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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실록 1권, 효종 대왕 묘지문[誌文]

효종 대왕 묘지문[誌文]

지문(誌文)

아, 우리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는 총명하고 예지로운 성인(聖人)으로서 비둔(否屯)052) 의 국운을 구제할 웅지를 품고 임어(臨御)한 지 10년 동안 국사에 부지런하고 백성의 일을 돌보는 것을 하루도 혹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해우(海隅)의 창생들이 바야흐로 발꿈치를 들고 고개를 길게 빼어 공을 이루고 다스림이 안정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기해년053) 4월 22일에 병을 앓아 미령한 중에도 오히려 농사의 병통을 안타깝게 여겨 한데 서서 비를 빌었다가 다음달 5월 4일에 창덕궁(昌德宮)의 정침(正寢)에서 승하하니, 향년 41세였다.

아, 하늘이여. 참으로 이른바 창업(創業)하여 반도 이루어놓지 못한 채 중도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 한 소열(漢昭烈)의 경우와 같게 되었다. 아, 하늘이여.

우리 전하께서 부여잡고 호곡하였으나 미칠 수가 없어 대소 신료들과 함께 옛 시법(諡法)을 상고하여 삼가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선문장무 신성현인 대왕(宣文章武神聖顯仁大王)이라고 하고 묘호(廟號)는 효종(孝宗)이라고 하였다. 그런 다음 뭇신하들이 서로 말하기를,

"시(諡)라는 것은 행한 업적의 자취이고 호(號)라는 것은 이룬 공의 표상인 것인데 이제 거의 그렇게 되었다."

하였다. 10월 29일 영릉(寧陵)에 장사지내니, 실로 건원릉(健元陵)의 서쪽 산등성이이다.

우리 전하께서 신(臣) 송시열(宋時烈)이 처음 잠저(潛邸) 때 시강(侍講)을 시작하여 말년에 이르러 다시 유악(帷幄)에서 모셨다고 하여 드디어 유궁(幽宮)의 지문(誌文)을 신에게 지으라고 명하였다. 신은 감히 못하겠다고 사양하였으나 기어이 지으라고 명하였으므로 드디어 피눈물을 흘리면서 머리 조아려 재배하고 지문을 지어 올린다.

아, 하늘이 굴신(屈伸)하는 기수(氣數)에 핍박되어 큰 난리를 발생케 했을 때에는 반드시 또 대성인(大聖人)을 내어 그 시대를 맡게 하는 것인데, 그에게 대임(大任)을 맡기려면 또 반드시 궁액(窮厄)을 몸소 겪게 하여 그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이 탄생하던 날 밤에는 채기(彩氣)가 어려 상서로움을 보였다. 태어나서 9세가 되자 정묘 호란을 당하였고, 17세에는 모대비(母大妃)가 돌아가셨는데 어찌나 슬퍼했던지 대궐 안의 사람들이 차마 들을 수가 없었고, 18세에는 병자 호란을 만나 강화(江華)로 들어갔고, 19세이던 정축년054) 정월에 남한 산성 아래에서 인조(仁祖)를 뵙고는 그 길로 심양(瀋陽)에 볼모로 갔다.

조금 뒤에는 서쪽으로 몽고(蒙古)의 경계에 갔고, 남쪽으로 산해관(山海關)에 갔으며, 또 더 남쪽으로 금주위(錦州衛)의 송산보(松山堡)에 이르러서는 제장(諸將)들이 패배하여 항복하는 것을 보았다. 또 동쪽으로 철령위(鐵嶺衛)·개원위(開元衛)에 갔고, 또 동북쪽으로 여해부(如奚部)에 이르러서는 한 길이 넘는 두꺼운 얼음을 깨어 그 물을 마시기도 하였다. 26세에 청(淸)나라에 있은 지 8년 만에 비로소 동쪽으로 돌아왔으나 몇 달이 못 되어 도로 연산(燕山)에 들어가서 경읍(京邑)이 잿더미가 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27세이던 을유년055) 연산에서 귀국했는데 전후 20여 년 동안 하늘이 옥성(玉成)시키기 위해 겪게 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그 후 드디어 차적(次適)에서 저위(儲位)에 오르게 되었고, 무감(撫監)을 거쳐 지존(至尊)에 올랐다. 왕은 하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알고 잠시도 감히 안일함을 꾀하지 않았음은 물론 오직 덕업을 연마하고 정사를 확립시키기 위해 하루도 한가한 날이 없었다. 덕을 연마한 일로 말하면, 학문으로 마음을 밝히고 행동으로 실천하였다. 그러므로 동궁으로 있을 적에 《서전》의 무일편(無逸篇)과 《시전》의 빈풍(豳風) 7월장(七月章) 및 옛날 잠계(箴戒)에 관계된 말들을 써서 스스로 경계하였다. 한번은 궁료들에게 한(漢)나라의 문제(文帝)무제(武帝) 가운데 누가 더 훌륭한가를 물은 적이 있었는데 모두들 문제가 훌륭하다고 대답하자, 왕이 이르기를,

"무제는 평성(平城)에서의 곤욕스러웠던 일을 잊지 않았으니, 무제가 더 훌륭하다."

