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대왕 묘지문[誌文]
지문(誌文)에 이르기를,
"아! 하늘이 크게 유위(有爲)한 임금을 내려 장차 일대(一代)의 큰 사업을 이루려 하면 반드시 먼저 우환(憂患)과 곤액(困厄)으로 시험하여 그 마음을 경동(警動)하고 그 욕성(慾性)을 참아서 그 덕지(德智)를 더 보탤 수 있어 마침내 험난(險難)을 겪어 내고 태평 만세(太平萬世)의 기틀에 이를 수 있게 하는데, 근세에서 살피건대, 우리 대행 대왕에게서 이것을 보았다. 왕의 성(姓)은 이(李)이고, 휘(諱)는 금(昑)이고, 자(字)는 광숙(光叔) 이니, 숙종 대왕(肅宗大王)의 둘째 아드님이고, 어머니는 화경 숙빈(和敬淑嬪) 최씨(崔氏)로 갑술년001) 9월 13순일에 창덕궁(昌德宮)의 보경당(寶慶堂)에서 탄생하셨다. 왕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오른 팔에 용의 비늘 같은 무늬가 있었는데, 숙종께서 늘 재기(才器)를 중하게 여겨 양성(養性) 이라는 헌호(軒號)를 내려서 그 덕을 권면(勸勉)하고 6세 때에 연잉군(延礽君)을 봉(封)하셨다. 경자년002) 숙종께서 승하하셨을 때에 청사(淸使)가 조상(弔喪)하러 와서 왕제(王弟)를 보려고 청하였으나, 적신(賊臣) 조태구(趙泰耉)가 말하기를, ‘상국(上國)에서 열국(列國)의 임금을 조상하되 배신(陪臣)인 공자(公子)에게도 미치는 것은 예전에 이런 일이 없었는데, 배신이 이것을 받아들이면 혐의를 무릅쓰는 것이 된다.’ 하였으니, 역란(逆亂)의 근원은 이때부터 비롯하였다. 처음에 경종 대왕(景宗大王)께서 병으로 눕고 후사(後嗣)가 없으시므로 온 국민이 근심하였는데, 신축년003) 에 정언(正言) 이정소(李廷熽)가 상소하여 저위(儲位)를 세우기를 청하고 대신(大臣)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가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입대(入對)하여 대책(大策)을 정하기를 청하니, 경종께서 왕대비(王大妃)께 여쭈어 명을 받아 대신들에게 일러 왕을 세제(世弟)로 책봉하셨다.
왕께서 상소하여 사양하시니, 경종께서 답하시기를, ‘저사(儲嗣)를 미리 세우는 것은 종묘 사직(宗廟社稷)을 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내가 착하지 못하여 후사가 없고 또 병이 있으므로 저이(儲貳)의 중임을 맡기니, 조심하고 삼가서 국민의 희망에 부응하라.’ 하셨다. 왕께서 다시 상소하여 굳이 사양하셨으나, 경종께서 윤허하지 않으셨다. 그 뒤 얼마 있다가 적신 유봉휘(柳鳳輝)가 상소하여 ‘대신들이 우롱하고 협박하였으니 신하의 예(禮)가 없다.’고 성언(盛言)하자, 왕께서 상소하여 저위를 사양하셨다. 대신들이 삼사(三司)를 거느리고 아뢰어 유봉휘를 국문(鞫問)하기를 청하니, 경종께서 윤허하셨다. 조태구가 차자를 올려 ‘유봉휘의 마음은 나라를 위하려는 데에서 나왔고 결코 다른 뜻이 없습니다.’ 하고 매우 힘써 신구(伸救)하여 성명(成命)을 거두기를 청하니, 경종께서 이 때문에 유봉휘를 귀양보내고 마침내 묻지 않으셨다. 그 뒤에 하교하여 크고 작은 국사(國事)를 세제(世弟)가 재단(裁斷)하게 하셨으나, 왕께서 네 번 상소하여 명을 거두기를 청하시고 백관(百官)은 정청(庭請)하여 마지 않으니, 경종께서 ‘좌우가 옳은가 세제가 옳은가?’ 하셨다. 대신들이 연명(聯名)하여 차자를 올려 정유년004) 에 대리(代理)한 고사(故事)에 따라 품지(稟旨)하여 행하기를 청하였는데, 이날 밤에 조태구가 그 당(黨)인 최석항(崔錫恒) 등과 함께 선인문(宣仁門)을 통하여 몰래 입시(入侍)하여 드디어 대리하라는 명을 거두게 되니, 왕께서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두렵고 조심스러워 안정하지 못하셨다. 이에 앞서 적신 김일경(金一鏡)이 역엄(逆閹)005) 박상검(朴尙儉)과 몰래 맺고 동궁(東宮)을 해치려고 꾀하였다. 박상검이 궁인(宮人) 석렬(石烈)·필정(必貞)을 시켜 날마다 밤에 청휘문(淸暉門)을 닫게 하여 동궁이 문침(問寢)하는 길을 끊었으므로 왕께서 들어가시지 못하게 되니, 빈객(賓客)·궁료(宮僚)를 소견(召見)하고 출합(出閤)006) 하여 저위를 사퇴하려 하셨다. 뭇 신하가 박상검 등을 주벌(誅罰)하기를 청하니, 대비(大妃)께서 언서(諺書)로 하교하여 대신에게 이르기를, ‘세제가 저사로 책봉된 것은 이 미망인(未亡人)이 선왕의 유교(遺敎)를 받들었고 대전(大殿)께서 친히 작호(爵號)를 써서 정하신 것인데, 불행히 궁인과 환시(宦侍)가 양궁(兩宮)에서 서로 결합하여 성총(聖聰)을 속이고는 감히 패역(悖逆)의 말을 방자하게 보의(黼扆) 앞에서 하였으니 그 죄는 죽여 마땅하다마는, 경들도 왕세제(王世弟)를 보호하여 사직을 지켜서 우리 선왕의 유교를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하셨다. 이때부터 적신이 다 두려워 떨고 감히 행하지 못하였다.
이듬해에 입학(入學)하셨는데, 목호룡(睦虎龍)이 급한 고변(告變)을 올려 무옥(誣獄)을 일으켜 건책(建策)한 대신들을 죄다 죽이고 세제빈(世弟嬪)의 종자(從子) 서덕수(徐德修)를 하옥(下獄)하여 죄상을 물은 것을 살펴서 동궁을 핍박하였으므로, 바야흐로 이때에 화(禍)를 장차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왕께서 불안하여 궁료를 소견하고 상소하여 그 무함을 통렬히 밝히려 하셨으나, 조태구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거짓 동궁을 위하는 체하며 경종께 각별히 위안하시도록 권하였고, 최석항은 동궁에 관련된 목호룡의 모든 옥사(獄辭)를 쓰지 말 것을 건언(建言)하고 끝내 목호룡의 죄를 바루기를 청하지 않았다. 왕께서 아침저녁으로 환난(患難)에 미칠 것을 알고 속으로 위태롭게 여겨 마치 스스로 보전하지 못할 듯하셨으나, 우애는 천성에서 나왔으므로 경종을 섬기되 반드시 그 정성을 다하시니, 나아가 뵐 때마다 경종께서 온화하게 기뻐하시는 모습이 있었고, 때때로 몸소 세제궁(世弟宮)에 가시는 것을 좌우가 말리면, 경종께서 꾸짖어 ‘과인(寡人)이 내 아우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려 하는데 너희가 어찌하여 막는가?’ 하시니, 적신이 이 말을 듣고 감히 다시 그 흉계를 부리지 못하였다.
