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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실록 1권, 순조 대왕 묘지문[誌文]

순조 대왕 묘지문[誌文]

지문(誌文)은 다음과 같다.

"우리 연덕 현도 경인 순희 대왕(淵德顯道景仁純禧大王)께서는 34년 동안 재위(在位)하시면서 오래도록 도를 행하여 교회를 이루었으므로 백료(百寮)들이 직무를 봉행함에 있어 각각 자신의 직위(職位)를 지켰고 만백성은 각기 생업(生業)을 즐기면서 각각 자신의 삶을 편안히 누려왔습니다. 길짐승·날짐승·벌레 등 생기를 머금고 꿈틀거리는 종류에 이르기까지 편안한 곳을 얻지 않은 것이 없어서 인성(仁聲)과 인문(仁聞)이 온 나라에 넘쳐 흘렀습니다. 그런데 신민(臣民)들이 복록이 없어 갑오년 11월 초6일 병이 있어 편안하지 못하시다가 13일에 경희궁(慶熙宮)회상전(會祥殿)에서 승하하시니, 춘추(春秋)가 45세였습니다. 가까이는 왕궁(王宮)과 국도(國都)로부터 멀리는 깊은 산속 외진 골짜기에 이르기까지 부모가 돌아가신 것처럼 발을 구르며 슬피 통곡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 서울과 지방이 차이가 없었으니, 진실로 성대한 덕과 지극한 선이 사람들에게 깊이 젖어들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겠습니까?

아! 성대합니다. 아! 슬픕니다. 대신(大臣)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삼가 존시(尊諡)를 올리기를, ‘문안 무정 헌경 성효(文安武靖憲敬成孝)’라고 하고, 묘호(廟號)를 ‘순종(純宗)’이라고 하였습니다. 을미년(乙未年) 4월 19일 무신(戊申)에 교하(交河)인릉(仁陵) 을좌(乙坐)의 언덕에 장사지내니 예절(禮節)인 것입니다. 금상(今上) 전하께서 신에게 유궁(幽宮)의 지문(誌文)을 지으라고 명하시었으므로 신은 두려워 떨면서 사실에 걸맞게 못하면 어쩌나 하는 조심스런 마음으로 감히 아래와 같이 차례대로 찬술(撰述)합니다.

삼가 살피건대, 왕(王)의 성(姓)은 이씨(李氏)이고 휘(諱)는 공(玜)이며 자(字)는 공보(公寶)이니 정종 문성 무열 성인 장효 대왕(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의 아드님이다. 모비(母妃)는 예경 자수 효의 왕후(睿敬慈粹孝懿王后) 김씨(金氏)이니 청원 부원군(淸原府院君) 정익공(靖翼公) 김시묵(金時默)의 따님이다. 수빈(綏嬪) 박씨(朴氏)가 실제로 왕을 낳았는데, 효의 왕후가 정종(正宗)의 명에 의하여 데려와서 아들로 삼고 원자(元子)로 정호(定號)하였다. 수빈은 증 영의정(贈領議政) 충헌공(忠獻公) 박준원(朴準源)의 따님이다. 이보다 앞서 문효 세자(文孝世子)가 졸서(卒逝)하자 정종이 저사(儲嗣)에 대해 매우 근심을 하고 있던 중에 기유년036) 봄에 이르러 궁인(宮人)이 용이 날으는 상서로운 꿈을 꾸었다. 조금 뒤에 수빈이 임신하였는데 바라보는 눈길이 맑고도 밝았고 이상한 신채(神彩)가 발산되었으므로 궁중의 상하가 모두 큰 경사가 있을 조짐으로 여겼다. 경술년037) 6월 18일 왕이 탄생하였는데 오색 무지개가 묘정(廟井)에서 하늘로 뻗혔고 신비로운 광채가 궁림(宮林)에 둘러 있었다. 정종(正宗)께서 나아가 보고 나서 이르기를, ‘이 아이의 복록은 내가 따를 수 없는 정도이다.’라고 하였다.

왕은 어려서부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 겨우 두 살 되던 해 동지(冬至)에 정종께서 새 역서(曆書)를 하사하였는데, 이는 왕이 장차 한 살 더먹게 되는 것을 기뻐해서였던 것이다. 왕은 그때 품에 안겨 있으면서 이를 받아서 펴보다가 이어 서병(書屛)의 글자 가운데 같은 글자를 가리키니 측근의 신하들이 매우 특이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조금 자라자 부왕(父王)을 더욱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보통 놀이하는 일도 부왕이 하기를 바라지 않으면 즉시 감히 하지 않음으로써 뜻을 어긴 적이 없었다. 전궁(殿宮)을 섬김에 있어 전혀 흠잡을 데가 없었고 효의 왕후에 대해서는 경애(敬愛)가 더욱 환히 드러났으므로 정종께서 자주 칭찬하였다.

경신년038) 봄 왕세자(王世子)로 책봉되고 관례(冠禮)를 행하였다. 6월에 정종(正宗)께서 승하하시자 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卽位)하였고 양암(諒闇)039) 의 상제(喪制)를 성인(成人)처럼 하였다. 군신(群臣)들 가운데 진현(進見)하는 사람들의 말이 선왕(先王)에게 언급되면 반드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슬픔을 억제하느라 실성(失聲)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 지극한 효성에 감복하였다. 이때 정순 왕후(貞純王后)가 수렴(垂簾)하고서 같이 청정(聽政)하였으므로 일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왕은 한결같이 모두 여쭈어 결정하였고 감히 혹시라도 마음대로 한 적이 없었다.