하였다. 즉위하고 나서는 하루에 세 번씩 경연에 나아갔는데, 한 번은 이르기를,

"나의 기질(氣質)은 치우친 점이 많은데 오직 학문을 통해서만 이를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고요히 있을 때에는 늘 경(敬)을 지니고 침묵하고 있을 때 늘 신(信)이 깃들게 하는 것이 최선의 요법(要法)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가장 절실한 공부는 경(敬)으로 마음을 함양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그렇게 하면 본원이 맑아지고 인욕이 다스려질 것이다. 그러나 또 꼭 의(義)로써 행동을 방정하게 한 뒤에야 동정이 서로 밑바탕이 되고 체용(體用)도 겸하여 갖추어지게 될 것이다. 경의(敬義)에 대한 이야기가 공자에게서 시작되기는 했지만 ·가 말했던 정일(精一)이 바로 그 이치인 것이고, 또 정일에 대한 이야기가 ·에서 시작되기는 했지만 그 이전의 성인(聖人)들도 반드시 그것을 서로 전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합(閤)을 이름하여 양심(養心)이라고 하고 재(齋)를 이름하여 경의(敬義)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사심(私心)을 퇴치시키려면 모름지기 치우친 성품부터 다스려야 하는데 나의 성품은 화를 잘 내는 데 있으므로 화가 났을 적에 처리한 일은 번번이 사리에 맞지 않았다. 근래에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는데 꼭 그때 해야 할 일이 아니면 밤중까지 기다려 화가 풀린 뒤에 처리하였더니, 자못 과오가 적어짐을 느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욕심이 매우 무서운 것이다. 내가 다시는 술을 즐겨 하지 않겠다고 말하였지만 정자(程子) 같은 대현(大賢)도 사냥을 좋아하는 마음이 다시 싹튼다고 했으니, 마음을 잠시인들 소홀히 다룰 수 있겠는가. 심술(心術)의 은미한 곳을 가장 철저히 살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언제나 백성들에게 관계되는 일이 있을 적이면 백성들이 나에게 고마움을 느꼈으면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으니, 이것으로 보건대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하는 것이 참으로 성학(聖學)의 요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였으니, 이것만 보더라도 왕이 정밀하게 공부에 힘썼음을 알 수 있다. 또 이르기를,

"우(禹)임금은 수많은 격전을 치른 끝에 창업(創業)한 사람들보다 훨씬 수고하였다. 그러나 우임금은 천하를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추호도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성인(聖人)이 된 이유인 것이다."

하였으니, 참으로 조예가 깊어 마음속으로 깨달은 것이 있어서 한 말이지 우연한 추측만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왕은 영예(英睿)스러움이 남보다 뛰어나서 성동(成童)이 되자마자 《서전》을 읽었는데, 기형(璣衡)·율려(律呂)056) 의 법 같은 내용을 대나무를 쪼개듯이 거침없이 풀었다. 기삼백(朞三百) 같은 것은 노사(老師)·숙유(宿儒)라 할지라도 풀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인데 왕은 한 번 보고 막히는 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아무리 정미(精微)하고 복잡한 대목이라도 깊이 생각하지 않고도 시원스럽게 통달하여 매우 고명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실로 후세의 인주(人主)로서는 쉽게 따라갈 수 없는 것이었다. 또 일찍이 이르기를,

"학문을 강하는 것은 이치를 밝히기 위한 것이고 이치를 밝히는 것은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서이며 실천의 실상은 무엇보다도 효제(孝悌)가 제일인 것이다. 요(堯) 순(舜)의 도(道)도 효제뿐이었다."

하였다. 그러므로 양전(兩殿)을 섬김에 있어 순경(順敬)을 극진히 갖추었다. 어려서부터 모시고 곁에 있으면서는 기물(器物)을 반드시 정리하였고 철따라 나는 과일이나 음식을 먼저 입에 넣는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양전께서 항상 이르기를

"우리 집의 효자이다."

하였다. 왕이 연경과 심양에 있을 때는 사모하는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여 말할 때면 눈물을 흘렸다.

인조(仁祖)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흘려 넣었고 상(喪)을 당했을 때는 애절한 곡읍과 슬픈 안색이 신하들을 감동시켰다. 인산(因山) 때에는 능에까지 나아가 영결(永訣)하려 했는데 여러 신하들이 너무 수척해졌다 하여 그만둘 것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어제 교외에서 영여(靈輿)를 우러러 뵙고 전우(殿宇)로 돌아왔더니 적막하고 쓸쓸하여 다시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지금 이 계사(啓辭)를 보니 슬픈 마음이 실로 천지처럼 끝이 없다."

하였다. 혼전(魂殿)의 작은 제사라도 심한 병이 아니면 언제나 직접 행하였고 산릉에 행행하여 오르내리며 행사하면서도 곡성이 잠시도 그치지 않았다.

상(喪)을 마치자 여러 신하들이 전례대로 진하할 것을 청하였으나 한사코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일찍이 《시전》의 육아편을 강하는 자리에서는 목이 메어 눈물을 흘리면서 이르기를,

"시(詩)는 성정에 근본한 것이라 하더니 사실이구나. 더구나 선조의 뜻을 펴게 하지 못하여 원한과 슬픔이 하늘에 사무친 나같은 사람이야 말해 뭐하겠는가."

하였다. 연신들은 지금 막 상을 마쳤으니 아직 그럴 때라고 여겼었으나 그 뒤로도 말이 이에 언급되면 언제나 그러지 않는 때가 없었으니, 왕이야말로 죽을 때까지 부모를 사모했던 분이라고 할 수 있다.

계대비(繼大妃)가 자주 병을 앓았는데 임금은 음식을 잘 봉양하면서 마음을 기쁘게 하여 성심 성의를 다하였다. 거처하는 곳이 비좁다 하여 왕이 몸소 집터를 정하여 별전(別殿)을 짓고 전호(殿號)를 만수(萬壽)춘휘(春暉)라고 하였다. 일찍이 거기서 상수(上壽)할 적에는 예(禮)가 엄숙하면서도 사랑이 넘쳤으며 차림은 검소하였으나 의식은 부족함이 없었다. 의식이 끝난 뒤에는 나라 안의 나이 많은 사람들을 존문(存問)하고 쌀과 고기를 내림으로써 은혜를 널리 미루는 뜻을 나타내었다. 이에 계대비가 일찍이 이르기를

"왕의 성효(誠孝)를 무엇으로 보답할 길이 없다."

하였다.

소현 세자(昭顯世子)와는 청나라에 볼모로 있으면서 어려운 역경을 겪었는데 그런 가운데에서도 우애로운 정이 더욱 지극하였다. 의견이 서로 엇갈린 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성의로 서로 조화를 이루었다. 청나라 사람들이 소현 세자를 종군(從軍)시키려 할 때마다 왕 자신이 대신 갈 것을 청했는데 말이 너무도 간절하고 정성스러웠으므로 청나라 사람들이 감복되어 중지하였다.