갑진년007) 8월에 경종께서 병환이 위독해지셨으나, 이광좌(李光佐)가 우의정(右議政)으로서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기를 청하지 않으므로 국인(國人)은 몰랐다. 그래서 적신 심유현(沈維賢)이 앞장서서 흉언(凶言)을 하여 경외(京外)를 선동하였다. 왕께서 즉위하시고, 이광좌가 집정(執政)하여 권익관(權益寬)·이사성(李思晟)·정사효(鄭思孝)를 거용(擧用)하여 각도의 번곤(藩閫)에 포치(布置)하였는데, 무신년008) 3월에 대란(大亂)이 일어났다. 이인좌(李麟佐)가 청주(淸州)에 들어가서 수신(帥臣) 이봉상(李鳳祥)과 영장(營將) 남연년(南延年)을 죽이고 그 아우 이웅보(李熊輔)와 정희량(鄭希亮)을 시켜 안의(安義)·거창(居昌)·함양(咸陽)을 엄습(掩襲)하여 적의 형세가 매우 확장하였으므로 서울이 어수선하여 백성이 다 옮겨 떠날 생각을 가졌으나 왕께서는 예장(禮裝)을 갖추고 성기(聲氣)를 변하지 않으셨는데, 이인좌가 형틀이 채워져 궐하(闕下)에 이르고 정희량 등 역적들의 머리가 저자에 걸리고 권익관·이사성·정사효를 잡아서 화란(禍亂)을 다스려 사방으로 하여금 군사를 해산하고 경작(耕作)에 안정하게 하여 3백 년의 종묘 사직이 망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 아! 성대하다. 이것이 누구의 힘인가?
왕께서는 타고난 자질이 영명(英明)하고 내행(內行)이 순지(純至)하셨다. 일찍이 ‘강학(講學)은 장차 몸소 행하기 위한 것인데 그 근본은 효제(孝悌)일 뿐이다.’ 하셨고, 어려서부터 어버이를 사랑하는 데에 도타우셨다. 태모(太母)를 받들어 섬기되 순경(順敬)에 전념하시어 여덟 번 보책(寶冊)을 바쳤으나 그 정성을 다하지 못한 듯하고 일국(一國)으로 봉양하여도 그 직분을 삼가 힘쓰지 못한 듯하였으며, 상을 당하셔서는 성수(聖壽)가 이미 불훼(不毁)009) 를 지났으나 집상(執喪)에 매우 부지런하여 육시(六時)로 제전(祭奠)하고 최질(衰絰)을 벗지 않으시어 매우 검어진 안색과 울부짖고 가슴 치는 슬픔이 신하들을 감동시켰으며, 장례 때에 배위(陪衛)하여 능(陵)에 가서 임결(臨訣)하기까지 하셨으니, 이 정성은 천고의 제왕(帝王)에게 없었던 것이다.
경종을 섬기되 정성을 다하고 게을리하지 않으셨으므로 사람들이 이간할 수 없었다. 갑진년 대상(大喪) 때에는 천륜(天倫)이 도타우셨기 때문에 계체(繼體)의 중대함을 생각하여 애훼(哀毁)가 과도하여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셨고, 선의 왕후(宣懿王后)께서 승하하셨을 때에도 갑진년과 똑같이 하셨다. 늘 영고(寧考)를 오래 모시지 못한 것을 지극한 아픔으로 여겨 탄일(誕日)에 진하(陳賀)를 청하면 정자(程子)의 말을 인용하여 굳이 거절하고 육아시(蓼莪詩)·척호시(陟岵詩)를 외고 슬피 눈물을 흘리셨는데, 연신(筵臣)은 혹 어쩌다 마침 그런 것이라고도 생각하였으나, 그 뒤에도 말이 탄일의 진하에 미치면 그러지 않으신 적이 없었다. 늘 서루(西樓)의 고사(故事)를 사모하여 궤장(几杖)을 받고 영수각(靈壽閣)에 오르셨을 때에 나이 70이 된 재신(宰臣)은 변품(變品)하여 입참(入參)하라고 명하여 기록하여 경하하게 하셨다. 하루는 《예기(禮記)》 증자문(曾子問)을 진강(進講)하였는데, 한 판(板)에 못 미쳐서 옥음(玉音)이 슬피 목메어 거의 소리를 이루지 못하고 이어서 울며 강관(講官)에게 ‘황형(皇兄)의 경연(經筵)이 증자문에서 그쳤으니 내가 차마 이 편(篇)을 읽지 못하겠다.’ 하고, 드디어 폐기하여 다시는 강독(講讀)하지 않으셨다.
태모께 진연(進宴)할 때에 하교하기를, ‘위에서 노인을 공경하면 백성이 효도를 일으키니 이것은 내 마음을 미루어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의리이다. 이제 내가 태모(太母)께 상수(上壽)하는데, 어찌 아랫사람을 생각하는 도리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하고 서로(庶老)를 궐정(闕庭)에 불러 잔치를 벌이고 비단을 내렸으며 외방(外方)은 본도(本道)를 시켜 자손에게 연수(宴需)를 주어 영친(榮親)하게 하고, 시종(侍從)에게 추은(推恩)하는 것도 모두 세수(歲首)를 기다리지 않으셨으니, 다 효심을 미루어 미치신 것이다.
조상을 추모하고 제사하는 데에는 성·례(誠禮) 두 가지가 극진하셨다. 봄·가을로 능(陵)에 거둥하면 근방의 여러 능도 일일이 친히 살피고 재실(齋室)에서 재계(齋戒)하여 심신(心身)을 깨끗이 하고 제사지낼 때에는 낯빛을 고쳐 마치 경광(耿光)을 다시 뵈는 듯하였으며, 물러가 판위(板位)에서 기다리면 선 모습이 우뚝 솟은 듯하셨는데 칠순(七旬)에도 전보다 못하지 않으셨으니, 뭇 신하 중에서 강력(疆力)한 자도 다 바랄 수 없는 것이었다. 병환이 있어서 몸소 제사하지 못하시면 반드시 스스로 향(香)을 마련하여 전하고 궁문(宮門) 밖에서 지송(祗送)하였으며, 밤새도록 옷을 가다듬고 재전(齋殿)에 앉았다가 제사를 마친 것을 듣고서야 비로소 취침하셨다. 효종(孝宗)·현종(顯宗)의 휘호(徽號)를 추상(追上)하고 또 숙종(肅宗)의 휘호를 두 번 올렸으며 비로소 시조(始祖)인 사공(司空)을 받들어 전주(全州)에 사당을 세워 임금이 선공(先公)을 제사하는 뜻으로 제사하셨다.
무오년010) 에 종계 변무(宗系辨誣)한 뒤에 정사(正史)가 세상에 반행(頒行)되었는데, 신묘년011) 에 주인(朱璘)·진건(陳建)의 패사(稗史)를 친히 보시니 또 잘못된 이야기를 답습하여 무욕(誣辱)당하는 것이 여전하므로 성심(聖心)이 못 견디게 원분(冤憤)하여 사신을 보내어 거듭 간청하게 하시어 마침내 삭제할 수 있었다.
