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실록16권, 중종 7년 6월 15일 정사 3/3 기사 / 1512년 명 정덕(正德) 7년
야인이 번갈아 도둑질을 하는 곳에 별군관을 더 보내는 것을 의논하게 하다
국역
전교하기를,
"지금 양계(兩界)에서 보고한 것을 보건대, 야인[彼人]이 번갈아 도둑질을 한다 하니, 내가 매우 민망스럽게 여긴다. 군량이 비록 부족하다고는 하나 별군관(別軍官)을 더 보내는 것이 어떠할지 아울러 의논하도록 하라."
하자, 유순정(柳順汀)·성희안(成希顔)·김응기(金應箕)·신윤무(辛允武)·황형(黃衡)·정광필(鄭光弼)·홍숙(洪淑)·이병정(李秉正)·최한홍(崔漢洪)·이장생(李長生)·최숙생(崔淑生) 등이 의계(議啓)하기를,
"북도에 적변(賊變)이 날로 심하고 군민(軍民)이 주려서 지쳤으니, 이 때에 급히 할 일은 식량을 수송하고 군사를 증강(增强)하는 것뿐입니다. 남도 여러 고을의 군량을 관찰사로 하여금 오는 8월 보름 전에 모두 북도로 실어보내도록 하고, 별군관 50명을 정선(精選)하여 북도에 45명 남도에 5명을 나누어 보내되, 조방장(助防將) 1명이 거느리고 가서 윤희평(尹熙平)의 지휘[節度]를 받아 조방하게 함이 마땅합니다.
못된 것들[小醜]이 너무 심하게 날뛰니, 마땅히 죄책하는 군사를 일으켜야 하겠으나, 북도가 잔폐한 데다가 해마다 흉년이 들었으며 올해도 또한 가물었으니 가을 추수를 짐작할 만합니다. 가령 다소 풍년이 든다 하더라도 군민(軍民)들이 겨우 죽음을 면할 뿐인데, 전쟁[用兵]하기에 어찌 남은 힘이 있겠습니까. 마땅히 병기를 수선하고 군사를 훈련시키며 군자[軍資]를 많이 저축하였다가, 때를 기다려서 출동해야 할 것이요, 경솔하게 행동함은 옳지 못합니다. 지금 반란한 부락은 모두 망합(莽哈)·홀비합(忽非哈) 등의 휘하(麾下)이니, 우선 변장(邊將)들로 하여금 이 무리들을 독촉하여 잡아오게 하고, 그 정세를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양양만동(梁楊萬洞)의 목책(木柵)은 외로운 곳에 있어 위험하니, 무산보(茂山堡)와 합하여 방어함이 편리한 듯하나, 다만 염려되는 것은 보(堡)와 목책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왕래하며 농사짓기가 불편할 것입니다. 대저 목책은 형세가 돌성[石城]과 같지 아니하여, 특별히 방략(方略)을 쓰지 않으면 지켜낼 수 없습니다. 목책을 치되 큰 나무로 되도록 굳고 치밀하게 세우고, 목책 안의 초가집의 지붕은 진흙을 두텁게 발라 적들의 방화를 방지하게 하고, 밖에는 참호(塹壕)를 파고 참호 밖에는 녹각성(鹿角城)313) 을 설치하여 적들이 밤을 타 마구 들어오는 것을 방지해야 합니다.
또 언제나 전각(戰角)314) 과 신기전(神機箭)315) 각 1명과 잘 달리는 사람 1∼2명을 뽑아서 매일 저녁 목책 밖에서 산봉우리를 바라보고 가만히 정탐을 보내어, 적변(賊變)이 있으면 곧 각을 불고 신기전을 발사하여 불을 비추고, 잘 달리는 사람은 보내어 이웃 진(鎭)에 치보(馳報)하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적이 밤에 오더라도 목책이 이미 설치되어 있어 쉽사리 들어오지 못할 것이고, 또 산봉우리에서 각소리를 듣고 불빛을 보면, 밖에 유병(遊兵)이 있는 줄 알고 반드시 도망하여 달아나게 될 것입니다.
