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일기46권, 연산 8년 10월 3일 임인 1/4 기사 / 1502년 명 홍치(弘治) 15년
영의정 한치형의 졸기
국역
영의정 한치형(韓致亨)이 죽었다.
그의 자(字)는 통지(通之)요. 소혜 왕후(昭惠王后)586) 의 사촌 오라버니다. 약관(弱冠) 때 혜장 대왕(惠莊大王)587) 께서 불러 보고 군직(軍職)에 임명하였고, 여러 번 전직(轉職)하여 사헌부 감찰(監察)·장령(掌令)·사복시 소윤(司僕寺少尹)이 되었다. 성화(成化)588) 3년589) 에 장례원(掌隷院)의 판결사(判決事)에 임명되었으며, 얼마 안 되어 승정원의 좌부승지(左副承旨)로 발탁되었다가 좌승지로 전임(轉任)되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승진되었다. 무자년590) 에 함길도(咸吉道) 관찰사에 임명되고, 돌아와서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으로 임명되었다. 신묘년591) 에 좌리 공신(佐理功臣)592) 으로 책록(策錄)되고 잠시 후에 형조 판서로 승진되었으며 여러 차례 호조 판서·병조 판서로 전임되었다가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으로 승진되었다. 병진년593) 에 우의정에 승진하고 전임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이때에 죽으니 나이가 69세다. 시호(諡號)는 질경(質景)이니, 충성스럽고 정직하여 간사함이 없어서[忠正無邪] 질(質)이라 했고 의리에 의하여 성사하여서 [由義而濟] 경(景)이라 했다.
성품이 순박하고 침착하여 말이 적었으며 실지를 속여 겉을 꾸미는 것을 일삼지 않았다. 관직에 있어서는 부지런하고 조심하여 사의(私意)로써 법을 굽히지 않았다. 집정(執政)이 일찍이 한치형을 위하여 그의 외손(外孫)에게 벼슬을 주려고 하니, 이를 제지해 말하기를 ‘이 늙은 것 때문에 벼슬을 어리석은 아이에게 줄 수는 없다.’ 하고는 마침내 허락하지 않았다. 네 조정594) 을 내리 섬겨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는데, 비록 큰 공적은 없지마는 또한 드러난 과실도 없었다. 연산군(燕山君)이 정치를 어지럽힐 때를 당하여 누차 검소(儉素)와 절용할 것을 아뢰다가 이로 인하여 비위를 거스렸고 화(禍)가 죽은 뒤에까지 미쳤으니, 슬픈 일이다. 다만 배우지 못하여 학술(學術)이 없어서 일을 만나면 막히는 것이 많았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46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13 책 518 면
- [註 586] 소혜 왕후(昭惠王后) : 덕종(德宗)의 비(妃) 한씨.
- [註 587] 혜장 대왕(惠莊大王) : 세조(世祖).
- [註 588] 성화(成化) : 명 헌종(明憲宗)의 연호.
- [註 589] 3년 : 1467 세조 13년.
- [註 590] 무자년 : 1468 세조 14년.
- [註 591] 신묘년 : 1471 성종 2년.
- [註 592] 좌리 공신(佐理功臣) : 성종의 즉위에 공을 세운 공신.
- [註 593] 병진년 : 1496 연산군 2년.
- [註 594] 네 조정 : 단종·세조·성종·연산군.
원문
○壬寅/領議政韓致亨卒。 字通之。 昭惠王后從父兄也。 弱冠, 惠莊大王召見, 命補軍職。 累轉, 司憲府監察, 掌令, 司僕寺少尹。 成化丁亥, 拜掌隷院判決事, 尋擢承政院左副承旨, 轉左承旨, 陞吏曹參判。 戊子拜咸吉道觀察使, 還拜司憲府大司憲。 辛卯策勳佐理, 俄陞刑曹判書。 累轉, 戶、兵曹判書, 陞議政府左贊成。 丙辰陞右議政, 轉至領議政,卒年六十九。 謚質(京)〔景〕 , 忠正無邪質, 由義而濟(京)〔景〕 。 性醇慤, 沈重寡言, 不事矯飾。 當官勤恪, 不以私意撓法。 執政嘗爲致亨, 欲官其外孫, 止之曰: "不可以老生之故, 官及癡兒。" 卒不許。 歷事四朝, 官至首相。 雖無大建明, 亦無顯失。 當燕山政亂, 累以崇儉節用陳戒。 因此忤旨, 禍及身後, 哀哉! 但不學無術, 遇事多礙。
- 【태백산사고본】 12책 46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13 책 518 면
연산 8년 (1502) 10월 3일
연산군일기46권, 연산 8년 10월 3일 임인 1/4 기사 / 1502년 명 홍치(弘治) 15년
영의정 한치형의 졸기
국역
영의정 한치형(韓致亨)이 죽었다.
