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실록 1권, 숙종 24년 남구만·윤지완·최석정·이세백 등이 노산의 위호를 추복하는 의논을 아뢰다
숙종 24년 남구만·윤지완·최석정·이세백 등이 노산의 위호를 추복하는 의논을 아뢰다
국역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남구만(南九萬)이 의논하기를,
"광묘(光廟)017) 께서 정난(靖難)한 거사는 비록 선위(禪位)를 받았다 하오나 실은 혁제(革除)이었고, 비록 처음에는 높여서 상왕(上王)으로 삼았더라도 뒤에는 유종(有終)하지 못하였으니, 오늘에 있어서 우리 후사왕(後嗣王)들은 오직 마땅히 어버이를 위하여 휘(諱)하고 임금을 위하여 휘(諱)하여야 할 뿐이며, 모든 우리 후세의 백성들도 또한 마땅히 나라를 위하여 휘(諱)하여야 할 뿐입니다. 이제 한갓 노산께서 억울[冤鬱]함을 펴심만 알고 어버이[親]에 대하여, 임금[尊]에 대하여, 나라[國]에 대하여 마땅히 휘할 것을 알지 못하니, 그것이 춘추(春秋)의 의리(義理)에 비겨 볼 때 또한 멀지 않겠습니까?
조종조의 일로 중종[中廟] 때의 기묘 사화(己卯士禍), 명종[明廟] 때의 을사 사화(乙巳士禍) 같은 것은 남곤(南袞)·심정(沈貞)·이기(李芑)·윤원형(尹元衡)의 기무(欺誣)에서 나온 것이요, 또 그러므로 임금이 신하를 죄 준 것입니다. 후왕에 미쳐서는 그 억울함을 씻고 다시 그 관직을 회복하였으니, 진실로 조종의 덕에 빛이 있으며, 계술(繼述)의 도리에 해로움이 없었습니다. 노산과 같은 일에 이르러서는 실로 그 때의 사세가 핍박한 데에 인연함이니, 죄를 6신이 격동하여 이룬 것으로 돌림이 불가합니다. 권남(權擥)과 정인지(鄭麟趾)의 밀찬(密贊)도 또한 기묘년·을사년의 신하가 원통하게 죽은 것[冤死]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의 말하기 어려운 것이 이와 같으니, 기왕의 일을 비록 가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단지 의논이 감히 이를 것은 못되니 삼갈 뿐입니다. 이제 곧 그 일을 표거(標擧)하여 시비를 밝혀 말한다면, 변통(變通)함이 있고자 하는 것이요, 그리고 이와 같다면 탕(湯) 임금에게 빛이 있어 반드시 참덕(慙德)의 혐의가 없을 것이니, 진실로 그 무슨 말인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또 이미 왕호를 회복하였다면, 별묘(別廟)에다 봉안(奉安)하는 것은 더욱 근거할 바가 없습니다.
오늘날까지 대수(代數)는 비록 이미 조(祧)에 미쳤으나, 대개 그 위차를 말하면 마땅히 노인(魯人)의 순사(順祀)를 따라 광묘(光廟)의 위에 올려야 할 것이니, 광묘의 양양(洋洋)한 신령이 만약 옛날의 일을 생각한다면, 생각하건대, 반드시 놀라서 돌아보며 슬퍼하여 스스로 뜰가에 오르내림을 편안히 여기지 못할 것이요, 생각하건대, 노산도 또한 반드시 추연(愀然)하고 달연(怛然)하여 분필(芬苾)의 서향(序享)에 즐겨하지 않을 것이니, 신리(神理)와 인정(人情)이 어찌 서로 멀겠습니까? 또 이미 대례를 거행하였으면, 특별히 태묘(太廟)에 고(告)하고 중외(中外)에 교서를 반포(頒布)하여야 할 것입니다. 당시의 화변(禍變)의 연고를 그 사실에 따를 것 같으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만, 만약에 숨기는 바가 있다면 이것은 허문(虛文)이오니, 또한 어찌 신인(神人)에게 진실함이 이르겠습니까?