변방 수비하는 방략(方略)은 멀리서 지시할 수는 없으나, 형세를 보아서 이 방책을 쓸 만한 곳이 있으면 시험해 보는 것이 무방합니다. 또 남도 절도사(南道節度使) 오보(吳堡)가 아뢴 야인의 땅[彼土]의 형세를 그림으로 그리는 것도 시행하여 볼 만한 일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 등이 양계(兩界)의 사변을 보건대, 북도의 군민(軍民)들이 기근으로 지친 데다가 변방의 경보(警報)는 연달아 오고 있어 방어하는 일이 매우 어렵게 되었으니, 마땅히 변장(邊將)들을 가려서 보내야 하겠습니다. 신 등은 듣건대, 전 종성 부사(鍾城府使) 오세한(吳世翰)이 이미 파직되었으니, 권연(權然)이 당연히 부임해야 하겠으나, 지금 계속 적변이 들어오고 있어 오세한이 방어 조치를 마음 속에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또 인물(人物)로 보더라도 전일 왜변(倭變) 때에 군공(軍功)을 세워 쓸 만한 인재이니, 군직(軍職)으로 강등하여 그대로 유임시키소서.
북도 우후(北道虞候) 김우증(金友曾)은 신병이 있습니다. 만일 주장(主將)이라면 진(鎭)에 앉아서 지휘할 뿐이나, 우후는 주장의 지시를 받아서 여러 진을 왔다갔다 해야 하니, 깊은 겨울에 순무(巡撫)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따로 쓸 만한 사람을 뽑아서 개차함이 어떠합니까? 북도의 군관(軍官)은 이미 마련하여 녹계(錄啓)하였습니다. 그러나 조방장(助防將)을 보내지 않을 수 없는데, 신 등의 생각에는 이극정(李克正)이 보낼 만합니다. 안지(安智)는 전에 다대포 만호(多大浦萬戶)로 있을 때 군사(軍事)를 궐(闕)한 일 때문에 파직되었는데, 지금 추고(推考)가 끝나지는 아니하였으나 이 사람은 우후 임무에 합당합니다.
신 등은 전번에 왜인에게 허화(許和)할 것을 아뢰었는데, 비록 전일에 상의 분부는 들었으나, 서북(西北)의 변보(邊報)가 날로 심한데, 만일 남방(南方)에 일이 있게 되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 등의 생각하는 바가 이러하므로 감히 아룁니다.
신 등은 듣건대 유자광(柳子光)이 죽었다고 합니다. 유자광은 국가에 공로가 있는데, 지금 그 자손들이 다른 곳에 나뉘어 귀양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 때 그 자손들을 여러 곳에 나누어 유배하고 또 훈적(勳籍)을 삭제한 것은, 그들이 공을 믿고 교만한 행동을 할까 염려되고 또 한곳에 모이게 되면 변을 일으킬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유자광이 죽었으니, 청컨대 익대 공식(翊戴功臣)316) 의 작호를 도로 주어 자손들로 하여금 예장(禮葬)하게 함이 어떠합니까?
인천(仁川)의 도적떼가 매우 횡포하여 장한공(張漢公)의 반인(伴人)317) 을 죽였으므로, 관군을 보내어 잡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농사철이어서 폐해가 농민에게 미치니, 청컨대 아직 그만두었다가 겨울이 깊어진 뒤를 기다려서 잡도록 함이 어떠합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양계(兩界)에 사변이 일어난 것은, 국가의 큰일이므로 의논하게 한 것이다. 오세한(吳世翰)은 유임시킴이 가하고, 안지(安智)는 비록 추고(推考)를 받으나 일이 그다지 긴요하지 않으니, 우후에 임명하여 보내도 좋다, 그러나 널리 의망(擬望)318) 하는 것이 가하다.
