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대왕 묘지문[墓誌文]
지문(誌文)
우리 정종 문성 무열 성인 장효 대왕이 왕위에 계신 지 13년 되던 해인 기유년에 현륭원(顯隆園)을 수원부(水原府) 화산(花山)으로 옮겨 모시고 그 원의 재전(齋殿)에다 어진(御眞)을 걸어두고는 거기에 혼정 신성의 뜻을 담은 다음 그 읍에다 성을 크게 쌓고 또 호위의 뜻으로 갖가지 형상을 세웠다. 그리고 1년에 한 차례 배알할 때마다 눈물을 쏟으며 차마 일어나지 못하였다. 경신년 1월에는 현륭원 배알을 마치고 동쪽 산기슭에 오르시더니 위연히 탄식을 하며 이르기를,
"아름답다 이 산이여, 수신(守臣) 너는 여기에 비를 세워 그 사실을 기록해 두도록 하라."
하였는데, 바로 그해 6월 11일 임술일에 병을 얻어 28일 기묘일에 창경궁의 정침(正寢)에서 승하하셨다. 그리고 앞으로 11월 6일 갑신일이면 그 동쪽 기슭을 따라 남쪽을 면으로 하여 성인(聖人)의 대장례를 치를 것이다. 아, 이 역시 하늘의 뜻인 것을 어찌하랴.
금상께서 신 행임(行恁)이 누구보다 남다른 인정을 받고 오랜 기간 가까이서 모시고 있었다 하여 신에게 현궁(玄宮)의 기록을 맡으라고 명하셨다. 우둔하여 따라 죽지도 못한 이 신이 차마 그 일을 맡을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또 학식이 천박하여 성인을 이해하기에도 부족한데 천지같이 크고 해와 달처럼 빛난 그 덕을 감히 만분의 일인들 그려낼 수가 있겠는가. 아, 도(道)의 근원은 하늘에서 나왔기 때문에 하늘이 성인(聖人)을 내어 그를 임금으로 삼고 스승으로 삼아 그 도를 온 천하에 퍼뜨리게 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이들이 복희(伏羲)·황제(黃帝)·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무(武)였고, 공부자(孔夫子)만은 임금이라는 지위를 못 얻었기 때문에 《시(詩)》·《서(書)》를 손질하고 《춘추(春秋)》를 저작하여 소왕(素王)으로서의 일을 했던 것이다. 공부자가 죽고 그로부터 1백여 년 후 맹씨(孟氏)가 나와서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정화시킴으로써 공부자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나 진(秦)·한(漢) 시대부터 이후로는 이단(異端)이 판을 치는 바람에 정학(正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었다. 송대(宋代)에 와서야 정자(程子)·주자(朱子)가 서로 이어 세상에 나와서 선왕(先王)의 도를 다시 밝혀내고, 이미 가버린 성인들의 뒤를 이어 후대 학자들의 길을 열어주었으니 그들 역시 맹씨 못잖은 공로를 남긴 분들이라 할 것이다.
정자·주자 시대가 멀어지자 사설(邪說)들이 또 일어나고 중구 난방으로 너도나도 떠드는 통에 표준이고 법식이고 도무지 없었는데, 이때 하늘이 문운(文運)을 열어 그 도가 드디어 우리 나라로 오게 된 것이다. 우리 선왕(先王)께서 왕위에 오르시고 천명을 지키면서 임금으로서 스승까지 겸하셨기에 덕이 높고 행실이 빈틈이 없었으며 학문이 높고 업적이 많았다. 주경(主敬)으로 근본을 다지고, 궁리(窮理)로서 앎을 넓혀나갔다. 오묘한 성명(性命)의 이치를 터득하고 조화(造化)의 원리를 꿰뚫어보는 지(知)와 만물을 동일체로 생각하고 천하를 한집으로 여기는 인(仁)과, 사사로운 자아를 극복하고 유구한 사업을 성취할 수 있는 용(勇)을 겸비하였던 것이다. 항상 경건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감히 일을 폐하거나 안일에 빠지지 않았으며, 방대하고도 중후한 은택이 군생들에게 골고루 미쳐 체온으로 감싸주고 따뜻하게 길러주고 수많은 백성들이 오고 가고 번성하여 거의 삼고(三古) 시절의 기상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 조종(祖宗)들이, 후손들이 번창할 만큼 덕을 쌓고 인(仁)을 쌓았기 때문에 하늘이 그를 위해 모든 상서를 모아두었다가 한 분의 성인을 내시어 이 나라가 한번 잘 다스려질 수 있는 운을 열어주신 것으로 남긴 풍도와 미진한 복이 앞으로 억만년을 두고두고 후손 대대의 힘이 될 수 있게 하셨으니 아, 그 얼마나 훌륭한가. 이에 드디어 손모아 절하고 머리를 조아린 다음 피눈물을 닦고 돌에다 이렇게 쓰는 것이다.
왕의 성은 이씨(李氏), 휘는 산(祘)이요, 자는 형운(亨運)이며, 영종 현효 대왕(英宗顯孝大王)의 손자이고, 사도 장헌 세자(思悼莊獻世子)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혜빈 홍씨(惠嬪洪氏)인데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이요, 왕비 김씨는 증 좌의정(贈左議政) 김시묵(金時默)의 딸이다. 이보다 앞서 왕의 백부(伯父)인 효장 세자(孝章世子)가 좌의정 조문명(趙文命)의 딸을 아내로 맞았으나 일찍 죽고 자식이 없었는데, 급기야 장헌 세자가 죽자 영종이 왕으로 하여금 효장의 계통을 잇도록 명하였기 때문에 왕이 즉위하여 효장을 추존, 진종(眞宗)이라 하고, 비(妃) 조씨를 왕후로 하였으며, 장헌의 사당을 세워 경모궁(景慕宮)이라 했으며, 혜빈(惠嬪)은 혜경궁(惠慶宮)으로 추존하였다.
처음에 장헌 세자 꿈에 용이 잠자리로 들어와서 그 꿈을 깨고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 용 모양을 벽에다 그려두었는데, 임신년 9월 22일 기묘일에 왕이 탄생하였다. 탄생하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마치 큰 쇠북소리 같았으며, 정신기운이 번쩍번쩍하고 두 눈이 깊고 영채가 있어 하늘이 내린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2세 때 벌써 문자(文字)를 알았고, 3세 때는 사부에게서 《소학(小學)》을 배웠는데 날이 갈수록 슬기로워 사부를 번거롭게 하지 않았었다. 8세에 왕세손에 책봉되고, 10세에 학궁에 들어갔는데 《소학》의 제사(題辭)에 명명 혁연(明命赫然)이라는 구절을 짚으면서 그 뜻을 박사(博士)에게 묻기를,
"밝은 명[明命]이 내 몸에 있다는 것은 과연 어느 경지를 가리킨 것이며, 그것이 훤히 빛나게 하려면 무슨 공부를 어떻게 해야만 합니까?"
하니, 박사가 그 대답을 못했고 교문(橋門)에 둘러서서 구경하던 이들은 모두 안색을 바꾸며, 참으로 성인이라고 서로들 축하하였다.