신비(愼妃)의 위호(位號)를 추복(追復)하고 태묘(太廟)에 올려 부제(祔祭)하여 성대한 의례(儀禮)를 거행하시니, 신인(神人)이 다 기뻐하였다. 일찍이 《대명집례(大明集禮)》를 보고 특별히 하교하기를, ‘이제부터 태묘에 친향(親享)할 때의 서계(誓戒)는 백관이 황조(皇朝)의 예와 같이 정전(正殿)에서 행하고 소홀히 하지 말라.’ 하셨다. 장릉(長陵)을 옮겨 모신 뒤에 효종(孝宗)께서 손수 심으신 측백나무의 씨를 옛 능에서 가져다 뿌려 심고 ‘대개 영릉(寧陵)의 효성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하셨으니, 또한 성효(聖孝)가 끝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왕께서는 더욱이 존주(尊周)의 대의를 중히 여기고 열성(列聖)의 가법(家法)을 따르셨다. 늘 영릉의 ‘날은 저물고 길은 멀다.’는 하교를 잊지 않고 마음에 두어 여러 번 연석(筵席)에서 말씀하셨고, 알릉(謁陵)하는 길에 남성(南城)에 거둥하여 서장대(西將臺)에 나아가 하교하기를, ‘내가 잠저(潛邸) 때부터 황조(皇祖)께서 존왕(尊王)하신 의리와 성고(聖考)께서 계술하신 뜻을 늘 추모하였는데, 이 대에 오르니 자연히 감창하게 된다. 추모하는 마음이 이러하더라도 황조의 의리와 성고의 뜻을 계술하고서야 큰 추모가 될 것이다.’ 하셨다. 을묘년012)
2월에 장차 노량(露梁)에서 대열(大閱)하게 되었는데, 열흘 뒤에는 황단(皇壇)에 친사(親祀)해야 하므로 연신(筵臣)이 ‘대열의 날짜가 잡혔으니 황단에는 대신에게 명하여 제사를 대행시키셔야 하겠습니다.’ 하자, 왕께서 ‘나라의 큰일은 제사와 군사에 있는데, 융정(戎政)을 중시하고 사전(祀典)을 경시한다는 말은 내가 듣지 못하였다.’ 하셨다.
기사년013) 봄에 태조 황제(太祖皇帝)가 처음으로 국호(國號)를 내려 주고 의종 황제(毅宗皇帝)가 장수를 명하여 우리를 원조한 은덕을 잊을 수 없다 하여 두 황제를 단사(壇祀)에 더 모시고 하교하기를, ‘이제 내가 아울러 제사하지 않는다면 어찌 계술하는 도리라 할 수 있겠는가? 이는 의리에 따라 일으킨 것이기는 하나, 나는 천지에 세워도 어그러지지 않고 성현에게 질정하여도 의심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해마다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휼사(恤祀)함에 있어 친제(親祭)·섭제(攝祭)에 차이를 두지 않아서 성왕의 대업을 계승하고 후손에게 유족(裕足)한 도리를 끼치고서야 백세(百世)에 할 말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셨다.
구전(舊典)을 수명(修明)하여 이를테면 시학(視學)·대사(大射)의 예(禮)와 친경(親耕)·친잠(親蠶)의 의(儀) 등을 모두 강행(講行)하시어 질서에 볼만한 것이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늘 학문에 종사하여 위로는 요순(堯舜)의 정일(精一)한 법까지 다하고 아래로는 은주(殷周)의 훈명(訓命)한 글에 미쳐 치지(致知)에 전념하였으며, 더욱이 《소학(小學)》·《대학(大學)》에 힘써서 팔순(八旬)에도 외고 정의(精義)를 환히 알아서 막히는 데가 없으시어, 일찍이 ‘내가 여기에서 수용한 것이 가장 많다.’ 하셨다. 《자성편(自省編)》·《경세문답(警世問答)》을 지어 후손을 가르치셨는데, 모두가 격언(格言)·명훈(明訓)이며 또 지난날의 뉘우침을 서술하여, 뭇 신하에게 ‘나에게 과실이 있거든 신하는 이 편(編)을 가지고 규계(規戒)해야 한다.’ 하셨다. 그런데 그 뒤에 조정(朝廷)에 임하여 사기(辭氣)가 변하신 일이 있어도 뭇 신하가 바로잡는 것이 없으므로, 왕께서 하교하기를, ‘내가 《자성편》을 실천하지 못한 것은 부끄러워할 만하나, 뭇 신하도 규간(規諫)하지 못하였으니 서로 면계(勉戒)하는 도리가 없을 수 없다.’ 하고는 매우 꾸짖으셨다.
임어(臨御)하신 이래로 어진이를 찾는 일에 자못 부지런하시어 암혈(巖穴)의 선비가 많이 정초(旌招)014) 되었다. 병인년015) 박필주(朴弼周)를 징소(徵召)하여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삼을 때에 손수 써서 하유(下諭)하기를, ‘예전 효묘(孝廟)의 성시(盛時)에 산림(山林)의 석덕(碩德)인 선비로서 총재(冢宰)에 발탁된 자가 많았거니와, 이제 내가 한번 이 직임에 발탁하면 세교(世敎)를 부식(扶植)할 것이 또한 많지 않겠는가?’ 하고 특별히 승지(承旨)를 보내어 함께 오게 하셨다. 박필주가 들어와 뵙고 수차(袖箚)를 바쳐 저사(儲嗣)를 세워 대리(代理)시킨 의리를 말하니, 왕께서 하교하기를, ‘후세 자손이 이 일을 밝히는 것이 옳다. 스스로 내가 밝히는 것이 어찌 구차하지 않겠는가?’ 하셨다. 곧 상신(相臣)이 요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서울을 떠났으나, 은례(恩禮)는 줄지 않았다.
영남의 유생(儒生) 이인지(李麟至)가 상소하여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문정공 송준길(宋浚吉)을 배척하니, 왕께서 하교하기를, ‘아! 선왕께서 두 선정(先正)을 표창하신 것이 해와 별처럼 분명하니 나 소자(小子)가 계술하는 도리로서는 선지(先志)를 따르고 사설(邪說)을 배척해야 할 따름이다. 이제 이인지가 뒤미처 예설(禮說)을 말하여 선정을 근거 없이 욕하고 여력(餘力)을 남기지 않으니, 이것은 선정을 근거 없이 욕할 뿐더러 선왕의 가르침을 저버리려는 것이다. 왕조(王朝)를 어지럽히는 자는 매우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는 먼 지방에 귀양보내셨다. 안동(安東)의 유생들이 문정공 김상헌(金尙憲)의 사우(祠宇)를 훼철하니, 왕께서 하교하기를, ‘예전에 청(淸)나라 군사가 남한(南漢)을 에웠을 때에 문정(文正)이 의리로 다투었고 임경업(林慶業)이 금주(錦州)에 들어갈 때에는 문정이 능히 대명(大明)을 위하여 봉사(封事)를 올렸으므로 정충 대절(精忠大節)이 우주(宇宙)에 빛나는데, 이제 유생들이 국법을 업신여기고 마음대로 서원(書院)을 훼손하였으니, 이것은 난민(亂民)이다.’ 하고 엄히 형신(刑訊)하여 멀리 귀양보내라고 명하셨다. 도(道)를 지키는 것이 엄하고 사(邪)를 배척하는 것이 바르기가 이러하셨다.
