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세의 동전법을 의논하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의 집에 가서 동전법(銅錢法)을 의논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포백(布帛)으로 세(稅)를 거두는 것은 중국 명왕(明王)의 유법(遺法)이다. 오늘날 30분의 1을 세로 받았는데, 20장에 차지 못하는 것은 종이[紙]로 계산하여 거두게 되니, 어린아이 장난과 같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동(銅)·철(鐵)·연(鉛)·석(錫) 4등(等)의 전법(錢法)이 있으므로, 이제 이 법을 행하려고 한다. 그러면 포백으로 세를 거두는 것보다 편하고, 제사고기[脁]를 기화로 하는 근심도 없어질 것이다. 다만 몰래 돈을 주조(鑄造)할까 두려우나, 마땅히 금주(禁鑄)의 영(令)이 있을 것이며, 또 옛날에 포(布)를 사용할 때에도 백성들이 직조(織造)함을 들어주었으니, 비록 돈을 몰래 주조한다 하더라도 어찌 해로울 게 있겠는가?"
변계량이 임금의 뜻을 전하니, 하윤(河崙)이 말하였다.
"중국 조정의 저폐(楮幣)는 1천 문(文)에 준하는 것 외에 또 9백 문에서 1백 문(一百文) 짜리까지 있습니다. 당초에 저폐의 법을 세워 시행할 때 역시 소저폐(小楮幣)를 만들어 중국의 제도를 모방할 것을 계속하여 청하려고 하였으나, 천연(遷延)되어 이루지 못했습니다. 민간(民間)으로 하여금 중(重)함은 있고 경(輕)함은 없게 하여, 행용(行用)할 때에 영축(盈縮)이 없지 못함이 진실로 성상의 교지와 같습니다. 그러나, 동전을 주조하면 반드시 동전은 중하고 저폐는 경하게 되어, 백성들이 더욱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청컨대, 작은 저폐를 만들어서 오늘날 대초(大鈔)를 1천 문에 준하게 하시고, 차차 이를 강등하여 10으로 하여서 9백 문에서 1백 문에 이르기까지 9개 등급의 저폐를 만들면, 거의 포백으로 세를 거두는 것보다 편할 것이고, 또 민간에서 되[升]를 헤아려 매매하는 것보다 더욱 이로울 것입니다."
이에 변계량이 복명(復命)하니, 육조에 명하여 명일에 의논에 올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환관(宦官) 최한(崔閑)에게 명하여 소저화(小楮貨)를 만드는 것의 편부(便否)를 승정원에 왕복하며 논란(論難)케 하고, 또 묻기를,
"소저화(小楮貨)의 신문(信文)152) 은 어떤 물건을 사용해야 좋겠는가?"
하니, 지신사 유사눌(柳思訥)이 말하였다.
"중국에서는 전에 동전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전관(錢貫)의 다소로써 저화의 신문(信文)을 삼았습니다. 만약 쌀되[米升]로써 계산하면, 쌀값의 다소가 수시(隨時)로 오르고 내리기 때문에 준거할 수 없습니다. 본국에서는 이미 포필(布匹)로써 저화의 신용을 삼고 있으니, 진실로 마땅히 포필의 척수(尺數)로써 그 등급[等第]을 나눔이 좋겠습니다. 즉, 35척을 극수(極數)로 하여 3척씩 내려 나누어 9등급으로 하면 거의 사용에 편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영수(零數)가 있어서 추이(推移)할 수가 없습니다. 가령 오늘날 저화 1장을 가지고 종이 60장을 사며, 1되의 쌀을 가지고 종이 6장을 살 것 같으면, 세(稅)를 부과하는 법은 목면(木綿) 1필에 종이 30장을 거두고, 정5승포(正五升布) 1필엔 종이 10장을 거두게 하소서. 지금 정5승포 1필에 종이 12장을 거두게 되면 너무 많고, 만약에 이를 감해서 받는다면 작은 것이 쌓여서 많게 될 것이니, 이익을 버림이 너무 많습니다. 진실로 돈을 주조하여 행용(行用)함만 같지 못하고, 낱낱이 세를 거두어 편리하고 또 정제(整齊)할 것입니다."
좌부대언(佐副代言) 탁신(卓愼)이 말하였다.
"대초(大鈔) 외에 10분의 1의 소초(小鈔)만을 만들어 다만 대·소(大小)로써만 사용하게 한다면, 거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간악한 상인에게 속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며, 또 사용하는 데도 편할 것입니다."
