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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127권, 영조 대왕 행장(行狀)

영조 대왕 행장(行狀)

행장(行狀)에 이르기를,

"영종 대왕(英宗大王)께서 승부(升祔)되신 뒤 일곱째 달 갑진(甲辰)에 사왕 전하(嗣王殿下)께서 신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하교하기를, ‘아! 우리 선왕의 성덕(盛德)·대업(大業)을 지금은 신민(臣民)이 알고 뒤에는 사책(史冊)에 실릴 것이므로 본디 행장에 기대할 것은 아니나, 바깥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궁중의 일을 나 불곡(不穀)062) 이 말하지 않으면 대저 누가 널리 밝힐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 불곡이 성왕의 공렬(功烈)을 깊이 사모하여 만기(萬幾)의 여가에 유사(遺事) 예순 여섯 가지를 모아 적었다. 아! 너희 태사(太史)인 신하들은 훈계(訓戒)·모유(謨猷)를 널리 찾아서 차례대로 찬술(撰述)하여 행장을 만들어 《실록(實錄)》 뒤에 붙이라.’ 하시매, 신(臣) 서명응(徐命膺)이 머리를 조아리고 대답하기를, ‘감히 명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왕(王)의 성(姓)은 이(李)이고 휘(諱)는 금(昑)이고 자(字)는 광숙(光叔)이며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손자이고 숙종 대왕(肅宗大王)의 둘째 아드님이시다. 화경 숙빈(和敬淑嬪) 최씨(崔氏)가 숙종 20년 갑술(甲戌) 9월 13일 무인(戊寅)에 창덕궁(昌德宮)에서 왕을 낳았는데, 그 사흘 전에 홍광(紅光)이 동방에 뻗고 백기(白氣)가 그 위를 덮었었다. 이날 밤에 궁인(宮人)이 꿈에 흰 용(龍)이 보경당(寶慶堂)에 날아 들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보경당은 바로 왕께서 탄강(誕降)하신 실(室)이다. 왕께서는 나시면서 특이한 자질이 있고 오른 팔에 잇따라 용이 서린 듯한 무늬 아홉 개가 있었다. 겨우 걸음을 배웠을 때에 숙종께 나아가 뵈면 반드시 무릎을 모아 바르게 앉고 숙종께서 물러가라고 명하지 않으시면 하루 해가 다 가더라도 어려워하시는 빛이 없으므로, 숙빈이 왕께서 오래 꿇어앉았느라 발이 굽을세라 염려하여 넓은 버선을 만들어서 힘줄과 뼈를 펼 수 있게 하였다. 무릇 글씨와 그림 따위는 다 배우지 않고도 잘하시어 필묵(筆墨)을 가지고 노실 때마다 빼어난 풍채가 사람들의 눈을 감동시켰다. 숙종께서 그 천성(天成)을 아름답게 여겨 시를 지어서 총애하셨다. 6세에 연잉군(延礽君)으로 봉하고 9세에 군수(郡守) 서종제(徐宗悌)의 딸을 맞아 달성 군부인(達城郡夫人)으로 삼고 19세에 출합(出閤)하셨다. 숙종께서 헌명(軒名)을 양성(養性) 이라 내리고 또 친히 화압(花押)하여 주셨다. 경자년063)숙종께서 승하하시고 경종(景宗)께서 즉위하셨는데 편찮으신 지 오래 되고 사속(嗣續)도 바랄 수 없으므로, 이듬해 정언(正言) 이정소(李廷熽)가 상소하여 조종(祖宗)의 고사(故事)를 인용하고 저위(儲位)를 미리 세워서 인심을 매어 두기를 청하니, 경종께서 대신(大臣)에게 명하여 의논하게 하셨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좌의정 이건명(李健命)·판부사(判府事) 조태채(趙泰采) 및 육경(六卿)과 양사(兩司)의 장관이 구대(求對)하여, 자성(慈聖)께 고하여 일찍 대계(大計)를 정하기를 청하였다. 경종께서 뭇 신하에게 명하여 합문(閤門) 밖에 물러가 기다리게 하였다가 조금 뒤에 다시 불러들여 자성의 수찰(手札)을 보이셨는데, 거기에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혈맥(血脈)이며 선대왕(先大王)의 골육(骨肉)으로는 주상(主上)과 연잉군이 있을 뿐이니 어찌 다른 의논이 있겠는가?’ 하셨으므로, 신하들이 다 눈물을 흘리며 물러갔다. 드디어 왕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고 군부인 서씨를 세제빈(世弟嬪)으로 책봉하였으나 왕께서 상소하여 사양하니, 경종께서 답하기를 ‘이미 입년(立年)064) 이 지났어도 사속이 없고 또 기이한 병이 있으니, 나라의 일을 생각하면 베풀 만한 계책이 없다. 자성께 우러러 여쭈고 뭇사람의 뜻을 굽어 따라서 중대한 저위를 맡기니, 소심(小心)하게 삼가서 나라 사람의 희망에 부응하라.’ 하셨다. 그때 마침 적신(賊臣) 유봉휘(柳鳳輝)가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중곤(中壼)을 다시 맞으신 지 겨우 수년인데 약시중을 드시느라 근심하고 황망하시고 이어서 양암(諒闇)065) 에 계셨으니, 사속은 논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제 보력(寶曆)066) 이 한창이시고 중곤의 연세가 겨우 성년을 지나셨으니, 앞으로 자손이 번창하는 경사는 전국에서 바라는 것입니다. 혹 양궁(兩宮)에 병환이 있어서 탄육(誕育)에 방해된다면 보호하는 곳에서 정성을 다하여 치료하는 일은 무엇이고 극진히 할 것인데, 즉위하신 원년에 이런 일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처음에는 이 정소를 시켜 상소하여 청하게 해서 마치 시험하여 보는 듯하였고, 밤이 이미 깊었는데 등대(登對)하여 힘껏 청하되 들어가 여쭈기를 청하고 나서 바로 나와 선포하기를 청하여 문득 시키고 독촉하는 것과 같았으니, 신하의 예(禮)가 없다 할 수 있습니다. 무진년067) 전하께서 탄생하셨을 때에도 후사를 세우는 일이 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신하들이 아직 수년을 기다려 볼 것을 말하였습니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이 이러해야 할 것인데 이제는 황급하고 경솔하니, 인심이 의혹하는 것이 오래 되어도 진정되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이제부터는 모든 행사에 대하여 신충(宸衷)068) 에서 결단하여 위복(威福)이 아래로 옮겨지게 하지 마시고 이어서 대신 이하가 우롱하고 협박한 죄를 바루게 하여서 나라 사람에게 답하소서.’ 하였다.

경종께서 조정(朝廷)에 하교하기를, ‘일월(日月)처럼 밝으신 선대왕께서 내게 후사가 없는 것을 매우 염려하셨고 이제 내 병이 아들을 바랄 수 없으므로, 공경히 부탁을 받고서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일전에 대간(臺諫)이 상소한 것은 종사(宗社)를 위하여 국본(國本)을 정하는 일이므로 바로 선대왕의 성려(盛慮)와 내 뜻에 맞거니와, 자성께 우러러 여쭈어 이미 국본을 정하였으니 참으로 종사의 끝없는 복이다. 유봉휘가 상소하였는데, 이는 어떤 사람인가? 경들은 논하여 아뢰라.’ 하셨다. 대신과 삼사가 유봉휘를 국문(鞫問)하여 왕법(王法)을 바루게 하기를 청하니, 경종께서 윤허하셨으나 곧 고쳐서 멀리 귀양보내게 하셨으므로, 대신·재신(宰臣)·삼사·정원(政院)·종신(宗臣)·관학생(館學生)이 전에 청한 것을 고집하여 더욱 힘껏 청하였다.

이때 적신 조태구(趙泰耉)가 우의정으로서 근기(近畿)에 있었는데, 문득 차자를 올려 효묘(孝廟)께서 저위(儲位)를 이으실 때에 고(故) 상신(相臣) 이경여(李敬輿)가 상도(常道)를 지킨 논의를 인용하고 유봉휘는 충성하므로 때려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에 앞서 숙종께서 승하하셨을 때에 조문하러 온 칙사(勅使)가 황제의 분부가 있었으므로 세자(世子)와 아우와 자질(子姪)도 아울러 위문하고 싶다고 말하였으나 조정의 의논이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다. 그런데 조태구가 상소하기를, ‘상국에서 행하는 것은 실례가 되는 것이고 배신(陪臣)이 그것을 받는 것은 혐의를 무릅쓰는 것이니, 왕자(王子)와 종신(宗臣)들이 어찌 감히 이 일을 편안하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하고 왕을 원망하여 꺼리는 것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다시 차자를 올려 유봉휘를 구제하는데 힘을 남기지 않으므로, 삼사가 말소리를 같이하여 조태구의 죄를 논하고 우선 삭출(削黜)하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왕께서 다시 상소하여 굳이 사양하였으나 경종께서 위로하여 타이르시는 것이 아주 극진하였으므로, 왕께서 9월에 비로소 인정전(仁政殿)에서 책보(冊寶)를 받으셨는데 보추(步趨)·진지(進止)가 모두 규도(規度)에 맞았다. 주연(胄筵)을 열어 《소학(小學)》·《강목(綱目)》을 강독(講讀)하셨는데, 뜻이 어렵고 의심스러운 것에 대하여 문답하느라 밤을 새우고 낮에 이어도 싫증 내지 않으시고 말하기를, ‘궁료(宮僚)는 벗이다. 벗이 선행(善行)을 책망하려면 반드시 정지(情志)가 유통하고서야 그 말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하셨다. 일찍이 《심경(心經)》과 필묵(筆墨)을 겸설서(兼說書) 조현명(趙顯命)에게 내리시고 말하기를, ‘설서가 성심으로 개도(開導)하였으므로, 백금(伯禽)·양자(襄子)에 관한 말을 내가 잊지 않고, 효묘(孝廟)의 큰 뜻에 관한 말을 내가 잊지 않고, 궁위(宮闈)의 화기(和氣)에 관한 말을 내가 잊지 않고, 근습(近習)을 진중히 가리는 데에 관한 말을 내가 잊지 않고, 견우과당도(牽牛過堂圖)를 벽에 건 데에 관한 말을 내가 잊지 않았다. 대저 말하였어도 잊는다면 곧 말을 버린 것이다. 하치않은 물건으로도 잊지 않는 뜻을 보이고 《심경》으로 심학(心學)을 권한 데에 보답한다.’ 하셨다.

이때에 경묘(景廟)께서 병환이 더욱 심하셨는데, 만기(萬幾)를 수접(酬接)하시느라 심화(心火)가 올라도 깨닫지 못한다는 뜻을 여러 번 사륜(絲綸)에 보이셨으므로, 나라에 충성한 생각을 가진 자들은 왕께서 서무(庶務)에 참결(參決)하여 성로(聖勞)를 분담하기를 바랐고, 재신(宰臣) 이태좌(李台佐)가 조정에서 호조 판서(戶曹判書) 민진원(閔鎭遠)에게 이런 때에 대리(代理)하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느냐고 말하였고, 사대부(士大夫)가 사사로이 서로 수작할 때에도 그 말이 한 입에서 나오듯이 같았다. 그러나 김일경(金一鏡) 이라는 자는 사람됨이 흉악하고 도리에 어그러진 행실이 많고 이로운 것을 보면 부끄러움을 잊는 자인데, 이사상(李師尙)·윤취상(尹就商) 등 세상에서 배척받고 버려진 자와 깊이 서로 결탁하여 허여하고 환자(宦者) 박상검(朴尙儉)·문유도(文有道)와 궁인(宮人) 석렬(石烈)·필정(必貞)을 서로 통하여 궁중의 응원으로 삼았다. 그런데 왕께서 영명(英明)하시기 때문에 그 간사한 정상을 다 아실세라 염려하여 드디어 외정(外庭)에서 눈을 부릅뜨고 팔을 걷어붙이고서 무릇 대리를 말하는 자를 문득 반역으로 몰므로, 뭇 신하들이 두려워 움츠리고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이해 10월에 집의(執義) 조성복(趙聖復)이 상소하여 신하들을 인접(引接)하고 정령(政令)을 재결할 때에 세제(世弟)를 불러들여 옆에서 모시고 참여하여 듣고 일에 따라 익히기를 선조(先朝) 정유년069) 의 고사(故事)와 마찬가지로 하기를 청하였다. 경종께서 그 말을 옳게 여기시고 드디어 하교하기를, ‘나는 10여 년 동안 기이한 병이 있거니와, 정유년에 청정(聽政)을 명하신 것은 선조에서 정섭(靜攝)하시기 위한 것이므로 내 몸을 돌볼 겨를이 없었는데, 등극하고부터는 증세가 더욱이 깊어졌다. 세제는 장년이고 영명하므로 청정하게 하면 국사를 맡긴 데가 있어서 내가 안심하고 조섭할 수 있을 것이니, 이제부터 모든 국사를 세제를 시켜 재단하게 하라.’ 하셨는데, 이날 밤에 적신 최석항(崔錫恒)이 입직(入直)한 승지(承旨)·옥당(玉堂)과 함께 구대하니, 성명(成命)을 거두셨다.

적신 한세량(韓世良)이 상소하여 조성복에게 형벌을 줄 것을 청하기를,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땅에는 두 임금이 없습니다. 세제를 시켜 임조(臨朝)하게 하기를 직접 청하지는 않았더라도 참여하여 듣는 것은 임조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신하로서 감히 남몰래 천위(天位)를 옮길 생각을 품었으니, 죄가 천지 사이에 용납될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도승지(都承旨) 홍계적(洪啓迪)한세량의 소(疏)는 지의(指意)가 흉패(凶悖)하다고 말하고 양사가 따라서 한세량을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기를 청하고 다시 잡아다 국문하여 엄히 묻기를 청하였다. 경종께서 시임(時任)·원임(原任)인 대신과 2품(品) 이상 및 삼사에 명하여 빈청(賓聽)에 와서 모이게 하고 하교하기를, ‘저위(儲位)를 일찍 정한 것은 본디 대리시키려 한 것인데 이미 자성께 여쭈었으니, 전에 하교한 대로 거행하라.’ 하셨다. 그래서 왕께서 네 번 상소하여 힘껏 사양하고 대신 이하가 예합(詣閤)하여 구대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으므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전정(殿庭)에서 호소하여 대리하라는 명을 거두기를 청한 것이 모두 사흘이나 되었다. 경종께서 또 하교하기를, ‘내가 병이 있어도 수응(酬應)할 수 있다면 어찌 이렇게까지 하겠는가? 요즈음 심화가 하루에도 자주 일어나므로 좌우를 시켜 전례를 살펴서 거행하게 하는데, 좌우를 시키는 것이 옳은지, 세제를 시키는 것이 옳은지를 경들이 생각하여 우리 형제가 고통을 나누어 망하려는 나라를 지키게 하라.’ 하셨다. 영의정 김창집·좌의정 이건명·영부사(領府事) 이이명(李頤命)·판부사 조태채 등이 연명(聯名)으로 차자를 올리기를, ‘모든 국사를 모두 재단하라고 명하셨으니 이것은 국조(國朝)에 없던 일이므로 중외(中外)에서 놀랍게 여기고 의혹합니다. 신들이 만 번 주륙(誅戮)을 당하더라도 감히 받들 수 없습니다마는, 작은 일을 나누어 다스리는 것으로 말하면 정유년에 재정(裁定)한 것이 이미 있으니, 전하의 신하로서 어찌 감히 경거(輕遽)함에 구애되어 모두 어기겠습니까?’ 하였다.

그런데 차자(箚子)가 올라가니, 조태구가 시골에서 달려와 선인문(宣仁門)으로 들어가 구대(求對)하였으나, 정원(政院)에서, ‘대각(臺閣)에서 바야흐로 조태구의 죄를 논하므로 조태구는 구대하지 말아야 한다.’ 하여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금 뒤에 사알(司謁)이 명을 전하여 조태구를 입시(入侍)하게 하고 다시 명을 전하여 정원·삼사(三司)를 입시하게 하고 다시 명을 전하여 시임·원임인 대신과 중신(重臣)·재신(宰臣)을 입시하게 하셨는데, 입시하니, 전후의 하교를 모두 거두어 거행하지 말게 하셨다. 물러가서 삼사에서 아뢰기를, ‘신하들을 인접(引接)할 때에는 정원을 거치는 것이 3백 년 동안 내려온 정규(定規)인데, 이제 조태구는 어느 길을 거쳐서 품지(稟旨)하였습니까? 이 길이 한 번 열리면 이 뒤에 북문(北門)의 변이 있더라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니, 승전색 사알(承傳色司謁)을 잡아다 문초하여 엄히 핵사(覈査)하소서.’ 하니, 경종께서 윤허하셨다. 양사(兩司)에서 다시 조태구가 평소에 환시(宦寺)와 교통한 죄를 논하고 극변(極邊)에 멀리 귀양보내기를 청하였으나, 답하지 않으셨다.

12월에 적신(賊臣)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이진유(李眞儒)·이명의(李明誼)·정해(鄭楷)·윤성시(尹聖時)·서종하(徐宗廈) 등 7인이 연명으로 상소하였는데, 거기에 ‘복합(伏閤)070) ·정유(庭籲)가 사흘에 이르렀습니다. 기사년071) 의 대신(大臣)은 한나절 정청(庭請)하였어도 오히려 정조(鄭造)·윤인(尹訒)·정인홍(鄭仁弘)과 같은 죄로 배척하였으니, 저들도 양기(梁冀)·석현(石顯)·왕망(王莽)·조조(曹操)와 같은 주벌(誅罰)을 면하기 워낙 어려울 것입니다. 바라건대 명지(明旨)를 내려 역적 조성복과 네 명의 흉적을 모두 법으로 결단하소서.’ 하고, 드디어 말을 맺기를, ‘자신에게 나라의 안위(安危)가 달려 있는 대신이 사력(死力)을 다하는데, 대각인 자가 감히 음기(陰機)라는 따위 말로 억지로 죄안(罪案)을 만드니 그 마음쓰는 것이 흉악하고도 참혹합니다.’ 하였는데, 조태구를 가리킨 것이다. 상소가 들어가니, 사대신(四大臣)이 대명(待命)하였고, 이날 밤에 승지·삼사·경재(卿宰)·장신(將臣)이 혹 파직(罷職)되기도 하고 출송(黜送)되기도 하였으며, 김일경이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고 박필몽·이진유·이명의 등이 삼사가 되고 윤취상이 훈련 대장(訓鍊大將)이 되었다. 얼마 안가서 박상검문유도·석렬·필정과 함께 왕께서 조현(朝見)하는 청휘문(淸暉門)을 닫아 막아서 왕을 모해하는 것이 더욱 급해졌으므로, 왕께서 밤에 궁료(宮僚)를 불러 출합(出閤)하고 사위(辭位)하려 하셨는데, 보덕(輔德) 김동필(金東弼)이 그 불가함을 힘껏 아뢰었다. 이튿날 대비(大妃)께서 빈청(賓廳)에 봉서(封書)를 내리기를, ‘저사(儲嗣)를 정한 것은 선왕의 유교(遺敎)를 받든 것이고 주상(主上)께서 친히 작호(爵號)를 쓰셨고 내가 또 대신에게 하교하였는데, 불행히 궁인(宮人)·환시(宦寺)가 양궁(兩宮)에서 결탁하였다. 전에 내가 주상과 함께 궁인을 불러 꾸짖어 일렀는데도 궁인이 감히 흉패(凶悖)를 부렸으니, 이는 반드시 당률(當律)이 있을 것이다. 경들도 우리 주상과 동궁을 보호하여 3백 년의 종사를 지키고 우리 선왕의 유교를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하셨다. 그래서 대신과 2품 이상과 정원과 삼사가 구대(求對)하여 논하니, 박상검·문유도·석렬·필정이 모두 처형되었다.

무릇 왕께서 저위(儲位)에 계신 동안에 간흉(奸凶)이 안팎으로 결탁하였으므로 옛 임금들이 어려워하던 처지에 놓이셨으나, 왕께서는 낯빛과 말에 나타내지 않고 응대하는 데에 도리가 있어서 마침내 궁위(宮闈) 안에 화기가 애연(藹然)하게 하셨으므로, 사람들이 이 때문에 왕께 성덕(聖德)이 있는 줄 알았다. 임인년072) 9월에 왕께서 치학(齒學)073) 하셨다.

갑진년074) 8월에 경종의 병환이 위독해졌다. 당초 이광좌(李光佐)가 약원 도제조(藥院都提調)이었을 때에 성후(聖候)가 오래 낫지 않고 있을 때에 이공윤(李公胤)이 의업(醫業)에 종사하여 나라 안에서 이름났기 때문에 드디어 이공윤에게 주부(主簿)를 제수하여 약원에 들어와 약을 의논하게 하였는데, 이종윤은 사람됨이 도리에 어그러지고 경망하여 계묘년075) 여름부터 날마다 준공제(峻攻劑)를 썼으나 조정에서는 이공윤이 선의(善醫)라 하여 의심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성후가 더욱 위독해졌어도 이광좌가 곧 의약청(議藥廳)을 설치하지 않았는데, 왕께서 관대(冠帶)를 벗지 않고 경종께서 약을 견디시는지 알려고 경종께서 한 술을 드시면 왕께서도 한 술을 드시고 두 술을 드시면 또한 두 술을 드셨으며 울면서 이공윤에게 말씀하기를, ‘참 원기가 날로 떨어지니 지금이 어찌 제 소견을 세울 때이겠는가? 급히 인삼과 부자(附子)로 양기를 회복해 드리라.’ 하였으나, 이광좌이공윤은 전의 소견을 고집하고 끝내 인삼과 부자를 많이 쓰지 않았다.

경종께서 훙서(薨逝)하시니 왕께서 애훼(哀毁)가 도를 지나셨고 뭇 신하가 사위(嗣位)를 청하여도 물리치고 따르지 않으시므로, 대신·삼사·정원·종친·문무 백관(文武百官)이 여러 번 아뢰었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왕대비(王大妃)께서 수찰(手札)로 권하시고서야 왕께서 비로소 면복(冕服)을 입고 인정문(仁政門)에 이르렀으나 오히려 슬피 울부짖고 자리에 오르지 않으시며, 개복(改卜) 때에 행례(行禮)하여 왕대비 김씨를 대왕 대비(大王大妃)로 높이고 왕비 어씨(魚氏)를 왕대비로 높이고 빈(嬪) 서씨(徐氏)를 왕비로 올렸다. 왕께서 책보(冊寶)를 받으시려 할 때에 환시·궁인 중에 아직 박상검·필정의 무리가 많아서 방자하게 헐뜯는 것이 부도(不道)하고 보록(寶盝)을 섬돌 모퉁이에 던지는 소리가 어좌(御座)까지 들렸으나, 왕께서 못 들은 체하셨다. 아침·저녁의 곡전(哭奠)에는 반드시 친히 임하셨는데, 일찍이 풍비(風痺)를 앓아 침을 맞으시므로 약원에서 침은 상측(喪測)을 꺼린다 하여 곡림(哭臨)을 중지하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으셨다. 여가에는 만기(萬幾)에 부지런하여 조금도 쉬지 않으시므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근로가 너무 지나친 것은 몸을 보호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기름진 땅의 백성이 재주가 없는 것은 안일하기 때문이고 메마른 땅의 백성이 모두 재주가 있는 것은 근로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삼대(三代)의 임금은 근로로 다스렸거니와, 안일로 다스렸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하셨다.

이에 앞서 숙종 말년부터 경종 4년에 이르는 동안은 다 편찮아서 경연(經筵)과 차대(次對)를 행하지 못하셨는데, 왕께서 공제(公除)하고 나서는 곧 강행(講行)하셨다. 선을 권하고 악을 간한 승지(承旨)에게 상주어 언로(言路)를 열고 호피(虎皮) 대신 바치는 면포(綿布)를 폐지하여 민력(民力)을 펴게 하며, 여염집을 함부로 차지하는 일을 매우 금하고 옥에 갇혀 지체되어 있는 자를 소방(疏放)하며, 경외(京外)의 관원을 구임(久任)하여 성적을 요구하시니, 한 가지 영(令)이 나올 때마다 사방에서 눈을 씻고 기대하였다. 마침 천둥의 이변이 있었으므로, 왕께서 친히 글을 지어 정원에 내려서 구언(求言)하는 교서(敎書)를 대신 짓게 하셨는데, 거기에 대략 말하기를, ‘자신을 닦기를 잘하지 못하였는가?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는 것이 극진하지 못하였는가? 자신을 봉양하는 것이 지나치게 사치하였는가? 신하를 대우하는 것이 성실하지 못하였는가? 어진 사람이 초야에 있어도 쓰지 못한 일이 있는가? 곤궁한 백성이 원통한 마음을 품어도 아뢰지 못한 일이 있는가? 조정이 화평하지 못하여 천기(天氣)를 손상하였는가? 사의(私意)가 마구 유행하여 공의(公議)를 막았는가? 아! 너희 근밀(近密)076) 은 나를 대신하여 교서를 지어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라. 말이 지나쳐도 내가 죄주지 않을 것이다. 아! 백성의 고통이 바야흐로 급하고 당습(黨習)의 다툼이 날마다 있으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내 잠자리가 어찌 편안하겠는가? 조정의 신하는 곧은 사람을 쓰고 굽은 사람을 버리며 방백(方伯)인 신하는 출척(黜陟)을 오직 밝게 하여 네 직무를 삼가서 위로 하늘의 경고에 답하라.’ 하였다. 정원에서 대신 짓지 말고 내리신 사륜(絲綸)을 중외에 포고(布告)하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왕께서 말씀하기를, ‘글이 졸렬하니 다시 대신 지어야 하겠다.’ 하시매, 정원에서 다시 말하기를, ‘신들이 대신 지으면 반드시 왕언(王言)만 못할 것입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어려워하는 일을 다시 요구하는 것은 예(禮)로 부리는 도리가 아니니 그 말대로 하라.’ 하셨다.

12월에 경종 대왕의릉(懿陵)에 장사하였다. 처음 복릉(卜陵)할 때에 왕께서 반드시 대비께 여쭈어 윤허를 받아야 결정하셨다. 국내(局內)에 있는 모든 백성의 전택(田宅)은 유사(有司)에 신칙(申飭)하여 후한 값을 주고 물러가게 하여 원망이 없게 하셨다. 이때 경자년077) 의 대상(大喪)을 겪은 지 얼마 안 되었어도 유사가 오히려 궁중의 고사(故事)를 몰라 거행하는 데에 헷갈렸는데, 왕께서 크고 작은 일들을 남김없이 고증하여 가르쳐 주어 반드시 성신(誠信)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어그러지지 않게 하셨다.

원년(元年) 을사(乙巳)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하교하여 농사를 권하되, 방백에게 신칙하여 농사 시기를 빼앗지 말게 하시고, 사폐(辭陛)하는 수령(守令)은 문득 소견(召見)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라고 경계하셨다. 또 하교하기를, ‘우리 나라는 좁아서 사람을 등용하는 것이 넓지 못한데, 구신(舊臣)을 죄다 물리쳤으므로 조정에서 벼슬하는 자가 예전만 못하니 내가 매우 한스럽다. 바야흐로 해가 바뀌었으므로 만물과 함께 봄을 같이해야 할 것이니, 귀양간 사람을 대신과 금오(金吾)로 하여금 경중을 참작하여 소석(疏釋)하게 하라.’ 하셨다. 당초 김일경(金一鏡) 등 역적들이 상소하여 연명으로 차자를 올린 사대신(四大臣)을 배척하여 양기(梁冀)·석현(石顯)·왕망(王莽)·조조(曹操)에 견주고 나서 스스로 양립(兩立)할 수 없는 형세임을 알고 일대(一隊)를 일망 타진하여 그 부리와 싹을 끊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시정(市井)의 무뢰한 사람 목호룡(睦虎龍)을 추기어 상변(上變)하게 하여 드디어 큰 옥사(獄事)를 일으켜 사대신과 그 족당(族黨)을 죄다 죽이고 친지(親知)를 연좌시켜 팔도에 두루 편배(編配)하고는 이어서 맹약(盟約)하고 반사(頒赦)하였다. 그 교문(敎文)은 김일경이 지은 것인데, 일을 인용하여 말을 만든 것이 모두 흉패(凶悖)를 극진히 하여 칠적(七賊)이 상소한 사연과 안팎이 되고 선왕을 무함하여 성궁(聖躬)에도 미쳤으므로 사람들이 다 근심하고 분개하였으나 김일경·박필몽(朴弼夢)의 기염을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전년 겨울에 정언(正言) 이의천(李倚天)이 상소하여 논하니, 왕께서 드디어 김일경·목호룡을 국문(鞫問)하여 처형하고 법대로 노적(孥籍)하였으며, 박필몽 등 육적(六賊)은 당초에 관직을 삭탈한 뒤에 모두 위리 안치(圍籬安置)하였으나, 무고 당한 사람들은 미처 소석하지 못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얼마 안 되어 경상도의 사인(士人) 김인수(金麟壽)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도봉 서원(道峰書院)에 다시 향사(享祀)하고 또 선정신 권상하(權尙夏)의 관작(官爵)을 회복시키기를 청하였는데, 이 또한 김일경 등이 출향(黜享)하고 삭탈(削奪)한 것이었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사문(斯文)의 시비는 유림(儒林)에 달려 있고 조정에 달려 있지 않으니, 해조(該曹)를 시켜 그 관작을 회복하도록 하라.’ 하셨다.

이달에 왕께서 의릉(懿陵)에 거둥하려 하셨는데, 날씨가 아직 매우 추우므로 약원(藥院)에서 따뜻해지기를 기다리기를 청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우로(雨露)가 이미 땅을 적시고 군자가 이를 밟으면 반드시 경동(警動)하는 마음이 생긴다.」 하였는데, 더구나 인산(因山) 때에 따라가지 못한 나이겠는가?’ 하고 마침내 따르지 않고 알릉(謁陵)하고 돌아오셨다. 마침 국옥(鞫獄)이 있었는데, 유사가 압슬형(壓膝刑)을 시행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예전에 한 문제(漢文帝)는 육형(肉刑)을 없애고 당 태종(唐太宗)은 명당도(明堂圖)를 보고 오장(五臟)이 등에 걸려 있다 하여 드디어 태배법(笞背法)을 없앴고 아조(我朝)의 세종(世宗)께서도 태배법을 없애셨는데, 더구나 오형(五刑)에 없는 압슬형이겠는가? 영구히 없애라.’ 하셨다.

3월에 우의정(右議政) 정호(鄭澔)가 사대신이 원통하게 죽은 정상을 말하니, 왕께서 명하여 복관(復官)하고 치제(致祭)하고 증시(贈諡)하게 하였다. 이만성(李晩成)·홍계적(洪啓迪)·김운택(金雲澤)·김민택(金民澤)·이홍술(李弘述)·조성복(趙聖復) 등도 모두 복관하게 하고 고(故) 찬선(贊善) 이희조(李喜朝)도 증시하게 하셨다. 일찍이 소대(召對) 때에 연신(筵臣)에게 말씀하기를, ‘완곡하게 간(諫)하고 넌지시 간하는 것은 본디 신하가 임금을 바로잡는 요체이나, 임금으로부터 말하면 신하가 바른 말로 간하지 못하게 하고 도리어 완곡하고 넌지시 하는 데에 구구하게 만든다면, 또한 매우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은둔하여 있는 어진 사람을 뽑고 지사(志士)를 구하여 경연관(經筵官)을 채우라고 명하셨는데, 장차 불러들여 고문(顧問)에 갖추려 하신 것이다. 우의정(右議政) 민진원(閔鎭遠)이 왕께 아뢰기를, ‘궁인(宮人)을 반드시 내비(內婢)에서 뽑고 양가(良家)까지 해가 미치지 않은 것은 선조(先朝)의 덕정(德政)입니다. 이제 이따금 양가에 해가 미친다 하니, 과연 그렇습니까?’ 하자, 왕께서 놀라 말씀하기를, ‘이제 액정(掖庭)을 조금이라도 내보내려고 하는데, 당 태종의 방출(放出)을 본받지는 못하더라도 어찌 더 뽑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양가의 딸은 그 부모가 어렵게 겨우 기른 것인데, 하루아침에 깊은 궁중에 유폐(幽閉)하는 것은 인정(仁政)이 아니다.’ 하고, 당장 명하여 중관(中官)을 잡아다 문초하고 궁노(宮奴)를 결장(決杖)하여 정배(定配)하게 하셨다.

5월에 형조(刑曹)에서 제도(諸道)의 강도죄(强盜罪)를 핵사(覈査)하여 아뢰니, 왕께서 형관(刑官)에게 말씀하기를,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것은 사람이 누구인들 이런 마음이 없겠는가? 기한(飢寒)에 몰리고 침어(侵漁)에 괴로워서 이 지경에 빠지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 것이니, 다 내 가르침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여 그런 것이다. 경들은 불쌍히 여기고 기뻐하지 말며 짐작하여 빨리 판결하여 옥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게 하라.’ 하셨다.

추7월(秋七月)에 크게 가무니, 왕께서 하교하여 구언(求言)하고 사직(社稷)에 친히 기도하여도 비가 내리지 않으므로 장차 북교(北郊)에서 다시 친히 기도하시려 하는데, 유사(有司)가 말하기를, ‘전례가 없으니 남교(南郊)로 개정하소서.’ 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선조에서는 선농단(先農壇)에 특별히 제사하였는데, 또한 본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드디어 정성을 기울이고 정결을 다하여 북교에서 기도하셨다. 관제(祼祭)하고 나서 빽빽한 구름이 사방에서 모여 비가 죽죽 내려서 면복(冕服)이 죄다 젖었으나 왕께서 규(珪)를 잡고 더욱 공손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용의(容儀)를 잃지 않으시니, 제사에 참여한 자들이 모두 흠탄(欽歎)하였다.

8월에 충청도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고(故) 충신(忠臣)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등의 묘석(墓石)을 세우게 하시고, 성조(聖祖)께서 일찍이 세 충신에게 전토(田土)를 내리셨으나 유사가 인순(因循)하여 오래 되어도 주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신칙(申飭)하여 죄다 주게 하셨다.

동11월(冬十一月)에 삼남(三南)에 기근이 들었는데, 왕께서 궁납미(宮納米)를 줄여서 진휼(賑恤)에 보태고 말씀하기를, ‘선조에서는 북관(北關)의 공은(貢銀)이 있었으므로 흔히 은으로 진휼에 보탰으나, 이제는 은이 베[布]로 바뀌었으므로 선조의 유의(遺意)를 본받으려 하여도 할 수 없다.’ 하셨다.

12월에 환장암(煥章庵)에 갈무리되어 있던 의종 황제(毅宗皇帝)의 어묵(御墨)을 바친 자가 있었는데, 왕께서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기를, ‘명나라가 재조(再造)하여 준 은혜는 영구히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세월이 점점 오래되면 인심이 버릇되어 예사로 여기기 쉬우니, 우리 성조께서 대의(大義)를 천명하지 않으셨다면 동토(東土)의 백성이 어찌 존주(尊周)의 의리를 알겠는가?’ 하였다. 이어서 명하여 남한(南漢)에 있는 현절사(顯節祠)에 치제(致祭)하고 또 강도(江都)에 있는 충렬사(忠烈祠)에 제사하고, 또 통제영(統制營)에 있는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사당에 제사하고 또 화양동(華陽洞)에 있는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사당에 제사하게 하셨다. 곧 만동묘(萬東廟)에 사액(賜額)한 어묵(御墨)을 돌에 새기게 하고 그 아래에 친서(親序)하셨는데, 그것을 인쇄하여 문정공의 손자에게 내리고 석본(石本)을 내부(內府)에 갈무리해 두게 하셨다. 일찍이 야대(夜對) 때에 날씨가 매우 추우므로 승지(承旨)가 와내(臥內)에 유신(儒臣)을 불러들여 강독(講讀)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인정은 그믐에 가까워지면 게을러지기 쉽거니와,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면 정신을 떨쳐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하셨다.

2년 병오(丙午) 춘정월(春正月)에 상참(常參)과 경연(經筵)을 거행하면서 왕세자(王世子)에게 명하여 서연(書筵)을 열게 하셨다. 구례(舊例)로는 한추위와 한더위에는 양연(兩筵)을 멈추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왕께서 하교하기를, ‘대우(大禹)는 촌음(寸陰)을 아꼈으니 뭇사람은 분음(分陰)을 아껴야 할 것이다. 이제 정월이 이미 시작되었는데 어찌 날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리겠는가?’ 하셨다. 상신(上辛)에 사직(社稷)에서 친히 기곡(祈穀)하시고 해마다 상례(常例)로 삼으셨다.

2월에 왕께서 삼남(三南)의 황정(荒政) 때문에 하교하기를, ‘예전 선조(先朝) 때에 영동 감진 어사(嶺東監賑御史)가 기민도(飢民圖)를 올렸는데 바로 어제시(御製詩)가 있었다. 내가 일찍이 그 그림을 펴 보니 굶어 죽은 자와 쓰러진 자와 허둥지둥 죽을 마시는 자가 눈앞에 있는 듯하였는데, 이제 삼남의 백성도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설진(設賑)한 고을의 백성은 한 해의 적곡(糴穀)을 감면하고 그 다음 가는 것은 반을 감면하라.’ 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종묘(宗廟)의 경종실(景宗室)을 더 세우는 일이 끝났는데, 종신(宗臣)이 상소하기를, ‘태조(太祖)께서 비로소 종묘를 세우셨는데 이제에 이르러서 중건(重建)한 것은 경사이니, 칭경(稱慶)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임금과 신하가 한마음으로 조종(祖宗)의 성헌(成憲)을 삼가 지켜서 깊은 인애(仁愛)와 두터운 은택이 백성의 피부와 골수에 스며 젖게 하는 것이 성대한 행사보다 훨씬 낫다. 어찌하여 칭경하겠는가?’ 하셨다.

추8월(秋八月)에 사간(司諫) 이병태(李秉泰)가 임금의 과실을 가리켜 아뢴 것이 매우 절실하고 정직하였는데, 왕께서 호피(虎皮)를 내려 장려하셨다.

9월에 명하여 고(故) 부제학(副提學) 권변(權忭)에게 증시(贈諡)하게 하셨다. 권변은 숙종 중년(中年)부터 영달하는 길에 대하여 생각을 끊었는데, 사대부들이 그 풍채를 존경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동10월(冬十月)에 경종 대왕(景宗大王)단의 왕후(端懿王后)태묘(太廟)에 부제(祔祭)하였다. 예(禮)가 끝나고 왕께서 돌아와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진하(陳賀)를 받고 세 가지를 백관에게 칙유(飭諭)하셨는데, 첫째는 붕당(朋黨)을 징계하는 것이고 둘째는 사치를 경계하는 것이고 셋째는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었다.

11월에 왕께서 문묘(文廟)에 참배하여 작헌(酌獻)하고 명륜당(明倫堂)에 나아가 친히 선비들을 책시(策試)하고 말씀하기를, ‘내가 나라를 다스릴 인재를 얻어 겉치레만 화려한 풍속을 없애고 문산(文山)078) 의 정충(精忠)을 본받게 하려 하니 각각 실속을 힘써 내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셨다.

3년 정미(丁未) 춘정월(春正月) 왕께서 친히 사직(社稷)에서 기곡(祈穀)하려 할 때에 하교하기를, ‘백성을 위하여 기곡하는데 감히 스스로 안일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재전(齋殿)까지 걸어가시는데, 승지들이 연(輦)을 타시기를 굳이 청하였으나 듣지 않으셨다. 고향에 돌아가 어버이를 뵈려는 유신(儒臣)이 어버이가 앓는다고 휴가를 청하였는데, 왕께서 말씀하기를, ‘참으로 앓는다면 인정이 워낙 그래야 마땅하겠으나, 병이 없는데 병이 있다고 하였다면 임금에게 고하는 것이 성실하지 않을 뿐더러 아들의 도리로서도 어떠하겠는가?’ 하고, 그 말을 여고(予告)로 고치라고 명하셨다.

3월에 경연(經筵)에 특진(特進)하는 무신(武臣)에게 명하여 각각 문의(文義)를 설명하게 하셨다. 이에 앞서 한 무신이 문의를 설명하였다가 승지의 찰추(察推)를 받았는데, 이때부터 특진하는 무신이 서로 경계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므로 이 명이 있었다. 이때 은거하던 어진 선비로서 경연관(經筵官)에 뽑힌 자가 죽었는데, 연신(筵臣)이 증관(贈官)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살았을 때에도 작록(爵祿)으로 매어 두지 않았는데, 죽은 뒤에 어찌하여 반드시 증관해야 하겠는가?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고 본도(本道)를 시켜 상장(喪葬)을 돕게 하라.’ 하셨다.

하5월(夏五月)에 좌의정(左議政) 홍치중(洪致中)이 경외(京外)의 전화(錢貨)가 다하였다 하여 돈을 주조(鑄造)하여 보태기를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돈을 주조하는 폐단은 돈이 귀한 것보다 훨씬 더하다.’ 하고 끝내 윤허하지 않으셨다.

4년 무신(戊申) 춘3월(春三月)에 영남(嶺南)의 역적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 등이 모반하였는데, 왕사(王師)가 물리쳐 평정하였다. 이에 앞서 역적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이 처형되고 박필몽(朴弼夢) 등 여러 역적이 죄다 위리 안치(圍籬安置)되었으므로, 그 무리가 스스로 역절(逆節)이 천지 사이에 용납되기 어려움을 헤아리고 박필몽의 종부제(從父弟) 박필현(朴弼顯)김일경의 아들 김영해(金寧海)목호룡의 형 목시룡(睦時龍) 등과, 김일경·박필몽의 심복인 심유현(沈維賢)기사년079) 에 죄로 죽은 사람 민종도(閔宗道)·이의징(李義徵)의 아들·손자 및 실지(失志)하여 나라를 원망하는 자와 체결하고 흉언(凶言)을 터무니없이 떠벌리어 인심을 속여 현혹하였다. 그리고 이인좌·정희량을 추대하여 원수(元帥)로 삼고 이유익(李有翼)·이하(李河)를 모주(謀主)로 삼고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사성(李思晟)관서(關西)에서 앞장서 난을 일으키고 총융사(摠戎使) 김중기(金重器)·금군 별장(禁軍別將) 남태징(南泰徵)은 안에서 화응(和應)하기로 약속하고 이달 20일에 서울을 침범하여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을 추대하려고 뱀·지렁이처럼 모여 얽혀서 화를 빚은 지 자못 오래 되었으나 조정에서는 까마득히 몰랐다.

이때에 이르러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용인(龍仁)에 물러가 사는 중에 이웃 사람 안박(安鑮)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적정(賊情)을 알고 급히 달려 들어와 고하고 수원 부사(水原府使) 송진명(宋眞明)이 이어서 또 상변(上變)한 사람을 형틀을 채워 압송하였다. 왕께서 곧 명하여 병조 판서(兵曹判書) 오명항(吳命恒)을 사도 도순무사(四道都巡撫使)로 삼고 박문수(朴文秀)·조현명(趙顯命)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아 보좌하여 경영(京營)의 군사를 거느리고 안성(安城)·죽산(竹山)을 따라 남으로 내려가 문죄(問罪)하게 하고, 이여적(李汝迪)·박동추(朴東樞)를 계원장(繼援將)으로 삼아 경영의 군사와 개성(開城)의 마군(馬軍)을 거느리고 도순무의 후원이 되게 하고, 장붕익(張鵬翼)을 진어 대장(鎭禦大將)으로 삼아 북한성(北漢城) 아래에 진쳐서 서우(西憂)를 막게 하였다가 곧 김중기를 갈음하여 총융사를 삼아 수원에 출진(出鎭)하게 하였다. 정찬술(鄭纘述)을 포도 대장(捕盜大將)으로 삼고 이정제(李廷濟)를 경기 감사(京畿監司)로 삼아 한강 동작진(銅雀津)을 방수(防守)하게 하고, 김동필(金東弼)을 경략사(經略使)로 삼아 개성부(開城府)남한(南漢)의 군사를 나누어 용인 등 여러 요로(要路)를 차단하게 하였다. 유척기(兪拓基)를 양주 목사 겸 동로 진어사(楊州牧使兼東路鎭禦使)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고암(鼓巖)에 나아가 지키게 하고, 김재로(金在魯)를 충추 목사 겸 호서 안무사(忠州牧使兼湖西安撫使)로 삼아 조령(鳥嶺) 등 요처를 제압하게 하였다. 권업(權𢢜)으로 권첨(權詹)을 갈음하여 충청 감사(忠淸監司)로 삼고 이광덕(李匡德)으로 정사효(鄭思孝)를 갈음하여 전라 감사(全羅監司)로 삼고 황해 감사(黃海監司) 김시혁(金始㷜)이 3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동선령(洞仙嶺)을 막아 지키게 하고, 병사(兵使) 원백규(元百揆)가 친기위(親騎衛) 3백 인을 거느리고 청석령(靑石嶺)을 막아 지키게 하였다가 이사성이 잡힌 뒤에 군사를 파환(罷還)하게 하였다. 박사수(朴師洙)를 영남 안무사(嶺南安撫使)로 삼아 안동(安東) 등 좌도(左道)를 돌아다니며 위유(慰諭)하고 소모(召募)하게 하고, 윤순(尹淳)을 감호 제군사(監護諸軍使)로 삼아 영애(嶺隘)를 살피고 군사를 나누어 방수하게 하고, 송인명(宋寅明)을 대사간 비국 제조(大司諫備局提調)로 삼아 금중(禁中)에 있으면서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다 왕께서 뭇 방책을 수합하여 결단하고 기회를 타서 승리를 취하되 털 하나가 끼어들 틈이 없게 하셨으므로 나라 사람이 의지하여 편안하였다. 왕사(王師)가 미처 떠나기 전에 적이 밤에 충청 병영(忠淸兵營)에 들어가 병사(兵使) 이봉상(李鳳祥)을 죽였다. 그래서 영장(營將) 남연년(南延年)이봉상의 편비(褊裨) 홍임(洪霖)이 적을 욕하며 굽히지 않고 죽었는데, 왕께서 남연년을 사나운 바람에도 쏠리지 않는 굳센 풀이라고 칭찬하였다. 곧 명하여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증직(贈職)하고 그 여문(閭門)에 정표(旌表)080) 하고 이봉상의 아들 이한필(李漢弼)남연년의 아들 남덕하(南德夏)기복(起復)081) 하고 그 품계(品階)를 올려 종군(從軍)하여 원수를 갚게 하시니, 사람들이 다 떨쳐 일어나 힘쓰려고 생각하였다.

왕께서 일찍이 장전(帳殿)에 나아가 수인(囚人)을 국문(鞫問)하실 때에 좌우를 물리고 송인명(宋寅明)을 불러 비밀히 말씀하기를, ‘아까 수인이 이사성을 끌어댔을 때에 시위(侍衛)하던 선전관(宣傳官) 이사필(李思弼)이 황급히 나갔는데, 이 자는 이사성에게 무슨 관계가 되는 자인가?’ 하시매, 대답하기를, ‘종부제(從父弟)입니다.’ 하였다. 이날 저녁에 궐직(闕直)하였기 때문에 이사필을 잡아 가두고 이사성이 처형되기에 이르러 이사필을 군전(軍前)에 효시(梟示)하였다. 이사성은 평소에 재주가 있다고 일컬어졌으므로 조정에서 금오랑(金吾郞)을 보내어 잡게 하고 나서도 변이 있을세라 의심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관서의 수령(守令)이 이사성이 제집에 보낸 글을 올렸는데, 모두 잗달고 부녀(婦女)에 관한 말이었다. 왕께서 기뻐하며 ‘걱정 없다.’ 하셨는데, 말씀이 끝나기 전에 금오랑이 이사성을 잡아서 이르렀다. 무릇 왕께서 시기에 알맞게 헤아리시는 것이 흔히 이러하였으므로 군사(軍事)를 조치하는 데에 빠뜨리시는 것이 없었다. 왕사가 안성·죽산에 이르러 적을 만나 마른 나무를 꺾고 무너진 것을 당겨 쓰러뜨리듯이 한 번 북을 쳐 사기를 떨쳐서 죄다 섬멸하고 적의 괴수 이인좌 등을 함거(檻車)에 실어 서울로 보냈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황선(黃璿)이 격문(檄文)을 보내어 성주 목사(星州牧使) 이보혁(李普赫)을 우방장(右防將)으로 삼아 군사를 경계하여 합천군(陜川郡)에 들어가 적병을 엄습하여 공격하게 하여 참획(斬獲)이 매우 많았고, 선산 부사(善山府使) 박필건(朴弼健)을 좌방장(左防將)으로 삼고 곤양 군수(昆陽郡守) 우하형(禹夏亨)이 군사를 거느리고 박필건의 군사에 속하여 우지령(牛旨嶺)에 웅거하게 하여 적의 우두머리 정희량·이웅보(李熊輔)의 머리를 베었으므로, 여러 적이 멀리서 바라보고 절로 무너졌다.

그래서 흉역(凶逆)이 죄다 평정되니 드디어 명하여 파병(罷兵)하고 귀농(歸農)하게 하셨다. 오명항이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오니, 왕께서 남문루(南門樓)에 나아가 헌괵(獻馘)을 받고 차등을 두어 논공(論功)하였으니 운대(雲臺)082) 에 초상을 그리고 철권(鐵券)083) 을 내려 주었다. 이어서 시위(侍衛)하는 장사(將士)에게 하유(下諭)하기를, ‘너희들 중에 친속이 흉역이거나 오래 사귄 친구가 흉역인 자가 있더라도 그 모의를 몰랐으니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생각을 품지 말라. 내가 덕이 부족할지라도 어찌 면유(面諭)하고서 어기겠는가?’ 하시매, 장사가 모두 느껴 울었다. 이달 왕께서 세자와 함께 숙빈(淑嬪)의 묘(廟)에 참배하셨을 때에, 잠저(潛邸)에서 부리던 가까이 모신 구사(丘史)가 묘 안에서 잠시 뵙고 문안드리려 하였다. 그런데, 홍문관(弘文館)에서 상차(上箚)하기를 ‘예(禮)에 어그러지게 뵈는 것을 동궁(東宮)에게 보여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니, 왕께서 칭찬하고 곧 명하여 진문(陣門) 밖으로 몰아 내게 하셨다.