그의 자(字)는 통지(通之)요. 소혜 왕후(昭惠王后)586) 의 사촌 오라버니다. 약관(弱冠) 때 혜장 대왕(惠莊大王)587) 께서 불러 보고 군직(軍職)에 임명하였고, 여러 번 전직(轉職)하여 사헌부 감찰(監察)·장령(掌令)·사복시 소윤(司僕寺少尹)이 되었다. 성화(成化)588) 3년589) 에 장례원(掌隷院)의 판결사(判決事)에 임명되었으며, 얼마 안 되어 승정원의 좌부승지(左副承旨)로 발탁되었다가 좌승지로 전임(轉任)되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승진되었다. 무자년590) 에 함길도(咸吉道) 관찰사에 임명되고, 돌아와서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으로 임명되었다. 신묘년591) 에 좌리 공신(佐理功臣)592) 으로 책록(策錄)되고 잠시 후에 형조 판서로 승진되었으며 여러 차례 호조 판서·병조 판서로 전임되었다가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으로 승진되었다. 병진년593) 에 우의정에 승진하고 전임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이때에 죽으니 나이가 69세다. 시호(諡號)는 질경(質景)이니, 충성스럽고 정직하여 간사함이 없어서[忠正無邪] 질(質)이라 했고 의리에 의하여 성사하여서 [由義而濟] 경(景)이라 했다.
성품이 순박하고 침착하여 말이 적었으며 실지를 속여 겉을 꾸미는 것을 일삼지 않았다. 관직에 있어서는 부지런하고 조심하여 사의(私意)로써 법을 굽히지 않았다. 집정(執政)이 일찍이 한치형을 위하여 그의 외손(外孫)에게 벼슬을 주려고 하니, 이를 제지해 말하기를 ‘이 늙은 것 때문에 벼슬을 어리석은 아이에게 줄 수는 없다.’ 하고는 마침내 허락하지 않았다. 네 조정594) 을 내리 섬겨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는데, 비록 큰 공적은 없지마는 또한 드러난 과실도 없었다. 연산군(燕山君)이 정치를 어지럽힐 때를 당하여 누차 검소(儉素)와 절용할 것을 아뢰다가 이로 인하여 비위를 거스렸고 화(禍)가 죽은 뒤에까지 미쳤으니, 슬픈 일이다. 다만 배우지 못하여 학술(學術)이 없어서 일을 만나면 막히는 것이 많았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46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13 책 518 면
- [註 586] 소혜 왕후(昭惠王后) : 덕종(德宗)의 비(妃) 한씨.
- [註 587] 혜장 대왕(惠莊大王) : 세조(世祖).
- [註 588] 성화(成化) : 명 헌종(明憲宗)의 연호.
- [註 589] 3년 : 1467 세조 13년.
- [註 590] 무자년 : 1468 세조 14년.
- [註 591] 신묘년 : 1471 성종 2년.
- [註 592] 좌리 공신(佐理功臣) : 성종의 즉위에 공을 세운 공신.
- [註 593] 병진년 : 1496 연산군 2년.
- [註 594] 네 조정 : 단종·세조·성종·연산군.
원문
○壬寅/領議政韓致亨卒。 字通之。 昭惠王后從父兄也。 弱冠, 惠莊大王召見, 命補軍職。 累轉, 司憲府監察, 掌令, 司僕寺少尹。 成化丁亥, 拜掌隷院判決事, 尋擢承政院左副承旨, 轉左承旨, 陞吏曹參判。 戊子拜咸吉道觀察使, 還拜司憲府大司憲。 辛卯策勳佐理, 俄陞刑曹判書。 累轉, 戶、兵曹判書, 陞議政府左贊成。 丙辰陞右議政, 轉至領議政,卒年六十九。 謚質(京)〔景〕 , 忠正無邪質, 由義而濟(京)〔景〕 。 性醇慤, 沈重寡言, 不事矯飾。 當官勤恪, 不以私意撓法。 執政嘗爲致亨, 欲官其外孫, 止之曰: "不可以老生之故, 官及癡兒。" 卒不許。 歷事四朝, 官至首相。 雖無大建明, 亦無顯失。 當燕山政亂, 累以崇儉節用陳戒。 因此忤旨, 禍及身後, 哀哉! 但不學無術, 遇事多礙。
- 【태백산사고본】 12책 46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13 책 518 면
원본
연산 8년 (1502) 10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