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실록12권, 태종 6년 7월 13일 경자 1/1 기사 / 1406년 명 영락(永樂) 4년
평양군 박석명의 졸기. 태종과의 오랜 교분
국역
평양군(平陽君) 박석명(朴錫命)이 졸(卒)하였다. 임금이, 석명(錫命)이 김제역(金蹄驛)에 이르러 병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급히 충청도 관찰사에게 명하기를,
"만일 불행하여 죽는다면, 빈장(殯葬)을 옮기는 중에 그 아비와 처자(妻子)의 소원을 따르라. 나의 하명을 기다릴 것 없이 예(禮)를 갖추어 판비(辦備)토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광연루(廣延樓)에 나아가서 정사를 보다가, 석명(錫命)의 부음(訃音)이 이르니, 임금이 통도(痛悼)하기를 특별히 심히 하여 급히 광연루에서 내려왔다. 철조(輟朝)096) 하고, 미두(米豆) 1백 20석과 종이 2백권을 내려 주고, 내사(內史)를 보내어 빈소(殯所)에 사제(賜祭)하였다.
석명(錫命)은 순천(順天) 사람으로 재상 박가흥(朴可興)의 아들이다. 의표(儀表)가 준수하고 총민(聰敏)이 뛰어났으며, 턱의 길이가 남들과 달라서 스스로 호(號)를 ‘이헌(頤軒)’이라 하였다. 나이 16세에 과거에 등제하여 갑자기 화요(華要)의 자리로 옮기고, 22세에 대언(代言)으로 임명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097) 의 사위[壻]인 까닭에 8년 동안 침폐(沈廢)해 있었다. 주상께서 즉위하자, 구교(舊交)가 있었던 까닭으로 불러서 좌승지(左承旨)에 임명하고, 지신자(知申事)로 천전(遷轉)하여 6년 동안 재직하였다. 명달(明達)하고 강기(强記)하여, 임금이 끝까지 의지하고 믿어, 전후(前後)로 비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자급을 뛰어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 임명되었다. 천성이 술을 좋아하여 종일 거나하게 마셨으나, 일을 결단하는 것이 물이 흐르는 듯하였다. 그러나, 마음속에 절조가 없어 여색(女色)에 빠지고, 뜻이 높아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전단(專斷)하니, 사람들이 매우 꺼리었다. 졸년(卒年)은 37세이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라 하였다. 아들 셋를 두었으니, 박거비(朴去非)·박거완(朴去頑)·박거소(朴去疎)이다.
- 【태백산사고본】 4책 12권 2장 A면【국편영인본】 1책 363면
- 【분류】왕실-사급(賜給)
- [註 096] 철조(輟朝) : 국상(國喪)을 당하거나 대신(大臣)이 죽었을 때 임시로 조회(朝會)를 정지하는 일. 정조(停朝).
- [註 097] 왕우(王瑀) : 공양왕(恭讓王)의 동생.
원문
○庚子/平陽君 朴錫命卒。 上聞錫命至金蹄驛病, 亟命忠淸道觀察使曰: "萬一不幸, 殯葬輸轉中, 從其父及妻子之願, 不待行下, 備禮應辦。" 上御廣延樓視事, 錫命之訃至, 上痛悼特甚, 遽下樓輟朝, 賜米豆百二十石、紙二百卷, 遣內史賜祭于殯。 錫命, 順天人, 宰相可興之子。 儀表俊爽, 聰敏絶倫, 頤長異於人, 自號頤軒。 年十六登科, 驟遷華要, 年二十二, 拜代言。 及高麗亡, 以歸義君 王瑀之壻, 沈廢者八年, 上卽位, 以有舊, 召拜左承旨, 轉知申事。 在職六年, 明達强記, 上終始倚信, 前後無比, 超拜知議政府事。 性嗜酒, 終日酣飮, 而斷事如流, 然內無操守, 沈于女色, 高亢而專, 人頗忌之。 卒年三十七。 諡曰文肅。 三子: 去非、去頑、去踈。
- 【태백산사고본】 4책 12권 2장 A면【국편영인본】 1책 363면
- 【분류】왕실-사급(賜給)
태종 6년 (1406) 7월 13일
국역
평양군(平陽君) 박석명(朴錫命)이 졸(卒)하였다. 임금이, 석명(錫命)이 김제역(金蹄驛)에 이르러 병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급히 충청도 관찰사에게 명하기를,
"만일 불행하여 죽는다면, 빈장(殯葬)을 옮기는 중에 그 아비와 처자(妻子)의 소원을 따르라. 나의 하명을 기다릴 것 없이 예(禮)를 갖추어 판비(辦備)토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광연루(廣延樓)에 나아가서 정사를 보다가, 석명(錫命)의 부음(訃音)이 이르니, 임금이 통도(痛悼)하기를 특별히 심히 하여 급히 광연루에서 내려왔다. 철조(輟朝)096) 하고, 미두(米豆) 1백 20석과 종이 2백권을 내려 주고, 내사(內史)를 보내어 빈소(殯所)에 사제(賜祭)하였다.