추9월(秋九月) 왕께서 정릉(靖陵)에 거둥하실 때에 길을 치느라 백성의 무덤을 무너뜨리는 것을 보고 왕께서 노하여 말씀하기를, ‘백성이 국법을 업신여기고 임금이 다니는 길가에 장사지내는 것은 죄이다. 그러나 백성의 무덤을 무너뜨리는 것이 어찌 임금의 정치이겠는가?’ 하고, 드디어 지방관(地方官)에게 벌을 내렸다. 이때 대풍(大豊)이 들었으므로 대왕 대비와 왕대비께 진연(進宴)하고 나이가 여든 이상인 조정의 신하와 나이가 아흔 이상인 서민에게 술·쌀과 어육(魚肉)을 차등을 두어 내리셨다.

동10월(冬十月)에 왕께서 장차 대향(大享)을 친히 행하려 하는데 마침 편찮으시고 날씨도 매우 추우므로 대신이 대행(代行)을 청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예전에 명나라 인종 황제(仁宗皇帝)가 병을 견디고 친향(親享)하였는데 땀이 옷에 배고 병이 나았다 하니 또한 본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마침내 친향하셨다. 그런데 신관(晨祼)부터 망예(望瘞)084) 까지 정성스러움과 공경스러움이 애연(藹然)하여 승강(昇降)하고 보추(步趨)하시는 것을 바라보면 신(神)과 같았다.

5년 기유(己酉) 춘정월(春正月)에 하교하여 농사를 권하고 수령(守令)에게 신칙(申飭)하여 백성에게 종자와 양식을 도와 주게 하셨는데, 해마다 상례(常例)로 삼았다. 왕께서 바야흐로 은거하여 있는 어진 선비를 부르려 하시는데, 한 간관(諫官)이 은례(恩禮)가 너무 지나침을 말하니, 왕께서 노하여 말씀하기를, ‘이것은 임금이 은거하여 있는 어진 선비를 경시하는 마음을 열어 주는 것이다.’ 하고 드디어 벌을 내렸다. 이때 왕께서 양역(良役)의 폐단을 바로잡는 일에 마음을 단단히 쓰셨는데, 일을 맡은 자가 경용(經用)을 채울 길이 없는 것을 괴로워하니, 왕께서 하교하기를, ‘신하들은 나에게 천박하지 않기를 바라는데, 내 정사는 오히려 느슨하다. 또 한 문제(漢文帝)가 전조(田租)의 반을 줄여 준 것이 전후에 잇달았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절약하였기 때문이다. 나라에 참으로 여유가 있다면 한 백성에게 두 필(匹)인들 어찌 감면하기 어렵겠는가? 궁전(宮田) 중에서 정제(定制) 이외에 면세된 것은 모두 세를 내게 하고 각 아문(衙門)·서원(書院)의 위전(位田)085) 도 이와 같이 하라.’ 하셨다. 이윽고 정신(廷臣)에게 하유하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궁중에서 고계(高髻)086) 를 좋아하면 사방에서는 높이가 한 자가 된다.」 하였으니, 본뜨는 선례가 있다. 예전에 우리 선조(宣祖)께서는 이불과 바지가 다 목면포(木綿布)이었으므로 궁중에서 아름다운 일로 전해 온다. 나는 본디 화사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또 성조(聖祖)를 본받으므로 상방(尙方)을 시켜 흑포립(黑布笠)을 짓게 하였다. 대저 금주(金珠)·금수(錦繡)는 우리 나라의 재화가 아닌데 나라 풍속이 이처럼 좋아하니, 어찌 황금이 흙 값과 같게 할 수 있겠는가? 늙은 신하는 그만이겠으나, 나이 젊은 신하는 뒷날에 반드시 내 뜻이 조금 펴진 것을 볼 것이다.’ 하시매, 우의정(右議政) 이태좌(李台佐)가 말하기를, ‘공자(孔子)가 「천승(千乘)의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한다.」 한 것이 이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한 가지 선정(善政)을 행하고 내일 한 가지 선정을 행하면 비운(否運)을 태운(泰運)으로 돌리기가 어찌 어렵겠습니까? 다만 앞으로 나가는 데 날랜 자는 뒤로 물러나는 데도 빠르니, 이것도 성심(聖心)이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착하다. 내가 동궁에 있을 때에 궁료(宮僚)가 경계를 아뢰면 듣기 싫어한 적이 없거니와, 경의 말이 내 병통을 절실히 맞혔으니, 마음에 두고 잊지 않겠다.’ 하셨다.

3월에 조정에서 무신년의 난을 겪은 지 얼마 안되었으므로 모든 흉역(凶逆)의 근족(近族)을 직임에 거의(擧擬)하지 않으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진(晉)나라의 왕도(王導)왕돈(王敦)의 근족이 아니었는가? 이전에 죄인의 공초에 이름이 나온 자는 흑백을 가려 석방하라. 더구나 국법이 죄를 연좌하지 않는데도 여러 비슷한 죄목 속에 놓은 것은 왕정(王政)에 어그러지니, 이제부터 등용하라.’ 하셨다.

하4월(夏四月) 왕께서 친히 종묘의 하향(夏享)을 행하실 때에 재전(齋殿)에 들어가 하교하기를, ‘경외(京外)의 백성이 다 조종(祖宗)의 백성이나, 서울 백성은 경작하지 않고 양잠(養蠶)하지 않으므로 부모를 섬기고 처자를 기르는 데에는 다 공미(貢米)에 의지하고 있다. 그런데 유사(有司)인 자가 내가 임문(臨門)하고 주교(駐橋)하여 하유한 것을 본받지 않고 한갓 비용을 아끼려고 마음먹으니, 어찌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 데에 미치는 도리이겠는가? 유사에 신칙하여 내가 태묘(太廟)에 들어가 느낌을 일으킨 것을 저버리지 말게 하고 또한 팔도(八道)·양도(兩都)로 하여금 첫봄에 하교한 것을 성실히 따르게 하라.’ 하셨다.

5월에 호조(戶曹)에서 북관(北關)에 은광(銀礦)을 설치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당(唐)나라 어사(御史) 권만기(權萬紀)가 은을 캐기를 청하니 태종(太宗)이 「수백만 민(緡)을 많이 얻는 것이 어찌 한 어진 인재를 얻는 것만 하겠느냐?」고 하였으니, 제왕의 체모가 있다 하겠다. 그만두어서 예전에 당 태종 만이 아름다움을 독차지하게 하지 말라.’ 하셨다.

추9월(秋九月) 탄일(誕日)에 유신(儒臣)이 《금감록(金鑑錄)》을 본떠 경계를 아뢰니, 왕께서 《근사록(近思錄)》을 내려서 상주셨다.

12월에 숙종(肅宗)의 묘(廟)를 받들어 세실(世室)에 들였는데, 시임(時任)·원임(原任)인 대신들의 청을 따른 것이다. 6년 경술(庚戌)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동국통감(東國通鑑)》을 강독(講讀)하셨는데, 연신(筵臣)에게 말씀하기를, ‘공자《춘추(春秋)》를 짓되 반드시 천자(天子)를 높인 것은 임금은 임금의 도리를 다하고 신하는 신하의 도리를 다하는 의리를 바르게 하기 위한 것이다. 고려(高麗)는 일찍이 송(宋)을 신하로서 섬겼으니, 휘종(徽宗)·흠종(欽宗)의 이름을 국사(國史)에 직서(直書)한 것이 옳겠는가? 우리 나라는 효묘(孝廟)·성고(聖考)께서 존주(尊周)하신 이후로 한 모퉁이에 있는 청구(靑丘)만이 대명 일월(大明日月)을 보전하였으니, 너희들은 선조(先朝)의 대의(大義)를 잊지 말라.’ 하셨다. 이에 앞서 찬집청(纂輯廳)을 설치하고 대제학(大提學) 이덕수(李德壽)에게 명하여 《숙묘보감(肅廟寶鑑)》을 짓게 하셨는데, 이때에 이르러 올리니, 왕께서 여러 번 느껴 울며 계술(繼述)을 잘할 것을 스스로 힘쓰셨다.

2월 왕께서 장차 영릉(寧陵)에 거둥하시려 할 때에 여주(驪州)·이천(利川) 사이에 이따금 여기(癘氣)가 있었다. 그러나 뭇 신하가 여기를 말하면 임금의 마음을 편하게 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드디어 다른 일을 핑계하여 홍문관(弘文館)에서 차자를 올려 말리니, 왕께서 꾸짖기를, ‘너희들은 성현의 글을 읽었고 벼슬이 경악(經幄)에 있는데 부인네가 꺼리는 것으로 임금에게 권하니, 내가 부끄럽게 여긴다.’ 하셨다. 대신과 삼사(三司)와 2품(品) 이상이 서로 따라서 힘껏 다투었으나, 왕께서 끝내 듣지 않으시고, 지나는 길에서 경작하는 백성에게 신칙하여 다들 파식(播植)을 그치지 말게 하며 말씀하기를, ‘이 또한 경작을 시찰하는 뜻이다.’ 하셨다. 회란(回鑾) 때에 광주(廣州)에 이르러 서장대(西將臺)에 올라 성조(聖祖)의 지사(志事)를 느끼고 부앙(俯仰)하며 크게 탄식하셨다.

3월에 나홍언(羅弘彦)이 폐출(廢黜)된 종실(宗室) 이해(李垓)이기(李圻)를 추대하려고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경신년087) 에 죄로 죽은 반역한 종실 이정(李楨)이남(李枏)의 종손(從孫)이고 기사년088) 에 죄로 죽은 사람 민취도(閔就道)의 외손(外孫)이며, 나홍언무신년089) 의 역적 나숭곤(羅崇坤)·나숭대(羅崇大)의 친속이고 역적 정사효(鄭思孝)우서(友壻)090) 이다. 《삼강행실(三綱行實)》·《이륜행실(二倫行實)》 등 서적을 팔도에 반포하고 명하여 인쇄하여 널리 펴서 백성이 보고 느끼게 하라 하셨는데, 두 서적은 다 세종(世宗) 때에 지은 것이다. 이때 북관(北關)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어사(御史)를 보내어 진정(賑政)을 살피게 하고 또 독운 어사(督運御史)를 영남(嶺南)에 보내어 포항창(浦項倉)의 곡물을 도련포(都連浦)로 날라 바닷길로 가서 구제하게 하고 태복(太僕)091) 의 목장 중에서 일굴 만한 땅은 백성에게 일구도록 허가하셨다. 그래서 북관의 백성이 한 사람도 버려져 야위지 않았다.

하5월(夏五月)에 왕께서 《숙묘보감》을 보다가 숭인전(崇仁殿)·무열사(武烈祠)에 치제(致祭)하였다는 글에 이르러 감탄하여 말씀하기를, ‘우리 동방이 오랑캐의 풍속을 면한 것은 기자(箕子)의 팔조(八條)가 있는 데에 힘입은 것인데, 보록(寶錄)이 아니면 잊을 뻔하였다.’ 하고, 드디어 예관(禮官)을 보내어 숭인전·무열사에 치제하게 하고 곧 명하여 악 무목(岳武穆)092)《정충록(精忠錄)》을 구입하여 바치게 하셨다. 이에 앞서 무신년의 역적 최필웅(崔必雄)이 망명하였다가 환관(宦官)에게 잡혀서 바쳐졌는데, 왕께서 환관에게 상주되 녹훈(錄勳)은 윤허하지 않으셨다. 이때에 이르러 연신(筵臣)이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중관(中官)을 책훈(策勳)하는 것은 그 버릇을 길게 할 수 없다.’ 하고, 끝내 윤허하지 않으셨다.

6월에 선의 왕후(宣懿王后) 어씨(魚氏)께서 훙서(薨逝)하시니, 왕께서 갑진년093) 과 마찬가지로 거상(居喪)하셨다. 대왕 대비(大王大妃)께서 지나친 예(禮)라 하시고 대신(大臣)·중신(重臣)도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역대의 임금을 두루 보면 능히 계체(繼體)가 중하다는 것을 아는 자가 드물다. 내가 이렇게 하는 까닭은 후왕(後王)이 계체가 중하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하셨다.

7년 신해(辛亥) 춘3월(春三月)에 왕께서 《주례(周禮)》를 강독(講讀)하다가 사구(司寇)는 방금(邦禁)을 맡는다는 글에 이르러 말씀하기를, ‘금(禁)이라는 것은 미연에 막는 것이다. 이제 추조(秋曹)094) ·경조(京兆)095) ·백부(柏府)096) 에서 수속(收贖)만을 힘쓰고 범하는 자가 많지 않을세라 염려하니, 방금을 설치한 것이 참으로 그런 것이겠는가? 신칙하라.’ 하셨다.

하5월(夏五月)에 가물었으므로 왕께서 남교(南郊)·북교(北郊)에서 두루 기도하매 문득 비가 내렸으나 줄기차지 않으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아! 또 흉년이 들겠으니 진휼(賑恤)할 방도를 의논하라.’ 하셨다. 대신이 돈을 주조하여 경비를 대충하고 그 곡물을 저축하였다가 진휼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그렇지 않다. 곡물은 관가에 있지 않으면 백성에게 있는 것이다. 굶주린 뒤에 진휼하는 것이 어찌 미리 백성에게 흩어 주어 백성이 굶주리지 않게 하는 것만 하겠는가? 백성이 넉넉하면 임금이 누구와 함께 넉넉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이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하시매, 신하들이 다 머리를 조아리고 칭선(稱善)하였다.

추8월(秋八月)에 장릉(長陵)교하(交河)에 옮겼다. 이에 앞서 옛 장릉에 뱀·살무사가 많다는 말이 있으므로 왕께서 대신에게 명하여 살펴보게 하였더니 과연 그러하므로 왕께서 드디어 옮기기로 뜻을 정하였다. 옮기는 날에 구릉(舊陵)에 거둥하셨다가 신릉(新陵)에 따라가 크고 작은 일들을 몸소 감독하시고, 일을 마치고 나서 하교하기를, ‘백성이 노고하였다. 백성의 부모가 되어 어찌 사냥이 아닌데 백성이 감히 노고를 말하라 할 수 있겠는가? 교하(交河)·파주(坡州)·양주(楊州)·고양(高陽) 네 고을 백성의 공세(貢稅)·조포(調布)는 반을 줄이고 우졸(郵卒)은 묘당(廟堂)을 시켜 은혜를 베풀게 하라.’ 하셨다. 당초 구릉의 송백(松柏)은 다 효묘(孝廟)께서 손수 심으신 것인데, 왕께서 그 종자를 가져다 손수 신릉에 부리고 말씀하기를, ‘내가 영릉(寧陵)의 손때를 느낀 것처럼 내 자손이 내 손때를 느끼게 하려는 것이다.’ 하셨다.

9월에 연신(筵臣)이 《오례의(五禮儀)》에 탄일(誕日)의 진하(陳賀)가 있는데 왕께서 탄일의 진하를 받지 않는 것은 지나치다고 말하니, 왕께서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정자(程子)가 「부모가 없는 사람은 생일에 슬픔이 훨씬 더할 것이라.」 하였다. 내가 세종 성조(世宗聖祖) 때와 같을 수 있다면 어찌 진하를 사양하겠는가? 동궁에 있을 때에는 사양하고 오늘날에는 받는 것이 옳겠는가?’ 하고, 끝내 따르지 않으셨다. 이에 앞서 경연관(經筵官) 양득중(梁得中)을 불러서 이르렀는데, 거지(擧止)가 촌스럽고 대답하는 것이 매우 데면데면하여 쓰기에 맞지 않으므로 연신(筵臣)이 다 웃었으나, 왕께서 후하게 예우하여 보내셨다. 이때에 이르러 연신이 다시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산야(山野)의 사람은 이러한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 없다. 귀하게 여겨야 하고 소홀히 여겨서는 안된다. 소홀히 하면 아마 다른 사람들이 오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셨으므로, 왕의 치세를 마칠 때까지 한번도 그 흉을 말하지 않았다. 동12월(冬十二月)에 삼복(三覆)을 행하였는데, 하교하기를, ‘당 태종(唐太宗)은 범상한 임금이지만 정관(貞觀) 동안에 옥이 비어 까치가 나무에 집을 지었는데, 과인(寡人)은 임어(臨御)한 지 7년이 되어도 덕행(德行)으로 교화를 베푼 것이 없어서 경외(京外)의 여수(慮囚)는 그 수가 열이 넘으니, 거의 덕화(德化)가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여 그런 것이다. 아! 방백(方伯)은 나의 부덕(否德)을 말하지 말고 선화(宣化)를 삼가 힘쓰고 신유(申諭)를 공경히 하라.’ 하셨다.

8년 임자(壬子) 춘정월(春正月)에 명하여 숭령전(崇靈殿)·숭덕전(崇德殿)을 수리하고 근신(近臣)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전조(前朝) 왕씨(王氏)의 후손을 등용하게 하셨다. 숭령전단군(檀君)의 사당이고 숭덕전(崇德殿)096) 은 고려 왕의 사당이다. 이때 5도(道)에 큰 흉년이 들었으므로 왕께서 여러 번 묘당에 신칙하여 진휼을 의논하게 하셨으나 오래도록 좋은 계책을 얻지 못하니, 왕께서 꾸짖기를, ‘경들이 백성을 내 형제 자매라고 생각하고 모든 백성을 위한 정사를 늘 학문하는 선비처럼 의심 없는 것은 의심을 두고 의심 있는 것은 의심을 없앤다면 어찌 구제하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이제 이처럼 세월만 보내니, 슬픈 우리 백성만 아래에서 괴로움을 받는다.’ 하시매, 뭇 신하가 다 부끄러워하고 빌었다. 이때에 이르러 5도를 진휼하는데 유사(有司)가 죽을 만들어 서울 백성을 먹이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건량(乾糧)을 주어서 돌아가 처자와 같이하게 하라.’ 하셨다.

3월에 삼남(三南)에 신칙하여 길에 있는 굶어 죽은 주검을 관가에서 거두어 묻게 하셨다.

하4월(夏四月) 왕께서 차대(次對)를 행하셨을 때에 신하들이 진휼을 의논하면서 다투어 마지않음을 대간(臺諫)이 말하니, 왕께서 조용히 말씀하기를, ‘천지가 서로 통하고서야 만물이 이루어지고 상하가 서로 믿고서야 모든 일이 다스려진다. 진 시황(秦始皇)은 주(周)나라 말기의 무너지고 느슨해진 것을 징계함에 형법(刑法)으로 바로잡았으나 뭇 신하가 죽음을 면하는 데에도 여유가 없었으니, 어느 겨를에 서로 믿겠는가? 화기(和氣)가 없어 상하가 원망하고 어그러졌으므로 2세(二世)에 이르러 망하였다. 한 고조(漢高祖)는 진나라의 가혹한 법을 징계하여 너그럽고 간약한 것으로 구제하였기 때문에 조의(朝儀)가 엄하지 않아서 검(劍)으로 기둥을 치는 자까지 있었으니, 숙손통(叔孫通)이 예를 제정하게 되어서야 황제가 귀한 줄 비로소 알았다 하였다. 진(晉)·당(唐)부터 아조(我朝)까지는 다 문식(文飾)이 실질보다 나았거니와, 지금에 이르러서는 임금과 신하 사이가 거의 막혔으므로, 내가 여유 있는 것을 덜어서 모자라는 것을 채우려 하니, 이는 굽은 것을 바로잡다가 바른 데를 지나치는 폐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신(臺臣)이 차대에 같이 들어오는 것은 자리만 갖추려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규찰(糾察)을 겸하는 것이니, 이제부터 일에 따라 살펴서 드러내라.’ 하셨다.

5월에 변무 주청사(辨誣奏請使)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 등이 연경(燕京)에서 돌아와 새로 수찬한 《명사(明史)》를 바쳤다. 이에 앞서 국조(國朝)의 종계(宗系)에 관한 일과 태조(太祖)의 득국(得國)에 관한 일과 인조(仁祖)의 등극(登極)에 관한 일이 전문(傳聞)이 잘못되어 다 《대명회전(大明會典)》 등 서적에 잘못 적혔으므로 열조(列朝)에서 여러 번 사신을 보내어 거짓을 밝히게 하였으나 죄다 바로잡히지 못하였다. 왕 7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청나라에서 강희(康熙)097) 말년부터 왕홍서(王鴻緖)에게 명하여 《명사》의 열전(列傳)을 수찬하게 하였는데, 미처 일을 끝내지 못하고 왕홍서가 죽으매 장정옥(張廷玉)·서건학(徐乾學) 등을 시켜 천하의 학문 있는 선비를 모아 본기(本紀)와 여러 지(志)를 이어서 수찬하게 하여 30여 년이 걸려서 이때에 이르러 끝나간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아! 이 기회를 넘기면 후회하더라도 어찌 미치겠는가? 빨리 이탱 등을 보내어 주청하게 하라.’ 하셨는데, 이탱 등이 돌아오기에 이르러서는 모든 거짓이 신사(新史)에서 죄다 밝혀졌다. 명하여 강화부(江華府)에 쌀 1천 석을 주어 조적(糶糴)하여 모곡(耗穀)을 취하여 천총(千摠)·파총(把摠) 이하의 사예(射藝)를 겨루고 상격(賞格)에 쓰는 비용으로 삼게 하셨다. 유수(留守) 윤유(尹游)의 청을 따른 것이다.

윤5월(閏五月)에 왕께서, 친히 ‘성묘를 높이고 사습을 바르게 하고 성실을 힘쓴다[尊聖廟 正士習 務誠實]’는 아홉 자를 쓰고 다시 윤음(綸音) 30줄을 만들어 근신(近臣)에게 명하여 태학(太學)의 유생(儒生)들에게 선유(宣諭)하고 또 선찬(宣饌)하게 하시니, 이튿날 태학의 유생들이 전문(箋文)을 올려 사례하였다. 드디어 명하여 대사성(大司成)을 구임(久任)시켜 성효(成效)를 책임지우셨다.

6월에 가물었으므로 왕께서 친히 사직(社稷)과 북교(北郊)에서 기도하셨으나 비가 내리지 않으니, 하교하기를, ‘해마다 잇달아 크게 가물어 백성이 장차 다 죽게 되었으니, 감선(減膳)만으로 어찌 자신을 책망하는 도리를 다할 수 있겠는가? 예전 진(晉)나라가 크게 가물었을 때에 현자(縣子)가 대답한 것이 재앙을 물리치는 요령을 얻게 되었거니와, 사흘 동안 천시(遷市)하라.’ 하셨다.

동10월(冬十月) 얇은 옷을 입은 상번(上番) 군사에게 동옷[襦衣]을 지어 주라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시고, 지나는 고을의 부호(富戶)가 나타나는 대로 들어가 있게 하여 거리에서 얼고 굶주리지 않게 하라고 신칙하였다.

11월에 경기·삼남(三南)·영동(嶺東) 백성에게 미조(米租) 4만 5천 석을 내리고 부역과 공물 반년분을 줄이고 적모곡(糴耗穀)을 죄다 감면하고, 하교하기를,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서 왕이 되면 이를 막을 수 없다고 맹자(孟子)가 말하였거니와, 지금의 백성은 우리 조종의 백성인데, 더구나 성고(聖考)께서 백성을 돌보신 성의(盛意)는 내가 평소에 보고 들은 것임에랴? 해마다 잇달아 기근이 들어 저축이 없으나, 백성이 죄다 죽으면 곡물이 억만 섬 있더라도 어디에 쓰겠는가?’ 하였다. 드디어 어사(御史)를 나누어 보내어 진정(賑政)을 살피고 선유(宣諭)하며 또 문무(文武)의 재능이 있는 자와 은거(隱居)하여 평소의 뜻을 지키는 선비를 찾게 하셨다.

9년 계축(癸丑)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하교하여 조정에 신칙(申飭)하여 정신을 모으고 재능 있는 자를 등용하고 옛날의 버릇을 버리고 본연의 공정을 넓혀서 해와 함께 모두 새로워지게 하셨다.

2월에 왕께서 시학(視學)하셨다. 당초에 문묘(文廟)에 작헌(酌獻)할 것을 명하셨는데, 우의정(右議政) 김흥경(金興慶)이 차자를 올리기를, ‘문묘에 작헌하면 으레 시사(試士)해야 하니 흉년에 행할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왕께서 답하기를, ‘한 고조(漢高祖)가 개창(開創)한 처음에 태뢰(太牢)로 선성(先聖)을 제사하였고, 우리 성조(聖祖)께서 용만(龍灣)098) 에서 회란(回鑾)하여 땅을 쓸고 제단을 만들어 맨 먼저 선성을 제사하셨다. 이제 국가에 일이 많았고 또 삼년(三年)이 겨우 끝났는데 이 예(禮)를 버려둔 것은 8년이나 되었으니, 내 마음이 불만스럽지 않겠는가? 그러나 비용을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은 선성이 가르친 것인데, 이제 선성의 가르침을 어기면서 선성을 뵐 수도 없고 시사하는 비용 때문에 선성을 뵙지 않을 수도 없으니, 한결같이 《오례의(五禮儀)》의 시학례(視學禮)에 따르되, 술을 바치고 찬선(饌膳)을 바치는 것을 그만두어 간략하게 예를 행하고, 작헌하고 시사하는 예는 오는 가을로 물리라.’ 하셨다. 왕께서 드디어 문묘에 이르러 친히 선성께 잔을 올리고 물러나 명륜당(明倫堂)에 나아가 《주례(周禮)》에 익숙한 조사(朝士)를 강서관(講書官)에 채우고 한 경서(經書)에 능통한 유생들과 함께 다 각각 진강(進講)하고 문의(文義)를 토론하게 하고 장의(掌議) 두 사람에게 《중용(中庸)》을 각각 한 부씩 내리셨다.

하4월(夏四月)에 왕께서 노심(勞心)하고 백성을 근심하여 감선(減膳)한 것이 오래 되었는데도 오래도록 회복하지 않으시므로 유사가 말하니, 왕께서 슬피 말씀하기를, ‘내가 좋은 음식을 대하면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여 좋은 음식을 굶주린 백성에게 두루 먹이고 싶으나 그럴 수 없는데, 더구나 문득 복선(復膳)을 의논할 수 있겠는가? 동지사(冬至使)가 가져온 문단(紋緞)을 죄다 진청(賑廳)에 내려 진자(賑資)에 보태라.’ 하셨다. 유사가 백관(百官)·군병(軍兵)의 녹(祿)을 줄이고 쌀 대신 조를 주기를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잇단 기근은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인데 차마 혼자 좋은 음식을 누릴 수 있겠는가?’ 하고 어공(御供)의 5분의 1을 줄이라고 명하시고, 연신(筵臣)을 돌아보고 말씀하기를, ‘이 백성은 조종께서 지성으로 사랑하고 돌보신 백성인데, 내가 조종께서 이 백성을 편안하게 하신 것을 본받지 못하니, 후세에서 나를 어떤 임금으로 여기겠는가?’ 하셨다. 그래서 일을 맡은 자도 감히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5월에 왕께서 소대(召對)하여 연신에게 말씀하기를, ‘임금과 신하 사이는 벗 사이와 다르거니와, 벗 사이에도 선행을 요구하기 어려운데, 더구나 임금이겠는가? 부열(傅說)고종(高宗)에게 경계하기를, 「네 마음에 맞는 진언(進言)이 있거든 도리에 어그러지는 것이 아닌지 살펴보고 네 마음에 거슬리는 진언이 있거든 도리에 맞는 것이 아닌지 살펴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임금이 진언을 듣는 요령이다. 내가 신하들의 진언에 강개하고 격렬한 것이 있으면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없지는 않으나, 일이 지난 뒤에 평온한 마음으로 생각하면 아닌게아니라 개연(慨然)히 유감스럽고 부끄러워진다.’ 하셨다.

또 일찍이 주강(晝講) 때에 문의(文義)에 따라 하교하기를, ‘예전에 제영(緹縈) 이, 「죽은 자는 다시 살 수 없고 형(刑)을 받은 자는 다시 이어질 수 없다.」고 하였는데, 천년 뒤에도 그 말이 오히려 사람을 슬프고 상심되게 한다. 강학(講學)하는 도리는 옛일을 거울삼아 오늘의 일을 경계해야 하는 것인데, 토포영(討捕營)에서 도둑을 다스릴 때에 오로지 엄하고 혹독한 것을 숭상하여 이따금 옥석(玉石)을 가리지 않고 함께 불사르므로 접때 여러 번 경계하였으나 요즈음 다시 구습에 따라 잘못을 되밟으니, 아마 영장(營將)이 될 사람을 가리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서전(西銓)099) 에 하유(下諭)하여 이제부터는 반드시 영장을 지낸 뒤에야 곤수(閫帥)에 의망(擬望)하게 하고 무릇 토포영에서 승복(承服)받은 무리는 경포청(京捕廳)에서 추조(秋曹)로 이송(移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순영(巡營)에 보내어 자세히 캐어 물어서 처결하게 하고 그대로 항령(恒令)으로 삼으라.’ 하셨다. 마침 국옥(鞫獄)이 있어서, 왕께서 친림(親臨)하여 죄수를 신문하셨는데, 안옥(按獄)하는 신하가 포청(捕廳)을 시켜 먼저 죄인을 신문하여 실정을 알아낸 뒤에 금오(金吾)에 올리게 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처음에는 망설이셨는데, 안옥하는 신하가 굳이 청하니, 왕께서 마지못하여 따르셨다. 조금 뒤에 뉘우쳐 말씀하기를, ‘옥사(獄事)에는 체례(體例)가 있어 죄인은 추조에서 신문하여 금오에 올리는 것이 원칙인데, 이제 도둑을 다스리는 청(廳)이 도리어 역적을 다스리는 청이 되어 포청이 드디어 금오의 막부(幕府)가 되었으니, 이 길이 한번 열리면 앞으로 진신(搢紳)도 그 화를 면하기 어려울 줄 나는 안다. 빨리 전에 명한 것을 거두어 뒷날의 본보기로 삼으라.’ 하셨다.

6월에 왕께서 일로 말미암아 탁지(度支)100) 에 이르기를, ‘절검(節儉)의 실체(實體)를 행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 내가 대내(大內)에 있으면 옷은 모시로 하고 일산(日傘)은 명주로 하거니와, 동가(動駕)할 때에야 곤복(袞服)과 일산을 다 비단으로 하는데, 대개 동가할 때에는 본디 체모가 있기 때문이다. 아! 너희 유사(有司)는 이것을 잘 알아서 낭비를 막으라.’ 하셨다.

추7월(秋七月)에 왕께서 장차 친향(親享)하려 하시는데, 대신이 날씨가 덥다 하여 대행할 것을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조상을 섬기는데 어찌 때를 가릴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하지 말라.’ 하셨다.

8월에 왕께서 하교하기를, ‘예전부터 형벌을 제정하는데에는 모두 그 법이 있으니, 법 외의 형벌은 혹 한때에 쾌한 것을 취할지라도 마침내 선왕께서 삼가고 불쌍히 여기신 뜻에 어그러진다. 내가 을사년101) 에 이미 압슬형(壓膝刑)을 없앴고 임자년102) 에 또 포청(捕廳)의 전주뢰형(剪周牢刑)을 없앴다. 이제는 낙형(烙刑)이 남았을 뿐이고 접때 친국(親鞫) 때에도 구습에 따라 썼으나, 육형(肉刑)·태배(笞背)는 오형(五刑)의 하나인데도 한제(漢帝)·당종(唐宗)이 오히려 없앴는데, 더구나 오형에도 없는 형벌이겠는가? 아! 금오는 영구히 낙형을 없애고 항령(恒令)으로 삼으라.’ 하셨다.

동10월(冬十月)에 명하여 동문 밖에 제단을 설치하여 신해년103) 에 굶어 죽은 주검을 찾아 제사하게 하셨다. 소대(召對) 때에 선찬(宣饌)하고 명하여 부모가 있는 자는 가지고 돌아가 주게 하셨다. 그래서 신하들이 앞다투어 가져다 소매 안에 채웠는데, 부모가 없는 자는 빈손으로 물러가니, 왕께서 슬퍼 목메시고 신하들도 모두 느껴 울었다.

11월에 평안 감사(平安監司) 권이진(權以鎭)이 아뢰기를, ‘압록강파수(把守)하는 군졸은 겨울이면 철파(撤罷)하는 것이 고례(古例)입니다. 전 감사 송진명(宋眞明)이 성교(聖敎)를 받아 창설하였으나, 얼음 얼고 눈이 내릴 때에 입김으로 언 것을 녹이다가 사람이 상할세라 염려되니, 폐지하소서.’ 하자, 왕께서 말씀하기를, ‘겨울에 얼음이 얼면 바로 파수할 때이다. 그러나 그것이 고례가 아닌데 파수하는 군졸 중에 혹 얼어 죽는 자가 있으면 이는 스스로 내가 사람을 죽이는 길을 여는 것이니, 어찌 차마 할 수 있겠는가? 폐지하라.’ 하셨다. 이때 대신(大臣)과 종신(宗臣)이 체례(體例)를 다투어 서로 하리(下吏)를 가두었는데, 잘못이 대신에게 있으므로 왕께서 종신을 옳게 여기고 대신을 그르게 여기셨다. 그래서 대신이 정고(呈告)하고 벼슬을 갈아 주기를 바랐는데, 홍문관(弘文館)에서 차자를 올려 조정의 체모를 존중하는 방법에 어그러진다고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사람이 누구인들 허물이 없겠는가? 고치는 것이 귀하다. 내가 대신을 공경하는 도리를 잘못하였다.’ 하고 드디어 종신을 파면하고 대신을 돈면(敦勉)하며 다시 서로 공경하는 의리로 종친부(宗親府)와 조정에 경계하셨다. 곧 예관(禮官)을 도산 서원(陶山書院)에 보내어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을 치제(致祭)하고 명하여 도산 서원을 그려 바치게 하셨다.

12월에 왕께서 풍현증(風眩症)을 앓는데도 오히려 기무(機務)에 부지런하여 한밤이 되도록 주무시지 않으므로, 연신(筵臣)이 왕께 건강을 해치는 일을 절제하시기를 권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보니 선조(先朝) 말년에 편찮으신 중에도 만기(萬機)를 수응(酬應)하시어 조금도 막힌 것이 없었다. 이것이 우리 가법(家法)이니 감히 스스로 안일할 수 있겠는가?’ 하시었다. 조금 뒤에 연신에게 말씀하기를, ‘처음에는 부지런하다가 나중에는 게으른 것이 임금들의 통환(通患)인데, 당명황(唐明皇)이 개원(開元)천보(天寶) 때에 판이하게 두 사람이 된 것이 그 중에서도 가장 심한 것이었다. 예전에 우리 세종(世宗) 때에 명하여 《명황계감(明皇戒鑑)》을 짓게 하신 것은 성의(聖意)에 까닭이 있다.’ 하고, 명하여 그 서적을 널리 구하여 바치게 하셨다. 소대(召對)하여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를 강독(講讀)할 때에 왕께서 수심에 잠겨 말씀하기를, ‘예전에 고(故) 좌상(左相) 이집(李㙫)이 나에게 이 글을 강독하기를 권하고 고 상신(相臣) 홍치중(洪致中)·조문명(趙文命)도 말하였는데, 그 뜻은 대개 내 도량이 좁기 때문에 이 글을 빌려서 받아들이는 도량을 개발(開發)하려 한 것이다. 대저 여조겸(呂祖謙)은 한낱 학문하는 선비인데, 능히 《논어(論語)》로 말미암아 그 기질(氣質)을 변화하였다. 내가 이 글을 강독하고 도량을 넓히지 못한다면, 어찌 이 글을 저버리는 것일 뿐이겠는가? 또한 세 정승을 저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세 정승은 이미 죽어서 내가 이 글을 강독하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하였으니, 상심되고 슬프다.’ 하셨다. 드디어 친히 30여 줄의 윤음(綸音)을 지어 정부(政府)에 명하여 구언(求言)하여 임금의 궐실(闕失)을 보완하고 유루(遺漏)를 수습하게 하셨다. 곧 여러 도에서 세말(歲末)에 효행이 뛰어난 선비를 천거하게 하고 서울에는 그렇게 시키지 않으셨으니 한 안팎의 도(道)가 아니기 때문이며, 경조(京兆)104) 에 명하여 여러 도에서 한 것처럼 세말에 천거하게 하셨다. 이에 앞서 왕께서 연신에게 말씀하기를, ‘내가 신축년105) 에 저위(儲位)를 잇고부터 개연(慨然)하여 거친 베옷을 입고 흰 베로 만든 관(冠)을 쓰고서 세도(世道)를 만회하려 하였으나, 근일 이래로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삭감하는 것을 정사(政事)로 삼을 뿐이니, 그 유폐(流弊)가 장차 사신(史臣)이 나날이 기록할 것이 없게 만들고야 말 것이다. 어찌 내가 전일에 뜻을 세운 것이 잘못이겠는가? 대저 나라를 망치는 근본은 바로 사치이다. 그러나 사치를 없애고 검약을 숭상하는 것도 오직 임금이 어떻게 이끄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내가 아첨을 좋아하면서 뭇 신하를 시켜 충직하라고 한다면 행해질 수 없을 것이고, 내가 비단옷을 입으면서 뭇 신하를 시켜 무명옷을 입게 한다면 또한 행해질 수 없을 것이다. 그 근본을 바르게 하고 그 근원을 바르게 하여 힘을 헤아려 점점 나아가면 바랄 수 있을 것이다.’ 하셨다. 이때에 이르러 다시 하교하기를, ‘예전에는 달군 돌 위에서 기장을 굽고 돼지고기를 갈라서 먹었어도 귀신을 공경할 수 있었고, 짐승을 날로 먹고 그 피를 마셨어도 존비(尊卑)를 분변할 수 있었으며, 궁실(宮室)의 지붕을 띠로 이고 섬돌을 흙으로 만들었어도 백성을 다스리고 가르칠 수 있었는데, 삼대(三代) 이후로 인문(人文)이 번성하고 사치가 번성하였으나 오히려 근세와 같지는 않았다. 바야흐로 혼인할 나이가 지나도 혼인하지 못하는 것도 사치 때문이며 달이 지나도 장사(葬事)하지 못하는 것도 사치 때문이며 조상을 제사하되 예(禮)대로 하지 않는 것도 사치 때문이다. 대저 풀이 쏠리면 바람이 부는 것을 알고 그림자가 바르면 표준(表準)을 안다. 그러므로 필서(匹庶)는 조사(朝士)를 본뜨고 조사는 귀척(貴戚)을 본뜨고 귀척은 왕궁(王宮)을 근본 삼으니, 내가 어찌 감히 사치를 싫어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상방(尙方)의 직금방(織錦坊)을 이제부터 영구히 철폐하고 다시는 설치하기를 청하지 말라.’ 하셨다.

10년 갑인(甲寅) 춘정월(春正月)에 팔도의 감사(監司)와 양도(兩都)의 유수(留守)에게 명하여 널리 《농사집성(農事集成)》을 인쇄하여 고루 민간에 반포하여 세종 때에 백성을 이끌어 근본을 힘쓰게 하신 성의(盛意)를 알게 하도록 하셨다. 친히 기곡제(祈穀祭)를 행하시느라 이미 서계(誓戒)하였는데, 마침 국옥(鞫獄)이 있으므로 제사를 지내고 국문(鞫問)하라고 명하셨다. 홍문관(弘文館)에서 차자를 올려 국옥의 체례(體例)를 엄히 하는 방도에 어그러짐을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백성을 위하여 농사를 비는 것이 도리어 중대하지 않은가?’ 하고, 마침내 따르지 않으셨다. 제사를 지내고 이튿날에 명정문(明政門)에서 조참(朝參)을 행하고 이미 죽은 군민(軍民)의 정포(丁布)를 면제하고서야 비로소 친히 국문하셨다. 한 죄인이 죄가 없으므로 드디어 용서하여 놓아 주라고 명하셨는데 옥에서 나가서 죽으니, 왕께서 뉘우쳐 말씀하기를, ‘내가 죄 없는 자를 죽였다. 사관(史官)은 내 허물을 써서 후세의 임금이 거울삼아 경계하게 하라.’ 하셨다. 곧 비변사 제조(備邊司提調)를 각도의 구관 당상(勾管堂上)으로 나누어 차출하여 맡은 도 안의 풍흉(豊凶)과 폐단을 살피고 방백(方伯)과 미리 강구하여 일을 처리하게 하셨다. 왕께서 바야흐로 차대(次對)를 행하실 때에 까치가 와서 우사(右史)의 모석(毛席)을 쪼았는데, 왕께서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미물도 모석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인데 오히려 쪼는 것은 굶주림에 몰렸기 때문이다. 불쌍한 우리 백성이 입을 것이 없고 먹을 것이 없어 길에서 쓰러지니, 저 미물과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경조(京兆)와 제도(諸道)의 방백에게 신칙(申飭)하여 농사를 권하고 안정시키며 백성을 어지럽히는 정사(政事)를 없애고 환과 고독(鰥寡孤獨)과 폐질(廢疾)이 있는 자를 찾아서 돌보게 하셨다.

2월 왕께서 장차 의릉(懿陵)에 거둥하시려 할 때에 국옥(鞫獄)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뭇 신하가 거둥을 멈추기를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송 태조(宋太祖)는 와탑(臥榻) 곁에서 다른 사람이 코를 골며 졸았어도 가기를 꺼리지 않았다. 다행히 나는 바야흐로 한 나라에 군림하여 경들을 신하로 삼았으니, 어찌 꺼릴 것이 있겠는가?’ 하고 듣지 않으셨다.

3월에 친히 대보단(大報壇)에 제사하고 양 경리(楊經理)의 사당에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친히 약제(禴祭)106) 를 행하셨다. 이 뒤로는 무릇 같은 일로서 여러 번 보이는 것은 다 쓰지 않는다.

5월에 왕께서 《이충정주의(李忠定奏議)》를 강독하고 곧 명하여 의군정(議軍政)·교차전(敎車戰) 두 차자(箚子)를 삼군문(三軍門)의 대장(大將)에게 반시(頒示)하게 하셨다. 곧 연신(筵臣)에게 하교하기를, ‘공평하되 밝지 못하면 어진 사람을 어리석게 여기고 어리석은 사람을 어질게 여길 것이고, 밝되 공평하지 못하면 어진 줄 알더라도 등용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줄 알더라도 버리지 못할 것이니, 쓰고 버리는 분별이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하셨다.

6월에 고(故) 참의(參議) 안방준(安邦俊)이 지은 《항의신편(抗義新編)》을 바친 자가 있었는데, 왕께서 조헌(趙憲)임진년107) 에 창의(倡義)한 일을 보고 감탄하여 마지않고 조헌의 사당과 칠백 의총(七百義塚)에 사제(賜祭)하고 다시 양남(兩南)의 감영(監營)에 명하여 조헌이 손수 고증한 《조천록(朝天錄)》과 일기(日記) 등 서적을 인쇄하여 금산(錦山)·옥천(沃川) 두 서원(書院)에 나누어 내리게 하셨다.

추9월(秋九月) 왕께서 각도의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에게 신칙하여 신역(身役)을 도피한 백성을 불러다 안주시키고 막 돌아온 자는 조세를 줄이고 요역(徭役)을 면제하여 소생시킬 방도를 다하도록 힘쓰게 하셨는데, 《시경(詩經)》 보우편(鴇羽篇)을 강독하고서 감흥(感興)하셨기 때문이다.

11년 을묘(乙卯) 춘정월(春正月)에 진주 부사(陳奏副使) 박문수(朴文秀)가, 고(故) 병사(兵使) 양무공(襄武公) 정봉수(鄭鳳壽)정묘년108) 에 적을 물리친 일을 말하고 또 명나라에서 내려 준 은패 표문(銀牌票文)을 바치니, 왕께서 한참 동안 감탄하고 정봉수를 치제(致祭)하고 그 후손을 등용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동지사(冬至使)가 가져온 문단(紋緞)을 경기영(京畿營)에 내려 곡물을 사서 저축하게 하셨다. 이에 앞서 임자년109) 에 굶주린 백성을 진구(賑救)할 때에 경기의 곡물이 모자라서 고통받았으므로, 지난 여름 비가 내릴 때에 왕께서 말씀하기를, ‘인정은 비를 얻으면 해이해질 것이다. 이 풍년일 때에 미리 대비할 방도를 생각해야 한다.’ 하고, 드디어 경기에 명하여 곡물을 저축하게 하셨는데, 이때에 이르러 문단을 내려서 도우셨다.

5월에 함경 감사(咸鏡監司)가 범월(犯越)한 백성 50인의 죄를 논하였는데, 왕께서 어사(御史)를 보내어 안사(按査)하게 하셨다. 연석(筵席)에서 하교하기를, ‘처벌을 너그럽게 한 잘못에 빠질지언정 사납게 하는 잘못에 빠지지 말라.’ 하고, 이어서 명하여 쓸 만한 문사(文士)·무사(武士)를 찾고 또 북쪽 변방의 징사(徵士) 이재형(李載亨)을 찾아보고 만나보고 싶다는 뜻을 전하게 하셨다.

추8월(秋八月) 왕께서 처음에 희릉(禧陵)·효릉(孝陵)에 전알(展謁)하려 하셨는데, 이윽고 유사(有司)에게 말씀하기를, ‘밤에 평소처럼 선조(先朝)를 모시는 꿈을 꾸었다. 한 명제(漢明帝)가 원릉(園陵)에서 꿈을 꾸고 역(曆)을 살펴 달[月]을 점쳤으니 본받기 꼭 좋은 것이다.’ 하고, 드디어 명릉(明陵)에 거둥하셨다.

9월에 일식(日食)이 있었는데, 왕께서 친히 구식(救食)110) 하셨다. 유신(儒臣)이 고사(故事)를 아뢰어 면계(勉戒)하니,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이셨다.

동12월(冬十二月)에 왕께서 사학(四學)의 집이 무너졌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도성(都城) 안은 왕화(王化)의 근본인 곳인데, 학사(學舍)가 이러함을 이웃 나라에 들리게 할 수 없다. 봄이 되거든 수리하라.’ 하셨다. 일찍이 밤에 입직(入直)한 옥당(玉堂)에게 선찬(宣饌)하며 말씀하기를, ‘선조(先朝)에서 일찍이 추운 밤이면 옥당을 생각한다고 말씀하시고 어찬(御饌)을 거두어 내리셨다. 나는 밤에 찬선(饌膳)을 장만하지 않으므로 어주(御廚)에서 장만하여 내리니, 좌사(左史)·우사(右史)와 함께 먹고 마시도록 하라.’ 하셨다.

12년 병진(丙辰) 춘정월(春正月) 이미 죽은 서울 백성은 그 빚을 죄다 면제하고 공채(公債)의 기한은 15년으로 하며 사채(私債)의 기한은 20년으로 하셨는데, 대신(大臣)의 말을 따르신 것이다. 동래(東萊)의 선비들이 상소하기를, ‘임진년에 사절(死節)한 송상현(宋象賢)은 문사이고 정발(鄭撥)은 무사입니다. 한 사당에 같이 향사(享祀)할 수 없으니 나누소서.’ 하자, 왕께서 말씀하기를, ‘유응부(兪應孚)는 어찌 무사가 아니랴마는 육신사(六臣祠)에 같이 향사한다. 무사라 하여 그 절의(節義)를 낮출 수 없다.’ 하고 물리쳐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2월에 광릉(光陵)에 거둥하고 양주(楊州)의 민역(民役)을 1등(等) 감면하셨다.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고려왕의 후손을 등용하고 영유현(永柔縣)에 있는 악비(岳飛)의 사당에 비석을 세우게 하셨다. 곧 2품(品) 이상에게 명하여 각각 자목(字牧)111) 을 감당할 자 두 사람을 천거하게 하셨다. 신축년112) ·임인년113) 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 영남(嶺南) 연해(沿海) 백성 중에 온 집안이 모두 죽은 경우에는 그 전조(田租)를 죄다 면제하셨다.

하5월(夏五月)에 무신년114) 에 사절(死節)한 사람 남연년(南延年)·이술원(李述原)의 자손을 등용하셨다. 감사(監司)·수령(守令)에게 하교하기를, ‘흉년에 전련(顚連)한 자는 감사·수령이 진구(賑救)할 줄 아나, 풍년에 전련한 자는 다시 마음쓰지 않아서 길에서 굶어 죽도록 버려두니, 한 지아비라도 제 살 곳을 얻지 못하면 마치 저자에서 매맞는 듯하다는 것과 어찌 다르겠는가?’ 하셨다. 대신이, ‘편배(編配)되어 있는 중에 부모의 상을 당한 자를 고향에 돌아가 장사지내게 하는 것은 법에 그런 조문이 없다’고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임금은 효(孝)로 다스리는 법인데 어떻게 고향에 돌아가 장사지내게 하지 않겠는가? 돌아가 장사지내게 하라.’ 하셨다.

6월에 양녕(讓寧)·효령(孝寧) 두 대군(大君)의 묘(墓)에 사당을 세우고 그 아래에 위전(位田)을 주고 묘지기를 두고 그 호역(戶役)을 면제하셨다.

동10월(冬十月)에 수령으로서 장오(贓汚)를 범한 자는 종신토록 금고(禁錮)하고 추천해 준 사람도 논죄(論罪)케 하기를 항령(恒令)으로 삼았다.

13년 정사(丁巳)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다섯 가지 일을 묘당(廟堂)·방백(方伯)에게 신칙(申飭)하셨는데, 서로 삼가서 공경하기를 힘쓰고 자목(字牧)을 잘 가리고 법을 지켜 선량하기를 힘쓰고 농상(農桑)을 권장하고 제언(堤堰)을 수리하라는 것이었다.

2월 왕께서 연초부터 법강(法講)115) 을 열고 토론함에 게을리하지 않으셨는데, 마침 옥당(玉堂)이 많이 채워지지 않아서 오래 개강(開講)하지 못하게 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위에서 게을리하더라도 아래에서 오히려 권면해야 할 것이다. 내가 만학(晩學)이기 때문에 봄날이 따뜻하고 점점 길어짐에 따라 전에 공부가 부족하였던 것을 채우려 하나, 옥서(玉署)116) 의 문이 오래 잠겨 법연(法筵)117) 을 열 기약이 없고 한가할 때에 고문(顧問)할 사람이 없으니, 옛 기록에서 찾더라도 이런 일이 있는가?’ 하고, 드디어 명하여 인원을 갖추게 하여 날마다 경서(經書)를 지니고 강독(講讀)하셨다.