신하들을 어거하는 것이 엄하고도 너그러우시어 늘 ‘일월(日月)은 사사로이 비추는 것이 없고 우로(雨露)는 땅을 가리지 않고 내리나, 미워하는 것은 붕당(朋黨)이 성하여 사람의 국가를 해치는 것이다. 역순(逆順)을 가리는 것은 엄하더라도 호오(好惡)가 치우치는 것은 없애야 한다.’ 하시고 두세 대신과 함께 황극(皇極)의 뜻을 취하여 뭇 신하들을 감독하고 이끌어 반드시 일세(一世)의 사람들을 소융(消融)하고 보합(保合)하여 함께 대도(大道)로 나가게 하셨다. 산함(酸鹹)을 조제(調劑)하여 굳게 지키고 힘껏 행하되, 극(極)에 맞지 않는 자일지라도 아닌게아니라 복을 내리고, 죄에 걸리지 않은 자는 아닌게아니라 덕으로 이끌어, 한가지로 보아 같이 사랑하고 공평히 들어서 아울러 쓰셨으므로, 모든 사람이 함께 삼가고 공경하여 모두가 교화된 가운데에 들어갔다.
을해년016) 역얼(逆孼)이 다시 일어나게 되니, 왕께서 ‘전에 천망(天網)이 넓어서 우두머리는 주벌(誅罰)하였으나 당여(黨與)는 오히려 죄다 죽이지 않았다. 이것은 협박 때문에 따른 자는 다스리지 않는다는 뜻이었는데, 흉도(凶徒)가 이제 또 치성(熾盛)하니, 뿌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난역(亂逆)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하고는 엄히 신문하고 깊이 캐어 그 무리를 죄다 다스리셨다. 그때에 정휘량(鄭孥良)·이창수(李昌壽) 등이 동료들에 앞장서 상소하여 조태구·유봉휘를 노적(孥籍)하고 최석항·이광좌의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곧 윤허하시고 이어서 조태억(趙泰億)의 직첩(職牒)을 거두셨다. 태학 장의(太學掌議) 이인빈(李寅彬)이 유생들을 거느리고 상소하여 선정(先正) 송시열·송준길을 태학에서 제사하여 공자(孔子)에 종향(從享)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또 윤허하셨다. 이는 대개 성화(聖化)가 널리 미치고 지성(至誠)이 참으로 감통(感通)하여 말하지 않아도 미덥고 호령하지 않아도 행해지며 성색(聲色)을 크게 하지 않아도 편안하게 내귀(來歸)하고 감동시키면 화목해져서 조정이 비로소 맑아지고 사추(士趨)가 바른 데로 귀일한 것이니, 그제야 성대(聖代)의 치효(治效)가 더욱 크게 밝혀졌다.
군민(軍民)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일념(一念)을 게을리 하지 않으시어 대궐과 가난한 백성의 집이 멀지 않고 가깝다고 여겼으며, 도민(都民)·위사(衛士)를 소견(召見)하여 그 고통을 묻고 때때로 근신(近臣)에게 명하여 주군(州郡)을 두루 살피게 하셨는데, 필부(匹夫)·필부(匹婦)라도 제 있을 곳을 얻지 못하면 아픔이 자신에게 있는 듯하여 가려운 데를 긁어 주고 마른 데를 적셔 주어 어린아이를 보호하듯이 하셨다. 법을 어기는 수령(守令)은 반드시 죄주고 치적(治績)이 가장 나타난 자에게는 표리(表裏)를 내리기도 하고 벼슬을 높이기도 하여 권장하셨다. 황구(黃口)의 첨정(簽丁)과 백골(白骨)의 징수는 방백(方伯)·군현(郡縣)에 엄히 신칙(申飭)하여 낱낱이 바로잡게 하셨다. 흉년이면 전조(田租)의 반을 줄이고 혹 설진(設賑)하게 되면 곡식을 옮기고 재물을 내어 구제에 전념하셨다. 어사(御史)를 나누어 보내어 굶주린 백성에게 유시하기를, ‘나라가 의지하는 것은 백성이고 백성이 의지하는 것은 먹는 것인데, 근년 이래로 각도에 거듭 흉년이 드니, 내 마음이 슬프다. 먹는 것이 달지 않고 자는 것이 편안하지 않으며 너희들의 매우 곤궁한 정상을 생각할 때마다 민망하고 상심된다. 지금의 백성은 성고(聖考)께서 사랑하고 돌보신 백성인데, 과인(寡人)이 즉위하여 백성이 불에 타는 것을 구제하지 못하고 백성이 물에 빠진 것을 건지지 못하니, 이것은 과인이 백성을 밀어서 도랑 속에 넣는 것이다. 그래서 어사에게 명하여 특별히 내 뜻을 이르고 이어서 황정(荒政)을 살피게 하였다. 아! 너희 굶주린 백성은 내 이 뜻을 깊이 생각하여 고향을 떠나지 말고 각각 안주(安住)하라.’ 하시니, 사륜(絲綸)이 간절하여 뭇 백성이 느껴 울었다. 탐라(眈羅)에는 더욱이 힘을 다하여 곡식을 배로 날라 가서 먹이는 데에 한 도(道)의 것을 기울이기까지 하셨으므로 칭송이 바다에 넘쳤다.
늘 양역(良役)의 폐단을 염려하여 백성이 편히 살지 못하는 것을 다친 사람을 염려하듯이 반드시 구제하려 하셨다. 임전(臨殿)하고 임문(臨門)하여 경사(卿士)·서민(庶民)에게까지 물어도 뭇사람의 의논이 갖가지이어서 정견(定見)이 없으니, 특별히 하교하여 부포(夫布) 한 필(匹)을 감하고 균역청(均役廳)을 설치하여 각도의 어염(魚鹽)·은결(隱結)의 세(稅)를 거두어 충대(充代)하셨다. 또 여공(女貢)이 고례(古例)가 아님을 생각하여 모두 면제하시니, 덕음(德音)이 미친 집에서 서로 경하하여 족히 화기(和氣)를 이끌어 올려서 대명(大命)을 맞이하여 이을 만하였다. 성안의 도랑이 막혀 물길이 넘쳐서 여염집이 많이 물에 빠져 백성이 편히 살지 못하므로,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여 돌을 캐어다 높이 쌓고 도랑을 쳐서 잘 흘러가게 하시니, 마을 집들이 잠기지 않아서 모두 편히 지냈으며, 신문고(申聞鼓)를 다시 설치하여 하정(下情)을 통하게 하시어 사방의 깊이 숨겨진 일이 다 진달되었다. 왕께서는 침소에서 천광(天光)을 보면 덥더라도 반드시 창호(窓戶)를 닫고 누우시고 혹 심한 천둥을 만나면 밤이라도 반드시 관(冠)을 바르게 하고 앉으셨다. 재변(災變)을 만나면 경계하고 두렵게 여겨 마음을 오로지하여 신명을 대하셨고, 가뭄을 민망히 여겨 비 오기를 기도하면 문득 영험(靈驗)이 있었다. 해마다 여수(慮囚)017) 에 친림(親臨)하여 반드시 살릴 길을 찾으시어, 슬퍼하고 삼가서 옥사(獄事)를 판결하여 죄가 의심스러운 자는 문득 가볍게 하는 의논에 붙이신 것이 많았으며, 사변(徙邊)의 율(律)018) 을 폐지하고 법에 어그러지는 형벌을 없애시어, 삼가고 불쌍히 여기는 뜻이 사교(辭敎)에 충만하셨다.