춘저(春邸)에 있으면서는 날마다 빈료(賓僚)들과 어려운 문제를 놓고 서로 토론하였는데, 가령 사단 칠정(四端七情)의 구별이라든지 중화(中和)의 설, 또는 성(性)과 도(道)의 이발(已發)·미발(未發) 등등의 문제들에 대하여 실오라기 하나 털끝 하나도 남기지 않고 세밀히 분석하여 그 모두가 사문(斯文)에 있어 바꿀 수 없는 당연한 논리로 정립되었다. 급기야 큰 길이 눈앞에 점점 보이고 나이와 덕도 점점 높아지면서는 인의(仁義)가 더 정밀하면서도 익숙해지고 교화(敎化)도 성숙되어 그 파급의 범위도 매우 넓었는데, 그것은 어정(御定)의 제서(諸書)들을 보더라도 많은 것이 속에 쌓여 자연 겉으로 나타난 것이었음을 그중 한둘만 보고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예를 들면 왕적(王跡)의 근본을 추적하고 자손들 복록이 끝이 없을 길을 부연 설명하여 우리 자손들이 만세를 두고 지켜야 할 법칙을 물려준 것으로 《국조보감(國朝寶鑑)》이라는 것이 있고, 황조(皇祖)의 교훈을 눈물을 흘리며 받들어 혐의점을 밝혀내고 희미한 점을 분명하게 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한 것으로 《궁원의(宮園儀)》가 있으며, 빛나는 부월(鈇鉞)로 간사한 흉물들을 쓸어 없애 위태로웠던 왕실을 의롭게 바로 세우고 국가 기반을 튼튼히 하여 윤리와 기강을 후세에 수립한 것으로 《명의록(明義錄)》 원편과 속편이 있고, 순(舜) 시대의 오교(五敎)를 표방하여 덕 있는 이를 후대하고 인후한 자를 신임한 것으로 《오륜행실(五倫行實)》이라는 책이 있으며, 인욕[慾]을 막고 천리[理]를 보존하며 왕도[王]를 존중하고 패도[覇]를 물리쳤던 것으로 《추서경선(鄒書敬選)》이 있다. 구름과 용, 바람과 호랑이처럼 기백이 서로 맞고, 두려워 아우성치는 저문 밤에 적군이 나타나도 걱정이 없으리라013) 는 것으로 《군려대성(軍旅大成)》이라는 것이 있으며, 늙은이는 쉬게 하고 농부의 노고를 치하하여 질서가 정연하고 풍류가 있고 인정이 두터우며 모든 아름다움이 집결되게 하는 것으로 《향례합편(鄕禮合編)》이 있고, 옛것을 상고하고 현대를 참작하여 육관(六官)의 서열을 정하고 그리하여 찬란한 일개 왕국의 제도를 만들어서 후세 자손의 표본이 되게 한 것으로 《대전통편(大典通編)》이라는 것이 있다. 많은 데서 요약해 간추려 언제나 보고 참고하기에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공자가 산술(刪述)했던 뜻을 본딴 것으로 《오경백편(五經百篇)》이 있고, 갑을병정(甲乙丙丁)으로 전적의 원본을 찾아 중요한 사실을 캐내고 또 가로 세로 교정을 가한 《경사자집수권(經史子集手圈)》이 있으며, 한만한 부분을 삭제하여 체재를 바로잡고 화이(華夷)의 한계를 엄히 하여 정통성을 부여한 것으로 《송사진전(宋史眞詮)》이 있다.
시(詩)란 사람으로 하여금 읊조리고 감탄하고 정서가 넘쳐흐르게 하는 것이라 하여 쟁글쟁글한 순(舜)의 소악[韶] 9장과도 같은 《아송(雅誦)》을 편집했으며, 범위가 넓고 뜻이 깊은 학문, 집집마다 존경하고 숭배해야 할 학문, 그 말이 곧 가르침이요 그 행동이 바로 법으로서 사문(斯文)의 유일한 정통임을 표방한 것으로 《주문제편(朱文諸編)》이 있고, 성인이 창작하고 현인이 서술한 것으로서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와 구준(丘濬)의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부문별로 엮어 세상을 경륜하는 중요한 규범으로 남긴 것으로 《대학유의(大學類義)》라는 것이 있으며, 충절을 표창하고 절의를 숭상하며 효자·열녀를 기록하고 마성(馬城)의 사당과 용만(龍灣)의 단으로 훌륭함은 명성을 세상에 선양하고 그리하여 우리에게 좋은 소리가 돌아오게 하는 《존주록(尊周錄)》이 있고, 예(禮)를 만들어 일을 절도있게 처리하며 악(樂)을 만들어 뜻을 선양하는 것으로 《춘관통고(春官通考)》라는 것이 있으며, 어려운 것 삼가야 할 것은 오직 옥(獄) 다스리는 일이 그것이기에 오청(五聽)014) 의 자애로움을 넓히고 삼유(三宥)015) 의 혜택을 주기 위한 것으로 《추관심리록(秋官審理錄)》이 있는데 이는 모두 왕께서 만들고 정하신 것들로서 그 위대한 업적과 끝없이 전해질 명성이야말로 풍아(風雅) 다음에다 엮어두고 그 가락을 관현(管絃)에 올려 《시경(詩經)》의 한록(旱麓)·생민(生民) 등의 편과 함께 영원히 전해져야 할 것들이다.
그리고 궁리 격물[窮格]과 존심 양성[存養] 공부에 있어서는 그 정밀도가 주돈이(周敦頤)와 주자(朱子)도 미처 발명하지 못했던 것들이 있으니, 태극(太極)을 논하면서 이르기를,
"태극이 하늘과 땅보다 먼저 존재한다고 해도 먼저 존재한 것이 아니며 뒤에 존재한다고 하여도 뒤에 존재한 것도 아닌 것이다. 정(靜)은 동(動)의 뿌리인 것이며, 유(柔)는 강(剛)의 뿌리인 것이다. 《역(易)》에도 이르기를 ‘일음 일양(一陰一陽) 그것을 도(道)라고 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문을 닫는 것을 곤(坤)이라고 한다.’ 했으며, 또 이르기를 ‘낳고 낳고 하는 것을 역(易)이라고 한다.’ 하기도 하였는데 음을 먼저 양을 뒤에 한 데서 낳고 낳고 한다는 뜻을 볼 수 있다. 상(商)나라의 역에서는 맨 첫머리가 곤괘(坤卦)인 것이 이러한 까닭이 있어서인 것이다."
하였다. 또 심성(心性)을 논하면서는 이르기를,
"심(心)은 대우모[禹謨]에서 처음으로 말을 했고, 성(性)은 탕고(湯誥)에서 처음으로 말했다. 그런데 공자(孔子)는 성(性)은 서로가 비슷하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하늘의 도를 잘 이어가는 것이 선(善)이다.’ 하여 드디어 형이상(形而上) 형이하(形而下)로 나누어 말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송유(宋儒)들이 이른바, 본연지성(本然之性)이니 기질지성(氣質之性)이니 한 것들이 다 공자의 그것을 조술하여 한 말들인데 성인은 가신 지가 오래 되고 그가 남긴 말도 퇴색하여 성을 말하는 자들이 선(善)이라고 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혹자는 악(惡)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자는 선악을 겸했다고 하기도 하여, 오직 중(中)인 그 본연의 정체를 후세 사람들이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맨 먼저 성선(性善)을 말했던 맹자(孟子) 역시 부득이해서 한 말이었는데 그 뒤를 이어 정숙자(程叔子)가 또 그를 밝혀 사람들마다 모두 본연지성이 있다는 것만을 알고 또 본연이면 다 순선(純善)일 것이라는 것만 알게 만들었다. 그러나 한갓 본연지성은 순선이라는 것만 알고 도리어 기질 쪽은 내버리는 자들도 가끔 있으니 만약에 공자가 맹자 뒤에 나왔더라면 공자도 맹자처럼 그 본연지성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세상에 살고 있는 자들은 또 기질 쪽을 말하려 들 것이니 이를 보아 나는 공자·맹자의 교훈도 때에 따라서는 같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겠다."
