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실록20권, 태종 10년 12월 1일 계사 2/2 기사 / 1410년 명 영락(永樂) 8년
동원군 함부림의 졸기
국역
동원군(東原君) 함부림(咸傅霖)이 졸(卒)하였다. 함부림은 강릉부(江陵府) 사람인데, 자(字)는 윤물(潤物)이요, 자호(自號)는 난계(蘭溪)요, 검교 중추원 학사(檢校中樞院學士) 함승경(咸承慶)의 아들이다. 홍무(洪武) 을축년에 급제하여 예문 검열(藝文檢閱)에 등용(登用)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좌정언(左正言)에 옮기었다. 공양왕(恭讓王)이 서매, 발탁하여 우헌납(右獻納)을 제수하였는데, 일을 논하다가 왕지(王旨)를 거슬러서 지춘주사(知春州事)로 폄출(貶出)되었다가, 다시 소환되어 형조 정랑(刑曹正郞)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중방(重房)의 여러 장수(將帥)가 궁내의 세력을 믿고 동반(東班)을 멸시하니, 함부림이 조금도 굽히지 않고 이와 더불어 겨루다가, 이 때문에 벼슬을 잃었다. 임신년 4월에 태조(太祖)가 국사를 담당하자, 병조 정랑(兵曹正郞) 겸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경력사 도사(經歷司都事)를 제수하였고, 7월에 태조가 천명(天命)을 받으매, 추대(推戴)의 모의에 참여하여 예조 의랑(禮曹議郞)에 발탁되고, 훈공(勳功) 삼등(三等)에 책록(策錄)되어 익대 개국 공신(翊戴開國功臣)의 칭호(稱號)를 하사 받았는데, 벼슬이 빨리 올라 좌산기 상시(左散騎常侍) 겸 상서 소윤(尙瑞少尹)에 이르러 전선(銓選)에 참여하여 주관하였다. 아비의 상(喪)을 당하여 복이 끝나매, 명성군(溟城君)에 봉해졌다. 계미년 3월에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에 제수되어, 동원군(東原君)으로 개봉(改封)되고, 갑신년 10월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서 파직되었다. 무자년 10월에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제수되어 그 해를 넘기고 병으로 사면 하였다. 함부림은 강직하여 지키는 바가 있고, 입조(立朝)하여 과감하게 말하고 이치(吏治)에 민첩하여, 이르는 곳마다 직책을 잘 수행하였다. 경기(京畿)·충청도(忠淸道)·경상도(慶尙道)·전라도(全羅道)·황해도(黃海道)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와 동북면도순문찰리사(東北面都巡問察理使)를 역임하였는데, 청렴 결백한 것으로 자임(自任)하여 감사(監司)의 위엄을 떨치고, 일찍이 굽히거나 흔들리지 않으니, 부내(部內)가 두려워하고 복종하였다. 죽으니 나이 51세였다. 임금이 슬퍼하여 철조(輟朝)하기를 3일 동안 하고, 중사(中使)를 보내어 조제(弔祭)하고 시호를 정평(定平)이라 하였다. 두 아들이 있으니, 함우공(咸禹功)·함우치(咸禹治)이다.
- 【태백산사고본】 8책 20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1책 571면
원문
○東原君 咸傅霖卒。 傅霖, 江陵府人, 字潤物, 自號蘭溪, 檢校中樞院學士承慶之子。 洪武乙丑, 及第, 調藝文檢閱, 累遷左正言。 恭讓王立, 擢拜右獻納, 論事忤旨, 貶知春州, 召拜刑曹正郞。 時, 重房諸將, 內有所挾, 蔑視東班, 傅霖不少屈, 與之抗禮, 坐此失官。 壬申四月, 太祖當國, 拜兵曹正郞兼都評議使司、經歷司都事。 七月, 太祖受命, 以與推戴之謀, 擢禮曹議郞, 策勳三等, 賜號翊戴開國功臣, 驟遷至左散騎常侍兼尙瑞少尹, 參典銓選, 遭父憂, 服闋, 封溟城君。 癸未三月, 拜參知議政府事, 改封東原君。 甲申十月, 拜司憲府大司憲, 未幾而罷。 戊子十月, 拜刑曹判書, 踰年病免。 傅霖剛直有守, 立朝敢言; 敏於吏治, 所至稱職。 歷任京畿ㆍ忠淸ㆍ慶尙ㆍ全羅ㆍ黃海道都觀察黜陟使、東北面都巡問察理使, 常以澄淸自任, 振監司之威, 未嘗挫撓, 部內畏服。 卒年五十一。 上悼之, 輟朝三日, 遣中使弔祭, 諡曰定平。 二子, 禹功、禹治。
- 【태백산사고본】 8책 20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1책 571면
태종 10년 (1410) 12월 1일
국역
