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실록137권, 성종 13년 1월 18일 정해 2/3 기사 / 1482년 명 성화(成化) 18년
왕순례와 이영상의 노비 송사에 대해 재결하다
국역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대사헌(大司憲) 김승경(金升卿)이 아뢰기를,
"문종(文宗) 때에 왕씨(王氏)의 후손(後孫)을 수소문하여 공주(公州)에서 왕순례(王循禮)를 찾아서 노비(奴婢) 30명을 하사(下賜)하였는데, 그 후 지난 무술년056) 에 왕순례가 왕휴(王休)의 후실(後室) 자손이라 하고, 이영상(李永常)의 노비를 얻기 위하여 상언(上言)하였는데, 이영상은 곧 왕휴의 외손(外孫)이고 왕순례는 곧 왕휴의 손자입니다. 그 때에 결정하지 못하였었는데, 지금 또 상언하여 본부(本府)에 이첩되었습니다. 신(臣)이 참고하니, 왕휴의 초취(初娶)는 권씨(權氏)로서 이영상의 어미를 낳았고, 또 오씨(吳氏)에게 장가들어 왕순례의 아비인 왕미(王美)를 낳았습니다. 오씨의 족파(族派)는 처음에는 자세히 알지 못하였는데, 전일에 장례원(掌隷院)에서 이영상과 왕순례의 첩자(妾子)를 취조하여 계본(啓本)을 작성하였고, 그 뒤에 이균(李鈞)이 사평(司評)으로 있을 때에 왕순례의 첩자(妾子)의 초사(招辭)와 계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왕순례의 초사는 찢어져 파손되었고 계본은 아직 있습니다. 정원(政院)의 관리(官吏)에게 물으면 대답하기를, ‘왕순례가 첩자임은 초사에 명백합니다.’ 하고, 지금 왕순례는 말하기를, ‘조종조(祖宗朝) 때에는 모두 두 처(妻)를 거느렸는데, 나도 왕휴의 후실(後室)의 손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왕순례의 첩(妾)의 손자라는 진위(眞僞)에 대해서는 예조(禮曹)나 《실록(實錄)》을 참고하여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호적(戶籍)을 참고하기 위하여 살던 고향의 옛 늙은이에게 물었으나 1백 년 이상의 일이어서 모두 알지를 못하였습니다. 난리를 겪은 뒤의 일은 자세히 알기가 어려우나 왕순례 집안은 아마 양반은 아닌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좌우(左右)에게 물었다. 영사(領事) 윤필상(尹弼商)이 대답하기를,
"왕순례의 송사(訟事)는 신이 승지(承旨)와 참찬(參贊)으로 있을 때에 보았는데, 조종(祖宗)께서 선대(先代)의 후손을 찾는 목적은 후사(後嗣)를 계승시키고자 함이었지 애당초 적(嫡)과 첩(妾)을 헤아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지금의 처치에 대해서는 주상(主上)의 재결(裁決)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적첩을 가리지 말고 조종조(祖宗朝)의 공사(公事)에 의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137권 9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290면
- 【분류】왕실-사급(賜給) / 왕실-경연(經筵) / 사법-재판(裁判) / 신분-천인(賤人) / 가족-가족(家族) / 가족-가산(家産)
- [註 056] 무술년 : 1478 성종 9년.
원문
○御經筵。 講訖, 大司憲金升卿啓曰: "文宗朝, 求王氏後, 得王循禮於公州, 賜奴婢三十口。 其後去戊戌年, 循禮稱王休後室子孫, 謀得李永常奴婢上言, 永常乃王休外孫, 而循禮卽王休孫也。 其時未決, 今又上言, 移於本府。 臣參考王休初娶權氏, 生永常母。 又娶吳氏, 生循禮父王美。 吳氏族派, 初未詳知, 前日掌隷院取招永常及循禮妾子, 而寫啓本, 其後李鈞爲司評, 受循禮妾子招辭及啓本。 今則循禮招辭裂破, 而啓本則尙在。 刑問院吏, 則答曰: ‘循禮妾子招辭明白。’ 今循禮則曰: ‘祖宗朝皆畜二妻, 吾亦王休後室孫也。’ 然其循禮之妾孫眞僞, 考於禮曹與《實錄》, 而不得。 欲考其戶籍, 而問於所居鄕故老, 則百年以上事, 皆不知之。 喪亂之餘事, 難詳知, 循禮之族, 則疑非兩班也。" 上問左右。 領事尹弼商對曰: "循禮訟事, 臣爲承旨及參贊時見之, 祖宗求先代後者, 爲其繼嗣也, 初不計嫡妾也。 今之處置, 在於上裁。" 上曰: "勿分嫡妾, 依祖宗朝公事施行。"
- 【태백산사고본】 20책 137권 9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290면
- 【분류】왕실-사급(賜給) / 왕실-경연(經筵) / 사법-재판(裁判) / 신분-천인(賤人) / 가족-가족(家族) / 가족-가산(家産)
성종 13년 (1482) 1월 18일