지금 붕중(弸中)이 가지고 온 서계(書契)를 보니, 단지 화친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계속 청하는 것이 많으니, 그의 뜻이 한갓 강화(講和)하는 허명(虛名)만 얻으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 나라 사람이 한두 사람 잡혀갔더라도 당연히 돌려보낼 것을 요구해야 하는데, 하물며 성을 함락시키고 장수를 죽였는데이겠는가. 경솔하게 화친을 허락할 수 없으니, 전 의논대로 하라. 유자광은 공신의 예로 장사지내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 [註 313] 녹각성(鹿角城) : 통나무를 사슴뿔처럼 얽어매어 세운 목책(木柵).
- [註 314] 전각(戰角) : 싸움에서 신호로 쓰는 나팔. 그것을 부는 군사.
- [註 315] 신기전(神機箭) : 신호로 쓰는 화전(火箭). 그것을 쓰는 군사.
- [註 316] 익대 공식(翊戴功臣) : 예종 즉위년에 남이(南怡)·강순(康純)의 모반 사건을 처리한 공신. 유자광이 이 사건을 고발하여 일등 공신이 되었다.
- [註 317] 반인(伴人) : 곧 반당(伴黨)·반당은 왕자(王子)와 공신 및 당상관(堂上官)을 우대하기 위하여 국가에서 개인별로 차급(借給)해 주는 심부름꾼.
- [註 318] 의망(擬望) : 관리를 임명할 때에 문관은 이조, 무관은 병조에서 추천하여 임금이 임명하는 것인데, 원칙적으로 삼망, 즉 수망(首望)·부망(副望)·말망(末望)의 세 사람의 후보자를 추천하였다.
원문
○傳曰: "今觀兩界所報, 彼人更迭作賊, 予甚憫慮。 軍糧雖云不足, 加送別軍官何如? 幷議之。" 柳順汀、成希顔、金應箕、辛允武、黃衡、鄭光弼、洪淑、李秉正、崔漢洪、李長生、崔淑生等議啓曰: "北道賊變日甚, 軍民飢困, 當今急務, 不過運糧益兵而已。 南官軍糧, 令本道觀察使, 來八月望前, 畢輸北道, 別軍官精選五十人, 北道四十五人, 南道五人分送, 而令助防將一員領去, 聽尹熙平節度, 助防爲當。 小醜跳梁已甚, 當問其罪。 然北道殘弊之餘, 連年凶歉, 今年亦旱, 秋事可知。 假使稍稔, 軍民僅得救死, 其於用兵, 安有餘力? 當繕兵鍊卒, 廣儲軍資, 竢時而動, 不宜輕擧。 今叛亂部落, 皆莾哈、忽非哈等麾下, 姑令邊將, 督責此輩拿致, 以觀其情可也。 (梁楊萬洞)〔梁永萬洞〕 木柵孤危, 就合茂山堡, 防禦似便。 但慮堡柵, 相去差遠, 往來農作不便耳。 大抵木柵與石城, 形勢不同, 非別施方略, 不可守也。 樹柵用大木, 務要堅緻, 柵內草家蓋覆, 上用黏泥, 厚塗之, 以防賊火, 外設坑坎, 坎外設鹿角城, 以防賊之乘夜闌入。 又常擇取戰角、放神機箭者各一人, 能走者一二人, 每日昏於柵外, 通望峯頭, 潛遣偵候, 若有賊變, 輒吹角放火, 遣能走者, 馳報隣鎭。 