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종 대왕 시장(諡狀)
시장(諡狀)
국왕의 성(姓)은 이씨(李氏)이고, 휘(諱)는 변(昪)이고, 자(字)는 도승(道升)인데, 선각왕(宣恪王)의 아드님이요 공선왕(恭宣王)의 손자입니다. 공선왕의 아우가 은언군(恩彦君) 이인(李䄄)이고 은언군의 아드님이 전계 대원군(全溪大院君) 이광(李㼅)인데, 이 분들이 임금의 본생(本生)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입니다. 장숙왕(莊肅王)께서 훙서(薨逝)하고 후사(後嗣)가 없었는데, 공선왕(恭宣王)·선각왕(宣恪王)·강목왕(康穆王)은 모두 방지손(旁支孫)이 없었으므로 선각왕의 비(妃)께서 임금을 데려다가 아들로 삼아 장숙왕의 계통(系統)을 계승하게 하고서 권서 국사(權署國事)138) 를 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유를 갖추어 왕위(王位)를 습봉(襲封)하게 해 줄 것을 중국에 주청(奏請)하니, 선종 성황제(宣宗成皇帝)가 칙서(勅書)를 내리기를, ‘선각 왕비(宣恪王妃)의 주칭(奏稱)에 의거하건대 그대의 나이가 이미 장성(長成)하였고 인효(仁孝)가 성대히 드러나 일찍이 여러 사람의 표솔(表率)이 될 덕이 있었으므로 국인(國人)들이 추대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승습(承襲)하도록 책봉(冊封)해 줄 것을 청하였다. 따라서 짐(朕)은 여정(輿情)을 굽어 따라 특별히 청한 것을 윤허한다. 이에 관원을 파견하여 조서(詔書)를 가지고 가서 그대 나라에 크게 고하고 그대를 봉하여 조선 국왕(朝鮮國王)으로 삼노니 계속하여 국정(國政)을 다스리라. 아울러 그대에게 채폐(綵幣) 등의 물품을 하사하노니 그대는 길이 삼가고 공손할 것을 다짐하여 힘써 후복(侯服)139) 을 계승할 것이며 충순(忠順)함을 지켜 나아가 천가(天家)의 병풍이 되어야 한다. 그대는 공손한 마음으로 짐(朕)의 명을 어김이 없게 하라.’ 하였습니다.
어머니 왕비(王妃) 김씨(金氏)는 영안 부원군(永安府院君)으로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追贈)된 김조순(金祖淳)의 따님이고, 본생모(本生母)인 염씨(廉氏)는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된 염성화(廉成化)의 따님인데, 신묘년140) 6월 17일 정유에 임금을 탄생시켰습니다. 이때 모왕비(母王妃)께서 꿈을 꾸었는데 영안 부원군께서 어린아이 하나를 주면서 말하기를, ‘이 아이를 잘 기르시오.’ 하였습니다. 모왕비께서 꿈을 깨고 나서는 그 일을 기록하여 보관해 두었는데, 임금께서 사복(嗣服)141) 하게 되자 임금의 용의(容儀)가 꿈에서 본 것과 똑같았습니다. 임금께서는 효우(孝友)를 하늘에서 타고나셨으므로 어진 성문(聲聞)이 날로 드러났으며 선각 왕비(宣恪王妃)·강목 왕비(康穆王妃)·장숙 왕비(莊肅王妃)를 섬김에 있어 성경(誠敬)이 매우 도타웠으므로 궁위(宮闈) 사이에 화기(和氣)가 넘쳐흘렀습니다. 선각 왕비께서는 은혜롭고 자상하게 돌보아 주고 아침저녁으로 훈칙(訓飭)하였는데, 임금께서 거처를 반드시 같은 궁전(宮殿)으로 하였고 음식도 반드시 같은 주방(廚房)으로 하였으며, 경연(經筵)이나 시사(視事)가 있는 이외에는 일찍이 잠시도 그 곁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의방(義方)의 훈계와 지물(志物)의 봉양은 자효(慈孝)를 이간할 수 없었으니, 대개 9년 동안을 하루처럼 하였습니다.
