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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38권, 숙종 29년 9월 3일 丙午 3번째기사 1703년 청 강희(康熙) 42년

명빈 박씨의 아들 이헌을 연령군으로 삼다

왕자 이헌(李昍)을 봉하여 연령군(延齡君)으로 삼았다. 헌은 명빈(榠嬪) 박씨(朴氏)가 낳았는데, 낳은 지 겨우 다섯 살 되던 때에 명빈이 졸(卒)하여 아직 장례를 치르기 전이다. 임금이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왕자의 봉작(封爵)은 혹은 여섯 살 혹은 열 살에 하였으나, 지금 명빈의 초상에 이미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있어야만 하니, 비록 장성(長成)하지는 않았지만 아명(兒名)을 방제(旁題)547) 에 쓸 수는 없다. 또 왕자는 몇 달만 지나면 여섯 살이 되니 정사(政事)를 열어 봉작(封爵)케 하라."

하였다. 승정원에서 작주(繳奏)하기를,

"왕자께서 지금 어리시니 다만 봉작만 너무 이른 게 아닙니다. 하물며 어머니의 상중(喪中)에 있고 장례(葬禮)도 행하지 아니했는데, 작호(爵號)를 봉하고 관면(冠冕)을 씌우는 것은 예법(禮法)에 아주 어긋난 일이니, 결코 거행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예관(禮官)에 명하여 전례(典禮)를 널리 상고하여 품달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번에 봉작은 상명(上命)에서 나왔으니, 미안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예관에게 상고하여 아뢰게 하고, 또한 대신에게도 묻도록 하라."

하였다. 조금 후에 또 문의(問議)할 것을 재촉하니, 예조에서 아뢰기를,

"선 정신(先正臣) 정구(鄭逑)의 오복도(五服圖)에 공자복(公子服)에 관한 한 대목이 있는데, ‘제후(諸侯)의 첩자(妾子)가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상복을 입을 때 제후가 생존해 있으면, 연포(練布)548) 로 관을 하고, 마포(麻布)549) 로 옷을 하며, 전포(縓布)550) 로 단을 둘렀다가 장례 후에 벗는다.’라 하였습니다. 이로써 말한다면 왕자가 상복을 벗기 전에 봉작을 의논하는 것은 예법에 어긋난 듯합니다."

하고, 영의정 신완(申琓)은 헌의(獻議)하기를,

"일찍이 《한사(漢史)》를 보니, 황자(皇子)는 혹 강보(襁褓)에 쌓였을 때라도 세워서 제후로 봉한 일이 있었으며, 또 무제(武帝)왕부인(王夫人)의 상(喪)에 그 아들 굉(閎)을 세워 제왕(齊王)을 삼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제왕가(帝王家)의 일은 사서인(士庶人)과는 같지 않았으니, 혹 예의(禮意)가 미비하여 그렇게 된 것인지요? 역대의 국조(國朝)에도 반드시 상고할 만한 예법이 있을 것이나, 갑자기 널리 상고하지 못하겠으니,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 재량하소서."

하였고, 다른 대신들은 모두 헌의하지 않았다. 이에 임금이 판하(判下)하기를,

"우리 나라에선 왕자 봉작의 조만(早晩)은 일정한 규정이 없고, 고사(古史)나 《대명집례(大明集禮)》로써 살펴본다면 어려서 봉작한 일도 있었으니, 승정원에서 너무 이르다고 한 말은 이해할 수 없다. 대저 제왕가의 일은 필부(匹夫)와는 같지 않다. 더욱이 지금 사세(事勢)로 보아 그만둘 수가 없으니, 되풀이하여 생각해도 끝내 미안함을 알지 못하겠다. 하교대로 거행하라."

