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실록105권, 성종 10년 6월 7일 임진 1/3 기사 / 1479년 명 성화(成化) 15년
유생들의 추국 금지·학열의 폐해 조사·홍이로를 외방에 내치다
국역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집의(執義) 윤민(尹慜)이 아뢰기를,
"유생(儒生)은 본래 광간(狂簡)하여, 지기(志氣)는 고원(高遠)하나 세상일에 있어서는 반드시 일일이 절도에 맞지 못합니다. 이번에 폐비(廢妃)하는 것이 불가(不可)하다는 일을 가지고 우러러 천총(天聰)을 번거롭게 하였으므로 의금부(義禁府)에 가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폐비의 원인은 비록 조정에 있는 대신(大臣)이라 하더라도 의심이 없을 수 없었다가, 윤씨(尹氏)의 사정이 나타난 연후에야 그전의 의심이 분명하게 풀리게 되었는데, 하물며 밖에 있는 유생으로서 이목(耳目)이 미치지 못한 바이겠습니까? 옛날 세종조(世宗朝)에 내불당(內佛堂)을 지은 것으로 해서 유생 등이 상소(上疏)하여 논청(論請)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자, 곧 방(榜)을 붙여서 이르기를, ‘이단(異端)은 날로 일어나고 우리의 도(道)는 날로 쇠(衰)해가니 우리는 가야겠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종께서는 오히려 용서하고 묻지 않았으니, 이는 그들이 광간(狂簡)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것은 불당(佛堂)의 예(例)가 아니다."
하고, 이어서 좌우(左右)를 돌아보고 물으니, 영사(領事) 정창손(鄭昌孫)이 아뢰기를,
"선비가 바야흐로 궁구(窮究)하게 길러질 때에는 곧 이르기를, ‘내가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다. 직언(直言)할 수 있다.’ 하다가도 조정에 서는 날에 이르러서는 관망(觀望)만 하고, 외축(畏縮)되어 직언으로 항론(抗論)할 수 있는 자가 대개 적습니다. 빌건대 너그러운 용서를 내리시어 곧은 선비의 기백을 기르게 하소서."
하였다. 윤민(尹慜)이 이르기를,
"선비는 집에서 닦은 것도 오히려 천자(天子)의 뜰에서 헐어버리는 것인데, 지금 만약 죄를 준다고 하면, 선비들이 모두 다 집에서 헐어버릴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승지(承旨)에게 이르기를,
"추국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윤민이 또 아뢰기를,
"산산(蒜山)의 전토는 비록 선왕(先王)의 하사한 바라 하더라도, 당초에 이를 하사할 때 수령(守令) 등이 학열(學悅)에게 위협을 받고 지나치게 많이 점령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선왕의 본의(本意)이겠습니까? 백성들이 원통해 한 지 진실로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백성들의 원통함이 오래 되었다고 하는데, 그 때에 신소(申訴)한 것을 이루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이었는가?"
하니, 정창손이 아뢰기를,
"김종지(金鍾之)가 죽고부터는 학열로 말미암아 강원도(江原道) 안의 모든 혈기(血氣) 있는 자는 머리를 수그리고 기운을 잃어서 그를 두려워하기를 뇌정(雷霆)과 같이 하였는데, 누가 감히 학열의 뜻을 어기고 상달(上達)하였겠습니까?"
하였다. 우부승지(右副承旨) 채수(蔡壽)가 아뢰기를,
"신(臣)의 아비가 일찍이 강원도를 맡아 다스렸는데, 신이 뵈오려고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상원사(上院寺)와 낙산사(洛山寺)의 사이를 보았더니, 험지(險地)를 넘음이 몇 겹이 되고 서로의 거리가 매우 멀었습니다. 그런데 무릇 재목을 실어나르고 돌을 운반하는 것은 모두 다 거민(居民)을 부리어, 그 백성들이 애써 노력하여 종사(從事)하면서도 감히 수고로움을 고(告)하지 못하니, 학열을 겁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아뢰기를,
"제언(堤堰)이 민전(民田)과 서로 떨어졌다고 하니, 다시 그 도(道)의 계본(啓本)을 상고하여 아뢰라."