이 일을 당(唐)·송(宋) 이전에서 상고할 때 증거할 만한 것이 없으나 오직 명조(明朝)에 있어서 경 태제(景泰帝) 때 복호(復號)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종의 즈음에 있어서 노산(魯山)과 현격하게 다름이 있으니, 비길 바가 아닙니다. 그 말년에 이르러 홍광(弘光)이 건문(建文)의 시호를 추상한 일이 바로 이 일과 유사하지만, 그 때의 조정 정사[朝政]를 생각하건대, 모두 마사영(馬士英)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 방란(厖亂)이 극도에 달하였었습니다. 그러므로 건문제의 복호뿐만 아니라, 또 그 사친(私親)을 추존하여 황제(皇帝)로 삼았고, 또 열조(列朝)에 이른 이후로 지위가 있는 모든 신하들에게 현사(賢邪)를 묻지 않고 모두 아름다운 시호를 주시니, 천하에서 그 기소(譏笑)를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일년이 못되어 몸은 사로잡히고 나라가 멸망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본받아야 할 전례(典禮)가 되겠습니까? 그전의 현인(賢人)들이 노산의 일에 대하여 참으로 슬퍼하여 임금에게 아뢴 이가 많았습니다. 어떤 이는 그 묘를 닦기를 청하고, 어떤 이는 그 치체(致祭)를 청하며, 어떤 이는 그 입후(立後)할 것을 청하였으나, 일찍이 복위(復位)하자고까지 한 이는 없었습니다. 오직 저번에 윤휴(尹鑴)가 이 일을 위하여 청하였다가 거절을 당하매, 이제 어찌 다시 윤휴(尹鑴)를 뒤따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윤지완(尹趾完)이 의논하기를,
"이제 이것을 하문[下詢]한 일은 곧 백세에 바꿀 수 없는 정론으로서 오직 이것은 지극히 중하고 지극히 큽니다. 또 이것은 열성(列聖)께서 행하지 못한 바이므로 사람들이 감히 입으로 발설하지 못하였는데, 다행히 이제 강개한 말이 소적(疎逖)한 신하에게서 나왔으되, 성명께서 사람이 미천하다 하여 소홀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척연(惕然)히 감동하시어 이같이 넓게 묻는 거사가 있으니, 아아, 우리 열성(列聖)께서 아직 행하지 못하였던 궐전(闕典)을 오늘에 기다리게 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실로 하늘의 뜻이지 그것이 어찌 사람의 꾀라 하겠습니까? 명하여 절문(節文)을 강(講)하고 욕의(縟儀)를 완성하게 함은 오직 성명의 결단에 있습니다."
하고, 영의정 유상운(柳尙運)이 의논하기를,
"신이 전날 전석(前席)에서 하문하셨을 때에, 감히 전해 들은 것을 가지고 대략 상달한 바 있으나, 노산군을 강봉(降封)하였다는 1절(節)에 대하여서는 어느 때에 있었는지 알지 못하므로 아울러 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엎드려 실록(實錄)에서 등사하여 온 문서를 보면, 호(號)를 내린 것은 송현수(宋玹壽) 등의 변고가 있은 뒤에 있었습니다. 그때의 처분이 이와 같았고, 그 뒤 중종조[中廟朝] 때에 노산에게 입후(立後)하는 의논을 상신(相臣) 정광필(鄭光弼)은, ‘세조에서 처음으로 즉위(卽位)한 때의 일이라 후세에서 경솔히 고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입후함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위호(位號)를 추복함이 어떠한 전례(典禮)이며 지금에 와서 어찌 경솔히 의논하겠습니까? 예(禮)를 말하면 곧 명문(明文)과 정확한 증거가 있어 근거될 만한 것이 없고, 일로 말하면 실로 조종조(祖宗朝)의 처분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조주(祧主)를 직접 영녕전(永寧殿)으로 올리는 1관(款)은 그것이 미안하고 난처한 단서가 되오니, 참으로 오늘날 의논한 사람의 의논과 같이 더욱 십분(十分) 신중을 기하여 지당(至當)한 뒤에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최석정(崔錫鼎)이 의논하기를,
"노산(魯山)이 화를 만난 것은 여러 재상의 밀찬(密贊)에서 이루어졌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지금도 불쌍히 여기오나, 그러나 위호(位號)를 추복(追復)하자는 의논은 듣지 못하였으니, 어찌 《춘추》의 ‘존자(尊者)를 위하여 휘(諱)한다.’ 함이나, 《예기(禮記)》의 ‘그 폐위한 것은 거행하지 못한다.’ 한 뜻의 지극히 중하고 또 엄함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뜻에 위호를 추복함은 비록 감히 경솔하게 논의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다만 생각하건대, 노산께서 일찍이 대위(代位)를 밟으셨다가 폄강(貶降)이 되신 것은 혼덕(昏德)018) 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데도 오늘까지 그 신주(神主)가 오랫동안 여염집에 있어 낮음이 필부와 서인의 천함과 같으니, 끝내 편하지 못한 바가 있었습니다. 만일 관(官)에서 사당을 세우고 4시에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신다면, 거의 신민의 한되고 울분함을 조금이라도 위로할 수 있을 것이요, 또한 《예기》와 《춘추》의 대의(大義)에도 해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우의정 이세백(李世白)이 의논하기를,
"노산께서 선대(禪代)하신 일에 대하여 대개 당시의 사람으로 촌의 아낙네와 마을의 아이 같은 이들이 어찌 일찍이 군신(君臣)의 의리를 알았겠습니까만, 대체로 그 입에서 나와 소리를 발하는 것은 애상(哀傷)하며 참달(慘怛)하는 뜻이 아님이 없으며, 오히려 오늘에 이르러서도 그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온나라 사람으로 그 누가 광묘(光廟)의 신서(臣庶)가 아니겠습니까마는, 오히려 또 그와 같으므로 끝까지 성조(聖祖)의 본심을 우러러 헤아릴 수 있겠으며, 그리고 천리(天理)와 인심(人心)도 또한 스스로 그러할 것을 기약하지 않아도 그러한 것이 있습니다. 전대(前代)의 제왕으로 비록 이성(異姓) 선대(禪代)의 임금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그 위호를 추폄(追貶)하지 아니하였고, 그리고 중조(中朝)의 일에서도 또한 비례(比例)할 만한 일이 있으니, 이제 숭봉하는 의논에 대하여 마땅히 이동(異同)이 없어야 하겠으나, 이 일이 지극히 중한 데 관계되므로 신자(臣子)로서 용이하게 입을 열 곳이 아님이 있습니다. 종전(從前)에는 궐했던 전례(典禮)를 모두 거행하지 않으심이 없으면서도 묘를 수축하고 제사나 드리며 그치는 데 불과하고, 끝까지 의논이 감히 이 일에 미치지 못함은 어찌 그 까닭이 없다 하겠습니까? 오직 성명(聖明)으로 깊이 연구하여 잠잠하게 운행하시며, 애써 의리(義理)로 하여금 지당한 데로 돌아가게 함에 달려 있다 하겠습니다."