정사년142) 에 선각 왕비께서 훙서(薨逝)하시자 임금께서 곡읍(哭泣)하는 슬픔과 가슴을 치고 발을 뛰는 예수(禮數)를 예경(禮經)에 따라서 하였으며, 수장(水漿)을 입에 넣지 않고 슬퍼하였으므로 몸이 쇠약하여져 지탱하지 못할 것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다섯 달 동안 여막(廬幕)에 거처하면서 최질(衰絰)을 몸에서 제거하지 않았으며, 아침저녁의 곡읍(哭泣)과 궤전(饋奠)의 제례(祭禮)에는 반드시 몸소 나가고 감히 혹시라도 폐지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장사지낼 때 이르러서는 풍한(風寒)을 무릅쓰고 직접 봉폐(封閉)하는 것을 보았으며, 찬선(饌膳)을 드실 때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이르기를, ‘전에 모비(母妃)를 모시고 먹을 적에는 모비께서 밥을 드신 후에야 나도 밥을 먹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찌 차마 혼자서 먹을 수가 있겠는가?’ 하였는데, 측근의 신하들이 모두 얼굴을 가리고 차마 우러러보지를 못했습니다. 선침(先寢)과 선원(先園)의 택조(宅兆)가 적합하지 않다는 것 때문에 누차 친히 간심(看審)하여 마침내 길지(吉地)를 얻어 평안히 모셨습니다. 조선(祖先)을 받들 적에는 효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여 제향은 반드시 몸소 거행하였으며, 진설이나 강신(降神)에서 배례(拜禮)를 올리는 것을 예법에 따라 어김이 없었습니다. 봄 가을로 선침(先寢)에 전배(展拜)하여 길이 추모(追慕)함으로써 상로(霜露)의 감회를 나타내었으며, 산천(山川)의 신기(神祇)에게 제사할 때는 심신(心身)을 깨끗이하여 행사(行事)하고 품식(品式)을 분명히 갖추었으며 더할 수 없이 정결하게 하였습니다. 하늘을 섬김은 엄숙하고 공손하게 하였으며 천도(天道)를 흠숭(欽崇)하였으므로, 수재(水災)와 한재(旱災)가 잇따라 발생하고 천문(天文)에 일식(日蝕)과 월식(月蝕)의 경고가 있으면, 그때마다 인구(引咎)하고 자신을 책망하면서 진언(進言)하여 도와줄 것을 요구하였고, 온화한 자세로 마음을 열어 간언(諫言)을 수납(受納)하면서도 오직 정의(情意)가 통달되지 못할까 염려하였으며, 대중의 의견을 모아 미더운 느낌을 불러 일으켰으니, 화기를 유도하여 상서(祥瑞)를 맞아들이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선왕(先王)의 보위(寶位)에 올라 선왕의 예법을 행하면서 전장(典章)은 어기지도 않고 잊지도 않았으며, 지사(志事)는 잘 계술(繼述)하였습니다. 장고(掌故)143) 를 명백히 잘 익혔고 정신을 가다듬어 잘 다스려지기를 도모하였으며, 날마다 강악(講幄)을 열어 경서(經書)를 주로 삼고 사서(史書)를 보조로 삼아 선성(先聖)이 전수(傳授)한 요령을 탐구하고 역대(歷代) 치란(治亂)의 자취를 증험하였습니다. 몸소 실행하고 마음으로 체득한 것을 미루어 정사(政事)에 능동적으로 시행하였으며,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기 위하여 민산(民産)을 증식(增殖)시키고 재용(財用)을 절약하여 국계(國計)를 넉넉하게 하였으며 오래 묵은 포흠(逋欠)을 탕감하고 공세(公稅)를 정지시켰으며 내탕전(內帑錢)을 내려 정공(正貢)을 감면시켰습니다. 