3월에 왕께서 팔을 앓아 손이 마비되셨는데, 오히려 황단(皇壇)에 친향(親享)하려 하시므로 뭇 신하가 힘써 말리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황은(皇恩)을 숭보(崇報)하는 것은 오직 수척(數尺)의 숭단(崇壇)에 있을 뿐인데, 내가 어찌 감히 작은 병 때문에 예(禮)를 그만두겠는가? 내 병이 굽히고 펴는 데에 방해되어 규(珪)를 잡고 광(筐)118) 을 받들 때에 실의(失儀)가 있을세라 두려우므로 한가할 때에 익혀서 대강 예대로 할 수 있으니, 다시 말하지 말라.’ 하셨다. 곧 정원(政院)에 명하여 육조(六曹)에 신칙하여 《대전(大典)》의 법을 수명(修明)하고 어기는 자는 찰추(察推)하게 하셨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민응수(閔應洙)가 상소하여 고(故) 참판(參判) 조위(曹偉)가 원통하게 죽은 일과 고 좌윤(左尹) 곽재우(郭再祐)의 훈업(勳業)과 고 군수(郡守) 조종도(趙宗道)가 무용(武勇)을 세운 일을 말하고 모두 사시(賜諡)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르고, 다시 공홍 감사(公洪監司)에게 명하여 정충신(鄭忠信)의 사당을 세우게 하고 그 후손을 등용하셨다.

하6월(夏六月)에 날씨가 매우 더운데, 왕께서 오히려 강학(講學)을 그만두지 않으시고 밤 4경(四更)이 되어서야 파하므로 대신이 정신을 너무 피로하게 하신다고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임금의 한마음은 만화(萬化)가 근본으로 삼는 것인데, 어찌 날이 덥다 하여 게을리 하겠는가? 조종조(祖宗朝)에서 반드시 그러지 않았을 것이므로 내가 승지(承旨)를 시켜 옛일을 살펴보니 한더위에도 개강(開講)하였거니와, 한추위에도 개강하였는지는 살펴보지 못하였으나 추위와 더위를 어찌 가리겠는가? 더구나 한 달에 여섯 번 차대(次對)하셨으니, 더욱이 조종께서 근정(勤政)하신 성의(盛意)를 알 수 있다.’ 하셨다. 이 뒤로 말년까지 왕께서 끝내 여섯 번의 차대를 한 번도 거르신 적이 없다.

추7월(秋七月)에 왕께서 사직(社稷)에서 기우(祈雨)하려 하셨으나 때마침 왕께서 편찮으시므로 연신(筵臣)이 정성에 달려 있고 예(禮)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성탕(成湯)은 정성이 모자라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상림(桑林)에서 희생을 대신하였는가?’ 하고, 마침내 친히 행하셨다. 돌아오다가 금오의 문앞에 이르러 승지에게 명하여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셨다. 이틀 뒤에 다시 친히 태묘(太廟)에서 기우하실 때에 연(輦)을 타지 않고 일산을 펴지 않고서 묘문(廟門)에 이르니, 비가 내려 곤면(袞冕)이 다 젖었으나 밤새도록 공경히 제사하고 이튿날 환궁(還宮)하고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군병을 노문(勞問)하게 하셨다.

8월에 왕께서 건원릉(健元陵)에 거둥하고 현릉(顯陵)·목릉(穆陵)·휘릉(徽陵)·의릉(懿陵)·혜릉(惠陵)에 들러 전알(展謁)하고 재실(齋室)에서 경기 감사(京畿監司)와 수령(守令)을 소견(召見)한 다음 거가(車駕)가 돌아왔다. 이튿날 주강(晝講)을 행하고 군병에게 호궤(犒饋)하셨다.

9월에 명하여 공씨(孔氏)를 등용하게 하셨다. 처음에 왕께서 우리 나라에 사는 공씨가 선성(先聖)의 후손인 줄 모르셨는데, 이때에 이르러 연신(筵臣)이 말하기를, ‘선성의 53세손 공소(孔紹)가 원(元)나라에서 벼슬하여 한림 학사(翰林學士)로 있다가 고려 말기에 노국 장공주(魯國長公主)가 공민왕(恭愍王)에게 시집올 때에 공소가 배종(陪從)하여 와서 그대로 동토(東土)에 살았는데, 동토에 공씨가 있는 것은 여기서 비롯하였습니다.’ 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관학(館學)의 유생(儒生)을 고강(考講)하고 분수(分數)가 같은 자에게 전정(前庭)에서 제술(製述)을 시험하여 그 우열(優劣)을 겨루게 하셨는데, 승지(承旨)가 밤이 어두워 시권(試券)을 베낄 수 없다고 말하니, 왕께서 어좌(御座)의 촛불을 거두어 주셨다.

윤9월에 경기(京畿)·호서(湖西)·호남(湖南)의 재해를 입은 고을의 군보 미포(軍保米布)를 감면하셨다. 이때 육진(六鎭)에 기근이 들었는데, 특별히 노공미(奴貢米) 3천 석을 내리고 다시 영남(嶺南)의 저치미(儲置米) 2천 석을 더하고 어사를 보내어 진정(賑政)을 살피게 하여 마침내 유망(流亡)한 자가 한 사람도 없게 하셨다.

동10월(冬十月)에 왕께서 친향(親享)하고 나서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 윤순(尹淳)에게 말씀하기를, ‘옛사람은 나라의 융쇠(隆衰)를 반드시 음악에서 점쳤다. 이제 묘악(廟樂)의 번잡하고 촉급(促急)한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 하셨다. 승지를 보내어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고 이 뒤로는 한추위와 한더위를 당하면 전례를 살펴서 품행(稟行)하라고 신칙하셨다.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과 삼사(三司)의 장관(長官)과 양국(兩局)의 대장(大將)과 팔도(八道)의 도신(道臣)과 양도(兩都)의 유수(留守)에게 명하여 각각 인재를 천거하게 하셨다.

11월에 금려(禁旅)는 병사 중에서 기예(技藝)를 시험하여 올리게 하고 항령(恒令)으로 삼으셨다. 이달에 왕께서 죄수를 살피고 연신(筵臣)에게 말씀하기를, ‘선조(先朝)께서는 어선(御膳)을 진공(進供)한 데에 산 꿩·닭·노루·토끼가 있으면 반드시 금원(禁苑)에 놓아 주셨고 나도 본떠서 행하는데, 대개 그 소리를 듣고 차마 그 고기를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금수도 그러한데, 더구나 사람이겠는가?’ 하셨다.

12월에 왕께서 대신에게 말씀하기를, ‘송(宋)나라의 이항(李沆)이 임금이 봉선(封禪)을 크게 벌이는 것을 염려하고 늘 홍수와 가뭄을 아뢰었으니, 참으로 대신의 체모를 얻었다. 내가 본디 학문이 없으나, 성인(聖人)과 광인(狂人)의 분별은 일념(一念)에 달려 있다는 것을 대강 들었고 또 세상 일을 겪은 것이 많으므로, 경들이 아뢰기를 기다리지 않고 늘 스스로 조심하며 밤마다 잠에서 깨면 오늘날 크게 벌이는 일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하셨다. 연신(筵臣)이 정문(程文)119) 의 폐단을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소식(蘇軾)은 어질다. 득실(得失)은 도외(度外)에 두고 임금의 덕이 나아지지 않는 것을 근심하였다. 그렇기는 하나 또한 위에 있는 자가 이끌기에 달려 있을 뿐이다.’ 하셨다.

14년 무오(戊午) 춘정월(春正月)에 관원을 보내어 고(故) 충신(忠臣) 김응하(金應河)에게 치제(致祭)하게 하셨는데, 순절(殉節)한 해이기 때문이다.

하5월(夏五月)에 안동(安東) 사람이 사사로이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의 사당을 훼손하였는데, 왕께서 말씀하기를, ‘문정(文正)의 대절(大節)은 백세(百世)에 빛나는 것인데 감히 사사로이 그 사당을 훼손할 수 있는가? 난민(亂民)이니, 맨 먼저 앞장선 자를 형배(刑配)하라.’ 하셨다.

추9월(秋九月)에 고려의 충신 길재(吉再)의 시호(諡號)를 내리고 이어서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셨다. 이때 경상 감사(慶尙監司) 이기진(李箕鎭)이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내려 준 전토(田土)에 대나무를 심었으니 신하가 되지 않을 뜻은 확고하여 바꿀 수 없다. 죽은 자가 아는 것이 있다면 어찌 시호를 내린다 하여 영광스럽게 여기겠는가?’ 하매, 연신이 말하기를,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도 다 전조(前朝)의 충신인데 아조(我朝)에서 시호를 내렸습니다.’ 하니, 왕께서 윤허하고 명하여 세 사람의 후손을 등용하게 하셨다.

동10월(冬十月)에 왕께서 구준(丘濬)《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강독(講讀)하다가 명례악편(明禮樂篇)에 이르러 유신(儒臣)에게 말씀하기를, ‘아! 우리 세종조(世宗朝)에 하늘이 거서(秬黍)120) 를 내리고 땅에서 경석(磬石)이 나와 드디어 명신(名臣)·석보(碩輔)와 함께 제작한 것이 빛나서 볼 만하였다. 이제 세상이 바뀌고 풍속이 변하였을지라도 어찌 음악이 없다 하겠는가? 도리어 성률(聲律)을 아는 자가 없으므로 음절(音節)을 번잡하고 촉급하게 하니, 조종(祖宗)의 옛것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다. 또, 여민락(與民樂)으로 말하면 예전에는 동궐(東闕)·서궐(西闕)을 왕래하고서야 일장(一章)이 끝난다 하였는데, 이제는 또한 그렇지 못하다. 아! 아깝다.’ 하고 한참 있다가 다시 말씀하기를, ‘우리 조정의 《오례의(五禮儀)》는 명나라의 《대명집례(大明集禮)》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조사(朝士)에는 익숙한 사람이 없으므로 무릇 대례(大禮)가 있으면 홍려리(鴻臚吏)에게 일임하여 전도되고 변란(變亂)되었다. 예(禮)도 이러한데, 음악을 어찌 논하겠는가?’ 하셨다. 조금 뒤에 방백(方伯)·수령(守令)이 남형(濫刑)하는 것을 금하셨다. 경기·삼남(三南)의 대동미(大同米)는 그 반을 각 고을에 두라고 명하고 말씀하기를, ‘예전에 유사(有司)인 신하가 전곡(錢穀)의 수를 임금에게 아뢰지 않은 것은 임금이 넉넉한 줄 알고서 도리어 즐기고 사치하는 마음을 일으킬까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늘 월말에 올리는 회요(會要)를 봄에 따라 이렇게 생각하였다. 어찌 저축이 풍부하여 한문제(漢文帝)를 본떠 천하(天下)의 전조(田租)를 죄다 줄여 줄 수 있으랴마는 지금의 저축이 전조를 줄여 주기에 마땅하지 못하더라도 옮겨 나르는 비용을 덜 수는 있을 것이다.’ 하셨다.

11월에 명하여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고(故) 참판(參判) 정온(鄭蘊)에게 다 후사(後嗣)를 세워 제사를 받들게 하고 고 부윤(府尹) 임경업(林慶業)과 명나라 제독(提督) 이여매(李如梅)의 후손을 등용하게 하셨다.

12월에 대신이 이천(伊川)·곡산(谷山)에 도둑이 많다 하여 무신 수령으로 바꾸기를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다스리기를 잘하고 못하는 것은 문신과 무신에 관계되지 않는다. 더구나 도둑도 본디 양민(良民)이니, 인의(仁義)로 점차 교화하여 용사(龍蛇)가 적자(赤字)로 변화하게 하는 것이 옳은데, 어찌 잡아서 장살(杖殺)하기를 힘쓸 수 있겠는가? 먼저 두 부(府)에 신칙해야 한다.’ 하셨다.

15년 기미(己未)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적전(籍田)에서 친경(親耕)한 다음 방백(方伯)·수령(守令)에게 신칙하여 종자와 소를 백성에게 도와 주어 전야(田野)를 널리 개간하게 하셨다. 종척(宗戚)의 복례(僕隷)가 서울 백성을 침탈(侵奪)하는 것을 금하고 백성 중에 가난하여 혼가(婚嫁)하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유사(有司)가 돕게 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왕께서 구준(丘濬)《대학연의보》를 강독하다가 교사(郊祀) 때에 황제가 친히 희생을 살피고 백관(百官)을 서계(誓戒)하였다는 데에 이르러 감탄하며 말씀하기를, ‘사전(祀典)을 공경하는 것이 또한 이러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셨다. 대신들이 다 수백년 동안 행하지 않던 예를 반드시 시작할 것 없겠다고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예(禮)에 없는 예는 워낙 시작할 수 없겠으나, 예(禮)에 있는 것을 어찌하여 행하지 않겠는가?’ 하고 드디어 본디 친향(親享)이 있을 때에는 희생을 살피고 서계하는 것도 다 친히 행하는 것으로 하도록 명하셨다. 대왕 대비(大王大妃)에게 진연(進宴)하고 나이가 일흔 이상인 조사(朝士)와 여든 이상인 서민(庶民)의 자손에게 관가에서 밑천을 주어 각각 그 어버이에게 잔치하게 하셨다.

5월에 중종(中宗)원비(元妃) 신씨(愼氏)에게 단경(端敬) 이라 시호(諡號)를 추상(追上)하고 태묘(太廟)에 부제(祔祭)하셨다. 이에 앞서 숙종(肅宗) 때에 신규(申奎)가 상소하여 장릉(莊陵)의 위호(位號)를 회복하기를 청하고 또 신비(愼妃)의 위호를 회복하기를 청하였는데, 숙종께서 장릉의 위호만을 회복하고 신비의 일은 오히려 망설이시어 사당을 세우고 수호(守戶)를 두게 하셨다. 이해 봄에 왕께서 일에 따라 느낌을 일으켜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사당을 지키게 하셨는데, 얼마 안가서 사인(士人) 김태남(金台南)이 상소하여 신비의 위호를 회복하기를 청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군심(君心)의 추향(趨向)은 삼가지 않을 수 없다. 한 무제(漢武帝)가 이재(理財)를 좋아하면 이재하는 자가 나아가고, 변방을 개척하기를 좋아하면 변방을 개척하는 자가 나아갔다. 이제 김태남은 중관이 사당을 지키기 때문에 이 상소를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임금이 말을 채용하는 데에는 그 당부(當否)만을 볼 뿐이다.’ 하셨다. 드디어 백관(百官)이 함께 의논하라고 명하셨는데, 다들 김태남의 말이 옳다고 말하니, 그대로 따르셨다.

추8월(秋八月)에 왕께서 온릉(溫陵)에 거둥하셨는데, 단경 왕후(端敬王后)의 신릉(新陵)이다.

16년 경신(庚申) 춘3월(春三月)에 왕께서 명릉(明陵)에 거둥하여 숙종조(肅宗朝)에 대보단(大報壇)을 건치(建置)한 일을 추사(追思)하고 감개하셨다. 회란(回鑾)할 때에 선무사(宣武祠)에 이르러 부앙(俯仰)하며 눈물을 흘리며 관원에게 명하여 치제(致祭)하게 하고 친히 감황은시(感皇恩詩)를 지어 새겨서 벽에 걸게 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왕께서 《주역(周易)》을 강독(講讀)하다가 서합(噬嗑)121) 의 대상(大象)에 이르러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임금의 강학(講學)은 장구(章句)를 자세히 파고 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대개 장차 몸소 행하려는 것이다. 성인(聖人)이 말하기를, 「예전 옥사(獄死)를 청리(聽理)하는 자는 살릴 방도를 찾았는데, 지금 옥사를 청리하는 자는 죽일 방도를 찾는다.」 하니, 이것이 어찌 만세(萬世)의 귀감(龜鑑)이 아니겠는가?’ 하고, 이어서 팔도에 신칙하여 모든 옥사를 상세히 살피고 삼가도록 힘쓰게 하셨다. 우의정(右議政) 유척기(兪拓基)《전록통고(典錄通考)》를 속찬(續纂)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윤허하셨다. 또 하교하기를, ‘창업(創業)하고 중흥(中興)한 임금은 관대한 것을 숭상하므로 국조(國祚)가 길이 이어졌으나, 계체(繼體)하고 수성(守成)한 임금은 가혹하고 각박함에 힘썼으므로 자손이 빨리 망하였다는 것을 이 글을 편집하는 자가 몰라서는 안 된다.’ 하셨다. 얼마 안되어 왕께서 계장(啓狀)에 자자(刺字)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고 경녈(黥涅)122) 이 지금도 아직 있는 것으로 의심하여 유척기에게 물으시매, 유척기가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는 《대명률(大明律)》을 따라 쓰는데, 《대명률》에 절도(竊盜)한 자는 자자한다 하였으므로 평의(評議)함에 있어서 그 글을 인용한 것이고, 실은 자자한 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연신(筵臣)이 말하기를, ‘법조(法曹)에 아직도 경녈하는 제구가 있어 이따금 팔에 자자하나 낯에는 자자하지 않습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같이 받은 것이니 그 손상하는 것은 낯이나 팔이나 마찬가지이다. 한번 손상한 뒤에는 혹 스스로 새로워지더라도 어찌 여느 백성과 같아질 수 있겠는가? 경녈하는 제구를 빨리 불사르고 팔에 자자하는 법도 금하라. 율문(律文)에 견주어 인용하는 것은 공명(空名)이라 할지라도 장래 그 이름대로 할 자가 없을는지 어찌 알겠는가? 이 죄명을 없애어 말하지 말아야 한다.’ 하셨다.

5월에 대동미(大同米)·전조(田租)의 반을 줄였는데, 유사(有司)가 경용(經用)이 모자람을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임금과 신하가 초의(草衣)하고 초식(草食)하기로 마음먹으면 어찌 경용을 근심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명하여 아홉 곳의 영선(營繕)을 그만두게 하셨다.

6월에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시호(諡號)를 명의 정덕(明義正德) 이라 가상(加上)하고 태묘(太廟)에서 친향(親享)하고 돌아와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백관의 진하(陳賀)를 받으셨다.

추7월(秋七月)에 뭇 신하가, ‘왕의 효제(孝悌)한 덕(德)과 무릇 당화(黨禍)를 없애고 역란(逆亂)을 소제하고 사전(祀典)을 닦고 백성을 어루만지신 일이 기록에서 찾아도 견줄 만한 것이 드물다’ 하여 여러 번 존호(尊號)를 청하였으나, 왕께서 굳이 사양하고 윤허하지 않으셨다. 대왕 대비(大王大妃)께서 받기를 권하시니, 왕께서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기를, ‘먼저 자성(慈聖)께 진호(進號)한 뒤에 삼가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하시매, 대비께서 허락하셨다. 드디어 대비의 존호를 현익(顯翼) 이라 올리고 왕의 존호를 지행 순덕 영모 의열(至行純德英謨毅烈) 이라 올리고 왕비의 존호를 혜경(惠敬) 이라 올렸다. 왕께서 인정전에서 책보(冊寶)를 받고 명정전(明政殿)에서 백관의 진하를 받으셨다. 이튿날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공시(貢市)의 민폐(民弊)를 묻게 하고 각도에 신칙하여 민폐를 물어서 아뢰게 하셨다.

8월에 왕께서 친히 문묘(文廟)에서 석채(釋菜)를 행하고 물러가 명륜당(明倫堂)에 나아가서 과시(科試)를 설행(設行)하여 선비를 뽑고 대사성(大司成)에게 명하여 한 달에 세 번 국자(國子)123) 에 가서 유생들과 회찬(會饌)하고 학업을 권과(勸課)하게 하고, 《주례(周禮)》에 있는 주(州)에서 승학(陞學)하는 법을 본떠 식년(式年)마다 각도에서 각각 오경(五經)에 능통한 선비 한 사람을 천거하여 태학(太學)에 들여보내어 인재를 만들어 내게 하셨다.

9월에 왕께서 제릉(齊陵)·후릉(厚陵)에 거둥하시는 길에 파주(坡州)에 있는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의 묘(墓)를 지날 때에 왕께서 교자(轎子)를 멈추고 식(式)124) 하여 경의를 나타내고 관원을 보내어 성혼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의 묘에 치제(致祭)하게 하셨다. 능에 배알하고 나서 드디어 개성부(開城府)에 거둥하여 만월대(滿月臺)에 나아가 문과(文科)·무과(武科)를 설행하여 선비를 뽑고, 칙교(飭敎)하여 문사(文士)·무사(武士)로서 침체되어 있는 사람을 등용하셨다. 그 중에서 청현(淸顯)에 통하여 마땅한 자는 청현에 통하도록 하셨다. 성균관(成均館)에 이르러 알성례(謁聖禮)를 행하고 학사(學舍)를 두루 보고,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터가 아름답다. 전조(前朝)에서 불(佛)을 좋아하고 유(儒)를 좋아하지 않아서 망하기에 이르렀으니 아깝다.’ 하고, 드디어 친히 ‘존성도(尊聖道)’라 써서 새겨 명륜당에 걸게 하고 《삼경(三經)》·《사서(四書)》 각 1부(部)를 내려 존경각(尊經閣)에 두게 하셨다. 다시 하교하기를, ‘선조(先朝) 계유년125) 에 고도(故都)에 거둥하셨을 때에 시학(視學)하려 하셨으나 못하고 다만 양조(兩朝)의 고사(故事)에 따라 면포(綿布)를 내리셨으니, 이제 또한 면포 1백 필(匹)을 내린다.’ 하셨다. 곧 선죽교(善竹橋)에 비(碑)를 세워 고려의 충신 정몽주(鄭夢周)의 절의(節義)를 기리고 또 부조현(不朝峴)에 비를 세워 새 조정에 나와 벼슬하지 않은 사람 자손의 충정(忠貞)을 장려하고, 사효자비(四孝子碑)를 지날 때에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김업(金嶪) 등의 자손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게 하시고, 드디어 회란(回鑾)하셨다.

동12월(冬十二月)에 은거하여 뜻을 지키는 선비에게 하유(下諭)하셨는데, 나와서 조정에 오게 하고 조정에 나오는 자는 다 역마(驛馬)를 타게 하셨다.

17년 신유(辛酉) 춘정월(春正月) 관동(關東)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어사(御史)를 보내어 진정(賑政)을 살피게 하고 기보병포(騎步兵布)를 면제하고 가장 심한 고을은 부역과 공물도 모두 면제하셨다. 이때 관북(關北)도 기근이 들었는데, 모든 관동·관북의 방물(方物)·물선(物膳)·삭선(朔膳)을 가을 곡물이 익을 때까지 죄다 면제하셨다.

2월에 전 부제학(副提學) 김진상(金鎭商)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았는데, 그 출처(出處)에 본말(本末)이 있고 말이 없이 절조를 지키는 것을 아름답게 여기신 것이다.

3월에 명하여 선비라 이름하는 자에게는 도둑을 다스리는 형벌을 시행하지 말게 하시고 항령(恒令)으로 삼았다. 처음에 전 참판(參判) 이춘제(李春躋)가 그 아들의 관례(冠禮)를 치를 때에 서제(庶弟) 이하제(李夏躋)를 시켜 성찬(盛饌)을 장만하는 일을 맡게 하고 공경(公卿)·위포(韋布)126) 를 두루 청하여 잔치하였다. 그런데 잔치에 참여한 자가 많이 중독되어 죽게 되거나 죽지 않으면 또한 병들었으므로 뭇사람이 원망하여 격고(擊鼓)하고 이하제를 다스려 죽은 자와 함께 일세(一洗)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불쌍히 여겨 윤허하셨다. 그래서 뭇 원망하는 사람들이 추관(秋官)의 상형(常刑)으로는 승복(承服)받을 수 없다 하므로, 포청(捕廳)에 보내어 도둑을 다스리는 형벌로 시행하여 아주 혹독하게 하였는데, 이하제가 마침내 포청에서 죽었다. 이때에 이르러 왕께서 관학(館學)의 유생(儒生)을 친히 시강(試講)하실 때에 명관(命官) 송인명(宋寅明)에게 말씀하기를, ‘이하제를 다스린 것은 효자(孝子)·자부(慈父)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傳)에는 「선비를 죽일 수는 있으나 욕보일 수는 없다.」 하였다. 이하제는 일찍이 강생(講生)으로서 이 뜰에 들어왔었는데, 도둑을 다스리는 율(律)로 다스렸다. 이 길이 한번 열려서 혹 뒷날의 본보기가 된다면 그 도도(滔滔)한 폐단이 어찌 내게서 비롯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셨는데, 대개 송인명의 아들도 잔치에서 죽었으므로 왕께서 언급하신 것이다. 곧 유사에 명하여 옥(獄)을 세척하여 그 불결한 것을 제거하게 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이조(吏曹)의 낭관(郞官)이 통청(通淸)을 관장하는 법을 없애고 한림(翰林)의 천거를 권점(圈點)으로 하는 것으로 고쳤다. 왕께서 당습(黨習)을 매우 미워하여 말씀하기를, ‘당습은 다 신진(新進)인 선비가 조급히 부귀를 다투고 서로 무함하는 데에서 말미암는다.’ 하고 명하여 두 가지 천거를 폐지하게 하셨다. 그런데 일찍이 한림이 된 자들이 상소하여 이이첨(李爾瞻)이 도당 회권(都堂會圈)을 행한 일을 인용하고 사관(史官)을 중히 여기는 방도가 아니라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관원이 제 직무에 따라 아뢰는 것을 누가 불가하다 하겠는가? 그러나 내가 당습을 미워하므로 익히 생각하고 살펴서 처리하였는데, 소관(小官)이 감히 방해하는가?’ 하고 드디어 상소한 신하들을 죄다 파면하셨다.

5월에 《오례의(五禮儀)》에 실린 궁전(宮殿)·문·다리의 옛이름이 달리 불리므로 예를 행함에 불편하다 하여, 전 대제학(大提學) 이덕수(李德壽)에게 명하여 바로잡게 하고, 글이 완성된 다음에 영남 감영(嶺南監營)에 보내어 간행(刊行)하게 하셨다.

6월 관동(關東)에서 백토(白土)를 파내는 일을 멈추게 하고 이어서 사옹원(司饔院)에 명하여 가을에 굽는 일을 그만두게 하셨는데, 어사(御史)의 말을 따른 것이다.

추7월(秋七月)에 광달문(廣達門) 밖에 태학생(太學生)을 불러 찬선(饌膳)과 술을 내려 먹이고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선성(先聖)을 존경하고 근본을 힘쓰는 도리를 선유(宣諭)하게 하셨다. 이것은 숙묘(肅廟)의 고사(故事)를 따른 것이다.

18년 임술(壬戌)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당의(黨議)의 분쟁(分爭)이 서원(書院)에서 많이 일어난다 하여 각도의 50년 이래 새로 창설한 서원을 철훼하라고 명하셨다. 찬선(贊善)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하여 기자(箕子)·공자(孔子)·주자(朱子) 삼성(三聖)의 영당(影堂)을 철훼하지 말기를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초야(草野)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윤허하셨다.

3월에 왕께서 친히 ‘공평하고 편파하지 않은 것은 군자의 공심이고 편파하고 공평하지 않은 것은 소인의 사의이다.[周而不比乃君子之公心比而不周寔小人之私意]’라고 써서 태학(太學)에 내려서 돌에 새겨 반수교(泮水橋)에 세우게 하셨다.

하5월(夏五月)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왕께서 하루 전에 재계(齋戒)하고 구식(救食)하고서 항령(恒令)으로 삼으셨다. 이때 여역(癘疫)이 매우 치성하여 사망이 많았는데, 왕께서 양의사(兩醫司)에 명하여 나누어 맡아서 치료하게 하고 온 집안이 죽은 자는 관(官)에서 거두어 묻게 하셨다.

6월에 강화(江華)외성(外城)을 쌓았는데, 유수(留守) 김시혁(金始㷜)의 청을 따른 것이다.

추7월(秋七月)에 이연덕(李延德)을 겸 장악원 정(兼掌樂院正)으로 삼아 아악(雅樂)을 고정(考正)하게 하셨다. 국가가 난리를 겪은 뒤로 아악이 산일(散軼)되어 생소관금(笙簫管琴)이 다 갖추어지지 않았으므로 황단(皇壇)의 악기(樂器)는 대부분을 속악(俗樂)으로 대체하였다. 또한 궁헌(宮軒)의 제도를 갖출 수 없었으므로 왕께서 개탄하여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 민응수(閔應洙)에게 명하여 연경(燕京)에서 네 가지 악기를 사 오게 하셨으나, 곡보(曲譜)를 탄취(彈吹)할 줄 아는 자가 없었는데, 어떤 자가 이연덕이 음악을 안다고 천거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왕께서 또 세종조(世宗朝)의 보루각(報漏閣)을 회복하려고 이연덕에게 명하여 정교하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 최천약(崔天若)과 함께 강구(講究)하게 하셨다.

8월에 어떤 사람이 평양(平壤) 땅속에서 옛 규(圭)를 얻어서 바치고 말하기를, ‘이것은 기자(箕子)의 규입니다.’ 하였으므로, 왕께서 연신(筵臣)에게 물었다. 연신이 대답하기를, ‘은(殷)나라는 검은 빛을 숭상하였으므로 기자의 규도 검었을 것인데, 이제 검지 않고 푸르니 아닐 것입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그렇다. 이것은 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가 우리 나라에 내려 준 것인데, 임진년의 서수(西狩) 때에 잃은 것일 것이다. 황단에 제사할 때에 이 규를 잡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하셨다.

9월에 경주(慶州)에 홍수가 나서 신라 헌덕 왕릉(憲德王陵)을 무너뜨렸는데, 왕께서 향축(香祝)을 보내고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수리하게 하셨다. 이에 앞서 영남(嶺南) 백성이 관북(關北)으로 곡물을 나르다가 바다 가운데에서 빠져 죽었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관북 백성을 위하다가 영남 백성을 죽였으니, 인(仁)을 온전히 하기 어렵기가 이렇구나.’ 하고, 도신에게 명하여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하게 하셨다.

동10월(冬十月)에 명하여 《병장도설(兵將圖說)》을 인쇄하여 중외(中外)에 널리 반포하게 하셨다.

11월에 왕께서 서울 선비가 태학(太學)에 들어가 거재(居齋)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민망히 여겨, 명하여 상재생(上齋生)의 액수 1백 인에 맞추어 늘리고 회찬(會饌) 하루를 1점(點)으로 하여 50점에 차면 반시(泮試)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게 하셨다. 드디어 강제 절목(講製節目)을 만들어 태학에 명하여 준행(遵行)하게 하고, 이튿날 숭문당(崇文堂)에서 태학생을 소견하여 말씀하기를, ‘선조(先朝)에서 이 당을 세우고 숭문이라 이름 붙인 것은 문을 숭상하기 위한 것이고, 이제 이 당에서 너희들을 만나는 것도 문을 숭상하는 뜻이다.’ 하셨다.

19년 계해(癸亥) 춘정월(春正月) 초하루 아침에 왕께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동조(東朝)께 진하(陳賀)하셨는데, 왕께서 즉위하신 뒤로 어머니로서 계신 지 20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3월에 명하여 《수교집록속편(受敎輯錄續編)》을 짓게 하셨다. 하교하기를, ‘이 뒤로 군무(軍務)가 아닌데 내가 혹 곤장(棍杖)을 쓰거든 후원(喉院)127) 에서 집주(執奏)하라.’ 하셨다. 형조 참의(刑曹參議) 유복명(柳復明)이 상소하여 술을 금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전에 술을 금하였으나 백성만 소요하게 하고 실효(實效)가 없었다. 내가 글을 만들어 경계하고 금령(禁令)을 만들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또 내가 도류안(徒流案)을 보니 술 때문에 충군(充軍)된 자가 많았는데, 이것은 형벌로 다스리는 것이다. 먼저 교화하지 않고 다만 법으로 다스리는 것을 쾌하게 여긴다면, 백성이 어떻게 편안히 살겠는가?’ 하고, 들어주지 않으셨다. 찬선(贊善) 박필주(朴弼周)를 불러 왕께서 말씀하기를, ‘대신(大臣)이 방금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구경(九經)128) 의 차서에 어진이를 높이는 것이 대신을 공경하는 것 위에 있으므로 먼저 경을 소견(召見)하였다.’ 하고, 이어서 묻기를, ‘삼대(三代) 이후에 다시 삼대 같은 때가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시매, 박필주가 대답하기를, ‘행해지고 행해지지 않는 차이입니다.’ 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어찌하여 행해지지 않는가?’ 하시매, 박필주가 대답하기를, ‘기품(氣稟)을 번거롭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제 선왕(齊宣王)은 맹자(孟子)를 대하여 재화(財貨)와 여색(女色)을 숨기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경에게 숨기겠는가? 나는 기쁨과 노여움이 나타나면 늘 중도를 잃는데, 스스로 병인 줄 알기는 하나 고치지 못한다.’ 하시매, 박필주가 대답하기를,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이렇게 하는 것이 병인 줄 알면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이 약이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그것이 병인 줄 아셨으면 어찌하여 고치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하시매, 박필주가 말하기를, ‘성의가 모자라면 스스로 속이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말이 착하다. 내가 스스로 속인 지 이미 반생이 넘었거니와, 이제부터 뒤로는 스스로 속이지 않기를 힘쓰겠다.’ 하셨다. 박필주가 이어서 이재(李縡)·한원진(韓元震)은 여러 해 동안 배척하여 두지 말아야 할 것임을 아뢰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이는 내 잘못이다.’ 하고, 당장에 명하여 한원진은 삭출(削黜)하지 말고 이재는 정경(正卿)에 올리게 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왕께서 태묘(太廟)에서 향사(享祀)하고 회란(回鑾)하다가 인조(仁祖)의 구궁(舊宮)을 바라보고 즉위하신 때로부터 천시(天時)가 3주갑(周甲)이 되었음을 느끼고 드디어 들를 것을 명하셨는데, 갑작스러워서 군진(軍陣)이 대열을 이루지 못하고 장위(仗衛)가 많이 질서를 잃었다. 장령 윤식(尹植)이 간(諫)하기를, ‘태묘를 나올 때에 명하지 않고 도중에서 명하셨으니, 뭇 신하가 말릴 것을 억제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억제한다는 것은 본정(本情)이 아니다. 그러나 말은 옳으니, 내가 받아들이고 거절하지 않겠다.’ 하고, 드디어 윤식을 통정(通政)의 품계에 발탁하셨다. 곧 향사 때의 뭇 신하의 제복(祭服)이 제도에 맞지 않는다 하여 유사(有司)에 명하여 《대명회전(大明會典)》을 살펴서 바로잡게 하고 또 의주(儀註) 가운데에서 절문(節文)이 번잡한 것을 친히 바로잡아 유사에 내리셨다.

윤4월(閏四月)에 왕께서 문묘(文廟)에 작헌(酌獻)하고 명륜당(明倫堂)에서 시사(試士)하고 하련대(下輦臺)에서 대사례(大射禮)를 행하셨는데, 왕께서 3시(矢)를 맞추셨다. 성종(成宗)의 고사(故事)를 따른 것이다. 문형(文衡)에게 명하여 그 일을 적어 명륜당에 걸고 향관청(享官廳) 동쪽에 각(閣)을 세워 궁시(弓矢)·기복(器服)을 보관케 하셨다. 이튿날 태학생을 숭문당(崇文堂)에 불러 술을 내리고 음식을 차려 주셨는데, 음식은 모두 다섯 가지이고 술은 모두 세 번 돌렸다. 이에 앞서 왕께서 묘중(廟中)에서 일을 행할 때마다 음악의 장절(章節)을 묵묵히 셈하셨는데, 그 제1실(第一室)의 공덕(功德)을 나타내는 것을 혹 제5실에서 연주하기도 하고 제6실의 공덕을 나타내는 것을 혹 제9실에서 연주하기도 하므로 왕께서 매우 의심하셨다. 이때에 이르러 연신(筵臣)에게 물으셨으나 연신이 대답하지 못하므로 드디어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대신(大臣)에게 의논하게 하셨다. 영의정(領議政) 김재로(金在魯)가 대답하기를, ‘세종조(世宗朝)에서 음악을 제정할 때에 신관(晨祼)과 삼헌(三獻)의 악장(樂章)에서 각각 인입(引入)·인출(引出)을 덜고 아홉으로 절(節)을 만들고 그 여덟 장(章)에서 목조(穆祖)부터 태종(太宗)원경 왕후(元敬王后)까지의 공덕을 두루 서술한 뒤에 제9장에서 통틀어 서술하여 마치게 하였으니, 이것이 그 음악을 제정한 미지(微旨)이었습니다. 인조조(仁祖朝)에 이르러 뭇 신하가 묘악(廟樂)이 구성(九成)하는 뜻을 깨닫지 못하고 드디어 실마다 그 장을 하나로 하고 선묘(宣廟)의 악장을 추가하여 만들어서 그 아홉 장을 열 장으로 만들었고, 지금의 악사(樂師)가 또 그 이치를 몰라서 또한 한 장을 각각 한 실에서 연주하니, 이 때문에 공덕이 연주하는 실에 맞지 않습니다.’ 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그렇다. 선조(宣祖)의 악장을 이제 없앨 수 없으니, 태종실(太宗室)의 현미장(顯美章)과 원경후실(元敬后室)의 정명장(貞明章)을 합하여 한 시(詩)를 만들어 구성의 수를 어기지 않게 하라. 또 오늘 바로잡은 시말(始末)을 의궤(儀軌)에 상세히 실어서 뒷날의 빙고(憑考)로 삼으라.’ 하셨다.

5월에 왕께서 사직(社稷)에 비오기를 빌었으나 비가 내리지 않으므로 다시 북교(北郊)에서 빌려 할 때에 근신(近臣)에게 말씀하기를, ‘비오기를 빌 때에는 연(輦)을 타지 않는 것이 고례(古例)인데, 일전에 원로 대신이 간절히 다투므로 애써 따랐으나, 이렇게 하고서 어찌 천신(天神)을 감동시킬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보여(步輿)로 북교에 이르니, 제사가 끝나고서 비가 내렸다. 왕께서 한참 동안 한데에 앉았다가 돌아오셨다.

추7월(秋七月)에 왕께서 일로 말미암아 하교하기를, ‘나라에서 착한 사람을 등용하면 그 이로움이 크다. 한(漢)나라 조정에 급암(汲黯)129) 이 있을 때에는 회남(淮南)에서 감히 반란이 일어날 수 없었다.’ 하셨다.

9월에 뭇 신하가 동조(東朝)께 잔을 올려 수(壽)를 빌기를 청하였는데, 동조께서도 왕이 조정에서 뭇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기를 바라시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삼가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하셨다. 드디어 탄미절(誕彌節)에 뭇 신하에게 잔치를 베푸셨는데, 음악은 아악(雅樂)을 쓰고 술은 현주(玄酒)130) 를 쓰고 음식은 그 가짓수를 줄였다.

동10월(冬十月)에 엄흥도(嚴興道)에게 하대부(下大夫)를 추증하고 관에서 제수(祭需)를 주게 하셨는데, 예관(禮官)의 말을 따른 것이다.

20년 갑자(甲子) 춘정월(春正月)에 《소학선정전훈의(小學宣政殿訓義)》를 찬집(纂輯)하였다. 왕께서 유신(儒臣)들에게 말씀하기를, ‘《소학》은 내가 평생 동안 존신(尊信)한 글이다. 내가 세종조(世宗朝)의 《사정전훈의(思政殿訓義)》를 본떠 음훈(音訓)의 사실(事實)과 선유(先儒)의 성명(姓名)·출처(出處)를 집해(集解) 아래에 나누어 풀이하여 보는 데에 편리하게 하고자 한다.’ 하셨다. 그래서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유신(儒臣)을 불러 친히 참증(參證)하시고 완성되고 나서는 찬성(贊成) 박필주(朴弼周)에게 보여 거듭 교정하게 하여 세상에 유행시키셨다.

하5월(夏五月)에 명하여 《속대전(續大典)》을 찬집(纂輯)하되 전가 사변율(全家徙邊律)을 없애게 하셨다. 이에 앞서 성종조(成宗朝)에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찬수하였는데, 규모는 매우 바르나 조관(條貫)은 오히려 상세하지 못하므로 역대에서 증수(增修)하여 각각 한 서책을 만들었는데, 《전속록(前續錄)》·《후속록(後續錄)》·《전록통고(典錄通考)》·《수교집록(受敎輯錄)》 등의 서책이 있었으므로 문호(門戶)가 번거롭고 많아서 고거(考據)하기에 불편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왕께서 명하여 찬집청(纂輯廳)을 설치하고 아홉 당상(堂上)과 아홉 낭청(郞廳)을 차출하여 육전(六典)을 나누어 맡겨 번잡한 것을 삭제하여 간단하게 하고 날마다 전석(前席)에 인대(引對)하여 친히 감정(勘定)하셨는데, 전가 사변율에 이르러 탄식하여 말씀하기를, ‘범한 자는 죄가 있으나 처자는 무슨 죄인가?’ 하고, 드디어 명하여 없애게 하셨다.

추7월(秋七月)에 명하여 《속오례의(續五禮儀)》를 찬집하게 하셨다. 《오례의》성종조에서 이루어졌는데, 뒤에 손익(損益)한 것이 많으나 완성된 서책이 없었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속찬(續纂)하게 하신 것이다.

9월에 왕께서 기사(耆社)에 들어가셨는데, 뭇 신하의 청을 따른 것이다. 왕께서 기사에 이르러 영수각(靈壽閣)에 참배하고 잠저(潛邸) 옛 동리의 나이 여든 이상인 부로(父老)를 소견(召見)하고 차등을 두어 미포(米布)를 내리셨다. 이튿날 기사의 신하들을 불러 선온(宣醞)하고 하교하기를, ‘선조(先朝) 기해년131) 에 기사의 신하에게 잔치를 내리셨는데, 이제 다만 선온하는 것은 감히 동조(東朝)께 진연(進宴)하기보다 먼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셨다.

동10월(冬十月)에 대왕 대비(大王大妃)께 진연하셨다. 왕께서 친히 사(詞)를 만들어 기쁨을 도우셨는데, 그 사에 ‘저 보각(寶閣)에 참배하고 궤장(几杖)을 받아 왔도다. 장락궁(長樂宮)에 기쁨을 받들어 예연(禮宴)을 크게 열었도다. 강릉(岡陵)에 송축(頌祝)하니 이것이 만세배(萬歲盃)로다.’ 하였다. 기쁨을 극진히 하고 파하여 물러나와 뭇 신하에게 말씀하기를, ‘어버이가 계시면 늙음을 말할 수 없으나, 영수각에서 받은 궤장을 동조의 좌우(座右)에 바치고 이 사를 노래하여 다만 색동옷을 입고 젖먹이 놀이를 하는 것을 갈음하였다.’ 하셨다.

21년 을축(乙丑) 춘정월(春正月)에 관서 어사(關西御史)가 돌아와, 영변부(寧邊府)육상궁(毓祥宮)에서 절수(折受)한 것이 있는데, 자못 민폐가 된다는 것을 아뢰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은 다 일체(一體)인데, 더구나 선조에서 지성으로 사랑하고 돌보신 백성이겠는가? 폐지하라.’ 하셨다.

3월에 왕께서 대보단(大報壇)에 친향(親享)하려 하시는데, 뭇 신하가 말리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더 노쇠하면 몸소 행하려 하여도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친향하셨다. 명하여 만동사(萬東祠)를 수리하고 면세전(免稅田)을 주게 하셨다.

하6월(夏六月)에 관동(關東)의 공삼(貢蔘)을 줄이고 속전(續田)을 주어 민역(民役)에 보태게 하셨다.

추7월(秋七月)에 하교하기를, ‘우리 동방의 도학(道學)·문장(文章)은 고려 포은(圃隱)132) 이 실로 창도하였으니,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근년 송경(松京)에 거둥하였을 때에 부조현(不朝峴) 두문동(杜門洞)을 표창하여 주 무왕(周武王)상용(商容)133) 의 여(閭)에 식(式)하고 비간(比干)134) 의 묘(墓)를 봉(封)한 일을 본떴는데, 이제 듣건대, 두문동의 후손에 장사꾼이 많다 하니, 등용해야 하겠다.’ 하셨다. 동11월(冬十一月)에 동조(東朝)께 잔을 올려 수를 비셨다.

22년 병인(丙寅) 춘2월(春二月)에 왕께서 문학신(文學臣)을 불러 말씀하기를, ‘옛사람이 글을 읽어서 방심(放心)을 되찾은 데에는 뜻이 있다. 내가 스스로 《소학훈의(小學訓義)》를 찬수(纂修)하고 늘 평소에 세종께서 동방의 성인으로서 예악(禮樂)을 제작하신 것을 몸소 생각하나, 이제 내가 어찌 감히 바랄 수 있겠는가? 오직 평소에 보고 들은 것과 계술(繼述)하는 뜻을 대략 적어서 스스로 경성(警省)하고 또 후세의 자손에게 보일 뿐이다.’ 하셨다. 드디어 날마다 편전(便殿)에서 인대(引對)하여 내편(內編)·외편(外編)을 지으셨는데, 계음식(戒飮食)에 이르러 신하들에게 말씀하기를, ‘예전에 우리 선조(宣祖)께서 처음 대통(大統)을 이으셨을 때 궁인(宮人)이 도량을 시험하려고 음식을 짐짓 깨끗하지 않게 하였으나 성조(聖祖)께서 조금도 낯빛이나 말씀에 나타내지 않으시니 궁인이 황공하여 그만두었는데, 이제까지 궁중에서 아름다운 일로 전하여 온다. 내가 음식에 대하여 가린 적이 없는 것은 이어받은 바가 있기 때문이다.’ 하셨다. 서책이 완성되니 《자성편(自省編)》 이라 이름짓고, 이어서 뭇 신하에게 경계하기를, ‘이제부터 언동(言動)이나 정령(政令)이 《자성편》에 어그러지는 것이 있거든 《자성편》에 따라서 경계를 아뢰라.’ 하셨다. 얼마 뒤에 왕께서 유신(儒臣)을 소접(召接)하시는 것이 자못 드물었는데, 유신이 《자성편》을 인용하여 경계하니, 왕께서 칭찬하고 표피(豹皮)를 내리셨다. 하4월(夏四月)에 왕께서 하교하기를, ‘땅에서 재물이 나는 것은 한정이 있는데 군국(軍國)의 수용(需用)은 절도가 없다. 한번 사신이 갈 때에 광은(礦銀) 10만을 써서 왕공(王公)·대부(大夫)·서필(庶匹)에게 쓰이는 능라(綾羅)를 채웠는데, 이제는 궁벽한 초야(草野)에서도 능라를 쓰므로 한 나라의 재력을 다하여 한때의 사치를 돕고 있다. 아! 한탄스러워 견딜 수 있겠는가? 대저 위에서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아래에서 반드시 그보다 심하게 하거니와, 이번 절사(節使)에서 비롯하여 위로는 곤의(袞衣)부터 아래로는 조의(朝衣)에 쓰이는 능라를 일체 엄금하되 군용(軍用)은 이 제한에 넣지 않는다. 어기는 자가 있으면 서장관(書狀官)은 직분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 죄주겠다.’ 하셨다. 이날 밤에 승지(承旨)·옥당(玉堂)을 불러 말씀하기를, ‘내가 평소에 거친 베옷을 입고 흰 베로 만든 관을 쓰는 데에 뜻이 있어 궁중에서 먼저 하려 하였으나, 위로 자성(慈聖)을 받들기 때문에 감히 할 수 없었다. 이제 마침 느낌을 일으켜 자성께 평소의 뜻을 환히 아뢰니, 자성께서 기뻐하여 말씀하기를, 「검약(儉約)을 나타내신 것은 열조(列朝)의 성대한 일이다. 네가 뜻이 있으면 대저 무엇이 어려우랴? 화려한 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하셨다. 이제부터 궁중에서 상투를 높이지 않을 수 있고 소매를 넓히지 않을 수 있으며, 또 옷이 땅에 끌리지 않을 수 있다. 아! 중외(中外)의 신서(臣庶)는 모두 이 뜻을 몸받아 백성으로 하여금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듯이 되게 하라.’ 하셨다. 왕께서 다시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 가운데에서 여섯 가지 말을 써서 좌우(座右)에 붙여 스스로 경계하셨는데, 남에게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好勝人]과 잘못을 가르쳐 줌에 듣기를 부끄러워하는 것[恥聞過]과 변설에 능란 한 것[騁辯給]과 총명을 자랑하는 것[衒聰明]과 위엄을 돋우는 것[厲威嚴]과 강퍅을 함부로 부리는 것[恣剛愎]이었다. 신하들에게 명하여 우러러보게 하고 하교하기를, ‘내가 여섯 가지 병폐를 범하거든 경들이 경계해야 한다.’ 하셨다. 또 말씀하기를, ‘위징(魏徵)당 태종(唐太宗)에게 경계하기를, 「처음에는 간(諫)하는 자가 많았으나 이제는 간하는 자가 적다」 하였는데, 이것은 다름 아니라 듣기를 좋아하므로 간하는 자가 많았고 듣기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간하는 자가 적어졌다는 것이다.’ 하셨다.

추8월(秋八月)에 왕께서 유신(儒臣)을 불러 《시경(詩經)》 관저편(關雎篇)을 강독(講讀)하실 때에 유신에게 말씀하기를, ‘이(理)와 의(義)는 천하 만세(天下萬世)의 공물(公物)이다. 제자와 스승 사이라도 반드시 구차하게 같이할 것 없는데, 더구나 임금과 신하 사이에 어찌 구차하게 맞추는 것이 옳겠는가?’ 하셨다. 처음에 왕께서 관저편을 문왕(文王)이 지은 것이지 궁중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셨는데, 이때에 이르러 연신(筵臣)이 궁중 사람이 지은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이 말씀이 있었다. 왕께서 벼 베기를 보려 하셨는데, 유사(有司)가 아뢰기를, ‘대저 친경(親耕) 뒤에는 적전(籍田)은 백성에게 맡겨서 경종(耕種)하는데, 구곡(九穀)을 심지 않았고 제물로 바친 적도 없습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신(神)을 속일 수 있는가? 이제부터 구곡을 심어서 제물을 채우라.’ 하셨다.