시사(視事)에는 반드시 부지런하여 한 달에 여섯 번 있는 차대(次對)를 멈추신 적이 없고, 정섭(靜攝)하는 중일지라도 백성과 나라에 관계되는 장소(狀疏)가 있으면 잠시를 지체하지 않고 뭇 신하를 소접(召接)하여 좋은 방도를 물어 편리하게 구획(區劃)하시되, 혹은 새벽을 알리는 북소리가 난 뒤에 파하여도 피로한 줄 모르시며, 서무(庶務)가 쌓여도 재결(裁決)에 어려움이 없어서 마치 칼로 실을 끊는 듯하셨다. 전곡(錢穀)에 관한 문부(文簿) 같은 잗단 것도 한마디로 판별하고 조금도 틀리지 않으시므로, 뭇 신하가 두려워 따르고 직무에 종사하기를 오직 삼가서 하였다. 성품이 또한 검약(儉約)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 늘 빤 옷을 입으시고 조석의 반찬도 두어 가지에 지나지 않았으며, 계시는 별당(別堂)의 동우(棟宇)가 매우 좁고 침실의 자리가 낡았으므로 유사(有司)가 갈기를 청하여도 윤허하지 않으셨다. 정신(廷臣)이 전후 다섯 번 존호(尊號)를 올렸는데, 왕께서 오래 고집하여 겸양한 뒤에야 애써 따르셨다. 오로지 소박함을 숭상하고 경박하고 화려한 것을 애써 없애며, 상방(尙方)의 직조(織造)를 줄이고 연경(燕京)에서 사 오는 문단(紋緞)을 금하시니, 온 국민이 변화되었다.
왕께서는 춘추가 더욱 높아져도 정력이 오히려 강하셨는데, 지난해 겨울부터 옥체가 자주 편찮으시다가 봄이 되니 병환이 날로 깊어져 마침내 병신년019) 3월 5일 병자(丙子)에 경희궁(慶熙宮)의 집경당(集慶堂)에서 승하하시니, 수(壽)는 여든 셋이고 재위(在位)는 52년이셨다. 도중(都中)의 사서(士庶)로부터 궁벽한 시골 백성까지 모두 분주하며 슬피 울부짖는 것이 마치 부모를 잃은 듯하였다. 왕께서는 굳세고 지혜가 깊은 자질로 넓고 두터운 덕을 가지시어, 효제(孝悌)는 신명(神明)에게 통하고 정성은 금석(金石)을 꿰었으나, 저위(儲位)에 오르고부터 험난을 두루 겪으셨다. 흉역(凶逆)이 위태롭게 공동(恐動)하는 방법이 갖가지이었는데, 왕께서는 환난(患難)에 처함에 따라 환난에서도 행할 도리를 행하여 그 도리를 잃지 않으셨고, 태모(太母)의 성자(聖慈)와 경묘(景廟)의 인애(仁愛)에 힘입어 어려움에서 벗어나실 수 있었으나, 군흉(群凶)이 악(惡)을 쌓아 암지(暗地)에서 빚어 내어 마침내 하늘에 사무치는 화(禍)에 이르렀다. 신축년020) ·임인년021) 부터 을해년022) 까지 전후 30여 년 동안 역변(逆變)이 여러 번 일어나서 인심이 진탕(震蕩)하였으나, 왕께서 묵묵히 신묘한 계책을 써서 임기 응변하시니 양서(陽舒)·음참(陰慘)이 다 마땅하게 되었다.
능히 대난(大難)을 평정하여 수습되어 할 일이 없을 듯하였으나, 더욱 성지(聖志)를 힘쓰고 더욱 성덕(聖德)을 닦아 능히 집에서 검소하고 능히 나라에서 부지런하며, 하늘을 공경하고 조상을 본받으며, 어진이를 높이고 도(道)를 중히 여기며, 명절(名節)을 숭상하고 풍교(風敎)를 바르게 하며, 소민(小民)을 화합시키고 세신(世臣)을 보전하며, 호령을 내는 것이 마치 바람이 움직이면 풀이 눕듯이 행해지니, 말년에 이르러서는 악한 무리들이 절로 사라져서 화란(禍亂)이 일지 않았다. 극(極)에 모으는 정치가 바라는 대로 되어 조야(朝野)가 평온하고 민생이 안락하며, 농사는 자주 풍년이 드는 상서가 있고 사람은 병들어 죽는 한탄이 없어서 지극한 교화가 성대히 일어나 빠르게 삼고(三古)와 같은 성세(盛世)가 되었다. 이른바 ‘큰 근심을 겪고서 성명(聖明)을 열고 많은 어려움을 겪고서 나라를 안정시킨다.’는 것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신(臣)이 삼가 옛일을 상고하건대, 예전에 순(舜)은 산림 천택(山林川澤)을 맡아서 질풍(疾風)이나 뇌우(雷雨)에 미혹하지 않고서 마침내 천하를 갖게 되고, 우(禹)는 홍수(洪水)를 다스리느라 외방(外方)에서 8년 동안 손발이 터지도록 애쓰고서 마침내 하조(夏祖)가 되었거니와, 왕의 대덕(大德)·신공(神功)은 뛰어나고 빛나서 장차 순·우와 함께 전하는 것을 같이하여 끝이 없을 것이니, 하늘이 우리 왕을 훌륭하게 만든 까닭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아! 희귀하다. 뭇 신하가 고제(古制)를 상고하여 삼가 시호(諡號)를 익문 선무 희경 현효(翼文宣武熙敬顯孝)라 올리고 묘호(廟號)를 영종(英宗) 이라 올리며 이해 7월 27일에 건원릉(健元陵) 서쪽 둘째 산등성이 해좌 사향(亥坐巳向)인 언덕에 장사하여 능호(陵號)를 원릉(元陵)이라 하고 전호(殿號)를 효명전(孝明殿)이라 하였다. 왕의 원비(元妃)는 정성 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이니 달성 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悌)의 따님인데, 정축년023) 에 훙서(薨逝)하여 홍릉(弘陵)에 장사하였다. 계비(繼妃)는 김씨(金氏)이니 지금의 왕대비 전하(王大妃殿下)이며 오흥 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의 따님이시다. 왕께서는 두 아드님을 두셨으니, 맏이는 효장 세자(孝章世子)로서 정빈(靖嬪)께서 탄생하였는데, 처음에 경의군(敬義君)을 봉하였고 을사년024) 에 세자(世子)로 책봉되었으며 무신년025) 에 훙서하였다. 다음은 사도 세자(思悼世子)로서 영빈(暎嬪)께서 탄생하였는데, 병진년026) 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기사년027) 에 대리(代理)하였으며 임오년028) 에 훙서하였다. 왕께서 복정(復政)하신 것은 대개 성인(聖人)이 만난 때가 그렇기 때문이었는데, 자애하심에 도타우시어 광혈(壙穴)에 임하여 슬픔을 펴고 어서(御書)로 제주(題主)하셨고, 세손(世孫)이 청정(聽政)하게 되어서는 정리(情理)를 굽어살피어 소어(疏語)를 보고는 슬피 느낌을 일으켜 기주(記注)를 씻어 없애기를 청한 것을 특별히 윤허하셨으니, 왕의 성덕(盛德)이, 아! 또한 지극하다.