부양받지 못하는 어린아이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늠식(廩食)을 제공하였으며, 병이 들어 제대로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의약(醫藥)을 내려 구제하였습니다. 깊은 인덕(仁德)과 후한 은택(恩澤)이 호산(湖山) 천리 밖에까지 널리 흡족하게 젖었고 따라서 음식을 먹고 숨을 쉬는 무리들은 평안한 삶을 누리면서 자기의 생업(生業)을 즐기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여러 옥송(獄訟)과 여러 금계(禁戒)에 대해 조심하는 마음을 지녔으므로, 딱하게 여기며 삼가고 신중하게 심의(審議)하여 대단한 추위와 몹시 더울 때면 번번이 소방(疏放)시키는 은전(恩典)을 행하였으며, 늘 큰 경사와 큰 혜택(惠澤)을 만나면 또한 완전히 석방(釋放)시킬 때가 많아서 측달(惻怛)하는 정성이 넘쳐흘렀으므로 백성들이 모두 열복(悅服)하였으며 영어(囹圄)144) 가 텅 비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습니다. 장리(長吏)들이 나약하여 관사(官事)를 낭패시키거나 반대로 탐학을 부려 백성을 해치게 할 것을 우려하여 전신(銓臣)에게 목어(牧御)145) 의 직임을 맡는 자들을 신중하게 선발하도록 명하고, 수시로 근신(近臣)들을 나누어 보내어 각도(各道)를 안렴(按廉)하게 하여 관리의 근만(勤慢)을 조사해서 출척(黜陟)을 철저히 하였으며, 벽촌의 가난한 마을에 사는 사람일지라도 회포가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게 하였으며, 바닷가나 깊은 산골의 하찮은 일일지라도 살펴보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군공(群工)들이 마음을 가다듬어 보필하여 맡은 바 직위(職位)를 조심하여 수행하였으며 상사(賞賜)는 순량(循良)한 관리에게 내려지고 초래(招來)하는 것은 유일(遺逸)에게 두루 미쳤습니다. 선유(先儒) 가운데 이름난 석학(碩學)으로서 충효(忠孝)와 의열(義烈)이 뛰어났는데도 아직 포양(褒揚)이 미치지 못한 경우에는 국론(國論)을 따르고 정의(廷議)를 채택하여 절혜(節惠)146) 의 은전(恩典)을 내려 영광이 천수(泉隧)147) 에 미치게 하였고, 마을 문 옆에 오두(烏頭)로 된 작설(綽楔)148) 을 세워 택리(宅里)를 정표(旌表)하였습니다. 비록 편호(編戶)의 필부(匹夫)일지라도 행의(行誼)에 기록할 만한 것이 있으면 또한 그 마을에 정표하게 하고 그 집에는 복호(復戶)149) 하기도 하여 일세(一世)를 풍려(風勵)하였습니다. 임금께서는 임금의 법도를 정성스럽게 지켜서 조심하고 근신하는 마음가짐을 지녔으므로, 시절(時節)에 따라 공헌(貢獻)하기 위해 보내는 사신(使臣)을 반드시 잘 가려서 선발하였으며 양전(壤奠)150) 은 반드시 점검하게 하였으며 조서(詔書)를 선포할 황화(皇華)의 사행(使行)이 나오면 군읍(郡邑)에 신칙하여 객관(客館)을 수리하고 길을 보수하며 노자와 양식을 준비하도록 하였고 신발까지도 감히 준비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상경(上卿)을 보내어 경상(境上)에서 접대하게 하였음은 물론, 교관(郊館)의 영송(迎送)과 연향(宴饗)의 수접(酬接)에 대해서도 혹은 삼가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변방(邊方)에서 국경을 넘어 법을 범하는 백성은 엄중히 규찰하여 이를 처벌하였고, 중국의 표해인(漂海人)은 노자(路資)를 후히 주어 보내었는데 한결같이 흠정(欽定)한 약속을 준행하여 조금이라도 어기는 일이 없었습니다. 