9월에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최석항(崔錫恒)·정해(鄭楷)·권익관(權益寬) 등의 벼슬을 추탈(追奪)하였다. 처음에 왕께서 전 대사헌(大司憲) 박필주(朴弼周)를 불러다가 벼슬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올리고 치도(治道)를 자문하셨는데, 박필주가 수차(袖箚)를 바쳐 우선 신축년135) ·임인년136) 의 역적들의 죄를 바르게 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침음(沈吟)하다가 말씀하기를, ‘반드시 대신과 익히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셨다. 이때에 이르러 삼사(三司)에서 아뢰기를, ‘조태구는 전하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부터 꺼리는 마음을 남몰래 품고 ‘모혐(冒嫌)’이라는 두 자를 만들어 냈습니다. 저위(儲位)가 이미 정해졌을 때에는 차자를 올려 역적 유봉휘를 구하되 충적(忠赤)이라고 칭찬하였고, 대리(代理)하라는 명이 있었을 때에는 대간(臺諫)의 말을 업신여기고 북문(北門)으로 불쑥 들어왔습니다. 목호룡(睦虎龍)이 상변(上變)하였을 때에는 예전에 양옥(梁獄)137) 을 캐지 말게 한 일이 있다는 말을 감히 아뢰었고, 백망(白望)의 공초(供招)가 나왔을 때에는 죽게 된 가운데에서도 살길을 찾는다는 말을 핑계 삼았습니다. 그 전후의 흉언(凶言)은 한 번 굴러서 유봉휘의 상소가 되고 두 번 굴러서 김일경(金一鏡)의 교문(敎文)이 되고 세 번 굴러서 무신년138) 에 역적들이 임금을 헐뜯고 욕하게 되었습니다. 조태구는 관작(官爵)을 추탈하소서.

신축년의 건저(建儲)는 우리 경종(景宗)께서 숙고(肅考)의 유의(遺意)를 몸받고 자성(慈聖)의 명명(明命)을 받들어 손수 써서 면대하여 주신 것이므로 처분이 광명(光明)한데도, 유봉휘는 바쁘고 갑작스러워 정밀하지 못하였으며 시켜서 독촉하였다 하였고, 종사(宗社)를 부탁한 데가 있어 팔역(八域)이 함께 기뻐하는데, 유봉휘는 인심이 의혹하여 오래 되어도 정해지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무인신례(無人臣禮)’라는 넉 자로 말하면 이는 한(漢)나라 어사(御史)가 폐립(廢立)을 탄핵한 말인데, 경묘(景廟)께서 마침내 사속(嗣續)이 없으실 것을 그만이 어찌 모르겠습니까마는, 자손의 번창을 바란다고 말하였으니, 이것이 병환을 숨겼다는 논의가 비롯된 까닭입니다. 유봉휘는 관작을 추탈하소서.’ 하였다.

또 논하기를, ‘이광좌(李光佐)가 무옥(誣獄)을 꾸며낸 것은 백망의 공초에서 죄다 드러났고, 역적 김일경이 교문(敎文)을 지은 뒤에 본병(本兵)에 발탁하여 의망(擬望)하여 마치 공로를 갚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잠(李潛)의 흉언을 역적 김일경이 무릉(茂陵)에 견주었는데, 이광좌가 답습하여 포증(褒贈)을 청하기까지 하였으며, 윤태징(尹泰徵)·이사성(李思晟) 등은 모두 이 광좌가 끌어들여 길러 낸 자인데, 무신년에 난을 일으킨 것도 다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최석항이 무옥을 주장한 것은 조태구와 흉심(凶心)을 같이한 것이고, 무옥이 이루어지고 나서는 반드시 역적 목호룡을 녹훈(錄勳)하기를 청하였으며, 또 청(淸)나라에 주문(奏聞)하고 위세를 빌려 위협하려 하였습니다. 박상검(朴尙儉)의 옥사를 늦추어 지레 죽게 만든 것으로 말하면 캐어 물을 길이 끊어지게 한 것이고, 대리를 전선(傳禪)에 견준 것은 말의 뜻이 흉참(凶慘)합니다. 조태억(趙泰億)이 지은 교문의 지의(指意)는 김일경과 서로 안팎이 되고, 정책 정책 국로(定策國老)139) 이니 문생 천자(門生天子)140) 이니 아뢴 것은 당(唐)나라 환관(宦官)이 어두운 임금을 옹립한 일을 인용한 것입니다. 또 김일경이 지은 교문에는 접혈(蹀血)141) 이라느니 행배(行盃)142) 라느니 하는 따위 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시끄러이 퍼뜨리도록 버려두었습니다. 모두 관작을 추탈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르셨다. 이광좌조태억은 시율(施律)이 지나치게 많다 하여 따르지 않으셨고, 정해·권익관은 헌부(憲府)에서 아룀에 따라 추탈하셨다.

명하여 생원(生員)·진사(進士)는 복두(幞頭)·난삼(襴衫) 차림으로 방방(放榜)하게 하고 드디어 정제(定制)로 삼으셨다. 이에 앞서 왕께서 중국 진사과(進士科)의 복두·난삼·대련화(戴蓮花)·문희연(聞喜宴) 등의 제도를 회복하셨으나 난삼은 그 복식을 몰랐다. 그런데 연신(筵臣)이 말하기를, ‘고(故)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늑(金玏)이 명나라 신종(神宗) 때에 사명을 받들고 중국에 갔을 때 황제가 복두·난삼과 《대학연의(大學衍義)》 1부(部)를 내려 주자, 김늑이 돌아와서 복두와 난삼을 안동(安東)의 학사(學舍)에 보관하였는데, 《대학연의》에는 어보(御寶)와 진적(眞蹟)이 있다고 이제 병조 정랑(兵曹正郞) 권만(權萬)이 말합니다.’ 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권만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의 후손이 아닌가? 예전에 우리 중묘(中廟)께서 재추(宰樞)와 함께 경회루(慶會樓) 아래에서 상화연(賞花宴)을 하셨는데, 파하고 나서 내시(內侍)가 수진(袖珍)143) 《근사록(近思錄)》을 주워 중묘께 바치니, 중묘께서 하교하기를, ‘이것은 권벌의 수중물(袖中物)일 것이다.’ 하고, 명하여 돌려주게 하셨다. 이는 또한 천년에 한번 있을 만한 드문 성사(盛事)이다. 아! 정원(政院)은 영남 감영(嶺南監營)에 공문을 보내어 두 서책과 의관(衣冠)을 두 신하의 후손을 시켜 가지고 오게 하라.’ 하셨다. 이때에 이르러 권만김늑의 손자 김홍운(金弘運)이 가지고 왔는데, 이때 왕께서 편찮으셨으나 굳이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하고 옷을 입고 관을 쓰고 앉아 두 사람을 소견(召見)하고 말씀하기를, ‘유학(儒學)하는 선비를 대접할 때에는 한 고조(漢高祖)가 양다리를 뻗고 앉은 것을 본떠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명나라의 옛 물건은 더욱이 존경해야 할 것임에랴?’ 하셨다. 드디어 명하여 《삼경(三經)》《근사록》·《대학연의》를 내리게 하고 유사(攸司)에 신칙하여 복두·난삼은 그 복식을 알아보고 김홍운에게 돌려주게 하셨다. 그래서 생원·진사의 의관은 죄다 명나라의 제도를 회복하였으나, 대련화·문희연은 의논이 같지 않아서 그만두었다.

동10월(冬十月)에 제주(濟州)에서 지실(枳實)을 바쳤는데, 왕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듣건대, 관에서 탱자나무를 세어 백성에게 그 열매를 내라고 요구하므로 백성이 혹 나무를 흔들어 절로 말라 죽게 한다 하니, 어찌 딱하지 않은가? 제주로 돌려보내고 다시는 바치지 말게 하라.’ 하셨다. 11월에 왕께서 하교하기를, ‘친경(親耕)·관예(觀刈)는 다 사전(祀典)을 중하게 여기기 위한 것인데, 임금이 갈고 백성이 거두는 것과 백성이 농사짓고 임금이 베는 것은 다 불편하다. 기성(箕城)144)정전(井田)은 복고(復古)하기 어려우나, 이 기회에 왕성(王城) 동쪽의 적전(籍田)을 유제(遺制)를 본떠 정형(井形)으로 만들고 공전(公田)의 하나에서 거두어 제물(祭物)로 바치고 그 나머지 여덟 구역은 죄다 그 세(稅)를 면제하면, ‘우리 공전(公田)에 비가 내리고 드디어 우리 사전(私田)에도 미친다.’는 시(詩)가 천년 뒤에 다시 읊어질 수 있을 것이다. 태상(太常)145) 을 시켜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하여 아뢰게 하라.’ 하셨다.

12월에 명하여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정분(鄭苯) 등의 벼슬을 회복하게 하셨는데, 숙묘(肅廟)께서 육신(六臣)의 벼슬을 회복시키신 일에 감동되셨기 때문이다.

23년 정묘(丁卯) 춘정월(春正月)에 대왕 대비(大王大妃)의 존호(尊號)를 강성(康聖) 이라 올리고 왕께서 백관을 거느리고 전문(箋文)을 바치고 진하(陳賀)하셨는데, 대비의 주갑(周甲)이기 때문이다. 하교하기를, ‘태묘(太廟)에서 쓰는 비단은 무늬가 없는데 내 의장(儀仗)에는 오히려 무늬가 있으니, 어찌 불면(黻冕)146) 을 아름답게 하는 뜻이겠는가? 홍양산(紅凉傘)은 무늬를 없애고 일산(日傘)은 명주로 하고 그 밖의 의장도 이를 본뜨라.’ 하셨다.

3월에 왕께서 연신(筵臣)에게 말씀하기를, ‘동조(東朝)께서 우연히 집상전(集祥殿)의 구장(舊藏)을 찾다가 한 옥대(玉帶)를 얻어 내게 주셨다. 곧 선묘(宣廟)께서 두르시던 것이고 숙묘 을해년147) 에 이 띠를 두르시고 조참(朝參)을 행하셨는데, 이제 문득 얻었으니 기이하다.’ 하셨다. 이튿날 드디어 옛 옥대를 두르시고 선원전(璿源殿)에서 분향(焚香)하고 이해 가을에도 이 띠를 두르시고 근정전(勤政殿)에서 시사(試士)하셨다. 이달에 왕께서 금원(禁苑)의 관풍각(觀豊閣)에 나아가 벼심기를 보고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이것은 사람을 쓰는 것과 같다. 재주가 맡길 만하더라도 참설(讒說)로 이간하면 마른 땅에 벼를 심고 추수가 있기를 바라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것은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충직한 말이 있더라도 받아들여지지 못하면 노숙한 농부를 멀리하여 버려두고 자기 지혜대로 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것은 학문하는 것과 같다. 강학(講學)하지 않는 것이 아닐지라도 때때로 사이가 끊어지면 논밭에 물 대기를 부지런히 하지 않고 열매 맺기를 바라는 것과 같을 것이다.’ 하셨다. 다시 하교하여 무격(巫覡)·음사(淫祀)를 금하고 말씀하기를, ‘태학(太學)에 예전에 이목(李穆)이 있었거니와, 내 이목(耳目)에도 이목 같은 자가 있는가?’ 하고, 경조(京兆)·오부(五部)에 신칙하여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이는 무리는 법조(法曹)에 보내어 형벌을 주게 하셨다.

추7월(秋七月)에 왕께서 경연(經筵)에 나아가 신하들에게 말씀하기를, ‘내가 늘 당 현종(唐玄宗)처럼 초년과 만년이 아주 달라질세라 염려한다. 겨울에 피는 꽃이 늦도록 향기를 피우더라도 때때로 시들면 마침내 연꽃이 진흙에서 나와도 물들지 않는 것만 못할 것이다.’ 하셨다. 곧 일 때문에 말씀이 자못 불평하셨는데, 이윽고 뉘우치고 말씀하기를, ‘《자성편(自省編)》이 완성되었을 때에 내가 신하들에게 경계하여 이 편으로 규면(規勉)하게 하였고 당시에 교정(校正)한 자와 편차(編次)한 자도 지금 경연에 있는데 한 사람도 감히 간하는 자가 없으니, 이것은 본디 내가 스스로 반성할 것이다. 또한 어찌 서로 권면할 도리가 없겠는가? 모두 문비(問備)하라.’ 하셨다. 이에 앞서 국릉(國陵)으로 봉표(封標)한 땅에 매장하지 않은 것은 매장을 금하고 이미 매장한 것은 옮기되 사대부가 이미 매장한 것은 논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이때에 이르러 승지(承旨)가 아뢰기를, ‘봉표한 곳이 여든인데 사대부가 범장(犯葬)한 곳이 이미 서른이나 됩니다. 국조(國祚)가 길어서 장차 몇백대가 될는지 모르니, 여든 곳도 오히려 적은데, 더구나 쉰 곳이겠습니까? 사대부가 범장한 것도 옮기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한 광무(漢光武)는 스스로 해를 넘길는지 어찌 알겠느냐고 하였으나 향국(享國)이 오래 이어졌고, 진 시황(秦始皇)은 반드시 만세토록 전하려 하였으나 2세(世)에서 드디어 망하였다. 국조가 길고 짧은 것은 오직 백성을 보전하기에 달려 있는 것이지, 어찌 명산(名山)이 많고 적은 것을 말하겠는가? 참으로 쉰 곳을 죄다 쓴다면 또한 이미 많거니와, 어찌 반드시 그 봉표를 넓혀서 해가 백골(白骨)에 미치게 해야 하겠는가?’ 하셨다. 이때 음동추(蔭同樞)인 자도 초헌(軺軒)을 탈 수 있었는데, 왕께서 말씀하기를, ‘번영(繁纓)148) 은 작은 물건인데도 부자(夫子)가 아꼈거니와, 조정의 등위(等威)가 문란해서는 안 되니, 경조(京兆)의 아윤(亞尹)이나 동돈녕(同敦寧)을 지낸 자가 아니면 초헌을 타지 못하게 하고 항령(恒令)으로 삼으라.’ 하셨다.

8월에 음옥(淫獄)이 있었는데, 왕께서 하교하기를, ‘주남(周南)의 교화는 강한(江漢)에 미쳤고 선정(先正) 조광조(趙光祖)가 도헌(都憲)이었을 때에는 남녀가 길을 달리하였는데, 내가 임어(臨御)하여서는 교화하지 못하여 음풍(淫風)이 방자하게 행해지니, 이것은 다름 아니라 학교의 정사(政事)가 폐기되어 《소학(小學)》의 가르침이 해이하기 때문이다. 서울의 태학(太學)·사학(四學)과 외방(外方)의 향교(鄕校)·서원(書院)은 다 《소학》을 강습하는 것을 상규(常規)로 삼고 교관(敎官)이 동몽(童蒙)을 가르치고 수령(守令)이 백성을 가르칠 때에도 반드시 《소학》의 도리로 하라.’ 하셨다. 이때에 왕께서 춘추가 높으므로 지기(志氣)가 쇠퇴하고 정사가 게을러질세라 염려하여 더욱 분려(奮勵)하여 다스리시고, 또 뭇 신하가 성심(聖心)이 향하는 바에 따라 변경하는 데에 힘썼다. 하교하기를, ‘선유(先儒)는 한 문제(漢文帝)가 정삭(正朔)을 고치고 복색을 바꾸지 못한 것을 비평하였으나, 사람마다 전장(典章)을 가벼이 의논한다면 한 가지 일은 경장(更張)되고 온갖 폐단이 어지러이 일어날 것이다. 아! 조정의 신하들은 내가 분려하는 것은 다만 구장(舊章)을 수거(修擧)하려 할 뿐임을 알아야 한다.’ 하셨다.

9월에 예조(禮曹)의 낭관(郞官)을 보내어 고려왕릉(王陵)을 두루 살펴 무너진 것은 수리하고 범경(犯耕)하는 자는 법으로 다스리게 하셨다. 명하여 안평 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벼슬을 회복시키셨는데,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 등의 전례와 같이 한 것이다. 이에 앞서 국법에 대왕(大王)의 적손(嫡孫)은 대(代)를 한정하지 않고 군역(軍役)에 충정(充定)하지 않게 하였으며, 지손(支孫)은 9대에 한하게 되어 있었는데, 경종(景宗)임인년149) 에 조정에서 그 댓수를 줄일 것을 의논하였다. 왕께서 즉위하시기에 이르러 명하여 한결같이 구전(舊典)을 따르게 하셨으나, 비변사(備邊司)에서 강정(講定)한 영식(令式)에 이르기를, ‘댓수를 한정하는 가운데 조금 사대부 모양이 있는 자는 군역에 충정하지 않는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왕께서 비로소 이를 듣고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지금 신하들이 현직(顯職)에 올라 조정에서 벼슬하면 그 선대의 적손도 수령(守令)인 자가 감히 군역에 충정하지 못하는데, 더구나 대왕의 적손을 어찌 사대부 모양이 있고 없는 것으로 취사(取捨)할 수 있겠는가? 매우 부당하다.’ 하고, 종부시(宗簿寺)를 시켜 외방(外方)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신칙하게 하고 빨리 이 한 구(句)를 없애게 하셨다.

동10월(冬十月)에 왕께서 하교하기를, ‘《예기》에 형벌은 대부(大夫)에게까지 미치지 않는다 하였는데, 지금은 아침에 금달(禁闥)에서 시종(侍從)하다가 저녁에 영어(囹圄)에서 결장(決杖)당하니, 예(禮)로 부리는 도리가 어디에 있는가? 이제부터는 장오(贓汚)에 관계되는 것 밖에는 무릇 시종에 대한 평결을 의논할 때에 장률(杖律)은 속형(贖刑)으로 논하라.’ 하셨다.

24년 무진(戊辰) 춘정월(春正月)에 명하여 무신(武臣)을 전강(殿講)할 때에는 병서(兵書)로 하고 그 연한(年限)·강규(講規)는 모두 문신 전강의 예(例)대로 하고 항령(恒令)으로 삼게 하셨다.

2월에 숙종(肅宗)의 진용(眞容)을 다시 그려 왕께서 친히 영희전(永禧殿)에 모셨다. 돌아오다가 경희궁(慶熙宮)경현당(景賢堂)에 이르러 일을 감독하는 신하들을 불러 제사에 쓰고 난 음식을 내리고 헌가(軒架)를 연주하여 위로하였으며, 친히 사(辭)를 만들어 태강(太康)을 경계하고 신하들에게 명하여 화답(和答)하게 하시고 한밤에야 파하였다. 이튿날 입직(入直)한 유신(儒臣) 김상철(金尙喆)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아조(我朝)의 음악을 쓰는 절도는 조하(朝賀)·진연(進宴)이 아니면 궁정(宮庭)에서 거행한 적이 없습니다.’ 하니, 왕께서 손수 써서 비답(批答)을 내리고 말을 내려 장려하셨다.

하5월(夏五月)에 명하여 광화문(光化門)의 구종(舊鐘)에 각(閣)을 짓게 하셨는데, 세조(世祖)의 봉호(封號)가 있기 때문이다.

추8월(秋八月)에 왜(倭)가 바친 증주(繒紬)·채릉(彩綾) 7백여 필을 호조(戶曹)·삼군문(三軍門)·경기 감영(京畿監營)과 시전(市廛) 백성에게 나누어 내리셨다.

동11월(冬十一月)에 용비(冗費)를 줄이셨다.

25년 기사(己巳) 춘2월(春二月)에 명하여 《탁지정례(度支定例)》를 찬집(纂輯)하게 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명나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종 황제(毅宗皇帝)대보단(大報壇)에 아울러 향사(享祀)하였다. 이에 앞서 숙종(肅宗)갑신년150) 에 북원(北苑)에 제단을 쌓고 신종 황제(神宗皇帝)를 제사하여 임진년에 재조(再造)하여 준 은혜에 보답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왕께서 《명사(明史)》를 보시니, ‘숭정(崇禎)151) 병자년152) 정월에 의종 황제가, 우리 나라가 포위당하여 원조를 청하니 총병(摠兵) 진홍범(陳洪範)에게 명하여 각진(各鎭)의 주사(舟師)를 징발하여 구원하러 가게 하였다.

이해 3월에 산동 순무(山東巡撫) 안계조(顔繼祖)가 아뢰기를, 「조선이 이미 지키지 못하여 피도(皮島)·철산(鐵山)도 위태로우니 진홍범심세괴(沈世魁)가 있는 두 진(鎭)에 신칙하여 피도를 굳게 지키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황제가 안계조에게 협력하여 바로잡도록 꾀하지 못하였다 하여 매우 꾸짖었다.’ 하였다. 왕께서 그래서 느껴 울고 말씀하기를, ‘정사(正史)가 선조(先朝) 갑신년에 나왔으면 의종 황제도 아울러 제사하였을 것은 틀림없다. 또 더구나 우리 동방의 봉전(封典)·국호(國號)는 다 고황제가 내려 준 것으로서 예우(禮遇)가 융숭함이 전대(前代)보다 훨씬 더함에 있어서랴?’ 세 황제를 아울러 제사하는 것은 우리 국가가 숭보(崇報)하는 예(禮)로도 마땅하다.’ 하고, 드디어 명하여 기한을 정하여 빨리 거행하게 하셨다. 왕께서 친히 향사(享祀)하셨는데, 바야흐로 울창(鬱鬯)153) 을 부어 제사를 시작할 때에 흰 구름 한 줄기가 북쪽에서 일어나 굼틀굼틀 제단 위에 머무르고 바람이 솔솔 불어 영우(靈雨)를 가져다 조금 부리더니 제1위(第一位)에 작헌(酌獻)이 끝났을 때에 바람이 고요해지고 구름이 개어 달과 별이 밝고 빽빽해지니, 제사에 참여한 뭇 신하가 서로 함께 감탄하여 ‘감응(感應)이 빠르다.’ 하고, 처연(悽然)히 신주(神州)가 있다는 생각을 일으켰다. 제사를 마치고 나서 예관(禮官)을 보내어 선무사(宣武祠)·무열사(武烈祠)강도(江都)충렬사(忠烈祠)·남한(南漢)현절사(顯節祠)에 치제(致祭)하게 하셨다.

추7월(秋七月)에 좌의정(左議政) 조현명(趙顯命)이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장망(長望)154) 하여 차제(差除)하고 홍문록(弘文錄)155)한림 소시(翰林召試)156) 와 같이 하여 서로 무함하는 폐단을 그치게 하기를 청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이를테면 물을 막는데 동쪽에서 막으면 서쪽에서 터지는 것과 같을 것이니, 어찌 법을 고쳐서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옥당(玉堂)은 임금이 강학(講學)할 때에 도움을 구하기 위한 것이니 소시할 수 없다.’ 하셨다.

8월에 왕께서 친정(親政)하실 때 양전(兩銓)에 신칙하여 공도(公道)를 넓히게 하고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정사(政事)와 학문은 다만 남을 위하고 자기를 위하는 구분에 달려 있을 뿐이다. 남을 위하면 공평하더라도 사사로울 것이고 오직 남만 구제하면 명예를 바란다는 혐의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끊임없이 있는 힘을 다하면 군자(君子)가 된다는 것이 이것이다.’ 하셨다.

9월에 신칙(申飭)하여 사대부의 혼취(婚娶)에는 반드시 친영(親迎)하고 국혼(國婚)에서 사혼(士婚)까지 다 동뢰탁(同牢卓)에 유밀과(油蜜果)를 금하게 하셨다.

12월에 왕께서 하교하여 학문을 권하기를, ‘학문의 도리는 변변치 못한 자를 어질게 할 수 있고 능하지 못한 자를 능하게 할 수 있는데, 세상에서 자포 자기(自暴自棄)하기를 좋아하여 거울을 어둠에 던지고 구슬을 모래에 던지니, 무슨 까닭인가? 아! 진신 대부(搢紳大夫)와 학교의 선비들은 스승이 없다 말고 네 학문에 부지런하라.’ 하셨다.

26년 경오(庚午)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풍속을 바루는 데에는 유(儒)를 숭상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 하여 관원을 보내어 고(故) 찬성(贊成) 정제두(鄭齊斗)·박필주(朴弼周)와 고 찬선(贊善) 김간(金榦)에게 치제(致祭)하게 하고 전 집의(執義) 민우수(閔遇洙)·박필부(朴弼傅)를 통정계(通政階)로 발탁하셨다. 이때 여역(癘疫)이 치성하여 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상번군(上番軍)이 많이 죽었는데, 왕께서 두 영문에 명하여 도와서 장사지내게 하고 그 과처(寡妻)·고아(孤兒)는 그 고을을 시켜 어루만져 돌보게 하셨다.

2월에 연경(燕京)에 사신 갔다가 돌아온 자가 송(宋)나라 승상(丞相) 문천상(文天祥)의 상(像)을 바쳤다. 왕께서 육진(六鎭)의 오국성(五國城)송제릉(宋帝陵)이 있다 하여 그 아래에 사당을 세워서 문천상·육수부(陸秀夫)를 아울러 향사(享祠)하고자 하여 대신(大臣)에게 물으셨으나, 대신이 불편하다 하니, 드디어 명하여 그 상을 와룡사(臥龍祠)에 배향(配享)하고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하게 하셨다. 생원(生員)·진사(進士)를 물색하는 규례를 폐지하였다. 이에 앞서 생원·진사의 회시(會試)에서 탁명(坼名)할 때에는 고관(考官)들이 먼저 합격한 봉미(封彌)를 보고 그 중에서 문벌과 문망(文望)이 있는 자를 가려서 뽑아 장원(壯元)에 놓고 생원의 셋째와 진사의 여섯째는 세상에서 말하기를, ‘이 차서에 있는 자는 명이 없어 일찍 죽는다.’ 하므로 또 시골의 천한 선비를 가려서 채웠다. 이때에 이르러 왕께서 말씀하기를, ‘이것이 공(公)인가 사(私)인가? 과장(科場)을 엄하게 하는 도리가 이러해서는 안된다. 이제부터 영구히 폐지하고 범하는 자는 용정률(用情律)로 논하라.’ 하셨다.

추7월(秋七月)에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하였다. 처음에 숙종(肅宗)께서 양역(良役)의 폐단을 바로잡고자 여러번 뭇 신하에게 명하여 여러 가지로 의논하게 하셨으나, 호포(戶布)·결포(結布)·유포(游布)·정전(丁錢) 등 갖가지 의논을 서로 고집하여 마침내 시행하지 못하였다. 왕께서 즉위하시고서 양역청(良役廳)을 두고 당상(堂上) 두서너 사람을 가려서 맡겨 정신을 쏟아 강구하게 하셨으나 좋은 방책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곧 폐지하였다.

이해 4월에 왕께서 홍화문(弘化門)에 나아가 오부(五部)의 사서(士庶)를 불러 묻기를, ‘백성의 폐단 중에 양역의 폐단이 크니, 일찍 고치지 않으면 어떻게까지 될는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 성고(聖考)께서 반드시 바로잡으려 하셨으나 뭇 신하가 마침내 덕음(德音)을 받들지 못하였으니, 내가 매우 개탄하여 병을 견디고 임문(臨門)하였다. 유포(游布)·구전(口錢)은 그것이 행할 수 없는 것인 줄 알고 있거니와, 호포·결포는 어느 것이 편리하고 어느 것이 불편한가? 이 밖에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셨는데, 사서(士庶)가 다 대답하기를, ‘호포가 편리합니다.’ 하고 결포가 편리하다고 한 자도 열 중에서 두셋 있었다. 왕께서 뭇 신하에게 물으셨는데, 호조 판서(戶曹判書) 박문수(朴文秀)가 대답하기를, ‘호포는 경비(經費)의 수를 감당할 수 없으니 호전(戶錢)이라야 합니다. 대호(大戶)는 1백 문(文)으로 하고 중호(中戶)는 50문으로 하고 소호(小戶)는 30문으로 하면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아! 잗단 것은 나라의 체모가 아니다.’ 하매, 박문수가 말하기를, ‘신은 쓸데없는 고을을 없애서 경비에 보태려 하였으나 전하께서 어렵게 여기시고 신하들도 어렵게 여기므로 그 차선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만둘 수 없다면 호포를 근본으로 세우고 모자라는 것은 어염(魚鹽)으로 채우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호포는 결포만 못합니다. 결포는 전조(田租)와 아울러 세(稅)를 내므로 관에서 거두기 쉽고 백성이 소요하지 않습니다.’ 하였으나, 왕께서는 오히려 결정하지 못하고 비국 당상(備局堂上)들에게 명하여 비변사(備邊司)에서 직숙(直宿)하면서 편의한 것을 강정(講定)하게 하셨으나 달이 지나도 좋은 방책을 얻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좌의정(左議政) 조현명(趙顯命)홍계희(洪啓禧)가 세운 균역의 방책을 아뢰니, 왕께서 처음에는 어렵게 여기다가 마침내 그 말을 따라서 국중(國中)의 양역(良役) 1필(匹)을 죄다 면제하고 따로 균역청(均役廳)을 두어 어염·결전(結錢)·선무포(選武布) 등의 세를 전관(專管)하게 하였다. 또 저치 상정미(儲置常定米)와 외읍(外邑)의 은여결(隱餘結)을 보태어 경비를 채우고 균세사(均稅使)를 팔도에 보내어 어염세(魚鹽稅)를 바로잡고 은여결을 살펴 내게 하고 드디어 과조(科條)를 엄하게 세우고 신칙하여 이 뒤로는 변경(變更)을 함부로 의논하지 못하게 하셨다. 말년에 이르러 왕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기를, ‘균역의 논의를 창도한 자의 자손이 번창한 뒤에야 균역이 실효가 있다는 것을 믿게 될 것이다.’ 하셨다.

9월에 왕께서 문묘(文廟)에 거둥하여 작헌(酌獻)하고 시사(試士)하셨다. 곧 온양(溫陽)의 온천에 거둥하셨는데, 환후를 목욕하여 요양하기 위한 것이다. 지나는 길에 있는 유현(儒賢)·명상(名相)·충절인(忠節人)의 묘에 다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셨다. 도과(道科)를 설행(設行)하여 선비를 뽑고 호서(湖西) 백성의 조세를 감면하시고 드디어 회란(回鑾)하였다.

27년 신미(辛未) 춘2월(春二月) 대왕 대비(大王大妃)의 존호(尊號)를 정덕(貞德) 이라 가상(加上)하였다. 왕께서 백관을 거느리고 진하(陳賀)하셨다. 각도의 방물(方物)을 멈추고 의장(儀仗)·연여(輦輿)를 새로 고치지 않았는데, 자교(慈敎)에 따른 것이다. 북관(北關)에 기근이 들었는데, 명하여 관동(關東)·영남(嶺南)의 곡물 3만 석을 전선(戰船)·병선(兵船)에 실어 바다로 북관에 날라 옮기고 어사(御史)를 보내어 진구(賑救)하게 하셨다.

3월에 왕께서 대보단(大報壇)에서 희생을 살피셨다. 이달 19일이 의종 황제(毅宗皇帝)가 순국(殉國)한 날이기 때문에 유사(有司)에 명하여 음악을 멈추게 하셨다. 왕께서 시임(時任)·원임(原任)인 대신(大臣)과 구경(九卿)을 거느리고 후원(後苑)의 영화당(映花堂) 앞에 이르러 북향하여 사배(四拜)하셨다. 이어서 예조(禮曹)에 명하여 고황제(高皇帝)·신종 황제(神宗皇帝)가 승하한 날에도 망배례(望拜禮)를 행하되 상례(常例)로 삼게 하셨다.

추9월(秋九月)에 수성 절목(守城節目)을 반포하였다.

28년 임신(壬申) 하5월(夏五月)에 대왕 대비(大王大妃)의 존호(尊號)를 수창(壽昌) 이라 가상(加上)하고 왕의 존호를 장의 홍륜 광인 돈희(章義弘倫光仁敦禧)라 가상하고 왕비의 존호를 장신(莊愼) 이라 가상하였는데, 왕께서 황단(皇壇)에서 신명에게 감통(感通)하신 덕(德)이 있기 때문이다.

6월에 명하여 편집청(編輯廳)을 설치하여 《상례보편(喪禮補編)》을 찬집(纂輯)하게 하셨는데, 짐작하여 손익(損益)한 것은 다 왕의 예단(睿斷)에서 나왔다.

추9월에 우리 주상 전하께서 탄강(誕降)하고 원손(元孫)으로 봉해지셨다.

동12월(冬十二月)에 공시 당상(貢市堂上) 세 사람을 두어 공시의 민폐를 바로잡게 하셨다. 29년 계유(癸酉)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적전(籍田)에서 친경(親耕)하셨는데, 경우(耕牛)는 반을 줄이고 종경(從耕)·선온(宣醞)·설과(設科) 등의 절차를 없애셨다. 하5월(夏五月)에 왕께서 북교(北郊)에서 기우(祈雨)하셨다. 초헌(初獻)하고 나서 소리가 나며 쓸쓸히 바람이 부는데 명하여 장막을 치우게 하고 비를 맞으며 서 계셨으므로 제사를 마칠 때에는 면불(冕黻)이 죄다 젖었다. 사흘 뒤에 비가 모자란다 하여 다시 선농단(先農壇)에서 친히 빌었는데, 비가 쏟아지고서야 그치셨다.

6월에 삼강(三江)에서 촘촘한 그물을 쓰는 것을 금하셨다. 왕께서 명하여 강민(江民)의 폐단을 바로잡게 하시자, 일을 맡은 자가 절목(節目)을 만들어 바쳤는데, 그 가운데에 촘촘한 그물이란 말이 있으므로 왕께서 말씀하기를, ‘촘촘한 그물로 죄다 잡는 것이 어찌 왕정(王政)이겠는가? 금하고 범하는 자는 도배(徒配)하라.’ 하셨다.

추8월(秋八月)에 소녕묘(昭寧墓)를 원(園)으로 개칭(改稱)하고 육상묘(毓祥廟)를 궁(宮)으로 개칭하고 수위관(守衛官)·수복(守僕)·수호군(守護軍)을 두고 제향(祭享)은 한결같이 궁원(宮園)의 규례대로 하게 하셨다. 숙빈(淑嬪)의 시호(諡號)를 화경(和敬) 이라 추상(追上)하였는데, 숙빈이 봉작(封爵)된 지 주갑(周甲)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왕께서 종백(宗伯)에게 말씀하기를, ‘한(漢)·당(唐) 이래로 중국에서는 모두 낳은 어버이를 추숭(追崇)하였으나, 아조(我朝)는 가법(家法)이 엄하고 또 성고(聖考)의 하교가 있으므로 내 뜻이 추숭에 미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한 가지 일만은 짐작하여 마땅한 것을 얻을 수 있겠으나, 외인(外人)이 헤아리지 못하면 반드시 아직도 여사(餘事)가 있다고 할 것이다.’ 하셨다.

9월에 하교하기를, ‘지금 악원(樂院)을 속칭하여 이원(梨園)이라 하나, 이원은 당 명황(唐明皇)이 이름 붙인 것이니, 어찌 법악(法樂)의 부(府)에 대하여 쓸 수 있겠는가? 금하라.’ 하셨다. 곧 명하여 강서원(講書院) 소장인 《능엄경(楞嚴經)》북한(北漢)중흥사(中興寺)에 옮겨 두게 하여 이단을 배척하는 뜻을 보이셨다.

동11월(冬十一月)에 혜국(惠局)에서 아뢰기를, ‘홍부미(紅腐米)를 오래 쌓아 두면 도리어 신미(新米)를 상하니, 값을 싸게 하여 경기 백성에게 팔아서 쓸모 없는 것을 쓸모 있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착하다. 그러나 그것이 먹을 수 없는 것이라면, 어찌 백성을 속일 수 있겠는가? 내가 백성을 위하여 먼저 맛보아야 하겠으니, 홍부미를 빨리 가져오라.’ 하셨다.

12월에 숙종 대왕(肅宗大王)의 존호(尊號)를 유모 영운 홍인 준덕(裕謨永運洪仁峻德) 이라 가상(加上)하고 인경 왕후(仁敬王后)의 존호를 선목(宣穆) 이라 가상하고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존호를 숙성(淑聖) 이라 가상하고 대왕 대비(大王大妃)의 존호를 영복(永福) 이라 가상하였는데, 이듬해가 인현 왕후께서 다시 곤위(壼位)를 회복하신 해이고 또 왕께서 주갑(周甲)이 되시는 해이기 때문이다.

30년 갑술(甲戌) 춘정월(春正月) 초하루 아침에 뭇 신하가 성수(聖壽) 때문에 진하(陳賀)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받아들이지 않고 드디어 태묘(太廟)·영수각(靈壽閣)·육상궁(毓祥宮)에 배알(拜謁)하셨다.

2월에 영남 이정사(嶺南釐正使)가 복명하니, 왕께서 조용히 백성의 고통을 묻고 풍토(風土)·속상(俗尙)에 언급하셨다. 이정사가 전복을 따는 자가 바가지를 차고 바다 밑으로 들어가는 정상을 대단히 아뢰니, 왕께서 섭이중(聶夷中)의 시(詩)를 외고 말씀하기를, ‘신고(辛苦)가 낟알보다 훨씬 심하니 차마 소반에 올리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당장 명하여 날전복의 공헌(貢獻)을 멈추게 하셨다.

31년 을해(乙亥) 춘정월(春正月) 상원일(上元日)에 왕께서 백관을 거느리고 동조(東朝)께 진하(陳賀)하셨는데, 이듬해에 동조의 수가 칠순이 되기 때문이다.

3월에 윤지(尹志)·이하징(李夏徵) 등이 처형되고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이사상(李師尙)·윤취상(尹就商)김일경(金一鏡)의 소하(疏下)인 역적들에게 역률(逆律)을 추시(追施)하고 이광좌(李光佐)·최석항(崔錫恒)·조태억(趙泰億) 등의 벼슬을 추탈(追奪)하였는데, 윤지윤취상의 아들이다. 이에 앞서 을사년157) 국옥(鞫獄) 때에 윤취상은 고문당하다가 죽고 윤지나주(羅州)에 귀양갔는데 밤낮으로 나라를 원망하고 그 아들 윤광철(尹光哲)을 시켜 나주의 향리(鄕吏)와 서로 맺어 계를 만들고 무리를 모아 불궤(不軌)를 꾀하고 객관(客館)의 망화루(望華樓)에 글을 걸어서 인심을 어지럽혔는데, 감사(監司) 조운규(趙雲逵)가 알아내어 아뢰었다. 왕께서 윤지 등을 국문(鞫問)하여 옥사(獄事)에 관련된 역적들을 차등을 두어 처형하거나 귀양보내셨는데, 이 일은 《천의소감(闡義昭鑑)》에 실려 있다. 윤지의 상자 가운데에는 이하징이 나주 목사(羅州牧使)이었을 때에 왕복한 글이 많은데 주무(綢繆)하고 매우 비밀스러워 드디어 이하징을 국문하였다. 이하징신축년158) ·임인년159) 의 역적 이명의(李明誼)·이명언(李明彦)의 조카인데, 감히 김일경 등 일곱 역적의 소(疏)를 일컬어 신하의 절조가 있다 하였으므로, 조정의 신하가 모두 놀라고 분개하여 처형하기를 청하였다. 또 조태구·유봉휘 등이 역적들의 근저(根柢)라 하여 모두 추율(追律)을 시행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르셨다. 최석항병오년160) 에 추탈(追奪)되었다가 그 뒤에 이 광좌가 입상(入相)함에 따라 복관(復官)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광좌·조태억과 함께 추탈되었다.

추8월(秋八月)에 명하여 편집청(編輯廳)을 설치하여 《천의소감》을 찬집하게 하셨는데, 역변(逆變)의 원류(源流)를 기록하기 위한 것이다.

32년 병자(丙子) 춘정월(春正月)에 대왕 대비(大王大妃)의 존호(尊號)를 융화(隆化)라 가상(加上)하고 왕의 존호를 체천 건극 성공 신화(體天建極聖功神化)라 가상하고 왕비의 존호를 강선(康宣) 이라 가상하였다. 왕께서 명정전(明政殿)에서 기곡 서계(祈穀誓戒)를 행하셨다. 끝나고서 대신(大臣)·종백(宗伯)·태학생(太學生)을 불러 사륜(絲綸)을 내려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게 하셨다.

2월에 왕께서 문묘에 작헌(酌獻)하고 물러가 명륜당(明倫堂)에 나아가 친히 대학서(大學序)를 외우고 강서관(講書官)·태학생에게 명하여 차례로 《시전(詩傳)》·《중용(中庸)》을 강독(講讀)하게 하고 문의(文義)를 토론하고 윤음(綸音)을 내려 학문을 권하셨다. 승지(承旨)를 보내어 여조(麗朝)의 명현(明賢) 정몽주(鄭夢周)의 묘(墓)에 치제(致祭)하게 하셨는데, 동방 도학(道學)의 조종이기 때문이다.

하5월(夏五月)에 제도(諸道)에 신칙하여 농사를 권하셨다. 왕께서 친히 어원(御苑)에 나아가 관운(觀耘)하여 백성을 선도하셨다.

6월에 명하여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석담 서원(石潭書院)과 유거(幽居)를 그려서 바치게 하셨는데, 《성학집요(聖學輯要)》를 보고 유례없는 느낌을 일으키셨기 때문이다.

추7월(秋七月)에 왕께서 동조(東朝)의 칠순(七旬)이기 때문에 기사(耆社)의 신하를 불러 선찬(宣饌)하여 경사를 나타내고, 동조께서도 왕께서 63세라 하여 음식을 갖추어 내리셨다. 신하들이 취하여 돌아가고 나서 왕께서 동조에 이르러 모시고 이야기하여 동조의 마음을 기쁘게 하셨다. 물러나실 때에는 날이 이미 밝았는데 법복(法服)을 벗지 않고 바로 정당(正堂)에 나아가 유신(儒臣)을 불러 《중용(中庸)》을 강독(講讀)하셨다. 며칠 뒤에 기사의 신하와 나이 60 이상인 종친(宗親)과 문무 경재(文武卿宰)를 거느리고 동조께 진하(進賀)하셨다. 이윽고 또 사서(士庶)와 함께 경사를 같이하고자 하여 기로과(耆老科)를 설치하여 나이 60 이상인 유생(儒生)·무사(武士)를 시험하고 탁명(坼名)·창명(唱名)을 규례대로 하였다.

8월에 왕께서 다시 친히 백관을 거느리고 동조께 진하하셨는데, 동조의 탄미절(誕彌節)이기 때문이다.

33년 정축(丁丑) 춘정월(春正月)에 침체되어 있는 문무 당하관(文武堂下官)은 그 이름을 적어 첩(帖)을 만들어 바쳐서 등용에 갖추게 하셨다. 관원을 보내어 임진년에 전사하여 장(場)161)안변(安邊)에 있는 자를 치제(致祭)하게 하고 또 강화(江華)충렬사(忠烈祠)에 치제하게 하고 명하여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의 사당을 부조(不祧)하게 하고 적장(嫡長)은 그 벼슬을 세습하게 하셨다. 이때 회양(淮陽)·금성(金城)의 굶주린 백성이 서울에 많이 흘러 들어왔는데, 왕께서 혜국(惠局)에 명하여 그 양식을 도와 주어 본적으로 돌아가게 하고 안집사(安集使)를 보내어 회양·금성의 백성을 안집하여 진구(賑救)하게 하고 회양·금성의 조세·부역·공물을 면제하셨다.

2월에 정성 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가 훙서(薨逝)하셨는데, 왕께서 명하여 상례(喪禮)를 간략하게 하고 공제(公除) 전부터 사서(士庶)의 장사(葬事)를 금하지 말게 하셨다.

3월에 두 진청(賑廳)을 설치하여 굶주린 백성 2만여 명을 나누어 진구(賑救)하였다. 이달에 인원 왕후(仁元王后)께서 훙서(薨逝)하셨다. 처음에 후(后)께서 편찮다가 곧 나으시니, 왕께서 매우 기뻐서 경하하고 제도(諸道)의 구포(舊逋)를 면제하고 친히 너그럽게 처결하여 사죄(死罪) 이하는 죄를 용서하셨다. 얼마 안가서 후께서 다시 위독하시니, 왕께서 관원을 보내어 산천에 빌게 하고, 곧 뜰에 내려가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하늘에 빌어 몸소 대신하기를 바라시니 슬픔이 좌우를 감동시켰다. 후께서 훙서하시니, 왕께서 사모하여 마지않아 그 당(堂)을 이름하여 영모(永慕)라 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어사(御史)를 보내어 단양(丹陽)·회인(懷仁)의 유민(流民)을 안집(安集)하여 저치미(儲置米)로 진구하게 하셨다.

5월에 가물었는데, 왕께서 자신을 책망하고 찬선(饌膳)을 줄이고 형장(刑杖)을 남용하는 것을 경계하고 관원을 보내어 산천에 비를 빌게 하시니, 하늘이 곧 비를 내렸다. 6월에 정성 왕후(貞聖王后)홍릉(弘陵)에 장사하였다. 국제(國制) 가운데 능침(陵寢)에는 사방에 큰 돌을 설치하게 되어 있는데, 승민(僧民)을 징발하여 나르므로 이따금 눌려 죽는 자가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왕께서 명하여 죄다 없애게 하셨는데, 이 일은 《상례보편(喪禮補編)》에 실려 있다.

추7월(秋七月)에 인원 왕후(仁元王后)명릉(明陵)에 장사하였는데, 크고 작은 일을 왕께서 몸소 살펴서 반드시 정성스럽고 미덥게 하여 능히 후(后)의 뜻을 따르셨다. 무릇 능전(陵殿)의 비용은 경자년162) 보다 3분의 1을 줄이고 경기의 결전(結錢)과 북도(北道)의 전조(田租)도 3분의 1을 면제하였다.

8월에 왕께서 경연(經筵)에 나아가셨을 때에 명하여 고(故) 상신(相臣) 노수신(盧守愼)의 후손을 등용하게 하셨는데, 《숙야잠주해(夙夜箴註解)》를 강독하고 느낌을 일으키셨기 때문이다.

동10월(冬十月)에 전조(銓曹)에 신칙(申飭)하여 침체되어 있는 자를 낱낱이 적어 올리게 하셨다. 어사(御史)를 보내어 청안(淸安)의 유민(流民)을 안집(安集)하게 하고 탐라(眈羅)의 곡물을 날라다 진구(賑救)하게 하셨다.

11월에 관원을 보내어 성삼문(成三問) 등 육신(六臣)의 사당에 치제(致祭)하게 하셨다.

12월에 인종(仁宗)의 시책(諡冊)을 개수(改修)하여 인종실(仁宗室)에 봉안하였다. 무릇 시책과 보(寶)는 반드시 태묘(太廟)의 당실(當室) 옆에 봉안해야 하는데, 인종의 시책은 잃어서 전해지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장차 정성 왕후(貞聖王后)우주(虞主)163) 를 묘정(廟庭)에 묻으려고 땅을 파다가 옥찰(玉札) 한 조각을 얻어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인종의 시책이었다. 왕께서 매우 기이하게 여겨 친히 전문(全文)을 베껴서 옥에 새겨 합하여 완편(完篇)을 만들어 인종실에 보관케 하셨다. 명하여 당하관(堂下官)의 홍포(紅袍)를 청록(靑綠)으로 바꾸게 하셨는데, 《대전(大典)》에 따른 것이다.

34년 무인(戊寅)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장차 친히 사직(社稷)에 기곡(祈穀)하려 하시는데, 대신이 왕의 춘추가 높아서 근력을 써서 예(禮)를 행할 수 없다 하여 대행하기를 힘껏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하늘이 백성을 위하여 임금을 세우지, 어찌 임금을 위하여 백성을 냈겠는가?’ 하고, 마침내 친히 행하셨다.

3월에 왕께서 운관(雲觀)164) 에 하교하기를, ‘산꼭대기에 태(胎)를 묻거나 한 고을에 한 태를 묻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이제 《실록(實錄)》을 살펴보건대, 광묘(光廟)와 여러 대군(大君)·왕자(王子)의 태가 묻힌 곳은 함께 한 산등성이에 있으니, 조종(祖宗)을 본받는 것은 여기에 말미암아야 한다. 이제부터 비롯하여 대(代)가 멀고 가까움에 불구하고 태를 한 산에 묻되 서로 거리가 두세 걸음을 넘지 말고 산등성이가 다할 때까지 하고 적자(嫡子)·중자(衆子)·원손(元孫)·군주(郡主)를 달리하지 말라.’ 하셨다.

추7월(秋七月)에 제도(諸道)에 명하여 명나라 사람의 후손을 적어 올리게 하고, 신칙하여 그들을 군역(軍役)에 잘못 충정(充定)한 수령(守令)에게는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을 시행하게 하셨다.

8월에 왕께서 명릉(明陵)에 거둥하고 회란(回鑾)하는 길에 가을장마가 벼를 손상한 것을 보고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이것은 내 허물이다.’ 하고, 열흘 동안 감선(減膳)하여 농민에게 사죄할 것을 명하셨다.

동12월(冬十二月)에 예조(禮曹)에 명하여 《황단봉실의(皇壇奉室儀)》를 짓게 하셨다.

35년 기묘(己卯) 춘3월(春三月)에 관서(關西)의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채권(債券)을 죄다 불사르고 강계(江界)에서 삼(蔘)을 사는 값을 늘리게 하셨다.

하5월(夏五月)에 인원 왕후(仁元王后)태묘(太廟)의 숙종실(肅宗室)에 부제(祔祭)하고 반사(頒赦)하셨다. 명하여 헌가(軒架)는 벌이되 연주하지 말게 하고 말씀하기를, ‘예전에 부자(夫子)가 자장(子張)·자하(子夏)를 다 이 때문에 군자(君子)라 허여하였고, 아조(我朝)에서는 결채 가요(結彩歌謠)165) 를 성조(聖祖)께서 없애시고, 전후의 고취(鼓吹)를 성고(聖考)께서 벌이되 연주하지 않게 하셨는데, 감히 지나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이것도 예(禮)이다.’ 하셨다.

6월에 왕께서 봉작(封爵)되신 지 주갑(周甲)이 되기 때문에 정전(正殿)에 나아가 뭇 신하의 진하(陳賀)를 받으셨다. 오흥 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의 따님을 왕비로 책봉(冊封)하셨다.

추7월(秋七月)에 우리 주상 전하를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하셨다. 이달에 왕께서 태묘(太廟)에 전알(展謁)하고 황단(皇壇)에 전배(展拜)하셨다. 문묘(文廟)에 작헌(酌獻)하고 하교하기를, ‘한 고조(漢高祖)의 4백 년의 기업(基業)은 실로 태뢰(太牢)로 공자(孔子)를 제사한 데에 근본하였다. 그 예(禮)를 생략할 수 없다.’ 하였다. 이어서 사성(四聖)의 신위(神位)에도 모두 친헌(親獻)하고 계성사(啓聖祠)에 재배례(再拜禮)를 행할 것을 명하셨다.