하였다.
윤민이 아뢰기를,
"홍이로(洪利老)는 율(律)에 의하여 죄를 살펴보면 장(杖) 1백 대에 도(徒) 3년에 해당되는데, 고신(告身)만을 거두었고, 권경(權擎)은 사첩(私妾)을 거느리고 부임(赴任)하였는데도 파직(罷職)만 시켰으니, 후인(後人)을 무엇으로 징계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사람이 비록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공(功)은 가리우지 못할 것이다. 홍이로는 도적을 잡은 공이 있고 또 무재(武才)가 있으니, 마침내는 서용(敍用)하지 아니할 수 없기 때문에 다만 고신만을 거둔 것이 옳고, 권경은 공신(功臣)이기 때문에 파직함이 또한 옳은 것이다."
하였다. 정창손이 아뢰기를,
"홍이로와 같은 자는 어찌 얻기 어려운 재주이겠습니까? 그를 징계하여 그 나머지를 경계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사첩을 거느리는 것은 빈번하게 있는 일인데, 권경은 불행(不幸)하게도 일이 발각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홍이로를 외방에 부처(付處)하게 하라."
하였다.
전경(典經) 안윤손(安潤孫)이 아뢰기를,
"폐비(廢妃)의 일을 대간(臺諫)들이 교장(交章)하여 상소하였을 때에는 곧 말씀하시기를, ‘죄인(罪人)을 구(救)하는 자는 죄가 없겠는가?’ 하고, 홍문관(弘文館)에서 상소하였을 때에는, ‘임금의 허물을 드러낸다.’고 하였으며,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들이 상소하였을 때에는 그들을 의금부(義禁府)에 가두었습니다. 대저 뇌정(雷霆)이 치면 꺾이지 않음이 없을 것이고, 만균(萬鈞)에 눌리면 부서지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비록 안색(顔色)을 온화하게 하여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오히려 말할 때에 뜻대로 다하지 못할까 걱정인데, 만약 뇌정의 위엄으로 치고 만균의 무게로 누른다면, 누가 감히 지존(至尊)에 항거하여 불측(不測)의 재앙을 밟으려고 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그 언로(言路)에 있어서 어쩌시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폐비의 일은 그대가 이미 충분히 알았을 것인데, 어제 다시 뒷말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고, 이어 좌우(左右)에게 이르기를,
"어떠한가?"
하니, 채수가 말하기를,
"옛날에 폐후(廢后)한 자는 혹은 영항(永巷)367) 에 두기도 하고, 혹은 금용성(金墉城)368) 에 처(處)하기도 하였습니다. 김주량(金主亮)은 이적(夷狄)의 임금이요, 소씨(蕭氏)는 망국(亡國)의 임금이었습니다마는, 오히려 전토(田土)를 하사(下賜)하였고, 차마 박하게 대우하지 못했습니다. 원컨대 전하(殿下)께서는 참작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와 같이 하면 후일(後日)의 근심을 알 수 있을 것인데, 어떻게 해서 죄책(罪責)을 가(加)하기를 엄(嚴)하게 하지 않겠는가?"
하니, 채수가 울면서 아뢰기를,
"신이 윤씨(尹氏)를 높여 받들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귀성군(龜城君)과 화의군(和義君)은 모두 다 죄가 크고 악(惡)이 극(極)에 달했는데도 오히려 안치(安置)하고 의식(衣食)을 관(官)에서 공급하는데, 하물며 윤씨는 한 나라의 모의(母儀)가 된 것이겠습니까? 오래도록 사제(私第)에 두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였다. 정창손이 아뢰기를,
"신이 밤낮으로 반복(反覆)하여 생각해보니, 윤씨가 궁금(宮禁)에 있을 때에도 착하지 못한 것이 이와 같았는데, 만약 외인(外人)과 교통(交通)하여 출입(出入)하는데에 방해로움이 없다고 하면, 그 후환(後患)이 어떻겠으며 국가(國家)에 누(累)가 되는 것이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별처(別處)에 두고 담장을 높이하여 외인으로 하여금 출입을 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만약 윤씨에게 죄가 있다고 하면, 국가에는 정해진 형벌이 있는데 무엇을 염려하겠는가?"