신해년151) 봄 임금의 본생(本生) 할아버지인 은언군(恩彦君)의 신유년152) 무안(誣案)에 대해 사신을 중국에 보내어 신변(伸辨)한 결과 특별히 환히 밝혀 감싸주는 은전을 받았고 드러내어 소설(昭雪)시키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계해년153) 봄에는 정원경(鄭元慶)의 《이십일사약편(二十一史約編)》 가운데 국조(國祖) 강헌 대왕(康獻大王)154) 께서 무함받은 일이 기재되어 있었으므로, 사신(使臣)을 보내어 변진(辨陳)하여 호소한 결과 또한 소석(昭晣)시키는 은전을 받았습니다. 신유년155) 봄 문종 현황제(文宗顯皇帝)의 어가(御駕)가 열하(熱河)에 행차하였을 적에는 임금께서 배신(陪臣)을 보내어 문후(問候)의 예절을 행하였으며 삼가 성지(聖旨)를 받들고 경사(京師)156) 에서 돌아왔는데, 그 내용이 또한 가장(嘉奬)하는 윤음(綸音)이었습니다. 이는 대국(大國)이 소국(小國)을 사랑하는 은택(恩澤)인 것이고 내복(內服)과 동일하게 여긴 것으로 또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예절이 진실로 충곤(衷悃)에서 나온 데 연유된 것입니다. 검덕(儉德)을 삼가고 박소(樸素)를 숭상하였으므로 법장(法章) 이외에는 비단옷을 물리쳤고 입는 옷도 여러 번 세탁을 하여 입었으며 찬수(饌羞)에는 진기한 맛있는 음식을 끊어버렸고 기용(器用)에는 사치하고 화려한 완구(玩具)가 없었으며 연유(宴遊)와 반락(盤樂)에 대해서는 담박하여 즐기는 것이 없었고 원유(苑囿)나 거마(車馬)에는 마음을 쓴 적이 없었습니다. 선왕(先王)의 궁실(宮室)은 낡아지면 고쳤는데 예전 그대로 수리하였으며, 연가(筵架)의 척도(尺度)를 증식(增飾)시킨 것이 없었습니다. 몸소 솔선하는 가르침으로 백성을 계도(啓導)하여 풍속을 이루는 근본으로 삼았으며, 실심(實心)과 실정(實政)으로 이 세상을 융숭한 지경으로 끌어올렸으므로 장차 장구하게 도(道)가 행하여져 교화를 이루는 효험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이 큰 해독을 내려 계해년157) 12월 초8일 경진(庚辰)에 병환이 매우 위독하여져 창덕궁(昌德宮)의 정침(正寢)에서 훙서(薨逝)하였습니다. 재위(在位)는 14년이고 춘추(春秋)는 33세였습니다. 임종(臨終)할 때 대신(大臣)·근신(近臣)·예관(禮官)을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였는데, 그 끝을 올바르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안으로 왕궁(王宮)·국도(國都)에서 밖으로 깊은 산골과 먼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부모(父母)의 상사(喪事)처럼 달려와서 울부짖으며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임금께서는 신해년158) 에 탈상(脫喪)하고 가례(嘉禮)를 행하였으며, 김씨(金氏)를 비(妃)로 책봉(冊封)하였고 중국의 고명(誥命)을 받아 중궁(中宮)의 자리에 정하였는데, 영의정에 추증(追贈)된 영은 부원군(永恩府院君) 김문근(金汶根)의 따님입니다. 