不可之大者也。 此事果有是非, 其時令弘文館, 言其是非, 則弘文館當言其是非, 而亦以兩是爲言, 凡事安有兩是之理乎? 臺諫之數易, 皆以是也。" 彦弼曰: "天下安有兩是之事乎? 其時弘文館之議, 至爲失矣。 故大臣亦有啓之者, 上敎亦以爲: ‘安有兩是之事?’, 此至當矣。 臣於其時, 亦忝弘文館, 而爲如是之議, 其失大矣。 今受言責, 至爲未安。" 奇遵曰: "當初下問之時, 倉卒之間, 以兩是爲對, 此事死有餘罪矣。 近日是非紛紜, 皆弘文館之過也。 如是而在侍從之列, 心豈得安乎? 顧以微官, 未得辭職, 臣之罪亦大矣。" 世熹曰: "臣於其時, 亦忝弘文館, 然其兩是之言, 本非臣意也, 彦弼亦知臣意矣。 朴祥等, 於求言後進言, 爲大臣者, 雖欲治罪, 爲臺諫者, 則當救之。 而臺諫先請治罪, 是, 臺諫自杜其言路也。" 上曰: "予亦以爲, 天下必無兩是兩非之事。 但兩是之議, 若非己意, 則當於其時, 直言己意可也。 旣不能然, 乃至於今日, 始曰予意本不如是, 豈可乎?" 世熹曰: "其時, 臣爲侍從, 而不能獨啓其意, 死有餘罪。 然其時本心, 實不如是, 而以衆議不一, 故如此。 凡事之是非, 必歸於一矣, 安有兩是兩非之事哉?" 領事金應箕曰: "兩是兩非之說, 固出於弘文館也。 當臺諫請罪祥等之時, 臺員所議不一, 外間嘗聞之矣。 弘文館爲兩是之議者旣非, 而臺諫之請罪祥等亦非也。" 上曰: "臺諫、侍從, 當與同僚議論, 必其議論歸一, 然後啓之也。 初旣同議, 而後則以爲非, 似不當矣。" 彦弼曰: "上敎至當。 但前臺諫之請罪祥等者, 至是亦爲言路, 而救解祥等之罪矣。" 應箕曰: "一時議論, 雖不一, 當從其議之是者也。 臣於其時, 亦聞弘文館諸議之不同也。 朴祥等, 抵罪已久, 至今不宥, 人心未快, 願速宥之。" 彦弼曰: "其時兩是之議, 臣無知識, 錯亂失對, 臣實無狀。" 應箕曰: "《書》云: ‘有言逆于汝心, 必求諸道; 有言遜于汝心, 必求諸非道?’ 如是則聽言行事, 皆得其當矣。 上當正心修身, 而歸於中正之道, 一言一動、一事一物、是非邪正, 如鑑之照物, 則是非自定, 處大事、決大疑, 有何難乎?" 特進官高荊山曰: "臣於近日都試, 見武士之取才者, 有弓力者蓋寡, 又皆以毛物裹其背, 此無他, 以射六兩, 【矢名也。】 傷臂之故也。 國家計六兩遠近取士, 故武士務欲强其弓力, 以致遠射, 雖元力不足者, 皆强彎勁弓, 以增其力, 而卒至於傷臂不用。 如李舜卿、成順仝、黃衡、崔漢洪等, 少時弓力至强, 人皆稱其大角。 但尙强太甚, 務欲遠射, 故臂力多傷, 至今反不能彎其弱弓, 舜卿則因此致死, 弓力之不足尙如此。 如李之芳、柳聃年, 則元氣雄健, 臂力雖强, 而不尙其弓力, 故其臂不傷, 雖至晩年, 尙能善射。 以此觀之, 若以六兩之法, 試武士, 則徒傷其臂而已, 此法雖革罷, 亦可也, 然舊法不可卒變。 臣意以爲, 六兩元步數八十步外, 量退二十步, 或三十步, 射過其限者, 雖極遠, 亦不計其畫數, 則雖不改《大典》之法, 而彎强傷臂之弊, 自無矣。" 上曰: "有如是之弊, 當與大臣議之。" 柳洵、鄭光弼、金應箕、申用漑、南袞議: "武士因彎强傷臂, 果如荊山所啓。 六兩元標外, 加二十步爲準, 不用過射步數, 以除其弊。" 上從之。
- 【태백산사고본】 12책 24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15책 14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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