하였다. 또 격물 치지(格物致知)를 논하면서는 이르기를,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한 까닭은 모든 이치를 다 궁구하지 못해서이다. 그 이치만 궁구하면 그 사물의 궁극을 아는 일은 그 속에 있는 것이다. 치(致)와 격(格)은 서로 혼동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서로 떼어놓아도 또 안 되는 것이다."
하였고, 또 함양 성찰(涵養省察) 공부에 관하여 말하면서는 이르기를,
"함양은 몸에 익도록 지속적으로 해야 하고 성찰은 되도록 빨리 해야 한다. 몸에 익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경계하고 삼가야 한다고 말하고서 또 두려워해야 한다고도 말하여 다시 말하고 거듭 말하였던 것이고, 되도록 빨라야 하기 때문에 한 마디로 요약해내고 사람으로 하여금 체험의 자세로 살피기에 전심하도록 한 것이다."
하였다. 또 기미(幾微)에 대하여 논하면서는 이르기를,
"성(誠)은 하는 것이 없다[無爲]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발동하기 이전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幾)는 선(善)과 악(惡)이 갈라지는 갈림길로서 이른바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발동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했으며, 또 지행(知行)에 대해 논하면서는 이르기를,
"알고 행하고[知行]는 그 어느 하나만을 하고 하나는 안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른바, 참으로 안다[眞知]고 하는 것은 즉 선은 꼭 해야 하고 악은 꼭 하지 않아야 할 것을 알기를, 마치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목마르면 마셔야 하며 물에 빠져서는 안 되고 불을 너무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는 것처럼 아는 것, 그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므로 그렇게 알면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알기를 참으로 아는 것이 물론 중요하지만 아는 데 있어 골라서 아는 것 또한 중요한 것이다."
하였고, 또 근독(謹獨)을 논하면서는 이르기를,
"마음이 천군(天君)이므로 마음을 속이는 것은 바로 하늘을 속이는 일이다. 하늘을 속일 수 있겠는가. 천덕(天德)과 왕도(王道) 그 모두가 요점은 오직 근독(謹獨)에 있는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또 벽사(闢邪)를 논하면서는 이르기를,
"오랑캐는 오직 응징 그뿐인 것이고, 용과 뱀 따위는 몰아내면 그뿐인 것이다. 올바른 학문이 정립되면 사설(邪說)들은 저절로 없어지기 마련인데, 그렇기 때문에 위엄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고, 자신을 새롭게 하는 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했으며, 또 이연평(李延平)이 말한 "고요한 속에서 발동 이전의 상태를 체인해야 한다.[靜中體認未發之旨]"는 데 대해 논하면서는 이르기를,
"체인이라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고, 일단 생각했다면 그것은 이미 발동한 것이다. 사람 마음이 아무것도 없이 맑고 비어있어 고요하고 조금도 치우친 데가 없어야지만 일을 대했을 때 착오가 없는 법인데, 고요한 상태로 있을 때 만약 주경(主敬)을 하지 아니하고 무엇인가 다른 생각을 한다면 일단 발동했을 때 어떻게 절도에 맞을[中節] 것인가? 비유하자면 10월은 음[坤]뿐인 달이다. 양기(陽氣)라고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찬 서리와 눈이 쌓이며 초목들도 모두 시들고 잎이 지는데, 양기가 비록 맨 밑에서 자라고는 있지만 아직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봄이 오면 모든 것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 힘과 공로는 오로지 자취를 감추고 응고 상태에 있던 양기가 원동력이 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주자(周子)가 정(靜)을 말하고 정자(程子)는 경(敬)을 말했던 것이 모두 그러한 맥락에서 한 말이었던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또 성(誠)과 인(仁)의 글자 뜻을 논하면서는 이르기를,
"인(仁)은 마음의 덕이고, 성(誠)은 행위의 실제이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는 천지(天地)의 이치를 모두 갖추고 태어나기 때문에 창자 속 가득히 전부가 생의(生意) 뿐인 것이다. 그 생의가 일단 발동하면 갓난애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발동하는 것에서부터 백성을 사랑하고 만물을 사랑하고 그리하여 온 누리를 덮어주고 감싸주고 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가 그것을 발원으로 하여 적재적소로 적용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그 무슨 사의(私意)나 이욕(利慾)이 그 사이에 끼어들겠는가. 사의·이욕이 끼어드는 것이 없으면 순수한 한 덩어리일 것이고 한 덩어리이면 그게 바로 성(誠)인 것이니 그렇다면 인과 성이 어찌 둘일 수가 있겠는가."
하였고, 또 정치하는 법을 논하면서는 이르기를,
"임금된 자라면 다만 삼대(三代) 시절같이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동물 식물 할 것 없이 비·바람·서리·이슬을 맞고 사는 것들이면 그 모두가 저들이 좋아하는 위치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해주고, 그리하여 아름다운 미래를 상징하는, 가령 기린·봉·거북·용과 같이 복을 불러오는 여러 사물들을 내가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지만 비로소 천지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을 번창하게 한 큰 공로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했으며, 또 문장(文章)을 논하면서는 이르기를,
"문장에도 도(道)와 술(術)이 있어 도는 바르지 않으면 안 되고, 술은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 반드시 이(理)를 주안으로 하고, 기(氣)를 보조로 하여 가만히 당기기도 하고 널리 늘이기도 하는 신묘한 기틀이 정로(正路)에서 한 발짝도 이탈함이 없어야지만 비로소 중언부언 말자랑이나 하는 꼴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광대하기가 은하수와 같은 문장도 그것이 후세에 남길 거리가 못 되는 것은 이치가 올바르지 못해서이며, 그림 그리듯이 아로 새기듯이 한 화려한 저작도 그것이 명가(名家) 축에 못 드는 것은 기운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구나 치교(治敎)가 잘 되고 못 되는 데 영향을 주고, 세도(世道)가 그를 따라 오르내릴 수도 있는 문장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내가 주서(朱書)를 온 세상이 배워야 할 목표로 삼는 것은 그의 도(道)를 존중해서일 뿐만이 아니라 문장으로서도 역시 참된 이치와 기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이상이 바로 왕께서 세우신 덕으로써 학문을 어떠한 순서로 했는가를 볼 수 있고, 따라서 뚫으려고 하면 더욱 굳기만 하고 보면 볼수록 높아만 보이는 경지와, 종묘·백관을 다 갖추고 금성 옥진(金聲玉振)의 아름다움이 구비된 것과 같은 문장, 그리고 세상의 모든 정수를 한몸에 다 모아 앞으로 만세를 위해서 태평의 길을 열어주신 것을 볼 수 있는데, 그야말로 천덕(天德)을 통달한 이가 아니고서야 누가 이 경지에 이를 것인가.