소현 세자의 아들들이 인조(仁祖) 때 그 어미의 사건에 연루되어 모두 폐해져 섬에 안치되었다. 왕이 그들을 불쌍히 여겨 모두 사면시켜 돌아오게 하였고, 뒤에 그 아들들을 봉작(封爵)하여 주고 딸들은 시집보냈는데, 사랑하고 돌봄에 있어 여러 공주들과 견주어 조금도 후하거나 박한 차이가 없었다.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소현과 함께 험난한 이역 땅에서 눈 서리를 맞으면서도 좌우로 서로 이끌어주면서 잠시도 떨어진 적이 없었는데,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어 사람의 일이 속절없이 저렇게 되었으니 항상 슬픈 마음으로 그를 생각하게 된다. 지금 그의 자식들을 나의 자식과 달리 본다면 죽은 이의 입장에서 어찌 유감이 없겠는가."

하였다. 언제나 봄 가을이면 각릉(各陵)에 참알(參謁)하였다. 효릉(孝陵)에 행행할 때 소현세자의 묘가 그 곁에 있었는데 왕이 이르기를,

"나의 지난번 꿈에, 소현이 나를 보고서 살았을 때처럼 반겼는데 지금의 꿈에는 나의 손을 잡고 슬퍼하였다. 꿈을 깨고 나서는 슬픔 감회를 형용하기 어려웠다."

하고는, 마침내 능에 참배한 뒤 그의 묘를 살피고 돌아왔다.

동모제(同母帝)인 인평 대군 이요를 매우 사랑하여 어렸을 때는 잠잘 적에 반드시 이불을 함께 덮었다. 그 뒤로도 자주 접견하였는데 밤이 되기 전에는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어떤 자가 위어(危語)로 가 역모에 가담했다고 하였는데 왕은 노하여 오히려 그 사람을 장살(杖殺)하였다. 가 병이 나자 왕이 가서 보았고,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는 채비를 갖추지도 않은 채 달려가 보았으나 이미 늦었다. 왕은 비통해 하는 것이 너무 심했는데 염(斂)할 때 도열(桃茢)057) 도 물리친 채 지켜보았다.

서제(庶第)인 이징(李澂)·이숙(李潚)과 그의 어미·누이가 전부터 나쁜 짓을 해 오다가 급기야는 김자점(金自點)과 역모를 꾀하였으므로 유사가 은의(恩義)를 끊고 법에 의거하여 처리할 것을 청하니, 왕은 그 사건이 계대비와 관계된 일이라 하여 그의 어미만을 사사(賜死)하고 자녀들은 외방으로 내쫓기만 하고 의식(衣食)의 공급은 끊지 않았다. 뒤에는 또 그들이 무로(霧露)에 손상되어 죽게 될까 염려하여 다시 돌아오게 하였다. ·이 궁궐에 들어와 왕을 뵈니 왕은 기뻐서 울먹이며 말을 하였다. 가 죽은 뒤에 임금은 형제가 더욱 적어진 것을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 신하들에게 하유하여 그들의 관작(官爵)을 모두 회복시켰다.

왕의 존속으로 이보(李俌)인조(仁祖)의 아우이고 이늑(李玏)·이영(李瑛)선조(宣祖)의 아들인데 왕은 사랑과 공경을 극진히 하여 죽을 때까지 변치 않았다. 그리고 먼 친속에 대해서도 은례(恩禮)가 두루 미쳤으므로 누구도 원한을 사거나 불만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전하께서 점점 자라나자 왕은 매우 사랑하였으나 가르침에 있어서는 반드시 법도에 의거하였으므로 이것저것 진기한 물건들을 들여와 덕성을 해치는 일이 조금도 없었으니, 이는 임금이 덕을 연마한 실상을 자신에게서 시작하여 집안에 행한 것이다.

왕의 정치의 근본 요체는 사람을 성심으로 임용하고 백성들을 인애(仁愛)로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처음 즉위하자마자 맨 먼저 김상헌(金尙憲)·김집(金集)을 기용했는데, 김집은 당시 산림(山林)의 숙덕(宿德)이었고 김상헌은 대의(大義)를 자신의 임무로 삼고 있었다. 그가 청나라에 잡혀 가 있을 때 간사한 무리들이 이를 매개로 농간을 부려 예측할 수 없는 화가 닥치게 되었다. 그때 왕이 임기 응변으로 잘 처리하여 일이 풀렸는데, 그 뒤로도 계속 그를 사랑하여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숨어 있는 선비들을 모두 예를 갖추어 맞아들였다. 언젠가 하문하기를,

"송 신종(宋神宗)이 인재가 없음을 한탄하고서도 정호(程顥)정이(程頣)를 기용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연신(筵臣)이 대답하기를,

"정자(程子)가 치도(治道)에 대해 극진히 아뢴 적이 있었는데 그때 신종이 이르기를 ‘그것은 요(堯) 순(舜)이나 하던 일이다. 짐이 어떻게 감히 감당할 수 있겠는가.’ 했습니다. 그의 의지가 그러했으니 기용하고 싶었어도 될 수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또 일찍이 주자(朱子)에 대해 논한 일이 있었는데 연신이 아뢰기를,

"주자는 송(宋)나라가 남도(南渡)한 때에 태어나 뜻을 나라를 잘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려는 데에 두었으므로 군주로 하여금 마음을 바르게 하여 자신의 사욕을 극복하고 백성의 힘을 배양하고 군대를 양성하는 일 외에는 다른 어떤 일도 그 사이에 끼이지 못하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송나라에서는 정자·주자가 있었는데도 그들을 기용하지 못하고 말았다. 지금도 그 도(道)를 미루어 행하지 못한다면 또 다시 뒷사람에게 한스러움을 남기는 일이 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또 이르기를,

"군신(君臣) 사이는 서로 믿기가 어려운 것인데 더욱 어려운 것은 장수를 임용하는 일이다. 한신(韓信)이 ‘한왕(漢王)058) 은 말하면 들어주고 계책을 세우면 따라주었기 때문에 죽어도 마음을 바꿀 수 없다.’ 했는데, 임금이 참으로 신하를 믿고 임용한다면 신하로서 떠나고 싶어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송 고종(宋高宗)종택(宗澤)·이강(李綱)·한세충(韓世忠)·악비(岳飛) 같은 이들이 있었는데도 그들을 쓰지 못하고 강남(江南)에 움츠리고 있으면서 한 발자욱도 나오지 못했던 일을 생각할 때마다 서글픈 마음이 들며 탄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였다.