처음 정종(正宗)께서 춘저(春邸)에 계실 적에, 척신(戚臣) 김귀주(金龜柱)의 종숙(從叔)인 김한록(金漢祿)이란 자가 김귀주를 위하여 은밀히 사당(死黨)을 모집하였다. 그러하여 장차 국본(國本)040) 를 위태롭게 할 것을 모의한 끝에 호인(胡寅)041) 이 당(唐)나라 중종(中宗) 때의 일042) 을 논한 것을 인용하였는데 그 말이 그지없이 패려스러웠다. 정종께서는 그 역절(逆節)을 환히 알고 있었지만 일이 성궁(聖躬)043) 에 관계된 것이어서 용서하고 묻지 않았다. 왕이 새로 대상(大喪)을 당하여 군주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롭게 되자 군흉(群凶)의 여얼(餘孽)들이 때를 타고 더욱 기세를 확장하여 위협하면서 옹폐(壅蔽)하였다. 적신(賊臣) 권유(權裕)의 상소에 이르러서는 그 계교가 또 선왕(先王)께서 이미 정해 놓은 대혼(大婚)을 저지시키기 위해 노신(老臣)의 충애(忠愛)라는 말을 전석(前席)에서 발론하였는가 하면 삼간(三揀)은 하지 않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온 세상에 유포되어 화가 장차 하늘에 닿게 될 상황이었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한심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정순 왕후의 성명(聖明)을 힘입어 기미를 살펴 간사한 싹을 자르고 힘써 큰 기강을 부지시켰으므로 드디어 임술년044) 겨울에 가례(嘉禮)를 행하게 되었고 따라서 종사(宗社)가 다시 편안할 수 있었다.

왕이 직접 만기(萬機)를 총괄하면서부터 숙특(淑慝)을 엄중히 하여 충역(忠逆)을 분변하였다. 그리하여 갑자년045) 에 제일 먼저 권유에게 역률(逆律)을 시행하였는데, 이는 흉적을 비호하고 군주와 모후(母后)를 무시한 것이니, 온 나라의 죄인이기 때문이었다. 심환지(沈煥之)의 관작(官爵)을 추삭(追削)했는데, 이는 공공연히 거짓말을 하여 양궁(兩宮)046) 을 이간한 것이니, 자성(慈聖)의 죄인이기 때문이었다. 홍재민(洪在敏)을 해도(海島)로 찬배(竄配)시켰는데, 이는 선왕의 의리를 간범하고 더할 수 없이 엄중한 자리를 능핍(凌逼)한 것이니, 삼조(三朝)의 죄인이기 때문이었다. 김달순(金達淳)을 사사(賜死)하였는데, 이는 간흉(奸凶)의 와주(窩主)가 되어 상하 4, 50년 동안 김귀주·김한록의 흉도(凶圖)를 근본으로 삼고 심환지·권유의 역안(逆案)을 연접시켜 온 세상을 이적(夷狄)과 금수(禽獸)의 지역으로 빠뜨린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김종수(金鍾秀)가 괴수가 되었으니 김종수는 실로 만세(萬世)의 죄인인 것이다. 정묘년047) 에 역률(逆律)을 추시(追施)하여 김귀주·김한록을 정향(庭享)에서 축출하고 아울러 그 도당(徒黨)과 지속(支屬)들은 각기 자신들이 지은 죄에 걸맞는 죄를 주었다. 이제야 천토(天討)가 크게 행하여졌고 국시(國是)가 정하여졌다.

이른바 서양학(西洋學)이라는 것이 북쪽에서부터 내려와서 인륜을 무너뜨리고 정교(正敎)를 파괴시키면서 많은 사람들을 물들이고 전습(傳習)되었으므로 그릇된 방면으로 인도되는 이들이 많았다. 드디어 빨리 주벌(誅罰)을 시행하여 깨끗하고 시원스럽게 쓸어냈으니, 이는 바로 왕의 오도(吾道)를 호위하고 사교(邪敎)를 내치는 큰 정사였다. 그런데 김귀주·김한록의 도당들은 이 일을 빙자하여 혜경궁(惠慶宮)의 동생인 홍낙임(洪樂任)과 아울러 폐종(廢宗)된 인(䄄), 의 아내, 그 아들 담(湛)의 아내까지 죄에 얽어 넣어 죽게 하였으나 왕의 뜻이 아니었다. 뒤에 왕이 마침내 다시 홍낙임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고 인(䄄)의 자녀들을 섬에서 나오게 하여 집을 지어주고 시집 장가보내었다.

왕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므로 지극한 슬픔이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어 정순 왕후(貞純王后)·효의 왕후(孝懿王后)·혜경궁(惠慶宮)·수빈(綏嬪)을 받들어 섬김에 있어 온화한 안색을 지니는 사랑을 극진히 하고 뜻과 물건을 봉양하는 정성을 다하면서도 공경하고 조심하여 미치지 못하는 듯이 애써서 하였다. 아침 저녁으로 문안 올리는 것은 추위나 더위에도 거른 적이 없었으며 일이 있어 못할 경우에는 반드시 내수(內竪)를 시켜 기거(起居)048) 를 묻게 하였고 내수가 돌아온 것을 본 후에야 마음을 놓았다.