석명(錫命)은 순천(順天) 사람으로 재상 박가흥(朴可興)의 아들이다. 의표(儀表)가 준수하고 총민(聰敏)이 뛰어났으며, 턱의 길이가 남들과 달라서 스스로 호(號)를 ‘이헌(頤軒)’이라 하였다. 나이 16세에 과거에 등제하여 갑자기 화요(華要)의 자리로 옮기고, 22세에 대언(代言)으로 임명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097) 의 사위[壻]인 까닭에 8년 동안 침폐(沈廢)해 있었다. 주상께서 즉위하자, 구교(舊交)가 있었던 까닭으로 불러서 좌승지(左承旨)에 임명하고, 지신자(知申事)로 천전(遷轉)하여 6년 동안 재직하였다. 명달(明達)하고 강기(强記)하여, 임금이 끝까지 의지하고 믿어, 전후(前後)로 비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자급을 뛰어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 임명되었다. 천성이 술을 좋아하여 종일 거나하게 마셨으나, 일을 결단하는 것이 물이 흐르는 듯하였다. 그러나, 마음속에 절조가 없어 여색(女色)에 빠지고, 뜻이 높아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전단(專斷)하니, 사람들이 매우 꺼리었다. 졸년(卒年)은 37세이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라 하였다. 아들 셋를 두었으니, 박거비(朴去非)·박거완(朴去頑)·박거소(朴去疎)이다.
- 【태백산사고본】 4책 12권 2장 A면【국편영인본】 1책 363면
- 【분류】왕실-사급(賜給)
- [註 096] 철조(輟朝) : 국상(國喪)을 당하거나 대신(大臣)이 죽었을 때 임시로 조회(朝會)를 정지하는 일. 정조(停朝).
- [註 097] 왕우(王瑀) : 공양왕(恭讓王)의 동생.
원문
○庚子/平陽君 朴錫命卒。 上聞錫命至金蹄驛病, 亟命忠淸道觀察使曰: "萬一不幸, 殯葬輸轉中, 從其父及妻子之願, 不待行下, 備禮應辦。" 上御廣延樓視事, 錫命之訃至, 上痛悼特甚, 遽下樓輟朝, 賜米豆百二十石、紙二百卷, 遣內史賜祭于殯。 錫命, 順天人, 宰相可興之子。 儀表俊爽, 聰敏絶倫, 頤長異於人, 自號頤軒。 年十六登科, 驟遷華要, 年二十二, 拜代言。 及高麗亡, 以歸義君 王瑀之壻, 沈廢者八年, 上卽位, 以有舊, 召拜左承旨, 轉知申事。 在職六年, 明達强記, 上終始倚信, 前後無比, 超拜知議政府事。 性嗜酒, 終日酣飮, 而斷事如流, 然內無操守, 沈于女色, 高亢而專, 人頗忌之。 卒年三十七。 諡曰文肅。 三子: 去非、去頑、去踈。
- 【태백산사고본】 4책 12권 2장 A면【국편영인본】 1책 363면
- 【분류】왕실-사급(賜給)
원본
태종 6년 (1406) 7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