하고, 좌참찬 윤증(尹拯)이 의논하기를,
"위호를 추복하는 의논은 실로 국가의 막중 막대(莫重莫大)한 일로서 2백 년 동안의 원울(冤鬱)한 기운을 오늘에 펴게 되었습니다. 아아, 밝으신 여러 성인의 척강(陟降)이 위에 계시고, 그리고 성상의 일념이 위로 천지에 통하였으니, 성하신 덕으로 비상한 거사(擧事)를 하심은 오로지 성단(聖斷)에 있을 뿐입니다."
하고, 호조 참의 권상하(權尙夏)는 의논하기를,
"정난(靖難)할 때에 노산께서 덕 있는 이에게 사양하여 왕위를 전하여 주어 일찍이 높여서 상왕(上王)을 삼았으니, 처음부터 내치고 폐위한 임금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말후(末後)의 처치도 실로 세조 대왕의 본뜻은 아니었습니다. 그 뒤 중종조[中廟朝]에 한산 군수(韓山郡守) 이약빙(李若氷)이 상소하여 노산을 위하여 입후(立後)하기를 청하니, 중묘에서 하교하기를, ‘그 같은 말은 지극히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열성(列聖)의 미의(微意)를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중국 조종의 사실을 가지고 말한다 하더라도 신종조(神宗朝)에 있어서 국자 사업(國子司業) 왕조적(王祖嫡)이 건문(建文)의 연호(年號) 복구를 청하였습니다. 건문제는 성조(成祖)에게 처음부터 전선(傳禪)한 군주가 아닌데도 왕조적의 말은 오히려 또 그와 같았으니, 그것이 오늘날 의논하는 바 의리에 있어서 방조(旁照)의 한 증거가 되지 못하겠습니까? 이제 말일 세조[世廟]께서 숭봉(崇奉)하시던 전례(典禮)를 따라 위호를 추복함으로써 당일에 수선(受禪)한 본 뜻을 밝히신다면 신인(神人)에게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엎드려 듣건대, 중종[中朝]에서 갑신(甲申)뒤에 홍광 황제(弘光皇帝)가 남경에서 사위(嗣位)하였는데, 각로(閣老) 사가법(史可法)이 당국(當國)하여 건문(建文)의 묘호(廟號)를 추존(追尊)하여 혜종(惠宗)이라 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명나라 말기의 유문(遺聞)에서 나왔으나, 야사(野史)는 국승(國乘)과 다릅니다. 신은 또 그 글을 보지도 못하였으니, 감히 끌어 당겨서 증거를 대지도 못하지만 이미 들은 바가 있었으므로 아울러 여기에 붙여 아룁니다."
하였다.