왕은 신채(神彩)가 근엄하고 굳세어 사람들이 감히 우러러 보지 못할 정도였으나 신하들을 대할 때마다 언소(言笑)가 평범하고 화기가 있었으며 마음을 열고 성의를 보여 간격이 없이 환히 통하게 하였으므로 사람마다 품고 있는 회포를 끝까지 개진할 수 있었다. 그 말이 정직하면 상을 내렸고 인품이 쓸 만하면 자격에 구애없이 발탁하여 기용하였으며 이미 죽은 사람이라도 칭찬하고 총애하여 마지 않았다. 충현(忠賢)의 자손은 특별히 거두어 녹용(錄用)하고 유선(儒先)들의 사묘에는 모두 편액(扁額)을 내렸다.

유사가 재정이 궁할 것을 근심하여 조신(朝臣)들의 녹봉을 삭감할 것을 청해도 이를 허락하지 않고 이르기를

"충신(忠信)스런 신하에게 늠록을 많이 주는 것은 선비를 권면하기 위한 것이니, 차라리 어공(御供)을 감하는 것이 낫다."

하였다. 민생을 사랑하고 보살핌은 항상 미처 못할 듯이 하였고 흉년이 들면 세금을 면제하거나 곡식을 푸는 것을 조금도 인색하게 하지 않았다. 자주 어사(御史)를 내보내어 그들의 질고(疾苦)를 조사하게 하고 어사가 돌아오면 직접 접견하여 정상을 하문했는데 혹 굶주려 죽은 정황에 대해 아뢰면 임금은 측은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이르기를,

"차마 못들을 말이다.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는가."

하고는, 곧 상선(常膳)을 감하게 하였다. 전염병이 유행하여 백성들이 죽게 되면 내약(內藥)을 가지고 가서 구제하게 하였으며, 수령은 반드시 인견하여 광범위하게 말을 받아들이고 격려하였다. 그리고 간혹 별로 드러나지 않은 사람을 발탁하여 높은 벼슬을 제수하고 이르기를,

"일찍이 아무 고을을 다스릴 때 있었던 그대의 치적을 가상히 여겨서이다."

하였다. 가뭄이 들면 반드시 직접 비를 빌었는데 빌기만 하면 그 시각이 넘기 전에 곧 효험이 있었다. 백성이 싫어하는 일을 혁파함에 있어서는 배고픈 이가 음식을 찾고 목마른 이가 물을 찾듯이 하였다. 군대를 충실히 하는 데 역점을 두었으나 노약자는 면제시켰으며, 관작(官爵)을 아꼈으나 노인들은 참여시켰다.

형벌 쓰는 것에 더욱 신중을 기하였는데 김자점의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때는 그가 주고받은 서신을 모두 불태워버리게 하였다. 몹시 춥고 더울 때에는 언제나 반드시 갇혀 있는 죄수에 대해 하문하고 그 가운데 작은 범죄는 소방(疎放)시켰다. 또 근신(近臣)을 시켜 살피게 하여 죄수 가운데 옷이 없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유사에게 옷을 주도록 명하고 이어 이르기를,

"죄에는 그에 해당되는 일정한 벌이 있는 것인데 얼어 죽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호민(湖民)이 무고(誣告)당하여 연루된 자가 매우 많았는데 왕이 원사(爰辭)059) 를 한 번 보고는 즉시 이들을 석방하고 옷과 양식까지 주었으므로 모두들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갔다. 《서전》의 여형편(呂刑篇)에 있는 애경(哀敬)060) 이라는 글을 읽고 한숨을 쉬며 탄식하고는 형관(刑官)을 불러 타이르기를,

"마음을 다해 치죄(治罪)하되 잘못 들어온 사람을 좌죄(坐罪)시킬 경우에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 때문에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화가 백성들에게 흠뻑 배게 되었다. 그러나 죄가 있는 자는 전적으로 법에 의거하여 결단할 뿐 자신의 마음대로 경중을 두지 않았으며, 아무리 외세(外勢)를 끼고 내분을 일삼아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존재일지라도 가차없이 죽였다.

학제(學制)를 손질하여 준수한 학자들의 앞길을 열어주었고 백성들을 깨우치는 일정한 제도가 없음을 염려한 나머지 《삼강행실(三綱行實)》《경민편(警民篇)》 등을 인쇄하여 중외에 반포하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제왕이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에 있어 큰 근본은 이미 다 확립되어 있었으므로 장차 그 동안 폐기되고 잘못된 것들을 수거(修擧)하고 기강을 바로잡음으로써 세도(世道)를 만회시키고 나아가서는 하고 싶은 성지(聖志)를 성취해 보려 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아, 문왕(文王) 같은 덕을 지니고 1백 년을 살다 죽었어도 오히려 이 세상에 그 덕이 고루 배지 못하게 했는데, 더구나 지금은 형세의 어려움이 은·주 때와는 만 배나 차이가 나는데야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게다가 하늘에서 받은 수명마저 문왕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으니, 아, 슬픈 일이다.

승하(昇遐)하던 날 도성의 사서(士庶)들은 목 메이게 통곡하며 발을 굴렀고 궁벽한 시골의 백성들도 모두들

"우리는 이제 어쩌면 좋단 말인가."