8월에 왕께서 하교하기를, ‘임금은 법으로 아랫사람을 어거하는데, 뜻대로 가감한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편안히 지낼 수 있겠는가? 경자년166) 이전에는 결안(結案)을 기다리지 않고 처형한 자가 없었는데, 한번 행하고서는 드디어 관례로 삼아 심하면 혹 한번의 전지(傳旨)로 처형한다. 뒷날 임금이 되는 자가 혈기에 맡겨 답습하고 신하가 된 자가 당습(黨習)을 부려 답습한다면 그 유폐(流弊)는 스스로 내가 인도한 것이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절로 두려워진다. 이 뒤로는 결안을 기다리지 않은 것과 군문(軍門)에서 효시(梟示)하는 것과 전지로 처형하는 것과 역률(逆律)을 추시(追施)하는 것은 일체 영구히 없애고, 임금이 혹 어기는 것이 있거든 법을 집행하는 신하가 이 하교로 다투라. 그러지 않고 영합(迎合)하고 승순(承順)하면 이는 간사하고 구차하게 비위를 맞추는 무리일 것이니, 왕법(王法)이 분명하고 천망(天網)이 넓은데 어찌 감히 그 죄를 피할 수 있겠는가? 준수하면 흥하고 준수하지 않으면 망할 것이니, 아! 금오(金吾)·추조(秋曹)·양사(兩司)는 인쇄하여 관부에 두고 길이 후세에 전하라.’ 하셨다.

36년 경진(庚辰) 춘2월(春二月)에 준천(濬川)하였다. 내[川]는 백악(白岳)·인왕산(仁王山)·목멱산(木覓山)의 물을 합하여 도성(都城) 가운데를 둘러서 동으로, 오간수문(五間水門)을 나가 또 동으로 가 영제교(永濟橋) 동남에서 중량천(中梁川)과 만나 한강(漢江)으로 들어가는데,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개천(開川)이라 한 것이 이것이다. 세종(世宗) 때에 이선로(李善老)가 더러운 물건을 투입하는 것을 금하여 명당(明堂)의 물을 맑히기를 청하고,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 어효첨(魚孝瞻)이 상소하여 그 형세가 행할 수 없는 것이라 배척하였는데, 세종께서 어효첨을 옳게 여기고 이선로의 말을 채용하지 않으셨다. 역대에서 세종 때의 일을 존중하고 믿어서 드디어 바닥을 쳐서 소통시키는 일을 모두 거행하지 않은 것이 또한 3백여 년이 되므로 내[川]가 점점 막혀서 거의 둑과 높이가 같아져 장마 끝에는 이따금 넘치는 재앙이 있었다. 왕께서 경(耿)·박(亳)고사(故事)167) 에 따라 여러 번 임문(臨門)하여 뭇 백성에게 물으셨는데, 모두가 쳐내는 것이 편리하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이것이 백성을 위한 것이기는 하나 어찌 백성의 힘을 괴롭힐 수 있겠는가?’ 하고, 수만 민(緡)을 내어 일꾼을 사서 쳐내게 하되 재촉하지 말도록 경계하였으나 몇 달 안 가서 공역이 끝났다. 그래서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한성 판윤(漢城判尹)과 삼군문(三軍門)의 대장(大將)으로 준천 당상(濬川堂上)을 겸하게 하고 도청 낭청(都廳郞廳) 각 1인을 두어 해마다 준천하는 것을 상규(常規)로 삼았다.

하5월(夏五月)에 왕께서 남단(南壇)에서 기우(祈雨)하고 회란(回鑾)하다가 태상(太常)에 이르러, 신실(神室)의 한 위판(位版)에 ‘대명동정관군(大明東征官軍)’이라 써 있는 것을 보고 드디어 명하여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손자 이태상(李泰祥)을 헌관(獻官)으로 삼고 명나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의 손자 이훤(李萱)을 대축(大祝)으로 삼고 노량(露梁)에 제단을 설치하여 치제(致祭)하게 하고 이어서 위판을 선무사(宣武祠)에 배향(配享)하게 하셨다.

동12월(冬十二月)에 왕께서 대사성(大司成)에게 명하여 국자생(國子生)을 거느리고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또 체직(替直)한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입시하게 하여 하교하기를, ‘임금과 스승의 책무를 내가 감히 그렇다 할 수 없다마는, 노년에 한 달에 세 번 《중용(中庸)》을 강독(講讀)하였으나 실효(實效)를 보지 못하였으므로, 경들 및 유생들과 함께 문난(問難)하여 내 천박한 학문을 보태고자 한다.’ 하셨다. 그래서 무릇 천인 성명(天人性命)부터 존양 성찰(存養省察)까지 유미(幽微)한 데를 출입하여 광대하고 충만하게 토론하셨는데, 그 말이 다 적을 만하다. 무릇 연석(筵席)에 있는 신하들이 자신이 회금점슬(回琴點瑟) 사이에 있는 듯이 황홀하여 간사한 마음이 일어날 수 없었다. 함께 일어서서 경례하고 말하기를, ‘인재를 만드는 데에는 강설(講說)이 중대하다는 것은 수사염락(洙泗濂洛)에서 보아 증험할 수 있습니다. 이번 거조(擧措)가 관감(觀感)을 감화시키는 것이 워낙 적지 않습니다마는, 정제(定制)가 없이 백성을 스스로 감화하게 하는 것은 요순(堯舜)이라도 할 수 없으니, 정제할 것을 감히 청합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착하다. 사유(師儒)의 장(長)이 국자생과 함께 한 달에 세 번 명륜당(明倫堂)에서 강회(講會)하되 장구(章句)만 이어 가지 말고 이의(理義)를 숭상하라.’ 하셨다.

37년 신사(辛巳) 동11월(冬十一月)에 명하여 연여(輦輿)에 금을 쓰던 것을 모두 구리로 바꾸게 하셨다. 12월에 하교하기를, ‘우리 동방의 예악(禮樂)·문물(文物)이 중국에 견주게 된 것은 다 기성(箕聖)이 끼친 은택이다. 특별히 중신(重臣)을 보내어 기성묘(箕聖墓)에 치제(致祭)하라.’ 하셨다. 곧 명하여 곤수(閫帥)에 대한 결장(決杖)도 시종(侍從)의 예(例)와 같이 속(贖)으로 논하게 하셨다.

38년 임오(壬午) 하4월(夏四月)에 경조(京兆)·오부(五部)에 신칙하여 어려서 부모를 잃고 다른 성(姓)을 가칭하여 성으로 삼은 자가 각각 스스로 고하게 하시어, 모두 60여 인이 죄다 제 성을 회복하였다.

동10월(冬十月)에 안집사(安集使)를 보내어 경기·삼남(三南)의 백성을 안집하게 하셨다. 남한(南漢)·북한(北漢)·강도(江都)의 어공미(御供米)를 폐지하였다.

39년 계미(癸未)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근정전(勤政殿) 옛터에 나아가 뭇 신하의 진하(陳賀)를 받으셨는데, 성수(聖壽)가 칠순(七旬)이기 때문이다. 곧 연화문(延和門)에서 조참(朝參)하고 육전(六典)에 따라 육관(六官)에 신칙하기를, ‘어떻게 사람을 등용하는가? 공도(公道)를 넓히고 사의(私意)를 없애야 한다. 어떻게 수령(守令)을 의망(擬望)하는가? 관직을 위하여 사람을 가려야 한다. 아! 이방 승지(吏房承旨)는 이조(吏曹)에 신칙하라. 호구(戶口)가 문란하니 바로잡아야 한다. 생민(生民)이 위험에 처하였으니 구제해야 한다. 국저(國儲)가 갈진(竭盡)하였으니 절약해야 한다. 아! 호방 승지(戶房承旨)는 호조(戶曹)에 신칙하라. 제사하여도 깨끗하지 않으면 신명을 감동시킬 수 없고 예(禮)를 행하여도 질서를 잃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 아! 예방 승지(禮房承旨)는 예조(禮曹)에 신칙하라. 융정(戎政)이 허술한 것은 책임이 사마(司馬)에 있고 무부(武夫)가 많이 침체되어 있는 것은 허물이 서전(西銓)에 있다. 아! 병방 승지(兵房承旨)는 병조(兵曹)에 신칙하라. 옥에 갇힌 자의 모습이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니 천화(天和)를 손상하는 것이 많다. 문안(文案)을 상세히 살피면 대저 어찌 반드시 죽어야 할 자 중에서도 살릴 길을 찾을 수 없겠는가? 아! 형방 승지(刑房承旨)는 형조(刑曹)에 신칙하라. 공장(工匠)도 백성인데, 근심하고 조석(朝夕)도 보전하지 못한다. 수부(水部)는 한가한 관직이라 말고 제 직무를 닦으라. 아! 공방 승지(工房承旨)는 공조(工曹)에 신칙하라.’ 하셨다.

3월에 호남(湖南)의 도신(道臣)이 굶주린 백성 중에서 죽은 자가 4백 53명임을 아뢰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내 허물이다.’ 하고, 사흘 동안 감선(減膳)할 것을 명하셨다.

추8월(秋八月)에 하교하기를, ‘예전에 송 인종(宋仁宗)귀비(貴妃)의 수식(首飾)이 다 구슬임을 보고 머리에 가득히 흰 것이 어지럽다는 말을 하였는데, 귀비가 황공하여 구슬을 제거하니, 인종이 크게 기뻐하여 모란꽃을 잘라서 내렸다. 며칠 안가서 경사(京師)의 구슬 값이 천해졌으니, 위에서 행하면 아래에서 본뜨는 것이 대개 이처럼 빠르다. 그러나 나는 번상(蕃商)이 구슬을 사서 저자에 파는 것이 사치의 근본이라고 생각한다. 그 근본을 제거하지 않고 어찌 그 말단을 다스리겠는가?’ 하셨다. 그래서 명하여 왜관(倭館)에서 구슬을 사는 자는 잠상률(潛商律)로 논하게 하셨다.

40년 갑신(甲申)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인일제(人日製)168) 를 설행(設行)하여 친히 선비들을 책시(策試)하셨는데, 대책(對策)한 것에 절직(切直)한 말이 없었다. 왕께서 하교하기를, ‘까마귀·소리개가 알을 깨면 봉황(鳳凰)이 오지 않는다. 이는 반드시 이현필(李顯弼)의 일 때문일 것이다. 내가 덕이 없기는 하나, 대강 듣건대 단주(丹朱)169) 와 같지 말라는 말을 우(禹)가 경계하고 순(舜)이 받아들였고, 겉으로 인의(仁義)를 베푼다는 말을 급암(汲黯)이 말하고 한 무제(漢武帝)가 받아들였다 한다. 어찌 이현필 한 사람에게만 너그러이 용서하는 은전을 베풀지 않겠는가? 그 마음씀이 바르지 않으므로 대간(臺諫)이 청함에 따라 처분하였으나, 사기(士氣)가 꺾이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늘그막에 이르러 어찌 후손에게 우족(優足)한 도리를 끼칠 것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이현필에게 직첩(職牒)을 도로 주고 서용(敍用)하라.’ 하셨다.

2월에 왕께서 종친(宗親)·문무관(文武官)으로 나이가 일흔 이상인 사람과 함께 대사례(大射禮)를 행하셨다. 이튿날 적전(籍田)에서 친경(親耕)하셨다.

3월에 왕께서 친히 대보단(大報壇)에 향사(享祀)하셨다. 제사를 마치고서 남은 정성이 그치지 않아서 제단 앞에 노복(露伏)하셨는데, 날이 밝기에 이르러 백기(白氣)가 황악(黃幄) 위에 퍼져 걸치니, 보는 자가 기이하게 여겼다.

하4월(夏四月)에 중외(中外)의 무복(巫卜)·잡술(雜術)을 금하였다.

5월에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를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다.

동10월(冬十月)에 사대부에게 친영례(親迎禮)를 신칙하셨는데, 《시경》 제풍(齊風)을 강독하고 느낌을 일으키셨기 때문이다.

41년 을유(乙酉) 춘2월(春二月)에 왕께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거느리고 남교(南郊)의 성경대(省耕臺)에 이르러 성경하고 경기 백성의 종량(種糧)을 도와 주셨다. 3월에 왕께서 친히 대보단(大報壇)에 향사하셨다. 철찬(撤饌)하고 나서 신하들에게 말씀하기를, ‘아헌(亞獻)하고서 기운이 더욱 맑아지는 것이 거의 신명의 도움 같았다.’ 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왕께서 친히 약제(禴祭)를 지내셨다.

추9월(秋九月)에 왕께서 명하여 고려 왕릉의 금표(禁標)에 관한 수교(受敎)를 인쇄하여 다섯 사고(史庫)에 나누어 보관하고 개성(開城)·강화(江華)·경기 감영(京畿監營)에 반포하여 백성의 경작·매장을 금하되 범하는 자는 지방관(地方官)도 아울러 죄를 처단하게 하셨다.

43년 정해(丁亥) 춘2월(春二月)에 왕께서 세손(世孫)과 함께 적전(籍田)에서 친경(親耕)하셨다. 하루 전에 선농(先農)에게 제사할 때 왕께서 초헌(初獻)하시고 세손이 아헌(亞獻)하셨으며, 이날 왕께서 다섯 번 쟁기를 미시고 세손께서 일곱 번 미셨다. 왕비께서도 빈어(嬪御)와 함께 경복궁(景福宮)의 채상단(採桑壇)에서 친잠(親蠶)하셨다.

3월에 전주(全州)에 불이 나서 2천 3백여 호를 연소(延燒)하였는데, 명하여 쌀 2천 3백여 석을 주고 결전(結錢) 1만 냥을 빌려 주게 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정부(政府)·후원(喉院)·팔도(八道)·양도(兩都)에 고치를 나누어 내리셨다.

동10월(冬十月)에 명하여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후손을 등용하게 하셨다.

45년 기축(己丑) 하5월(夏五月)에 왕께서 적전(籍田)에 거둥하여 관예(觀刈)하시고 회란(回鑾)하여 이튿날 국자생(國子生)을 불러 《숙야잠(夙夜箴)》을 외어 스스로 경계하셨다. 며칠 뒤에 친히 밀을 받으셨다. 경외(京外)에 신칙하여 두곡(斗斛)·권형(權衡)을 동일히 하게 하셨다.

46년 경인(庚寅) 춘정월(春正月)에 편집청(編輯廳)을 설치하여 《문헌비고(文獻備考)》를 편찬하게 하셨다. 국조(國朝)의 전장(典章)은 금궤(金櫃)에 담고 석실(石室)에 넣어 명산(名山)에 보관한 것이 있으나 이 밖에는 증거할 것이 없으므로 무릇 조종(祖宗)의 예악(禮樂)·문물(文物)은 노사(老師)·숙유(宿儒)도 혹 그 연혁(沿革)을 모르고 육관(六官)·서직(庶職)은 다 서리(胥吏)의 전설(傳說)에 의지하므로 뒹굴고 잘못되어 점점 그 옛것을 잃어 갔다. 그래서 왕께서 이 글을 편찬하도록 명하셨는데, 편목(篇目)은 모두 마단림(馬端臨)《문헌통고(文獻通考)》대로 하되 개괄(槪括)을 조금 더하였다. 이때부터 나라에 일이 있으면 의거하여 살피는 데에 이 글에 힘입은 것이 많았다.

하4월(夏四月)에 측우기(測雨器)를 나누어 내리셨다. 왕께서 세종(世宗) 때의 측우기의 제도를 얻어 탁지(度支)에 명하여 만들어서 두 대궐과 운관(雲觀)에 두고 또 양도(兩都)·팔도(八道)에 나누어 보내어 비가 내릴 때마다 치수를 보고하게 하셨는데, 《문헌비고》 상위고(象緯考)를 편찬함에 따라 이 명이 있었다.

6월에 주부군(州府郡)의 학교에 문묘(文廟)의 위차(位次)대로 육현(六賢)을 같이 배향(配享)하게 하셨는데, 학교고(學校考)를 편찬함에 따라 이 명이 있었다. 포청(捕廳)의 난장형(亂杖刑)을 영구히 없애게 하셨는데, 형고(刑考)를 편찬함에 따라 이 명이 있었다.

추7월(秋七月)에 왕께서 세손과 함께 홍문관(弘文館)에 거둥하여 강학(講學)하고 선찬(宣饌)하셨다.

47년 신묘(辛卯) 동10월(冬十月)에 전주(全州)조경묘(肇慶廟)를 세웠다. 처음에 일곱 도(道)의 선비 이득리(李得履) 등이 상소하여 국조(國朝)의 시조인 신라 사공(司空)의 사당을 세우기를 청하니, 왕께서 종백(宗伯)에게 명하여 대신(大臣)에게 의논하게 하셨는데, 의논이 같지 않았다. 다시 정신(廷臣)을 불러 물으셨는데, 정신이 다 대답하지 못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예(禮)는 인정에서 말미암거니와, 이제 조선은 사대부도 오히려 시조를 존경하여 그 예를 차리는데, 더구나 나라의 시조이겠는가? 고구려·신라도 다 시조묘(始祖廟)가 있거니와, 예에는 본디 풍속과 의리에 따라서 생기는 것이 있다.’ 하셨다. 그래서 유사(有司)를 보내어 전주경기전(慶基殿) 북쪽에 사당을 세우게 하고 세손에게 명하여 사판(祠版)을 쓰게 하고 선공(先公)이라 칭하였다. 자정전(資政殿)에 봉안하는 날 곤면(袞冕)을 갖추고서 전배(展拜)하고 대신·종백에게 명하여 의장(儀仗)을 갖추고서 사당에 이르러 봉안하게 하셨다. 호남(湖南) 열 한 고을의 결전(結錢)·선무포(選武布)와 구포(舊逋)를 감면하고 경기·호서(湖西)의 연(輦)이 지나는 고을도 이와 같이 하였다.

48년 임진(壬辰)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편전(便殿)에서 국자생을 소견하고 선찬(宣饌)하였다. 사민(四民)에게 차등을 두어 쌀을 내리고 경외(京外)의 백성 가운데 가난하여 혼인을 못하거나 매장을 못한 사람들은 관아에서 혼인 비용과 장례 비용을 주게 하셨다.

3월(三月)에 왕께서 명나라 사람의 후손과 선조 임진년에 사절(死節)한 사람의 후손을 거느리고 근정전(勤政殿) 옛터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셨는데, 재조(再造)의 갑자(甲子)를 거듭 만났기 때문이다.

동10월(冬十月)에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존호(尊號)를 소휴 연경 돈덕 수성(昭休衍慶敦德綏成) 이라 가상(加上)하고 명성 왕후(明聖王后) 김씨(金氏)의 존호를 희인(禧仁) 이라 가상하였는데, 공덕(功德)이 세실(世室)에 들어가 마땅하기 때문이다. 곧 왕의 존호를 대성 광운 개태 기영(大成廣運開泰基永) 이라 가상하고 정성 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의 존호를 공익(恭翼) 이라 가상하고 왕비 김씨의 존호를 예순(睿順) 이라 올렸는데, 뭇 신하가 청한 것이다.

49년 계사(癸巳)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니 세손이 백관을 거느리고 진하(陳賀)하였는데, 성수(聖壽)가 80이고 즉위하신 지 50년이 되기 때문이다. 신문고(申聞鼓)를 건명문(建明門)에 걸고 원통한 마음을 품은 백성이 북을 쳐서 아뢰게 하셨다. 사민(四民)에게 차등을 두어 쌀을 내리셨다.

2월에 양로연(養老宴)을 행하였는데, 세손이 청한 것이다.

하6월(夏六月)에 개천(開川)을 돌로 쌓았다. 이에 앞서 개천 바닥을 쳐 낼 때에 양 언덕이 장마에 무너져 개천을 막을 것을 염려하여 버드나무를 심어서 막았으나 그래도 아주 튼튼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왕께서 명하여 돌로 둑을 쌓게 하시니, 튼튼하고 정밀하여 엄연히 왕거(王居)의 체세(體勢)를 이루었다. 공역이 끝나고서 왕께서 세손과 함께 광통교(廣通橋)에 나아가셨는데, 세손을 돌아보고 말씀하기를, ‘뜻이 있는 자는 일이 마침내 이루어진다. 무릇 유위(有爲)하려면 먼저 뜻을 세워야 하니 이를 힘쓰라.’ 하셨다.

50년 갑오(甲午)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근정전(勤政殿) 터에 나아가 등준시(登俊試)170) 를 행하셨는데, 국초(國初)의 고사(故事)를 행한 것이다. 3월에 왕께서 하교하기를, ‘우리 나라의 노비법(奴婢法)은 기성(箕聖)에게서 비롯하였으나, 기성은 이것을 설치하여 절도(竊盜)를 막았을 뿐이다. 어찌 대대로 자손이 길이 노비가 되게 하였겠는가? 또 더구나 공물·부역·조세의 법은 남자에게는 역(役)이 있으나 여자에게는 역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노비를 아울러 역을 매기니, 매우 부당하다. 이 뒤로는 비공(婢貢)은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죄다 폐지하라. 그 경상(經常) 비용으로 가져다 주는 것은 비국(備局)·혜국(惠局)이 상의하여 아뢰라.’ 하셨다. 이에 앞서 31년에 왕께서 내사복시(內司僕寺)의 노비가 혼취(婚娶)하지 못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 그 명색을 죄다 폐지하려 하셨으나 경상 비용을 충당할 길이 없는 것을 걱정하여 다만 노공(奴貢)을 한 필 줄이고 비공을 반 필 줄이라고 명하셨는데, 이때에 이르러 공사 비공(公私婢貢)을 죄다 폐지하고 그 경상 비용은 적곡(糴穀)으로 대충하게 하셨다. 이달에 왕께서 옥당(玉堂)과 춘방(春坊)에 거둥하여 친히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독(講讀)하셨는데, 세손이 시강(侍講)하였고 옥당과 춘방에 선찬(宣饌)하셨다.

하5월(夏五月)에 가물었는데, 관원을 보내어 기우(祈雨)하고 열 가지 일로 자책(自責)하고 구언(求言)하고 옥을 열어 죄수를 석방하시니,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추7월(秋七月)에 왕께서 숭정전(崇政殿)에서 진하(陳賀)를 받고 그해 전조(田租)의 반을 감면하고 아홉 곳의 영선(營繕)을 철폐하고 공시(貢市) 백성이 바치는 것을 감면하고 나이 여든 이상인 사서(士庶)에게 한 자급(資級)을 올려 주셨다. 곧 세손과 함께 창의궁(彰義宮)에 거둥하여 기사(耆社)의 신하와 나이 여든 이상인 동민(洞民)에게 차등을 두어 비단을 내리셨다.

51년 을미(乙未) 하4월(夏四月)에 왕께서 조강(朝講)·조참(朝參)을 행하셨는데,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시사(視事)·강학(講學)은 임금의 직분이다. 그러므로 하루 이틀에 만 가지 일을 보살핀다 하였다. 내가 계사년171) 조강·조참의 일을 생각하면 억지로 일어나 연석(筵席)에 나아가도 강서(講書)할 때가 되면 이미 말소리를 이루지 못하였다. 이 일을 다시 하려 하더라도 어찌 될 수 있겠는가?’ 하셨다.

동10월(冬十月)에 왕께서 병환이 있어 편찮으셨다.

12월에 왕세손에게 명하여 기무(機務)를 대청(代聽)하게 하셨다. 이때 왕께서 앉아 있지 못하시고 앉으면 반드시 세손을 시켜 부축하게 하고 보아도 사물을 가리지 못하시므로 세손이 늘 옆에서 고하였다. 이 때문에 태의(太醫)가 밤낮으로 떠나지 않고 약원 제조(藥院提調)가 새벽에 들어와 세 번 탕제(湯劑)를 바치고 저녁이 되어야 돌아가는 것이 이미 여러 해 되었는데, 겨울이 되면 숨이 더욱 막히고 담(痰)이 오르내려 마지않았다. 일찍이 상참을 행할 것을 명하여 이미 갖추게 하였는데, 세손이 그만두기를 청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이것은 내 잠꼬대 같은 말이나, 이미 명하였으니 그 말을 실행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좌우에게 명하여 부축하게 하고 나가시어 자리에 오르려 하시다가 기(氣)가 어지러워 대내(大內)로 돌아가셨는데, 세손에게 말씀하기를, ‘너에게 대청시키려 한 지 오래 되었다. 사전(祀典)을 대행해야 할 조짐이다.’ 하고, 또 이제부터 잠꼬대 같은 말은 네가 선포하지 말도록 하라고 경계하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교하기를, ‘오늘 진하(陳賀) 때에는 백관이 집경당(集慶堂)에 들어와 예를 행하라.’ 하셨다. 이때 이미 밤 5고(五鼓)이었는데, 중관(中官)이 정원(政院)에 전하였다. 적신(賊臣) 홍인한(洪麟漢)이 좌의정(左議政)이었는데 반드시 임금의 분부를 선포하려 하므로, 세손께서 여러 번 사람을 보내어 홍인한에게 말하기를, ‘날이 밝아 담(痰)이 내리기를 기다려서 이 분부를 반포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하셨으나, 홍인한이 끝내 듣지 않고 마침내 밤에 백관을 재촉하여 모이게 하였으므로 서울 사람들이 모두 놀라워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좌우가 이 일을 고하니, 왕께서 탄식하고 말씀하기를, ‘백성이 다들 나를 늙어서 정신이 어지러운 임금으로 여길 것이다.’ 하셨다. 그래서 세손에게 품신(稟申)하지 않았다 하여 중관을 죄주고 이어서 명하여 예를 행하고 백관을 파하여 보내게 하셨다. 이때부터 왕께서 더욱 대청시킬 뜻을 결정하여 세손의 손을 잡고 말씀하기를, ‘내가 너에게 선위(禪位)하려 하는데, 나는 자의(紫衣)를 입고 너에게 임하고 너는 홍의(紅衣)를 입고서 나를 섬기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그러나 네 마음을 상하게 할세라 염려하여 차선을 생각하여 너에게 대청시키려 하는데, 대청하면 반드시 대조(大朝)께 여쭈어야 하므로 도리어 더욱 번거로울 것이니, 나는 대청에 따라 나라의 일을 너에게 죄다 맡기려 한다.’ 하셨다.

이때에 적신 정후겸(鄭厚謙)이 화완 옹주(和緩翁主)의 후사가 된 양자로서 그 어머니와 함께 용사(用事)하여 매우 세력을 부렸는데, 홍인한은 세손의 외척으로서 바라는 것이 적지 않았으나, 그러나 세손께서 늘 그 사람됨이 탐욕스럽고 포악하며 지식이 없는 것을 더럽게 여겨 낯빛이나 말씀을 너그럽게 하신 적이 없으므로 홍인한이 불만하고 원망하여, 드디어 정후겸 모자에게 붙어서 꾀하여 평안 감사(平安監司)가 되고 돌아와서는 또 후원을 받아서 입상(入相)하였다. 이 세 사람은 세손께서 영명(英明)하시어 뒷날 헤아릴 수 없는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홍지해(洪趾海)·윤양후(尹養厚) 등과 맺어 사우(死友)가 되어 밤낮으로 비어(蜚語)를 만들어 저위(儲位)를 위태롭게 하려고 꾀하고, 또 홍지해를 끌어들여 함께 힘을 합하려고 하였다. 왕께서 환후가 심한 때를 타서 여러 번 홍지해를 정승으로 천거하였으나, 왕께서 그때마다 답하지 않으시고 세손에게 말씀하기를, ‘좌상(左相)은 반드시 홍지해를 우의정(右議政)으로 삼고 윤태연(尹泰淵)을 훈련 대장(訓鍊大將)으로 삼아야 마음에 쾌할 것이다.’ 하고, 곧 또 말씀하기를, ‘세상에 어찌 정승이 청하는 일이 있겠는가?’ 하셨다. 홍인한이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윤양후정후겸 모자와 함께 꾀하는 것이 더욱 급해졌고 세손의 궁료(宮僚)인 홍국영(洪國榮)이 목숨 걸고 지키고 떠나지 않으며 정민시(鄭民始)와 함께 늘 보좌하는 것을 꺼려서 여러 번 홍국영 등을 세손께 참소(讒訴)하여 그 세력을 고립시키려 하였으나, 세손께서 끝내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이때에 이르러 왕께서 시임(時任)·원임(原任)인 대신(大臣)을 불러 대청시킬 뜻을 이르셨는데, 홍인한이 앞장서서 옳지 않다고 말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아조(我朝)에서 대청이 전후에 잇달아 있었던 것은 노고를 나누려는 것일 뿐이 아니라 저이(儲貳)가 나라의 일을 밝게 익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노론(老論)·소론(少論)도 알아야 할 것이고 이판(吏判)·병판(兵判)도 알아야 할 것이다.’ 하셨는데, 홍인한이 분노를 낯빛에 나타내며 말하기를, ‘동궁(東宮)께서 이판·병판을 아실 것 없고 노론·소론을 아실 것 없고 또 나라의 일을 아실 것 없습니다.’ 하였다. 이때 왕께서 답답하여 스스로 떨치지 못하고 다만 한숨쉬고 문지방을 두드리며 말씀하기를, ‘경들은 물러가라.’ 하시매, 대신들이 물러가려 하였다. 그런데 왕께서 오히려 스스로 그만두지 못하여 다시 불러들여 말씀하기를, ‘내 병이 이렇거니와, 그 중에서도 담이 오르고 헛소리가 나는 것이 급한데 혹 한밤에 촌지(寸紙)를 내어 경들을 부르더라도 내가 영상(領相)·좌상(左相)이 어느 사람인지 가리지 못한다면 나라의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경들과 이 일을 논할 만하지 못하니, 차라리 내 심법(心法)을 동궁에게 전하겠다.’ 하고, 이어서 동궁에게 명하여 《자성편(自省編)》·《경세문답(警世問答)》을 강독하게 하셨다. 대신이 물러가니, 왕께서 또 문지방을 두드리며 말씀하기를, ‘대신이 이러하니 조정의 일이 될 수 없다. 종사(宗社)와 백성을 어찌하는가?’ 하셨다.

열흘 뒤에 왕께서 명하여 상참(常參)을 행하였는데, 세손에게 기대어 앉았다가 조금 뒤에 병환이 발작하여 도로 누우셨다. 대신을 불러 큰 소리로 명을 따르지 않는 것을 꾸짖고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대청하라는 분부를 써서 내리게 하셨는데, 홍인한이 몸으로 승지를 가려 왕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고는 또 말하기를, ‘신하로서 누가 감히 이 분부를 쓸 수 있겠습니까?’ 하니, 왕께서 노하여 꾸짖고 말씀하기를, ‘경들은 빨리 물러가라.’ 하셨다. 물러가니, 왕께서 정원(政院)에 하교하기를, ‘순감군(巡監軍)은 동궁에 들어가 점하(點下)하고 이비(吏批)172) ·병비(兵批)173) 는 여쭌 뒤에 동궁에 들어가 점하하라.’ 하셨다. 그래서 홍인한이 다시 대신들에 앞장서서 구대(求對)하여 성명(成命)을 거두시기를 청하니, 왕께서 경묘(景廟)께서 ‘좌우가 가하겠는가 세제(世弟)가 가하겠는가?’ 하신 비답(批答)을 외고 말씀하기를, ‘내가 근자에 눈이 어두워 정망(政望)에 낙점(落點)하지 못하므로 중관(中官)이 대신하여 부표(付標)하는데, 만일 중관이 내 명을 전도(顚倒)시키더라도 내가 어떻게 깨닫겠는가? 차라리 내 손자에게 맡기는 것이 당연하겠다.’ 하셨다. 영의정(領議政) 한익모(韓翼謨)가 말하기를,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시니 지금의 중관에게는 틀림없이 그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왕께서 다시 한숨쉬며 말씀하기를, ‘장차 내 손자에게 대내(大內)에서 대로(代勞)시키겠다.’ 하셨는데, 홍인한이 다시 말을 늦추어 ‘대내의 일은 신들이 알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이날 저녁에 왕께서 중관에게 명하여 계보(啓寶)를 동궁에게 보내게 하셨는데, 세손께서 눈물을 흘리며 굳이 사양하기를, ‘계보가 어찌 조정의 신하와 나라 사람이 모르게 주고받는 것이겠습니까?’ 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내 기운은 네가 아는 바이다. 저 대신과 다투기 어려우므로 이런 부득이한 일을 하는 것이니, 내가 너에게 내밀히 주더라도 후세에 어찌 그르게 여길 자가 있겠는가? 시상(時相)에게 죄가 있다고 말하는 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내가 네 뜻을 밝히겠다.’ 하고, 드디어 승전색(承傳色)에게 명하여 정원에 전하기를, ‘충자(沖子)가 상소하면 두 자의 분부를 내리겠다.’ 하셨는데, 두 자는 ‘선위(禪位)’를 가리킨 것이다. 이 때문에 세손께서 감히 상소하지 못하셨으나, 성후(聖候)가 이때부터 더욱 심해지고 대청하는 일은 바야흐로 미결된 가운데에 있는데, 홍인한정후겸 모자가 안팎으로 방해하여 온갖 계책을 써서 종사의 위망(危亡)이 호흡(呼吸)하는 사이에 닥쳐 있었다. 그러므로 홍국영이 근심하고 분개하여 정민시와 함께 연명으로 상소하여 토죄(討罪)를 청하려 하였으나 세손께서 옳지 않게 여겨 힘써 말리셨다.

전 참판(參判) 서명선(徐命善)이 상소하기를, ‘생각하건대, 우리 성상께서 기무(機務)가 번거로운 것은 요양에 방해되므로 선조(先朝)의 고사(故事)에 따라 오늘의 하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달 20일 입시(入侍)하였을 때에 좌의정 홍인한이 감히 말하기를, 「동궁께서 알 것 없습니다.」 하였으니, 대저 저군(儲君)이 할 수 없다면 어떤 사람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까? 방자하고 무엄하기가 지극합니다. 상참(常參) 때에는 전 영상 한익모가 또 말하기를, 「좌우는 근심할 것이 못된다.」 하였으니, 대저 자신이 수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내시에게 질언(質言)한 일이 옛 대신에게도 있었습니까? 홍인한이 「대내에서 하시는 일이므로 신은 쟁집(爭執)하지 않습니다.」라고 아뢴 것으로 말하면 놀랍고 해괴하기가 더욱 막심합니다. 이것이 국가의 대사를 위하여 어떠한 것이기에 궁위(宮衛) 안에서 비밀히 하고 심엄(深嚴)한 가운데에서 행하여 만백성이 알 수 없고 팔방에서 듣지 못하게 합니까? 전하의 오늘의 거조(擧措)는 밝고 바르며 뜻이 커서 천고에 뛰어난 것인데, 모두가 쳐다보는 직위에 있는 자가 겉치레로 여기고 오로지 미봉을 일삼으니, 어찌 마음 아프지 않겠습니까? 명명(明命)을 내려 대신의 죄를 빨리 바루게 하소서.’ 하였다. 소(疏)가 들어가니, 왕께서 서명선을 불러 온 몸이 혈성(血誠)으로 찼다고 칭찬하고 두 자급(資級)을 올리셨다. 이 일은 《명의록(明義錄)》에 실려 있다.

그래서 왕께서 세손에게 명하여 서정(庶政)을 대청(代聽)하게 하고 조참(朝參) 때에 법가(法駕)를 쓰고 의장(儀仗)에 수정장(水晶仗)·금부월(金斧鉞)을 설치하고 수하(受賀) 때에는 백관이 조복(朝服)으로 예를 행하고 헌가(軒架)를 아울러 연주하였다. 태묘(太廟)에 전배(展拜)할 때에는 전정(殿庭)에서부터 여(輿)를 타고 거가(車駕)가 성밖으로 나갈 때에는 훈련(訓鍊)·금위(禁衛)·어영(御營)의 군사가 수여(隨輿)하고 무릇 찬배(竄配) 이하는 여쭙지 않고 결단하게 하셨는데, 다 특교(特敎)이었다. 세손께서 세 번 상소하여 사양하셨는데, 왕께서 누누이 위유(慰諭)하셨다. 여드레가 지나서 고묘(告廟)하고 반사(頒赦)하였다. 왕께서 부축받아 경현당(景賢堂)에 이르러 세손과 함께 진하(陳賀)를 받으셨는데 매우 즐거워하셨다. 공시인(貢市人)의 요역(徭役)을 감면하고 사민(四民)에게 차등을 두어 쌀을 내리셨다.

얼마 안가서 적신(賊臣) 심상운(沈翔雲)이 소조(小朝)에 상서(上書)하여 진계(陳戒)를 명목 삼아 교묘히 계략을 펴서 궁료(宮僚)를 배척하였는데, 온실수(溫室樹)174) 라는 말이 있었다. 서명선(徐命善)이 연석(筵席)에서 아뢴 말에 ‘궁료한테서 들으니 세손께서 세 가지를 알 것 없다는 말 때문에 상소하여 인의(引義)하려 하신다 합니다.’ 한 것이 있으므로 심상운이 궁위(宮衛)의 말과 글을 누설한 것으로 홍국영(洪國榮) 등의 죄를 만들어 일망 타진할 계책을 부리려 한 것이다. 심상운은 본디 심사순(沈師淳)의 후사로 들어간 양자심일진(沈一鎭)의 아들인데, 심사순은 또 심익창(沈益昌)의 손자로서 심정보(沈廷輔)의 후사로 들어간 자이다. 심익창은 일찍이 역환(逆宦) 박상검(朴尙儉)의 숙사(塾師)이었고 신축년175) ·임인년176) 에는 김일경(金一鏡)·윤취상(尹就商)과 밤낮으로 박상검의 집에 모여 궁금(宮禁)과 교통하는 일을 참여하여 들었는데, 박상검이 역모(逆謀)하다가 일이 발각되고 옥사(獄詞)가 심익창에게 관련되니, 여러 번 고문받고 석방되어 금고(禁錮)되어 있다가 죽었다. 심상운의 아우 심익운(沈翼雲)은 등제(登第)하였으나 심익창에 연좌되어 오래 등용되지 못하였다. 심상운이 이것을 근심하여 이미 죽은 아비 심일진심사순에게서 파양(罷養)하고 또 이미 죽은 할아비 심사순심정보에게서 파양하여 곧바로 심일진의 아비를 심정보에게 이으니, 무릇 두 세대가 두 번 그 아비를 바꾼 것이다. 그래서 청의(淸議)가 더욱 침뱉고 더럽게 여기니, 심상운이 드디어 정후겸에게 아부하여 곡진히 섬기고 삼갔다. 이때에 이르러 정후겸·홍인한(洪麟漢) 등이 그 일이 드러난 것을 보고 윤 양후와 함께 심상운을 불러다가 신축년·임인년의 유봉휘(柳鳳輝)와 같은 흉악한 마음을 부려 먼저 궁료의 죄안을 꾸며 큰 옥사(獄事)를 일으키려 하였는데, 세손께서 그 정상을 살펴 알고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일이 충역(忠逆)에 관계되니 흐릿하게 미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셨다. 판부사(判府事) 김양택(金陽澤)이 왕께 갖추어 아뢰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역적 놈의 손자가 감히 그럴 수 있는가?’ 하고, 명하여 고문하여 흑산도(黑山島)에 위리 안치(圍籬安置)시키셨다. 이윽고 명하여 심상운의 형제를 영구히 서민(庶民)으로 삼게 하셨다.

52년 병신(丙申) 춘정월(春正月)에 왕의 존호(尊號)를 요명 순철 건건 곤녕(堯明舜哲乾健坤寧) 이라 가상(加上)하고 정성 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의 존호를 인휘(仁徽)라 가상하고 왕비 김씨(金氏)의 존호를 성철(聖哲) 이라 가상하였다.

3월에 왕께서 병환이 위독하므로 세손께서 관원을 보내어 묘사(廟社)·산천에 두루 기도하게 하셨다. 곧 고명(顧命)하여 대보(大寶)를 왕세손에게 전하고 초닷샛날 묘시(卯時)에 왕께서 경희궁(慶熙宮)집경당(集慶堂)에서 승하하시니, 수는 여든셋이고 재위는 52년이다. 하인(下人)·노소(老少)가 궐하(闕下)에서 분주하여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리고, 조사(朝士)·부녀가 각각 그 집에서 곡(哭)하여 소리가 거리를 진동하고, 먼 시골에서도 상(喪)을 들은 날에 남녀 노소가 다 어린아이가 어버이를 사모하듯 하였다. 뭇 신하가 왕의 덕행(德行)과 공업(功業)을 의논하여 익문 선무 희경 현효(翼文宣武熙敬顯孝)라 시호(諡號)를 올리고 묘호(廟號)를 영종(英宗) 이라 하였다.

이해 7월 27일에 원릉(元陵) 해좌(亥坐)인 언덕에 장사하니, 곧 건원릉(健元陵)의 서쪽 산등성이다. 이에 앞서 기해년177) 효종께서 승하하셨을 때에 대신(大臣) 정태화(鄭太和)·김수흥(金壽興) 등이 효종을 받들어 여기에 장사하였는데, 찬술(撰述)한 것이 다 장려(壯麗)하고 명수(明秀)하기가 건원릉과 같으나 도리어 더 낫다고 말하였다. 현종 계축년178) 에 물이 병석(屛石)에서 스며 나옴으로써 이의(異議)가 있어서 구릉(舊陵)을 열었는데, 조화(調和)로움을 보고는 중신(重臣) 민정중(閔鼎重)이 몸소 구릉을 봉축(封築)할 때에 일을 돕는 자에게 경계하기를, ‘잘 닦으라. 뒤에 반드시 다시 국릉(國陵)이 될 것이다.’ 하였다. 경종의 대상(大喪)에 이르러서야 왕께서 경종을 여기에 모시기를 매우 바라셨으나, 김일경(金一鏡)이 이때 산릉 도감 당상(山陵都監堂上)이 되어 국조(國朝)에서는 옮긴 곳을 능으로 삼은 적이 없다고 극언(極言)하였으므로, 드디어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왕의 능이 되었으니, 아! 어찌 우연이겠는가?

왕께서는 영명(英明)하기가 뛰어나시어 모든 임금의 덕 중에서 큰 것을 얻으셨으니, 효(孝)·경(敬)·근(勤)·검(儉)·공(公)·서(恕)가 임금의 덕 중에서 큰 것이다. 왕께서는 어려서 인현 왕후(仁顯王后)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셨다. 바야흐로 5세 때에 손수 금원(禁苑)의 온갖 꽃을 따서 술을 만들어 후(后)께 바치시니, 후께서 감탄하여 말씀하기를, ‘효제(孝悌)는 본디 타고나는 것이거니와, 어찌 그리 숙성한가?’ 하셨다. 숙묘(肅廟)께서 편찮으신 7년 동안에 좌우에서 돕고 구원하는 일을 왕께서 친히 하고 밤에 편안히 주무시지 못하시는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루 같으니, 숙묘께서 늘 말씀하기를, ‘기특한 아이다. 어찌 잠이 없는가?’ 하셨다. 인원 왕후(仁元王后)를 섬기신 것은 등극(登極)하고 기사(耆社)에 들어가신 뒤일지라도 늘 왕자(王子)이었을 때와 같으셨다. 나아가 뵐 때마다 공수(拱手)하고 질추(疾趨)하며, 시좌(侍坐)하면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이며, 물음이 있으면 소매로 입을 가리고서 답하며, 물건을 갖추어 뜻을 기쁘게 하여 드리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어기지 않으셨다. 국구(國舅)인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의 집에도 매우 넉넉하게 물건을 보내어 후의 마음을 기쁘게 하되 또한 조정(朝政)에는 간여하지 않게 하시니, 인원 왕후께서 늘 말씀하기를, ‘누가 주상을 내 소생이 아니라고 생각하겠는가?’ 하셨다. 경묘(景廟)를 섬기신 것도 숙묘를 섬기신 것과 같고 선의 왕후(宣懿王后)를 섬기신 것도 인원 왕후를 섬기신 것과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형제 사이인지 수숙(嫂叔) 사이인지 알 수 없을 만하였다. 크고 작은 향사(享祀)에는 반드시 친히 나아가고 정성스러움과 공경스러움이 극진하여 신명이 양양(洋洋)히 위에 임하신 듯하셨다.

선원전(璿源殿)이 궁중에 있으므로 절제(節祭)·탄일제(誕日祭)·기일제(忌日祭)가 있으면 왕께서 으레 몸소 제물을 살피고 선부(膳婦)를 경계하여 정결을 극진히 하게 하셨다. 선조(先朝)에서 즐기시던 햇것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전(殿)에 바치고서야 드셨는데, 찬선(饌膳)을 맡은 자가 일찍이 송이[松栮]를 바치자, 왕께서 말씀하기를, ‘전에 바쳤는가?’ 하시매, 대답하기를, ‘때가 아직 일러서 바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아직 바치지 않고서 내가 먹게 하는 것은 내 정성스러움과 공경스러움이 모자라기 때문이니, 너를 어찌 꾸짖겠는가?’ 하고 물리치고 들지 않으셨다. 춘추가 매우 높아져서도 선왕(先王)·선후(先后)의 기일(忌日)을 당하면 소식(素食)하고 재거(齋居)하며 탕약(湯藥)까지도 드시지 않았다. 향사는 몸소 하지 못하더라도 제삿날에는 반드시 재계(齋戒)하여 마음을 바르게 하고 새벽까지 중정(中庭)에서 노복(露伏)하였다가 제사가 끝난 것을 듣고서야 그치셨다. 만년에 경희궁(慶熙宮)으로 옮겨 계셨는데, 궁의 북쪽에 있는 영취정(暎翠亭)육상궁(毓祥宮)과 아주 가까웠다. 왕께서 아침과 저녁마다 소여(小輿)를 타고 이르러 사당을 바라보고 노복하여 혼정 신성(昏定晨省)을 갈음하고 눈물을 흘리고 돌아오셨는데, 한추위와 한더위에도 그만두지 않으셨다. 일찍이 꿈에서 숙묘를 모셨는데, 숙묘께서 간지(簡紙)를 가져오라고 명하셨으나 미처 드리기 전에 깼으므로 이때부터 다시는 간지에 글을 쓰지 않으셨다. 춘추가 높고 병환이 깊어졌을 때에도 늘 《시경(詩經)》의 육아(蓼莪)·척호(陟岵)의 시(詩)를 외시고 외고 나면 목이 메어 눈물이 줄줄 흐르셨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이 다 왕께서 효성스러우시다 하였다. 왕께서는 일념으로 하늘을 공경하고 극진히 하지 않으신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종이에 ‘천(天)’ 자가 있으면 손으로 스스로 깨끗이 씻고 남이 밟고 무엄하게 하지 못하게 하셨다. 보통 대화 때에도 말이 하늘에 미치면 반드시 존경을 더하고 말씀하기를, ‘임금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고 신하는 임금을 대신하여 일을 다스리니, 임금이 하늘을 공경하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공경하는 것과 같아야 한다.’ 하셨다.

재이(災異)를 당하면 정성을 다하여 경계하고 감선(減膳)하고 구언(求言)하고 자신을 반성하고 자책(自責)하셨다. 경인년179) 봄 객성(客星)이 나타났을 때에 왕께서 밤에 편집신(編輯臣)과 운관 사력(雲觀司曆)을 불러 재앙을 그치게 할 방책을 강구하고 저녁마다 월대(月臺)에서 측후(測候)하고 말씀하기를, ‘백성과 나라에 재앙을 옮기지 말기 바란다.’ 하셨다. 이렇게 사흘 동안 하시니 객성이 사라졌다. 혹 바람이 사납거나 비가 심하면 밤이라도 반드시 옷을 입고 관을 쓰고 앉으시며 때때로 혼자 말씀하기를, ‘내게 무슨 허물이 있어서 하늘의 경고가 이러한가?’ 하고, 잠을 못 이루고 근심하며 앉아서 아침까지 기다리셨다. 날이 가물어 비를 빌 때에는 대행시킨 적이 없고 친히 규(圭)를 잡아 정성이 반드시 감통되게 하려 하셨다. 그러므로 임자년180) 이후로는 거의 친히 비시지 않은 해가 없었고 비시면 으레 비를 내렸으므로 큰 풍년이 들었으니, 사책(史冊)에 이루 다 쓸 수 없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관원을 보내어 대행시키셨으나 또한 반드시 궐정(闕庭)에서 노복(露伏)하여 비가 내린 다음이라야 비로소 연침(燕寢)으로 돌아가셨고, 혹 비가 내리지 않으면 옷을 벗고 맹렬한 볕을 쬐며 말씀하기를, ‘어찌 내 몸을 태우지 않겠는가?’ 하셨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이 다 왕께서 공경스러우시다 하였다.

왕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이미 한추위와 한더위 때에 강일(講日)을 늘리고 낮에는 반드시 해질 때까지 계속하고 밤에는 문득 새벽 종이 울 때까지 계속하고 능행(陵幸)·친경(親耕)하신 뒤에도 피로하여 게을리하거나 그만두지 않으셨다. 바야흐로 춘추가 칠순이 되어서도 삼복(三伏) 날에 아침·낮·저녁 세 번의 강석(講席)을 열어 토론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요양하실 때에 이르러 눈이 어두워 글자를 가리지 못하셔도 친히 《소학》·《대학》을 외어 강독하고 한 달에 여섯 번 소대(召對)하여 신하를 만나고 국사(國事)를 재결하며 크고 작은 일을 버려 두지 않으셨다. 혹 묘모(廟謨)가 적으면 조용히 민간의 고통과 궁부(宮府)의 고사(故事)를 논하시어, 소대가 파하고 해가 이미 저물었는데도 시인(寺人)이 다시 당(堂)에 촛불을 붙이게 하셨다. 그리고 승지(承旨)가 장소(章疏)·계장(啓狀)을 가지고 들어오면 왕께 아뢰는 말을 듣고 판비(判批)를 불러 줌에 조금도 지체하지 않으셨으며, 물러갈 때에는 야루(夜漏)가 4고(四鼓)·5고를 알렸으므로 나라 사람이 다 왕께서 부지런하시다 하였다.