원문
○領中樞府事南九萬議曰: "光廟靖難之擧, 雖曰禪授, 實則革除, 雖曰初尊爲上王, 後則不克有終, 在今我後嗣王, 惟當爲親諱, 爲尊諱而已, 凡在我後民, 亦惟當爲國諱而已。 今徒知魯山冤鬱之可伸, 而不知於親於尊於國之當諱者, 其於春秋之義, 不亦遠乎? 祖宗朝事若中廟己卯、明廟乙巳, 出於袞、貞、芑、元衡之欺誣, 且是以君上罪臣下者也。 及於後王, 追雪其冤, 更復其官, 誠有光於祖宗之德, 而不害於繼述之道。 至若魯山事, 實緣其時事勢之相逼, 不可歸罪於六臣之激成。 擥ㆍ麟趾之密贊, 亦非己卯、乙巳臣下之冤死者比也。 其事之難言如此, 則旣往之事, 雖不可掩, 只宜議論不敢到, 憖置之耳。 今乃標擧其事, 明言是非, 欲有所通變, 而曰‘如此則可以于湯有光, 而必無慙德之嫌’ 云者, 誠不知其何說也。 且旣復王號, 則奉以別廟, 尤無所據。 于今代數雖已及祧, 蓋言其位次, 當從魯人之順祀, 躋在光廟之上, 光廟洋洋之靈, 若念疇昔之事, 想必驚顧怵惕, 不能自安於陟降庭止, 惟魯山亦必愀然怛然, 不樂於芬苾之序享, 神理人情, 夫豈相遠乎? 且旣擧大禮, 則當特告於太廟, 頒敎中外。 當時禍變之故, 若從其實, 則有不敢言者, 若有所隱, 則是虛文也, 亦何以孚格於神人乎? 此事考諸唐、宋以前, 無可爲證, 惟明朝有景泰帝之復號。 然其始終之際, 與魯山有懸殊者, 非所可擬。 及其季也, 弘光之追上建文諡號, 正與此相類, 但念其時朝政, 皆出於馬士英之手, 厖亂極矣。 故非特建文復號, 且追尊其私親爲皇, 至於列朝以來有位諸臣, 不問賢邪, 悉贈美諡, 天下不勝其譏笑。 未朞歲, 身擒國滅, 此何足爲倣行之典禮乎? 伊昔前賢, 於魯山事, 皆爲之衋傷, 陳聞於上者多矣。 或請其修墓, 或請其致祭, 或請其立後, 而未嘗有及於復位者。 惟向日尹鑴以此爲請而見塞矣, 今何可復踵鑴說也?" 領敦寧府事尹趾完議曰: "今此下詢事, 卽百世不易之正論, 而惟其至重至大。 又是列聖所未行者, 故人不敢發諸口矣。 幸於玆者慷慨之言, 出於踈逖之臣, 而聖明不以人微而忽之, 惕然感動, 有此廣詢之擧, 嗚呼! 我列聖未行之闕典, 有待於今日者。 實惟天意, 夫豈人謀? 命講節文, 克完縟儀, 惟在聖明之夬斷。" 領議政柳尙運議曰: "臣於頃日前席下詢之時, 敢以傳聞者略有所達, 而降封魯山君一節, 未知在於何時, 不得竝陳矣。 伏見實錄謄來文書, 則降號在於宋玹壽等變故之後矣。 其時處分如是, 其後中廟朝魯山立後之議, 相臣鄭光弼以爲, ‘世祖初卽位時事, 在後世不可輕改’ 云。 立後猶尙如此, 則追復位號是何等典禮, 而到今輕議乎? 以禮則無明文的證可以爲據, 以事則實係祖宗朝處分。 而如祧主直陞永寧殿一款, 其爲未安難處之端, 儘如今日議者之議, 尤不可不十分愼重, 務歸至當。" 行判中樞府事崔錫鼎議曰: "魯山遭禍, 成於諸宰之密贊, 國人憐之至今, 然而追復位號之論, 久未有聞, 豈不以《春秋》‘爲尊者諱’、《禮》 ‘有其廢莫敢擧’之義, 至嚴且重故歟? 臣之愚意, 追復位號, 雖不敢輕議, 而第念魯山曾踐大位, 貶降非由昏德, 而今其神主久在閭家, 下同於匹庶之賤, 終有所未安。 如令自官建祠, 四時差官行祭, 則庶可以少慰臣民之恨鬱, 而亦無害於《禮》、《春秋》之大義矣。" 右議政李世白議曰: "魯山禪代時事, 大抵當時之人, 如村婦里童, 曷嘗知君臣之義, 而凡其出於口發於聲者, 無非哀傷慘怛之意, 猶至今未已。 一國人類孰非光廟之臣庶, 而尙且如此, 則終始聖祖之本心有可以仰揣, 而天理人心, 亦自有不期然而然者矣。 前代帝王雖於異姓禪代之君, 猶不追貶其位號, 而皇朝之事亦有可以比例者, 則今於崇奉之議, 宜無有異同, 而第玆事關涉至重, 有非臣子容易開口處。 從前闕典, 靡不畢擧, 而不過修墓致祀而止, 終不敢論及此事者, 豈無所以乎? 惟在聖明深究而默運, 務令義理歸於至當而已。" 左參贊尹拯議曰: "追復位號之議, 實爲國家莫重莫大之事, 二百年冤鬱之氣, 得伸於今日。 於昭列聖陟降在上, 而聖上一念上通天地, 盛德非常之擧, 亶在聖斷而已。" 戶曹參議權尙夏議曰: "靖難之際, 魯山讓德傳位, 嘗尊爲上王, 初與放廢之君不同, 末後處置, 實非世祖大王之本意也。 其後中廟朝, 韓山郡守李若氷上疏, 請爲魯山立後, 則中廟下敎曰, ‘如此之言, 至貴也。’ 以此推之, 列聖之微意可見也。 雖以皇朝事言之, 在神宗朝, 國子司業王祖嫡請復建文年號。 建文於成祖, 初非傳禪之主, 而祖嫡之言, 猶且如此, 此於今日所論之義, 似不可爲旁照之一證耶? 今若遵世廟崇奉之典, 追復位號, 以明當日受禪之本意, 則可得無憾於神人。 而又伏聞皇朝甲申後弘光皇帝嗣位於南京, 閣老史可法當國, 追尊建文廟號惠宗。 此出明季遺聞, 而野史異於國乘。 臣又未見其書, 不敢援以爲證, 而旣有所聞, 竝此附奏。"
단종실록 1권, 숙종 24년 남구만·윤지완·최석정·이세백 등이 노산의 위호를 추복하는 의논을 아뢰다
숙종 24년 남구만·윤지완·최석정·이세백 등이 노산의 위호를 추복하는 의논을 아뢰다
국역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남구만(南九萬)이 의논하기를,
"광묘(光廟)017) 께서 정난(靖難)한 거사는 비록 선위(禪位)를 받았다 하오나 실은 혁제(革除)이었고, 비록 처음에는 높여서 상왕(上王)으로 삼았더라도 뒤에는 유종(有終)하지 못하였으니, 오늘에 있어서 우리 후사왕(後嗣王)들은 오직 마땅히 어버이를 위하여 휘(諱)하고 임금을 위하여 휘(諱)하여야 할 뿐이며, 모든 우리 후세의 백성들도 또한 마땅히 나라를 위하여 휘(諱)하여야 할 뿐입니다. 이제 한갓 노산께서 억울[冤鬱]함을 펴심만 알고 어버이[親]에 대하여, 임금[尊]에 대하여, 나라[國]에 대하여 마땅히 휘할 것을 알지 못하니, 그것이 춘추(春秋)의 의리(義理)에 비겨 볼 때 또한 멀지 않겠습니까?