성종실록137권, 성종 13년 1월 18일 정해 2/3 기사 / 1482년 명 성화(成化) 18년
왕순례와 이영상의 노비 송사에 대해 재결하다
국역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대사헌(大司憲) 김승경(金升卿)이 아뢰기를,
"문종(文宗) 때에 왕씨(王氏)의 후손(後孫)을 수소문하여 공주(公州)에서 왕순례(王循禮)를 찾아서 노비(奴婢) 30명을 하사(下賜)하였는데, 그 후 지난 무술년056) 에 왕순례가 왕휴(王休)의 후실(後室) 자손이라 하고, 이영상(李永常)의 노비를 얻기 위하여 상언(上言)하였는데, 이영상은 곧 왕휴의 외손(外孫)이고 왕순례는 곧 왕휴의 손자입니다. 그 때에 결정하지 못하였었는데, 지금 또 상언하여 본부(本府)에 이첩되었습니다. 신(臣)이 참고하니, 왕휴의 초취(初娶)는 권씨(權氏)로서 이영상의 어미를 낳았고, 또 오씨(吳氏)에게 장가들어 왕순례의 아비인 왕미(王美)를 낳았습니다. 오씨의 족파(族派)는 처음에는 자세히 알지 못하였는데, 전일에 장례원(掌隷院)에서 이영상과 왕순례의 첩자(妾子)를 취조하여 계본(啓本)을 작성하였고, 그 뒤에 이균(李鈞)이 사평(司評)으로 있을 때에 왕순례의 첩자(妾子)의 초사(招辭)와 계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왕순례의 초사는 찢어져 파손되었고 계본은 아직 있습니다. 정원(政院)의 관리(官吏)에게 물으면 대답하기를, ‘왕순례가 첩자임은 초사에 명백합니다.’ 하고, 지금 왕순례는 말하기를, ‘조종조(祖宗朝) 때에는 모두 두 처(妻)를 거느렸는데, 나도 왕휴의 후실(後室)의 손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왕순례의 첩(妾)의 손자라는 진위(眞僞)에 대해서는 예조(禮曹)나 《실록(實錄)》을 참고하여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호적(戶籍)을 참고하기 위하여 살던 고향의 옛 늙은이에게 물었으나 1백 년 이상의 일이어서 모두 알지를 못하였습니다. 난리를 겪은 뒤의 일은 자세히 알기가 어려우나 왕순례 집안은 아마 양반은 아닌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좌우(左右)에게 물었다. 영사(領事) 윤필상(尹弼商)이 대답하기를,
"왕순례의 송사(訟事)는 신이 승지(承旨)와 참찬(參贊)으로 있을 때에 보았는데, 조종(祖宗)께서 선대(先代)의 후손을 찾는 목적은 후사(後嗣)를 계승시키고자 함이었지 애당초 적(嫡)과 첩(妾)을 헤아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지금의 처치에 대해서는 주상(主上)의 재결(裁決)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적첩을 가리지 말고 조종조(祖宗朝)의 공사(公事)에 의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137권 9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290면
- 【분류】왕실-사급(賜給) / 왕실-경연(經筵) / 사법-재판(裁判) / 신분-천인(賤人) / 가족-가족(家族) / 가족-가산(家産)
- [註 056] 무술년 : 1478 성종 9년.
원문
○御經筵。 講訖, 大司憲金升卿啓曰: "文宗朝, 求王氏後, 得王循禮於公州, 賜奴婢三十口。 其後去戊戌年, 循禮稱王休後室子孫, 謀得李永常奴婢上言, 永常乃王休外孫, 而循禮卽王休孫也。 其時未決, 今又上言, 移於本府。 臣參考王休初娶權氏, 生永常母。 又娶吳氏, 生循禮父王美。 吳氏族派, 初未詳知, 前日掌隷院取招永常及循禮妾子, 而寫啓本, 其後李鈞爲司評, 受循禮妾子招辭及啓本。 今則循禮招辭裂破, 而啓本則尙在。 刑問院吏, 則答曰: ‘循禮妾子招辭明白。’ 今循禮則曰: ‘祖宗朝皆畜二妻, 吾亦王休後室孫也。’ 然其循禮之妾孫眞僞, 考於禮曹與《實錄》, 而不得。 欲考其戶籍, 而問於所居鄕故老, 則百年以上事, 皆不知之。 喪亂之餘事, 難詳知, 循禮之族, 則疑非兩班也。" 上問左右。 領事尹弼商對曰: "循禮訟事, 臣爲承旨及參贊時見之, 祖宗求先代後者, 爲其繼嗣也, 初不計嫡妾也。 今之處置, 在於上裁。" 上曰: "勿分嫡妾, 依祖宗朝公事施行。"
- 【태백산사고본】 20책 137권 9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290면
- 【분류】왕실-사급(賜給) / 왕실-경연(經筵) / 사법-재판(裁判) / 신분-천인(賤人) / 가족-가족(家族) / 가족-가산(家産)
원본
성종 13년 (1482) 1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