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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51권, 세종 13년 3월 17일 신사 3번째기사 1431년 명 선덕(宣德) 6년

무묘를 세우고자 박아생의 상서에 대해 논의하다

사직(司直) 박아생(朴芽生)이 상서(上書)하기를,

"삼대(三代) 이상에서는 문(文)과 무(武)를 한결같이 하였기 때문에, 고굉(股肱)의 대신들이 들어오면 정승이 되고, 나가면 장수가 되었으며, 천하를 다스리는 데도 순연 부잡(純然不雜)하였습니다. 삼대 이하로 오면서 문무를 함께 일으켜,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유신(儒臣)들과 계책을 세우고, 군사 문제를 다스리는 일은 무신(武臣)들과 계책을 강구하여 천하를 편안히 다스려 왔던 것이니, 그 유래가 유구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을 숭상하고 무를 폐지할 수 없으며, 무만을 닦고 문을 폐지해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러하옵기에 문무의 이치를 놓고 그 하나만을 고집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공자(孔子)는 선성(先聖)의 뒤를 이어 장래 학문의 길을 열어 만대에 법을 전해 주신 까닭에, 예로부터 지금까지 온 천하 각국에서 문묘(文廟)를 세우고는 제향하고 있으며, 여망(呂望)무후(武侯)의 재능으로 백성을 도탄(塗炭) 속에서 건져내어 각기 편히 그 업(業)에 종사하고 연수(年壽)를 누리게 하였으며, 난세(亂世)를 다스려 정도(正道)를 되찾게 하였은즉, 그 공로도 혁혁하거니와 또 비서(秘書)를 후세에 전했기 때문에 옛날의 성군(聖君)들이 무묘(武廟)를 세워 제향하던 것을 후세에 와서 다만 문(文)의 숭상만을 일삼고 이내 이를 폐하고 말았으나, 이는 문·무의 도(道)를 다한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태종 대왕께서 하늘이 내신 성인(聖人)으로 즉위하신 지 수년이 못되어 만사가 다 잘 다스려지매, 비로소 무과(武科)로 인재를 선발하는 법을 실시하시니 이는 문을 숭상하며 무를 연수(鍊修)하는 길을 다함이요, 과거를 실시하여 인재를 선발하는 법도 더할 수 없이 다한 것입니다. 신이 다행하게도 무묘도(武廟圖)를 얻어 바치오니, 원컨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무묘(武廟)를 훈련관(訓鍊觀) 북쪽에 세우고, 아울러 둑소(纛所)도 이것에 옮겨, 무거(武擧)의 무리로 하여금 제향에 참사하게 하시면 문무의 길이 갖추어질 것입니다."

하니, 명하여 이를 상정소(詳定所)에 내리고, 또 집현전(集賢殿)으로 하여금 고제(古制)를 참고하게 하였다. 임금이 사마온공(司馬溫公)의 논의를 보고 말하기를,

"문무(文武)란 본래 두 가지가 아닌 것인데, 만약 무성왕묘(武成王廟)를 따로 세운다면, 이는 상도(常道)에 벗어나는 일이다."

하니, 상정소 제조(詳定所提調) 맹사성(孟思誠)·허조(許稠)·정초(鄭招) 등이 이를 검토 평론해 올리기를,

"옛부터 문묘를 세우고 공자(孔子)를 제사해 온 것은, 오로지 문만을 위함이 아니요, 이는 곧 하늘 같으신 성인으로서 만대에 교훈을 남겨, 수많은 제왕의 스승이 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따로 무묘(武廟)를 세울 것 같으면, 이것은 공자는 문을 전업으로 하고, 태공(太公)은 무를 전업으로 한 것이 되어, 문·무를 하나로 보는 본의가 아닐 것입니다. 하물며 본조에서는 무과의 시험을 당하여 아울러 경서까지 시험하고 있사온즉, 이는 문·무를 둘로 다루지 않는 것이며, 무묘를 세운 부당성을 온공(溫公)이 이미 밝힌 논문이 있사온즉, 이제 무엇을 다시 논의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51권 34장 B면【국편영인본】 3책 304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司直朴芽生上書曰:

    三代而上, 文與武爲一, 而股肱大臣, 入則爲相, 出則爲將, 其理天下也, 純然不雜。 三代而下, 文武竝興, 而治國則策儒臣, 治軍則策武臣, 以安天下, 其來尙矣。 若然則崇文廢武, 未可也; 修武廢文, 亦未可也。 是故文武之理, 不可守一。 孔子繼往聖、開來學, 垂法萬世, 自古迄今, 天下諸國立文廟以祭享之。 呂望武侯之材, 拯民於塗炭之中, 躋民於仁壽之域, 足以拔亂反正, 其功赫然, 而且傳秘書於後世, 故古之聖君, 建武廟以祭享之, 及乎後世, 但事崇文, 因而廢之, 不可謂盡文武道也。 我太宗大王天縱聖憲, 卽位不數年, 而萬事乃理, 始設武科取人之法, 崇文修武之道盡矣, 設科取士之法至矣。 臣幸得武廟圖以進, 願令攸司設武廟於訓鍊觀之北, 幷移纛所, 令武擧之徒參祭, 文武之道備矣。

    命下詳定所, 又令集賢殿參考古制。 上覽司馬溫公議曰: "文武非二致也。 若別立武成王廟, 其不經甚矣。" 詳定所提調孟思誠許稠鄭招等議曰: "自古建文廟以祀孔子者, 非爲專文, 乃以天縱之聖, 垂訓萬世, 爲百王之師故也。 今若別立武廟, 則是孔子專文, 太公專武, 而非文武一體之道也。 況本朝當試武科之時, 幷試經書, 則非以文武爲二也。 且建武廟之非, 溫公已嘗著論, 今何更議?" 上然之。


    • 【태백산사고본】 16책 51권 34장 B면【국편영인본】 3책 304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