효장 세자의 총사(冢嗣)의 중함을 추념(追念)하여 사도 세자의 아드님에게 명하여 후사(後嗣)가 되게 하시니 곧 금상 전하(今上殿下)이시며, 뒤에 또 효장에게 승통 세자(承統世子)라는 시호(諡號)를 더 내려서 추륭(追隆)하는 뜻을 보이셨다. 왕의 병환이 위중하여 기무(機務)에 소홀한 것이 많으므로 문손(文孫)에게 명하여 대로(代勞)하게 하셨는데, 역적 홍인한(洪麟漢)이 집권(執權)하여 역적 정후겸(鄭厚謙)과 함께 갖은 계책으로 막았으나 성단(聖斷)이 혁연(赫然)하여 급히 대청(代聽)을 명하시니, 군정(群情)이 기뻐하고 국세(國勢)가 튼튼해졌다. 왕께서 승하하셔도 사왕(嗣王)이 명성(明聖)하여 능히 하늘의 권애(眷愛)를 받고 크게 사방을 어루만지시니, 종사(宗社)의 억만년 끝이 없을 복록은 실로 여기에서 비롯하였다. 전(傳)에 이르기를, ‘지성(至誠)은 감통(感通)하는 것이 신(神)과 같다.’ 한 것을 바로 왕께서 가지셨다. 우리 전하께서 신(臣)이 선조(先朝)에서 지우(知遇)를 받아 지위가 삼사(三事)029) 에 이르고 또 일찍이 사원(詞苑)030) 에 있었다 하여 유궁(幽宮)의 지(誌)를 지으라고 명하셨다. 신(臣)이 생각하건대 천일(天日)의 고명(高明)함은 신처럼 어리석은 자가 형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구구한 정성을 스스로 다하는 것이 여기에 달려 있으므로 감히 불능(不能)함으로써 사양하지 못하고 평소에 이목(耳目)이 보고 기억한 것을 대략 모아서 피눈물을 흘리며 위와 같이 순서대로 찬술(撰述)하였다."
하였다.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김양택(金陽澤)이 짓고 공조 참판(工曹參判) 윤득양(尹得養)이 썼다.
- 【태백산사고본】 83책 127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539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어문학-문학(文學)
- [註 001]갑술년 : 1694 숙종 20년.
- [註 002]
경자년 : 1720 숙종 46년.- [註 003]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註 004]
정유년 : 1717 숙종 43년.- [註 005]
역엄(逆閹) : 반역한 내시.- [註 006]
출합(出閤) : 왕자가 장성한 뒤에 사궁(私宮)을 짓고 따로 나가서 사는 것.- [註 007]
갑진년 : 1724 경종 4년.- [註 008]
무신년 : 1728 영조 4년.- [註 009]
불훼(不毁) : 60세를 이름.- [註 010]
무오년 : 1738 영조 14년.- [註 011]
신묘년 : 1771 영조 47년.- [註 012]
을묘년 : 1735 영조 11년.- [註 013]
기사년 : 1749 영조 25년.- [註 014]
정초(旌招) : 대부(大夫)를 정당한 예로 초빙하는 것. 《맹자(孟子)》 만장장(萬章章)에 "서인(庶人)은 전(旃)으로 부르고, 사(士)는 기(旂)로 부르고, 대부(大夫)는 정(旌)으로 부른다."고 하였음. 정(旌)은 새깃을 깃대 끝에 단 기를 말함.- [註 015]
병인년 : 1746 영조 22년.- [註 016]
을해년 : 1755 영조 31년.- [註 017]
여수(慮囚) : 죄수의 정상을 살핌.- [註 018]
사변(徙邊)의 율(律) : 죄인(罪人)을 그 가족과 함께 변방으로 옮겨 살게 하던 형벌. 조선조 세종 때부터 북변(北邊) 개척을 위한 정책의 하나로 실시되었음.- [註 019]
병신년 : 1776 영조 52년.- [註 020]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註 021]
임인년 : 1722 경종 2년.- [註 022]
을해년 : 1755 영조 31년.- [註 023]
정축년 : 1757 영조 33년.- [註 024]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 [註 025]
무신년 : 1728 영조 4년.- [註 026]
병진년 : 1736 영조 12년.- [註 027]
기사년 : 1749 영조 25년.- [註 028]
○誌文曰:
於戲! 天降大有爲之君, 將致一代之洪業, 則必先試之憂患困戹, 俾有以動心忍性, 增益其德智, 卒乃濟屯涉險, 克底太平萬世之基, 考詣近世, 於我大行大王見之矣。 王姓李, 諱昑, 字光叔, 肅宗大王第二子, 母和敬淑嬪崔氏, 以甲戌九月十三日, 誕生于昌德宮之寶慶堂。 王幼岐嶷, 右腕有文如龍鱗, 肅宗常器重之, 錫軒號曰養性, 以勖其德, 六歲封延礽君。 庚子肅宗昇遐, 淸使來弔, 請見王弟, 賊臣趙泰耉言: "上國弔列國之君, 竝及公子之爲陪臣者, 古無是焉, 陪臣受之, 爲冒嫌。" 逆亂之源自此始。 初景宗大王寢疾無嗣, 擧國憂之, 辛丑正言李廷熽上疏, 請建儲位, 大臣金昌集、李頤命、李健命、趙泰采率諸臣入對, 請定大策, 景宗稟承王大妃, 命諭諸大臣, 冊王爲世弟。 王上疏辭, 景宗答曰: "豫建儲嗣, 所以重宗廟社稷也。 予以不穀無嗣, 又有疾, 委之以儲貳之重, 小心翼翼, 以副國人之望。" 王再上疏固辭, 景宗不許。 已而賊臣柳鳳輝上疏, 盛言: "諸大臣愚弄迫脅, 無人臣禮。" 王上疏辭位。 諸大臣率三司, 啓請鞫鳳輝, 景宗可之。 泰耉上箚言: "鳳輝之心, 出於爲國, 斷斷無他。" 伸救甚力, 請收成命, 景宗由是竄鳳輝, 卒不之問。 後有敎, 大小國事, 令世弟裁斷, 王四上疏乞寢命, 而百官庭請不止, 景宗曰: "左右可乎? 