조종조의 일로 중종[中廟] 때의 기묘 사화(己卯士禍), 명종[明廟] 때의 을사 사화(乙巳士禍) 같은 것은 남곤(南袞)·심정(沈貞)·이기(李芑)·윤원형(尹元衡)의 기무(欺誣)에서 나온 것이요, 또 그러므로 임금이 신하를 죄 준 것입니다. 후왕에 미쳐서는 그 억울함을 씻고 다시 그 관직을 회복하였으니, 진실로 조종의 덕에 빛이 있으며, 계술(繼述)의 도리에 해로움이 없었습니다. 노산과 같은 일에 이르러서는 실로 그 때의 사세가 핍박한 데에 인연함이니, 죄를 6신이 격동하여 이룬 것으로 돌림이 불가합니다. 권남(權擥)과 정인지(鄭麟趾)의 밀찬(密贊)도 또한 기묘년·을사년의 신하가 원통하게 죽은 것[冤死]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의 말하기 어려운 것이 이와 같으니, 기왕의 일을 비록 가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단지 의논이 감히 이를 것은 못되니 삼갈 뿐입니다. 이제 곧 그 일을 표거(標擧)하여 시비를 밝혀 말한다면, 변통(變通)함이 있고자 하는 것이요, 그리고 이와 같다면 탕(湯) 임금에게 빛이 있어 반드시 참덕(慙德)의 혐의가 없을 것이니, 진실로 그 무슨 말인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또 이미 왕호를 회복하였다면, 별묘(別廟)에다 봉안(奉安)하는 것은 더욱 근거할 바가 없습니다.
오늘날까지 대수(代數)는 비록 이미 조(祧)에 미쳤으나, 대개 그 위차를 말하면 마땅히 노인(魯人)의 순사(順祀)를 따라 광묘(光廟)의 위에 올려야 할 것이니, 광묘의 양양(洋洋)한 신령이 만약 옛날의 일을 생각한다면, 생각하건대, 반드시 놀라서 돌아보며 슬퍼하여 스스로 뜰가에 오르내림을 편안히 여기지 못할 것이요, 생각하건대, 노산도 또한 반드시 추연(愀然)하고 달연(怛然)하여 분필(芬苾)의 서향(序享)에 즐겨하지 않을 것이니, 신리(神理)와 인정(人情)이 어찌 서로 멀겠습니까? 또 이미 대례를 거행하였으면, 특별히 태묘(太廟)에 고(告)하고 중외(中外)에 교서를 반포(頒布)하여야 할 것입니다. 당시의 화변(禍變)의 연고를 그 사실에 따를 것 같으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만, 만약에 숨기는 바가 있다면 이것은 허문(虛文)이오니, 또한 어찌 신인(神人)에게 진실함이 이르겠습니까?