하며, 슬피 울었다. 아, 이것이 바로 슬퍼하게 하지 않았어도 백성이 스스로 슬퍼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왕의 휘(諱)는 호(淏)이고 자(字)는 정연(靜淵)인데 인조(仁祖)의 아들이다. 모비(母妃) 한씨(韓氏)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딸이다. 신종 황제(神宗皇帝) 말년부터 세상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는데 우리 나라도 바야흐로 윤상(淪喪)되었다가 천명이 다시 인조에게로 돌아왔다. 왕은 만력(萬曆) 기미년061) 5월 22일 탄생하였고, 소현 세자는 왕의 동모형(同母兄)이다. 소현 세자가 죽고 나서 아들이 있었지만 인조는 왕에게 성덕(聖德)이 있다 하여 후사(後嗣)로 삼았다. 비(妃)는 고(故) 신풍 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의 딸로 1남을 낳았는데 그 분이 바로 우리 전하이다. 다섯 명의 공주(公主)를 두었는데 홍득기(洪得箕)·심익현(沈益顯)·정제현(鄭齊賢)·정재륜(鄭載崙)·원몽린(元夢麟)이 부마이다. 한 명의 옹주는 어리다. 여러 공주(公主)들은 하가(下嫁)하여 시부모를 섬김에 있어 며느리로서의 도리를 극진히 하고 있으니, 여기에서도 왕화(王化)의 일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아, 삼대(三代) 이후로는 정치가 학문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았으므로 도술(道術)이 천하를 여러 갈래로 나누어 놓았다. 그러나 왕은 겸허한 자세로 자신을 연마하고 나아가서 나라와 집안을 다스렸기 때문에 점차 왕도(王道)의 순수함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삼대 이후로는 공리(功利)만을 숭상했으므로 천리(天理)와 민이(民彛)에 부끄러운 점이 많았는데, 왕만은 의(誼)를 바루고 도(道)를 밝혔을 뿐 계교(計較)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성지(聖志)가 안정되어 청천 백일과도 같이 우뚝하였다. 자신의 잘못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백성이 적은 것을 탓하지 않았으며 오직 자신의 마음을 극진히 하고 자신이 할 일을 삼가면서 항상 갈 길은 먼데 해는 저물어간다는 탄식을 하였다. 또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옛날에 ‘마음을 같이 하는 신하가 한둘만 되어도 도움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했는데 지금은 너나없이 덩달아 눈앞의 이익만을 꾀하고 있으니, 나와 함께 일을 할 사람이 과연 누구이겠는가."

하였다. 그러므로 간혹 형남(荊南)062) 을 유악(帷幄)에서 면대(面對)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 살펴보면 침착한 기략과 신묘한 추리가 사람마다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송유(宋儒)의 글을 더욱 좋아했는데 심학(心學)에 관한 설(說)을 올린 사람이 있자 즉석에서 연신(筵臣)에게 주어 이를 정정하게 하고는 이르기를,

"이것이 정(程) 주(朱)의 학설과 혹 어긋난 점은 없는가?"

하였다. 천리(天理)를 어기지 않고 성학(聖學)을 밝히고 왕법(王法)을 바로 세우고 대의(大義)를 신장시킴으로써 춘추(春秋) 대일통(大一統)의 서업(緖業)과 성고(聖考)의 도심(道心)에 대한 전법을 계승하여 하늘이 성인(聖人)을 내신 뜻을 저버리지 않았던 것이야말로 천지에 세워놓아도 어긋남이 없고 귀신에게 질정하여 보아도 의심될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세상에는 덕을 아는 이가 없는 탓으로 그것을 노래와 시로 표현하고 또 질박한 음악으로 정성을 들임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듣고 훌륭했던 덕용(德容)을 다시 보는 듯한 느낌을 야기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경전에 기록된 비슷한 점들을 들어 이 좁은 소견으로 살펴보면, 문무(文武)를 겸비한 것은 요(堯)임금을 본받았고, 효제(孝悌)의 도리를 극진히 한 것은 순(舜)임금을 본받았고, 부지런하고 검소하고 맛있는 술을 싫어한 것은 우(禹)임금을 본받았고, 성색(聲色)을 멀리하고 허물 고치는 것을 인색하게 하지 않은 것은 탕(湯)임금을 본받았고, 백성을 상처난 사람처럼 돌보고 자봉(自奉)은 박하게 하면서 백성을 편안케 했던 것은 문왕(文王)을 본받았고, 위무(威武)를 발양(發揚)하여 행여 일에 미치지 못할까 염려한 것은 무왕(武王)을 본받았다. 한(漢)나라 이후로 말하면, 넓고 큰 도량은 한 고조(漢高祖)와 같았고 중후하고 강직하면서도 부드러웠던 것은 광무제(光武帝)와 같았으며 신의(信義)가 환히 드러난 것은 한 소열(漢昭烈)과 같았으며 화살대와 쇠막대처럼 곧게 자나깨나 준걸들을 모아들였지만 뜻만 지닌 채 펴보지 못했던 것은 애석하게도 송 효종(宋孝宗)과 같았는데 그것은 시세가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왕이 연경(燕京)에 있을 때 갑자기 오색 빛이 방안에 꽉 차더니 신령스러운 거북이 나타났었다. 옛날 우임금이 홍수(洪水)를 다스리고 나자 하늘이 우임금에게 거북을 내렸다고 한 것으로 보아 왕이 그 지업(志業)을 성취했더라면 아마도 공이 우임금에 못지 않았을 것인데, 하늘은 어찌하여 그 징조는 보여주고도 수명(壽命)은 주지 아니하여 이 세상 만세토록 임금이 남긴 덕화를 영원히 입게 하지 못하게 한 것인가. 난(亂)은 다스릴 수 있고 변(變)은 바로잡을 수 있고 양(陽)은 끝내 없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말했던가. 비풍(匪風)·하천(下泉)이 결국 변풍(變風)의 끝맺음을 한 그 뜻이 어디 있는 것인가. 그것은 이른바 하늘도 굴신(屈伸)하는 기수(氣數)는 이길 수가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그렇기는 하지만 황극을 제자리에 세우고 회색(晦塞)된 인륜을 밝힌 그 정대하고도 굉원한 규모가 하늘에 빛나는 별과 태양처럼 우리 성자(聖子)에게 물려짐으로써 억만 년 동안 이어갈 끝없는 대업의 터전을 다져 놓았으니, 천지를 잘 다스려 만세 뒤에까지도 영원히 힘입게 한 우임금과 공덕이 같다고 할 수 있다. 아, 그렇다면 그 거북은 참으로 앎이 있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아, 이것이면 신자(臣子)들의 한없는 슬픔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겠는가. 신은 외람된 지우(知遇)를 받고서도 충성을 바쳐 따라 죽지 못하고 차마 문자(文字)로 사실을 기록하는 글을 지으려니 건곤(乾坤)처럼 크고 일월(日月)처럼 밝은 그 덕을 비슷하게나마 그려 낸다는 것이 어려운 일일 뿐만 아니라 내용을 엮는 과정에서 수식만 하고 실상이 없게 한다면 그 죄가 화원(華元)·악거(惡擧)063) 보다 더한 점이 있게 될 것이기에 차라리 질박함을 택하여 감히 지나친 표현은 하지 않음으로써 옛날 입만 나불거리던 자들을 멀리하시던 성덕(聖德)을 널리 드날리게 하였다. 【숭록 대부 의정부 좌참찬 신 송시열(宋時烈)이 지어 올렸다.】


