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조가 각신 이만수의 별단을 아뢰다
예조가 아뢰기를,
"각신 이만수의 별단(別單)의 여러 조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가락국의 왕릉이 김해부(金海府) 성 서쪽 2리쯤 되는 평야에 있는데, 사면이 모두 낮은 논으로 둘러 있습니다. 그런데 비록 큰 장마를 만나더라도 능 곁의 10보(步) 안에는 물이 고이지 않으니, 거주하는 백성들이 이상한 일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봉분(封墳)을 쌓은 것은 그리 높지도 넓지도 않고 사초(莎草)도 말라 죽지 않았습니다. 설치한 물건은 혼유석(魂遊石) 1좌(坐), 향로석(香爐石) 1좌, 진생석(陳牲石) 1좌이고, 능 앞의 짤막한 비석에는 ‘수로왕릉(首露王陵)’이란 4글자를 써서 거북머리의 받침돌에 세워 놓았으니, 이는 바로 경자년에 특별 전교로 인하여 고쳐 세운 것입니다. 돌담으로 둘러 쌓았는데 앞은 제각(祭閣)까지 닿았습니다. 허 왕후(許王后)034) 의 능은 성(城) 북쪽 2리쯤 되는 구지봉(龜旨峰)의 동쪽에 있는데, 구봉(龜峰)은 바로 수로왕이 탄생한 곳입니다. 수로왕과 허왕후의 두 능은 서로의 거리가 또한 2리쯤 되고, 봉분 쌓은 것과 설치한 물건은 수로왕릉과 같으며, 짤막한 비석에는 ‘수로왕보주태후허씨능(首露王普州太后許氏陵)’이란 10글자를 썼습니다.
돌담 전면에 삼문(三門)을 설치하고 다른 각우(閣宇)는 없습니다. 제각(祭閣)은 4칸인데 정자각(丁字閣)의 제도를 사용하였고, 부엌 4칸, 재랑(齋廊) 4칸, 재실(齋室) 4칸으로 바로 옛 회로당(會老堂)입니다. 제각(祭閣)의 기둥 밖 서까래 끝에는 간간이 물이 새고 단청은 벗겨져 떨어진 곳이 많으며 부엌의 서까래는 태반이나 썩었으니, 올 여름의 장마를 지내면 쉽게 무너질 염려가 있습니다. 금번에는 이미 고유(告由)하지 못했으니 역사를 시작하기 어려운 형편이지만 추향(秋享)을 기다려 수리하는 것은 아마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제물은 한결같이 본릉(本陵)의 동지(冬至) 제사의 전례대로 장만하는데, 벼[稻]·기장[梁]·개암[榛]·밤[栗]·희생[牲]·포[鱐]·김치[菹]·젓갈[醢] 따위는 대략 숭덕전(崇德殿)의 제물과 같습니다. 제기(祭器)는 제상(祭床) 2개, 향상(香床) 1개, 촛대[燭臺] 2개, 보(簠)와 궤(簋) 각각 2개, 목기[豆] 6개, 대그릇[籩] 10개, 술잔[爵] 6개이며, 술독이 있는 곳에 술잔이 없어 자기병[磁甁]에 제주(祭洒)를 담아 놓았으므로 신이 본 부사에게 말하여 추향(秋享) 때까지 술잔[尊] 1개와 구기[勺] 1개를 새로 장만하여 격식을 차리게 하였습니다. 허 왕후의 능은 수로왕의 능에서 거리가 다소 멀어 이미 같은 국내(局內)가 아니고 들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 허 왕후의 능에는 제각(祭閣)이 없으므로 전부터 제사지낼 때 수로왕릉의 제각에 합설(合設)하였었습니다. 금번 제사를 지낼 때는 하교로 인하여 각각 진설하였으나, 이후 절향(節享)에는 다만 전례대로 합설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1. 위전(位田)에 관한 일은 신이 김해(金海)에 도착하여 본부(本府)의 아전·향임과 김씨·허씨 등 여러 사람을 상세히 조사하여 비로소 전말(顚末)을 알았습니다. 능의 위토전이라고 이름한 것은 1결(結)이 조금 넘는다고 하는데, 김희명(金熙明)이 상언(上言)하기를 조정에서 떼어준 문서도 증거할 만한 것이 없고 연조(年條)도 상세하지 않다고 합니다. 