기사년049) 에 왕세자가 탄생하여 전궁(殿宮)에 진하(陳賀)하고 나서 상신(相臣)의 건백(建白)으로 인하여 수빈(綏嬪)에게 진호(進號)하였는데, 이는 저하(邸下)를 위하여 존봉(尊奉)한 것으로 혜경궁의 의절(儀節)과 대등하게 하였다. 을해년050)혜경궁이 훙서(薨逝)하니 정신(廷臣)들 가운데 복제(服制)에 대해 의심하는 이가 많자, 왕이 소생(所生)임을 추사(追思)하여 널리 고례(古禮)를 채집하여 대공(大功)051) 의 복제(服制)로 하기로 정한 다음, 상복을 입었다. 신사년052) 에 효의 왕후가 승하하자 왕은 슬퍼하고 사모하는 것을 경신년053) 때와 같게 하였으며 영돈녕부사 김조순(金祖淳)의 말로 인하여 건릉(健陵)으로 이봉(移奉)하여 합부(合祔)하였다. 임오년(壬午年)054)수빈이 졸서(卒逝)하니, 왕이 대신(大臣)과 제신(諸臣)들의 의논을 수용하여 시마 삼월복(緦麻三月服)을 입었다. 제복(除服)하고 나서는 흰 의관[索衣冠]을 입고 3년 동안 지냈다.

왕은 하늘을 섬기고 선조를 받드는데 더욱 경근(敬謹)을 극진히 하였다. 그리하여 거처하는 침실(寢室)은 아무리 더워도 반드시 문을 닫게 함으로써 감히 하늘을 쳐다보고 드러눕지 않았으며, 말이 일월(日月)과 풍우(風雨)에 언급되면 반드시 존경을 극진히 하여 태만한 자세가 없었으며, 천둥이 심하게 칠 적에는 반드시 엄숙한 자세로 안색을 고치고 옷깃을 여미고 두 손을 마주잡고 앉아서 천둥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모든 크고 작은 재이(災異)에 대해 중앙과 지방에 신칙하여 아뢰지 않고 숨기는 일이 없게 하였으며, 재이가 발생할 때마다 도와 주어 재앙을 없애줄 것을 하늘에 빌었다.

종묘(宗廟)의 향사(享祀)는 반드시 몸소 행하였는데 자성(粢盛)은 정결하게 하고 제기(祭器)를 씻는 것을 살피는 등 두려워 조심하는 마음가짐을 지녔다. 봄·가을로 반드시 침원(寢園)을 지알(祗謁)하는 것을 해마다 상례(常禮)로 삼았다.

중국의 연경(燕京)에서 《황청통고(皇淸通考)》를 사가지고 왔는데, 거기에 기재된 본조(本朝)의 신축년055) 사대신(四大臣)056) 의 일에 대해 기재된 내용이 거짓된 것이어서 차마 말할 수 없는 정도였다. 왕은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여 속히 사신(使臣)을 보내어 변정(辨正)하여 무주(誣奏)한 구어(句語)를 삭제하게 하였으며, 사신이 일을 끝내고 돌아오자 종묘(宗廟)에 고하였다. 국제(國制)에 옛날 궁시(宮寺)에 있던 노복(奴僕)을 선두안(宣頭案)에 입적(入籍)시켜놓은 것이 있었는데, 때대로 신공(身貢)을 받기 때문에 이것이 백성들에게 뼈에 사무치는 억울함이 되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선왕(先王)의 유의(遺意)라고 아뢰니, 왕은 즉시 그 문권(文券)을 불에 태우라고 명하였다. 장영(壯營)의 큰 경비(經費)를 철회(撤回)하여 대농(大農)으로 돌려주었고, 약원(藥院)의 별공(別供)을 감하여 제도(諸道)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하였다.

계해년057) 여름에 관서(關西)관북(關北)에 재해(災害)가 들었고 겨울에는 강화(江華)에 기근이 들었는데, 이때 내부(內府)에 저장되어 있는 것을 지출하여 본도(本道)의 세입(稅入)을 정지하게 하였다. 기사년058) 에 양호(兩湖)에 큰 흉년이 들자,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포흠(逋欠)을 견감시키고 조부(租賦)를 감면하여 주었다. 신사년059) 에 여역(癘疫)이 크게 치성하여 죽는 사람이 잇따랐는데 관서(關西)가 더욱 극심하였으므로 근신(近臣)을 보내어 경내(境內)에서 여제(癘祭)를 지내게 하였다. 임진년060) 에 큰 홍수가 났는데 특별히 소결(疏決)061) 을 행하여 용서하여 준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이로부터 큰 흉년이 들거나 홍수의 재해가 발생하면 번번이 주야로 우근(憂勤)하여 곡진한 우휼(優恤)을 가하였으며, 한더위와 한추위에는 반드시 오랫동안 판결이 나지 않은 죄수를 내어 보내고 춥고 굶주리는 것을 진념(軫念)하여, 말년(末年)에 이르도록 혹시라도 폐기한 적이 없었다.

신미년062) 에는 관서(關西)에서 토구(土寇)063) 가 일어나 장리(長吏)를 죽이고 일곱 군(郡)을 함락시켰으므로 왕이 군대를 보내어 이들을 주토(誅討)하였다. 관리 가운데 나랏일 때문에 죽은 사람은 정포(旌褒)한 다음 그 아들을 녹용(錄用)하게 하고, 민인(民人) 가운데 협박에 의해 가담한 사람은 사면하여 주어 생업에 복귀시켰으며, 수령에게 신칙하여 위로하고 맞아와서 안집(安集)시키게 하니, 1년도 안 되어 백성들이 그 난리를 잊게 되었다. 왕은 명기(名器)064) 를 신중히 하고 아껴서 일체의 관직(官職)을 혹시라도 함부로 제수한 것이 없었으며, 더욱 대신(大臣)을 공경하고 예우하여 매양 구복(甌卜)065) 할 때를 당하면 반드시 의관(衣冠)을 단정히 하고 앉아서 그 성명(姓名)을 썼으며, 대신을 진접(進接)할 때는 아무리 병환이 심해도 설복(褻服)066) 으로 대하지 않아서 예모(禮貌)를 반드시 근신하게 하였다.