世弟可乎?" 諸大臣聯名上箚, 請遵丁酉代理故事, 稟旨而行, 是夜泰耉與其黨崔錫恒等, 從宣仁門潛入侍, 遂寢代理, 王夙夜踧踖不安。 先是賊臣金一鏡陰結逆閹尙儉, 謀危東宮。 尙儉使宮人石烈、必貞, 連日夜闔淸暉門, 斷東宮問寢之路, 王至不得入, 乃召見賓客、宮僚, 欲出閤以辭儲位。 群臣請誅尙儉等, 大妃諺敎諭大臣曰: "世弟之冊爲儲嗣者, 此未亡人奉先王之遺敎, 而大殿親書爵號以定之, 不幸宮人及宦侍, 交構兩宮, 欺蔽聖聰, 乃敢以悖逆之說, 肆然發於黼扆之前, 其罪當誅, 而卿等亦宜調護王世弟, 以保社稷, 毋負我先王遺敎。" 自是賊臣皆戰怖而莫敢售焉。 明年入學, 虎龍乃上飛變起誣獄, 盡殺建策諸大臣, 下世弟嬪從子德修獄考問狀, 以逼東宮, 方是時禍將不測。 王屛營召見宮僚, 欲上疏痛辨其誣, 而泰耉不少驚動, 佯爲東宮勸景宗, 別加慰安, 錫恒建言凡虎龍辭連東宮者, 皆不書, 終不請正虎龍罪。 王朝暮知及於難內危厲, 若不自全, 而友愛出於天性, 事景宗必盡其誠, 每進見景宗怡怡有喜容, 時時躬臨世弟宮, 左右止之, 景宗叱曰: "寡人欲聽吾弟讀書聲, 爾何沮也?" 賊臣聞之, 不敢復逞其凶。 甲辰八月, 景宗疾大漸, 李光佐以右議政, 不請設侍藥廳, 故國人不知也。 於是賊臣沈維賢, 乃倡爲凶言, 扇動京外。 王卽位, 光佐執政, 擧權益寬、李思晟、鄭思孝, 布置於諸道藩閫, 而戊申三月大亂作。 李麟佐入淸州, 殺帥臣李鳳祥、營將南延年, 使其弟熊輔與鄭希亮, 襲安義、居昌、咸陽, 賊勢張甚, 京師洶洶, 民皆有離思之志, 王端冕不動聲氣, 而麟佐械至闕下, 希亮諸賊之頭, 懸於市, 收益寬、思晟、思孝, 以靖禍亂, 使四方釋兵解甲, 安於耕作, 三百年宗廟社稷得不亡, 於乎盛哉! 是誰之力也? 王天姿英明, 內行純至。 嘗曰: "講學將以躬行, 而其本孝悌是已。" 自幼篤於愛親。 承事太母, 壹意順敬, 八獻寶冊, 如未足以稱其誠養, 以一國如未能以恭其職, 及宅憂, 聖壽已過不毁, 執喪冞勤, 六時祭奠, 衰絰不脫, 深墨之容, 號擗之哀, 感動臣隣, 至窆陪廞衛, 詣陵臨訣, 斯誠千古帝王所未有也。 事景宗殫誠不懈, 人無以間焉。 甲辰大喪, 以天倫之篤, 念繼體之重, 哀毁過制, 不自節抑, 及宣懿王后薨, 一如甲辰。 常以不能久侍寧考爲至痛, 誕日請賀, 輒引程子語牢拒之, 誦《蓼莪》、《陟岵詩》, 悽然泣下, 筵臣意或是適然, 其後語及誕賀, 未嘗不然。 常慕西樓故事, 几杖躋靈壽閣, 命宰臣年七十者, 變品入參, 以志慶焉。 一日進講《禮記》 《曾子問》, 未及一板, 玉音悽咽, 殆不成聲, 仍泣謂講官曰: "皇兄經筵, 止於《曾子問》, 予不忍讀此篇。" 遂廢而不復講。 進宴太母敎曰: "上老老而民興孝, 絜矩之義也。 今小子上壽太母, 豈可無體下之道?" 召庶老于闕庭, 設宴賜帛, 外則令本道賜宴需於子孫, 使之榮親, 凡侍從推恩者, 竝不待歲首, 皆孝之推也。
奉先追遠, 誠禮兩盡。 春秋幸陵, 旁近諸陵, 亦一一親審, 假于廟, 齊明將事, 愀然如復覲耿光, 退候于板位, 立容如峙, 七旬不衰, 群臣彊力者, 皆莫能望。 若有疾不得躬祀, 必自瓣香以傳之, 祗送宮門之外, 終夕整衣坐齋殿, 聞徹祀始就寢。 追上孝宗、顯宗徽號, 又再上肅宗徽號, 肇奉始祖司空, 建祠于全州, 以上祀先公之義祭之。 戊午宗系辨誣之後, 正史頒行於世, 辛卯親覽朱璘、陳建稗史, 又襲謬說, 受誣如前, 聖心不勝冤憤, 遣使申懇, 終得刊去。 追復愼妃位號, 躋祔太廟, 縟儀載擧, 神人胥悅。 嘗覽《大明集禮》, 特敎: "自今太廟親享之時誓戒百官, 如皇朝之禮, 行于正殿, 其無忽。" 長陵遷奉之後, 取孝宗手植栢樹之種於舊陵, 手自播植曰: "蓋欲章寧陵之孝。" 亦可見聖孝之無窮也。 王尤重尊周大義, 式遵列聖家法。 每以寧陵日暮途遠之敎, 耿耿在心, 屢發於筵席, 謁陵之路, 幸南城御西將臺, 敎曰: "予自潛邸時, 以皇祖尊王之義, 聖考繼述之志, 常常追慕, 而登臺自然感愴矣。 追慕之心雖如此, 必繼述皇祖之義, 聖考之志, 然後乃爲追慕之大者耳。" 乙卯二月, 將大閱于露梁, 後十日當親祀皇壇, 筵臣言: "大閱卜日, 皇壇宜命大臣攝祀。" 王曰: "國之大事在祀與戎, 重戎政而輕祀典, 予未之聞也。" 己巳春,以太祖皇帝肇錫國號, 毅宗皇帝命將東援, 恩德不可忘, 乃增奉兩皇帝于壇祀, 敎曰: "今予若不竝祀, 豈可謂繼述之道乎? 此雖義起, 予則曰建天地而不悖, 質聖賢而無疑也。 歲歲虔誠恤祀, 不以親攝有間, 紹先裕後, 可以有辭於百世。" 修明舊典, 如視學大射之禮, 親耕親蠶之儀, 靡不講行, 秩有可觀焉。 終始典學, 上究堯、舜精一之法, 下逮殷、周訓命之文, 專心致知, 尤用工於《小學》、《大學》, 八旬猶成誦, 洞見精義, 無所礙滯, 嘗謂: "予於此受用最多。" 箸《自省編》、《警世問答》, 以詔後昆, 無非格言明訓, 且敍旣往之悔, 諭群臣曰: "予若有過失, 臣下宜以此編規戒之。" 後臨朝, 有動辭氣者, 而群臣無所匡救, 王敎曰, ‘予不能踐《自省編》, 有足愧者, 然群臣不能規諫, 不可無交勉之道。" 仍切責之。 臨御以來, 求賢頗勤, 巖穴之士, 多被旌招。 丙寅徵朴弼周爲吏曹判書, 手諭曰: "昔孝廟盛際, 山林碩德之士, 擢冡宰者多矣, 今小子一擢此任, 其所以扶世敎者不亦多乎?" 別遣承旨, 俾與偕來。 弼周入見, 進袖箚言建儲代理之義, 王敎曰: "後世子孫, 以玆事暴之可也。 自我彰之, 豈不苟乎?" 旋因相臣起鬧去國, 而恩禮不衰。 嶺儒李麟至上疏, 斥文正公 宋時烈、文正公 宋浚吉, 王敎曰: "嗚呼! 先王表章二先正, 昭若日星, 予小子繼述之道, 宜遵先志, 斥邪說而已矣。 今麟至追陳禮說, 誣辱先正, 不遺餘力, 此非特誣辱先正, 其欲背先王之訓。 熒惑王朝者, 不可不痛懲。" 乃投之遠方。 安東諸生毁文正公 金尙憲祠, 王敎曰: "昔淸兵圍南漢時, 文正以義爭之, 及林慶業入錦州, 文正能爲大明上封事, 精忠大節, 炳朗宇宙, 今諸生不有國法, 恣意毁院, 此亂民也。" 命嚴刑遠配。 衛道之嚴, 斥邪之正, 有如此者矣。 御臣僚嚴而寬, 常曰: "日月無私照, 雨露不擇地而下, 所惡朋黨之盛, 禍人家國。 逆順之辨雖嚴, 好惡之偏當祛。" 與二三大臣, 取皇極之義, 蕫率群下, 要使一世之人, 消融保合, 偕之大道。 調劑酸醎, 堅持力行, 不協于極者, 未嘗不錫之以福, 不罹于咎者, 未嘗不導之以德, 一視而同仁, 公聽而竝用, 大小寅協, 咸囿於陶甄之中。 及乙亥逆孽復起, 王曰: "往者天網恢恢, 雖誅渠魁, 黨與猶未盡戮者。 卽脅從罔治之意, 凶徒今又熾盛, 不鋤根柢, 則亂逆必不止。" 乃嚴訊窮覈, 悉治其黨。 于時鄭翬良、李昌壽等, 倡諸僚上疏, 請孥籍泰耉、鳳輝, 追奪錫恒、光佐官爵, 王卽可之, 仍收趙泰億職牒。 太學掌議李寅彬, 率諸生疏, 請祀先正宋時烈、宋浚吉太學, 從享孔子, 王又可之。