왕은 아침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의관을 정제하고 북을 향해 북극성을 우러러보고 아무리 더울 때라도 일단 누우면 문을 닫고서 감히 하늘을 대면하지 않기를 40년을 하루같이 하였으니 《시경》에 이른바 "조심조심 조심스런 마음으로 하느님을 잘 섬긴다." 한 그 사실을 왕은 실천했던 것이다. 영종(英宗)을 지극한 효성으로 섬겨 10년을 두고 시질(侍疾)하였지만 일찍이 띠를 풀러본 일이 없었고, 급기야 상을 당하자 그 슬픔은 신하들을 감동시켰으며, 환왕(桓王)을 원묘(原廟)에다 올려모시고 장헌의 사당을 세웠으며 자전(慈殿)016) 과 자궁(慈宮)017) 을 받들면서 화기에 찬 얼굴빛으로 봉양의 도리를 다하고 옥첩(玉牒)에다 금니(金泥)로 그 덕행을 밝혀놓았으니 《시경》에 이른바 "효도하는 이 있고 덕 있는 이 있어 앞에서 인도하고 좌우에서 보필한다." 한 말대로 왕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이 대리 청정을 할 때 척당(戚黨)들이 왕의 영특하고 명철한 것을 꺼려한 나머지 안팎에서 위기를 조성하여 마치 철류(綴旒)018) 처럼 된 상황이었으나 왕은 그때그때 조용하게 대처하면서 그 모든 옳지 못한 무리들을 다 적당하게 처리하였고, 급기야 재신(宰臣) 서명선(徐命善)의 상소문이 올라오자 영종(英宗)께서 대책(大策)을 확정하여 결국 왕에게 기무(機務)를 맡겼는데, 이때 왕은 맨 먼저 자기 개인의 슬픔을 아뢰면서 눈물로 청하였다. 그리하여 그 효성에 감격한 영종이 상서(尙書)의 기록에서 차마 못할 말들은 삭제하도록 하였으며, 즉위하던 날에는 명령을 반포하고 더욱 불이본(不貳本)019) 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잘못이 있으면 서로 바로잡아가며 선왕의 도를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그리고 법도를 따르지 않고 앞장서서 흉론(凶論)을 퍼뜨린 완악한 자는 영고(寧考)의 영령께 고한 후 법에 따라 처벌하였으니 《시경》에 이른바 "네 죄인에게 벌을 내리자 온 세상이 다 심복했다." 한 것과 옛 기록에 이른바 "성인(聖人)은 변란을 당해도 그를 처리하는 데 있어 정당한 도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한 말대로 왕은 실천했던 것이다.
제사에는 조심과 정성을 다해 정숙 화락하고 재계하고 명결히 하여 친히 모시지 않는 제사라도 지킬 의식은 다 지키어 사소한 예라도 함부로 다루지 않으면서 정신을 집중하고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앉아서 아침까지 기다렸으며, 능(陵)이나 원(園)에 일이 있을 때면 곧 분지(粉)를 내오게 하여 맛을 보고, 영전(影殿) 배알을 할 때면 새벽종이 나기 전에 길을 챙기면서 안개가 끼나 바람이 부나 눈이 내리거나 한 번도 빠뜨린 적이 없었다. 그리고 매월 비궁(閟宮)을 가 뵈오면서는 죽도록 사모하는 마음과 함께 그 속에는 말못할 슬픔이 있었고 휘신(諱辰)이 돌아오면 반드시 열흘 가량을 재거(齋居)하면서 처음 초상 때와 같이 하였다. 《시경》에 이른바 "봄 가을로 게을리 않고 제사 모시는 데 틀리는 점이 없다." 한 말을 왕은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3천 가지의 예를 그 절문(節文)을 다 밝혀 영고 장례를 모실 때는 아침에 조전(祖奠)하는 것이 잘못임을 바로잡았으며, 왕위를 이을 때는 면류관을 벗는 것이 정도가 아님을 개탄하였다. 명유(名儒)를 공자 사당 곁채에다 모시게 하고, 대로(大老)를 선조의 묘정에다 배향했다. 예경(禮經)에 이른바 "예(禮)란 실천하는 것이고 의(義)란 옳은 것이다." 한 말을 왕은 그대로 했던 것이다.
서제(庶弟)로 이인(李䄄)과 이진(李禛)과 이찬(李禶)이 있었다. 인은 역모에 가담되어 법으로 볼 때 꼭 죽음을 당해야 하고 귀신도 사람도 용서할 수 없는 입장이었지만 왕은 그래도 차마 사형을 가하지 못하고 그를 가족과 함께 강화(江華)로 보내 거기에서 살게 하면서 내부(內府)에 명하여 의복·음식 등을 풍족하게 대주게 하고, 안부를 묻는 사행을 길이 파이도록 보냈으며, 연말 연초면 불러들여 만나보곤 하였다. 그에 대해 정신(廷臣)들이 강력하게 간하면 왕은 "내가 잘못이다. 내가 잘못이다." 하면서도 끝까지 정신들 주장을 듣지 않았으며, 진은 영종 때 탐라(耽羅)로 귀양가 거기에서 죽었는데 왕은 그를 슬픈 마음으로 추념하면서 좋은 시호를 내리고 그의 사당에 직접 가 제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찬은 흉한 무리들의 추대를 받았다가 죽었는데 왕은 그를 두고 늘 한탄하기를,
"찬이 죽은 것은 홍국영(洪國榮) 때문이었으니 국영이 폐기를 당한 것은 그 보복을 받은 것이다. 내가 후일 후궁 중에서 아들을 낳는 자가 있으면 꼭 찬을 위해 양자를 세워주리라."
하였다. 또 영종(英宗)의 딸로서 정치달(鄭致達)의 처가 된 자가 있었는데 그가 제 자식 후겸(厚謙)과 역적 홍인한(洪麟漢)을 끼고 왕이 대리 청정 때 종묘 사직을 위태롭게 할 모의를 하다가 다행히 왕대비의 성스러운 덕과 더할 나위 없는 공로에 힘입어 낌새를 미리 알고 싹부터 꺾어버렸기 때문에 그들의 흉모가 부려지지 못한 채 정토(廷討)가 행해졌었다. 그런데 왕은 그가 영종이 퍽 사랑하던 딸이라 하여 잠시 경기도 내의 섬으로 귀양보냈다가 섬에서 뭍으로 뭍에서 다시 서울로, 심지어는 대내(大內)로 불러들여 만나보기까지 하였으므로 정신들이 역시 다투었지만 그도 되지 않았었다. 전(傳)에 이른바 "노여움을 감추어두지도 않고 원망을 잠재우지도 않았다." 한 그대로 왕은 실천한 것이다.
되도록 검소하게 먼 장래를 생각하면서 그릇도 조각한 것을 쓰지 않고 옷은 세탁한 것을 입으며 무명베 요에 부들자리도 아주 평안하게 여겼다. 계시던 집도 겨우 몇 칸짜리에다 단청도 하지 않은 채 창문이나 벽에는 매연이 시꺼멓게 붙어 있어 유사가 수리할 것을 청하면 왕은 말하기를,
"내가 어찌 비용을 아끼려고 그러는 것이겠는가. 내 성품이 이것이 좋아서다."
하였는데, 경(經)에 이른바 "나라에 대하여는 부지런하고 집에 있어서는 검소했다." 한 것을 왕은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성품이 활달하여 어느 사람이건 오직 성심으로 대했기에 호월(胡越)도 한집안이었고 뜰 앞이 바로 사방팔방이었으며, 한가한 틈이거나 조회 때이거나 겉과 속이 따로 없고 속이 시원시원하여 사람을 대해 말못할 것이라고는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만천 명월 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고 자호하면서 그것을 대서 특필하여 전각(殿閣)에다 걸어두기도 했는데, 경(經)에 이른바 "왕의 가는 길이 확 열려 있어 편당도 없고 치우침도 없다." 한 그 모습이 왕에게 있었던 것이다.