이른바 회로당(會老堂)의 위토전은 4결(結)이 조금 넘는데, 이는 바로 저지난 무인년035) 에 고 부사(府使) 허재(許梓)가 장만한 것입니다. 대개 허재는 가락왕의 후예로서 이 고을의 원이 되어서 선조의 능을 위해 재목을 모으고 토지를 사서 제사를 지내고 건물을 수리할 수용을 구비하여 그대로 고을 사람에게 맡겼었습니다. 이것이 회로당 위토전이라 일컫게 된 원인인데, 본부(本府)에서 기사년에 결정한 입안(立案)을 상고해 보면 이는 고을 사람이 간여할 바가 아님은 다시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시골 풍속이 근래에는 예전과 달라 왕릉의 동지 제사에는 다만 민가에 배정한 물건만으로 희생과 술을 마련하고 허씨의 전답에서 나온 것은 공공연히 모두 사용(私用)으로 돌렸으며 종말에는 또 회로당이 왕릉에 가까운 것을 혐의하여 당의 현판은 향청(鄕廳)으로 옮겨 걸고 전답의 이름은 고을 둔전(屯田)이라고 고쳐 기록하였으며, 처음에는 몰수한 것이라고 핑계대었다가 결국에는 공공연히 빼앗았습니다. 지난번 간사한 짓을 한 고을 사람을 엄중하게 형신하고 멀리 귀양보내라는 명령이 있자 먼 변방의 완악한 풍속이 거의 징계할 줄 알게 되었고, 원래의 전답도 또한 본부(本府)에서 왕릉을 수리하는 위토전으로 양안(量案)을 정리하였으니, 이후로는 명목이 비로소 바로잡히고 간사한 폐단을 막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위토전이 아직까지 향임(鄕任)에 속해 있으니, 실로 오래되면 또 폐단이 생길까 염려됩니다. 김씨와 허씨 등 여러 사람들은 모두 능감(陵監)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려고 하지만 이른바 능감이 꼭 향임보다 나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금번 춘추(春秋) 절사(節祀)를 거행한 뒤에는 왕릉의 사체(事體)가 전보다 더욱 각별하니 능의 위토전과 회로당의 위토전을 막론하고 모두 본부(本府)에 소속시키고 모든 출납의 숫자와 지출의 절차를 본 부사로 하여금 주관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정당하다고 여겨집니다. 지금 실제 숫자를 조사해보면, 능의 위토전과 회로당(會老堂)의 토지에서 받는 벼가 가정하여 매년마다 42석이 되며, 능졸(陵卒) 50명에게 군역(軍役)을 면제한 대가로 받는 돈이 61냥이 되고, 각면(各面)에서 각종의 제수(祭需)를 대신하여 바치는 돈이 89냥이 되니, 합하면 1백 50냥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동지 제사의 준례에 의하여 제수를 마련하면, 두 차례 절사(節祀) 때에 들어가는 벼가 28섬이고 돈이 1백 4냥이니, 남은 숫자는 벼가 14섬이고 돈이 46냥입니다. 만약 숭덕전(崇德殿)의 준례에 의해 제수(祭需)를 본부(本府)에서 회감(會減)한다면, 위토전에서 나오는 것과 능졸(陵卒)에게서 군역을 면제한 대가로 받은 돈은 전량을 저축해 놓을 수 있으니, 제각(祭閣), 제수(祭需)를 수리 개조하는 등의 절목과 능감(陵監), 능직(陵直)에게 주는 봉급 따위는 모두 공비(公費)를 쓰지 않고도 넉넉히 지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사 의식은 이미 해조(該曹)로 하여금 참고하여 마련해서 내려보내라는 명령이 있었으니, 또한 본부(本府)로 하여금 사세(事勢)를 참작해 품식을 결정해서 영구히 준수할 수 있는 방도를 삼게 하소서.