如是則賊雖夜至, 柵旣設備, 未易猝入, 又聞峰頭角聲與放火, 慮有游兵在外, 其勢必遁走矣。 凡守邊方略, 不可遙授。 然觀其形勢, 有合用此策處, 則試用之無妨。 且南道節度使吳堡所啓, 圖畫彼土形勢事, 亦可施行。" 又啓曰: "臣等觀兩界事變, 北道軍民飢困, 邊警連報, 防禦之事甚難, 尤宜擇遣邊將。 臣等聞前鍾城府使吳世翰已罷, 權然當赴任。 然時方賊變交報, 世翰措置備禦之事, 已積慮于胸中, 且以人物觀之, 則前於倭變時, 有軍功可用之才也。 請仍任降付軍職。 北道虞候金友曾有身病。 若主將則在鎭指揮而已, 虞候則聽主將節度, 往來列鎭, 當隆冬則不能巡撫必矣。 別擇可用之人, 改差何如? 北道軍官, 已令磨鍊錄啓矣。 然不可不遣助防將也。 臣等之意, 李克正可遣也。 安智頃爲多大浦萬戶時, 以闕軍事罷職, 雖時未畢推, 然斯人正合虞候之任。 臣等頃以許和之事啓之。 雖聞前日上敎, 然西北邊報日甚, 南方若有事, 則後悔何及乎? 臣等所懷如此, 故敢啓。 臣等聞柳子光身死, 子光有功於國家, 其子孫今方分配他方。 其時所以分配其子孫, 又削勳籍者, 恐其恃功驕恣, 若會一處, 則恐生變故也。 今子光身死, 請還給翊戴功臣, 令子孫治喪禮葬何如? 仁川賊黨恣暴, 殺張漢公伴人, 故遣官軍使捕之。 然今方農月, 弊及農民, 請姑罷之, 竢冬深後搜捕。" 傳曰: "兩界事變方起, 國家大事, 故議之。 吳世翰仍任可也。 安智雖被推, 事甚不緊, 亦當差遣。 然可廣擬。 今觀弸中持來書契, 非但求和, 多有繼請之事。 其意不欲徒得講和之虛名耳。 我國人雖一二被虜者, 固當責還, 況陷城殺將乎? 不可輕許, 當如前議。 柳子光以功臣禮葬可也。"
중종실록16권, 중종 7년 6월 15일 정사 3/3 기사 / 1512년 명 정덕(正德) 7년
야인이 번갈아 도둑질을 하는 곳에 별군관을 더 보내는 것을 의논하게 하다
국역
전교하기를,
"지금 양계(兩界)에서 보고한 것을 보건대, 야인[彼人]이 번갈아 도둑질을 한다 하니, 내가 매우 민망스럽게 여긴다. 군량이 비록 부족하다고는 하나 별군관(別軍官)을 더 보내는 것이 어떠할지 아울러 의논하도록 하라."
하자, 유순정(柳順汀)·성희안(成希顔)·김응기(金應箕)·신윤무(辛允武)·황형(黃衡)·정광필(鄭光弼)·홍숙(洪淑)·이병정(李秉正)·최한홍(崔漢洪)·이장생(李長生)·최숙생(崔淑生) 등이 의계(議啓)하기를,
"북도에 적변(賊變)이 날로 심하고 군민(軍民)이 주려서 지쳤으니, 이 때에 급히 할 일은 식량을 수송하고 군사를 증강(增强)하는 것뿐입니다. 남도 여러 고을의 군량을 관찰사로 하여금 오는 8월 보름 전에 모두 북도로 실어보내도록 하고, 별군관 50명을 정선(精選)하여 북도에 45명 남도에 5명을 나누어 보내되, 조방장(助防將) 1명이 거느리고 가서 윤희평(尹熙平)의 지휘[節度]를 받아 조방하게 함이 마땅합니다.