하였다. 동지사(同知事) 정효상(鄭孝常)과 윤민(尹慜)이 아뢰기를,
"윤씨의 집은 대대로 청한(淸寒)하여 거실(居室)이 외부로 드러나며, 그 어머니 신씨(申氏)가 또 어질지 못한 사람이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선갑 후갑(先甲後甲)의 교훈을 경계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마땅히 짐작(斟酌)하여 이를 처리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105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23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사법-행형(行刑) / 농업-전제(田制) / 농업-수리(水利) / 사상-불교(佛敎) / 역사-고사(故事)
- [註 367] 영항(永巷) : 죄 있는 궁인(宮人)을 유폐하는 곳.
- [註 368] 금용성(金墉城) : 진(晉)나라 양후(楊后)와 민회 태자(愍懷太子)의 가후(賈后)가 폐출(廢出)되어 있던 곳.
원문
○壬辰/御經筵。 講訖, 執義尹慜啓曰: "儒生本狂簡, 志氣高遠, 其於世事, 未必一一中節。 今者將廢妃不可事, 仰瀆天聰, 命囚禁府。 廢妃之因, 雖在庭大臣, 不能無疑, 及見尹氏事情, 然後, 前疑渙釋, 況在外儒生, 耳目所不及哉? 昔世宗朝, 作內佛堂, 儒生等, 上疏論請, 未蒙兪允, 則榜之曰: ‘異端日興, 吾道日衰, 吾其去矣。’ 世宗猶原貸不問, 以狂簡也。" 上曰: "此非佛堂例也。" 仍顧問左右, 領事鄭昌孫曰: "士方窮養, 乃曰: ‘我能格君心者也, 能直言者也。’ 至於立朝之日, 觀望畏縮, 能直言抗論者, 蓋寡。 乞賜優容, 以養直士之氣。" 尹慜曰: "士修之於家, 尙且毁之於天子之庭, 今若罪之, 則臣恐, 士皆毁之於家矣。" 上謂承旨曰: "勿推。" 尹慜又啓曰: "蒜山之田, 雖先王所賜, 當初賜之之時, 守令等, 見脅於學悅, 多所濫占, 是豈先王之本意耶? 民之忿怨, 固已久矣。" 上曰: "民之忿怨久矣, 而其時未得申訴何歟?" 昌孫啓曰: "自金鍾之死, 由學悅, 而江原道內, 凡有血氣者, 垂首喪氣, 畏之如雷霆, 誰敢違學悅, 而上達哉?" 右副承旨蔡壽啓曰: "臣父, 嘗宰于江原道, 臣於歸覲時, 見上院、洛山間, 越險數重, 相距甚遠。 凡輸材轉石, 皆役居民, 其民黽勉從事, 不敢告勞, 其爲學悅之所刼, 可知。" 上曰: "堤堰與民田相距, 更考其道啓本以啓。" 尹慜啓曰: "洪利老, 依律按罪, 則杖一百、徒三年, 而只收告身, 權擎, 則率私妾赴任, 而只罷職, 後人何所懲乎?" 上曰: "人雖有罪, 功不可掩也。 利老, 有捕賊之功, 且有武才, 終不可不敍, 只收告身可也。 權擎則功臣也, 罷職亦可也。" 昌孫啓曰: "如利老, 豈難得之才? 懲之以警其餘可也。 率私妾, 則比比有之, 而權擎, 不幸事覺耳。" 上曰: "付處利老于外。" 典經安潤孫啓曰: "廢妃之事, 臺諫交章上疏, 則曰: "救罪人者, 其無罪耶?" 弘文館上疏, 則彰君之惡, 成均館儒生上疏, 則囚之禁府。 大抵雷霆之所擊, 無不摧折, 萬鈞之所壓, 無不麋滅, 雖和顔色以受之, 猶恐言不盡意, 若擊之以雷霆之威, 壓之以萬鈞之重, 誰敢抗至尊, 而蹈不測之禍哉? 然則其於言路何?" 上曰: "廢妃之事, 爾旣洞知, 而今復有後言, 何耶?" 仍謂左右曰: "何如?" 蔡壽曰: "古之廢后者, 或置于永巷, 或處于金墉城。 