정해년067) 에 왕세자에게 군국 대사(軍國大事)를 대리(代理)하여 스스로 결단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국조(國朝)의 고사(故事)를 따른 것이다. 이해 가을 왕세자가 왕에게 연덕 현도 경인 순희(淵德顯道景仁純禧)라는 존호(尊號)를 올리고 왕비(王妃)에게는 명경(明敬)이란 존호를 올렸다. 경인년068) 에 세자가 훙서(薨逝)하니 원손(元孫)을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하였다. 왕은 지극한 정을 애써 억누르면서 다시 기무(機務)를 직접 보살폈는데, 임진년069) 에 두 공주(公主)가 또 서로 잇따라 요서(夭逝)하니, 왕은 아프고 슬픈 마음을 안색에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영위(榮衛)070) 가 안에서 삭아져서 항상 실의(失意)한 모습으로 즐거움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뜻밖의 병으로 인하여 군신(群臣)들을 아주 버리고 떠나시니, 하늘이여! 슬픕니다. 왕의 대덕(大德)으로 반드시 그 보답을 받을 터인데도 수(壽)가 중년(中年)에 그쳤으니, 이치를 믿기 어려운 것이 이와 같다. 그러나 성교(聲敎)가 당시에 널리 미쳤고 광렬(光烈)이 후세에 영구히 전하여, 후왕(後王)은 그 친족에게 친근하고 현인을 존경하며, 백성들은 그 즐거움을 즐겁게 여기고 그 이익을 이롭게 여겨 살아서는 영광스럽고 죽어서는 슬퍼하니, 아아! 영원히 잊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장차 천지와 함께 영원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보다 성대한 것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정신(廷臣)들이 왕의 공덕을 의논하여 백세(百世)토록 제사지내는 것이 마땅하다 하여 드디어 높여 세실(世室)로 삼았다.

왕비(王妃) 김씨(金氏)는 본관(本貫)이 안동(安東)인데, 영안 부원군(永安府院君) 충문공(忠文公) 김조순(金祖淳)의 따님이다. 2남(男) 3녀(女)를 낳았는데 장남(長男)은 효명 세자(孝明世子)이다. 금상(今上)이 즉위하여 익종 대왕(翼宗大王)으로 추존(追尊)하였다. 차남은 요서(夭逝)하였다. 장녀는 명온 공주(明溫公主)인데 동녕위(東寧尉) 김현근(金賢根)에게 하가(下嫁)하였으며, 차녀는 복온 공주(福溫公主)인데 창녕위(昌寧尉) 김병주(金炳疇)에게 하가하였으나, 모두 일찍 졸서(卒逝)하여 소생이 없다. 그 다음은 덕온 공주(德溫公主)인데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숙의 박씨(淑儀朴氏)영온 옹주(永溫翁主)를 낳았는데 또한 요서(夭逝)하였다. 익종의 비(妃) 조씨(趙氏)풍은 부원군(豊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의 따님인데 금상 전하를 탄생하시었다.

왕은 자표(姿表)가 특이하여 넓은 이마와 높은 콧마루에 네모난 입과 겹턱을 가졌는데 용안(龍顔)은 불그레하고 체상(體相)은 풍만하고도 장대하였다. 그리하여 바라보면 엄연(儼然)한 위엄이 있어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는데, 앞으로 나아가면 온화하게 덕이 있어 친근함을 느끼게 하였다. 천성이 효우(孝友)하고 공검(恭儉)하며 돈중(敦重)하고 인서(仁恕)하여 사물(事物)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평상시에도 하루 종일 단정히 앉아 있었으며 사람을 접견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고대의 전적(典籍)을 즐겨 탐독하여 열람하지 않은 책이 없었으며 눈으로 보면 즉시 기억하였다. 전장(典章)과 의문(儀文)에 이르기까지 묵묵히 알고 널리 관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시문(詩文)을 짓는 것도 모두 오묘한 경지에 이르렀으나, 스스로 자부심을 지니지 않고 경전(經傳)에만 전심(專心)하여 마음속으로 궁구하고 체험해서 힘써 실용(實用)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왕의 학문은 일관되게 성신(誠信)을 근본으로 하고 화려한 명예와 우뚝한 행실을 좋아하지 않았다. 3기(紀) 동안의 치화(治化)가 태평 성대를 이루어 백성들이 그 혜택을 받게 된 것은 실로 그 기반이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중년(中年)에 수빈(綏嬪)이 살아계실 적에는 왕이 섬기기를 매우 근신히 하여 반드시 생각하기 전에 뜻을 받듦으로써 기뻐함을 곡진히 유도하였다. 수빈께서 매양 왕에게 찬선(饌膳)을 보낼 적마다 비록 구미(口味)에 맞지 않더라도 반드시 수저를 들어 맛보았으며 아무리 자주 보내와도 또한 그렇게 하였다. 수빈께서 늘 양심합(養心閤)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이는 왕의 처소와 가깝기 때문이었다. 졸서(卒逝)함에 이르러서는 왕이 매양 홀로 서서 그쪽을 바라보았는데 옥색(玉色)에 처연(凄然)함이 감돌아 마치 뵐 수 있는데도 못뵈는 것처럼 하였다. 그리하여 음식상을 대하면 번번이 수저를 내리고 드시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므로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숙선 옹주(淑善翁主)는 왕의 누이동생인데 다독거려 사랑하는 것이 더욱 돈독하였다. 공주가 하가(下嫁)할 적에 3일 동안 외저(外邸)에 있었는데도 왕은 매우 서글픈 빛을 띠었으며, 공주가 돌아올 적에는 마치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이 온 것처럼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출합(出閤)할 때가 되어서는 계속 서로 만나볼 수 없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고 문안과 선물을 빠뜨리는 날이 없었으며 말하는 것은 반드시 따라 주었고 요구하는 것은 반드시 들어주었다. 공주가 입궁(入宮)한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기일을 손꼽으면서 기다렸는데 기쁜 빛이 안색에 드러나 보였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감복하여 마지 않았다.