임금께서는 덕기(德器)가 혼연(渾然)히 완성되고 학문(學問)이 일찍 성취되어 백행(百行)의 근원인 효성은 위로 가법(家法)을 이었고, 정일(精一)의 모훈(謨訓)은 멀리 성훈(聖訓)을 받들었으며, 천인(天人)의 성명(性命)에 대한 깊은 뜻과 공사(公私)의 의리(義理)에 대한 한계를 섬세하게 분석하여 본원(本原)을 환하게 알았으며, 매양 연거(燕居)할 때에 더욱 강습(講習)하는 공부에 힘썼습니다. 임금께서는 오랫동안 외방에서 노고를 겪으셨으므로 곧 백성들이 농사(農事)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데 대한 어려움을 알았으며 백성들이 날씨가 추워도 원망하고 더워도 원망하는 것은 모두 임금께서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겪은 것이었기 때문에,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계획과 백성을 보호하게 하는 교훈(敎訓)이 누차 연석(筵席)에서 발론되었습니다. 일찍이 ‘안민(安民)’이라는 두 글자를 써서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늘 바라보면서 이르기를, ‘이것이 나의 책임이다.’ 하고, 일념(一念)으로 걱정하고 부지런히 하였으므로, 스스로 편안한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을 위로하고 구휼하는 정사에 대해 극진히 하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위로는 조선(祖先)을 잘 받드는 덕(德)이 있고, 아래로는 많은 복을 받는 비호(庇護)가 있어 임금의 세대가 끝나도록 강년(康年)이 계속되었으며, 곡식이 풍성하게 잘 익어 백성들이 춥고 배고프지 않았고, 교조(敎條)가 성대하여 성문(聲聞)이 찬연히 빛났습니다. 하늘이 도와주지를 않아 마침내 장수(長壽)를 아껴 우리 나라의 많은 생령(生靈)들로 하여금 유구하여 끝이 없는 교화를 받을 수 없게 하였으니, 아! 원통합니다. 그러나 선세(先世)의 인덕(仁德)을 베푼 태평한 국운(國運)을 계승하여 일대(一代)의 박대(博大)한 정치를 이룩하였습니다. 휘황하게 환히 빛나는 정치에 많은 백성들이 흠뻑 젖었고 은혜로운 큰 혜택이 팔역(八域)을 뒤덮었으니, 그 지선(至善)과 성덕(盛德)은 백성들이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고 크고도 아름다운 규범(規範)은 사서(史書)에도 이루 기록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하늘이 돕는 것은 순리(順理)로 하는 사람이요, 사람이 돕는 것은 신의(信義)가 있는 사람이다.’ 했는데, 이것이 임금께서 대명(大命)을 받아 큰 경사를 맞이한 이유인 것입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그 덕이 퍼져 아래로 백성에게 소문이 나 있고, 밝게 빛나 위로는 하늘에까지 올랐다.’ 했는데, 이것이 임금께서 서적(庶績)159) 을 빛나게 하고 영도(靈圖)를 공고히 하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아! 전왕(前王)을 잊을 수가 없다.’ 했는데, 이것이 임금께서 자신에게 있는 것을 미루어 백성에게 증험한 결과인 것입니다. 후왕(後王)은 친애하고 어질게 여기고 후민(後民)은 즐겁게 여기고 이롭게 여겨서, 전왕(前王)을 잊을 수 없게 되는 것은 그 근본이 연유된 데가 있는 것입니다. 아! 성대합니다. 아! 통한스럽습니다. 【행 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 김병국(金炳國)이 지었다.】