金主 亮, 夷狄之君也; 蕭氏, 亡國之君也, 猶賜之以土田, 不忍待之以薄。 願殿下, 留神焉。" 上曰: "如此則後日之患可知也, 何不嚴加罪責乎?" 蔡壽泣而啓曰: "臣非尊奉尹氏也。 臣意以爲 ‘龜城君、和義君、皆罪大惡極, 而猶且安置, 官給衣食,’ 況尹氏, 爲一國母儀也, 久不可置於私第。" 昌孫啓曰: "臣夙夜反覆思之, 尹氏在宮禁時, 不善如此, 若交通外人, 出入無妨, 則其於後患何。 爲國家累, 豈不大哉? 願置別處, 高其垣墉, 使外人不得以出入。" 上曰: "若尹氏有罪, 則國有常刑, 何慮之爲?" 同知事鄭孝常及尹慜啓曰: "尹氏家世淸寒, 居室淺露, 其母申氏, 又不令之人, 願殿下, 戒先甲後甲之訓。" 上曰: "予當斟酌處之。"
- 【태백산사고본】 16책 105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23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사법-행형(行刑) / 농업-전제(田制) / 농업-수리(水利) / 사상-불교(佛敎) / 역사-고사(故事)
성종 10년 (1479) 6월 7일
성종실록105권, 성종 10년 6월 7일 임진 1/3 기사 / 1479년 명 성화(成化) 15년
유생들의 추국 금지·학열의 폐해 조사·홍이로를 외방에 내치다
국역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집의(執義) 윤민(尹慜)이 아뢰기를,
"유생(儒生)은 본래 광간(狂簡)하여, 지기(志氣)는 고원(高遠)하나 세상일에 있어서는 반드시 일일이 절도에 맞지 못합니다. 이번에 폐비(廢妃)하는 것이 불가(不可)하다는 일을 가지고 우러러 천총(天聰)을 번거롭게 하였으므로 의금부(義禁府)에 가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폐비의 원인은 비록 조정에 있는 대신(大臣)이라 하더라도 의심이 없을 수 없었다가, 윤씨(尹氏)의 사정이 나타난 연후에야 그전의 의심이 분명하게 풀리게 되었는데, 하물며 밖에 있는 유생으로서 이목(耳目)이 미치지 못한 바이겠습니까? 옛날 세종조(世宗朝)에 내불당(內佛堂)을 지은 것으로 해서 유생 등이 상소(上疏)하여 논청(論請)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자, 곧 방(榜)을 붙여서 이르기를, ‘이단(異端)은 날로 일어나고 우리의 도(道)는 날로 쇠(衰)해가니 우리는 가야겠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종께서는 오히려 용서하고 묻지 않았으니, 이는 그들이 광간(狂簡)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것은 불당(佛堂)의 예(例)가 아니다."
하고, 이어서 좌우(左右)를 돌아보고 물으니, 영사(領事) 정창손(鄭昌孫)이 아뢰기를,
"선비가 바야흐로 궁구(窮究)하게 길러질 때에는 곧 이르기를, ‘내가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다. 직언(直言)할 수 있다.’ 하다가도 조정에 서는 날에 이르러서는 관망(觀望)만 하고, 외축(畏縮)되어 직언으로 항론(抗論)할 수 있는 자가 대개 적습니다. 빌건대 너그러운 용서를 내리시어 곧은 선비의 기백을 기르게 하소서."