왕은 평소 아름답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스스로의 생활은 매우 담박(淡泊)하였으며 복어(服御)에는 비단으로 꾸민 것이 없고 반선(盤膳)에는 기이한 식품(食品)을 금하였는데, 포백(布帛)의 꾸밈새와 숙속(菽粟)의 음식으로도 거부감 없이 편안하게 여겼다. 신기하고 보기 좋은 물건은 모두 남김없이 물리쳐 버리고서 이르기를, ‘이것을 써서 무엇을 하겠는가? 사람의 심지(心志)만 손상시킬 뿐이다.’라고 하였다. 궁실(宮室)이 좁고 누추해도 이를 넓혀 새롭게 하지 않았으니 이에 대해서도 말하기를, ‘몸을 용납할 수 있으면 되지 사치스럽고 크게 만들어 어디다 쓰겠는가?’라고 하였다. 주금(裯衾)·유장(帷帳)의 등속에 이르러서도 모두 빨아서 기워 쓰게 하였다. 궁중에서 무늬 비단으로 된 반소매 옷을 하나 올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 왕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이것이 과연 좋기는 하구나.’ 하고, 받아서 입고 하룻밤을 지내고는 즉시 벗고 다시는 입지 않았다.

조정에 임어하여서는 침착하여 말이 적었고 의용(儀容)은 엄숙하고도 온화하였으므로 군하(群下)들이 감히 우러러 보지를 못하였다. 그러나 사람을 대하고 사물(事物)을 접할 적에는 부드럽고 순수하며 겸손하고 온화하여 자만하거나 긍장(矜莊)하는 안색이 없었으며 조신(朝臣)이 진언(進言)하면 반드시 허심 탄회하게 받아들여 선한 말은 취하여 쓰고 선하지 않은 것은 버렸다. 그리하여 혹시라도 성색(聲色)과 위벌(威罰)을 갑자기 시행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충성(衷誠)을 바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더욱 백성의 일을 중히 여기고 농사짓는 어려움을 두루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매양 상선(常膳)을 진어할 적에도 반드시 예모를 갖추고 밥상을 대하였으며 떨어뜨린 밥알이 있으면 반드시 주우라고 명하면서 말하기를, ‘백성들이 하늘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인데 어떻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며, 항상 말하기를, ‘재부(財賦)는 백성에게서 나와 위에 바쳐진 것이기 때문에 사의(私意)로 부고(府庫)의 축적을 함부로 허비하지 않는 것은 장차 쓸 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또 당연히 지출하여야 하는데도 지출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그런 때문에 왕의 한평생 동안에는 영작(營作)을 하지 않고 사여(賜與)를 신중히 하였으며 농상(農桑)을 권과(勸課)하고 민력(民力)을 애양(愛養)하였는데, 홍수·가뭄·도적·기근·돌림병 등의 재해를 당하면 번번이 전세(田稅)를 견감시키거나 탕감하고 곡식을 진대(賑貸)하였으며 내탕(內帑)의 것을 다 내어 놓아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몸가짐을 단속하고 아랫사람 다스리는 것은 너그럽게 하였으며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고 같은 허물을 두 번 범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편견을 버리고 남의 좋은 의견을 취하며 선한 말을 따르는 것을 물흐르는 듯이 하였다. 한 번도 일을 해치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고(敎告)가 간이(簡易)하여 알기가 쉬웠으며, 정령(政令)이 순일하여 잡된 것이 없었기 때문에 말년(末年)에 이르기까지 조야(朝野)가 평안하였다. 용심(用心)이 지극히 인자하여 하찮은 벌레라 할지라도 혹여 상해(傷害)될까 두려워하였으며, 나이 들어 늙은 사람을 보면 비록 신분이 비천하더라도 반드시 후하게 대우하였다. 또 형벽(刑辟)은 사람의 사생(死生)에 관계되는 것으로 여겨 흠휼(欽恤)하고 애긍(哀矜)하는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므로 죄없이 부당한 처벌을 당하는 사람이 있지 않았다.

삼가 논하건대, 예로부터 훌륭하고 명철한 임금이 대대로 끊이지 않고 사서(史書)에 기록되고 있지만, 왕·패(王覇)에 뒤섞이지 않고 이의(利義)에 현혹 되지 않은 경우는 대체로 드물다. 그런데 우리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는 하늘이 내신 자품으로 전성(前聖)의 통서를 이었으며 치법(治法)과 정모(政謨)가 순수하게 한결같이 올바른 데서 나왔으므로 요제(堯帝)순제(舜帝)가 큰 하늘을 본받고 무위(無爲)의 다스림을 베풀어 높고 넓어 이름하기 어렵다는 것과, 우왕(禹王)탕왕(湯王)이 나랏일에 부지런하고 〈성색(聲色)을〉 가까이 하지 않고 〈화리(貨利)를〉 증식시키지 않은 것과, 주(周)나라 문왕(文王)무왕(武王)이 덕이 순일하여 선왕의 사업을 잘 계술(繼述)한 것을 왕이 실상 모두 다 겸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자부하지 않았으니, 아! 지극합니다.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군자의 도(道)는 자신의 덕에 근본하여 백성에게서 이를 증험하며 삼왕(三王)071) 에 견주어 고찰하더라도 어긋남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왕을 두고 한 말이다.