하였다. 이어 관고(官誥)551) 를 들여보내라 명하고, 후일을 기다려 숙사(肅謝)하겠다 하였다. 처음으로 녹봉(祿俸)을 타서 구례대로 나누어주었다. 영창군(瀛昌君) 이침(李沈)이 왕자가 이미 봉작(封爵)되었다 하여 상소해 종친부(宗親府)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의 소임을 사양하니 윤허하고 이헌(李昍)으로 대신하라 계하(啓下)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삼가 상고해 보건대, 선왕(先王)이 예(禮)를 제정(制定)할 때 큰 방제(防制)를 만들어 두었는데, ‘3년 동안의 통상(通喪)은 귀천의 구별 없이 똑같다 하였다. 우리 동방은 본디 예의의 나라로 일컬어졌는데, 더욱 상례(喪禮)를 소중히 여겨왔다. 그런데 이제 왕자의 어머니가 죽어 미처 장례도 치르기 전에 갑자기 봉작(封爵)을 명하니, 이는 천리(天理)와 인정에 차마 하지 못할 바가 있는 것이다. 저 이제 막 강보를 벗어난 아이에게는 장복(章服)552) 이 애당초 맞지 않으니, 어떻게 차마 상중(喪中)에 입히겠는가? 임금의 교지에 이르기를, ‘상명(上命)에서 나왔으니 그 불가함을 알지 못하겠다.’ 하였지만, 아아! 예법은 지극히 엄하고 풍교(風敎)는 지극히 중한 것이니, 비록 군주의 위엄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멸시하거나 파기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하물며 군주는 예교(禮敎)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것인데, 자신을 바로 하지 못하고 어떻게 아랫사람들을 거느릴 것인가? 선왕의 제도를 파괴하고 예의의 풍속을 망치는 것은 아마도 오늘부터 비롯될 것 같으니, 어찌 천만세의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대신은 능히 광구(匡救)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난 역사를 끌어대어 임금의 뜻에 영합만 하고, 대각(臺閣)에서도 다투며 고집하는 일이 없었으며, 종친부(宗親府)의 당상(堂上)을 환수하시라는 청도 해가 바뀐 뒤에야 나왔으니, 어떻게 행사 전에 미칠 수가 있겠는가? 애석한 일이다."


  • 【태백산사고본】 45책 38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45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역사-사학(史學) / 역사-고사(故事)

  • [註 547]
    방제(旁題) : 신주(神主) 아래의 왼쪽에 쓴 제사를 받드는 사람의 이름.
  • [註 548]
    연포(練布) : 누인 피륙.
  • [註 549]
    마포(麻布) : 삼베.
  • [註 550]
    전포(縓布) : 엷게 붉은 빛깔의 피륙.
  • [註 551]
    관고(官誥) : 4품 이상의 벼슬아치에게 주는 사령서.
  • [註 552]
    장복(章服) : 관복(冠服).

○封王子延齡君, 䄙嬪 朴氏出也。 年纔五歲時, 䄙嬪卒, 未葬。 上傳于政院曰: "王子封爵, 或於六歲, 或於十餘歲爲之, 今䄙嬪之喪, 旣有主祀之人, 則雖未長成, 不可以兒名書於旁題。 且王子差過數月, 當爲六歲, 其令開政封爵。" 政院繳奏: "王子方在幼稚之年, 不但封爵太早, 況喪制在身, 葬禮未行, 封以爵號, 加以冠冕, 大有乖於禮法, 決不可擧行矣。 宜令禮官, 博考典禮以稟。" 答曰: "今玆封爵, 出自上命, 則未知其未安, 而第令禮官考啓, 亦問于大臣。" 俄而又促令問議, 禮曹啓曰: "先正臣鄭逑五服圖, 有公子服一款, 以爲諸候妾子, 爲其母服喪, 諸候在則練冠麻衣縓緣, 旣葬除之。 以此言之, 王子喪制未除之前, 遽議封爵, 似有乖於禮法。" 領議政申琓議: "嘗見史, 皇子或在襁袱, 而立爲諸候, 且武帝王夫人之喪, 使之立其子, 爲齊王。 以此見之, 帝王家事, 與士庶不同, 而抑或禮意未備而然耶? 歷代國朝, 必有可考之禮, 而倉卒未可博考, 伏願上裁。" 他大臣竝不獻議。 上判下曰: "我朝王子封爵之早晩, 無一定之規。 以古史及《大明集禮》觀之, 年幼冊封者有之, 則政院太早之說, 已未可曉, 而大抵帝王家事, 與匹夫不同。 況今事勢, 亦不可已, 反復思惟, 終未覺其未安也。 依下敎擧行。" 仍命官誥內入, 以待後日肅謝。 初受(祿捧)〔祿俸〕 , 依舊式頒給。 瀛昌君 , 以王子旣封爵, 上疏讓宗親府有司堂上之任, 許之, 遂以啓下。

【史臣曰: "謹按, 先王制禮, 以爲大防, 三年通喪, 無貴賤一也。 我東素稱禮義之邦, 尤重喪制, 而今王子母死未葬, 遽命封爵, 此於天理、人情, 有所不忍。 彼纔離襁褓者, 固已不稱於章服, 何忍加之在疚中耶? 上敎若曰: ‘出自上命, 未知其不可。’ 噫! 禮律至嚴, 風敎至重, 雖以人主之威, 亦安得以蔑棄之? 況人君, 以禮敎治國, 不能正己, 何以率下? 其壞先王之制, 敗禮義之俗, 蓋將自今日始, 豈不爲千萬世之譏笑乎? 大臣不惟不能匡救, 攙引前史, 迎合上意, 臺閣亦不能爭執。 宗親堂上還收之請, 始發於經歲之後, 顧何及於事哉? 惜哉。"】


  • 【태백산사고본】 45책 38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45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역사-사학(史學)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