1. 가락왕릉과 허 왕후의 능에서 1백 보(步) 안에는 일찍이 선조(先朝)의 특별한 전교로 인하여 표석(標石)을 세워 경작과 장사 지내는 것을 금지하였는데, 근래 완악한 백성들이 금지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두 능의 금지 표시 안에 침범하여 경작하는 걱정거리가 종종 있습니다. 금번 판부(判付)한 뒤에 본부사(本府使)가 조사하여 다스리고 엄하게 금지하였으므로 신이 간 뒤에 상세히 살펴보았는데, 아직까지 새로 개간한 것은 없었습니다. 침범하여 장사 지내는 것에 이르러서는 왕릉은 평지에 있기 때문에 본래 이러한 걱정이 없으나 허 왕후의 능에는 금지 구역을 침범한 곳이 한두 군데 있었는데, 여러 해가 된 것은 조사하여 규명하기가 어렵고 그중 작년에 새로 장사 지낸 것은 그대로 둘 수 없으므로 본부사(本府使)로 하여금 엄히 다스리고 기한을 정해 파서 옮기게 하도록 하였습니다.
1. 신라의 여러 왕릉 중에 12위의 왕릉은 20리 안에 있기 때문에 신이 가서 살펴보았고, 16위의 왕릉은 20리 밖에 있기 때문에 본주(本州)의 부윤(府尹)으로 하여금 살펴보고 와서 보고토록 하였는데, 모두 봉분이 완전하고 견고했으며 사초(莎草)가 잘 자라서 바라보기에 무성하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여러 왕릉은 모두 평야에 있으며, 오직 태종무열왕릉(太宗武烈王陵)만은 거북머리 받침돌의 짤막한 비석에 능호(陵號)가 큰 글자로 적혀 있을 뿐, 그밖에는 하나의 표시도 없어 어느 무덤이 어느 왕릉이라는 것은 다만 촌노인들의 손가락으로 가르키는 것과 고을 아전의 구전(口傳)에 의거할 뿐입니다. 옛날에는 48위의 왕릉이라고 일컬었으나 지금 찾을 수 있는 것은 다만 28위의 왕릉 뿐인데 그 또한 확실하지는 못합니다. 설치한 물건은 간혹 혼유석(魂遊石)과 병풍석(屛風石) 등이 있으나 다만 형체만 있어서 옛 제도를 상고하기는 어렵습니다. 헌덕왕릉(憲德王陵)에서 바라보이는 곳에 경순왕전(敬順王殿)이 있는데, 영정(影幀) 1장은 지난 무술년036) 에 영천(永川)의 은해사(銀海寺)에서 옮겨 봉안하였으므로 신이 지나는 길에 일체 살펴보았습니다.
