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실록35권, 태종 18년 2월 4일 을유 1/1 기사 / 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성녕 대군 이종의 졸기
국역
성녕 대군(誠寧大君) 이종(李)이 졸(卒)하였다. 종(
)은 임금의 제4자(第四子)로서 어렸으나, 총명하고 지혜로왔고 용모가 단정하고 깨끗하였고 행동거지가 공순(恭順)하였으므로, 임금과 정비(靜妃)가 끔찍이 사랑하여 항상 궁중에 두고 옆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나이 12세에 총제(摠制) 성억(成抑)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일찍이 궁위(宮闈)088) 를 나가지 아니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창진(瘡胗)에 걸려서 바야흐로 병이 심해지니, 신(神)에게 제사지내지 아니함이 없었고, 마음을 다하여 기도(祈禱)하였다. 충녕 대군(忠寧大君)이 의원(醫員) 원학(元鶴)을 거느리고 밤낮으로 항상 종(
)의 곁에 있으면서 자세히 방서(方書)089) 를 궁구(窮究)하여 일찍이 손에서 놓지 않았고 친히 약이(藥餌)를 잡아 병을 구료(救療)하니, 양전(兩殿)이 그 지성에 감복하였다. 졸(卒)하게 되자 나이 14세였다. 임금이 철선(輟膳)090) 하고 통도(痛悼)091) 하여 조회와 저자를 3일 동안 정지하고, 예조 참판 신상(申商)과 공조 참판 이적(李迹)에게 명하여 호상(護喪)하게 하고, 부정윤(副正尹) 이승(李昇)으로서 상(喪)을 주장하게 하였다. 빈장 도감(殯葬都監)을 세워 사(使)·부사(副使)·판관(判官) 각각 2원(員)이 그 상(喪)을 다스렸는데, 상제(喪制)는 한결같이 문공가례(文公家禮)에 의하였다. 이튿날이 지나서 미명(未明)에 그 영구(靈柩)가 돈화문(敦化門)으로부터 나와서 사제(私第)에서 염빈(殮殯)하였다. 종(
)은 충성스럽고 효성스럽고 형제간에 우애함이 천성(天性)에서 나왔으며, 학문에 부지런하고 활을 잘 쏘았으나 다른 기호(嗜好)는 없었다.
- [註 088] 궁위(宮闈) : 궁중(宮中)의 내전(內殿).
- [註 089] 방서(方書) : 의서(醫書).
- [註 090] 철선(輟膳) : 수라를 들지 않음.
- [註 091] 통도(痛悼) : 심히 애통함.
원문
태종 18년 (1418) 2월 4일
국역
성녕 대군(誠寧大君) 이종(李)이 졸(卒)하였다. 종(
)은 임금의 제4자(第四子)로서 어렸으나, 총명하고 지혜로왔고 용모가 단정하고 깨끗하였고 행동거지가 공순(恭順)하였으므로, 임금과 정비(靜妃)가 끔찍이 사랑하여 항상 궁중에 두고 옆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나이 12세에 총제(摠制) 성억(成抑)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일찍이 궁위(宮闈)088) 를 나가지 아니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창진(瘡胗)에 걸려서 바야흐로 병이 심해지니, 신(神)에게 제사지내지 아니함이 없었고, 마음을 다하여 기도(祈禱)하였다. 충녕 대군(忠寧大君)이 의원(醫員) 원학(元鶴)을 거느리고 밤낮으로 항상 종(
)의 곁에 있으면서 자세히 방서(方書)089) 를 궁구(窮究)하여 일찍이 손에서 놓지 않았고 친히 약이(藥餌)를 잡아 병을 구료(救療)하니, 양전(兩殿)이 그 지성에 감복하였다. 졸(卒)하게 되자 나이 14세였다. 임금이 철선(輟膳)090) 하고 통도(痛悼)091) 하여 조회와 저자를 3일 동안 정지하고, 예조 참판 신상(申商)과 공조 참판 이적(李迹)에게 명하여 호상(護喪)하게 하고, 부정윤(副正尹) 이승(李昇)으로서 상(喪)을 주장하게 하였다. 빈장 도감(殯葬都監)을 세워 사(使)·부사(副使)·판관(判官) 각각 2원(員)이 그 상(喪)을 다스렸는데, 상제(喪制)는 한결같이 문공가례(文公家禮)에 의하였다. 이튿날이 지나서 미명(未明)에 그 영구(靈柩)가 돈화문(敦化門)으로부터 나와서 사제(私第)에서 염빈(殮殯)하였다. 종(
)은 충성스럽고 효성스럽고 형제간에 우애함이 천성(天性)에서 나왔으며, 학문에 부지런하고 활을 잘 쏘았으나 다른 기호(嗜好)는 없었다.
- [註 088] 궁위(宮闈) : 궁중(宮中)의 내전(內殿).
- [註 089] 방서(方書) : 의서(醫書).
- [註 090] 철선(輟膳) : 수라를 들지 않음.
- [註 091] 통도(痛悼) : 심히 애통함.
원문
원본
태종 18년 (1418) 2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