하늘이 덮고 있는 모두와 땅이 싣고 있는 모든 것을 총망라하여 전부 자신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성력(星曆)에서부터 병가(兵家)·농가(農家) 등 구류(九流)·백가(百家) 할 것 없이 그 모든 분야를 찾고 캐고 하여 실지 응용에다 이용하고, 그리고 그 마음을 또 남에게까지 미루어 나이 젊은 문학(文學)의 신하들을 추려뽑아 고과(考課)·강제(講製) 등으로 날마다 달마다 갈고 닦게 하여 마치 뭇 짐승들이 함께 바다를 마시면 각기 제 양이 차서 말지 바다는 한도 끝도 없는 것과 같은 형상이었으니 이는 《시경》에 이른바 "그러므로 성인(成人)은 덕이 있고 소자(小子)들은 조예가 있게 되었다." 한 그것을 왕은 실천했던 것이다.
현자를 발탁하고 외척(外戚)은 되도록 억제했으며, 환관(宦官)과 궁첩(宮妾)을 멀리하고 어진 사대부(士大夫)를 자주 대하였다. 규장(奎章)이라는 관서를 두어 늘 여러 학사(學士)들을 인견하고 경사(經史)를 강론했으며, 심지어 병이 위중했을 때도 측근의 시신들은 오히려 가까이 못했어도 보필하는 신하들은 늘 좌우에 있으며 시중을 들었었다. 언젠가 누가, 사류(士類)가 나라를 해치는 자들이라고 말한 자가 있었는데, 왕이 이르기를,
"사류(士類)를 나라를 해치는 자들이라고 여겨서야 나라가 잘 되겠는가. 내가 함께하고 있는 자들은 사류이다."
하고서는 그 사람을 물리치고 쓰지 않았는데 《시경》에 이른바 "제제 다사(濟濟多士)들로 하여 문왕(文王)은 마음이 편하였다." 한 그것이 왕에게도 적용되었었다. 언젠가 여러 신하들과 부용정(芙蓉亭)에서 술자리를 가졌었는데, 자리가 다 마련되고 거문고 등도 다 차려놓았을 때 그 들보 위에 둥지를 틀었던 제비가 새끼에게 무엇을 먹이려고 빙빙돌면서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를 가엾게 여겨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으며, 그후로는 그 정자에 나올 때면 그 제비둥지에 대해 물었던 것이다. 그리고 항상 이르기를,
"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 때문에 사람을 해치고 싶지는 않다."
하고는 꿩과 생선 공물을 견감하고 노루와 멧돼지 사냥도 하지 않았다. 경(經)에 이른바 "사람이 그 물건을 다른 물건으로 바꿔서가 아니라 그 물건이 덕이 함유된 물건이기 때문이다." 한 말대로 왕도 실천하였던 것이다.
오직 백성들 생각에 밤이나 낮이나 쉴새없이 아무리 작은 일도 살피지 않은 것이 없고 일단 폐단이 있으면 모두 손을 대서 위에서 털어다가 아래에다 보태주고 어루만져주고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스며든 이택(利澤)이 짙고 진하게 젖어들어 오래가면 갈수록 효과가 나타났는데 그러고서도 백성들 보기를 마치 부상이라도 당한 자를 보듯 하여 그중 한 사람이라도 자기 성취하고 싶은 바를 다 못할까 염려했다. 그리하여 약물을 나눠주어 병을 구제하고, 곳집을 덜어내어 매장을 돕기도 했으며, 내탕(內帑)을 이용하여 흉년 대비의 물건을 별도로 저장해 두기도 하고, 장영(壯營)을 설치하여 균역(均役)의 법을 혁파해 보려고도 하였다. 그리고 서얼(庶孽)이라도 적임자면 추려 쓰는 일, 노비(奴婢) 신분을 대를 물리지 않는 일, 조적(糶糴) 제도를 개혁하는 일 등을 차근차근 추진하고 시행하려고 하였으나 미처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나타난 효과만 가지고도 시중에서 장사하는 백성들은 토색질이 없어졌다고 말하였고, 들에서 농사짓는 백성들은 쌓여 있던 문서가 청산되었다고 했으며, 조세를 납부하는 백성들은 정량 외에 더 내는 제도가 없어졌다고 했고, 법이 공정함을 좋아하는 백성들은 억울한 누명을 씻었다고 했으며, 도비(都鄙)의 백성들은 농경지가 더 넓어졌다고 했고, 창고 관리하는 백성들은 출납이 정당하다고 했으며, 의관을 갖춘 백성들은 인재를 육성하고 등용하는 제도가 문왕(文王) 시대에는 어떠했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이에 하늘과 땅과 사람이 조화를 이루고 사방 팔방이 다 화답했으며, 상서가 내리고 풍년이 들고 하여 따스하기 봄날 같았고, 촉촉이 비가 내린 듯했으며 마음이 편안하기 마치 빛나는 하늘 이글대는 태양 아래 있는 것과 같았었다. 왕이 승하하시던 날 왕궁과 서울로부터 시작하여 저 멀리 국경 지대와 심산 유곡의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무릇 발로 걷고 입으로 숨쉬는 무리라면 모두가 날뛰고 울부짖으면서 더 살고 싶지 않은 듯이 하였는데, 이야말로 《시경》에 이른바 "모든 백성들이 두루 그대를 덕스럽게 여기네." 한 그 덕을 왕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은 왕이 세운 공로가 이 나라 전역에 나타나 있어 백성들이 무어라 이름할 수 없을 만큼 높고도 넓은 그것인 것이다.
그밖에도 천만 가지 일을 응수해 처리함에 있어서 그 모두를 의리(義理)에 맞게 절충하고 속에 가득찬 소양을 발휘하여 강건(剛健)하고 순수하게 인욕(人欲)의 사사로움이란 조금도 용납됨이 없이 오직 천리(天理)의 공정함 그대로 하였으며, 경전(經傳)의 뜻을 연구함에 있어서는 우선 그 강령을 들어 대의를 통찰하였으나 어떠한 문제를 변별하는 데 있어서는 한치 한눈이라도 소홀함이 없이 세밀히 헤아렸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명령을 반포하거나 경연에서의 유시까지도 모두가 전모(典謨)에 맞았으며 시속을 바로잡고 선을 드러내고 악을 응징하려는 뜻이 백성들을 가엽게 마음 아프게 여기는 쪽으로 나타나 그 마지막 명령까지도 그 정성이 금석(金石)을 뚫고 지극히 아둔한 사람까지 감복시키기에 족했으니 그를 어찌 언어나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언젠가 이르시기를,
"내가 원하는 것은 공자(孔子)를 배우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공자를 배우려면 주자(朱子)부터 배워야 한다."
하고는, 주자가 강목(綱目)을 썼던 것처럼 《춘추(春秋)》의 좌씨전(左氏傳)을 편정하고 어원(御苑) 속에다 집을 지어 주자의 유상(遺像)을 안치해두고 《대전(大全)》·《어류(語類)》 그리고 주자가 쓴 각종 서적의 전주(箋注)들을 책으로 엮어 그 속에다 쌓아두려 했다가 미처 못하였다. 평상시 언제나 남면(南面)의 자리에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왕위를 신짝을 벗어 던지듯이 버리고 싶어하는 개연한 생각을 가졌었으며 조정에서 누차에 걸쳐 휘칭(徽稱)을 올릴 것을 청했으나 그것도 끝내 허락지 않았다. 그리고 수원성 수축의 역사를 일으킨 것은 남모르는 은미한 뜻이 있어서였기 때문에 그곳의 당(堂)은 이름하여 노래(老來)라고 하고 정자는 미로한(未老閑)이라고 이름했던 것인데 하늘이 결국 몇 해 좀더 계시도록 수한을 주지 않아 천고 제왕(帝王)들이 일찍이 하지 못했던 훌륭한 업적이 당세에 실현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었던 것이다.