신(臣)은 폐부(肺腑)의 친분으로 일월(日月)같이 빛나는 말광(末光)을 의탁하여 20여 년 동안 직접 훈도(薰陶)를 받았으므로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을 진실로 다 기술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러나 이제 덕을 글로 표현해 냄에 있어 화려하기만 하고 실상이 없으며 너무 지나쳐 진실하지 않게 한다면 후세에서 징신(徵信)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또한 평소 겸손으로 빛나던 지극한 덕에 어긋남이 있게 된다. 그리하여 삼가 큰 줄거리만을 뽑아서 차라리 간략하게 할망정 지나침이 없게 하는 쪽을 택하였다." 【홍문관 제학 김유근(金逌根)이 지었다.】


  • 【태백산사고본】 35책 1권 3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420면
  • 【분류】
    왕실(王室) / 어문학(語文學)

  • [註 036]
    기유년 : 1789 정조 13년.
  • [註 037]
    경술년 : 1790 정조 14년.
  • [註 038]
    경신년 : 1800 정조 24년.
  • [註 039]
    양암(諒闇) : 임금의 거상중(居喪中)을 이름.
  • [註 040]
    국본(國本) : 왕세자.
  • [註 041]
    호인(胡寅) : 송(宋)나라 학자.
  • [註 042]
    당(唐)나라중종(中宗) 때의 일 : 당(唐)나라 중종(中宗)은 고종(高宗)의 아들로, 모후(母后)인 측천 무후(則天武后)에게 유폐되어 황제로서의 구실을 못하였는데, 유폐된 지 21년 만에 충신 적인걸(狄仁傑)·장간지(張柬之) 등에 의해 측천 무후가 폐위되고 다시 중종이 복위하였음.
  • [註 043]
    성궁(聖躬) : 정종.
  • [註 044]
    임술년 : 1802 순조 2년.
  • [註 045]
    갑자년 : 1804 순조 4년.
  • [註 046]
    양궁(兩宮) : 임금과 왕대비.
  • [註 047]
    정묘년 : 1807 순조 7년.
  • [註 048]
    기거(起居) : 안부.
  • [註 049]
    기사년 : 1809 순조 9년.
  • [註 050]
    을해년 : 1815 순조 15년.
  • [註 051]
    대공(大功) : 오복(五福)의 하나, 비교적 올이 굵은 베로 상복을 만들어 9개월 동안 입는 것. 장자처(長子妻)에 대하여서는 기년복(期年服)을 입고, 중자처(衆子妻:맏며느리 이외의 며느리)에 대하여서는 대공복을 입음.
  • [註 052]
    신사년 : 1821 순조 21년.
  • [註 053]
    경신년 : 1800, 정조가 승하한 해.
  • [註 054]
    임오년(壬午年) : 1822 순조 22년.
  • [註 055]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 [註 056]
    사대신(四大臣) : 경종 원년(1721년)에 세제(世弟)의 책봉을 주장했던 노론(老論)의 네 대신, 곧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頣命)·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를 말함.
  • [註 057]
    계해년 : 1803 순조 3년.
  • [註 058]
    기사년 : 1809 순조 9년.
  • [註 059]
    신사년 : 1821 순조 21년.
  • [註 060]
    임진년 : 1832 순조 32년.
  • [註 061]
    소결(疏決) : 죄인을 관대하게 처벌함.
  • [註 062]
    신미년 : 1811 순조 11년.
  • [註 063]
    토구(土寇) : 홍경래의 난.
  • [註 064]
    명기(名器) : 작호(爵號)와 거복(車服).
  • [註 065]
    구복(甌卜) : 재상을 가려 뽑는 일.
  • [註 066]
    설복(褻服) : 평상시의 의복.
  • [註 067]
    정해년 : 1827 순조 27년.
  • [註 068]
    경인년 : 1830 순조 30년.
  • [註 069]
    임진년 : 1832 순조 32년.
  • [註 070]
    영위(榮衛) : 몸을 보양하는 혈기(血氣).
  • [註 071]
    삼왕(三王) : 하·은·주(夏殷周)의우왕, 탕왕, 문·무왕을 말함.

○誌文:

惟我淵德顯道景仁純禧大王, 在宥三十四年, 久道化成, 百寮奉職, 各守其位, 萬姓樂業, 各安其生。 以至跂喙肖蝡, 蠢動含氣之倫, 無不各得其所。 仁聲仁聞, 洋溢八域。 臣民不祿, 以甲午十一月初六日, 有疾不豫, 十三日甲戌, 禮陟于慶熙宮會祥殿, 春秋四十有五。 近自王宮國都, 遠而深山窮谷, 莫不悲號哭踊, 如喪之慟, 無間中外, 苟非盛德至善入人之深, 何以致此? 嗚呼! 盛矣。 嗚呼! 慟矣。 大臣率百官, 謹上尊謚曰 ‘文安武靖憲敬成孝’, 廟號曰, 純宗。 以乙未四月十九日戊申, 大葬于交河仁陵坐乙原, 禮也。 今上殿下, 命臣以幽宮之誌, 臣悸恐戰越, 惟懼不稱, 敢撰次如左。 謹按王姓李氏, 諱, 字公寶, 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之子, 母妃睿敬慈粹孝懿王后金氏, 淸原府院君 靖翼公時默女也。 綏嬪朴氏, 是實生王, 而孝懿后, 以正宗命, 取而子之, 定號元子。 綏嬪贈領議政忠獻公 準源之女也。 先是, 文孝世子卒, 正宗, 深以儲嗣爲憂, 及己酉秋, 宮人夢飛龍之祥。 旣而綏嬪有娠, 視瞻淸炯, 神彩異常, 宮中上下, 皆以爲大慶之兆。 庚戌六月十八日, 王誕生, 彩虹亘于廟井, 神光繞於宮林。 正廟就而視之曰, ‘是兒福祿, 非吾所及也。’ 王自在孩提, 聰明絶人, 甫二歲冬至, 正廟賜以新曆, 蓋喜王之將添齡也。 王, 時自抱中, 受而披覽, 仍拈書屛上同文而指之, 左右莫不聳異。 稍長, 益敬畏父王, 雖尋常娛嬉之事, 父王所不欲爲, 卽不敢爲, 未嘗違拂。 事殿宮無間然, 而於孝懿后, 敬愛尤著, 正廟亟稱之。 庚申春, 冊封王世子, 行冠禮。 六月, 正宗昇遐, 王沖齡嗣服, 諒闇之制, 已如成人。 群臣之進見者, 語及先王, 必泫然流涕, 失聲掩抑, 國人服其至孝焉。 時貞純后垂簾同聽政, 事無大小, 王一皆稟決, 罔敢或專也。 初正廟之在春邸也 戚臣金龜柱之從叔漢祿者, 爲龜柱陰募死黨。 將謀危國本, 引胡寅 中宗時事, 其言絶悖。 正廟雖燭其逆節, 以事關聖躬, 貸而不問。 及王新遭大喪, 主勢孤危, 群凶餘孽, 乘時益張, 脅持壅蔽。 至賊臣權裕之疏, 而其計又欲沮敗, 先王已定之大婚, 老臣忠愛之語, 發於前席, 三揀不爲之說, 行於一世, 禍將滔天, 聞者寒心。 賴貞純后聖明, 炳幾折奸, 力扶大綱, 遂以壬戌冬, 行嘉禮。 宗社得以復安, 自王之親總萬幾, 嚴淑慝而辨忠逆。 甲子首施逆律, 營護凶賊, 目無君母者, 擧國之罪人也。 追削沈煥之官爵, 公肆矯誣, 惎間兩宮者, 慈聖之罪人也。 竄洪在敏于海島, 干犯先王義理, 凌逼莫嚴者, 三朝之罪人也。 賜金達淳死爲奸凶窩主, 上下四五十年, 本乎祿之凶圖, 接以之逆案, 陷一世於夷狄禽獸之域者。 金鍾秀爲之魁, 實萬世之罪人也。 丁卯, 追施逆律, 黜庭享龜柱漢祿, 竝與其徒黨支屬, 各以其罪罪之。 於是乎天討大行, 國是乃定。 有所謂西洋學者, 自北而來, 斁倫敗敎, 流染傳習, 人多詿誤。 遂亟施誅, 鋤闢之廓如, 此乃王衛道斥邪之大政。 而祿之徒藉其事, 構殺惠慶宮之弟洪樂任, 竝及廢宗, 之妻與其子之妻, 非王之意也。 後王, 卒復洪樂任官, 出之諸子女于島, 爲之置第而嫁娶之。 王以沖年失怙, 至慟在心, 奉貞純后孝懿后惠慶宮ㆍ綏嬪, 極容色之愛, 盡志物之養, 洞屬如不及。 定省以時, 寒暑無曠, 有故輒使內竪問起居, 見其還然後乃安也。 己巳, 王世子生陳賀于殿宮, 因相臣建白, 進號綏嬪, 爲邸下尊奉, 視惠慶宮儀節。 乙亥, 惠慶宮薨逝, 廷臣多以服制爲疑, 王, 追惟所生, 博採古禮, 定爲大功之制而服之。 辛巳, 孝懿后上賓, 王哀慕如庚申, 因領敦寧府事金祖淳言, 移奉健陵而合祔焉。 壬午, 綏嬪卒逝, 王, 用大臣諸臣議, 服緦麻三月。 旣除, 御素衣冠以終三年也。 王, 事天奉先, 尤致敬謹, 所御寢室, 雖暑必令閉戶, 未敢對天而臥, 語及日月風雨, 必致尊而無慢, 迅雷肅然, 改容必整襟拱手坐而待止。 凡大小災異, 飭中外無得諱而不聞, 輒求助而消弭之。 宗廟享祀, 必躬將潔粢盛眂滌漑, 憧憧粥粥也。 春秋, 必祗謁寢園, 歲以爲常。 有自燕肆購《皇淸通考》而來, 所載本朝辛丑四大臣事, 誣衊不忍言。 王大驚慼, 亟遣使辨正刊去誣奏句語, 使還, 告于廟。 國制, 舊有宮寺臧獲, 籍于案, 而世其貢爲民切骨之冤。 或以先王遺意爲言, 王, 卽命火其券。 撤壯營之巨費, 以還大農, 減藥院之別供, 俾紓諸道。 癸亥夏關西關北災, 冬, 江華饑, 出內府之藏, 停本道之入。 己巳兩湖大饑, 命道臣, 蠲欠逋寬租賦, 辛巳沴癘大熾, 死亡相續, 而關西尤甚, 遣近臣禳于境內。 壬辰, 大水, 特行疏決, 宥者屢十百人。 