  • 【태백산사고본】 22책 1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194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어문학-문학(文學)

  • [註 052]
    비둔(否屯) : 《역경(易經)》의 비괘(否卦)와 둔괘(屯卦)를 가리킨 것으로, 비는 상하가 꽉 막혀 서로 통하지 못하는 것이고, 둔은 가능성은 있으나 침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형용한 말인데, 어려운 시기를 가리키는 말임.
  • [註 053]
    기해년 : 1659 효종 10년.
  • [註 054]
    정축년 : 1637 인조 15년.
  • [註 055]
    을유년 : 1645 인조 23년.
  • [註 056]
    기형(璣衡)·율려(律呂) : 기형은 《서경》 순전(舜典)에 나오는 천체(天體)를 관측하는 기구인데 지금의 혼천의(渾天儀)와 같은 것임. 율려는 육률(六律)과 육려(六呂)를 말하는 것으로 음률(音律)의 청탁과 고저를 규정하고 나아가 도량형(度量衡)을 만드는 기본이 되는 것임.
  • [註 057]
    도열(桃茢) : 액풀이를 위하여 복숭아 나무 가지로 만든 비임. 옛날 임금이 신하의 상(喪)에 임어할 때는 이 비로 관(棺)을 쓸어 액막이를 하였음.
  • [註 058]
    한왕(漢王) : 유방(劉邦).
  • [註 059]
    원사(爰辭) : 공사(供辭).
  • [註 060]
    애경(哀敬) : 옥사(獄事)를 결단하는 사람은 반드시 죄수를 불쌍히 여겨 외경(畏敬)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는 뜻임.
  • [註 061]
    기미년 : 1619 광해군 11년.
  • [註 062]
    형남(荊南) : 인재(人材).
  • [註 063]
    화원(華元)·악거(惡擧) : 춘추 시대 송 문공(宋文公)의 신하들임. 이들은 문공의 장례(葬禮)를 지나치게 후하게 치렀다 하여 신하답지 못하다는 비평을 받았다.

○誌文:

嗚呼。 我大行大王, 以聰明睿智之聖, 有傾否濟屯之志, 臨御十年, 克勤克恤, 未嘗一日或怠。 海隅倉生, 方且岐踵延頸, 以望功成治定之日。 乃以己亥四月二十二日辛亥, 有疾不豫, 猶愍稼穡之病, 露立禱雨。 越五月初四日甲子, 禮陟于昌德宮之正寢, 壽四十一。 嗚呼! 天乎, 眞所謂創業未半, 中道崩殂者, 嗚呼! 天乎。 我殿下攀號莫及, 與小大臣, 考古諡法, 謹上尊號曰: "宣文章武神聖顯仁大王, 廟號孝宗。" 群臣相與言曰: "諡者行之跡, 號者功之表, 今其庶矣乎"。 將以十月二十九日丙辰, 葬于寧陵, 實健元陵之西麓也。 我殿下, 以臣時烈, 自始侍講于初潛, 曁末年復侍帷幄, 遂以幽宮之誌命臣。 臣辭謝不敢, 不獲命, 則遂泣血拜手稽首而獻文曰: 嗚呼! 天之迫於氣數屈伸, 而生大亂, 亦生大聖人, 以擬其時, 將降大任於是人也, 亦必窮厄其身, 以增益之。 故王誕降之夕, 彩氣呈瑞。 旣生九歲, 而遭丁卯之難, 十七歲而母大妃薨, 哭泣悲哀, 庭中不忍聞, 十八歲而遭丙子之難, 入于江華, 十九歲而丁丑正月, 得朝 仁祖南漢之城下, 仍質乎瀋陽。 旣而西至于蒙古界, 南至于山海關, 又南至于錦州衛 松山堡, 見諸將敗降。 又東至于鐵嶺衛 開元衛, 又東北至如奚部, 鑿玄氷丈餘, 而飮其水。 二十六歲, 而居北八年, 始得東歸, 未數月, 旋入燕山, 見京邑灰燼。 二十七歲乙酉, 自燕山歸國, 前後二十餘年之間, 天之憂戚玉成者, 靡所不至。 遂由次適, 而升儲位, 由撫監, 而履至尊。 王心知天意之有在, 不敢自暇逸, 惟修德立政, 日不暇給。 其修德曰: "學以明其心, 行以踐其實也。" 故在東宮, 《書》 《無逸豳雅》及古昔箴戒之語以自警。 嘗問宮僚, 孰勝, 皆曰文帝勝, 王曰: "武帝不忘平城之憂, 武帝勝。’ 及卽位, 日三御經筵, 嘗曰: "予氣質多偏, 惟學可以變化。 然靜而常敬, 默而常信, 此最要法"。 又曰: "緊切工夫, 無如敬以養心, 如是則本源澄澈, 人慾退聽矣。 然亦須義以方外, 然後動靜相資, 體用兼該也。 敬義之說, 雖始於孔子, 而所謂精一者, 已是此理, 精一之說, 雖始於, 而前此聖人, 亦必以是相傳矣"。 故名其閤曰養心, 齋曰敬義。 又曰: "克己須從性偏處下功, 予性多在於怒, 怒時處事, 每不中理。 近得一術, 事有不可必, 待中夜怒弛而處之, 頗覺其寡過矣"。 又曰: "慾之潛隱者, 甚可畏。 予雖自謂不復喜酒, 然程子大賢, 猶復有喜獵之心, 心其可少忽哉。 且心術隱微處, 最可深察。 予每有及民之事, 不無使民德我之意, 是知無所爲而爲者, 眞聖學之要也"。 此可見王用功之精密也。 又曰: "之勤勞, 甚於百戰創業者。 然絶無私天下之心, 此所以爲聖人也。" 此實深造默契之言, 非懸度揣模之可及也。 蓋王英睿絶倫, 甫成童, 講《尙書》, 如璣衡律呂之法, 曉解如破竹。 至如朞三百, 雖老師宿儒, 猶病其難通, 王一見無復礙滯。 自是, 於精微肯綮處, 不甚思索, 而灑然通透, 克至于高明之域, 實非後世人主所可跂望也。 又嘗曰: "講學, 所以明理, 明理, 將以躬行, 躬行之實, 孝悌爲先。 之道, 孝悌而已"。 故承事兩殿, 順敬備至。 自幼侍側, 器物必整理, 時新之物, 不先入口。 兩殿每曰, "吾家孝子"。 其在燕瀋, 思慕不自克, 興言必涕泣。 及仁祖大漸, 割指進血, 及喪哭泣之哀, 顔色之戚, 感動臣隣。 至窆, 將詣陵臨訣, 群臣以毁疾請止, 敎曰: "昨於郊外, 瞻望靈轝, 歸來殿宇, 閴寂更無憑依。 今見此啓, 予懷之悲, 實與天地無窮也"。 魂殿小祭祀, 非疾甚, 未嘗不躬行, 嘗幸山陵, 降陟進止, 哭不暫止。 喪畢群臣請依例陳賀, 固辭不受。 嘗講蓼莪詩, 悽咽泣下曰: "詩本性情, 信矣。 況予先志未伸, 含痛窮天者乎"。 筵臣以爲, 新免於喪, 是適然矣, 其後語及, 未嘗不然, 玆可謂終身而慕者歟。 繼大妃善病, 王奉養調娛, 翼翼油油。 以所處狹隘, 親自視址, 以營別殿, 曰萬壽、曰春暉。 嘗上壽其中, 禮肅而愛至, 物儉而儀備。 旣罷, 仍問國中高年, 各賜米肉, 以廣推及之意。 繼大妃嘗曰: "王之誠孝, 將無以報矣"。 與昭顯蒙難于北, 孔懷之情益至。 或不無蓋底之方圓, 而能以誠意諧之。 淸人欲以昭顯從戰, 王輒請自行, 辭氣懇款, 人感而止。 昭顯諸子, 仁祖朝, 坐其母, 皆廢置海島。 王憐而赦回, 後封其子、嫁其女而撫愛, 與諸公主, 絶無纖毫厚薄。 謂群臣曰: "吾與昭顯, 崎嶇異域, 冒犯霜雪, 左右提挈, 未嘗暫離, 東還未幾, 人事奄忽, 每常悼念。 今若視其子, 異於己子, 逝者豈無憾恨"。 常以春秋, 謁諸陵。 當幸孝陵, 昭顯墓在其傍, 王曰: "予疇昔之夢, 昭顯見予, 歡若平生, 今又夢予執手悵然。 覺來悲懷難狀"。 遂於拜陵訖, 省其墓而歸。 愛母弟甚至, 幼時宿必同衾。 後常源源接見, 日未夕, 不許出。 有以危語持者, 王怒杖殺其人。 疾, 就見之, 及聞其革, 以約徑出, 則已無及矣。 王悲痛忒甚, 至斂又却桃茢以臨之。 庶弟, 其母與姊, 舊已稔惡, 與金自點謀逆, 有司請斷恩處以法, 王以事係繼大妃, 只賜其母死, 而子女放置于外, 不絶衣食。 後王念其逢霧露以死, 命還之。 入宮見王, 王喜而泣語。 沒, 王益悼其終鮮, 泣諭群臣, 悉復其官爵。 王之尊屬, 仁祖弟也, , 宣廟子也, 王愛敬之, 沒身不衰。 其於疏屬, 恩禮周至, 無有怨恨不滿者。 我殿下稍大, 王雖甚愛之, 然敎之必以法度, 故絶無奇袟雜進, 以害其德性, 此王修德之實, 自身而行於家者也。 其立政曰: 任人以誠, 而保民以仁也, 故始宅宗。 