- 【태백산사고본】 9책 1권 8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666면
- 【분류】왕실(王室) / 어문학(語文學)
- [註 138]권서 국사(權署國事) : 아직 왕호(王號)를 인정하지 못하는 동안 우선 국사를 다스린다는 뜻의 칭호.
- [註 139]
후복(侯服) : 오복(五服)의 하나.- [註 140]
신묘년 : 1831 순조 31년.- [註 141]
사복(嗣服) : 왕위를 계승함.- [註 142]
정사년 : 1857 철종 8년.- [註 143]
장고(掌故) : 한 나라의 법칙과 제도.- [註 144]
영어(囹圄) : 감옥.- [註 145]
목어(牧御) : 백성을 다스림.- [註 146]
절혜(節惠) : 시호를 내림.- [註 147]
천수(泉隧) : 황천(黃泉)이란 말.- [註 148]
작설(綽楔) : 효자(孝子)나 의사(義士) 등을 정표(旌表)하기 위해 문 옆에 세운 대(臺)를 말함.- [註 149]
복호(復戶) : 효자나 열녀 등 특정한 대상자에게 조세(租稅)나 그밖의 부역(賦役)을 면제시켜 주는 것.- [註 150]
양전(壤奠) : 토공(土貢).- [註 151]
신해년 : 1851 철종 2년.- [註 152]
신유년 : 1801 순조 원년.- [註 153]
계해년 : 1863 철종 14년.- [註 154]
강헌 대왕(康獻大王) : 태조(太祖).- [註 155]
신유년 : 1861 철종 12년.- [註 156]
경사(京師) : 북경(北京).- [註 157]
○諡狀:
國王姓李氏諱昇, 字道升, 宣恪王之子也, 恭宣王之孫也。 恭宣王之弟曰恩彦君 䄄, 恩彦君之子曰全溪大院君 㼅, 是爲王之本生祖與父。 而莊肅王薨無嗣, 恭宣王宣恪王康穆王, 俱無旁支, 宣恪王妃, 取王爲子, 以承莊肅車之統, 命權署國事。 具奏請襲封王位, 宣宗成皇帝降勑曰, ‘據宣恪王妃奏稱, 爾年旣長成, 仁孝茂著, 夙有長人之德, 爲國人所願戴, 請冊承襲。 朕俯循輿情, 特允所請。 玆遣官齎詔, 誕告爾國, 封爾爲朝鮮國王, 繼理國政。 幷賜爾綵幣等物, 爾宜永失靖共, 懋纉承於侯服, 迪宣忠順, 作屛翰於天家。 爾其欽哉, 毋替朕命。’ 母王妃金氏永安府院君賜議政府領議政祖淳女, 本生母廉氏, 贈議政府領議政成化女, 以辛卯六月十七日丁酉, 生王。 是時, 母王妃夢, 永安府院君, 授一小兒曰, ‘善養此兒。’ 母王妃覺而記其事, 藏之, 及王嗣服, 容儀若夢中所見焉。 王孝友天植, 仁聞日彰, 事宣恪王妃康穆王妃莊肅王妃, 誠敬肫篤, 宮闈之間, 和氣融洽。 宣恪王妃, 顧復恩勤, 朝夕訓飭, 王居處必同殿, 飮食必同廚, 經筵視事之外, 未嘗造次離側。 義方之訓, 志物之養, 慈孝無間, 蓋九年如一日。 丁巳宣恪王妃薨, 王哭泣之哀, 擗踊之數, 動遵禮經, 水漿不入口, 柴毁若不能支。 五月居廬, 衰經不去身, 朝晡之哭, 饋奠之禮, 必躬臨而罔敢或廢。 及葬, 冒犯風寒, 親視封閉, 每進饍, 輒泣曰, ‘嘗侍食母妃, 母妃進飯然後。 予亦進飯, 今何忍獨食。" 左右皆掩抑不忍仰視。 以先寢先園宅兆不叶, 屢次親審, 竟得吉地而安厝焉。 奉先思孝, 禋享必躬將, 薦祼興頫, 式禮莫愆。 春秋拜先寢, 永言追慕, 以寓霜露之感, 神祇山川, 齊明昭事, 品式明備, 眂滌吉蠲, 嚴恭對越。 欽崇天道, 水旱隔竝之災, 象緯剝蝕之警, 輒引咎責躬, 進言求助, 翕受開納, 惟恐情意之不通, 而鬷假孚感, 有足以導和延祥。 