못된 것들[小醜]이 너무 심하게 날뛰니, 마땅히 죄책하는 군사를 일으켜야 하겠으나, 북도가 잔폐한 데다가 해마다 흉년이 들었으며 올해도 또한 가물었으니 가을 추수를 짐작할 만합니다. 가령 다소 풍년이 든다 하더라도 군민(軍民)들이 겨우 죽음을 면할 뿐인데, 전쟁[用兵]하기에 어찌 남은 힘이 있겠습니까. 마땅히 병기를 수선하고 군사를 훈련시키며 군자[軍資]를 많이 저축하였다가, 때를 기다려서 출동해야 할 것이요, 경솔하게 행동함은 옳지 못합니다. 지금 반란한 부락은 모두 망합(莽哈)·홀비합(忽非哈) 등의 휘하(麾下)이니, 우선 변장(邊將)들로 하여금 이 무리들을 독촉하여 잡아오게 하고, 그 정세를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양양만동(梁楊萬洞)의 목책(木柵)은 외로운 곳에 있어 위험하니, 무산보(茂山堡)와 합하여 방어함이 편리한 듯하나, 다만 염려되는 것은 보(堡)와 목책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왕래하며 농사짓기가 불편할 것입니다. 대저 목책은 형세가 돌성[石城]과 같지 아니하여, 특별히 방략(方略)을 쓰지 않으면 지켜낼 수 없습니다. 목책을 치되 큰 나무로 되도록 굳고 치밀하게 세우고, 목책 안의 초가집의 지붕은 진흙을 두텁게 발라 적들의 방화를 방지하게 하고, 밖에는 참호(塹壕)를 파고 참호 밖에는 녹각성(鹿角城)313) 을 설치하여 적들이 밤을 타 마구 들어오는 것을 방지해야 합니다.
또 언제나 전각(戰角)314) 과 신기전(神機箭)315) 각 1명과 잘 달리는 사람 1∼2명을 뽑아서 매일 저녁 목책 밖에서 산봉우리를 바라보고 가만히 정탐을 보내어, 적변(賊變)이 있으면 곧 각을 불고 신기전을 발사하여 불을 비추고, 잘 달리는 사람은 보내어 이웃 진(鎭)에 치보(馳報)하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적이 밤에 오더라도 목책이 이미 설치되어 있어 쉽사리 들어오지 못할 것이고, 또 산봉우리에서 각소리를 듣고 불빛을 보면, 밖에 유병(遊兵)이 있는 줄 알고 반드시 도망하여 달아나게 될 것입니다.
변방 수비하는 방략(方略)은 멀리서 지시할 수는 없으나, 형세를 보아서 이 방책을 쓸 만한 곳이 있으면 시험해 보는 것이 무방합니다. 또 남도 절도사(南道節度使) 오보(吳堡)가 아뢴 야인의 땅[彼土]의 형세를 그림으로 그리는 것도 시행하여 볼 만한 일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 등이 양계(兩界)의 사변을 보건대, 북도의 군민(軍民)들이 기근으로 지친 데다가 변방의 경보(警報)는 연달아 오고 있어 방어하는 일이 매우 어렵게 되었으니, 마땅히 변장(邊將)들을 가려서 보내야 하겠습니다. 신 등은 듣건대, 전 종성 부사(鍾城府使) 오세한(吳世翰)이 이미 파직되었으니, 권연(權然)이 당연히 부임해야 하겠으나, 지금 계속 적변이 들어오고 있어 오세한이 방어 조치를 마음 속에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또 인물(人物)로 보더라도 전일 왜변(倭變) 때에 군공(軍功)을 세워 쓸 만한 인재이니, 군직(軍職)으로 강등하여 그대로 유임시키소서.
북도 우후(北道虞候) 김우증(金友曾)은 신병이 있습니다. 만일 주장(主將)이라면 진(鎭)에 앉아서 지휘할 뿐이나, 우후는 주장의 지시를 받아서 여러 진을 왔다갔다 해야 하니, 깊은 겨울에 순무(巡撫)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따로 쓸 만한 사람을 뽑아서 개차함이 어떠합니까? 북도의 군관(軍官)은 이미 마련하여 녹계(錄啓)하였습니다. 그러나 조방장(助防將)을 보내지 않을 수 없는데, 신 등의 생각에는 이극정(李克正)이 보낼 만합니다. 안지(安智)는 전에 다대포 만호(多大浦萬戶)로 있을 때 군사(軍事)를 궐(闕)한 일 때문에 파직되었는데, 지금 추고(推考)가 끝나지는 아니하였으나 이 사람은 우후 임무에 합당합니다.