首起金尙憲金集, 山林宿德, 尙憲身任大義。 嘗拘執在北, 姦人以此媒孽之, 禍將不測。 王應機善處, 事以得解, 後亦眷向不少怠。 巖穴之士, 無不禮致。 嘗問 " 神宗歎無人材, 而不用二程何也"。 筵臣對曰: "程子嘗極陳治道, 神宗曰: 此之事, 朕何敢當。 神宗其志如此, 雖欲用之得乎"。 又嘗論朱子, 筵臣曰: "朱子生南渡時, 志在經濟, 蓋欲人君正心克己養民養兵之外。 孑然無一事以間之也"。 王曰: "而不能用。 今不能推行其道, 則豈不復爲後人所恨也"。 又曰: "君臣固難相信, 而任將尤難。 韓信曰: 王言聽計用, 雖死不易, 人主苟信用臣子, 則臣下寧有欲去者乎"。 又曰: "每念 (高有宗)〔高宗有〕 , 而不能用, 蹙處江南, 不能進一步, 未嘗不悵然太息也"。 王神采嚴毅, 人不敢仰視, 而每對群臣, 言笑樂易, 開心見誠, 洞徹無間, 故人人咸得以自盡。 其言直則賞之, 其人可用則奬拔之, 不拘資格, 雖已死者, 褒寵不已。 忠賢子孫, 特加收錄, 儒先祠廟, 悉賜扁額。 有司恤罄, 請削朝廩, 不許曰: "忠信重祿, 所以勸士也, 無寧盡損御供也"。 愛養民生, 常如不及, 歲惡免入發積, 未嘗少靳。 數遣御史, 廉問其疾苦, 歸則輒親見問, 有白其死飢之狀, 王惻然泣下曰: "此不忍聞。 食其下咽"。 卽減常膳。 疾疫民死, 命齎內藥以救之, 守令必引見, 敷納以言, 因勉勵之。 或於恒調擢授右職曰: "嘗爲某邑, 嘉爾治績"。 天旱必親禱, 禱輒應不移晷。 凡民之惡, 欲罷置如飢渴。 雖力討軍實, 而尤弱者免, 雖愛惜官爵, 而耆艾者與。 尤愼祥刑, 自點獄起, 悉焚其所親交書。 每寒暑甚時, 必問獄囚, 疏出其細犯。 嘗使近臣閱囚, 有無衣者, 命所司備給曰: "罪有常服, 凍殺則不可"。 湖民被誣告, 逮繫者甚衆, 王一見爰辭, 卽釋之, 亦給衣糧, 皆叩頭流涕而去。 讀《呂刑》哀敬之文, 喟然興歎, 面諭刑官, 使之盡心, 有失入者, 輒坐之不以恕。 以故好生之德, 浹于民心。 然有罪者, 一斷於法, 不自爲輕重, 雖外挾內訌者, 衆所疑懼, 亦殄戮之, 無所撓。 增損學制, 以造俊升, 而尙慮牖民無法, 命梓《三綱行實》《警民》等篇, 以頒中外。 蓋帝王爲治之道, 大本旣立矣。 方將修擧廢墜, 振起綱維, 以挽回世道, 以克酬聖念之所欲爲者, 而卒未能就。 嗚呼! 且以文王之德, 百年而崩, 猶未洽於天下, 況形勢之難易, 又萬萬於之際者。 而天之降年, 又未及文王之中身哉。 嗚呼! 痛哉。 昇遐之日, 京都士庶, 塡咽哭踊, 深山窮谷, 莫不悲號曰: "吾其奈何"。 嗚呼! 玆所謂未施哀, 而民哀者歟。 王諱, 字靜淵, 仁祖子也。 母妃韓氏, 西平府院君 浚謙之女。 神皇末年, 天下始發亂, 本朝方且淪喪, 天命已歸仁祖。 而王以萬曆己未五月二十二日生焉, 昭顯世子, 王母兄也。 昭顯卒, 有子, 仁祖以王有聖德, 故立之。 王妃, 故新豐府院君 張維女, 誕一男, 卽我殿下。 五公主, 洪得箕 沈益顯鄭齊賢鄭載崙元夢鱗, 其駙馬也。 一翁主幼。 諸公主下嫁, 事舅姑, 甚執婦道, 此見王化之一端也。 嗚呼! 自三代以後, 治不本於學, 故道術爲天下裂。 惟王遜志來修, 以御家邦, 故駸駸乎王道之純。 三代以下, 惟功利是尙, 故多愧於天理民彝, 惟王正誼明道, 無所計較, 故聖志克定, 卓然如靑天白日。 罔曰不克, 罔曰民寡, 惟厥心厥事, 是旣是愼, 常有日暮道遠之歎。 又歎曰: "古語一二臣同, 不爲無助, 今則小大敷同, 惟目前是圖, 誰與我共此者"。 故時有荊南幄對之賜, 其沈機妙算, 有非人人所可窺測者, 尤好宋儒書, 有以心學說進者, 卽授筵臣訂正曰: "得無或悖於否"。 蓋秉天理、明聖學、正王法、伸大義, 以繼春秋大一統之業, 以承聖考道心之傳, 而以不負皇天生聖之意者, 豈非建天地而不悖, 質鬼神而無疑者乎。 世無知德者, 固不能象成歌詩, 疏越薦誠, 使人愀然如復見乎盛德之容。 然以經傳所載, 模像而蠡管之, 其乃武乃文, 祖乎, 孝弟盡道, 宗乎, 儉勤惡旨酒, 法乎, 不邇聲色改過不吝, 效乎, 視民如傷卑服卽功, 師乎文王, 發揚蹈厲, 恐不逮事, 象乎武王。 自以下, 則恢廓大度, 高祖如之, 重厚直溫, 光武同之, 信義彰著, 昭烈近之, 弧矢鐵柱, 窹寐豪英, 而齋志不伸, 惜乎 似之, 此則時勢然也。 王在, 忽見五彩盈室, 而神龜出, 見昔抑洪水, 而天乃以是錫, 使王志業成就, 則將不在下矣, 奈何天示之兆, 而不畀之壽, 使天下萬世, 不得卒受其賜歟。 孰謂之亂之可治, 變之可正, 而陽不可終無歟。 《匪風》《下泉》之終於變風, 其意安在。 豈所謂天不勝氣數屈伸而然者歟。 雖然建皇極之正, 明人理之晦, 其正大宏遠之規, 日星乎中天, 以遺我聖子, 以基億萬年無疆之業, 則其與地平天成, 萬世永賴者, 未嘗不同也。 嗚呼! 龜眞有知也歟。 噫! 此可以少慰臣子無窮之痛也歟。 臣猥蒙知奬, 不卽褥蟻, 忍以文字, 紀事纂言, 乾坤之大, 日月之明, 固難繪畫, 而且恐遣辭之際, 華而不實, 則罪有深於華元樂擧, 故寧質而不敢溢, 以對揚疇昔遠侫之聖德云。 【崇政大夫議政府左參贊臣宋時烈製進。】


  • 【태백산사고본】 22책 1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194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어문학-문학(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