踐先王之位, 行先王之禮, 典章則不愆不忘, 志事則善繼善述。 明習掌故, 勵精圖治, 日開講幄, 經經翼史, 求先聖傳授之要, 驗歷代治亂之蹟。 推諸躬行心得之餘, 而克施有政, 卽康功以殖民産, 節財用以裕國計, 蕩舊逋而停公稅, 捐內藏而減正貢。 嬰孩之不得其養者, 繼以餼廩, 厲扎之不遂其生者, 濟以醫藥。 深仁厚澤, 普洽於湖山千里之外, 而脰飮喙息之倫, 無不安其生而樂其業。 兢兢乎庶獄庶愼, 而哀敬欽䘏, 祁寒盛暑, 輒行疏放之典, 每遇大慶大惠, 亦多全釋之時, 藹然惻怛之誠, 民皆悅服, 或至囹圄之空虛。 慮長吏之選輭, 而敗官貪虐而病民, 命銓臣, 愼簡牧御之任, 時或分遣近臣, 按廉各道, 考勤慢嚴黜陟, 蓽門圭竇, 有懷必陳, 窮澨遐陬, 無微不燭。 群工勵翼, 儆于有位, 賞賚降於循良, 招徠遍於遺佚。 若先儒名碩, 忠孝義烈之未及褒揚者, 循國論採廷議, 貤誥節惠, 施及泉隧, 烏頭綽楔, 表厥宅里。 雖編戶匹庶之流, 行誼有可記者, 則亦命旌其閭, 或賜復其家, 用以風勵一世。 王, 恪修侯度, 小心翼翼凡時節貢獻行人必揀, 壤奠必檢, 皇華宣詔之行, 飭郡邑塓館, 易路資糧, 屝履無敢不備, 遣上卿, 儐於境上, 郊館之迎送, 宴饗之酬接, 靡或不謹。 邊岡犯境之民, 嚴紏而罪之, 上國漂海之人, 厚資而送, 之壹遵欽定約束, 罔有少違。 辛亥春, 以王之本生祖恩彦君, 辛酉誣案, 遣使伸辨, 特蒙燭庇之恩, 顯賜昭雪之命。 癸亥春, 以鄭元慶 《廾一史約編》中, 有國祖康獻王受誣事, 專价陳籲, 亦蒙昭晣之典。 辛酉春, 文宗顯皇帝駕幸熱河, 王遣陪臣伸起居之禮, 欽奉聖旨, 自京師回還, 亦蒙嘉奬之音。 是惟大朝字小之渥, 視同內服, 亦緣小邦事大之節, 亶出衷悃也。 克愼儉德, 敦尙樸素, 法章之外, 屛祛錦綺, 常服之衣, 屢加澣濯, 饌羞絶珍異之味, 器用無奢麗之玩, 宴遊盤樂, 泊然無所好, 苑囿輿馬, 不役于心。 先王宮室, 弊則改之, 仍舊修葺, 筵架尺度, 無所增飾。 躬先率敎, 以爲導民成俗之本, 實心實政, 躋斯世於郅隆之域, 將見久道化成之效矣。 天降大割, 以癸亥十二月初八日庚辰, 疾大漸, 薨于昌德宮之正寢。 在位十四年, 春秋三十三, 臨終, 命大臣近臣禮官入侍, 正其終也。 內自王宮國都, 以至深山絶海, 莫不奔走號哭, 如喪父母。 王, 辛亥免喪, 行嘉禮, 冊金氏爲妃, 膺大朝誥命, 正位中宮, 永恩府院君贈議政府領議政汶根之女也。 王德器渾成, 學問夙就, 源百之行, 上紹家法, 精一之謨, 遠承聖訓, 天人性命之蘊奧, 公私義理之界分, 纖悉剖析, 洞見本原, 每於燕閑之時, 益懋講習之工。 王舊勞于外, 卽知小人依畎畝艱難, 寒暑怨咨, 皆王耳目之所閱歷, 故綏民之謨, 保民之訓, 屢發於筵席之上。 嘗書揭安民二字, 朝夕常目曰, ‘此予之責也’, 一念憂勤, 不自暇逸。 凡所勞徠撫䘏之政, 靡有不用其極。 是以, 上有克享之德, 下受多福之庇, 終王之世, 迄用康年, 禾穀豐稔, 民不饑寒, 敎條峻茂, 聲施鬯明。 不弔昊天, 竟嗇遐齡, 使環東土含生之倫, 未能蒙悠久無疆之化。 嗚呼! 冤哉。 然而承先世熙洽之運, 做一代博大之治。 輝光之著, 萬姓衣被, 渥澤之覃, 八埏幈幪, 室善盛德, 民無能名, 宏規懿範, 史不勝書。 易曰 ‘天之所助者順也, 人之所助者信也’, 王之所以膺景命而對洪休也。 書曰 ‘敷聞在下, 昭升于上’, 王之所以熙庶績而鞏靈圖也。 詩曰 ‘於戲! 前王不忘。’ 王之所以存諸身而徵諸民, 親賢樂利而不能忘者, 其本有由。 嗚呼! 盛矣。 嗚呼! 痛矣。 【行知中樞府事金炳國製。】
- 【태백산사고본】 9책 1권 8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666면
- 【분류】왕실(王室) / 어문학(語文學)
- [註 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