아, 큰 규모를 가지고 그렇게 화신이 되어버린 것을 성(聖)이라고 하고, 성이면서 도무지 알 수 없는 경지에 이른 것을 신(神)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성인이면 하늘과 대등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하늘의 명(命)은 너무 심원하고 잠시도 쉴 틈이 없다고 했는데, 이는 바로 하늘이 하늘된 까닭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능호(陵號)를 건(健)으로 했는데 이는 쉬지 않고 가고 있는 하늘의 도를 상징한 것이니 그 얼마나 걸맞는 이름인가. 복희·신농에서부터 문왕·무왕까지는 그 빛나는 공훈이 그들이 한 일에 나타나 있고, 공자·맹자로부터 정자·주자까지는 빛나는 공훈이 그들이 한 말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을 그대로 본받아 그 여택이 만세를 이롭게 하는 데는 말과 일이 원래 같은 것으로서 서로 입장을 바꾸면 다 그렇게 되는 것이다.
왕은 성인이었다. 사도(斯道)의 정체를 밝혀내고 사도가 지향할 바를 주장하였다. 왕이 한 일은 복희·신농·문왕·무왕이 했던 일이며, 왕이 한 말은 공자·맹자·정자·주자가 한 말이었다. 앞으로 천세 후에 옛것을 논하는 자가 있다면 아마 이를 《시경》의 청묘(淸廟) 악장에다 실어 연주하여 역시 한 사람이 창을 하면 세 사람이 감탄을 하리라. 여기에는 특히 남들의 귀와 눈에 배어있는 천덕(天德)·왕도(王道)만을 추려뽑아 굉장한 유자이고 현철한 임금이었던 그의 법도를 이 정도로 소개했을 뿐이다. 【이조 참판 윤행임(尹行恁)이 제술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5책 1권 5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290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역사(歷史) / 어문학(語文學)
- [註 013]두려워 아우성치는 저문 밤에 적군이 나타나도 걱정이 없으리라 : 준비가 있으면 불의의 변란이 있어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뜻이다. 《주역(周易)》 쾌쾌(夬卦)에 "구이(九二)는, 두려워 아우성을 치고 어두운 밤에 융병이 있더라도 걱정이 없으리라.[惕號 暮夜有戎 無恤]" 하였음.
- [註 014]
오청(五聽) : 죄인을 심리하는 법으로 사청(辭聽)·색청(色聽)·기청(氣聽)·이청(耳聽)·목청(目聽)의 다섯 가지가 있음. 《주례(周禮)》 추관(秋官) 소사구(小司寇).- [註 015]
삼유(三宥) : 죄인을 용서하는 제도로 모르고 지은 죄가 일유, 과실(過失)인 경우가 이유, 잊어버리고 한 짓이 삼유에 해당함. 《주례(周禮)》 추관(秋官) 사자(司刺).- [註 016]
자전(慈殿) : 영종의 계비 정순 왕후(貞純王后).- [註 017]
자궁(慈宮) : 정조의 생모 혜경궁(惠慶宮).- [註 018]
철류(綴旒) : 임금이 신하들 세력에 의하여 좌우되는 상태를 말함. 《논형(論衡)》 변동(變動).- [註 019]
불이본(不貳本) : 왕위(王位)를 계승한 자는 비록 사친(私親)이 있을지라도 그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왕통(王統)만을 이어받는 것. 정조(正祖)는 사도 세자(思悼世子)가 자기 사친이지만 중간에 폐위되었기 때문에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음을 말함.○誌文。 我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 在宥十有三年己酉, 遷顯隆園于水原府之花山, 揭御眞于園之齎殿, 以寓晨昏之義, 大城厥邑, 以拱衛象設。 歲一謁, 輒涕泣不能起。 及庚申春正月, 旣拜園, 遂御東麓, 喟然歎曰: "美哉! 斯邱。 守臣汝其伐石以識之。" 粤六月十一日壬戌, 有疾不豫, 二十八日己卯, 禮陟于昌慶宮之正寢。 將以十有一月六日甲申, 因東麓面南而大葬聖人焉。 嗚呼! 豈非天哉? 今殿下, 以臣行恁, 最被殊遇侍軒墀日久, 命臣以玄宮之志。 臣頑然不能下從, 忍執斯役? 而學術譾薄, 不足以知聖人, 則天地之大, 日月之光, 其敢曰摹畫萬一云乎哉? 嗚呼! 道之大原, 出於天, 而天生聖人, 爲之君爲之師, 以弘道於天下。 伏羲、黃帝、堯、舜、禹、湯、文、武是也, 惟孔夫子不得其位, 而刪詩、書作《春秋》, 行素王之事。 夫子歿百有餘年, 孟氏出而明天理淑人心, 以接夫子之統, 自秦、漢以來, 異端橫流, 正學遂泯。 及宋 程、朱相繼而興, 講明先王之道, 繼往聖開來學, 其功不在孟氏下。 程、朱旣遠, 邪說又作, 衆口爭豗, 靡所準式, 天開奎運, 吾道遂東。 我先王正位凝命, 以君兼師, 德尊而行備, 學崇而業廣。 主敬以立其本, 窮理以致其知。 知有以窮性命之奧, 而達造化之原, 仁有以同萬物之體, 而普天下之公, 勇有以克有我之私, 而成悠久之業。 嚴恭寅畏, 不敢荒寧, 厖恩厚澤, 延及群生, 喣嫗覆育, 熙熙穰穰, 庶幾乎三古之氣像焉。 葢天以我祖宗積德累仁, 克昌其後, 爲之含弘亭毓, 篤生聖人, 啓東方一治之運, 而遺風餘庥, 將萬億年是賴, 於乎! 盛哉? 遂拜手稽首, 抆血而書之石。 曰王姓李氏, 諱祘字亨運, 英宗 顯孝大王之孫, 思悼莊獻世子之子。 母惠嬪洪氏, 領議政鳳漢之女, 妃金氏, 贈左議政時默女。 