이 일을 당(唐)·송(宋) 이전에서 상고할 때 증거할 만한 것이 없으나 오직 명조(明朝)에 있어서 경 태제(景泰帝) 때 복호(復號)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종의 즈음에 있어서 노산(魯山)과 현격하게 다름이 있으니, 비길 바가 아닙니다. 그 말년에 이르러 홍광(弘光)이 건문(建文)의 시호를 추상한 일이 바로 이 일과 유사하지만, 그 때의 조정 정사[朝政]를 생각하건대, 모두 마사영(馬士英)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 방란(厖亂)이 극도에 달하였었습니다. 그러므로 건문제의 복호뿐만 아니라, 또 그 사친(私親)을 추존하여 황제(皇帝)로 삼았고, 또 열조(列朝)에 이른 이후로 지위가 있는 모든 신하들에게 현사(賢邪)를 묻지 않고 모두 아름다운 시호를 주시니, 천하에서 그 기소(譏笑)를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일년이 못되어 몸은 사로잡히고 나라가 멸망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본받아야 할 전례(典禮)가 되겠습니까? 그전의 현인(賢人)들이 노산의 일에 대하여 참으로 슬퍼하여 임금에게 아뢴 이가 많았습니다. 어떤 이는 그 묘를 닦기를 청하고, 어떤 이는 그 치체(致祭)를 청하며, 어떤 이는 그 입후(立後)할 것을 청하였으나, 일찍이 복위(復位)하자고까지 한 이는 없었습니다. 오직 저번에 윤휴(尹鑴)가 이 일을 위하여 청하였다가 거절을 당하매, 이제 어찌 다시 윤휴(尹鑴)를 뒤따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윤지완(尹趾完)이 의논하기를,
"이제 이것을 하문[下詢]한 일은 곧 백세에 바꿀 수 없는 정론으로서 오직 이것은 지극히 중하고 지극히 큽니다. 또 이것은 열성(列聖)께서 행하지 못한 바이므로 사람들이 감히 입으로 발설하지 못하였는데, 다행히 이제 강개한 말이 소적(疎逖)한 신하에게서 나왔으되, 성명께서 사람이 미천하다 하여 소홀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척연(惕然)히 감동하시어 이같이 넓게 묻는 거사가 있으니, 아아, 우리 열성(列聖)께서 아직 행하지 못하였던 궐전(闕典)을 오늘에 기다리게 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실로 하늘의 뜻이지 그것이 어찌 사람의 꾀라 하겠습니까? 명하여 절문(節文)을 강(講)하고 욕의(縟儀)를 완성하게 함은 오직 성명의 결단에 있습니다."
하고, 영의정 유상운(柳尙運)이 의논하기를,
"신이 전날 전석(前席)에서 하문하셨을 때에, 감히 전해 들은 것을 가지고 대략 상달한 바 있으나, 노산군을 강봉(降封)하였다는 1절(節)에 대하여서는 어느 때에 있었는지 알지 못하므로 아울러 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엎드려 실록(實錄)에서 등사하여 온 문서를 보면, 호(號)를 내린 것은 송현수(宋玹壽) 등의 변고가 있은 뒤에 있었습니다. 그때의 처분이 이와 같았고, 그 뒤 중종조[中廟朝] 때에 노산에게 입후(立後)하는 의논을 상신(相臣) 정광필(鄭光弼)은, ‘세조에서 처음으로 즉위(卽位)한 때의 일이라 후세에서 경솔히 고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입후함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위호(位號)를 추복함이 어떠한 전례(典禮)이며 지금에 와서 어찌 경솔히 의논하겠습니까? 예(禮)를 말하면 곧 명문(明文)과 정확한 증거가 있어 근거될 만한 것이 없고, 일로 말하면 실로 조종조(祖宗朝)의 처분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조주(祧主)를 직접 영녕전(永寧殿)으로 올리는 1관(款)은 그것이 미안하고 난처한 단서가 되오니, 참으로 오늘날 의논한 사람의 의논과 같이 더욱 십분(十分) 신중을 기하여 지당(至當)한 뒤에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최석정(崔錫鼎)이 의논하기를,
"노산(魯山)이 화를 만난 것은 여러 재상의 밀찬(密贊)에서 이루어졌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지금도 불쌍히 여기오나, 그러나 위호(位號)를 추복(追復)하자는 의논은 듣지 못하였으니, 어찌 《춘추》의 ‘존자(尊者)를 위하여 휘(諱)한다.’ 함이나, 《예기(禮記)》의 ‘그 폐위한 것은 거행하지 못한다.’ 한 뜻의 지극히 중하고 또 엄함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뜻에 위호를 추복함은 비록 감히 경솔하게 논의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다만 생각하건대, 노산께서 일찍이 대위(代位)를 밟으셨다가 폄강(貶降)이 되신 것은 혼덕(昏德)018) 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데도 오늘까지 그 신주(神主)가 오랫동안 여염집에 있어 낮음이 필부와 서인의 천함과 같으니, 끝내 편하지 못한 바가 있었습니다. 만일 관(官)에서 사당을 세우고 4시에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신다면, 거의 신민의 한되고 울분함을 조금이라도 위로할 수 있을 것이요, 또한 《예기》와 《춘추》의 대의(大義)에도 해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우의정 이세백(李世白)이 의논하기를,
"노산께서 선대(禪代)하신 일에 대하여 대개 당시의 사람으로 촌의 아낙네와 마을의 아이 같은 이들이 어찌 일찍이 군신(君臣)의 의리를 알았겠습니까만, 대체로 그 입에서 나와 소리를 발하는 것은 애상(哀傷)하며 참달(慘怛)하는 뜻이 아님이 없으며, 오히려 오늘에 이르러서도 그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온나라 사람으로 그 누가 광묘(光廟)의 신서(臣庶)가 아니겠습니까마는, 오히려 또 그와 같으므로 끝까지 성조(聖祖)의 본심을 우러러 헤아릴 수 있겠으며, 그리고 천리(天理)와 인심(人心)도 또한 스스로 그러할 것을 기약하지 않아도 그러한 것이 있습니다. 전대(前代)의 제왕으로 비록 이성(異姓) 선대(禪代)의 임금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그 위호를 추폄(追貶)하지 아니하였고, 그리고 중조(中朝)의 일에서도 또한 비례(比例)할 만한 일이 있으니, 이제 숭봉하는 의논에 대하여 마땅히 이동(異同)이 없어야 하겠으나, 이 일이 지극히 중한 데 관계되므로 신자(臣子)로서 용이하게 입을 열 곳이 아님이 있습니다. 종전(從前)에는 궐했던 전례(典禮)를 모두 거행하지 않으심이 없으면서도 묘를 수축하고 제사나 드리며 그치는 데 불과하고, 끝까지 의논이 감히 이 일에 미치지 못함은 어찌 그 까닭이 없다 하겠습니까? 오직 성명(聖明)으로 깊이 연구하여 잠잠하게 운행하시며, 애써 의리(義理)로 하여금 지당한 데로 돌아가게 함에 달려 있다 하겠습니다."