왕께서는 성품이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온갖 완호(玩好)에 욕심이 없으셨다. 보위(寶位)에 오르셔서는 거친 베 옷을 입고 흰 베 관을 써서 풍속을 바꾸려 하셨다. 거처하시는 궁궐의 벗겨진 벽 칠과 이지러진 창영(窓楹)과 해진 보연(黼筵)·포석(鋪席)을 해가 지나도 고치지 않아서 유사(有司)가 수리하기를 청하여도 윤허하지 않으셨다. 집경당(集慶堂)에 연거(燕居)하시되 해진 병풍 두어 개로 안팎 청마루를 가려서 소박하고 좁기가 청수(淸修)한 선비의 집만도 거의 못하였다. 일찍이 선조(先朝)의 침전(寢殿) 옆에 초가 하나를 짓고 그 안에서 글을 읽고 고사(故事)를 추술(追述)하려 하셨으나 마침내 민력(民力)을 거듭 번거롭힌다 하여 그만두셨다. 입으시는 것 중에서 오직 곤면(袞冕)·법복(法服)은 제도를 살펴서 아름답게 하고 그 나머지 중의(中衣)·철릭[貼裏] 따위는 이따금 빨고 기워 입고 겨울에 매우 춥더라도 갖옷을 입으신 적이 없으므로, 왕을 모시는 뭇 신하도 감히 갖옷을 껴입지 못하였다. 밤에도 이부자리를 깔지 않고 때때로 목침을 베고 곤히 주무시면 궁인(宮人)이 왕의 몸에 한기(寒氣)가 닥칠세라 염려하여 작은 이불을 덮어 드렸다. 국법에는 내선부(內膳夫)가 하루에 다섯 번 왕의 찬선(饌膳)을 바치게 되어 있으나 왕께서는 하루에 세 번 찬선을 드시고 찬선도 배불리 드신 적이 없으므로 궁중에서 드디어 낮과 밤 두 번의 찬선을 폐지하였다. 그 밖에도 풍성하게 즐기는 것을 경계하고 줄이는 것을 힘쓰신 것이 흔히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이 왕께서 검소하시다고 하였다.

왕께서 일찍이 말씀하기를, ‘임금의 정사는 궁위(宮闈)에서 비롯해야 한다.’ 하고, 공사(公事)가 아니면 환관(宦官)·궁녀(宮女)와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고례(古例)로는 파조(罷朝) 뒤에 크고 작은 공사를 혹 환관을 시켜 와내(臥內)에서 읽어 아뢰게 하였으나, 왕께서 환관이 이 때문에 국사(國事)를 몰래 익혀 조정(朝政)에 간여할세라 염려하여 밤이 깊었더라도 반드시 승지를 불러서 읽어 아뢰게 하셨다. 일찍이 세손에게 말씀하기를, ‘예전에는 환관 10여 인도 오히려 많다고 여겼는데, 이제는 1백여 인이 넘는다. 많으면 제어하기 어렵다는 것을 너는 알라.’ 하셨다. 신하를 만나면 늘 진심을 옮기고 무릇 죄가 있으면 처음에는 견책(譴責)이 매우 엄하였더라도 서용(敍用)한 뒤에는 예전처럼 신임하여 쓰시어 마치 처음부터 그런 일이 없었던 것 같았다.

신축년·임인년의 화를 당하신 끝에 당론(黨論)이 살육(殺戮)의 근본이 되고 살육이 망국(亡國)의 근본이 된다는 것을 깊이 아시어 붕당을 없애고 세신(世臣)을 보전하는 것을 정치를 하는 요체로 삼았다. 바야흐로 동궁에 계실 때에 교리(校理) 조문명(趙文命)이 봉사(封事)하니, 경묘께서 삼당(三黨) 뒤에 탕평(蕩平)으로 폐단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왕께서 그 말씀에 열복(悅服)하여 마음에 새기셨다. 등극하셔서는 맨 먼저 탕평론을 주장하는 두세 신하를 발탁하셨는데, 흠잡는 말이 좌우에서 갈마들었으나, 왕께서 끝내 굽히지 않고 신임하였으며 그 중에서 지론(持論)이 세찬 자가 있으면 으레 배척하여 쓰지 않으셨다. 늘 선묘(宣廟)의 어제시(御製詩)의 ‘신하들이 오늘 이후에도 어찌 다시 동인·서인을 계속하겠느냐?’는 구(句)를 외고 말씀하기를, ‘이것이 우리 가법(家法)이다. 누가 감히 방해하겠는가?’ 하셨다. 일찍이 인원 왕후의 상을 당하셨을 때에 왕께서 글을 만들어 세신을 보전하고 나라를 편안히 하는 계책을 극진히 말씀하고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효소전(孝昭殿)에 고하게 하고 말씀하기를, ‘내가 이렇게 하는 까닭은 멀리 주공(周公)이 금등(金縢)에 보관한 일을 본뜨고 가까이 조변(趙抃)이 분향하고 하늘에 고한 일을 본뜨기 위한 것이다.’ 하셨다. 이 때문에 물과 불처럼 서로 나뉘어 싸움이 잇달던 때일지라도 잔포(殘暴)한 자를 교화하고 형살(刑殺)을 없애며 50년 가까이 내려오다가, 임진년181) 에 척당(戚黨)의 일이 일어나니 왕께서 김귀주(金龜柱)를 매우 엄하게 벌하셨다. 세손에게 말씀하기를, ‘조당(朝黨)도 오히려 세도(世道)의 근심거리가 되는데, 더구나 척당이겠는가? 금하지 않으면 앞으로 하늘에 사무치게 될 것이다. 나는 늙었으니 미처 보지 못하겠으나, 네게는 뒷날의 근심거리이다.’ 하셨다. 생각이 깊고 염려함이 깊기가 이러하셨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이 다 왕께서 공평하시다 하였다.

왕께서는 잠저(潛邸)에 오래 계시어 여염의 어려움과 백성의 괴로움과 위항(委巷)·황야(荒野)의 아주 작은 일도 모두 두루 아셨고, 저위(儲位)를 이어받게 되어서는 경전(經傳)을 널리 강구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라는 것을 환히 아셨다. 무릇 공민(貢民)·시민(市民)·경종민(耕種民)·판상민(販商民)·군보민(軍保民)에 대하여 그 굶주리고 배부르고 춥고 따뜻한 것을 모두 상세히 살피셨으므로 감면하는 정령(政令)이 내려지지 않은 해가 없었다. 혹 유사(有司)가 경비 때문에 어려워하면 왕께서 으레 ‘어찌 기부(肌膚)를 아끼랴?’ 하신 숙종의 말씀을 외고 분부를 내려 은혜를 베푸셨으므로, 즉위하신 50년 동안에 감면하신 것이 무려 수백만이었다. 처음에 북관(北關)의 백성 중에는 교제전(交濟錢) 때문에 처자를 팔고 목매어 죽은 자가 있었다. 마침 왕께서 어사를 보내어 안렴(按廉)하게 하셨는데, 백성이 길을 막고 울며 말하기를, ‘돌아가서 우리 임금께 아뢰어 적자(赤子)의 뜻이 부모께 전달되게 하여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였다. 어사가 그 말대로 돌아와 아뢰니, 왕께서 목이 메어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기를, ‘내가 일찍이 임금이 넓고 큰 집 안에서 고운 모전(毛氈)을 깔고 옥식(玉食)을 후하게 누리되 가난한 백성 집의 정상을 살피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였거니와, 어찌 우리 풍패지향(豊沛之鄕)에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였겠는가? 내가 폐단을 바로잡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못한다면 참으로 고묘(高廟)에 들어갈 낯이 없을 것이다.’ 하고, 당장 명하여 감면하게 하셨다. 그 밖에 고할 데 없는 자가 왕께 호소하여 그 생명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병신년182) 봄에 왕의 환후가 더욱 위급하였다. 이때에 제주(濟州)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어사를 보내어 진구(賑救)하게 하셨으나, 왕께서 염려를 놓지 못하여 간절하게 이르는 꿈결의 말씀이 다 제주에 관한 일이었다. 그 백성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듯하였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이 다 왕께서 어지시다 하였다.

왕께서 이미 이 여섯 가지 덕을 갖추고서 이것으로 정치의 근본을 세우는 상도(常道)를 삼아 성헌(成憲)을 살피고 유폐(流弊)를 고치고 서옥(庶獄)을 삼가고 국용(國用)을 넉넉하게 하셨으니, 또한 모두가 여섯 가지 덕을 상법(常法)으로 삼은 것이다. 이 때문에 춘추가 높을 때까지 보위를 누리시고 나라 안이 평안하며 신하는 대대로 그 녹(祿)을 누리고 백성은 그 이(利)를 즐겼다. 무릇 조야(朝野)에 늙은이가 태반이었는데 이 가운데 또한 1백 세를 넘은 자가 있었으니, 어찌 인사(人事)가 아래에서 닦여져 천운(天運)이 위에서 응한 것이 아니겠는가? 전(傳)에 이르기를, ‘대덕(大德)은 반드시 수(壽)를 얻고 반드시 위(位)를 얻고 반드시 녹(祿)을 얻는다.’ 하였는데, 왕께서 이에 가까우실 것이다.

왕께서는 두 아드님을 두셨는데, 효장 세자(孝章世子)는 좌의정(左議政) 조문명(趙文命)의 딸을 빈(嬪)으로 맞았는데 후사가 없고, 장헌 세자(莊獻世子)는 영의정(領議政) 홍봉한(洪鳳漢)의 딸을 빈으로 맞았는데 실로 우리 사왕 전하(嗣王殿下)를 낳으셨다. 갑신년183) 에 명하여 우리 사왕 전하를 효장 세자의 후사로 삼았고, 왕께서 태묘(太廟)에 부제(祔祭)되실 때에 효장 세자진종 대왕(眞宗大王)이라 추존(追尊)하고 효순 현빈(孝純賢嬪)효순 왕후(孝純王后)라 추존하여 태묘에 동부(同祔)하였는데, 다 왕의 유명(遺命)에 따른 것이다.

이제 사왕 전하께서 신(臣)을 학문이 없다 하지 않으시고 유사(遺事)에 따라 정리하여 행장(行狀)을 만들라고 명하시니, 신은 황공하여 굴러 떨어질 듯하여 책임을 다할 방법을 모르겠으나, 혼자 가만히 듣건대, 제왕(帝王)의 대절(大節)은 오직 마땅한 사람에게 종사를 부탁하는 것일 뿐이라 한다. 그러므로 우사(虞史)가 요전(堯典)을 만들되 순(舜)에게 전위(傳位)한 일을 반복하여 상세히 말한 것이 한 편(篇) 중에 반이 되는데, 세상에서 우사를 일컬어 천고(千古)의 사신(史臣)의 근본으로 삼는 것이 이 때문이다. 신은 감히 경묘께서 왕에게 오로지 맡기고 왕께서 전하에게 오로지 맡기신 것을 한 편의 위아래에 실어서 요전의 단례(斷例)를 따라 들은 바를 존중한다."

하였다. 대제학 서명응(徐命膺)이 지어 바쳤다.


  • 【태백산사고본】 83책 127권 42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543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註 062]
    불곡(不穀) : 왕후(王侯)의 겸칭.
  • [註 063]
    경자년 : 1720 숙종 46년.
  • [註 064]
    입년(立年) : 30세.
  • [註 065]
    양암(諒闇) : 임금이 여묘살이하는 것.
  • [註 066]
    보력(寶曆) : 임금의 나이.
  • [註 067]
    무진년 : 1688 숙종 14년.
  • [註 068]
    신충(宸衷) : 임금의 뜻.
  • [註 069]
    정유년 : 1717 숙종 43년.
  • [註 070]
    복합(伏閤) :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조신(朝臣) 또는 유생(儒生)들이 대궐문 밖에 이르러 상소(上疏)하고, 임금의 재가(裁可)가 날 때까지 엎드려 청하던 일.
  • [註 071]
    기사년 : 1689 숙종 15년.
  • [註 072]
    임인년 : 1722 경종 2년.
  • [註 073]
    치학(齒學) : 세자가 국학에서 나이의 순서에 따라 예양(禮讓)하는 것. 여기에서는 입학하는 것을 뜻함.
  • [註 074]
    갑진년 : 1724 경종 4년.
  • [註 075]
    계묘년 : 1723 경종 3년.
  • [註 076]
    근밀(近密) : 임금의 측근.
  • [註 077]
    경자년 : 1720 숙종 46년.
  • [註 078]
    문산(文山) : 문천상(文天祥)의 호.
  • [註 079]
    기사년 : 1689 숙종 15년.
  • [註 080]
    정표(旌表) : 선행을 칭찬하여 여러사람에게 알리는 것.
  • [註 081]
    기복(起復) : 기복 출사(起復出仕)의 준말로, 상중(喪中)에는 벼슬하지 않는 것이 관례(慣例)이나 국가의 필요에 따라 상제의 몸으로 벼슬자리에 나오게 하는 일.
  • [註 082]
    운대(雲臺) : 후한(後漢) 명제(明帝)가 전세(前世)의 공신(功臣)을 추념하여 장수 28인의 초상을 그리게 한 대(臺)의 이름. 운각(雲閣).
  • [註 083]
    철권(鐵券) : 공신(功臣)에게 나누어 주던 녹권(錄券). 겉에는 이력과 은상(恩賞)을 기록하고, 속에는 면죄(免罪)와 감록(減錄)의 수를 새겼는데, 글자를 속에 파서 넣었기 때문에 철권이라 함. 좌부(左符)는 공신(功臣)에게, 우부(右符)는 내부(內府)에 두었다가 감합(勘合)하였음.
  • [註 084]
    망예(望瘞) : 제사를 끝마치고 축문과 폐백을 파묻을 때 헌관(獻官)과 집사(執事)가 이를 지켜보던 일을 말함.
  • [註 085]
    위전(位田) : 관청의 경비(經費)나 제사의 비용(費用)을 충당하기 위하여 설치된 토지. 위토(位土).
  • [註 086]
    고계(高髻) : 높은 상투.
  • [註 087]
    경신년 : 1680 숙종 6년.
  • [註 088]
    기사년 : 1689 숙종 15년.
  • [註 089]
    무신년 : 1728 영조 4년.
  • [註 090]
    우서(友壻) : 동서.
  • [註 091]
    태복(太僕) : 사복시(司僕寺).
  • [註 092]
    악 무목(岳武穆) : 무목은 악비(岳飛)의 시호(諡號).
  • [註 093]
    갑진년 : 1724 경종 4년.
  • [註 094]
    추조(秋曹) : 형조(刑曹).
  • [註 095]
    경조(京兆) : 한성부(漢城府).
  • [註 096]
    백부(柏府) : 사헌부(司憲府).
  • [註 096]
    숭덕전(崇德殿) : 경주 탑동에 있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사당. 1732년(영조 8) 1월 영조는 숭덕전에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행장에는 숭덕전이 고려 왕의 사당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 [註 097]
    강희(康熙) : 청 성조(淸聖祖)의 연호.
  • [註 098]
    용만(龍灣) : 의주(義州).
  • [註 099]
    서전(西銓) : 병조(兵曹).
  • [註 100]
    탁지(度支) : 호조(戶曹).
  • [註 101]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
  • [註 102]
    임자년 : 1732 영조 8년.
  • [註 103]
    신해년 : 1731 영조 7년.
  • [註 104]
    경조(京兆) : 한성부(漢城府).
  • [註 105]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 [註 106]
    약제(禴祭) : 종묘의 여름 제사.
  • [註 107]
    임진년 : 1592 선조 25년.
  • [註 108]
    정묘년 : 1627 인조 5년.
  • [註 109]
    임자년 : 1732 영조 8년.
  • [註 110]
    구식(救食) : 일식(日食)이 있을 때 해가 먹히는 것을 구원하는 의식. 흉변(凶變)으로 생각하여 임금이 천담복(淺淡服) 차림으로 월대(月臺) 위에서 각사의 당상관(堂上官)과 낭관(郞官)을 거느리고 해와 달이 다시 완전해질 때까지 기도하였으며, 좌우에 악기(樂器)를 벌려 놓으나 연주하지는 아니하였음.
  • [註 111]
    자목(字牧) : 고을의 수령이 백성을 사랑으로 다스림.
  • [註 112]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 [註 113]
    임인년 : 1722 경종 2년.
  • [註 114]
    무신년 : 1728 영조 4년.
  • [註 115]
    법강(法講) : 경연(經筵).
  • [註 116]
    옥서(玉署) : 홍문관(弘文館).
  • [註 117]
    법연(法筵) : 경연.
  • [註 118]
    광(筐) : 폐백을 담는 죽기(竹器).
  • [註 119]
    정문(程文) : 과거를 보일 때 독권관(讀券官)이 채점을 하기 위하여 만들던 모범 답안지.
  • [註 120]
    거서(秬黍) : 검은 기장.
  • [註 121]
    서합(噬嗑) : 《주역(周易)》에 나오는 괘(卦)의 하나로, "턱 가운데 물건이 있는 것을 서합(噬嗑)이라 한다.[頣中有物曰噬嗑]" 하였는데, 서로 물어 뜯는다는 뜻으로, 형옥 죄수(刑獄罪囚)의 상(像)임.
  • [註 122]
    경녈(黥涅) : 살을 째고 먹물로 죄명을 써 넣는 형벌.
  • [註 123]
    국자(國子) : 성균관(成均館).
  • [註 124]
    식(式) : 수레 앞턱에 가로 댄 나무에 의지하여 경례함.
  • [註 125]
    계유년 : 1693 숙종 19년.
  • [註 126]
    위포(韋布) : 성균관 유생.
  • [註 127]
    후원(喉院) : 승정원(承政院).
  • [註 128]
    구경(九經) : 아홉 가지 정치에 중요한 일로서, 《중용(中庸)》에 보면 몸을 닦는 것[修身], 어진 이를 높이는 것[尊賢], 친족을 친히 하는 것[親親], 대신을 공경하는 것[敬大臣], 신하를 체찰하는 것[體群臣], 서민을 돌보는 것[子庶民], 모든 공장(工匠)들을 오게 하는 것[來百工], 먼 곳 사람들을 회유하는 것[柔遠人], 제후를 따르게 하는 것[懷諸侯]이라 하였음.
  • [註 129]
    급암(汲黯) : 한대(漢代)의 간신(諫臣). 경제(景帝) 때에 태자 세마(太子洗馬)가 되고 무제(武帝) 때에 동해(東海)의 태수(太守)를 거쳐 구경(九卿)의 반열에 올랐음. 성정(性情)이 심히 엄격하여 직간(直諫)을 잘하여 무제(武帝)로부터 옛날의 사직(社稷)의 신하에 가깝다는 평을 들었음.
  • [註 130]
    현주(玄酒) : 물.
  • [註 131]
    기해년 : 1719 숙종 45년.
  • [註 132]
    포은(圃隱) : 정몽주(鄭夢周)의 호.
  • [註 133]
    상용(商容) : 은(殷)나라 때 사람. 주왕(紂王)의 대부(大夫)로서 주왕에게 직간(直諫)하다가 폄출(貶黜)되었음.
  • [註 134]
    비간(比干) : 은대(殷代)의 사람. 주왕(紂王)의 숙부(叔父)인데, 주왕의 악정(惡政)을 간하다가 피살되었음.
  • [註 135]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 [註 136]
    임인년 : 1722 경종 2년.
  • [註 137]
    양옥(梁獄) : 양왕(梁王)의 옥사(獄事). 한(漢)나라 경제(景帝)가 제위(帝位)를 아우인 양왕(梁王)에게 전수(傳授)하겠다는 대화를 들은 대신들이 부자 상전(父子相傳)의 약조를 들어 반대하였는데, 이에 양왕이 사람을 시켜 원앙(袁盎) 등 여러 의신(議臣)들을 죽였음. 경제가 이에 전숙(田叔)에게 양왕의 죄안(罪案)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전숙이 말하기를, "양왕의 일은 묻지 마소서. 바른 대로 말하면 처단해야 되고, 처단하면 태후(太后)의 마음이 상할 것입니다." 하니, 양왕의 신하 몇 사람에게만 죄를 돌려 처단하였음.
  • [註 138]
    무신년 : 1728 영조 4년.
  • [註 139]
    정책 국로(定策國老) : 당(唐)나라 때 경종(敬宗)부터 선종(宣宗)까지 그 폐립(廢立)을 환관들이 마음대로 행하고 국가의 원로로 자처하였으므로 정책 국로라 하였음.
  • [註 140]
    문생 천자(門生天子) : 당나라 말기에 환관들이 정권을 전횡하여 천자 보기를 시관(試官)이 문생을 보듯이 하였으므로 문생 천자라 하였음.
  • [註 141]
    접혈(蹀血) : 금정 접혈(禁庭蹀血)의 준말로, 대궐의 뜰에 유혈이 낭자하여 그것을 밟고 건널 정도였다는 뜻. 당(唐)나라 고조(高祖)가 정자 이건성(李建成)을 태자로 세웠는데, 이건성이 당나라 건국에 공이 많았던 아우 이세민(李世民)이 자기 자리를 넘볼까 염려하여 미리 제거하고자 하니, 이세민이 군사를 동원하여 현무문(玄武門)으로 들어가 이건성을 죽였음. 이때의 처참했던 상황을 《자치통감(資治通監)》에서 ‘접혈 금정’이란 말로 묘사했는데, 아우가 형을 잔인하게 죽이고 왕위를 차지했다는 뜻을 내포함.
  • [註 142]
    행배(行盃) : 한(漢)나라 때 대장군 곽광(霍光)의 아내인 곽현(霍顯)이 태후(太后)로 하여금 술을 장만하게 하고는 이어 천자(天子)를 폐하려고 도모한 일을 말함.
  • [註 143]
    수진(袖珍) : 소매 안에 넣어 다닐 수 있도록 작게 만든 책.
  • [註 144]
    기성(箕城) : 평양(平壤).
  • [註 145]
    태상(太常) : 봉상시(奉常寺).
  • [註 146]
    불면(黻冕) : 슬갑(膝甲)과 갓. 모두 제복(祭服).
  • [註 147]
    을해년 : 1695 숙종 21년.
  • [註 148]
    번영(繁纓) : 제후(諸侯)의 마식(馬飾).
  • [註 149]
    임인년 : 1722 경종 2년.
  • [註 150]
    갑신년 : 1704 숙종 30년.
  • [註 151]
    숭정(崇禎) : 명 의종(明毅宗)의 연호.
  • [註 152]
    병자년 : 1636 인조 14년.
  • [註 153]
    울창(鬱鬯) : 울금향(鬱金香)을 넣어 빚은 향기 나는 술로, 제사의 강신(降神)할 때 썼음. 울창주(鬱鬯酒).
  • [註 154]
    장망(長望) : 관원(官員)을 추천(推薦)할 때에 다수(多數)의 후보자를 선정(選定)하는 것. 대개 3인의 후보자를 추천함.
  • [註 155]
    홍문록(弘文錄) : 홍문관(弘文館)의 교리(校理)·수찬(修撰)을 임명하기 위한 1차 선거(選擧) 기록. 먼저 7품 이하의 홍문관원(弘文館員)이 뽑힐 만한 사람의 명단을 만들면 부제학(副提學) 이하 여러 사람이 모여 적합한 사람의 이름 위에 권점(圈點)을 찍는데, 이것을 기록하는 것을 홍문록이라고 함. 관록(館錄). 본관록(本館錄).
  • [註 156]
    한림 소시(翰林召試) :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 후보자에 대한 특별 시험. 적임자를 선정하여 상주(上奏)하면, 왕명으로 불러 위원(委員)을 시켜 시(詩)·부(賦)·논(論)·책문(策問) 등 시험을 보여 합격한 자를 임용하는 것.
  • [註 157]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
  • [註 158]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 [註 159]
    임인년 : 1722 경종 2년.
  • [註 160]
    병오년 : 1726 영조 2년.
  • [註 161]
    장(場) : 제사하는 곳.
  • [註 162]
    경자년 : 1720 경종 즉위년.
  • [註 163]
    우주(虞主) : 궁중에서 우제(虞祭)를 지낼 때에 쓰는 뽕나무 신주(神主).
  • [註 164]
    운관(雲觀) : 관상감(觀象監).
  • [註 165]
    결채 가요(結彩歌謠) : 죽은 임금이나 왕비의 신주(神主)를 종묘(宗廟)로 모실 때 행하는 행사.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기생 등이 각각 색종이를 길 좌우에 화려하게 장식하고 가요를 올리며 돌아간 임금이나 왕비의 덕을 칭송함.
  • [註 166]
    경자년 : 1720 숙종 46년.
  • [註 167]
    고사(故事) : 경(耿)과 박(亳)은 은(殷)나라의 도읍으로, 은나라 제17대 왕 반경(盤庚)이 비가 많이 내려 경의 제방이 무너져 물이 넘치게 되자 박으로 도읍을 옮기었는데, 탕임금의 덕화를 따라 탕임금이 베풀었던 정치를 다시 베풀어 제후들이 사방에서 조회(朝會)하고 상도(商道)가 부흥되었다는 고사(故事).
  • [註 168]
    인일제(人日製) : 인일인 음력 정월 초7일에 가절(佳節)이라고 하여 보이는 과거(科擧). 성균관(成均館) 유생이 주대상임.
  • [註 169]
    단주(丹朱) : 요(堯)의 아들. 부질없이 놀기를 좋아하고 포학스런 행동을 하여 불초(不肖)했으므로, 제위(帝位)를 순(舜)에게 전한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
  • [註 170]
    등준시(登俊試) : 조선조 세조(世祖) 때에 특별히 베푼 과거. 세조 12년(1466) 7월에 종친과 경재(卿宰) 이하의 문관(文官)으로서 자원하는 사람을 시험보게 하였는데, 이때 중추부 판사(中樞府判事) 김수온(金守溫) 등 12인을 선발하였으며, 그 뒤 9월에 무과 등준시(武科登俊試)에서 최적(崔適) 등 모두 51인을 선발하였음.
  • [註 171]
    계사년 : 1773 영조 49년.
  • [註 172]
    이비(吏批) : 이조(吏曹)에서 주청하여 임금의 비답(批答)을 받은 벼슬.
  • [註 173]
    병비(兵批) : 병조(兵曹)에서 무관의 벼슬을 골라서 뽑는 일.
  • [註 174]
    온실수(溫室樹) :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의 명신(名臣)인 공광(孔光)은 경학(經學)에 더욱 밝았으며, 퇴청(退廳) 후 형제 처자들과의 사담에 조정의 일은 절대 말하지 않았음. 혹자가 장락궁(長樂宮) 안의 온실전(溫室殿)에 어떤 나무들이 있느냐는 물음에 잠잠하게 있다가 다른 화재로 돌려 대답하며, 궁중의 일을 외부에 누설하지 않았음.
  • [註 175]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 [註 176]
    임인년 : 1722 경종 2년.
  • [註 177]
    기해년 : 1659 효종 10년.
  • [註 178]
    계축년 : 1673 현종 14년.
  • [註 179]
    경인년 : 1770 영조 46년.
  • [註 180]
    임자년 : 1732 영조 8년.
  • [註 181]
    임진년 : 1772 영조 48년.
  • [註 182]
    병신년 : 1776 영조 52년.
  • [註 183]
    갑신년 : 1764 영조 40년.

○行狀曰: 維英宗大王升祔之越七月甲辰, 嗣王殿下, 進臣等敎曰: "於戲! 我先王盛德大業, 在今在臣民, 在後在方策, 固非有待於狀, 乃若宮中之事, 外人不與知者, 予不穀不言之, 夫孰能宣昭乎? 肆予不穀, 永思前烈, 萬幾之暇, 綴遺事六十六, 則咨爾太史之臣, 旁采訓謨, 撰次爲狀, 以附實錄之後。" 臣命膺稽首對曰: "敢不唯命?" 謹按 王姓, 諱, 字光叔, 顯宗大王之孫, 肅宗大王第二子也。 和敬淑嬪 崔氏, 以肅宗二十年甲戌九月十三日戊寅, 誕王于昌德宮, 前三日紅光亘于東方, 白氣罩其上。 是夜宮人夢白龍, 飛入寶慶堂, 堂卽王誕降之室也。 王生有異質, 右腕累累龍蟠文者九。 纔學步, 進見肅宗, 必斂膝危坐, 肅宗不命之退, 雖至竟晷無難色, 淑嬪恐王久跪拘攣, 爲製廣襪, 以舒其筋骸。 凡書畫之屬, 皆不學而能, 每遊翰墨, 神彩動人目。 肅宗嘉其天成, 爲詩以寵之。 六歲封延礽君, 九歲聘郡守徐宗悌女爲達城郡夫人, 十九歲出閤。 肅宗賜軒名養性, 又親爲花押與之。 庚子肅宗昇遐, 景宗卽位, 違豫久嗣續且無望, 明年八月正言李廷熽上疏, 引祖宗故典, 請豫建儲位, 以繫人心, 景宗命大臣議。 領議政金昌集、左議政李健命、判府事趙泰采及六卿兩司長求對, 請告慈聖, 早定大計。 景宗命群臣, 退俟閣門外, 有頃復召入, 宣示慈聖手札, 有曰: "孝宗大王血脈, 先大王骨肉, 只有 主上與延礽君而已, 豈有他議乎?" 諸臣皆涕泣而退。 遂冊封王爲王世弟, 郡夫人徐氏爲世弟嬪, 王上疏辭, 景宗報曰: "已過立年, 尙無嗣續, 又有奇疾, 念國事無計可施。 仰稟慈聖, 俯從群情, 委以儲位之重, 小心翼翼, 以副國人顒望。" 會賊臣柳鳳輝上疏曰: "殿下再聘中壼僅數年, 嘗藥憂遑, 仍居諒闇, 嗣續無可論也。 今寶曆方盛, 中壼年纔踰筓, 日後螽斯之慶, 擧國所顒望。 或兩宮有疾, 妨於誕育, 則保護之地, 竭誠醫治, 靡不用極, 而乃於卽阼元年, 爲此擧何哉? 始使廷熽疏請, 有若嘗試, 更皷已深, 登對力請, 而旣請入稟, 旋請出宣, 便同使令催督, 可謂無人臣禮耳。 戊辰殿下之誕生也, 立嗣非不急矣, 而諸臣以姑觀數年爲言。 人臣事君當如此, 今忙急草率, 人心疑惑, 久而靡定。 願自今凡於事爲, 斷自宸衷, 毋使威福下移, 仍正大臣以下愚弄迫脅之罪, 以謝國人。" 景宗乃下敎于朝廷曰: "先大王日月之明, 深慮予之無嗣, 今予疾無期斯男, 敬承付托, 夙夜憂懼。 日昨臺疏, 爲宗社定國本, 正合先大王盛慮及予之志, 仰稟慈聖, 旣定國本, 實宗社無疆之福。 柳鳳輝之疏, 此何人斯? 卿等論以啓。" 大臣三司, 請鞫鳳輝以正王法, 景宗可之, 尋改爲遠竄, 大臣、宰臣、三司、政院、宗臣、館學生, 執前請愈力。 時賊臣趙泰耉以右議政在近畿, 忽陳箚借引孝廟承儲日, 故相李敬輿守經之論, 以爲鳳輝忠赤, 不當撲殺也。 先是肅宗上賓, 弔勑言有皇旨, 欲竝慰世子及弟子姪, 廷議拒不從。 泰耉上疏言: "上國行之爲失禮, 陪臣受之爲冒嫌, 王子諸宗, 豈敢安於此哉?" 嗛王無顧忌。 至是復箚救鳳輝不遺力, 三司齊聲論泰耉罪, 請先削黜。 於是王再上疏固辭, 景宗慰諭備至, 九月王始受冊寶於仁政殿, 步趨進止, 咸中規度。 開冑筵, 講《小學》《綱目》, 難疑問答, 夜繼晷不倦曰: "宮僚朋友也。 朋友將以責善, 必情志流通, 然後方盡其言也。" 嘗以《心經》筆墨, 賜兼說書趙顯命曰: "說書誠心開導, 伯禽襄子之言, 余不忘也, 孝廟大志之言, 余不忘也, 宮闈和氣之言, 余不忘也, 近習愼擇之言, 余不忘也, 牽牛過堂圖揭壁之言, 予不忘也。 夫言而忘之, 是棄言也。 薄物以示不忘之意, 《心經》以謝心學之勸。" 當是時景廟疾益甚, 以酬接萬幾, 火升不覺察, 屢見意於絲綸, 諸有忠慮於國者, 欲王參決庶務, 以分聖勞, 宰臣李台佐廷語戶曹判書閔鎭遠曰: "此時代理, 烏可已也?" 士大夫私相酬酢, 其言如出一口無異辭。 有金一鏡者, 爲人凶譎多悖行, 見利忘恥, 與李師尙尹就商等, 爲世擯棄者, 深相結納, 通宦者朴尙儉文有道, 宮人石烈必貞爲奧援。 以王英明, 恐悉燭其奸宄狀, 遂張目攘臂於外庭, 凡言代理者, 輒驅之逆, 群臣瑟縮不敢言。 是年十月, 執義趙聖復上疏, 請臣僚延接, 政令裁決, 引世弟侍側參聽, 隨事訓習, 一如先朝丁酉故事。 景宗是其言, 遂下敎曰: "予有奇疾十餘年, 丁酉聽政之命, 爲先朝靜攝, 不暇顧予躬, 及自登極, 症尤沈痼。 世弟年壯英明, 若使聽政國事有托, 予得安意調便, 自今大小國事, 令世弟裁斷。" 是夜, 賊臣崔錫恒, 與入直承旨、玉堂求對, 寢成命。 賊臣韓世良陳疏, 請加聖復邦刑曰: "天無二日, 地無二王。

雖不直請, 使世弟臨朝, 而參聽, 非臨朝而何? 爲人臣敢懷陰移天位之計, 罪不容於覆載也。" 都承旨洪啓迪爲言, 世良疏指意凶悖, 兩司隨請世良絶島安置, 復請拿鞫嚴問。 景宗命時ㆍ原任大臣、二品以上及三司, 來會賓廳, 敎曰: "早定儲位, 本欲代理, 已稟慈聖, 依前下敎擧行。" 於是王四上疏力辭, 大臣以下, 詣閣求對, 不得請, 率百官庭籲, 請寢代理者凡三日。 景宗又敎曰: "予病若可酬應, 何至是耶? 近者火升一日頻發, 使左右考例而行, 左右可乎, 世弟可乎, 卿等思之, 使我兄弟, 分苦分痛, 以扶將亡之國。" 領議政金昌集、左議政李健命、領府事李頤命、判府事趙泰采等聯名箚言: "大小國事, 竝命裁斷, 此國朝未之有者, 中外驚惑。 臣等雖萬被誅戮, 不敢奉承, 而至於細務分理, 旣有丁酉裁定, 爲殿下臣庶者, 豈敢以輕遽爲拘, 一竝違拒哉?" 箚上, 泰耉自鄕馳入宣仁門求對, 政院謂: "臺閣方論泰耉罪, 泰耉不宜求對也。" 拒不納。 有頃, 司謁傳命泰耉入侍, 復傳命政院三司入侍, 復傳命時ㆍ原任大臣、重宰臣入侍, 入侍, 悉收前後下敎寢不行。 旣退, 三司啓: "臣隣晉接, 關由喉司, 乃三百年定規, 今泰耉自何逕稟旨乎? 此路一開, 後雖有北門之變, 無以隄防, 請承傳色司謁拿問嚴覈。" 景宗可之。 兩司復論泰耉平日交通宦寺罪, 請極邊遠竄, 不報。 十二月, 賊臣金一鏡朴弼夢李眞儒李明誼鄭楷尹聖時徐宗厦等七人聯名上疏, 有云: "伏閤庭籲, 止於三日。 己巳大臣半日庭請, 尙斥以仁弘之科, 則彼輩固難逭之誅。 原降明旨, 賊四凶, 一以三尺斷之。" 遂結之曰: "身佩安危之大臣, 進死一步, 爲臺閣者, 敢以陰機等說, 勒成罪案, 其設心凶且慘矣。" 指泰耉也。 疏入四大臣胥命, 是夜承旨三司卿宰將臣, 或罷或黜, 一鏡爲吏曹參判, 弼夢眞儒明誼等爲三司, 就商爲訓鍊大將。 未幾尙儉有道石烈必貞閉塞王朝見之淸暉門, 謀害王益急, 王夜召宮僚, 欲出閤辭位, 輔德金東弼力陳其不可。 明日大妃下封書于賓廳曰: "儲嗣之定, 奉先王遺敎, 而主上親書爵號, 予又下敎於大臣, 不幸宮人、宦寺, 交構兩宮。 比予與主上, 招宮人責諭, 則宮人敢肆凶悖, 是必有當律。 卿等亦宜調護我主上及東宮, 以保我三百年宗社, 毋負我先王遺敎。" 於是大臣二品以上政院三司, 求對論之, 尙儉有道石烈必貞竝伏誅。 凡王在儲位, 奸凶表裏交構, 處前古帝王所難處, 而王不形色辭, 應之有道, 卒使宮闈之內, 和氣藹然, 人以是知王有聖德焉。 壬寅九月王齒學。 甲辰八月景宗疾大漸。 初李光佐爲藥院都提調, 以聖候久沈綿, 而李公胤業醫名國中, 遂除公胤主簿, 入藥院議劑, 公胤爲人悖妄, 自癸卯夏, 日試峻攻劑, 朝廷以公胤善醫, 不之疑也。 至是聖候益沈篤, 光佐不卽設議藥廳, 王不脫冠帶, 一飯亦一飯, 再飯亦再飯, 泣謂公胤曰: "眞元日下, 此豈立已見之時耶? 急以蔘附回陽。" 光佐公胤執前見愈固, 竟不多用蔘附。 景宗薨, 王哀毁踰節, 群臣請嗣位, 却不從, 大臣、三司、政院、宗親、文武百官, 屢啓不得請。 王大妃手札勸進, 然後王始御冕服, 至仁政門, 猶哀號不陞座, 改卜時行禮, 尊王大妃金氏爲大王大妃, 王妃魚氏爲王大妃, 嬪徐氏進爲王妃。 王將受冊寶時, 宦寺宮人, 尙多黨, 肆詆不道, 擲寶盝砌隅聲, 徹御座, 王若無聞也。 朝夕哭奠必躬臨, 嘗患風痺試鍼, 藥院以鍼忌喪側, 請停哭臨, 終不聽。 暇則孜孜萬幾, 不少休, 或言: "勤勞太過, 非所以保嗇也。" 王曰: "沃土之民不才, 逸也; 瘠土之民莫不有才, 勞也。 況三代之君, 以勞爲治, 未聞以逸豫爲治也。" 先是肅宗季年, 至景宗四年, 皆以違豫不得行經筵次對, 王旣公除, 卽講行之。 賞獻替之承宣, 以開言路, 罷虎贖之綿布, 以紓民力, 申禁閭舍之橫占, 疏放囹圄之幽滯, 久任京外官, 責以成效, 每一令出, 四方拭目。 會有雷異, 王親爲文下政院, 使代撰求言之敎, 其略曰: "修己之未能歟? 虛受之未盡歟? 自奉過侈歟? 待臣不誠歟? 賢人在野, 有未用歟? 窮民抱冤, 有未達歟? 朝著不和, 傷天氣歟? 私意橫流, 閼公議歟? 咨爾近密, 代予草敎, 廣求直言。 言而過中, 予當不罪也。 噫! 生民之水火方亟, 黨習之干戈日尋, 念及於此, 丙枕何安? 廊廟之臣, 擧直措枉, 方伯之臣, 黜陟惟明, 欽乃職事, 上答旻天之警告。" 政院請毋代撰, 以所下絲綸, 布告中外。 王曰: "‘文拙也, 宜更代撰’, 政院復言臣等代撰, 必不如王言也。" 王曰: "‘覆難非禮, 使之道如其言。" 十二月葬景宗大王懿陵。 始卜陵, 王必稟大妃, 得旨乃決。 凡民田宅在局內者, 飭有司, 厚價斥之, 不使有怨。 時新經庚子大喪, 有司猶未知宮中故事, 眩於擧行, 王考据指授, 細大不遺, 必誠必信, 終始罔愆。

元年乙巳春正月, 王下敎勸農, 飭方伯勿奪民時, 守令辭陛者, 輒召見, 戒以安民。 又敎曰: "我國褊小, 用人不廣, 而舊臣盡逬, 仕朝端者, 不如往昔, 予庸痛恨。 方今歲籥已改, 理宜與物皆春, 被謫人其令大臣金吾, 參輕重疏釋。" 初一鏡諸賊, 旣疏斥聯箚四大臣, 比之, 自知勢不兩立, 欲網打一隊, 絶其根芽。 乃嗾市井無賴人睦虎龍上變, 遂起大獄, 盡殺四大臣及其族黨, 株連親知, 編配幾遍於八道, 仍歃血頒赦。 其敎文一鏡撰也, 用事造語, 備極凶悖, 與七賊疏辭相表裏, 矯誣先王, 以及聖躬, 人皆憂憤, 然畏氣焰, 莫敢言。 前年冬正言李倚天上疏論之, 王遂鞫一鏡虎龍正刑, 孥籍如法, 弼夢等六賊, 初削黜後幷栫棘, 而被誣諸人未及疏釋, 故有是命。 亡何慶尙道士人金麟壽等, 疏請先正臣宋時烈復享道峰書院, 且復先正臣權尙夏官, 亦一鏡等所黜奪也。 王曰: "斯文是非, 在儒林, 不在朝廷, 可令該曹, 復其官。" 是月王將幸懿陵, 天氣尙峭寒, 藥院請竢和暖。 王曰: "《禮》云: ‘雨露旣濡, 君子履之, 必有怵惕之心。’ 況不得隨詣因山乎! 卒不從, 謁陵還。 會有鞫獄, 有司請施壓膝刑, 王曰: "昔 文帝除肉刑, 太宗觀明堂圖, 謂人五臟係於背, 遂除笞背法, 我朝世宗亦除笞背, 況壓膝五刑所無乎? 其永除之。" 三月右議政鄭澔言四大臣冤死狀, 王命復官致祭贈諡。 李晩成洪啓迪金雲澤金民澤李弘述趙聖復等竝復其官, 故贊善李喜朝亦贈諡。 嘗召對謂筵臣曰: "諷諫微諫, 固爲人臣格君之要, 若自人君而言, 則使其臣不能正諫, 乃反規規於諷與微, 不亦可愧之甚乎?" 夏四月命鈔巖穴求志士, 以充經筵官, 將欲招延備顧問也。 右議政閔鎭遠白王曰: "宮人必選於內婢, 不侵及良家者, 先朝德政也。 今往往侵及良家云, 果然否?" 王驚曰: "今掖庭少縱, 不能法唐宗之放出, 豈容益其選也? 況良家女, 爲其父母辛勤長養, 一朝幽閉深宮, 非仁政也。" 立命拿問中官, 杖配宮奴。 五月刑曹覈奏諸道强盜罪, 王謂刑官曰: "好生惡死, 人孰無此心? 迫飢寒困侵漁, 不自覺其陷溺至此, 皆予敎不及民而然也。 卿等宜哀矜勿喜, 酌量遄決, 不令久滯囹圄也。" 秋七月大旱, 王下敎求言, 親禱社稷, 不雨, 將復親禱北郊, 有司曰: "無例也, 請改以南郊。" 王曰: "先朝特祀農壇, 顧不當法耶?’ 遂積誠致潔, 禱于北郊。 旣祼, 密雲四集, 雨滂沱下, 冕服盡濕, 王秉珪愈恭, 始終無失容, 與祭者莫不欽歎。 八月命忠淸道臣, 竪故忠臣洪翼漢尹集吳達濟等墓石, 聖祖嘗賜三忠田畝, 有司因循久不與, 至是飭令盡與之。 冬十一月三南饑, 王減宮納米補賑曰: "先朝有北關貢銀, 故多以銀補賑, 今銀變爲布, 雖欲體先朝遺意, 不可得也。" 十二月有以煥章庵所藏毅宗皇帝御墨獻之者。 王感涕曰: "皇明再造之恩, 沒世不可忘也。 然歲月寖久, 人心易狃, 倘非我聖祖闡明大義, 則東土生靈, 豈知尊周之義乎?’ 仍命致祭于南漢 顯節祠, 又祭于江都忠烈祠, 又祭于統制營忠武公 李舜臣祠, 又祭于華陽洞 文正公 宋時烈祠。 尋以萬東祠賜額御墨刻之石, 親序其下, 印賜文正之孫, 藏石本于內府。 嘗夜對, 天甚寒, 承旨請於臥內, 召儒臣講。 王曰: "人情嚮晦易倦, 正衣冠庶幾振發精神也。" 二年丙午春正月, 行常參經筵, 命王世子開書筵。 舊例祁寒盛暑, 停兩筵, 至是王敎曰: "大禹惜寸陰, 衆人當惜分陰。 今三陽已開, 何待日暖乎?" 上辛親祈穀于社稷, 歲以爲常。 二月王因三南荒政, 敎曰: "昔在先朝, 嶺東監賑御史上飢民圖, 是有御製詩。 予嘗披見其圖, 餓殍者顚連者匍匐歠粥者, 宛在目前, 今三南之民, 奚異是哉? 設賑邑民, 其蠲一年糴庸, 次者半之。" 夏四月, 增建宗廟景宗室成, 宗臣上疏言: "太祖始建宗廟, 至於今而重建慶也, 宜稱慶。" 王曰: "君臣一心謹守祖宗成憲, 使深仁厚澤, 淪浹民肌髓, 勝豫大之擧遠矣。 何庸稱慶爲也?" 秋八月司諫李秉泰上疏, 指陳袞闕甚切直, 王賜虎皮奬之。 九月命贈故副提學權忭諡。 肅宗中年, 絶意榮塗, 士大夫高其風采, 故有是命。 冬十月景宗大王端懿王后祔太廟。 禮成, 王還御仁政殿受賀, 以三條飭諭百官, 一戒朋黨, 二戒奢侈, 三戒崇飮。 十一月王謁文廟酌獻, 御明倫堂親策多士曰: "‘予欲得經綸才, 祛習俗之文華, 效文山之精忠, 其各務實, 毋孤予意。"

三年丁未春正月, 王將親祈穀于社稷, 敎曰: "爲民祈穀, 敢自逸乎?" 乃步至齋殿, 諸承旨固請乘輦, 不聽。 有儒臣將歸覲其親, 以親病謁告, 王曰: "誠病也, 情固當然, 若無病而爲有病, 非惟告君不誠, 其於子道何如哉?" 命改其語予告。 三月, 武臣之特進經筵者 命各陳文義。 先是一武臣陳文義, 被承旨察推, 自是武臣特進者, 相戒不敢言, 故有是命。 時巖穴士被選經筵官者身歿, 筵臣請贈官。 王曰: "生不以爵祿羇縻, 歿何必贈官乎? 可遣禮官致祭, 令本道庇其喪葬。" 夏五月, 左議政洪致中以京外錢貨匱竭, 請鑄錢以益之, 王以爲鑄錢之弊, 倍於錢貴也, 竟不許。

四年戊申春三月, 嶺南賊李麟佐鄭希亮等反, 王師討平之。 先是逆一鏡虎龍伏誅, 弼夢諸賊悉栫棘, 其徒自度逆節難容於覆載間, 弼夢從父弟弼顯一鏡之子寧海虎龍之兄時龍等, 與沈維賢之爲腹心者, 締結己巳罪死人閔宗道李義徵子若孫及諸失志怨國者, 譸張凶言, 誑惑人心。 推麟佐希亮爲元帥, 李有翼李河爲謀主, 約平安兵使李思晟倡亂於西, 摠戎使金重器、禁軍別將南泰徵和應於內, 欲以是月二十日犯京, 推戴密豐君 , 蛇糾蚓結, 醞釀頗久, 朝廷漠然不知。 至是奉朝賀崔奎瑞, 方退居龍仁, 因隣人安鑮, 始知賊情, 疾馳入告, 水原府使宋眞明, 續又械送上變人。 王乃命兵曹判書吳命恒, 爲四道都巡撫使, 朴文秀趙顯命爲從事官佐之, 使率京營兵, 徇南下問罪, 以李汝迪朴東樞爲繼援將, 率京營兵及開城馬軍, 爲都巡撫後援, 張鵬翼爲鎭禦大將, 陣北漢城下, 以防西憂, 尋代金重器爲摠戎使, 出鎭水原鄭纉述爲捕盜大將, 李廷濟京畿監司, 防守漢江 銅雀津, 金東弼爲經略使, 開府南漢分兵遮截龍仁等諸要路。 兪拓基楊州牧使兼東路鎭禦使, 領兵進守皷巖, 金在魯忠州牧使兼湖西安撫使, 控扼鳥嶺等處。 權𢢜權詹忠淸監司, 李匡德鄭思孝全羅監司, 黃海監司金始㷜率三千軍, 遮守洞仙嶺, 兵使元百揆率親騎衛三百人, 遮守靑石嶺, 待思晟就拿後罷兵。 朴師洙爲嶺南安撫使, 徇安東等左道, 慰諭召募, 尹淳爲監護諸軍使, 察嶺隘分兵防守, 而宋寅明爲大司諫備局提調, 使處禁中議事。 皆王屈群策剖分, 投機制勝, 間不容髮, 國人倚以爲安。 王師未及發, 賊夜入忠淸兵營, 殺兵使李鳳祥。 於是營將南延年鳳祥褊裨洪霖, 罵賊不屈死之, 王褒延年曰疾風勁草, 立命贈兵曹判書, 旌其閭, 起復鳳祥漢弼延年德夏, 陞其品從軍復讎, 人人皆思奮勵。 王嘗御帳殿鞫囚, 屛左右, 召寅明密語之曰: "俄者囚援引思晟也, 侍衛宣傳官李思弼蒼黃出去, 是於思晟誰也?" 對曰: "從父弟也。" 是夕以闕直拿囚思弼, 及思晟伏法, 梟示軍前。 思晟素以才稱, 朝廷遣金吾郞捕之, 疑有變。 未幾西倅上思晟寄其家書, 皆瑣細婦女語。 王喜曰: "無憂也。" 言未已, 金吾郞捕思晟至。 凡王籌度機宜多此類, 故措置軍事無闕漏。 王師至安城竹山, 遇賊如摧枯拉毁, 一皷盡勦, 檻送賊魁麟佐等於京師。 慶尙監司黃璿星州牧使李普赫爲右防將, 誓師入陜川郡, 掩擊賊兵, 斬獲甚衆, 善山府使朴弼健爲左防將, 昆陽郡守禹夏亨領兵屬弼健軍, 據牛旨嶺, 斬賊酋希亮熊輔首, 諸賊望風自潰。 於是凶逆悉平, 遂命罷兵歸農。 命恒班師, 王御南門樓受馘, 論功有差, 圖像雲臺, 賜鐵券。 乃諭侍衛將士曰: "爾等雖親屬凶逆、故舊凶逆者, 不知其謀, 勿懷疑懼。 予雖涼德, 豈面諭而貳之乎?" 將士莫不感泣。 是月王與世子, 謁淑嬪廟, 暬御丘史所嘗使令於潛邸者, 欲得間進見伺候於廟內。 弘文館上箚言: "不當以非禮之視, 示東宮也。" 王嘉奬之, 立命驅出陣門外。 秋九月王幸靖陵, 見除道毁民塚, 王怒曰: "民不有國法, 犯葬御路傍罪也。 然毁民塚, 豈王者之政乎?" 遂罪地方官。 時大熟, 進宴于大王大妃、王大妃, 賜朝士年八十以上, 庶民年九十以上, 酒米魚肉有差。 冬十月, 王將親行大享, 會不豫, 天且甚寒, 大臣請代攝。 王曰: "昔皇 仁宗皇帝强疾親享, 汗透衣疾愈, 顧不當法耶?" 竟親享。 自晨祼至望瘞, 誠敬藹然, 升降步趨, 望之若神。

