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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실록 12권, 태조 6년 12월 24일 임인 2번째기사 1397년 명 홍무(洪武) 30년

권근이 원종 공신에 참여되기를 빈 상서문. 설장수와 함께 공신에 추록되다

화산군(花山君) 권근(權近)이 상서(上書)하였다.

"신은 본래 용렬하고 어리석은데, 오직 문구(文句)의 말식(末識)으로 전하의 부육(覆育)의 은혜를 입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전조(前朝) 때에는 미치고 망령됨으로 법에 저촉되어 죄가 있게 됨을 불측(不測)하였는데, 다행히 성자(聖慈)께서 곡진하게 애긍(哀矜)을 가하심에 힘입어 성명(性命)을 보존하였습니다. 신이 그 당시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제부터는 죽는 날까지 모두 전하께서 주심이라.’ 하여, 마음으로 맹세하고 하늘에 고하여 뼈가 가루가 되더라도 보답하기를 도모하였더니, 전하께서 천명을 받아 용처럼 날으시는 날을 당하여 큰 도량으로 하자(瑕疵)를 숨기시고, 조정에 소환하시어 발탁하여 추부(樞府)에 두어 도당(都堂)에 참여하게 하시었으니, 벼슬이 영화되고 녹이 후하여 분수에 넘치오매, 재조(再造)의 은혜가 하늘과 같이 끝이 없습니다. 항상 스스로 생각하기를 다행히 성조(聖朝)의 개국하는 처음에 나서 지나치게 작명(爵命)을 받고 재상의 한 사람이 되었으나, 재능이 없어 촌공(寸功)031) 도 세우지 못하였으므로, 원종 공신(原從功臣)의 수백여 인의 열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분수를 헤아려보면 마땅하나, 마음에는 홀로 부끄럽습니다.

또 스스로 생각하건대, 성군(聖君)과 현상(賢相)이 공덕(功德)의 성함이 천지에 이르고 사해(四海)에 빛나더라도 반드시 문신(文臣)의 말에 의탁한 뒤에라야 후세에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전하의 신통한 공과 성스러운 덕이 전고(前古)에 탁월하와 문신이 숲처럼 들어서서 발양(發揚)하고, 찬송(讚頌)하여 양양(洋洋)하게 귀에 가득하니, 비록 전(典)·모(謨)의 기록한 것과 아(雅)·송(頌)의 노래한 것에 비교하더라도 또한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신(臣)과 같이 천박하고 고루한 자를 더럽게 여기지 않으시고 신에게 문사(文詞)를 짓는 것을 명하셨으니, 신이 이에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감히 엷은 기예(技藝)를 바치어 성조(聖朝)의 공덕의 아름다움을 포장(鋪張)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의 큰 운수가 바야흐로 일어나는 즈음에 당하여, 비록 털끝만한 공효는 펴지 못했다 하더라도 후세에 전파하는 일에 있어서는 또한 작은 도움이 없다고 할 수 없으니, 비록 혹 원종 공신(原從功臣) 수백여 인 아래에 참여할 수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불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래 이 회포를 가지고 천일(天日)을 바라보았으나, 스스로 나오고 중매하는 것은 선비와 여자의 추한 행실이므로 감히 표현하지 못하고 말을 하려다가 다시 침묵한 것이 몇 해가 되었습니다.

또 스스로 생각하건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자식이 아비 섬기는 것과 같으니, 자식이 하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아비에게 말하여 숨김이 없는 것이 정(情)과 친(親)의 지극한 것입니다. 지금 전하의 부육(覆育)의 인자하심이 하늘같이 광대하심을 만나서, 크고 작은 종류가 생(生)을 이루지 않음이 없고, 궁벽하고 먼 정이 다 통달하지 않음이 없으니, 어리석은 신이 어찌 감히 마음에 소회가 있어도 스스로 중매하는 것을 혐의하여 표현하여 드러내지 않고 한갓 앙앙(怏怏)하고 울읍(鬱悒)함을 안고서 스스로 회확(恢廓)·인명(仁命)한 큰 도량에 소외(疎外)될 수가 있겠습니까? 이에 스스로 중매하는 추함을 잊고 감히 신이 찬진(撰進)한 글 중에 대체(大體)에 관계되는 것 한두 가지를 뒤에 진달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자(聖慈)께서 살피시옵소서.