하였다. 윤민(尹慜)이 이르기를,
"선비는 집에서 닦은 것도 오히려 천자(天子)의 뜰에서 헐어버리는 것인데, 지금 만약 죄를 준다고 하면, 선비들이 모두 다 집에서 헐어버릴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승지(承旨)에게 이르기를,
"추국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윤민이 또 아뢰기를,
"산산(蒜山)의 전토는 비록 선왕(先王)의 하사한 바라 하더라도, 당초에 이를 하사할 때 수령(守令) 등이 학열(學悅)에게 위협을 받고 지나치게 많이 점령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선왕의 본의(本意)이겠습니까? 백성들이 원통해 한 지 진실로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백성들의 원통함이 오래 되었다고 하는데, 그 때에 신소(申訴)한 것을 이루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이었는가?"
하니, 정창손이 아뢰기를,
"김종지(金鍾之)가 죽고부터는 학열로 말미암아 강원도(江原道) 안의 모든 혈기(血氣) 있는 자는 머리를 수그리고 기운을 잃어서 그를 두려워하기를 뇌정(雷霆)과 같이 하였는데, 누가 감히 학열의 뜻을 어기고 상달(上達)하였겠습니까?"
하였다. 우부승지(右副承旨) 채수(蔡壽)가 아뢰기를,
"신(臣)의 아비가 일찍이 강원도를 맡아 다스렸는데, 신이 뵈오려고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상원사(上院寺)와 낙산사(洛山寺)의 사이를 보았더니, 험지(險地)를 넘음이 몇 겹이 되고 서로의 거리가 매우 멀었습니다. 그런데 무릇 재목을 실어나르고 돌을 운반하는 것은 모두 다 거민(居民)을 부리어, 그 백성들이 애써 노력하여 종사(從事)하면서도 감히 수고로움을 고(告)하지 못하니, 학열을 겁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아뢰기를,
"제언(堤堰)이 민전(民田)과 서로 떨어졌다고 하니, 다시 그 도(道)의 계본(啓本)을 상고하여 아뢰라."
하였다.
윤민이 아뢰기를,
"홍이로(洪利老)는 율(律)에 의하여 죄를 살펴보면 장(杖) 1백 대에 도(徒) 3년에 해당되는데, 고신(告身)만을 거두었고, 권경(權擎)은 사첩(私妾)을 거느리고 부임(赴任)하였는데도 파직(罷職)만 시켰으니, 후인(後人)을 무엇으로 징계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사람이 비록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공(功)은 가리우지 못할 것이다. 홍이로는 도적을 잡은 공이 있고 또 무재(武才)가 있으니, 마침내는 서용(敍用)하지 아니할 수 없기 때문에 다만 고신만을 거둔 것이 옳고, 권경은 공신(功臣)이기 때문에 파직함이 또한 옳은 것이다."
하였다. 정창손이 아뢰기를,
"홍이로와 같은 자는 어찌 얻기 어려운 재주이겠습니까? 그를 징계하여 그 나머지를 경계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사첩을 거느리는 것은 빈번하게 있는 일인데, 권경은 불행(不幸)하게도 일이 발각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홍이로를 외방에 부처(付處)하게 하라."
하였다.
전경(典經) 안윤손(安潤孫)이 아뢰기를,
"폐비(廢妃)의 일을 대간(臺諫)들이 교장(交章)하여 상소하였을 때에는 곧 말씀하시기를, ‘죄인(罪人)을 구(救)하는 자는 죄가 없겠는가?’ 하고, 홍문관(弘文館)에서 상소하였을 때에는, ‘임금의 허물을 드러낸다.’고 하였으며,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들이 상소하였을 때에는 그들을 의금부(義禁府)에 가두었습니다. 대저 뇌정(雷霆)이 치면 꺾이지 않음이 없을 것이고, 만균(萬鈞)에 눌리면 부서지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비록 안색(顔色)을 온화하게 하여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오히려 말할 때에 뜻대로 다하지 못할까 걱정인데, 만약 뇌정의 위엄으로 치고 만균의 무게로 누른다면, 누가 감히 지존(至尊)에 항거하여 불측(不測)의 재앙을 밟으려고 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그 언로(言路)에 있어서 어쩌시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폐비의 일은 그대가 이미 충분히 알았을 것인데, 어제 다시 뒷말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고, 이어 좌우(左右)에게 이르기를,
"어떠한가?"