先是, 王伯父孝章世子, 聘左議政趙文命女, 早薨無子, 及莊獻薨, 英宗命以王承孝章統, 王卽阼, 尊孝章爲眞宗, 妃趙氏爲后, 立莊獻廟曰景慕宮, 尊惠嬪曰惠慶宮。 始莊獻世子夢見神龍入寢, 覺而異之, 畫其狀於壁, 王乃以壬申九月二十二日己卯誕降。 喤喤之聲, 若巨鍾然, 神彩燁如日月, 穆穆有天人之表。 二歲知文字, 三歲就傅受《小學》書, 睿智日長, 不煩師承。 八歲冊爲王世孫, 十歲齒于學, 拈《小學》題辭明命赫然之義, 問于博士曰: "明命在吾身, 果指何境, 欲求赫然, 當下何工?" 博士不能對, 圜橋門觀者, 無不動色相賀曰, 眞聖人也。 其在春邸, 日與賓僚相問難, 如四七之辨, 中和之說, 性道之已發未發, 縷析毫分, 皆可爲斯文定論。 及夫大猷時升, 年德俱進, 仁精而義熟, 敎成而化敷, 則觀乎御定諸書, 而積中彰外之文, 尙可得其一二焉。 推王跡之所興, 演景籙之無疆, 以貽我子孫萬世之柯則, 曰《國朝寶鑑》也, 皇祖有訓, 涕泣以受, 別嫌明微, 得盡我所得爲, 曰《宮園儀》也, 煌煌鈇鉞, 掃除奸兇, 義闡乎金縢, 象列乎夏鼎, 樹倫綱於千秋, 曰《明義》原續之編也, 虞廷五敎, 惇德允元, 曰《五倫行實》之書也, 遏慾存理, 尊王黜覇, 曰《鄒書敬選》也。 雲龍風虎, 蔚焉合章, 惕號暮夜, 有戎勿恤, 曰《軍旅大成》也, 休老勞農, 秩然有序, 風流篤厚, 百嘉鬯遂, 曰《鄕禮合編》也, 稽古酌今, 序列六官, 燦然爲一王之制, 以昭來許, 曰《大典通編》也。 由博反約, 常目存玆, 追刪述之遺旨, 曰五經百篇也, 甲乙丙丁, 元元本本, 搴英摭實, 縱橫丹鉛, 曰《經史子集手圈》也, 刪繁蕪正, 體裁嚴華夷寓袞鉞, 曰《宋史眞詮》也。 詩道敎人, 詠歎淫液, 鏗然如舜韶之九成, 曰《雅誦》也, 地負而海涵, 家戶而戶祝, 言有敎動有法, 揭斯文之一統, 曰《朱文諸編》也, 聖作而賢述, 眞衍而丘補, 纂次部分, 垂經世之要範, 曰《大學類義》也, 顯忠崇節, 載棹載楔, 馬城之祠, 龍灣之壇, 義問宣昭懷我好音, 曰《尊周錄》也, 制禮以節事, 修樂以道志, 曰《春官通考》也, 其難其愼, 曰維庶獄, 廣五聽之慈, 布三宥之澤, 曰《秋官審理錄》也。 此王之立言而鴻號鉅跡, 聲流無窮, 可以撰次風雅, 被諸管絃, 與旱麓生民之詩, 同其傳也。 其窮格之精, 存養之密, 又有濂、閩諸賢之所未發者, 論太極則曰: "太極在天地之先, 而不爲先, 在天地之後, 而不爲後。 靜爲動之根, 柔爲剛之本。 《易》曰: ‘一陰一陽之謂道。’ 又曰: ‘闔戶謂之坤。’ 又曰: ‘生生之謂易。’ 先陰後陽, 生生之義見矣。 商易首坤, 蓋有以也。" 論心性則曰: "言心自《禹謨》始, 言性自《湯誥》始。 而孔子曰性相近也, 又曰: ‘繼之者善。’ 遂分形而上下而言。 宋儒所謂本然之性也, 氣質之性也, 蓋祖於此, 聖遠言湮, 言性者不惟不言善, 或曰惡, 或曰善惡, 而本然大中之體, 無以闡發於後世。 則首言性善孟子, 蓋亦不得已也, 程叔子又繼而明之, 俾人人者, 知有本然之性, 而本然則皆純善也。 然而徒知本然之爲純善, 而反遺乎氣質者, 往往有之, 如孔子後於孟子, 不可不言本然如孟子。 而在今之世者, 又將言氣質, 予以是知孔、孟之訓, 隨時而不同焉。" 論格物致知則曰: "知之未至, 由於理之未窮。 窮此理也, 物格在其中。 曰致曰格, 雖不可以相混, 亦不可以相離也。" 論涵養省察之工則曰: "涵養要熟, 省察要疾。 要熟也故旣曰戒愼, 又曰恐懼, 不憚其重言而複言, 要疾也故, 一言以蔽之, 使人專心乎體察。" 論幾微則曰: "誠無爲, 何也? 未發也。 幾善惡之所由分, 而所謂動之微也。 旣曰動之微, 則豈非已發耶?" 論知行則曰: "知行不可偏廢。 而所謂眞知者, 知善之可爲也, 惡之不可爲也, 如飢食渴飮, 水不可蹈, 火不可狎, 是謂眞知, 知則可以行耳。 知固貴眞, 而其求知也亦宜擇術焉。" 論謹獨則曰: "心爲天君。 欺心卽欺天也。 天可欺乎? 天德王道, 其要祗在謹獨。" 論闢邪則曰: "戎狄膺而已矣, 龍蛇驅而已矣。 正學明邪說自熄, 此所以蕫之以威, 開自新之路也。" 論李延平 ‘靜中體認未發之旨,’ 則曰: "體認則思也, 思則已發。 夫人之心, 湛然虛靜, 無偏倚而後, 應事不差, 靜時若不主敬, 發使能中節? 譬如十月純坤, 陽氣斂藏, 霜雪凝冱, 草木凋落, 陽雖生於下, 而隱而未露。 春來發生之功, 專資於斂藏凝固。 周子之言靜, 程子之說敬, 皆此理也。" 論誠仁之訓則曰: "仁爲心之德, 誠爲行之實。 夫人之生也, 具天地之理, 故滿腔皆生意也。 生意旣發, 自赤子入井, 以至於仁民愛物, 覆冒四海, 而罔不自此焉推之, 曷嘗有私意利欲, 間乎其間哉? 無私意利欲以間之則一矣, 一則誠也, 仁與誠, 豈有二也?" 論爲治之法則曰: "君人者, 但恥不及乎三代, 使動植之物, 風雨霜露之所霑被者, 皆得其所, 而休徵嘉瑞, 如麟鳳龜龍諸福之物, 爲我能事, 如此然後, 始可謂位育之極功也。" 論文章則曰: "文章有道術, 道不可不正, 術不可不愼。 必主之以理, 而輔之以氣, 使潛彀曠引之神機, 不敢離正路一步, 可免於哆言夸辭之歸矣。 夫汪洋河漢之談, 不足以垂後者, 詘於理也, 藻繪雕篆之作, 不足以名家者, 薄于氣也。 況治敎爲之汙隆, 而世道隨以升降者乎? 予以朱書爲一世之學的者, 不惟尊其道, 亦爲其文章理氣之眞也。" 此王之立德, 而可以見爲學用工之次序, 鑽彌堅仰彌高, 宗廟百官之盛, 金聲玉振之美, 集衆之粹, 會聖之精, 爲萬世開太平, 苟非達天德者, 孰能與此? 王, 每朝起整衣, 北面瞻仰辰極, 雖盛暑, 臥則閉戶不敢對天, 四十年如一日, 《詩》所云: ‘小心翼翼, 昭事上帝。’ 王實有焉。 事英宗至孝, 十年侍疾, 未嘗解帶, 及宅宗, 哀動臣隣, 躋桓王於原廟, 樹莊寢之配墠, 奉慈殿、慈宮, 婉容愉色, 致其養, 玉牒金泥, 揚其徽, 《詩》所云: ‘有孝有德, 以引以翼。’ 王實有焉。 王之代理也, 戚黨憚王英明, 內外危逼, 勢如綴旒, 王, 從容應變, 處群不逞, 曲當其宜, 及宰臣徐命善之疏出, 英宗誕定大策, 卒畀王機務, 則王首陳私痛, 泣而請。 