하고, 좌참찬 윤증(尹拯)이 의논하기를,
"위호를 추복하는 의논은 실로 국가의 막중 막대(莫重莫大)한 일로서 2백 년 동안의 원울(冤鬱)한 기운을 오늘에 펴게 되었습니다. 아아, 밝으신 여러 성인의 척강(陟降)이 위에 계시고, 그리고 성상의 일념이 위로 천지에 통하였으니, 성하신 덕으로 비상한 거사(擧事)를 하심은 오로지 성단(聖斷)에 있을 뿐입니다."
하고, 호조 참의 권상하(權尙夏)는 의논하기를,
"정난(靖難)할 때에 노산께서 덕 있는 이에게 사양하여 왕위를 전하여 주어 일찍이 높여서 상왕(上王)을 삼았으니, 처음부터 내치고 폐위한 임금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말후(末後)의 처치도 실로 세조 대왕의 본뜻은 아니었습니다. 그 뒤 중종조[中廟朝]에 한산 군수(韓山郡守) 이약빙(李若氷)이 상소하여 노산을 위하여 입후(立後)하기를 청하니, 중묘에서 하교하기를, ‘그 같은 말은 지극히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열성(列聖)의 미의(微意)를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중국 조종의 사실을 가지고 말한다 하더라도 신종조(神宗朝)에 있어서 국자 사업(國子司業) 왕조적(王祖嫡)이 건문(建文)의 연호(年號) 복구를 청하였습니다. 건문제는 성조(成祖)에게 처음부터 전선(傳禪)한 군주가 아닌데도 왕조적의 말은 오히려 또 그와 같았으니, 그것이 오늘날 의논하는 바 의리에 있어서 방조(旁照)의 한 증거가 되지 못하겠습니까? 이제 말일 세조[世廟]께서 숭봉(崇奉)하시던 전례(典禮)를 따라 위호를 추복함으로써 당일에 수선(受禪)한 본 뜻을 밝히신다면 신인(神人)에게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엎드려 듣건대, 중종[中朝]에서 갑신(甲申)뒤에 홍광 황제(弘光皇帝)가 남경에서 사위(嗣位)하였는데, 각로(閣老) 사가법(史可法)이 당국(當國)하여 건문(建文)의 묘호(廟號)를 추존(追尊)하여 혜종(惠宗)이라 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명나라 말기의 유문(遺聞)에서 나왔으나, 야사(野史)는 국승(國乘)과 다릅니다. 신은 또 그 글을 보지도 못하였으니, 감히 끌어 당겨서 증거를 대지도 못하지만 이미 들은 바가 있었으므로 아울러 여기에 붙여 아룁니다."
하였다.