좌부대언 조말생(趙末生)이 하윤의 말에 따르도록 청하였다.
"더[盈]하거나 줄이[縮]는 물건은 세[稅]를 거두는 예(例)에 두지 마소서."
의논이 분분하여 결정을 보지 못하였다. 임금이 최한(崔閑)에게 명하여 선포하였다.
"내가 장차 《문헌통고(文獻通考)》를 승정원에 내려보내어 동전의 주조법을 자세히 상고하게 하겠다. 또 생각건대, 전조(前朝)에서 나라를 보유한 지 5백여 년인데 일찍이 이 법을 사용하지 못했고, 태조(太祖)가 일찍이 이 법을 사용하지 않았으니, 내 몸에 이르러서 어찌 노심 초사(勞心焦思)해 가며 민중의 원망을 사겠는가? 수세(收稅)의 법은 역시 사용하지 않음이 마땅하겠다."
임금의 뜻은 대체로 초법(鈔法)은 백성들이 사용하기를 즐겨하지 않음을 염려하여, 동전(銅錢)을 행용(行用)해서 백성들을 길들여서 고치려고 한 것인데, 유사눌이 이것을 찬성하였다고 한다.
- 【태백산사고본】 13책 29권 42장 A면【국편영인본】 2책 69면
- 【분류】금융-화폐(貨幣) / 재정-잡세(雜稅) / 물가-물가(物價)
- [註 152]신문(信文) : 화폐 가치의 표준이 되는 물건이나 또는 그것의 수량.
○命藝文館提學卞季良, 往晋山府院君 河崙第, 議銅錢法。 上曰: "布帛收稅, 中國明王之遺法。 今者三十稅一, 其不滿二十張者, 計紙收之, 有同兒戲。 《文獻通考》有銅鐵鉛錫四等錢法, 今欲行之, 庶便於布帛收稅, 無奇脁之患。 又恐盜鑄, 然當有禁鑄之令。 且昔日用布, 亦聽民織造, 雖其盜鑄, 亦何傷乎?" 季良往傳上旨, 崙謂: "中朝楮幣, 準一千文之外, 又有九百, 至一百文者。 初建行楮幣之時, 亦欲續請造小楮幣, 以倣華制, 遷延未果, 致令民間有重無輕, 用行之際, 不無盈縮, 誠如上旨。 然造銅錢, 必致錢重幣輕, 民益不用。 請造小楮幣, 以今大鈔準一千文, 降殺以十, 自九百至一百, 作九等楮貨, 庶便於布帛收稅, 且尤利於民間數升買賣矣。" 季良復命, 命六曹於明日上議, 仍命宦官崔閑往復論難造小楮貨便否於承政院, 且問: "小楮信文, 當用何物?" 知申事柳思訥謂: "中國舊用錢, 故以錢貫多小, 爲楮貨之信。 若以米升爲計, 則米價多小, 隨時高下, 不可準擬。 本國旣以布匹爲楮貨之信, 固當以布匹尺數, 分其等第, 以三十五尺爲極數, 降以三尺, 分爲九等, 庶便於用。 然尙有零數, 不能推移。 假如今以楮貨一張, 買紙六十張, 一升米買紙六張, 着稅之法, 木綿一匹收紙三十張, 正五升布收紙十張。 今者正五升布一匹, 收紙十二張則太多, 若減取則又積少成多。 遺利甚多, 固不若鑄錢行用, 箇箇取之之爲便, 且整齊也。" 左代言卓愼言: "大鈔之外, 只造十分之一之小鈔, 只以大小用之, 庶愚民不見欺於奸商, 且用之爲便。" 左副代言趙末生請依河崙之言, 而或盈或縮之物, 不在收稅之例, 紛紜未決。 上命崔閑宣曰: "吾將下《文獻通考》於承政院, 令詳考造錢之法。 又念前朝有國五百餘年, 未嘗用此法, 太祖亦未嘗用之。 至於吾身, 何爲勞心焦思, 以斂衆怨乎? 收稅之法, 亦當不用矣。" 上意, 蓋慮鈔法民不樂用, 欲因行用銅錢, 馴致改之, 思訥贊之云。
- 【태백산사고본】 13책 29권 42장 A면【국편영인본】 2책 69면
- 【분류】금융-화폐(貨幣) / 재정-잡세(雜稅) / 물가-물가(物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