1. 숭덕전(崇德殿)과 경순왕전(敬順王殿)에는 모두 참봉(參奉)이 있는데, 숭덕전의 참봉은 바로 계하(啓下)하는 자리였습니다. 고 판서(判書) 박문수(朴文秀)가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에 다른 도(道)의 사람으로 구차하게 충원하고 임시 벼슬로 만들어서 오래도록 재실(齋室)을 비우는 때가 많았으니, 능(陵)과 전(殿)의 수호가 자연 소홀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이 뒤로는 절목(節目)에 의거하여 본도(本道)에 사는 자가 아니면 차출하지 말도록 해도(該道)에 신칙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신라의 여러 왕릉에는 으레 왕릉을 수호하는 3호(戶)가 있었는데, 근래 본부(本府) 군역(軍役)에 거듭 침탈을 입은 것으로 인하여 편안하게 살지 못하고 왕왕 도피하고 있습니다. 신이 살펴볼 때에 간혹 능졸(陵卒)이 하나도 없는 곳도 있었으므로 본 부사(府使)로 하여금 즉시 정해서 세우도록 하였으니, 이 뒤로는 여러 능의 능졸에게 다른 역사(役事)로 침해하지 말도록 엄하게 신칙하는 것을 그만 둘 수 없습니다. 이에 의거하여 규정을 정하도록 감사에게 분부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 계본(啓本) 전체를 등사하여 해도(該道)에 내려보내고 감사와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서로 의논하여 개정한 뒤에 고을의 장고(掌故)에 상세히 기록하게 하라. 능졸(陵卒)의 정원이 빠졌다는 말은 듣고 보니 매우 놀랍다. 이후로 감사는 다시 못된 습속을 따르는 자가 있는지 자주 조사해서 수령을 논죄하라. 그리고 묘당으로 하여금 본부에서 서울에 바치는 군포(軍布) 중에서 능을 지키는 호는 역호(役戶)에서 제해 주고 그들을 수호하는 부서로 이속시켜 떠나지 않는 기반을 만들게 하라. 같은 기슭에 있는 왕릉들도 또한 각각 정할 것 없이 아울러 이런 뜻으로 알려 주어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4책 34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286면
- 【분류】재정(財政) / 군사(軍事) / 역사(歷史)
- [註 034]
○乙巳/禮曹啓言: "閣臣李晩秀別單諸條, 其一, 駕洛王陵在金海府城西二里許平野中, 四面皆是汚下水田, 雖値大潦, 陵傍十步內, 水不渟滀, 居民傳爲異事, 封築則不甚高廣, 莎草不枯, 象設則魂遊石一坐, 香爐石一坐, 陳牲石一坐, 陵前短碑, 書 ‘首露王陵’ 四字, 承以龜頭籠臺, 卽庚子年因特敎改竪者, 繚以石墻, 前抵于祭閣, 許王后陵在城北二里許龜旨峰之東, 龜峰, 卽首露王降生之地, 兩陵相距, 亦爲二里許, 封築象設, 與王陵同, 而短碑書 ‘首露王普州太后許氏陵’ 十字, 石墻前面, 設三門, 無他閣宇, 祭閣四間, 用丁字之制, 神廚四間, 齋廊四間, 齋室四間, 卽舊會老堂。 祭閣, 楹外椽端, 間間滲漏, 丹雘多有剝落, 神廚椽木, 太半腐傷, 若經今夏潦雨, 易致傾頹之患, 今番則旣未兼告由, 勢難始役, 待秋享修改, 恐不可已 祭品, 一依本陵冬至亨前例, 而稻、粱、榛、栗、牲、鱐、菹、醢等屬, 略似崇德殿。 祭器, 則祭床二, 香床一, 燭臺二, 簠、簋各二, 豆六, 籩十, 爵六, 尊所無尊罍, 以磁甁盛祭酒, 故臣言于本府使, 使之趁秋享新備尊一、勺一, 以存品式。 