동북면(東北面)은 왕업(王業)이 기초한 곳이니 근본의 땅입니다. 중국(中國)에서 철령(鐵嶺)에 위(衛)를 세우고자 하였을 때에 신이 표문을 지었는데, 회자(回咨)를 흠봉(欽奉)하매 말하기를, ‘철령의 연고로 왕의 나라에서 말이 있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국가에 다시 동북(東北)의 근심이 없을 것이니, 우리의 신복(臣僕)이 되어 일어나는 운수를 도우라’ 하였으니, 일은 비록 전조(前朝) 때에 있었으나, 이익은 실상 오늘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황고(皇考) 환왕(桓王) 정릉(定陵)의 비(碑)는 신과 정총(鄭摠)이 함께 하교(下敎)를 받들어 지은 것이옵고, 개국 공신(開國功臣) 교서(敎書)의 글도 모두 다 신이 닦아서 고친 것이오며, 교사(郊社)·종묘(宗廟)의 악장(樂章)과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경영하는 문부(文簿)도 모두 신이 짓고 뽑은 것이오니, 비록 그 글이 저속하고 상스럽기는 하나, 개국하는 처음에 사공(事功)의 아름다운 것은 족히 후세에 전할 것입니다.

지난해 겨울 중국에 머물러 있었을 때, 하정사(賀正使) 문하 평리(門下評理) 신(臣) 안익(安翊)과 동지밀직(同知密直) 신 김희선(金希善) 등이 와서 중궁(中宮)의 부음(訃音)을 공경하여 받들고, 신이 정총(鄭摠)·김약항(金若恒)·노인도(盧仁度) 등과 같이 한림원(翰林院)에 고하여 황제에게 통달하였기 때문에, 신 등이 회환하는 날, 칙위(勅慰)하는 성지(聖旨)를 받들어 가지고 올 수 있었으니, 이것은 고금으로 한 번도 없었던 성전(盛典)이었습니다. 신이 한림관(翰林官)과 같이 매양 전하의 사대하는 정성과 무진년의 회군(回軍)한 공을 칭송하였기 때문에, 선유(宣諭)에 정녕(丁寧)하게 포미(褒美)하였으니, 이것도 우리 나라 신민이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는 아름다운 일이옵고, 병자년의 하정(賀正) 표문은 신이 홀로 닦아 고쳤고, 정도전(鄭道傳)은 일찍이 함께 닦지 않은 것으로 변명하였기 때문에, 신이 싸 가지고 온 선유(宣諭)와 자문(咨文)에 모두 다시는 정도전경사(京師)에 온 일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바다 밖의 작은 선비로 한림원(翰林院)의 반열을 따라 날마다 문연각(文淵閣) 위에 다달아 이미 응제(應制)하는 시(詩)를 지었고, 또 어제(御製)의 하사하심을 입어 우리 조선(朝鮮)의 성예(聲譽)를 아름다움으로 중화(中華)에 파전(播傳)하고, 특히 사이(四夷) 여러 나라에 영광이 있었으니, 모두 전하의 사대하는 정성이 천지를 감동함으로 말미암아 그리 된 것이오나, 신의 몸으로부터 발단시켰으니 어찌 신의 큰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훗날 신더러 ‘봉사(奉使)하는 날 명(命)을 욕되게 하지 않았고, 개국한 처음에도 조금은 보익함이 있었다.’고 이르더라도 될 만한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신이 스스로 중매하는 추함을 용서하옵시고, 신의 홀로 부끄러워하는 정상을 불쌍히 여기시어, 신의 이름을 원종(原從)의 끝에 부탁하게 하시면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신 근(近)은 황송하고 부끄럽고 떨리고 땀나는 지극함을 견딜 수 없사옵니다."

임금이 도당(都堂)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하여, 근(近)과 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偰長壽)로 원종 공신(原從功臣)을 허여하고, 녹권(錄券)을 주면서 말하였다.

"전날에 하등 공신을 칭할 때에 우연히 미치지 못한 것이다."

이때에 설장수 또한 글을 올려 원종(原從)에 참여하기를 청하였었다.