동원군(東原君) 함부림(咸傅霖)이 졸(卒)하였다. 함부림은 강릉부(江陵府) 사람인데, 자(字)는 윤물(潤物)이요, 자호(自號)는 난계(蘭溪)요, 검교 중추원 학사(檢校中樞院學士) 함승경(咸承慶)의 아들이다. 홍무(洪武) 을축년에 급제하여 예문 검열(藝文檢閱)에 등용(登用)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좌정언(左正言)에 옮기었다. 공양왕(恭讓王)이 서매, 발탁하여 우헌납(右獻納)을 제수하였는데, 일을 논하다가 왕지(王旨)를 거슬러서 지춘주사(知春州事)로 폄출(貶出)되었다가, 다시 소환되어 형조 정랑(刑曹正郞)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중방(重房)의 여러 장수(將帥)가 궁내의 세력을 믿고 동반(東班)을 멸시하니, 함부림이 조금도 굽히지 않고 이와 더불어 겨루다가, 이 때문에 벼슬을 잃었다. 임신년 4월에 태조(太祖)가 국사를 담당하자, 병조 정랑(兵曹正郞) 겸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경력사 도사(經歷司都事)를 제수하였고, 7월에 태조가 천명(天命)을 받으매, 추대(推戴)의 모의에 참여하여 예조 의랑(禮曹議郞)에 발탁되고, 훈공(勳功) 삼등(三等)에 책록(策錄)되어 익대 개국 공신(翊戴開國功臣)의 칭호(稱號)를 하사 받았는데, 벼슬이 빨리 올라 좌산기 상시(左散騎常侍) 겸 상서 소윤(尙瑞少尹)에 이르러 전선(銓選)에 참여하여 주관하였다. 아비의 상(喪)을 당하여 복이 끝나매, 명성군(溟城君)에 봉해졌다. 계미년 3월에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에 제수되어, 동원군(東原君)으로 개봉(改封)되고, 갑신년 10월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서 파직되었다. 무자년 10월에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제수되어 그 해를 넘기고 병으로 사면 하였다. 함부림은 강직하여 지키는 바가 있고, 입조(立朝)하여 과감하게 말하고 이치(吏治)에 민첩하여, 이르는 곳마다 직책을 잘 수행하였다. 경기(京畿)·충청도(忠淸道)·경상도(慶尙道)·전라도(全羅道)·황해도(黃海道)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와 동북면도순문찰리사(東北面都巡問察理使)를 역임하였는데, 청렴 결백한 것으로 자임(自任)하여 감사(監司)의 위엄을 떨치고, 일찍이 굽히거나 흔들리지 않으니, 부내(部內)가 두려워하고 복종하였다. 죽으니 나이 51세였다. 임금이 슬퍼하여 철조(輟朝)하기를 3일 동안 하고, 중사(中使)를 보내어 조제(弔祭)하고 시호를 정평(定平)이라 하였다. 두 아들이 있으니, 함우공(咸禹功)·함우치(咸禹治)이다.
- 【태백산사고본】 8책 20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1책 571면
원문
○東原君 咸傅霖卒。 傅霖, 江陵府人, 字潤物, 自號蘭溪, 檢校中樞院學士承慶之子。 洪武乙丑, 及第, 調藝文檢閱, 累遷左正言。 恭讓王立, 擢拜右獻納, 論事忤旨, 貶知春州, 召拜刑曹正郞。 時, 重房諸將, 內有所挾, 蔑視東班, 傅霖不少屈, 與之抗禮, 坐此失官。 壬申四月, 太祖當國, 拜兵曹正郞兼都評議使司、經歷司都事。 七月, 太祖受命, 以與推戴之謀, 擢禮曹議郞, 策勳三等, 賜號翊戴開國功臣, 驟遷至左散騎常侍兼尙瑞少尹, 參典銓選, 遭父憂, 服闋, 封溟城君。 癸未三月, 拜參知議政府事, 改封東原君。 甲申十月, 拜司憲府大司憲, 未幾而罷。 戊子十月, 拜刑曹判書, 踰年病免。 傅霖剛直有守, 立朝敢言; 敏於吏治, 所至稱職。 歷任京畿ㆍ忠淸ㆍ慶尙ㆍ全羅ㆍ黃海道都觀察黜陟使、東北面都巡問察理使, 常以澄淸自任, 振監司之威, 未嘗挫撓, 部內畏服。 卒年五十一。 上悼之, 輟朝三日, 遣中使弔祭, 諡曰定平。 二子, 禹功、禹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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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태종 10년 (1410) 12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