許后陵距王陵頗遠, 旣非同局, 則間隔一坪, 而后陵無祭閣, 故自前享事, 合設于王陵祭閣。 今番致祭, 因下敎各設, 此後節享只當依前合設。 其一, 位田事, 臣到金海, 詳査本府吏、鄕及金、許諸人, 始知顚末, 名以陵位田者, 爲一結零金熙明上言以爲, 自朝家劃給文跡無徵, 年條未詳, 所謂會老堂位田, 爲四結零, 卽二去戊寅, 故府使許梓所置者, 蓋許梓以伽洛後裔, 作宰是邑, 爲先陵鳩材買土, 以備祀享修理之需, 仍付鄕人, 此會老堂位田之所以稱, 而考之本府己巳決立案, 此非鄕人所可干與, 更無可疑, 鄕俗近不如古, 王陵之南至一享則只以民戶分定物種, 謹備牲酒之品, 而許田所出, 公然盡歸私用, 末又嫌會老堂之猶近王陵, 堂扁則移揭鄕廳, 田名則改錄鄕屯, 始則假托乾沒, 終至公肆攘奪, 而向有作奸鄕人嚴刑遠配之命, 遐陬頑俗, 庶知懲戢, 原田亦自本府, 以王陵修理位田, 釐正量案, 此後名色始正, 奸弊可杜, 惟是位田之尙屬鄕任, 實恐久又生弊, 金許諸人, 皆欲使陵監主之, 而所謂陵監未必勝於鄕任, 臣意則今番春秋節享, 定行後, 王陵事體, 視前尤別, 勿論陵位田會老堂田, 一竝屬之本府, 凡出納之數, 支用之節, 使本府使主管, 最爲正當。 今考實數, 陵位田及會老堂田收租, 每年假令爲四十二石零, 陵卒五十名, 除役價錢爲六十二兩, 各面祭需各種代捧錢, 爲八十九兩, 合一百五十兩, 以此依冬至享例磨鍊, 則兩次節享時所入租, 當爲二十八石, 錢當爲一百四兩, 餘數租爲十四石, 錢爲四十六兩, 若依崇德殿例, 祭需自本府會減, 則位田所出, 陵卒役價, 當全數儲置, 祭閣祭品修改等節, 陵監陵直廩料之屬, 皆可不煩公費, 優可支給, 而祭儀旣有令該曹參考磨鍊下送之命, 亦令本府, 斟酌事勢, 裁定品式, 以爲永久遵行之道。 其一, 伽洛王陵、許后陵百步內, 曾因先朝特敎, 立石標禁耕葬, 而近來頑民, 不畏法禁, 兩陵禁標內犯耕之患, 種種有之。 今番判付後, 本府使査治嚴禁, 臣行後詳察, 則姑無新墾者。 至於犯葬, 則王陵處在平地, 故本無此患, 后陵有一二犯禁處, 年久者有難査究, 其中昨年新葬者, 不可仍置, 故令本府使, 嚴加懲治, 刻期掘移。 其一, 新羅諸王陵中, 十二陵, 在二十里內, 故臣進去看審, 十六陵, 在二十里外, 故令本州府尹, 看審報來, 而皆封築完固, 莎草茁密, 望之鬱然。 大抵諸陵, 皆在平野, 惟太宗武烈王陵, 有龜頭短碑, 大書陵號, 其外則漫然無一標識, 某丘之爲何王陵, 只憑野老之指點, 邑吏之口傳, 古稱四十八王陵, 今之可尋者, 只二十八陵, 而亦未敢詳的象設, 則或有魂遊屛風等石, 而只存形體, 古制難考。 憲德王陵相望地, 有敬順王殿, 而影幀一本, 去戊戌年, 自永川 銀海寺移安, 故臣於歷路, 一體看審。 其一, 崇德殿、敬順王殿皆有參奉, 崇德殿參奉, 卽啓下窠, 故判書朴文秀爲嶺伯時, 以他道人苟充, 便作假銜, 長多空齋, 陵殿守護, 未免踈虞, 此後依節目, 非本道居生者, 毋得差出, 申飭該道, 恐爲得宜, 新羅諸王陵, 例有守陵三戶, 而近因本府軍役之疊侵, 不能奠居, 往往逃避, 臣之看審時, 或有無一陵卒處, 故使本府使, 卽速定立, 而此後諸陵陵卒, 勿侵他役事, 亦爲嚴飭, 有不可已, 請依此定式, 分付道臣。" 敎曰: "以此啓謄出全本, 下送該道, 令道伯與邑倅, 相議釐正後, 詳載於邑中掌故, 陵卒之闕額, 聞甚駭然, 此後道臣, 頻加考察, 復循謬習者, 守令論罪, 而令廟堂, 取考本府京納軍布中守陵戶除給役戶, 使之移屬守護, 以爲不離之地, 陵在同崗者, 亦不必各定, 竝以此意知悉。"
- 【태백산사고본】 34책 34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286면
- 【분류】재정(財政) / 군사(軍事) / 역사(歷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