원문
○領中樞府事南九萬議曰: "光廟靖難之擧, 雖曰禪授, 實則革除, 雖曰初尊爲上王, 後則不克有終, 在今我後嗣王, 惟當爲親諱, 爲尊諱而已, 凡在我後民, 亦惟當爲國諱而已。 今徒知魯山冤鬱之可伸, 而不知於親於尊於國之當諱者, 其於春秋之義, 不亦遠乎? 祖宗朝事若中廟己卯、明廟乙巳, 出於袞、貞、芑、元衡之欺誣, 且是以君上罪臣下者也。 及於後王, 追雪其冤, 更復其官, 誠有光於祖宗之德, 而不害於繼述之道。 至若魯山事, 實緣其時事勢之相逼, 不可歸罪於六臣之激成。 擥ㆍ麟趾之密贊, 亦非己卯、乙巳臣下之冤死者比也。 其事之難言如此, 則旣往之事, 雖不可掩, 只宜議論不敢到, 憖置之耳。 今乃標擧其事, 明言是非, 欲有所通變, 而曰‘如此則可以于湯有光, 而必無慙德之嫌’ 云者, 誠不知其何說也。 且旣復王號, 則奉以別廟, 尤無所據。 于今代數雖已及祧, 蓋言其位次, 當從魯人之順祀, 躋在光廟之上, 光廟洋洋之靈, 若念疇昔之事, 想必驚顧怵惕, 不能自安於陟降庭止, 惟魯山亦必愀然怛然, 不樂於芬苾之序享, 神理人情, 夫豈相遠乎? 且旣擧大禮, 則當特告於太廟, 頒敎中外。 當時禍變之故, 若從其實, 則有不敢言者, 若有所隱, 則是虛文也, 亦何以孚格於神人乎? 此事考諸唐、宋以前, 無可爲證, 惟明朝有景泰帝之復號。 然其始終之際, 與魯山有懸殊者, 非所可擬。 及其季也, 弘光之追上建文諡號, 正與此相類, 但念其時朝政, 皆出於馬士英之手, 厖亂極矣。 故非特建文復號, 且追尊其私親爲皇, 至於列朝以來有位諸臣, 不問賢邪, 悉贈美諡, 天下不勝其譏笑。 未朞歲, 身擒國滅, 此何足爲倣行之典禮乎? 伊昔前賢, 於魯山事, 皆爲之衋傷, 陳聞於上者多矣。 或請其修墓, 或請其致祭, 或請其立後, 而未嘗有及於復位者。 惟向日尹鑴以此爲請而見塞矣, 今何可復踵鑴說也?" 領敦寧府事尹趾完議曰: "今此下詢事, 卽百世不易之正論, 而惟其至重至大。 又是列聖所未行者, 故人不敢發諸口矣。 幸於玆者慷慨之言, 出於踈逖之臣, 而聖明不以人微而忽之, 惕然感動, 有此廣詢之擧, 嗚呼! 我列聖未行之闕典, 有待於今日者。 實惟天意, 夫豈人謀? 命講節文, 克完縟儀, 惟在聖明之夬斷。" 領議政柳尙運議曰: "臣於頃日前席下詢之時, 敢以傳聞者略有所達, 而降封魯山君一節, 未知在於何時, 不得竝陳矣。 伏見實錄謄來文書, 則降號在於宋玹壽等變故之後矣。 其時處分如是, 其後中廟朝魯山立後之議, 相臣鄭光弼以爲, ‘世祖初卽位時事, 在後世不可輕改’ 云。 立後猶尙如此, 則追復位號是何等典禮, 而到今輕議乎? 以禮則無明文的證可以爲據, 以事則實係祖宗朝處分。 而如祧主直陞永寧殿一款, 其爲未安難處之端, 儘如今日議者之議, 尤不可不十分愼重, 務歸至當。" 行判中樞府事崔錫鼎議曰: "魯山遭禍, 成於諸宰之密贊, 國人憐之至今, 然而追復位號之論, 久未有聞, 豈不以《春秋》‘爲尊者諱’、《禮》 ‘有其廢莫敢擧’之義, 至嚴且重故歟? 臣之愚意, 追復位號, 雖不敢輕議, 而第念魯山曾踐大位, 貶降非由昏德, 而今其神主久在閭家, 下同於匹庶之賤, 終有所未安。 如令自官建祠, 四時差官行祭, 則庶可以少慰臣民之恨鬱, 而亦無害於《禮》、《春秋》之大義矣。" 右議政李世白議曰: "魯山禪代時事, 大抵當時之人, 如村婦里童, 曷嘗知君臣之義, 而凡其出於口發於聲者, 無非哀傷慘怛之意, 猶至今未已。 一國人類孰非光廟之臣庶, 而尙且如此, 則終始聖祖之本心有可以仰揣, 而天理人心, 亦自有不期然而然者矣。 前代帝王雖於異姓禪代之君, 猶不追貶其位號, 而皇朝之事亦有可以比例者, 則今於崇奉之議, 宜無有異同, 而第玆事關涉至重, 有非臣子容易開口處。 從前闕典, 靡不畢擧, 而不過修墓致祀而止, 終不敢論及此事者, 豈無所以乎? 惟在聖明深究而默運, 務令義理歸於至當而已。" 左參贊尹拯議曰: "追復位號之議, 實爲國家莫重莫大之事, 二百年冤鬱之氣, 得伸於今日。 於昭列聖陟降在上, 而聖上一念上通天地, 盛德非常之擧, 亶在聖斷而已。" 戶曹參議權尙夏議曰: "靖難之際, 魯山讓德傳位, 嘗尊爲上王, 初與放廢之君不同, 末後處置, 實非世祖大王之本意也。 其後中廟朝, 韓山郡守李若氷上疏, 請爲魯山立後, 則中廟下敎曰, ‘如此之言, 至貴也。’ 以此推之, 列聖之微意可見也。 雖以皇朝事言之, 在神宗朝, 國子司業王祖嫡請復建文年號。 建文於成祖, 初非傳禪之主, 而祖嫡之言, 猶且如此, 此於今日所論之義, 似不可爲旁照之一證耶? 今若遵世廟崇奉之典, 追復位號, 以明當日受禪之本意, 則可得無憾於神人。 而又伏聞皇朝甲申後弘光皇帝嗣位於南京, 閣老史可法當國, 追尊建文廟號惠宗。 此出明季遺聞, 而野史異於國乘。 臣又未見其書, 不敢援以爲證, 而旣有所聞, 竝此附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