五年己酉春正月, 下敎勸農, 飭守令助民種糧, 歲以爲常。 王方招徠巖穴士, 一諫官言恩禮太過, 王怒曰: "此啓人主輕視巖穴士之心也。" 遂罪之。 時王銳意矯良役弊, 任事者病經用無以充。 王敎曰: "諸臣期予不淺, 而予之政猶泄泄也。 且如 給田租半者, 前後相望, 無他焉節約也。 國誠有裕, 一民二匹, 何難蠲乎? 宮田定制外免稅, 悉令出稅, 各衙門書院位田視此。" 尋諭廷臣曰: "古語云: ‘宮中好高髻, 四方高一尺。’ 慕效之本故在也。 昔我宣祖衾與袴皆木綿布, 宮中傳爲美事。 予素不喜奢華, 且以聖祖爲法, 故令尙方製黑布笠。 夫金珠錦繡, 非我國之貨, 國俗樂趨之若是, 而何能使黃金同土價乎? 老臣已矣, 年少之臣, 他日必見予志之少展也。" 右議政李台佐曰: "孔子道千乘, 節用愛民, 不過如此。 今日行一善政, 明日行一善政, 回否爲泰, 夫何難乎? 但其進銳者其退速, 此又聖心之所當勉也。", 王曰: "善。 予在東宮, 宮僚陳戒, 未嘗厭聞, 卿言切中予病, 當佩服也。" 三月朝廷新經戊申亂, 凡凶逆近族, 不擧擬於職任, 王曰: " 王導王敦之近族乎? 往者名出賊招, 亦分其黑白疏釋之。 況國法之所不坐者, 置諸疑似之中乎? 非王政也, 其自今調用。" 夏四月, 王親禴, 入齋殿敎曰: "京外生民, 皆我祖宗赤子, 然都民不耕不蠶, 事育皆仰貢米。 爲有司者, 不體予臨門駐橋之諭, 徒以惜費爲心, 豈自近及遠之道乎? 其飭所司, 毋孤予入太廟起感, 亦令八道兩都, 恪遵首春之敎。" 五月戶曹請北關設銀礦, 王曰: "御史權萬紀, 以採銀爲請, 太宗曰: ‘與其多得數百萬緍, 何如得一賢才, 可謂有帝王之體矣。’ 其已之, 毋俾唐宗專美有昔。" 秋九月, 誕彌節, 儒臣效《金鑑錄》陳戒, 王賜《近思錄》以賞之。 十二月奉肅宗廟入世室, 從時原任大臣之請也。

六年庚戌春正月, 王講《東國通鑑》, 謂筵臣曰: "孔子《春秋》, 必尊天王, 所以正君君臣臣之義也。 高麗嘗臣事有, 則之名, 直書國史可乎? 我國自孝廟、聖考尊周以後, 一隅靑丘, 獨保大明日月, 爾等其不忘先朝大義也。" 先是設纂輯廳, 命大提學李德壽《肅廟寶鑑》, 至是上之, 王三復感涕, 以善繼自勉。 二月王將幸寧陵時, 間往往有癘氣。 然群臣恐以癘氣爲言, 不摡〔槪〕王心, 遂托他事, 弘文館上箚諫止, 王責曰, ‘爾等讀聖賢書, 職在經幄, 乃以婦人之拘忌, 勸其君, 予竊恥之。" 大臣、三司、二品以上, 相率力爭, 王終不聽, 飭所過路耕民, 皆令播植不輟曰: "此亦春省耕之意也。" 回鑾至廣州, 登西將臺, 感聖祖之志事, 俯仰太息。 三月羅弘彦謀推戴廢宗, 事覺伏誅。 庚申罪死逆宗之從孫, 己巳罪死人閔就道之外孫, 弘彦戊申賊崇坤崇大之親屬, 逆鄭思孝之友壻也。 頒《三綱》《二倫行實》等書于八道, 命刊印廣布, 俾民觀感, 二書皆世宗朝所撰也。 時北關饑, 遣御史監賑, 又遣督運御史於嶺南, 輸浦項倉穀于都連浦, 浮海以濟之, 太僕牧場可墾之地, 許民起墾。 於是北民無一捐瘠。 夏五月, 王覽《肅廟寶鑑》, 至致祭崇仁殿武烈祠, 歎曰: "‘吾東方免左袵之俗, 賴有箕子八條也, 微寶錄, 幾忘之矣。" 遂遣禮官致祭于殿祠, 尋命購岳武穆 《精忠錄》以進。 先是戊申賊崔必雄亡命, 爲宦官所捕納, 王賞宦官, 不許錄勳。 至是筵臣以爲言, 王曰: "中官策勳, 其漸不可長也。" 竟不許。 六月宣懿王后 魚氏薨, 王宅憂一如甲辰。 大王大妃以爲過禮, 大臣重臣亦以爲言, 王曰: "歷觀前代帝王, 能知繼體之重者尠矣。 予所以爲此者, 欲後王知繼體之重也。"

七年辛亥春三月, 王講《周禮》, 至司寇掌邦禁曰: "禁者, 禁於未然也。 今秋曹京兆柏府, 惟收贖爲務, 恐犯者之不衆, 禁之設, 旣亶然哉? 其飭之。" 夏五月旱, 王遍禱南北郊, 輒雨, 雨不沛然, 王曰: "噫! 歲且歉矣, 議所以賙賑者。" 大臣請鑄錢, 以代經費, 而儲其穀賙賑。 王曰: "不然。 穀不在官則在民。 與其飢而後賑之, 曷若預散於民, 使民無飢也? 百姓足, 君誰與不足, 其是之謂乎?、 諸臣皆頓首稱善。

秋八月, 遷長陵交河。 先是有言舊長陵多蛇虺, 王命大臣相視, 果然王遂決意遷厝。 遷厝日, 幸舊陵, 隨至新陵, 事巨細躬親蕫飭, 旣卒事, 敎曰: "民勞矣。 爲民父母, 豈可曰非遊畋, 民敢言勞云爾乎? 四邑民貢稅調布減其半, 郵卒令廟堂施惠。、 初舊陵松栢, 皆孝廟手植, 王取其子, 手自播新陵曰: "‘使予子孫, 感予手澤, 如予之感寧陵手澤也。" 九月筵臣言《五禮儀》有誕日賀, 王不受誕日賀過也, 王喟然嘆曰: "程子云人無父母, 生日當倍悲痛。 使予得如世宗聖祖之時, 何辭於賀? 在東宮則辭之, 在今日則受之可乎?" 卒不從。 先是召經筵官梁得中至, 擧止樸野, 所對太闊, 不適用, 筵臣皆笑, 然王優禮遣之。 至是筵臣復以爲言, 王曰: "山野之人, 無怪其如此。 可貴不可忽。 忽之恐他人不肯來也。" 終王之世, 未嘗一言其短。 冬十二月, 行三覆, 敎曰: " 太宗中主也, 然貞觀之間, 囹圄空, 鵲巢于樹, 寡人臨御七年, 無德以施化, 京外慮囚, 厥數過十, 殆德化未能及民而然也。 咨方伯毋曰予否德, 恪勤宣化, 欽乃申諭。"

八年壬子春正月, 命修崇靈殿崇德殿, 遣近臣致祭, 調用前朝王氏後。 崇靈殿, 檀君祠也; 崇德殿, 高麗王祠也。 時五道大饑, 王屢飭廟堂議賑, 久未得善策, 王讓曰: "卿等若以民吾同胞爲心, 而凡諸爲民之政, 常如學問之士, 無疑者有疑, 有疑者無疑, 則豈有不濟乎? 今乃玩愒如此, 哀我赤子, 徒受困於下也。" 群臣皆愧謝。 至是賑五道, 有司欲爲粥以賑京民, 王曰: "與之乾餱, 俾歸與妻子共之。" 三月飭三南, 餓殍在道路者, 官收痤之。 夏四月, 王行次對, 諸臣議賑爭不已, 臺諫以爲言, 王從容謂曰, 天地交泰, 然後萬物成, 上下交孚, 然後庶事理。 秦皇末頹弛, 以刑法繩之, 群臣救死不贍, 何暇交孚? 和氣索然, 上下怨叛, 比及二世而亡。 懲秦苛法, 濟以寬簡, 故朝儀不嚴, 至有劍擊柱者, 及叔孫通制禮, 乃曰始知皇帝貴也。 自 以訖我朝, 皆文勝其質, 至於今則君臣之間, 幾乎否隔, 故予欲損有餘補不足, 此所以有矯枉過正之弊也。 然臺臣之同入次對, 非欲備位, 實兼糾察, 可自今隨事刺擧。’ 五月辨誣奏請使洛昌君 等, 回自燕京, 進新修《明史》。 先是國朝宗系事, 太祖得國事, 仁祖登極事, 傳聞訛謬, 皆誤紀於《大明會典》等書, 列朝屢遣使辨誣, 未之盡正。 及王七年, 始聞淸國康熙季年, 命王鴻緖《明史》列傳, 未及卒業而鴻緖卒, 乃使張廷玉徐乾學等, 集天下文學之士, 續修本紀諸志, 歷三十餘年, 至是垂畢。 王曰: "噫若過此會, 雖悔曷追? 亟遣等奏請。" 及等還, 諸誣盡昭晣於新史。 命給米一千石于江華府, 俾糶糴取耗, 爲千把摠以下較射賞格費, 從留守尹游請也。 閏月, 王親書尊聖廟正士習務誠實九言, 復爲綸音三十行, 命近臣宣諭太學諸生且宣饌, 明日太學生等上箋謝。 遂命久任大司成, 以責成效。 六月旱, 王親禱于社稷北郊, 不雨。 乃敎曰: "連年亢旱, 民將盡劉, 減膳豈足以盡責己之道? 昔大旱, 縣子所對, 得禳災之要, 其令遷市三日。" 冬十月, 上番軍薄衣者, 命有司製襦衣賜之, 飭所過州縣富戶, 隨見收接, 不令凍餓於街上。 十一月賜京畿、三南、嶺東民米租四萬五千石, 減庸調一年之半, 盡蠲糴耗, 乃敎曰: "孟子云: ‘保民而王, 莫之能禦。’ 今之民, 卽我祖宗赤子, 而況聖考恤民之盛意, 予素見聞者乎? 連年荐饑, 蓄積枵如, 然民若盡劉, 雖有穀億萬斛, 將安用哉?" 遂分遣御史, 監賑宣諭, 且令搜訪文武才及巖穴求志士。

九年癸丑春正月, 王下敎飭朝廷, 聚精會神, 惟才是用, 祛舊日之習, 廓本然之公, 與歲俱新。 二月, 王視學。 初命酌獻文廟, 右議政金興慶上箚言: "酌獻文廟, 例當試士, 非荒歲所宜行也。" 王報曰: " 開創之初, 以太牢祀先聖, 我聖祖自龍灣回鑾, 掃地爲壇, 首祀先聖。 今國家多事, 且三年甫畢, 斯禮之曠, 比及八年, 於予心不其歉乎? 雖然節用愛民, 先聖攸訓, 今不可違先聖之訓, 而祗謁先聖, 亦不可因試士之費, 而不謁先聖, 一依《五禮儀》視學禮, 祛進酒進饌, 從簡行禮, 其酌獻試士之禮, 則退以來秋。" 王遂至文廟, 親獻于先聖, 退御明倫堂, 以朝士習《周禮》者, 充講書官, 與諸生之能通一經者, 皆各進講, 討論文義, 賜掌議二人《中庸》各一部。 夏四月, 王癉心憂民, 減膳久不復, 有司以爲言, 王愀然曰: "予對玉食, 心不能安, 欲以玉食, 遍饋饑民而不可得, 況可遽議復膳乎? 冬至使齎來紋緞, 悉以賜賑廳補賑。" 有司請減百官軍兵祿, 以梁代米, 王曰: "荐饑由予涼德, 忍獨享玉食乎?" 命減御供五分一, 顧謂筵臣曰: "斯民也, 祖宗至誠愛恤之民也, 予不能法祖宗保斯民, 後世將以予爲何如主也?" 由是任事者, 亦莫敢不盡誠。 五月, 王召對語筵臣曰: "君臣與朋友異, 朋友猶難責善, 況君乎? 傅說高宗曰: ‘有言遜于汝心, 必求諸非道, 有言逆于汝心, 必求諸道。’ 此人君聽言之要也。 予於諸臣進言, 有忼慨激切者, 不能無咈於心, 然事過之後, 平心思之, 未始不慨然歉愧也。" 又嘗於晝講, 因文義敎曰: "昔緹縈以爲: ‘死者不可復生, 刑者不可復續。’ 千載之下, 其言猶令人惻傷矣。 講學之道, 當鑑古而戒今, 討捕營治盜, 專尙嚴酷, 往往玉石俱焚, 故曩嘗累飭, 近復因循踵謬, 殆營將不擇人而然也。 其諭西銓, 自今必歷營將然後, 方擬閫帥, 凡討捕營承款之類, 一如京捕廳移送秋曹者, 送巡營盤問處決, 仍著爲令。" 會有鞫獄, 王親臨訊囚, 按獄之臣, 請令捕廳先問罪人得實, 然後上于金吾, 王始難之, 按獄之臣固請, 王不得已從之。 有頃悔曰: "獄有體, 罪人訊于秋曹, 上于金吾固也, 今治盜之廳, 反爲治逆之廳, 而捕廳遂成金吾之幕府, 此路一開, 予知後來搢紳, 亦難免其禍也。 亟寢前命, 以爲後日法。" 六月, 王因事謂度支曰: "節儉實體, 行之甚有味。 予在內則衣以紵, 傘以紬, 及至動駕, 然後袞與傘皆錦, 蓋動駕之時, 固自有體貌在也。 咨爾有司, 其悉此以防尾閭。" 秋七月, 王將親享, 大臣以日熱請代攝, 王曰, ‘事先何可擇時? 勿復言。" 八月, 王敎曰: "自古制刑, 俱有其法, 法外之刑, 雖或取快一時, 終非先王欽恤之意也。 予於乙巳, 旣除壓膝刑, 壬子又除捕廳剪周牢刑。 今只餘烙刑而已, 頃當親鞫亦循用之, 然肉刑笞背, 五刑之一, 而宗, 猶且除之, 況無於刑之刑乎? 咨金吾, 其永除烙刑著爲令。" 冬十月, 命設壇東門外, 索祭辛亥餓殍。 召對宣饌, 命有父母者歸遺之。 於是諸臣爭取盈袖, 其無父母者, 空手而退, 王爲之悽咽, 諸臣亦莫不感泣。 十一月, 平安監司權以鎭啓: "鴨綠江把守卒, 冬月撤罷古也。 前監司宋眞明承聖敎創設, 然氷雪呵凍恐傷人, 請罷之。" 王曰: "冬月氷合, 乃把守之時。 然苟其非古也, 而把守卒或有凍死者, 則是自我開死人之路, 何忍爲也? 其罷之。" 時, 大臣、宗臣爭體例, 胥囚下吏, 而曲實在大臣, 王是宗臣而非大臣。 於是大臣呈告求遞, 弘文館上箚言, 非所以尊朝體也。 王曰: "人孰無過, 改立爲貴。 予於敬大臣失之矣。" 遂罷宗臣, 敦勉大臣, 復以相敬之義, 飭宗府朝廷。 尋遣禮官, 致祭文純公 李滉陶山書院, 命畫陶山書院以進。 十二月, 王患風眩, 猶孶孶機務, 至夜分不寢, 筵臣勸王節損, 王曰: "予見先朝季年違豫之中, 酬應萬機無少滯。 此我家法, 敢自逸乎?" 亡何, 謂筵臣曰: "始勤終怠, 人主之通患, 而 開元天寶, 判爲二人, 尤其甚者也。 昔我世宗朝, 命撰《明皇戒鑑》者, 聖意有以哉。" 命廣求其書以進。 召對講《陸宣公奏議》, 王愀然曰: "昔故左相李㙫, 勸予講是書, 故相臣洪致中趙文命亦以爲言, 其意蓋以予量狹, 而欲借是書, 以開發聽納之量也。 夫呂祖謙, 一介學問之士, 能因《論語》變化其氣質。 予講是書, 若不能恢其量, 豈特負是書? 亦所以負三相也。 然三相已亡, 不及見予之講是書, 傷哉悲乎!" 遂親製綸音三十餘行, 命政府求言, 補闕拾遺。 尋以諸道, 歲末薦孝行卓爾之士, 而京師則否, 非一內外之道也, 命京兆歲末薦擧如諸道。

先是王語筵臣曰: "予自辛丑承儲, 慨然欲以大布大帛, 挽回世道, 自近以來, 事不從心, 徒剋減爲政, 其流之弊, 將使史臣無日曆而後已。 豈予前日立志之過哉? 大抵亡國之本, 奢侈是已。 然祛奢崇儉, 亦惟在人君導率之如何。 予好阿諛, 而使群下忠直, 則不能行矣, 予着錦綺, 而使群下着木綿, 則亦不能行矣。 端其本正其原, 量力而漸進, 倘庶幾乎!" 至是復下敎曰: "古者燔黍捭豚, 可以致敬鬼神; 茹毛飮血, 可以辨別尊卑。 茅茨土階, 可以平章百姓, 三代以降, 人文繁而奢侈盛, 然猶未若近世也。 方今過年未婚者, 奢侈也; 踰月未葬者, 奢侈也; 祭先不以禮者, 亦奢侈也。 夫草偃知風, 影正知表。 故匹庶效朝士, 朝士效貴戚, 貴戚本王宮, 予其敢曰惡奢乎哉? 尙方織錦坊, 可自今永撤, 勿復請設。"

十年甲寅春正月, 命八道監司兩都留守, 廣印《農事集成》, 均布民間, 俾知世宗朝導民務本之盛意。 親行祈穀祭, 旣誓戒, 會有鞫獄, 命過祭乃鞫。 弘文館上箚言, 非所以嚴鞫體也。 王曰: "爲民祈年, 顧不重耶?" 竟不從。 過祭明日, 行朝參於明政門, 蠲軍民已故者之丁布, 然後始親鞫訊。 一罪人無其實, 遂命宥釋, 出獄而斃, 王悔曰: "予殺不辜也。 史官書予之過, 使後世人主鑑戒也。" 尋以備邊司提調, 分差各道句管堂上, 察所管道內豐歉弊瘼, 與方伯預講而經理之。 王方行次對, 有鵲來啄右史毛席。 王歎曰: "微物亦知毛席之不可食, 而猶且啄之者, 迫於飢也。 哀我赤子, 無衣無食, 顚連道路, 安知不如彼微物乎?" 遂飭京兆及諸道方伯, 勸農安集, 去擾民之政, 鰥寡孤獨廢疾者, 訪問軫恤。 二月, 王將幸懿陵, 時鞫獄未罷, 群臣請停幸。 王曰: " 太祖臥榻之側, 他人鼾睡, 尙不憚行。 幸予方君臨一國, 以卿等爲臣. 何憚之有乎?" 不聽。 三月親祀大報壇, 遣官致祭于楊經理祠。 夏四月, 親禴後, 凡一事而屢見者, 皆不書。 五月, 王講《李忠定奏議》, 命以議軍政、敎車戰兩箚, 頒示三軍門大將。 尋敎筵臣曰: "公而不明, 則以賢爲愚, 以愚爲賢; 明而不公, 則雖知其賢, 不能用, 雖知其愚, 不能舍。 用舍之分, 不亦難哉?" 六月, 有以故參議安邦俊所撰《抗義新編》進之者, 王覽趙憲壬辰倡義事, 嗟歎不已, 賜祭祠及七百義塚, 復命兩南營, 刊印所手證《朝天錄》日記等書, 分賜錦山沃川兩書院。 秋九月, 王飭諸道監司守令, 民之避役者, 招徠安集, 新歸者減稅蠲徭, 務盡蘇息之道, 因講《詩》《鴇羽》而興感也。

十一年乙卯春正月, 陳奏副使朴文秀言, 故兵使襄武公 鄭鳳壽丁卯却敵事, 且進皇所賜鳳壽銀牌票文, 王嗟歎久之, 致祭鳳壽, 錄其後。 夏四月, 以冬至使讀來紋緞, 賜京畿營, 買穀儲積。 先是壬子賑飢, 病京畿穀不足, 及前夏時雨降。 王曰: "人情得雨則弛。 迨此有年, 宜思備預之道也。" 遂命京畿儲穀, 至是賜緞以助之。 五月, 咸鏡監司論犯越民五十人罪, 王遣御史按査。 臨筵敎曰: "寧失之寬, 毋失之猛。" 仍命采訪文武士可用者, 且訪見北鄙徵士李載亨, 使傳願見之意也。 秋八月, 王始欲謁二陵, 俄而謂有司曰: "夜夢侍先朝如平昔。 明帝夢園陵, 按曆卜月, 正好爲法也。" 遂幸明陵。 九月, 日有食之, 王親救食。 儒臣陳故事勉戒, 嘉納之。 冬十二月, 王聞四學舍頹圮, 歎曰: "‘都內王化之本, 而學舍乃如此, 不可聞於隣國。 其令俟春修葺。" 嘗夜宣饌于入直玉堂曰: "先朝嘗敎以寒夜念玉堂, 而撤御饌宣賜。 予夜不設饌, 故自御廚具以賜, 可與左右史同飮食也。"

十二年丙辰春正月, 京民已故者, 悉蠲免其債, 而公限十五年, 私限二十年, 從大臣言也。 東萊多士疏言: "壬辰死節人宋象賢文也, 鄭撥武也。 不可同享一祠, 請二之。" 王曰: "兪應孚豈不是武, 同享六臣祠。 不可以武而貶其節也。" 斥不納。 二月幸光陵, 蠲楊州民役一等。 飭銓曹, 錄高麗王遺裔, 立碑于永柔縣 岳飛祠。 尋命二品以上, 各薦才堪字牧者二人。 辛壬歉歲, 嶺南沿海民全家死者, 悉免其田租。 夏五月, 錄戊申死節人南延年李述原子孫。 下敎于監司守令曰: "凶年之顚連者, 監司守令知賑救之, 樂歲之顚連者, 不復置心, 任其餓死道路, 何其與一夫不獲, 若撻于市者異乎?" 大臣言: "編配遭父母喪者, 許令歸葬, 法無其文也。" 王曰: "王者以孝爲治, 如之何其不歸葬也? 可令歸葬。" 六月, 讓寧孝寧兩大君墓立祠, 其下給田置守塚, 復其戶。 冬十月, 守令犯贓者, 禁錮終身, 薦主論罪, 著爲令。

十三年丁巳春正月, 王以五事飭廟堂方伯, 務寅協也, 擇字牧也, 勉循良也, 勸農桑也, 修堤堰也。 二月, 王自首歲開法講, 討論不倦, 會玉堂多不充, 久未開講。 王曰: "上雖倦怠, 下猶當勸勉。 以予晩學, 因春煦漸長, 欲補前工之闕, 而玉署之門長鎖, 法筵之開無期, 淸燕顧問, 未有其人, 求諸往牒, 有是否?、 遂命備員, 日橫經講讀。 三月王患臂手不仁, 猶欲親享皇壇, 群臣力止之。 王曰: "崇報皇恩, 惟在數尺崇壇, 予曷敢以小疾曠禮乎? 予病妨屈伸, 秉珪承筐, 懼有失儀, 燕居之中, 試肄習之, 粗可以如禮也, 勿復言。" 尋命政院飭六曹, 修明《大典》法, 違者察推。 慶尙監司閔應洙疏言故參判曹偉之冤死, 故左尹郭再佑之勳業, 故郡守趙宗道之立殣, 請竝賜謚, 從之。 復命公洪監司, 建鄭忠信廟, 錄其後。 夏六月, 天甚熱, 王猶講學不輟, 至夜皷四下乃罷, 大臣言太勞神用。 王曰: "人主一心, 萬化所本, 豈可以日熱怠乎? 祖宗朝必不爾, 故予使承旨溯考古事, 盛暑開講, 未有考祁寒則有之, 寒與暑奚擇哉? 況一月六對, 尤可見祖宗勤政之盛意也。" 是後季年, 王竟行六對, 未嘗一有闕焉。 秋七月, 王將祈雨社稷, 時王不豫, 筵臣言在誠不在禮, 王曰: "成湯非不足於誠, 何爲代犠桑林乎?" 竟親行。 還至金吾門前, 命承旨放釋輕囚。 越二日, 復親祈太廟, 不乘輦不張傘至廟門, 雨下袞冕盡濕, 達宵祗事, 明日還宮, 遣宣傳官勞問軍兵。 八月王幸健元陵, 歷謁五陵, 召見京畿監司及守令于齋室, 駕還。 明日行晝講, 犒饋軍兵。 九月, 命調用孔氏。 初王未詳國中之孔爲先聖裔, 至是筵臣言: "先聖五十三世孫, 仕爲翰林學士, 當高麗魯國長公主來嫁恭愍王, 陪而來, 因家東土, 東土之有孔氏始此, 故有是命。 考講館學生, 同分者令試製前庭, 較其優劣, 承旨言夜黑不可寫卷, 王爲撤御座燭與之。 閏月蠲京畿湖西湖南災損邑軍保米布。 時六鎭饑, 特賜 奴貢米三千石, 復益以嶺南儲置米二千石, 遣御史監賑, 卒無一人流亡。 冬十月, 王旣親享, 謂掌樂院提調尹淳曰: "昔人占國隆替必於樂。 今廟樂繁促宜正之。" 遣承旨放釋輕囚, 飭是後遇祁寒盛暑, 按例稟行。 命大臣備局堂上三司長兩局大將八道道臣兩都留守, 各擧人才。 十一月, 禁旅以行伍試藝陞之, 著爲令。 是月王慮囚, 謂筵臣曰: "先朝每當御膳進供, 有雉鷄獐兎之生者, 必放諸禁苑, 予亦倣而行之, 蓋聞其聲, 不忍食其肉之意也。 禽獸尙然, 況人乎?" 十二月。 王語大臣曰: " 李沆慮人主侈大封禪, 常以水旱奏, 誠得大臣體也。 予素無學術, 粗聞聖狂之分, 在於一念, 且經歷世故者多, 不待卿等之奏, 常自儆惕, 每夜睡覺, 幸今日之無侈大也。" 筵臣以程文之弊爲言。 王曰: "蘇軾賢矣哉! 得失置之度外, 憂君德不進也。 雖然亦惟在上者之道率而已。"

十四年戊午春正月, 遣官致祭于故忠臣金應河, 以殉節之歲也。 夏五月, 安東人私毁文正公 金尙憲祠, 王曰: "文正大節, 百世炳然, 敢私毁其祠乎? 亂民也, 首倡者刑配。" 秋九月, 賜高麗忠臣吉再諡, 仍命致祭。 時慶尙監司李箕鎭以爲言。 王曰: "種竹賜田, 罔僕之志, 確乎不可拔。 逝者有知, 豈以賜謚爲有光耶?" 筵臣言: "鄭夢周朴尙衷皆前朝忠臣, 而我朝賜諡也。" 王可之, 命錄三人後。 冬十月, 王講丘濬 《衍義》, 至《明禮樂篇》。 謂儒臣曰: "猗我世宗朝, 天降秬黍, 地出磬石, 遂與名臣碩輔, 制作粲然可觀。 今雖世變風移, 豈曰無樂? 顧未有解聲律者, 繁音促節, 非復祖宗之舊。 且如《與民樂》, 古稱來往東西闕一章方終, 今亦不能然。 嗚呼惜哉!" 良久, 復曰: "我朝之《五禮儀》, 卽皇朝之《大明集禮》。 然朝士無人習熟, 凡有大禮, 一委鴻臚吏, 顚倒變亂。 禮尙如此, 樂何論乎?" 亡何禁方伯守令之濫刑者。 京畿、三南大同米, 命留其半于各邑曰: "古者有司之臣, 不以錢穀之數, 白于上者, 恐人主知其裕, 反生豫大心也。 予常因月終所上會要, 以爲安得儲積殷富, 效 盡給天下田租也, 今之儲留, 雖不能當給租, 庶可省轉輸費也。" 十一月, 命文正公 趙光祖、故參判鄭蘊, 皆立後奉祀, 錄故府尹林慶業及皇朝提督李如梅後。 十二月, 大臣以伊川谷山多盜, 請易以武倅。 王曰: "爲治能否, 不係文與武。 況盜本良民, 使仁漸義, 摩龍蛇化爲赤子可也, 豈容以緝捕杖殺爲務哉? 宜先飭兩府。"

十五年己未春正月, 王親耕籍田, 飭方伯守令, 助民種糧及牛, 廣闢田野。 禁宗戚僕隷, 侵漁京民, 民有貧不能婚嫁者, 有司助之。 夏四月, 王講丘濬 《衍義》, 至郊祀皇帝親省牲誓戒百官, 歎曰: "敬祀典, 顧不當若是耶?" 命禮官議大臣。 大臣皆以爲累百年不行之禮, 不必創也, 王曰: "無於禮之禮, 固不可創, 禮所有者, 若之何不行也?" 遂命自有親享, 省牲誓戒, 亦皆親之。 進宴于大王大妃, 朝士年七十, 庶民年八十以上者之子若孫, 官與資各宴其親。 五月, 追上中宗元妃愼氏諡曰端敬, 祔于太廟。 先是肅宗申奎上疏, 請復莊陵位號, 又請復愼妃位號, 肅宗但復莊陵位號, 至愼妃事猶難之, 建祠置守戶。 是年春, 王因事起感, 命中官守祠。 未幾, 士人金台南上疏, 請復愼妃位號。 王曰: "君心趨向, 不可不愼。 好理財, 則理財者進, 好開邊, 則開邊者進。 今台南必因中官守祠而爲此疏也。 然人君用言, 但觀其當否而已。" 遂命百官雜議, 皆曰: "台南之言是也。" 從之。 秋八月, 王幸溫陵, 端敬后新陵也。

十六年庚申春三月, 王幸明陵, 追思肅宗朝建置大報壇, 爲之感慨。 回鑾至宣武祠, 俯仰涕泗, 命官致祭, 親賦感皇恩詩, 刻揭于壁。 夏四月, 王講《周易》, 至《噬嗑》之大象, 歎曰: "人君講學, 非爲尋章摘句, 蓋將欲體行也。 聖人云, 古之聽獄者, 求所以生之, 今之聽獄者, 求所以殺之, 此豈非萬世龜鑑乎?" 仍飭八道, 務詳愼庶獄。 右議政兪拓基請續《典錄通考》, 王可之。 且敎曰: "創業中興之君尙寬大, 故國祚綿永, 繼體守成之主務苛刻, 故子孫促亡, 輯是書者, 不可不知也。" 未幾王覽啓狀有刺字語, 疑黥剌尙存於今, 以問拓基, 拓基對曰: "我國循用《大明律》, 《大明律》竊盜者刺字, 故議讞引其文, 實未嘗刺字也。" 筵臣言: "法曹尙有黥涅具, 往往刺其臂, 不刺其面也。" 王曰: "身體髮膚, 同受父母, 其爲毁傷, 面與臂一也。 一傷之後, 雖或自新, 何能爲平民乎? 黥刺之具遄焚之, 刺臂之法且禁之。 比律引用, 雖曰空名, 安知後來不有實其名者乎? 宜去此名勿稱也。" 五月, 大同米田租減其半, 有司以經用不足爲言, 王曰: "君臣以草衣草食爲心, 何憂經用乎?" 遂命罷九營繕。 六月, 加上孝宗大王諡曰明義正德, 親享太廟, 還御仁政殿受百官賀。 秋七月, 群臣以王孝悌之德, 與凡祛黨禍掃逆亂修祀典懷黎庶, 求諸載籍, 尠有倫比, 屢請尊號, 王固讓不許。 大王大妃勸之受, 王泣曰: "請先進號慈聖, 然後謹受敎。" 大妃許之。 遂上大妃尊號曰顯翼, 王尊號曰至行純德英謨毅烈, 王妃尊號曰惠敬。 王受冊寶於仁政殿, 受百官賀於明政殿。 明日命承旨詢貢市民弊, 飭各道采民瘼以聞。 八月, 王親行釋菜于文廟, 退御明倫堂, 設科取士, 命大司成, 月三至國子, 與諸生會饌, 課其業倣《周禮》州陞學之法, 每式年諸道各薦能通五經士一人, 入太學作成。 九月, 王幸二陵, 路過坡州 文簡公 成渾墓, 王駐轎而式以致敬焉, 遣官致祭于文成公 李珥墓。 旣謁陵, 遂幸開城府滿月臺, 設文武科取士, 飭甄用文武沈滯人。 其當通淸顯者, 通淸顯。 至成均館, 行謁聖禮, 周覽學舍, 歎曰: "美哉基也。 勝國好佛不好儒, 以至於亡惜乎。" 遂親書尊聖道, 刻揭明倫堂, 賜三經四書各一部, 貯尊經閣。 復敎曰: "先朝癸酉, 幸故都也, 欲視學未果, 但依兩朝故事, 賜綿布, 今亦賜綿布一百匹。" 乃竪碑于善竹橋, 褒高麗忠臣鄭夢周之節, 又竪碑于不朝峴, 以勖不朝人子孫之忠貞, 過四孝子碑, 命承旨問金嶪等子孫有乎無乎, 遂回鑾。 冬十二月, 諭巖穴求志之士, 出而造朝, 造朝者皆命乘傳。

十七年辛酉春正月, 關東饑, 遣御史監賑, 蠲騎步兵布, 其尤甚邑竝免庸調。 時關北亦饑, 凡東北道方物物膳朔膳, 限秋成悉免。

二月, 擢前副提學金鎭商爲大司憲, 嘉其出處, 有本末語默以節也。 三月命儒名者, 勿施治盜刑, 著爲令。 初前參判李春躋, 冠其子, 使庶弟夏躋掌具盛饌, 遍邀公卿韋布宴之。 與宴者多中毒歸死, 不死亦病, 群怨擊皷, 請治夏躋比死者一洗, 王矜而可之。 於是群怨以爲, 秋官常刑, 不足以取服, 送捕廳雜施治盜刑, 備極酷烈, 夏躋竟死捕廳。 至是王親試講館學生, 謂命官宋寅明曰: "治夏躋, 所以慰孝子慈父心也。 然傳有之士可殺而不可辱。 夏躋曾以講生入此庭, 乃以治盜之律治之。 此路一開, 或爲後日法, 則滔滔之弊, 豈不自予始乎?" 蓋寅明子亦死於宴, 故王及之。 尋命有司, 洗滌囹圄, 除其不潔。 夏四月, 革吏曹郞通淸法, 改翰林薦爲圈。 王痛惡黨習, 以爲: "黨習皆由新進士, 躁競相傾軋也。" 命罷二薦。 諸嘗爲翰林者, 上疏引李爾瞻都堂會圈事, 以爲非所以重史官也。 王曰: "執藝之陳, 夫誰曰不可? 然予惡黨習, 熟思而審處之, 小官敢沮戲乎?" 遂盡罷陳章諸臣。 五月, 以《五禮儀》宮殿門橋古名異, 命不便行禮也, 命前大提學李德壽正之, 待書成送于嶺南營刊行。 六月, 停關東掘白土之役, 仍命司饗院輟秋燔, 從御史言也。 秋七月, 召太學生于廣達門外, 賜饌饋酒, 命都承旨宣諭, 尊聖務本之道, 遵肅廟故事也。

十八年壬戌春正月, 王以黨議分爭, 多起於書院也, 命撤諸道五十年後新創書院。 贊善朴弼周上疏, 請勿毁箕子孔子朱子三聖影堂, 王曰: "草野之言, 可不從歟?" 遂許之。 三月, 王親書‘周而不比, 乃君子之公心, 比而不周, 寔小人之私意。’ 賜太學, 刻石竪于泮水橋。 夏五月日有食之。 王前一日, 齋戒救食仍著爲令。 時癘疫熾甚, 多死亡, 王命兩醫司, 分掌醫之, 全家死者, 自官收瘞。 六月, 築江華外城, 從留守金始㷜之請也。 秋七月, 以李延德兼掌樂院正, 使考正雅樂。 國家經亂以後, 雅樂散軼, 笙簫管琴皆不備, 皇壇樂器, 太半以俗樂代。 亦不能備宮軒之制, 王慨然, 命掌樂院提調閔應洙, 購得四器於燕京, 然其彈吹曲譜無知之者, 或薦延德知樂, 故有是命。 王且欲復世宗報漏閣制, 命延德與巧思人崔天若講究之。 八月, 有人得古圭於平壤土中, 以獻曰: "此箕子圭也。" 王以問筵臣。 筵臣對曰: "尙玄, 箕子圭必玄, 而今弗玄伊靑非也。" 王曰: "然。 此必皇 高皇帝所賜與我國, 而失於壬辰西狩者也。 享皇壇時, 秉此圭不亦可乎?" 九月, 慶州大水, 毁新羅 憲德王陵, 王遣香祝, 命道臣修之。 先是嶺南民運穀關北, 至海中渰沒。 王曰: "爲北民而死南民, 仁之難全也如是夫。" 命道臣設壇祭之。 冬十月, 命刊《兵將圖說》, 廣布中外。 十一月, 王悶京華士, 不肯入太學居齋, 命增上齋生額百人, 爲率以會饌, 一日爲一點, 滿五十點者, 許赴泮試。 遂成講製節目, 命太學遵行, 明日召見太學生於崇文堂曰: "先朝建此堂, 名崇文爲右文也。 今見爾等於此堂, 亦右文之意也。"

十九年癸亥春正月朔朝, 王率百官陳賀于東朝, 以王卽阼後母臨二十年也。 三月命撰《受敎輯錄續編》。 敎曰: "是後非軍務, 而予或用棍, 喉唍執奏。" 刑曹參議柳復明上疏, 請禁酒。 王曰: "往者禁酒, 擾民而無實效。 予所以爲文戒之, 不設禁者此也。 且予見徒流案, 以酒充軍者多, 是乃齊之以刑也。 不先敎化, 徒繩法爲快, 民何以措手足乎?" 不聽。 召贊善朴弼周至, 王曰: "大臣方請見, 然九經之序, 尊賢在敬大臣上, 故先召見卿矣。" 仍問: "三代後不復有三代何也?" 弼周對曰: "行與不行也。" 王曰: "何爲不行?" 弼周對曰: "氣稟累之也。" 王曰: "齊宣孟子, 不諱好貨色, 予何獨諱卿乎? 予喜怒之發, 常失其中, 雖自知爲病, 莫能改也。" 弼周對曰: "先儒云知如此是病, 不如此是藥。 殿下旣知其病, 何爲不改?" 王曰: "非知之艱, 行之惟艱。" 弼周對曰: "誠意不足, 未免於自欺也。" 王曰: "善哉言乎! 予之自欺已過半生, 今而後當以不自欺爲勉也。" 弼周仍陳李縡韓元震不宜斥累年。 王曰: "是予之過。" 立命元震勿削逸, 陞正卿。 夏四月, 王享太廟, 回鑾望仁祖舊宮, 感天時三周於龍興, 遂命歷臨, 倉卒陣不得成列, 仗衛多失序。 掌令尹植諫曰: "不令於出廟時, 而令於路中, 無乃抑制群下之諫止乎?" 王曰: "抑制非其情也。 然言則是, 予當受而不辭。" 遂擢通政階。 尋以享祀時群臣祭服不中度, 命有司考《大明會典》正之, 且親釐改儀註中節文之繁縟者, 下所司。 閏月, 王酌獻文廟, 試士於明倫堂, 行大射禮於下輦臺, 王獲三矢。 遵成宗故事也。 命文衡記其事, 揭之明倫堂, 建閣于享官廳東, 藏弓矢器服。 明日召太學生於崇文堂, 賜酒設饌, 饌凡五品酒凡三行。 先是王每祗事廟中, 默數樂之章節, 其紀第一室功德者, 或奏第五室, 紀第六室功德者, 或奏第九室, 王甚疑之。 至是以問筵臣, 筵臣莫能對, 遂命禮官議大臣。 領議政金在魯對曰: "世宗朝制樂時, 晨祼及三獻樂章, 各除引入引出以九爲節, 而其八章歷述穆祖太宗元敬王后功德, 然後以第九章總敍以終之, 此其制樂之微旨也。 及至仁祖朝, 群臣不悟廟樂九成之旨, 遂以爲逐室各一其章, 追製宣廟樂章, 以十其九, 而今之樂師, 又不知其理, 亦以一章各奏一室, 所以功德不合於所奏之室也。" 王曰: "然。 宣祖樂章, 今不可去之, 其以太宗室之《顯美章》, 元敬后室之《貞明章》合爲一詩, 俾不違九成之數。 且以今日釐正始末, 詳載儀軌, 爲後日考。 五月, 王祈雨社稷, 不雨, 將復祈于北郊, 謂近臣曰: "祈雨不乘輦古也, 日者元老大臣苦爭, 故勉從之, 若是而何能感天神乎? 遂步輿至北郊, 祭畢雨, 王露坐良久乃還。 秋七月, 王因事敎曰: "國之用善人, 其利博哉! 廷有汲黯, 則准南不敢叛也。" 九月, 群臣請稱觴上壽於東朝, 東朝欲王亦宴群臣於廷, 王曰: "謹受敎。" 遂以誕彌節, 宴群臣, 樂用雅樂, 酒用玄酒, 饌品減其數。 冬十月, 贈嚴興道下大夫, 官給祭需, 從禮官言也。

二十年甲子春正月, 纂《小學宣政殿訓義》。 王謂儒臣等曰: "《小學》一部, 是予平生尊信之書也。 予欲倣世宗《思政殿訓義》, 以音訓事實, 與先儒姓名出處, 分釋集解之下, 以便觀覽也。 於是蚤夜召儒臣, 親自參證。 旣成, 示贊成朴弼周, 重加校正, 行于世。 夏五月, 命纂《續大典》, 除全家徙邊律。 先是成宗朝纂修《經國大典》, 規模甚正, 條貫猶未詳, 歷代增修, 各爲一書, 有《前續錄》《後續錄》《典錄通考》《受敎輯錄》等書, 門煩戶衆, 不便考据。 至是王命設纂輯廳, 差九堂上九郞廳, 分授六典, 刪繁就簡, 日引對於前席, 親自勘定, 至全家徙邊律, 歎曰: "犯者罪矣, 妻子何辜?" 遂命除之。 秋七月, 命纂《續五禮儀》《五禮儀》亦成於成宗朝, 後多損益, 未有成書, 至是續之。 九月, 王入耆社, 從群臣請也。 王至耆社, 拜靈壽閣, 召見潛邸舊洞父老年八十以上, 賜米布有差。 明日名耆社諸臣宣法醴, 敎曰: "先朝己亥, 錫宴于耆社臣, 今但宣醴, 以不敢先於東朝進宴也。" 冬十月進宴于大王大妃。 王親爲詞侑歡, 其詞曰: "瞻彼寶閣兮, 受几杖來。 奉歡長樂兮, 禮宴大開, 頌祝岡陵兮斯萬歲盃。" 極歡而罷, 退語群臣曰: "親在不稱老, 然靈壽閣所受几杖, 奠于東朝座右, 歌此詞, 聊代斑斕戲也。"

二十一年乙丑春正月, 關西御史歸奏, 寧邊府毓祥宮折受, 潁爲民弊。 王曰: "宮中府中, 俱爲一體, 況先朝至誠愛恤之民乎? 其罷之。" 三月, 王欲親享大報壇, 群臣止之。 王曰: "予若益衰, 欲躬行得乎?" 竟親享。 命修萬東祠, 給免稅田。 夏六月, 減關東貢蔘, 給續田, 以補民役。 秋七月, 敎曰: "吾東方道學文章, 高麗 圃隱實倡之, 可遣禮官致祭。 頃年予幸松京, 表章不朝峴 杜門洞, 以追式閭, 封墓之義, 今聞杜(洞門)〔門洞〕遺裔多販商, 宜甄用之。" 冬十一月, 稱觴東朝。

二十二年丙寅春二月, 王召文學臣語之曰: "昔人以讀書爲求放心, 有旨哉。 予自纂《小學訓義》, 每端居躬念世宗以東方聖人, 制作禮樂, 今予何敢望? 惟有略記平日見聞與繼述之意, 以自警省, 且以示後世子孫而已。" 遂日引對于便殿, 撰內外編, 至戒飮食, 謂諸臣曰: "昔我宣祖新承大統, 宮人欲試度量, 飮食故不潔, 聖祖一不形於色辭, 宮人皇恐乃止, 至今宮中傳爲美事。 予於飮食, 未嘗揀擇, 有所受也。" 書成名《自省編》, 仍戒群臣曰: "自今言動政令, 有違於《自省編》者, 其以《自省編》陳戒也。" 亡何, 王召接儒臣頗簡, 儒臣引《自省編》以爲戒, 王嘉奬賜豹皮。 夏四月, 王下敎曰: "土地之生財有限, 軍國之需用無節。 一使之行, 費礦銀十萬, 以充王公卿大夫匹庶所需之綾羅, 今窮村僻野, 亦皆綾羅, 竭一國之財, 助一時之侈。 嗚呼! 可勝歎哉? 夫上有好者, 下必有甚焉, 始自今節使, 上而袞衣, 下而朝衣所需綾羅, 一切嚴禁, 軍用不在此限。 如有否者, 書狀官當罪以不職也。" 是夜召承旨玉堂, 語之曰: "予素有志於大布大帛, 欲自宮中先之, 然而上奉慈聖故未敢也。 今適起感, 洞陳平素志於慈聖。 慈聖喜曰: "昭儉, 列朝盛事。 爾若有意, 夫何難乎? 華美非吾好也。 從此宮中可以不高髻, 可以不廣袖, 又可以衣不曳地。 咨! 中外臣庶, 咸體此意, 俾民如影之惟形。" 王復以《陸宣公奏議》中六條語, 書付座右以自戒, 曰好勝人, 恥聞過, 騁辦給, 衒聰明, 厲威嚴, 恣剛愎。 命諸臣仰視而敎曰: "予犯六病者, 卿等宜戒之。" 且曰 "魏徵唐宗云: ‘初則諫者多, 今則諫者少。’ 此無他, 樂聞故諫者多, 不樂聞故諫者少也。" 秋八月, 王召儒臣, 講《詩》《關雎》, 謂儒臣曰: "理義者, 天下萬世之公物也。 雖生師之間, 不必苟同, 況君臣之際, 豈苟合爲是乎?" 初王以《關雎》文王作, 而非宮中人作, 及是筵臣謂以宮中人作, 故有是敎。 王將欲觀刈, 有司奏曰: "凡親耕後籍田, 任民耕種, 不藝九穀, 亦未嘗供粢盛也。" 王曰: "神可欺乎? 自今藝九穀, 以充粢盛也。" 九月, 追奪趙泰耉柳鳳輝崔錫恒鄭楷權益寬等官。 初王招延前大司憲朴弼周, 進秩爲吏曹判書, 咨訪治道, 弼周進袖箚, 請先正辛壬諸賊罪, 王沈吟曰: "會當與大臣熟議而處之。" 至是三司啓曰: "泰耉自殿下潛邸, 陰懷畏忌, 創冒嫌二字。 及儲位已定, 則箚救賊, 奬以忠赤, 代理有命, 則不有臺言闖入北門。 虎龍之變上, 則敢陳毋究梁獄之說, 白望之招出, 則諉以死中求生之言。 其前後凶言, 一轉爲鳳輝之疏, 再轉爲一鏡之敎文, 三轉爲戊申諸賊之詬天罵日。 請泰耉追奪官爵。 辛丑建儲, 卽我景廟肅考之遺意, 承慈聖之明命, 手書面授, 處分光明, 而鳳輝則謂之忙急草率, 使令催督, 宗社有托, 八域同歡, 而鳳輝則謂之人心疑惑, 久而靡定。 至若無人臣禮四字, 是御史劾廢立之語, 而景廟之終無嗣續, 渠豈獨不知, 乃以顒望螽斯爲言, 此諱疾之論所毋始也。 請鳳輝追奪官爵。" 又論: "光佐之粧出誣獄, 盡露白望之招, 賊敎文後, 擢擬本兵, 有若酬勞者然。 李潜凶言, 賊比之茂陵, 光佐沿襲, 至請褒贈, 泰徵思晟輩, 皆光佐所汲引卵育, 而戊申稱亂, 亦非別入。 錫恒之主張誣獄, 與泰耉同一凶心, 誣獄旣成, 必請賊之錄勳, 又欲奏聞彼中, 借勢脅持。 至若緩獄, 以致徑斃, 則盤問路絶, 以代理比之傳禪, 則語意凶慘。 泰億之敎文, 指意與一鏡相表裏, 定策國老門生天子之奏, 引用宦擁立昏辟之事。 且一鏡敎文蹀血行盃等語, 視爲當然, 一任騰播。 請竝追奪官爵。" 從之。 光佐泰億以施律過多不從, 益寬因憲府啓追奪。 命生員進士, 以幞頭襴衫放榜, 遂爲定制。