寧考感其孝, 就尙書記注, 刊其不忍者, 踐位之日, 渙發絲綸, 致嚴乎不貳本之義, 胥匡以遵先王之道。 而有頑不率, 皷倡凶論, 則告于寧考之靈, 誅竄如法, 《書》所云: ‘四罪, 而天下咸服。’ 志所云: ‘聖人處變, 而不失其正。’ 王實有焉。 所愼在祀, 肅雝齊明, 攝儀無間乎親祼, 疏節克謹乎縟文, 凝神致虔, 坐而待朝, 陵園有事, 輒進粉以嘗之, 拜影殿戒蹕, 先於曉鐘, 霧露風雪, 未始或闕。 月覲閟宮, 優然有終身慕, 而至痛在心, 每諱辰, 必浹旬齋居, 若喪之初。 《詩》所云: ‘春秋匪懈, 享祀不忒。’ 王實有焉。 優優三千, 克昭節文, 葬寧考則正朝祖之失禮, 嗣寶位則慨釋冕之非經。 名儒享夫子之廡, 大老配先祖之庭。 經所云: ‘禮者履也, 義者宜也。’ 王實有焉。 有庶弟䄄、禛、禶。 而䄄坐逆當誅, 神人所不容, 猶不忍加辟, 幷家室移置江華, 命內府衣服飮食之極其豐足, 問訊織於路, 歲輒召見。 廷臣爭之力, 王曰: ‘吾過矣。 吾過矣。’ 終不聽, 禛於英宗時, 謫死耽羅, 王追念衋然, 錫美謚, 臨其廟親奠之。 禶爲凶徒所推戴而死, 王每歎曰: "禶之死, 由於洪國榮, 國榮之廢, 所以報也。 予於異日, 有媵御擧丈夫子, 必爲禶立後。" 英宗女有爲鄭致達妻者, 挾其子厚謙與逆臣洪麟漢, 當王代理時, 謀危宗社, 而賴王大妃聖德神功, 炳幾折萌, 凶謀不得售, 而廷討遂行。 王, 以其爲英宗所鍾愛, 暫流畿島, 自島而陸而京, 至引入大內見之, 廷臣亦爭不得。 傳所云: ‘不藏怒焉, 不宿怨焉。’ 王實有焉。 愼乃儉德, 維懷永圖, 器無彤鏤, 衣有澣濯, 綿褥蒲茵, 處之裕如也。 所御之堂, 僅數架, 不施丹艧, 牕壁烟煤如塗, 有司請葺理, 則王曰: "予豈惜其費乎? 顧素性安此耳。" 經所云: ‘克勤于邦, 克儉于家。’ 王實有焉。 性豁達, 待人一以誠, 胡越一家, 庭衢八荒, 蜎涓之暇, 會朝之時, 表裏無間洞然無不可, 對人言者。 嘗自號以萬川明月主人翁, 大書特書, 昭揭殿閣, 經所云: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實有焉。 際天之所覆, 極地之所載, 摠以攬之爲己分之所有, 而星曆兵農九流百家, 罔不包羅搜剔, 措諸實用, 又推以及人, 妙選年富文學之臣, 考課講製, 日月琢磨, 有如群飮于河, 各盡其量, 而不見其涯涘, 《詩》所云: ‘肆成人有德, 小子有造。’ 王實有焉。 右賢而左戚, 屛宦官宮妾而接賢士大夫。 置奎章之署, 常引諸學士, 講論經史, 及至大漸, 暬御猶不敢近, 而承弼諸臣, 左右擧扶。 嘗有人言, 士類國之戕斧者, 王曰: "謂士類戕斧, 而國其乂乎? 予所共者, 士類也。" 斥其人不用, 《詩》所云: ‘濟濟多士, 文王以寧。’ 王實有焉。 與諸臣, 觴于芙蓉之亭, 筵几旣肆, 琴瑟旣張, 有燕巢樑將哺子, 飛繞不入, 王憐之遂起, 後御是亭, 輒問燕巢。 常曰: "吾不欲以養人者害人。" 遂蠲雉鮮之貢, 侵鹿豕之獵。 經所云: ‘人不易物, 惟德其物。’ 王實有焉。 一念黎元, 蚤夜孜孜, 靡隱不察, 靡弊不擧, 損上益下, 撫之綏之。 利澤之滲漉人者, 浸灌醲郁, 久而愈著, 而猶且視之 如傷, 恐一物之不獲自盡。 頒珍劑以救病, 傾廩財以掩骼, 因內帑而別儲備荒之需, 設壯營而擬罷均役之法。 以至庶孽之甄拔也, 奴婢之勿世也, 糶糴之更張也, 蓋欲次第施措而未遑。 然其已然之効, 則市廛之民曰橫索絶矣, 在野之民曰積案淸矣, 輸將之民曰羡耗除矣, 嘉肺之民曰幽冤洗矣, 都鄙之民曰田疇墾矣, 筦庫之民曰出納允矣, 衣冠之民曰菁莪棫樸之化, 不知文王何如也。 於是乎三元調八風協, 嘉瑞降豐年應, 曖然如春, 油然如雨, 恬然如在光天化日之中。 而及夫昇遐日, 自夫王宮國都, 以至荒徼絶塞, 深山邃谷男婦稚老, 岐踵喙息之倫, 率皆奔走號哭, 如不欲生, 《詩》所云: ‘群黎百姓, 徧爲爾德。’ 王實有焉。 此王之立功, 著之八域之廣, 而嵬嵬蕩蕩民無能名者也。 若其酬酢萬變, 折衷義理, 充養發揮, 剛健純粹, 無所容乎人欲之私, 而有以全夫天理之公, 硏窮經傳之旨, 則提綱而挈領, 辨別事爲之故, 則銖量而錙較。 是以綸告筵諭, 動合典謨, 矯時正俗, 彰善癉惡之志, 哀矜惻怛, 于末命, 有足以透金石而感豚魚, 則非言語文字所由述也? 嘗曰: "予所願學孔子也。 學孔子, 當自朱子始。" 旣倣《朱子綱目》, 定《春秋》左氏傳, 將建閣御苑之中, 妥朱子遺像, 取《大全》、《語類》群書箋注之出於朱子者, 編以爲書, 庤其中而不及行焉。 居常無樂乎南面, 慨然有脫屣千乘之想, 朝廷請加徽稱者屢, 終不許。 築華之役, 葢有微意存焉, 故堂曰老來, 亭曰未老閑, 而卒不能假我數年, 俾千古帝王所未有之盛節, 不得見於當世則天也。 嗚呼! 大而化之之謂聖, 聖而不可知之之謂神, 葢謂聖人之所以配天也。 維天之命, 於穆不已, 葢謂天之所以爲天也。 陵號曰健, 取諸天行, 不其然乎? 自羲、農至文、武, 功烈見於事, 自孔、孟至程、朱, 功烈見於言。 其範圍天地澤利萬世, 則言與事, 未始不同, 而易地則皆然也。 王, 聖人也。 發明斯道之體, 主張斯道之命。 其事則羲、農、文、武, 其言則孔、孟、程、朱。 千世之下尙論者, 庶幾乎登《淸廟》之瑟, 愀然一唱而三歎。 特撮其天德王道, 布濩人耳目者, 以揭夫宏儒哲辟之憲度章程, 如此云爾。 【尹行恁吏曹參判製。】
- 【태백산사고본】 55책 1권 5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290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역사(歷史) / 어문학(語文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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