  • 【태백산사고본】 3책 12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1책 112면
  • 【분류】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花山君 權近上書曰:

臣本庸愚, 惟以文句末識, 得蒙殿下覆育之恩, 爲日久矣。 在前朝時, 狂妄觸法, 罪在不測, 幸賴聖慈, 曲加哀矜, 獲保性命。 臣於當時, 自謂從今至死之年, 皆是殿下之賜, 誓心告天, 粉糜圖報。 及値殿下受命龍飛之日, 大度匿瑕, 召還于朝, 擢置樞府, 俾參都堂, 官榮祿厚, 踰越涯分, 再造之恩, 昊天罔極。 常竊自念, 幸生聖朝開國之初, 濫荷爵命, 備員宰相, 而以無能, 未立寸功, 故不得與原從功臣數百餘人之列。 揆分則宜, 於心獨愧。 又竊自念, 聖君賢相功德之盛, 格于天地, 光于四海, 然必托於文臣之詞, 而後可以傳於後世。 今我殿下, 神功聖德, 度越前古, 文臣林立, 發揚讃頌, 洋洋盈耳。 雖典謨之所記、雅頌之所歌, 亦無愧矣。 尙且不鄙臣之淺陋, 命撰文詞, 臣乃盡心殫力, 敢效薄技, 以鋪張聖朝功德之懿。 是則臣於景運方興之際, 雖不得展絲毫之效, 其於傳播後世之事, 亦不可謂無所小補。 雖或得與原從之功數百餘人之下, 未必不可。 久蘊此懷, 瞻望天日, 然以自進自媒, 士女之醜行, 故不敢宣, 欲言復默, 有年于玆。 又竊自念, 臣之事君, 猶子事父, 子有所欲, 必言於父而無隱, 情親之至也。 今遇殿下覆育之慈, 如天廣大, 鴻纖之類, 靡不遂生, 幽遠之情, 靡不畢達。 愚臣安敢心有所懷, 嫌於自媒而不宣露, 徒抱怏鬱, 以自疏外於恢廓仁明之大度哉! 於是, 忘其自媒之醜, 敢陳臣所撰進之詞有關大體者一二于後, 伏惟聖慈垂察焉。 東北面, 王業所基根本之地也。 上國欲於鐵嶺立衛之時, 臣撰表文, 欽奉回咨曰: "鐵嶺之故, 王國有辭。" 由是國家更無東北之憂, 爲我臣僕, 以翊興運。 事雖在於前朝, 利實關於今日者也。 皇考桓王 定陵之碑, 臣與鄭摠同奉敎撰; 開國功臣敎書之文, 悉皆臣所修改; 郊社宗廟之樂章, 定都營宮之文簿, 亦皆臣所撰選。 雖其文辭鄙俚, 然於開國之初, 事功之美, 足以傳於後世者也。 去年之冬, 留滯上國, 賀正使門下評理臣安翊、同知密直臣金希善等至, 敬承中宮訃音。 臣與鄭摠金若恒盧仁度等告翰林院, 以達帝聰, 故於臣等回還之日, 欽齎勑慰聖旨以來, 此乃古今絶無之盛典也。 臣與翰林官等, 每稱殿下事大之誠, 戊辰回軍之功, 故於宣諭, 丁寧以褒美之, 此亦我國臣民罔不懽忻之美事也。 丙子賀正之表, 臣獨修改, 而鄭道傳未嘗同修之, 故辨明之, 臣所欽齎宣諭及咨, 皆不復言道傳赴京之事也。 臣以海外小儒, 隨班翰林院中, 日赴文淵閣上, 旣賦應制之詩, 又蒙御製之賜, 使我朝鮮聲譽之美, 播於中華, 別有光於四夷諸國, 皆由殿下事大之誠, 感動天地之使然爾, 而自於臣身而發之, 豈不爲臣之大幸哉! 是在後日, 雖謂臣爲不辱命於奉使之日, 小有補於開國之初, 亦庶幾焉。 伏望聖慈, 恕臣自媒之醜, 憐臣獨愧之情, 俾臣之名, 得以托於原從之末, 不勝幸甚。 臣無任兢慙戰汗之至。

上令都堂擬議申聞。 以及判三司事偰長壽, 許爲原從功臣, 給之錄券, 乃曰: "前日稱下之時, 偶不及耳。" 時偰長壽亦上書請與原從。


  • 【태백산사고본】 3책 12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1책 112면
  • 【분류】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