先是王欲復中朝進士科, 幞頭襴衫戴蓮花聞喜宴等制, 然襴衫未知其式。 筵臣有言, ‘故吏曹參判金玏當皇 神宗時奉使朝天, 皇帝宣賜幞頭襴衫及《大學衍義》一部, 歸以巾衫, 藏之安東學舍, 《衍義》亦有御寶眞蹟, 今兵曹正郞權萬云。" 王曰: "萬無乃忠定公 權橃後耶? 昔我中廟, 與宰樞爲賞花宴于慶會樓下, 旣罷內侍捨得袖珍《近思錄》, 進于中廟, 中廟敎曰: "此必權橃袖中物也。’ 命還之。 是亦千載稀有之盛事。 咨政院公移嶺南營, 二書與衣冠, 使二臣之後領來也。" 至是之孫弘渾領至, 時王弗豫, 强起盥櫛, 衣服冠而坐, 召見二人曰: "侍之士, 不宜效 箕踞, 況皇朝舊物, 尤宜尊敬乎?’ 遂命賜三經《近思錄》 《大學衍義》, 飭所司幞頭襴衫, 得其式, 還歸弘運。 於是生進衣冠, 悉復明制, 其戴蓮花聞喜宴, 議不一乃止。 冬十月, 濟州貢枳實, 王曰: "予聞官數枳樹, 責出其實於民, 故民或撼樹自枯云, 豈不哀哉? 其還送濟州, 勿復貢。" 十一月, 王下敎曰: "親耕、觀刈, 皆所以重祀典也, 君耕而民取, 與民農而君刈, 俱不便。 箕城井田, 雖難復古, 然若因此會以王城東之籍田, 倣遺制爲井形, 取公田之一, 以供粢盛, 其餘八區, 盡蠲其稅, 則‘雨我公田, 遂及我私’之詩, 可復詠於千載之下。 其令太常, 講定節目以奏。" 十二月, 命復金宗輲皇甫仁鄭苯等官, 感肅廟復六臣官也。

二十三年丁卯春正月, 上大王大妃尊號曰康聖, 王率百官進箋稱賀, 以大妃周甲也。 敎曰: "太廟之錦不紋, 而予儀仗尙紋, 豈致美黻冕之義乎? 紅涼傘去其紋, 日傘以紬, 他儀仗視此。" 三月, 王謂筵臣曰: "東朝偶檢集祥殿舊藏, 得一玉帶賜予。 卽宣廟所嘗御, 而肅廟乙亥御此帶朝參, 今忽得之, 亦異矣哉!" 明日遂御古玉帶, 焚香于璿源殿, 是年秋亦以此帶, 試士于勤政殿。 是月王御禁苑之觀豊閣, 觀種稻歎曰: "是猶用人乎! 才雖可任, 讒說惎間, 則種稻乾土而望有秋也。 是猶納諫乎! 雖有忠讜, 不能見容, 則踈棄老農而任私智也。 是猶爲學乎! 非不講學, 有時間斷, 則灌漑不勤而欲成實也。" 復下敎, 禁巫覡淫祀曰: "太學古有李穆, 予之耳目, 亦有李穆者乎?" 飭京兆五部, 惑世誣民之類, 送法曹施刑。 秋七月王臨筵, 語諸臣曰: "予每恐如 玄宗之初晩兩截。 寒花晩香, 亦有時凋枯, 終不如芙蕖之出淤泥不染也。" 尋因事辭敎頗不平, 旣而悔曰: "《自省編》成, 予戒諸臣, 以將此編規勉, 當時之校正者、編次者, 亦如今筵, 而無一人敢諫, 此固予自反處。 然亦豈無交勉之道乎? 竝問備。" 先是命國陵封標之地, 未葬者禁葬, 已葬者遷移, 而士大夫已葬者勿論。 至是承旨奏: "封標八十, 士大夫犯葬已三十。 國祚綿遠, 將不知爲幾百代, 則八十猶少, 況五十乎? 士大夫犯葬遷移便也。" 王曰: " 光武自言安知踰年而享國長久, 始皇必欲傳之萬世, 而二世遂亡。 國祚脩短, 唯在保民, 豈名山衆寡之云乎? 誠使盡用五十亦已多矣, 何必廣其封標, 害及白骨也?" 時有以蔭同樞者乘軒。 王曰: "繁纓小物也, 而夫子惜之, 朝著等威, 不可紊也, 非曾經京兆亞尹同、敦寧者, 毋得乘軒著爲令。" 八月, 有淫獄, 王下敎曰: "《周南》之化及於江漢, 先正趙光祖爲都憲, 男女異路, 涼德臨御, 不能敎化, 淫風肆行, 此無他, 學校之政廢, 而《小學》之敎弛也。 京之太學四學, 外之鄕校書院, 皆講習《小學》以爲常, 敎官之誨童蒙, 守令之敎小民, 亦必以《小學》之道。" 當是時, 王春秋高, 恐志氣衰而政事惰, 益奮勵爲治, 又慮群臣隨聖心所向, 務爲變更。 乃敎曰: "先儒譏 不能改正朔易服色, 然人人輕議典章, 則一事更張, 百弊紛起。 咨廷臣須知予之奮勵, 只欲修擧舊章而已。" 九月, 遣禮曹郞, 遍審高麗王陵, 毁者修之, 犯耕者科治之。 命復安平大君 官, 視金宗瑞皇甫仁等例。 先是國典, 大王嫡孫, 不限代勿充軍役, 支孫限九代, 景宗壬寅, 廷議減其代數。 及王卽位, 命一遵舊典, 備邊司講定令式有曰: "限代中稍有士夫樣子者, 勿定軍役。" 至是王始聞之, 歎曰: "今諸臣登顯仕於朝廷, 則其先之嫡長爲守令者, 不敢充軍役, 況大王嫡孫, 豈容以士夫子有無, 而爲之取舍乎? 甚無謂也。" 令宗簿寺, 關飭外方, 亟去此一句。 冬十月, 王下敎曰: "《禮》云: ‘刑不上大夫。’ 今也朝侍從於禁闥, 夕決杖於囹圄, 惡在其禮使之道乎? 自今關係贓汚外, 凡侍從讞議杖律, 以贖論。"

二十四年戊辰春正月, 命殿講武臣以兵書, 其年限講規, 一如文臣殿講例著爲令。 二月, 改摸肅宗眞容, 王親奉于永禧殿。 還至慶熙宮景賢堂, 召蕫事諸臣賜餕餘, 奏軒架以勞之, 親爲辭戒太康, 命諸臣和, 夜分乃罷。 明日入直儒臣金尙喆等上箚言: "我朝用樂之節, 非朝賀進宴, 則宮庭未嘗擧也。" 王手書賜批, 錫馬奬之。 夏五月, 命閣光化門舊鐘, 以有世祖封號也。 秋八月, 以貢繒紬彩綾七百餘疋, 分賜戶曹、三軍門、京畿營及市廛民。 冬十一月減冗費。

二十五年己巳春二月命纂《度支定例》。 夏四月, 竝享皇 太祖高皇帝毅宗皇帝大報壇。 先是肅宗甲申, 築壇墠于北苑, 祀神宗皇帝, 以報壬辰再造恩。 至是王覽《明史》, 有曰: "崇禎丙子正月, 毅宗皇帝因我國被圍請援, 命摠兵陳洪範, 調各鎭舟師赴救。 是年三月山東巡撫顔繼祖奏: ‘朝鮮已失守, 皮島鐵山且危, 宜飭洪範沈世魁二鎭, 堅守皮島。’ 皇帝以繼祖不能協圖匡救, 切責之。" 王於是感泣曰: "使正史而出於先朝甲申也, 其竝祀毅皇必矣。 又況我東之封典國號, 皆高皇賜, 而禮遇之隆, 逈越前代者乎? 竝祀三皇, 我國家崇報之禮, 亦宜之。" 遂命刻日擧行。 王親享以妥之, 方灌鬯始事, 白雲一道, 起自北方, 蜿蜒逗于壇上, 有風颼颼, 引靈雨微灑, 比第一位獻畢, 風恬雲淨, 月星明穊, 與祭群臣, 相與竊歎, 以爲感應捷矣, 擧悽然有神州之思。 旣卒事, 遣禮官致祭于宣武武烈祠及江都忠烈祠、南漢顯節祠。 秋七月, 左議政趙顯命, 請吏曹參議長望差除, 弘文錄亦如翰林召試, 以熄傾軋之弊。 王曰: "譬如防水, 壅于東則決于西, 豈更法可矯乎? 況玉堂人君所以講學求助者, 不可召試也。" 八月, 王親政, 飭兩銓恢公, 歎曰: "政與學, 只在爲 人、爲己之分。 苟其爲人也, 雖公亦私, 唯濟人, 不可避要譽之嫌。 所謂作之不已乃成君子是也。" 九月, 飭士大夫婚娶必親迎, 自國婚至士婚, 禁油蜜果於同牢卓。 十二月, 王下敎勸學曰: "學之爲道, 不肖者可以賢, 不能者可以能, 世俗甘自暴棄, 昏其鏡、沙其珠, 何哉? 咨! 搢紳大夫, 賢關多士, 莫曰言敎勤乃學問。"

二十六年庚午春正月, 王以正風俗, 當先崇儒, 乃遣官致祭于故贊成鄭齊斗朴弼周、故贊善金榦, 擢前執義閔遇洙朴弼傅通政階。 時癘疫熾, 禁衛御營上番軍多死亡, 王命兩營助之葬, 其寡妻孤兒, 令所在邑撫恤。 二月, 使還者, 以丞相文天祥像獻之。 王以六鎭五國城, 有宋帝陵, 欲建祠其下, 以文天祥陸秀夫竝享之, 詢于大臣, 大臣以爲不便。 遂命配其像于臥龍祠, 遣承旨致祭。 罷生員、進士物色之規。 先是生員、進士會圍坼名, 諸考官先窺覘入格封彌, 擇其有地閥文望者, 擢置壯元, 其生員之第三, 進士之第六, 俗稱: "居是序者, 無命蚤死。" 故又擇鄕谷賤士以充。 至是王曰: "此公乎私乎? 嚴科場之道, 不當爾也。 自今永罷, 犯者以用情律論。" 秋七月, 行均役法。 初肅宗欲矯良役弊, 屢命群臣雜議, 而戶布、結布、游布、丁錢, 互持甲乙, 卒未能行。 及王卽位, 設良役廳, 擇任堂上數人, 專精講究, 以未得善策, 尋罷之。 是年四月, 王御弘化門, 召五部士庶詢曰: "生民之弊, 良役爲大, 不早更張, 莫知稅駕何地。 肆我聖考, 必欲矯救, 群臣竟不能奉承德音, 予庸痛慨, 今强疾臨門。 游布、口錢已知其不可行, 戶布結布, 何便何否? 外此亦有可以矯救者乎?" 士庶皆對曰: "戶布便。" 其以爲結布便者又十之二三。 王以問群臣, 戶曹判書朴文秀對曰: "戶布不能當經費之數, 其惟戶錢乎。 大戶一百文, 中戶五十文, 小戶三十文, 可以行也。" 王曰: "咄哉瑣瑣, 非國體也。" 文秀曰: "臣始欲汰冗縣, 以補經費, 而殿下難之, 諸臣又難之, 故思其次也。 無已則戶布立其本, 而未足者以魚鹽足之, 庶乎其可也。" 領議政金在魯曰: "戶布不如結布。 結布竝田租出稅, 官易收而民不撓也。" 王猶未決, 命諸備堂, 直宿備邊司, 講確便宜, 旣月未得長策。 至是左議政趙顯命, 爲陳洪啓禧均役之策, 王始難之, 竟從其言, 盡蠲國中良役一匹, 別設均役廳, 專管魚鹽結錢選武布等稅。 又益以儲置常定米及外邑隱餘結, 以充經費, 分遣均稅使於八道, 釐正魚鹽稅, 査鉤隱餘結, 遂嚴立科條, 飭今與後, 毋得妄議變更。 及季年, 王語人曰: "倡均役之論者子孫繁衍, 然後方信均役之有實效也。" 九月, 王幸文廟, 酌獻試士。 尋幸溫陽之溫泉, 浴疾也。 所過路儒賢名相忠節人墓, 皆遣官致祭。 設道科取士, 蠲湖西民租稅, 遂回鑾。

二十七年辛未春二月, 加上大王大妃尊號曰貞德。 王率百官陳賀頒赦。 停諸道方物, 不新儀仗輦輿, 慈敎也。 北關饑, 命移關東、嶺南穀三萬石, 載之戰兵船, 浮海輸北, 遣御史賑之。 三月, 王省牲于大報壇。 以是月十九日爲毅皇殉社日, 命有司停樂。 王率時ㆍ原任大臣、九卿, 至後苑之映花堂前, 北向四拜。 仍命禮曹, 當高皇神皇禮陟日, 亦行望拜禮以爲常。 秋九月頒守城節目。

二十八年壬申夏五月, 加上大王大妃尊號曰壽昌, 王尊號曰章義弘倫光仁敦禧, 王妃尊號曰莊愼, 以王有皇壇格神之德也。 六月, 命設編輯廳, 纂《喪禮補編》, 斟酌損益, 皆出王睿斷。 秋九月我主上殿下誕降, 封爲元孫。 冬十二月, 置貢市堂上三人, 釐正貢市民弊。

二十九年癸酉春正月, 王親耕籍田, 耕牛減其半, 除從耕宣醴設科等節。 夏五月, 王祈雨北郊。 旣初獻有聲蕭颯, 命撤帟雨立, 比卒事, 冕黻盡濕。 後三日, 以雨未足, 復親禱于先農壇, 霈然乃止。 六月, 禁三江數罟。 王命釐正江民弊, 任事者成節目進之, 中有密網語, 王曰: "密網盡取, 豈王政乎? 其禁之, 犯者徒配。" 秋八月, 昭寧墓改稱爲園, 毓祥廟改稱爲宮, 置守衛官守僕守護軍, 祭享一惟宮園例。 追上淑嬪諡曰和敬, 以淑嬪封爵之周歲也。 王謂宗伯曰: "以來, 中朝皆追崇所生, 而我朝家法嚴, 且有聖考下敎, 故予意未嘗及於追崇。 唯此一事, 庶乎斟得宜, 然外人不諒, 必曰尙有餘事也。" 九月, 敎曰: "今俗稱樂院爲梨園, 梨園 明皇所名, 奚爲於法樂之府乎? 其禁之。" 尋命講書院所藏《楞嚴經》, 移置北漢 中興寺, 以示闢異端之意。 冬十一月, 惠局奏: "紅腐米積之久, 反傷新米, 宜輕其價, 賣與畿民, 以無用爲有用也。" 王曰: "善。 然若其不可食也, 豈容欺元元乎? 予當爲民先嘗, 速取紅腐來。" 十二月, 加上肅宗大王尊號曰裕謨永運洪仁峻德, 仁敬王后尊號曰宣穆, 仁顯王后尊號曰淑聖, 大王大妃尊號曰永福, 以明年爲仁顯王后再正壼位之年, 且爲王周甲也。

三十年甲戌春正月朔朝, 群臣以聖壽請賀, 王不納, 遂謁太廟靈壽閣毓祥宮。 二月, 嶺南釐正使返命, 王從容問民疾苦, 以及風土俗尙。 釐正使盛陳採鰒漢, 佩瓢潛海狀, 王誦聶夷中詩曰: "辛苦過於粒遠甚, 忍令登盤乎?’ 立命停生鰒魚貢獻。

三十一年乙亥春正月上元日, 王率百官賀東朝, 以明年東朝壽七旬也。 三月, 尹志李夏徵等伏誅, 追施趙泰耉柳鳳輝李師尙尹就商一鏡疏下諸賊等逆律, 追奪李光佐崔錫恒趙泰億等官。 , 就商之子也。 先是乙巳鞫, 就商拷掠死, 羅州, 日夜怨國, 使其子光哲交結羅之吏鄕爲稧, 募衆圖不軌, 掛書于客館望華樓, 以撓人心, 監司趙雲逵鉤得之以聞。 王鞫等, 詞連諸賊誅竄有差, 事在《闡義昭鑑》篋笥中, 多夏徵羅州時往復書, 綢繆甚密, 遂鞫夏徵夏徵辛壬賊明誼明彦姪也, 敢稱一鏡等七賊疏以爲有臣節, 廷臣莫不駭憤, 請誅之。 且以等爲諸賊根柢, 請竝施追律, 從之。 錫恒丙午追奪, 後因光佐入相復官, 至是與光佐泰億同追奪。 秋八月, 命設編輯廳, 纂《闡義昭鑑》, 紀逆變源流也。

三十二年丙子春正月, 加上大王大妃尊號曰隆化, 王尊號曰體天建極聖功神化, 王妃尊號曰康宣。 王親行祈穀誓戒於明政殿。 訖, 召大臣宗伯太學生, 宣降絲綸, 以文正公 宋時烈宋浚吉從祀文廟。 二月, 王酌獻文廟, 退御明倫堂, 親誦大學序, 命講書官太學生, 以次講《詩傳》《中庸》, 討論文義, 下綸音勸學。 遣承旨致祭於朝名賢鄭夢周墓, 以東方道學之宗也。 夏五月, 飭諸道勸農。 王親御苑觀耘, 以爲民先。 六月, 命圖畫文成公 李珥 石潭書院及幽居以進, 因《聖學輯要》曠感也。 秋七月, 王以東朝七旬, 召耆社臣宣饌以飾慶, 東朝亦以王六旬有三, 具饌以賜之。 及諸臣醉歸, 王至東朝侍話, 以悅東朝心。 比退則天已明矣, 不脫法服, 直詣正堂, 召儒臣, 講《中庸》。 越數日, 率耆社臣及宗親文武卿宰年六十以上, 進賀于東朝。 旣而又欲與士庶同慶, 爲設耆老科, 試儒武年六十以上, 坼號唱名如例。 八月, 王復親率百官賀東朝, 以東朝誕彌節也。

三十三年丁丑春正月, 文武堂下官沈滯者, 疏其名爲帖進之, 以備甄用。 遣官致祭于壬辰戰亡場之在安邊者, 又祭于江華 忠烈祠, 命不祧文忠公 金尙容廟, 嫡長世其官。

淮陽金城饑民, 多流入京師, 王命惠局, 資其糧回籍, 遣安集使安集民賑之, 蠲租庸調。 二月, 貞聖王后 徐氏薨, 王命喪禮從略, 自公除前, 勿禁士庶葬。 三月, 設兩賑廳, 分賑饑民二萬餘口。 是月仁元王后薨。 初后違豫旋瘳, 王喜甚稱慶, 蠲諸道舊逋, 親自疏決, 宥死罪以下。 未幾后復沈篤, 王遣官祈于山川, 卽下庭俛伏, 涕泣禱天, 願以身代, 哀動左右。 及后薨, 王思慕不已, 名其堂曰永慕。 夏四月, 遣御史, 安集丹陽懷仁流民, 以置米賑之。 五月, 旱, 王責己減膳, 飭濫杖, 遣官祈雨于山川, 天乃雨。 六月, 葬貞聖王后弘陵。 國制陵寢設四方大石, 調僧民運輸, 往往有壓死者。 至是王命悉去之, 事在《喪禮補編》。 秋七月, 葬仁元王后明陵, 事大小王躬自照檢, 必誠必信, 克遵后志。 凡陵殿費減庚子三之一, 免京畿結錢及北道田租亦三之一。 八月, 王御經筵, 命錄故相臣盧守愼後, 以講《夙夜箴註解》而起感也。 冬十月, 飭銓曹, 疏擧淹滯。 遣御史安集淸安流民, 運耽羅穀販之。 十一月, 遣官致祭于成三問等六臣祠。 十二月改修仁宗冊諡, 奉于仁宗室。 凡諡冊與寶, 必奉于太廟當室之傍, 而仁宗諡冊, 失不傳焉。 至是將埋貞聖后虞主於廟庭, 掘地得玉札一片, 諦視之, 乃仁宗諡冊也。 王甚異之, 親寫全文, 鐫于玉, 合成完篇, 藏于仁宗室。 命堂下官紅袍, 易以靑祿, 從《大典》也。

三十四年戊寅春正月, 王將親祈穀于社稷, 大臣以王春秋高, 不可以筋力爲禮, 力請代攝, 王曰: "天爲民立君, 豈爲君生民乎?’ 竟親行之。 三月, 王下敎雲觀曰: "山頂封胎, 與一縣藏一胎, 不其謬乎? 今考實錄, 光廟與諸大君王子胎封, 同在一岡, 法祖宗, 當由此始。 自今勿拘代之遠近, 藏胎一山, 相距無過二三步, 以岡盡爲限, 而嫡子衆子元孫郡主勿貳之。" 秋七月, 命諸道, 錄上皇朝人遺裔, 飭守令之誤充軍役者, 施以制書有違律。 八月, 王幸明陵, 回鑾見秋霖傷稼。 歎曰: "是吾過也。"’ 命減膳十日, 以謝農民。 冬十二月, 命禮曹撰《皇壇奉室儀》

三十五年己卯春三月, 命關西道臣, 悉焚債券, 增江界貿蔘之價。 夏五月, 祔仁元王后于太廟肅宗室, 頒赦。 命軒架陳而不作曰: "昔夫子於子張子夏皆許以君子, 而我朝結彩歌謠, 聖祖除之, 前後皷吹, 聖考陳而不作, 非敢過也, 是亦禮爾。" 六月, 以王封爵之周甲, 御正殿受群臣賀。 冊鰲興府院君 金漢耉女爲王妃。 秋七月, 冊我主上殿下封王世孫。 是月王謁太廟, 拜皇壇。 酌獻文廟, 敎曰: " 四百年基業, 實本於太牢祀孔子。 其禮不可略也。" 仍命四聖位, 亦竝親獻, 啓聖祠行再拜禮。 八月, 王下敎曰: "人君以法御下, 若隨意低昻, 人何能措手足乎? 庚子以前, 未有不待結案而正法者, 一番行之, 遂以爲例, 甚或以一傳旨正法。 日後爲君者, 任氣循襲, 爲臣者, 逞黨循襲, 其流之弊, 自我導之, 興惟及此, 不覺懍惕。 今後不待結案者, 軍門梟示者, 傳旨正法者, 追施逆律者, 一切永除, 君或有犯, 執法之臣, 將此敎爭之。 苟爲不然而迎合承順, 此宵小苟容之流, 王章昭昭, 天網恢恢, 安敢逃其罪乎? 遵之則興, 不遒之則亡, 咨金吾、秋曹兩司, 刊印藏府, 永垂諸後。"

三十六年庚辰春二月濬川。 川合白岳仁王木覔之水, 襟帶都城中, 東出五間水門, 又東爲永濟橋東南會中梁川, 入于漢江, 《輿地勝覽》所謂開川是也。 當世宗李賢老[李善老], 請禁投穢物, 以淸明堂之水, 集賢校理魚孝瞻上疏, 斥其勢不能行, 世宗孝瞻而不用賢老[善老]言。 歷代尊信世宗朝事, 遂竝疏濬不擧者, 且三百有餘年, 川漸壅閼, 幾與隄平, 霖潦之餘, 往往有汎濫之患。 王用故事, 屢臨門詢衆庶, 僉曰: "濬之便。" 王曰: "是雖爲民, 豈可煩民力乎?" 乃捐累萬緍, 雇丁夫濬之, 戒勿催督, 不月功告訖。 於是設濬川司, 以兵曹判書、漢城判尹、三軍門大將, 兼濬川堂上, 置都廳、郞廳各一人, 每歲濬川以爲常。 夏五月, 王祈雨南壇, 回鑾至太常, 見神室有一位版題曰大明東征官軍, 遂命忠武公 李舜臣之孫泰祥爲獻官, 皇朝提督李如松之孫爲大祝, 設壇致祭于露梁, 仍以位版配食宣武祠。 冬十二月, 王命大司成, 率國子生入侍。 又命替直儒臣入侍。 敎曰: "君師之責, 予敢云然, 耄朞也月三講《中庸》, 未見實效, 欲與卿等及諸生問難, 以補予涼學也。 於是自夫天人性命, 以至存養省察, 出幽入微, 洋洋討論, 其言皆可書也。 凡在筵諸臣, 怳疑身在回琴點瑟之間, 非辟之心, 無自而生。 同起身請曰: "人才作成, 講說爲大, 觀於洙泗濂洛可驗也。 今玆之擧, 其爲風動觀感, 固不淺尠, 然不有定制, 使民自化, 雖不能也, 敢請所以定制者。" 王曰: "善。 師儒之長, 與國子生, 月三講會於明倫堂, 毋綴章句, 專尙理義也。"

三十七年辛巳冬十一月, 命輦輿用金者, 悉易以銅。 十二月, 敎曰: "我東之禮樂文物, 侔擬中華, 皆箕聖之遺澤也。 特遣重臣, 致祭箕聖墓。 尋命閫帥決杖, 亦如侍從例以贖論。

三十八年壬午夏四月, 飭京兆五部, 幼失父母, 冒他姓以爲姓者, 令各自陳, 凡六十餘人, 悉復其姓。 冬十月, 遣安集使, 安集畿甸三南民。 罷南、北、江都御供米。

三十九年癸未春正月, 王御勤政殿舊址, 受群臣賀, 以聖壽七旬也。 尋朝參於延和門, 以六典飭六官曰: "何以用人? 恢公祛私。 何以擬守令? 爲官擇人。 咨吏房承旨飭吏曹。 戶口紊矣, 宜正之; 生民倒矣, 宜拯之; 國儲竭矣, 宜節之。 咨戶房承旨飭戶曹。 祀而不潔, 罔以格神; 禮而失序, 罔以爲國。 咨禮房承旨飭禮曹。 戎政踈虞, 責惟司馬, 武夫多滯, 咎在西銓。 咨兵房承旨飭兵曹。 囹圄之囚, 非人非鬼, 傷天和多矣。 細考文案, 夫豈無求生於必死者乎? 咨刑房承旨飭刑曹。 工匠亦民耳, 悁悁且不保朝夕。 莫曰水部閒局, 修乃職事。 咨工房承旨飭工曹。 三月, 湖南道臣, 啓饑民死者四百五十三人。 王曰: "予之過也。" 命減膳三日。 秋八月, 敎曰: "昔 仁宗貴妃首开皆珠, 有滿頭白紛紛之語, 貴妃皇恐去珠, 仁宗大喜, 剪牧丹花賜之。 不數日京師珠價賤, 上行下效, 蓋如是捷矣。 予則曰蕃商之賈 珠售市, 此奢侈之本也。 不揣其本, 惡乎齊其末哉?" 於是命賈珠館者, 以潛商律論。

四十年甲申春正月, 王設人日製, 親策多士, 對者無切直語。 王乃敎曰: "烏鳶破卵, 鳳凰不至。 是必由李顯弼也。 予雖否德, 粗聞無若丹朱之語, 戒之, 受之, 外施仁義之語, 言之, 容之。 獨於一顯弼也, 不施寬假之典乎? 顧其用心不正, 故因臺請處分, 而不虞士氣之摧沮。 今當白首暮年, 豈不思裕昆之道乎? 李顯弼給牒敍用。" 二月, 王與宗親文武年七十以上人, 行大射禮。 明日親耕籍田。 三月, 王親享于大報壇。 旣卒事, 餘誠未已, 露伏壇前, 至天明, 有白氣彌亘黃幄上, 見者異之。 夏四月, 禁中外巫卜雜術。 五月以文純公 朴世采從祀文廟。 冬十月, 飭士大夫親迎禮, 因講《詩》《齊風》而興感也。

四十一年乙酉春二月, 王率大臣備局堂上, 至于南郊省耕臺省耕, 助民種。 三月, 王親享于大報壇。 旣撤語諸臣曰: "亞獻而氣益淸, 殆若神助也。" 夏四月, 王親禴。 秋九月, 王命印陵禁標受敎, 分藏五史庫, 頒于開城江華京畿營, 禁民耕葬, 犯者竝地方官科罪。

四十三年丁亥春二月, 王與世孫, 親耕籍田。 前一日祀先農, 王初獻, 世孫亞獻, 王五推, 世孫七推。 王妃亦與嬪御, 親蠶于景福宮採桑壇。 三月, 全州火, 延燒二千三百餘戶, 命給米二千三百餘石, 貸結錢一萬兩。 夏四月, 頒繭于政府喉院八道兩都。 冬十月, 命錄文正公 趙光祖文純公 李滉後。

四十五年己丑夏五月, 王幸籍田觀刈回鑾, 明日召國子生, 誦《夙夜箴》以自儆。 越數日親受小麥。 飭京外同斗斛權衡。

四十六年庚寅春正月, 設編輯廳, 纂《文獻備考》。 國朝典章, 有金櫃石室, 藏之名山, 外此無徵, 凡祖宗禮樂文物, 老師宿儒, 莫或知其沿革, 六官庶職, 皆憑胥史傳說, 轉輾訛謬, 漸失其舊。 於是王令纂是書, 篇目一惟馬端臨《文獻通考》, 而稍加檃括。 自是國有事, 据考多賴是書。 夏四月頒測雨器。 王得世宗朝測雨器之制, 命度支製置兩闕及雲觀, 且分送兩都八道, 每雨澤以尺寸報, 因編《象緯考》有是命。 六月州府郡學, 同配六賢如文廟位次, 因編《學校考》有是命。 永除捕廳之亂杖刑, 因編《刑考》有是命。 秋七月, 王與世孫, 幸弘文館, 講學宣饌。

四十七年辛卯冬十月, 建肇慶廟全州。 初七道士李得履等, 上疏請建國朝始祖新羅司空祠, 王命宗伯就大臣議, 議不一。 復召問廷臣, 廷臣皆莫能對, 王曰: "禮緣人情, 今朝鮮士大夫, 猶且尊敬始祖而飾其禮, 況國之始祖乎? 高句麗新羅亦皆有始祖廟, 禮固有因俗義起者也。" 於是遣有司, 建廟於全州慶基殿北, 命世孫題祠版, 稱先公。 奉于資政殿日, 具袞冕展拜, 命大臣宗伯, 具儀仗奉至廟妥之。 蠲湖南十一邑結錢選武布及舊逋, 京畿、湖西輦過邑視此。

四十八年壬辰春正月, 王召見國子生於便殿宣饌, 賜四民米有差, 京外貧不能婚葬者, 官與資婚葬。 三月, 王率皇朝人遺裔及宣廟壬辰死節人後孫, 詣勤政殿舊址, 行望拜禮, 以重逢再造之甲子也。 冬十月, 加上顯宗大王尊號曰昭休衍慶敦德綏成, 明聖王后 金氏尊號曰禧仁, 以功德當入世室也。 尋加上王尊號曰大成廣運開泰基永, 貞聖王后 徐氏尊號曰恭翼, 王妃金氏尊號曰睿順, 群臣請之也。

四十九年癸巳春正月, 王御崇政殿, 世孫率百官賀, 以聖壽八十卽位五十年也。 懸申聞皷於建明門, 令民抱冤者, 擊皷以聞。 賜四民米有差。 二月, 行養老宴, 世孫請之也。 夏六月, 石築開川。 先是濬川, 病兩岸爲潦壞缺闋于川, 乃植楊柳以防之, 然猶不能堅完。 至是王命以石隄之, 牢固精緻, 儼成王居之體勢。 功旣竣, 王與世孫臨廣通橋, 顧謂世孫曰: "有志者事竟成。 凡欲有爲, 當先立志, 勉之哉!"

五十年甲午春正月, 王御勤政殿址, 行登俊試, 修國初故事也。 三月, 王下敎曰: "我國奴婢法, 創自箕聖, 然箕聖特設此, 以禁竊盜而已。 豈使其世世子孫, 長爲奴婢乎? 又況調庸租之法, 男有役而女無役。 今奴婢竝役, 甚無謂也。 今後婢貢, 亡論公私盡革之。 其取給經用者, 備局惠局商確以聞。" 先是三十一年, 王憫內寺奴婢, 不得婚娶, 欲盡革其名, 病經用無以充, 只命奴貢減一匹, 婢貢減半匹, 至是悉革公私婢貢, 其經用以糴代之。 是月王幸玉堂春坊, 親講《聖學輯要》, 世孫侍講, 宣饌于玉堂春坊。 夏五月, 旱。 遣官祈雨, 以十事自責求言, 開囹圄釋囚, 天乃雨。 秋七月王受賀于崇政殿, 減今年田租之半, 撤九營繕, 蠲貢市民征, 士庶年八十以上, 各加一資。 尋與世孫幸彰義宮, 召耆社臣及洞民年八十以上者, 賜帛有差。

五十一年乙未夏四月, 王行朝講朝參。 歎曰: "親事講學, 人君之職。 故曰一日二日萬幾也。 予思癸巳朝講朝參事, 强起臨筵, 而及夫講書, 已不能成聲。 雖欲復爲此事, 何可得也?" 冬十月, 王有疾弗豫。 十二月, 命王世孫代聽機務。 時王居不能坐, 坐必令世孫扶視, 亦不能辨物, 世孫常在傍告之。 由是太醫晝夜不離, 藥院提調, 晨入三進湯, 至夕乃歸者已有年, 及冬氣益綴痰升降不已。 嘗命行常參, 令旣具, 世孫請止之。 王曰: "是予夢語也, 然旣命矣, 不可不實其言也。"’ 遂命左右, 扶以出, 欲陞座, 氣昏還內, 語世孫曰: "欲令汝代聽者久。 祀典攝行爲之兆也。" 且戒以自今夢語, 汝可勿布。 亡何, 敎曰: "今日陳賀, 百官入集慶堂行禮。" 時夜已五皷, 中官傳于政院。 賊臣洪麟漢方爲左議政, 必欲宣旨, 世孫屢遣人謂麟漢曰: "待天明痰降, 頒此敎未晩也。" 麟漢終不聽, 竟夜促百官會, 都人莫不驚駭。 詰朝左右以告, 王歎曰: "百姓皆謂予耄荒之君也。" 於是以不稟世孫, 罪中官, 仍命行禮, 罷遣百官。 自是王益決代聽志, 執世孫手語之曰: "予欲傳禪於汝, 予衣紫臨汝, 汝衣紅事, 予不亦樂乎? 然恐傷汝心, 思其次, 欲令汝代聽, 而代聽必稟大朝, 反益煩撓, 予欲因代聽, 盡付國事於汝也。" 當是時賊臣鄭厚謙, 以和綏翁主所後子, 與其母用事張甚, 麟漢自以世孫外黨, 意望不淺, 然世孫常鄙其爲人, 貪暴無知識, 未嘗假以色辭, 麟漢怏怏怨望, 遂附厚謙母子, 圖爲平安監司, 歸又攀援入相。 三人者以世孫英明, 恐他日罪將不測, 與洪趾海尹養厚等結爲死友, 日夜造蜚語, 謀傾儲位, 且欲引趾海與之幷力。 乘王疾甚, 屢薦趾海爲相。 王輒不答, 謂世孫曰: "左相必以洪趾海爲右議政, 尹泰淵爲訓鍊大將, 然後快於心乎。" 尋又曰: "世安有政丞請也?" 麟漢聞之大懼, 與養厚厚謙母子, 謀益急憚, 世孫宮洪國榮, 守死不去, 與鄭民始常左右之, 乃數讒國榮等於世孫, 欲以孤其勢, 然世孫終不納。 至是王召時、原任大臣, 諭以代聽之意, 麟漢挺身言其不可。 王曰: "我朝代聽前後相望, 非惟分勞, 欲使儲貳, 明習國事。 如老論少論所當知也, 吏判兵判所當知也。" 麟漢忿形於色曰: "東宮不必知吏判, 兵判不必知老論少論, 又不必知國事。" 時王綿惙不自振, 但噓唏叩閾曰: "卿等可退去。" 諸大臣將退。 王猶不能自已, 復召入曰: "予疾如此, 就中痰升譫語發輒亟 或夜半出寸紙召卿等, 予不辨領左相之爲何人, 則將置國事於何地耶? 然不足與卿等論此事, 毋寧以我心法, 傳之東宮也。" 仍命東宮, 講《自省編》《警世問答》。 及大臣退, 王又叩閾曰: "大臣如此, 朝事無可爲矣。 奈宗社生靈何?" 越十日, 王命行常參, 倚世孫坐, 有頃疾作還臥。 召大臣厲聲責其不從命, 命承旨書下代聽之敎, 麟漢身蔽承旨, 使不得聞王言, 且曰: "臣子孰敢書此敎乎?" 王怒叱曰: "卿等速退。" 退, 王乃下敎政院曰: "巡監軍入東宮點下, 吏兵批稟而後入東宮點下。"

於是麟漢復倡諸大臣求對, 請寢成命, 王誦景廟‘左右可乎, 世弟可乎’ 之批曰: "予近者視昏不能點政望, 中官代爲之付標, 萬一中官顚倒予命, 予何能覺乎? 無寧付諸我孫之爲當然也。" 領議政韓翼謩曰: "聖明在上, 今之中官, 保無此也。" 王復噓唏曰: "將使我孫, 代勞於內也。,’ 麟漢復爲緩辭曰: "內事非臣等所知也。" 是夕王命中官以啓寶, 送于東宮, 世孫涕泣固辭曰: "啓寶豈朝臣國人所不知而授受者乎?" 王曰: "予之氣, 汝所知也。 難與彼大臣爭, 故爲是不得已之擧, 予於汝雖內授, 後世豈有非之者乎? 不過曰罪在時相也。 雖然予當昭汝志也。" 遂命承傳色傳于政院曰: "沖子若陳章, 當下二字之敎。" 二字指禪位也。 由是世孫不敢陳章, 然聖候自此益劇, 代聽事方在然疑之中, 而麟漢厚謙母子, 表裏沮戲, 爲計千百, 宗社危亡, 迫在呼吸。 國榮憂憤, 欲與民始聯章請討, 世孫以爲不可, 力止之。 前參判徐命善乃上疏曰: "惟我聖上機務之煩, 有妨頥養, 繼先朝之故事, 有今日之下敎。 而前月二十日入侍也, 左議政洪麟漢敢曰: ‘東宮不必知。’ 夫謂儲君不能, 則當作何如人也? 肆無嚴極矣。 及夫常參也, 前領相韓翼謩又曰, ‘左右不足憂。’ 夫身居首相之位, 質言閹竪之事, 古之大臣亦有是否? 至若麟漢所奏: ‘自內爲之, 臣不爭執。’ 云者, 驚且駭尤萬萬。 此爲國家大事何如也? 乃秘之於宮衛之內, 行之於深嚴之中, 萬姓不得知, 八方不得聞? 以殿下今日之擧, 明正磊落, 卓越千古, 而職具瞻者, 視爲虛文, 專以彌縫爲事, 豈不痛哉? 乞降明命, 亟正大臣罪。" 疏入王召命善, 褒以滿腔血忱, 進其秩二級。 事在《明義錄》。 於是王命世孫代聽庶政, 朝參用法駕, 儀仗設水晶杖、金釜鉞, 受賀時百官朝服行禮, 幷奏軒架。 展拜太廟, 自殿庭乘輿, 駕出城外, 訓鍊禁衛御營兵隨輿, 凡竄配以下不稟裁斷, 皆特敎也。 世孫三上疏辭, 王縷縷慰諭。 越八日, 告廟社頒赦。 王扶至景賢堂與世孫同受賀, 顧世孫甚樂也。 蠲貢市人徭役, 賜四民米有差。 亡何, 賊臣沈翔雲上書小朝, 以陳戒爲名, 巧設機關, 指斥宮僚, 有溫室樹語。 以命善筵奏, 有曰: "因宮僚聞世孫以三不必知之說, 欲陳章引義。" 云。 故翔雲將以宣洩內言文, 致國榮等之罪, 以售其網打之計也。 翔雲師淳所後子一鎭之子, 而師淳又以益昌之孫, 爲後於廷輔者也。 益昌嘗爲逆宦朴尙儉塾師, 當辛壬時, 與金一鏡尹就商日夜聚會於尙儉家, 與聞交通宮禁事, 及尙儉謀逆事覺詞連益昌, 累拷掠得釋, 禁錮以死。 翔雲之弟翼雲登第, 坐益昌久不調。 翔雲患之, 以其旣死之父一鎭罷所後於師淳, 又以旣死之祖師淳, 罷所後於廷輔, 而直以一鎭之父繼廷輔, 凡兩世再易其父。 於是淸議益唾鄙之, 翔雲遂謟附厚謙, 曲事惟謹。 至是厚謙麟漢等, 見其事敗露, 與養厚翔雲以逞辛丑鳳輝之凶肚, 先講宮僚罪案, 將起大獄, 世孫察其狀, 歎曰: "事關忠逆, 非可以漫漶彌縫也。" 判府事金陽澤具奏于王。 王曰: "逆竪之孫, 敢爾耶?" 命拷掠, 栫棘于黑山島。 尋命翔雲兄弟, 永爲庶民。

五十二年丙申春正月, 加上王尊號曰堯明舜哲乾健坤寧, 貞聖王后 徐氏尊號曰仁徽, 王妃金氏尊號曰聖哲。 三月, 王疾大漸, 世孫遣官遍禱于廟社山川。 乃顧命, 大寶傳于王世孫, 以初五日卯時, 王昇遐于慶熙宮集慶堂, 壽八十有三, 在位五十有二年。 輿儓旄倪, 波奔闕下, 號呼雨泣, 朝士婦女, 各哭其家, 聲宸街巷, 絶域遐陬, 聞喪之日, 男女老少, 皆爲孺子慕。 群臣議王德行功業, 上諡曰翼文宣武熙敬顯孝, 廟號曰英宗。 是年七月二十七日葬于元陵亥坐之原, 卽健元陵西岡也。 先是己亥孝宗不諱, 大臣鄭太和金壽興等, 奉孝宗葬于此, 術者皆言壯麗明秀如健元而反復勝也。 顯宗癸丑, 以水由屛石滲漉, 有異議, 啓舊陵見和, 重臣閔鼎重, 躬封築舊陵, 戒相役者曰: "善治之。 後必復爲國陵也。" 及景宗大喪, 王甚欲奉景宗於此, 一鏡時爲山陵都監堂上, 極言國朝未嘗以遷厝地爲陵也, 遂不果。 至是竟爲王陵, 嗚呼! 豈偶然哉? 王英明特達, 凡於君德, 得其大者, 孝敬勤儉公恕, 君德之大也。 王幼事仁顯后至孝。 方五歲, 手擷禁苑百種花, 爲酒以獻后。 后歎曰: "孝悌固所性, 何其夙就也。" 及肅廟違豫七年, 左右扶將, 王皆親之, 夜不安寢, 首尾如一日, 肅廟常曰: "異哉兒也。 何無寐乎?" 事仁元后, 雖登極入耆社後, 常如爲王子時。 每進見拱手疾趨, 侍坐則曲腰俛首, 有問以袖掩口而對, 備物養志, 始終無違。

錫賚國舅慶恩家甚隆渥, 以悅后心, 然亦不令干預朝政, 仁元后常曰: "孰謂主上非已出乎?" 事景廟如事肅廟, 事宣懿后如事仁元后, 人不知爲兄弟嫂叔。 大小享祀, 必親莅之, 誠敬備至, 洋洋如臨于上。 璿源殿在宮中, 有節祭誕日祭忌日祭, 王輒躬眂齍鑊, 戒膳婦極其潔。 有新物先朝所嗜者, 必先薦于殿, 乃御掌膳者, 嘗以松蕈進之。 王曰: "薦乎?’ 對曰: "時尙蚤未也。" 王曰: "未薦而使予食, 由予誠敬不足也, 於汝何責焉?" 却不御。 及春秋篤老, 値先王先后忌日, 猶素食齋居, 倂湯藥不御。 享祀雖不得躬親, 祭之日必齊, 明達曙露伏中庭, 聞已撤乃止。 晩移御慶熙宮, 宮之北有暎翠亭, 密邇毓祥宮。 王每朝夕, 小輿戾止, 望廟露伏, 以代定省禮, 泫然而還, 祁寒盛暑不廢也。 嘗夢侍肅廟, 肅廟命取簡紙來, 未及進而覺焉, 自是不復用簡紙書。 雖當大耋沈綿時, 常誦《蓼莪》《陟岵》之詩, 誦訖, 嗚咽涕涔涔下。 故國人皆曰: "王之孝也。 王一念敬天, 無所不用其極。 故紙中見有天字, 手自洗濯, 不令人踐躁。 雖尋常酬酢, 語及於天, 必加尊敬曰: "君代天理物, 臣代君理事, 君之敬天, 當如臣之事君也。" 遇有災異, 至誠警懼, 減膳求言, 反躬自責。 庚寅春客星見, 王夜召編輯臣及雲觀司曆, 講究消弭之策, 每夕躬測候月臺曰: "願毋移於民國。" 如是者三日, 客星乃消。 或有 疾風甚雨, 雖夜必衣服冠而坐, 有時獨語曰: "予有何咎, 天之警告若是也?’ 轉輾憂慮, 坐而待朝。 天旱祈雨, 未嘗命官, 親秉圭以孚格爲期。 故壬子以後, 幾乎無歲不親禱, 禱輒得雨大有年, 史不勝書。 及其季年, 遣官代攝, 亦必露伏闕庭, 得雨然後, 始返燕寢, 或未得雨, 則解衣曝烈日曰: "曷不焦予之躬乎?" 故國人皆曰: "王之敬也。 王卽位之初, 己以祁寒盛暑, 增添講日, 晝必移晷, 夜輒趁鍾, 雖當陵幸親耕之後, 亦不以勞倦或曠。 方春秋七旬, 以三伏日, 開朝晝夕三講, 討論不倦。 比及于頤, 視昏不能辨字, 猶親誦《小》《大學》以爲講, 一月六對, 晉接臣隣, 裁決國事, 細大不遺。 或廟謨簡, 則從容論閭里疾苦宮府故事, 對罷日已夕, 而寺人復燃燭于堂。 承旨抱章疏啓狀以入, 王聽奏, 呼判無少滯, 比退則夜漏下四五皷, 故國人皆曰: "王之勤也。" 王性不喜奢華, 凡百玩好泊如也。 及登寶位, 欲以大布大帛, 易風俗。 所居宮闕壁塗之墁泐者, 窓楹之剝缺者, 黼筵鋪席之破弊者, 經歲不改, 或有司請修, 亦不許。 燕居集慶堂, 以破屛數疊, 隔內外廳軒, 樸陋褊隘, 雖淸修士室廬, 殆不如也。 嘗以先朝寢殿側, 搆一茆舍, 讀書其中, 欲追述故事, 竟以重煩民力, 不果焉。 服御唯袞冕法服, 按制致美, 自餘中衣貼裏之屬, 往往澣濯補綴, 冬雖甚寒, 未嘗御裘, 故群臣侍王者, 亦不敢挾裘。 夜不設衾褥, 有時支木枕倦寐, 則宮人恐寒氣逼王躬, 以小被加之。 國典內膳夫日五進王膳, 而王一日三膳, 膳亦未嘗飽, 故宮中遂廢午夜二膳。 其他戒豐亨務抑損, 多此類。 故國人皆曰王之儉也。 王嘗言, ‘王者爲政, 當自宮闈始。" 非公事, 未嘗與宦官宮女語。 古例罷朝後大小公事, 或令宦官讀奏臥內, 王恐宦官因此暗習國事, 干預朝政, 雖夜深必召承旨讀奏。 嘗謂世孫曰: "古則宦官十餘人, 猶以爲多, 今過百餘人。 多則難制, 汝其識之。" 待臣隣常推赤心, 凡厥有罪, 始雖譴責極於嚴厲, 及其甄敍之後, 任用如舊, 若初無是事者。 承辛壬黨禍之餘, 深知黨論爲殺戮之本, 殺戮爲亡國之本, 以消朋黨保世臣, 爲立治先務。 方在銅闈, 校理趙文命封事, 景廟言三黨之後, 當以蕩平捄弊, 王悅其言而心識之。 及登極, 首擢主蕩平之論者二三臣, 雖瑕摘左右交至, 王終如不撓而倚任之, 其有持論峻者, 輒斥不用。 每誦宣廟御製詩, ‘諸臣今日後, 寧復更西東。" 曰: "此我家法也。 孰敢沮敗乎?" 嘗宅仁元后憂, 王親爲文, 極言保世臣, 安宗國之謨, 命儒臣告于孝昭殿曰: "予所以爲此者, 遠效周公之藏金縢, 近效趙抃之焚香告天也。" 由是雖當水火胥分, 干戈相尋之時, 勝殘去殺, 垂五十年, 及壬辰戚黨事起, 王罪金龜柱甚嚴。 謂世孫曰: "朝黨尙爲世道患, 況戚黨乎? 不戢將滔天。 予老矣不及見, 乃汝他日之憂也。" 其思深慮遠如此。 故國人皆曰: "王之公也。 王處潛邸久, 閭里艱難, 民生疾苦, 委巷荒野, 至微細事, 無不遍知, 及承儲, 博講經傳, 灼見保民爲治國之要。 凡貢民、市民、耕種民、販商民、軍保民, 無不曲察其飢飽寒煖, 蠲免之政, 無歲不下。 或有司以經費難之, 王輒誦肅宗何惜肌膚之語, 趣頒旨施惠, 故卽位五十年間, 所蠲免無慮累百萬。 初北關民, 困交濟錢, 有賣妻鬻子自縊死者。 會王遣御史按廉, 民遮道泣曰: "但願歸奏吾王, 使赤子之情, 達于父母也。" 御史如其言歸奏, 王失聲流涕曰: "予嘗病人君廣廈細氈, 厚享玉食, 不能察蔀屋之情, 豈謂吾豐沛之鄕, 有此事乎? 予不能矯弊安民, 誠無顔可以入高廟也。" 立命蠲免。 其他無告者, 赴愬於王, 得遂其生, 不可勝紀。

丙申春王疾益亟。 當是時濟州饑, 遣御史賑之, 王憂念不置, 諄諄夢語, 皆濟州事。 其仁民惻怛, 出於至誠者然也。 故國人皆曰: "王之恕也。" 王旣具此六德, 以爲立治之經, 而監成憲、革流弊、愼庶獄、裕國用, 又無非爲緯於六德。 是以高年天位, 邦內乂安, 臣世其祿, 民樂其利。 凡在朝野黃髮鮐背太半, 而是亦有年過百歲者, 庸詎非人事修於下, 天運應於上哉? 傳曰: "大德必得其壽, 必得其位, 必得其祿。" 王庶幾焉。 王有二男, 曰孝章世子, 以左議政趙文命女爲嬪, 無嗣。 曰莊獻世子, 以領議政洪鳳漢女爲嬪, 實誕我嗣王殿下。 甲申命我嗣王殿下爲孝章世子後, 及王祔太廟時, 追尊孝章世子眞宗大王, 孝純賢嬪孝純王后, 同祔太廟, 皆王遺命也。 今嗣王殿下, 不以臣不文, 命因遺事攛掇爲狀, 臣惶恐隕越, 不知所以稱塞, 獨竊聞帝王大節, 惟付托之得人是已。 故《虞史》《堯典》, 其言傳以位之事, 反復詳悉蓋一篇而半之, 世稱《虞史》爲千古史臣之宗, 以此也。 臣敢以景廟之全付於王, 王之全付於殿下者, 該載一篇之上下, 以追《堯典》之斷例而尊其所聞云。

大提學徐命膺製進。


  • 【태백산사고본】 83책 127권 42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543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