하니, 채수가 말하기를,
"옛날에 폐후(廢后)한 자는 혹은 영항(永巷)367) 에 두기도 하고, 혹은 금용성(金墉城)368) 에 처(處)하기도 하였습니다. 김주량(金主亮)은 이적(夷狄)의 임금이요, 소씨(蕭氏)는 망국(亡國)의 임금이었습니다마는, 오히려 전토(田土)를 하사(下賜)하였고, 차마 박하게 대우하지 못했습니다. 원컨대 전하(殿下)께서는 참작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와 같이 하면 후일(後日)의 근심을 알 수 있을 것인데, 어떻게 해서 죄책(罪責)을 가(加)하기를 엄(嚴)하게 하지 않겠는가?"
하니, 채수가 울면서 아뢰기를,
"신이 윤씨(尹氏)를 높여 받들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귀성군(龜城君)과 화의군(和義君)은 모두 다 죄가 크고 악(惡)이 극(極)에 달했는데도 오히려 안치(安置)하고 의식(衣食)을 관(官)에서 공급하는데, 하물며 윤씨는 한 나라의 모의(母儀)가 된 것이겠습니까? 오래도록 사제(私第)에 두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였다. 정창손이 아뢰기를,
"신이 밤낮으로 반복(反覆)하여 생각해보니, 윤씨가 궁금(宮禁)에 있을 때에도 착하지 못한 것이 이와 같았는데, 만약 외인(外人)과 교통(交通)하여 출입(出入)하는데에 방해로움이 없다고 하면, 그 후환(後患)이 어떻겠으며 국가(國家)에 누(累)가 되는 것이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별처(別處)에 두고 담장을 높이하여 외인으로 하여금 출입을 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만약 윤씨에게 죄가 있다고 하면, 국가에는 정해진 형벌이 있는데 무엇을 염려하겠는가?"
하였다. 동지사(同知事) 정효상(鄭孝常)과 윤민(尹慜)이 아뢰기를,
"윤씨의 집은 대대로 청한(淸寒)하여 거실(居室)이 외부로 드러나며, 그 어머니 신씨(申氏)가 또 어질지 못한 사람이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선갑 후갑(先甲後甲)의 교훈을 경계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마땅히 짐작(斟酌)하여 이를 처리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105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23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사법-행형(行刑) / 농업-전제(田制) / 농업-수리(水利) / 사상-불교(佛敎) / 역사-고사(故事)
- [註 367] 영항(永巷) : 죄 있는 궁인(宮人)을 유폐하는 곳.
- [註 368] 금용성(金墉城) : 진(晉)나라 양후(楊后)와 민회 태자(愍懷太子)의 가후(賈后)가 폐출(廢出)되어 있던 곳.