玆蓋聖化旁達, 至諴孚格, 不言而信, 不令而行, 不大聲以色, 而綏之斯來, 動之斯和, 朝著始淸, 士趨一於正, 於是乎聖代之治效, 益大闡矣。 愛恤軍民, 一念不弛, 廈氈蔀屋, 不遠而邇, 召見都民衛士, 問其疾苦, 時命近臣, 遍察州郡, 若有匹夫匹婦, 不獲其所, 若恫在己, 爬癢濡枯, 如保嬰兒。 守令之不法者, 必抵之罪, 其有治績最著者, 或賜表裏, 或晉秩而勸之。 黃口之簽, 白骨之徵, 嚴飭方伯郡縣, 一一釐正。 歲惡減田租之半, 或至設賑, 則移粟捐財, 專意拯救。 分遣御史, 諭饑民曰: "國之所依者民, 民之所依者食也, 比年以來, 諸路荐飢, 予心惻焉。 食不甘寢不安, 每思爾顚連之狀, 爲之愍傷。 今之元元, 乃聖考子惠之民, 寡人踐位而不能救民之焚拯民之溺, 是寡人推元元而納之溝中。 玆命御史, 特諭予意, 仍監荒政。 咨爾飢民, 體予此意, 毋離鄕井, 其各安居。" 絲綸懇惻, 群黎感泣。 耽羅則尤致力, 船粟往哺, 至傾一道, 民無捐瘠, 頌溢瀛海。 常軫良役之弊, 民不聊生, 如傷之念, 必欲拯濟。 臨殿臨門, 謀及卿士庶民, 而衆議甲乙, 汔無定見, 廼特敎減夫布一疋, 設廳均役, 收諸路魚鹽隱結之稅充其代。 又念女貢之非古, 一皆蠲除, 德音所被, 室家相慶, 有足以導揚和氣, 迓續景命矣。 城內溝洫湮塞, 水道汎濫, 閭舍多墊沒, 民不奠居, 命設濬川司, 伐石高築, 疏瀹川渠而善導, 里戶不沈, 擧皆安堵, 復置申聞皷, 以通下情, 而四方之幽隱畢達矣。 王燕寢見天光, 則雖暑, 必掩戶而臥; 或値迅雷, 則雖夜, 必正冠而坐。 遇災警惕, 一心對越, 憫旱禱雨, 輒有靈應。 每歲冬親臨慮囚, 必求諸生道, 哀敬折獄, 罪疑者輒多傅輕, 罷徙邊之律, 除非法之刑, 欽恤之意, 藹於辭敎。 視事必勤, 一月六對, 未曾或停, 雖在靜攝時, 若有狀疏之關於民國者, 不淹晷刻, 召接群僚, 諮諏善道, 區劃便宜, 或至曉皷下而罷, 不知爲疲, 庶務叢委, 而裁決無難, 如刃迎縷。 解錢穀文簿之瑣, 一言判剖, 毫忽不爽, 群下懾服, 率職惟謹。 性又儉約, 不喜紛華, 常衣澣濯衣, 朝夕膳羞, 不過數品, 所御別堂, 棟宇甚狹小, 寢室席弊, 有司請改不許。 廷臣前後五上尊號, 王執謙固, 久而後勉從。 專尙質素, 痛祛浮靡, 簡尙方織造, 禁燕貿紋緞, 一國化之。 王春秋彌高, 精力尙强, 自昨年冬, 王體頻有不安節, 及春病日臻, 竟以丙申三月初五日丙子, 禮陟于慶熙宮之集慶堂, 壽八十三, 在位五十二年。 自都中士庶, 以至窮谷遐陬之民, 莫不奔走悲號, 如喪考妣。 王以剛毅濬哲之資, 有廣大博厚之德, 孝悌通于神明, 精誠? 貫于金石而自陞儲位, 備嘗艱險。 凶逆之所以危動者萬端, 王素患難, 行乎患難, 不失其道, 賴太母之聖慈, 景廟之仁愛, 獲免于難, 而群凶稔惡, 暗地醞釀, 竟至滔天之禍。 自辛壬至乙亥, 上下三十餘年, 逆變屢起, 人心震蕩, 王默運神籌, 隨機制變, 陽舒陰慘, 咸得其宜。 克戡大難, 而斂然若無所事, 益勵聖志, 益修聖德, 克儉于家, 克勤于邦, 敬天法祖, 尊賢重道, 崇名節而正風敎, 諴小民而保世臣, 發號施令, 如風動而草偃, 逮至季年, 淫朋自消, 禍亂不作。 會極之治, 至乎從欲, 朝野寧謐, 民生安樂, 歲有屢豐之祥, 人無扎瘥之歎, 至化肸蠁, 駸駸乎三古之盛。 所謂‘殷憂啓聖, 多難固邦’者, 詎不信諸? 臣謹稽古昔舜納于大麓, 疾風雷雨, 不迷而卒有天下, 禹治洪水, 八年於外, 手足腁胝, 而終爲夏祖, 王之大德神功, 巍乎煥乎! 將與舜、禹同其傳而無極, 天之所以玉成我王, 其不在斯歟? 其不在斯歟? 嗚呼希矣! 群臣攷古制, 謹上諡曰, 翼文宣武熙敬顯孝, 廟號曰英宗, 以是年七月二十七日, 葬于健元陵西第二岡亥坐巳向之原, 陵曰元, 殿曰孝明。 王元妃貞聖王后徐氏, 達城府院君 宗悌之女, 丁丑薨, 葬于弘陵。 繼妃金氏, 今王大妃殿下, 鰲興府院君 漢耉之女。 王有二子, 長曰孝章世子, 靖嬪誕生, 初封敬義君, 乙巳冊封世子, 戊申薨。 次曰思悼世子, 暎嬪誕生, 丙辰冊封世子, 己巳代理, 壬午薨。 王復政, 蓋聖人所遇之時然也, 而篤於止慈, 臨壙伸哀, 御書題主, 及世孫聽政, 俯諒情理, 覽疏語戚然起感, 特許記注洗去之請, 王之盛德, 吁亦至矣。 追念孝章世子冢嗣之重, 命思悼世子之子爲嗣, 卽今上殿下, 後又加賜孝章承統之諡, 以示追隆之意。 王疾彌留, 機務多曠, 命文孫代勞, 逆麟執權, 與賊厚, 百計沮遏, 聖斷赫然, 亟命代聽, 群情聳喜, 國勢鞏固。 及宮車晏駕, 而嗣王明聖, 克膺天眷, 誕撫四方, 宗社億萬年無疆之休, 實基於此。 《傳》曰: "至誠如神。" 卽王有焉。 我殿下, 以臣受知先朝, 致位三事, 亦嘗忝叨詞苑, 命製幽宮之誌。 臣竊惟天日之高明, 有非如臣鹵莽所可形摸。 而區區衷悃, 自効在此, 不敢以不能辭, 略綴平日所覩記, 泣血撰次如右。
- 【태백산사고본】 83책 127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539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어문학-문학(文學)
- [註 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