신 등은 전번에 왜인에게 허화(許和)할 것을 아뢰었는데, 비록 전일에 상의 분부는 들었으나, 서북(西北)의 변보(邊報)가 날로 심한데, 만일 남방(南方)에 일이 있게 되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 등의 생각하는 바가 이러하므로 감히 아룁니다.
신 등은 듣건대 유자광(柳子光)이 죽었다고 합니다. 유자광은 국가에 공로가 있는데, 지금 그 자손들이 다른 곳에 나뉘어 귀양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 때 그 자손들을 여러 곳에 나누어 유배하고 또 훈적(勳籍)을 삭제한 것은, 그들이 공을 믿고 교만한 행동을 할까 염려되고 또 한곳에 모이게 되면 변을 일으킬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유자광이 죽었으니, 청컨대 익대 공식(翊戴功臣)316) 의 작호를 도로 주어 자손들로 하여금 예장(禮葬)하게 함이 어떠합니까?
인천(仁川)의 도적떼가 매우 횡포하여 장한공(張漢公)의 반인(伴人)317) 을 죽였으므로, 관군을 보내어 잡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농사철이어서 폐해가 농민에게 미치니, 청컨대 아직 그만두었다가 겨울이 깊어진 뒤를 기다려서 잡도록 함이 어떠합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양계(兩界)에 사변이 일어난 것은, 국가의 큰일이므로 의논하게 한 것이다. 오세한(吳世翰)은 유임시킴이 가하고, 안지(安智)는 비록 추고(推考)를 받으나 일이 그다지 긴요하지 않으니, 우후에 임명하여 보내도 좋다, 그러나 널리 의망(擬望)318) 하는 것이 가하다.
지금 붕중(弸中)이 가지고 온 서계(書契)를 보니, 단지 화친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계속 청하는 것이 많으니, 그의 뜻이 한갓 강화(講和)하는 허명(虛名)만 얻으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 나라 사람이 한두 사람 잡혀갔더라도 당연히 돌려보낼 것을 요구해야 하는데, 하물며 성을 함락시키고 장수를 죽였는데이겠는가. 경솔하게 화친을 허락할 수 없으니, 전 의논대로 하라. 유자광은 공신의 예로 장사지내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 [註 313] 녹각성(鹿角城) : 통나무를 사슴뿔처럼 얽어매어 세운 목책(木柵).
- [註 314] 전각(戰角) : 싸움에서 신호로 쓰는 나팔. 그것을 부는 군사.
- [註 315] 신기전(神機箭) : 신호로 쓰는 화전(火箭). 그것을 쓰는 군사.
- [註 316] 익대 공식(翊戴功臣) : 예종 즉위년에 남이(南怡)·강순(康純)의 모반 사건을 처리한 공신. 유자광이 이 사건을 고발하여 일등 공신이 되었다.
- [註 317] 반인(伴人) : 곧 반당(伴黨)·반당은 왕자(王子)와 공신 및 당상관(堂上官)을 우대하기 위하여 국가에서 개인별로 차급(借給)해 주는 심부름꾼.
- [註 318] 의망(擬望) : 관리를 임명할 때에 문관은 이조, 무관은 병조에서 추천하여 임금이 임명하는 것인데, 원칙적으로 삼망, 즉 수망(首望)·부망(副望)·말망(末望)의 세 사람의 후보자를 추천하였다.