自是, 凡大侵之年, 極備之災, 輒宵旰憂勤, 曲加優恤, 盛暑祁寒, 必出滯囚, 軫凍餒, 至于末年, 未嘗或廢。 辛未關西土寇起, 殺長吏, 陷七郡, 王, 遣兵討誅之。 官吏之死事者, 旌褒而錄其孤, 民人之誘脅者, 肆赦而復其業, 飭守令勞徠安集, 不朞年而民忘其亂。 王, 愼惜名器, 一切官職, 罔或濫授, 而尤敬禮大臣, 每當甌卜, 必整衣冠端坐, 而書其姓名, 其晉接也, 雖甚病, 不以褻服對之, 禮貌必謹也。 丁亥, 命王世子代理軍國大事, 自決之。 遵國朝故事也。 是秋, 世子上王尊號淵德顯道景仁純禧, 王妃尊號明敬。 庚寅, 世子薨, 冊元孫爲王世孫。 王, 勉抑至情, 復親機務, 而壬辰, 兩公主又相繼夭逝。 王雖不以疚慼, 見於色, 榮衛內鑠, 恒忽忽如無樂。 竟以旡妄, 大棄群臣, 天乎! 慟哉。 以王大德, 必得其報, 而壽止中身, 理難諶斯。 然聲敎被於當時, 光烈垂於後世, 親賢樂利, 生榮死哀, 於戲! 不忘之思, 將與天壤而俱已。 又何盛也? 廷臣議王功德, 宜百世祀, 遂尊爲世室焉。 王妃金氏安東, 永安府院君 忠文公 祖淳之女。 誕二男三女, 男長孝明世子, 今上卽位, 追尊爲翼宗大王。 次夭逝。 女長明溫公主, 下嫁東寧尉 金賢根, 次福溫公主, 下嫁昌寧尉 金炳疇, 俱蚤卒無育。 次德溫公主, 未筓。 淑儀朴氏永溫翁主, 亦夭。 翼宗趙氏, 豐恩府院君 萬永女, 誕今上殿下。 王姿表特異, 廣顙隆準, 方口重頤, 龍顔渥丹, 體相豐偉。 望之儼然有威而可畏也, 卽之藹然有德而可親也。 天性孝友, 恭儉敦重, 仁恕不以事物經心。 燕居常終日危坐, 罕與人接。 耽賾墳典, 於書無所不覽, 過目輒記, 以至典章儀文, 無不默識而該貫。 奎藻宸翰, 皆臻其玅, 而退然不以自居, 專意經傳, 心究體驗, 務求實用, 故王之學, 一以誠信爲本, 不喜赫赫之譽, 矯矯之行。 而三紀之間, 治化熙洽, 民受其賜者, 實基於此。 中年, 惟綏嬪在世, 王事之冞謹, 必先意順志, 曲盡其歡。 綏嬪每致膳於王, 雖適不欲, 必下箸嘗之, 雖數亦然。 綏嬪嘗處養心閤, 爲其近於王所。 及卒, 王每獨立凝望, 玉色凄然, 若有所覿而不得也。 當食輒停箸不御曰, ‘食不下咽’, 聞者爲之感動泣下。 淑善主, 王之妹也, 撫愛尤篤。 其下嫁也, 在外邸三日, 王, 大以爲悵, 其還也, 迎勞如遠別, 及出閤, 以不得源源相見爲恨, 問遺無闕日, 所言必從, 所求必副。 聞其入宮, 必指期而待, 喜見於色, 觀者感服。 素不喜芬華, 自奉甚淡泊, 服御無錦綺之飾, 盤膳絶奇衺之品, 布帛之文, 菽栗之味, 處之晏如。 玩好之物, 悉屛去不留曰, ‘用此何爲? 徒喪人心志耳。’ 宮室之狹陋者, 未嘗拓而新之曰, ‘不過容膝, 何用侈大爲也?’ 至於椆衾帷帳之屬, 皆令澣濯而補綴之。 宮中嘗進一半臂紋緞也, 王, 笑曰, ‘此果好乎?’ 受而御之, 經宿卽解而不復進也。 臨朝淵默, 儀客肅穆, 群下不敢仰視。 及其對人而接物也, 溫粹謙和, 無滿假矜莊之色, 朝臣進言, 必虛懷聽納, 善則取之用之, 不善則舍之。 未或以聲色威罰, 加諸倉卒, 故人莫不輸其衷誠。 尤重民事, 周知稼穡之艱難, 故每御常膳, 必貌而對, 有遺粒則必命拾取曰, ‘民之所以爲天者, 豈可忽也?’ 常曰, ‘財賦出於民, 以奉上不可以私意, 濫費府庫之積, 將以有待也。 又不可以當出而不出。’ 故終王之世, 絶營作愼賜與, 勸課農桑, 愛養民力, 而遇有水旱盜賊饑饉癘疫, 輒蠲蕩賑貸, 傾帑而不惜也。 約以持身, 寬以御下, 不遷怒不貳過。 舍己取人, 從善如流。 未嘗以作爲害事, 故敎告簡易而易知, 政令純一而無雜, 迄于季年, 朝野寧謐。 用心至仁, 雖蟲豸之微, 惟恐其或傷, 見人有老者, 雖卑必優視之。 又以爲刑辟者, 人之死生係焉, 欽恤哀矜, 出於至誠, 未有無辜而橫罹者也。 竊嘗論之, 自古懿君哲辟, 代不絶書, 而不雜乎王ㆍ覇, 不眩於利義者, 蓋鮮矣。 惟我大行大王, 以天縱之姿, 接前聖之統, 治法政謨, 粹然一出於正, 之則大無爲, 巍蕩難名, 之克勤克儉, 不邇不殖, 之之德之純, 善繼善述, 王實兼有之而不與焉。 嗚呼! 其至矣。 傳曰, ‘君子之道, 本諸身, 徵諸庶民, 考諸三王而不繆’, 王之謂乎。 臣以肺腑之餘蔭, 托日月之末光, 親炙薰陶, 二十餘年, 其得於耳目者, 固難殫述。 而今於狀德之文, 華而不實, 溢而不衷, 則不但後世之無以徵信, 抑亦有違於平日謙光之至德。 謹撮其大槪, 寧約無濫云"爾。 【弘文館提學金逌根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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