원문
○壬辰/御經筵。 講訖, 執義尹慜啓曰: "儒生本狂簡, 志氣高遠, 其於世事, 未必一一中節。 今者將廢妃不可事, 仰瀆天聰, 命囚禁府。 廢妃之因, 雖在庭大臣, 不能無疑, 及見尹氏事情, 然後, 前疑渙釋, 況在外儒生, 耳目所不及哉? 昔世宗朝, 作內佛堂, 儒生等, 上疏論請, 未蒙兪允, 則榜之曰: ‘異端日興, 吾道日衰, 吾其去矣。’ 世宗猶原貸不問, 以狂簡也。" 上曰: "此非佛堂例也。" 仍顧問左右, 領事鄭昌孫曰: "士方窮養, 乃曰: ‘我能格君心者也, 能直言者也。’ 至於立朝之日, 觀望畏縮, 能直言抗論者, 蓋寡。 乞賜優容, 以養直士之氣。" 尹慜曰: "士修之於家, 尙且毁之於天子之庭, 今若罪之, 則臣恐, 士皆毁之於家矣。" 上謂承旨曰: "勿推。" 尹慜又啓曰: "蒜山之田, 雖先王所賜, 當初賜之之時, 守令等, 見脅於學悅, 多所濫占, 是豈先王之本意耶? 民之忿怨, 固已久矣。" 上曰: "民之忿怨久矣, 而其時未得申訴何歟?" 昌孫啓曰: "自金鍾之死, 由學悅, 而江原道內, 凡有血氣者, 垂首喪氣, 畏之如雷霆, 誰敢違學悅, 而上達哉?" 右副承旨蔡壽啓曰: "臣父, 嘗宰于江原道, 臣於歸覲時, 見上院、洛山間, 越險數重, 相距甚遠。 凡輸材轉石, 皆役居民, 其民黽勉從事, 不敢告勞, 其爲學悅之所刼, 可知。" 上曰: "堤堰與民田相距, 更考其道啓本以啓。" 尹慜啓曰: "洪利老, 依律按罪, 則杖一百、徒三年, 而只收告身, 權擎, 則率私妾赴任, 而只罷職, 後人何所懲乎?" 上曰: "人雖有罪, 功不可掩也。 利老, 有捕賊之功, 且有武才, 終不可不敍, 只收告身可也。 權擎則功臣也, 罷職亦可也。" 昌孫啓曰: "如利老, 豈難得之才? 懲之以警其餘可也。 率私妾, 則比比有之, 而權擎, 不幸事覺耳。" 上曰: "付處利老于外。" 典經安潤孫啓曰: "廢妃之事, 臺諫交章上疏, 則曰: "救罪人者, 其無罪耶?" 弘文館上疏, 則彰君之惡, 成均館儒生上疏, 則囚之禁府。 大抵雷霆之所擊, 無不摧折, 萬鈞之所壓, 無不麋滅, 雖和顔色以受之, 猶恐言不盡意, 若擊之以雷霆之威, 壓之以萬鈞之重, 誰敢抗至尊, 而蹈不測之禍哉? 然則其於言路何?" 上曰: "廢妃之事, 爾旣洞知, 而今復有後言, 何耶?" 仍謂左右曰: "何如?" 蔡壽曰: "古之廢后者, 或置于永巷, 或處于金墉城。 金主 亮, 夷狄之君也; 蕭氏, 亡國之君也, 猶賜之以土田, 不忍待之以薄。 願殿下, 留神焉。" 上曰: "如此則後日之患可知也, 何不嚴加罪責乎?" 蔡壽泣而啓曰: "臣非尊奉尹氏也。 臣意以爲 ‘龜城君、和義君、皆罪大惡極, 而猶且安置, 官給衣食,’ 況尹氏, 爲一國母儀也, 久不可置於私第。" 昌孫啓曰: "臣夙夜反覆思之, 尹氏在宮禁時, 不善如此, 若交通外人, 出入無妨, 則其於後患何。 爲國家累, 豈不大哉? 願置別處, 高其垣墉, 使外人不得以出入。" 上曰: "若尹氏有罪, 則國有常刑, 何慮之爲?" 同知事鄭孝常及尹慜啓曰: "尹氏家世淸寒, 居室淺露, 其母申氏, 又不令之人, 願殿下, 戒先甲後甲之訓。" 上曰: "予當斟酌處之。"
- 【태백산사고본】 16책 105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23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사법-행형(行刑) / 농업-전제(田制) / 농업-수리(水利) / 사상-불교(佛敎) / 역사-고사(故事)
원본
성종 10년 (1479) 6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