원문
○傳曰: "今觀兩界所報, 彼人更迭作賊, 予甚憫慮。 軍糧雖云不足, 加送別軍官何如? 幷議之。" 柳順汀、成希顔、金應箕、辛允武、黃衡、鄭光弼、洪淑、李秉正、崔漢洪、李長生、崔淑生等議啓曰: "北道賊變日甚, 軍民飢困, 當今急務, 不過運糧益兵而已。 南官軍糧, 令本道觀察使, 來八月望前, 畢輸北道, 別軍官精選五十人, 北道四十五人, 南道五人分送, 而令助防將一員領去, 聽尹熙平節度, 助防爲當。 小醜跳梁已甚, 當問其罪。 然北道殘弊之餘, 連年凶歉, 今年亦旱, 秋事可知。 假使稍稔, 軍民僅得救死, 其於用兵, 安有餘力? 當繕兵鍊卒, 廣儲軍資, 竢時而動, 不宜輕擧。 今叛亂部落, 皆莾哈、忽非哈等麾下, 姑令邊將, 督責此輩拿致, 以觀其情可也。 (梁楊萬洞)〔梁永萬洞〕 木柵孤危, 就合茂山堡, 防禦似便。 但慮堡柵, 相去差遠, 往來農作不便耳。 大抵木柵與石城, 形勢不同, 非別施方略, 不可守也。 樹柵用大木, 務要堅緻, 柵內草家蓋覆, 上用黏泥, 厚塗之, 以防賊火, 外設坑坎, 坎外設鹿角城, 以防賊之乘夜闌入。 又常擇取戰角、放神機箭者各一人, 能走者一二人, 每日昏於柵外, 通望峯頭, 潛遣偵候, 若有賊變, 輒吹角放火, 遣能走者, 馳報隣鎭。 如是則賊雖夜至, 柵旣設備, 未易猝入, 又聞峰頭角聲與放火, 慮有游兵在外, 其勢必遁走矣。 凡守邊方略, 不可遙授。 然觀其形勢, 有合用此策處, 則試用之無妨。 且南道節度使吳堡所啓, 圖畫彼土形勢事, 亦可施行。" 又啓曰: "臣等觀兩界事變, 北道軍民飢困, 邊警連報, 防禦之事甚難, 尤宜擇遣邊將。 臣等聞前鍾城府使吳世翰已罷, 權然當赴任。 然時方賊變交報, 世翰措置備禦之事, 已積慮于胸中, 且以人物觀之, 則前於倭變時, 有軍功可用之才也。 請仍任降付軍職。 北道虞候金友曾有身病。 若主將則在鎭指揮而已, 虞候則聽主將節度, 往來列鎭, 當隆冬則不能巡撫必矣。 別擇可用之人, 改差何如? 北道軍官, 已令磨鍊錄啓矣。 然不可不遣助防將也。 臣等之意, 李克正可遣也。 安智頃爲多大浦萬戶時, 以闕軍事罷職, 雖時未畢推, 然斯人正合虞候之任。 臣等頃以許和之事啓之。 雖聞前日上敎, 然西北邊報日甚, 南方若有事, 則後悔何及乎? 臣等所懷如此, 故敢啓。 臣等聞柳子光身死, 子光有功於國家, 其子孫今方分配他方。 其時所以分配其子孫, 又削勳籍者, 恐其恃功驕恣, 若會一處, 則恐生變故也。 今子光身死, 請還給翊戴功臣, 令子孫治喪禮葬何如? 仁川賊黨恣暴, 殺張漢公伴人, 故遣官軍使捕之。 然今方農月, 弊及農民, 請姑罷之, 竢冬深後搜捕。" 傳曰: "兩界事變方起, 國家大事, 故議之。 吳世翰仍任可也。 安智雖被推, 事甚不緊, 亦當差遣。 然可廣擬。 今觀弸中持來書契, 非但求和, 多有繼請之事。 其意不欲徒得講和之虛名耳。 我國人雖一二被虜者, 固當責還, 況陷城殺將乎? 不可輕許, 當如前議。 柳子光以功臣禮葬可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