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의 수정을 청하는 대제학 이식의 소(疏)
대제학 이식(李植)의 소
역사는 일대(一代)의 전장(典章)이요 만세의 귀감으로서 천서(天叙)와 천질(天秩)의 의거하는 바요 민심과 사론(士論)에 관계된 것이니, 나라가 있어도 역사가 없으면 나라가 아니요 역사가 있어도 공정치 못하면 역사가 아닙니다. 옛날 송(宋)나라 고종(高宗)이 남쪽으로 파천할 때 행도(行都)가 정해지지 않고 화전(和戰)이 결정되지 않아 혼란이 극심하였으나, 원우 태후(元祐太后)가 먼저 국사(國史)를 개수하여 선인(宣仁)의 무고(誣告)를 가릴 것을 청하였습니다. 이에 고종이 곧 사관(史官) 범충(范冲)에게 명하여 옛것에 근거해서 개수케 하였으니 이를 일러 주묵사(朱墨史)라 합니다. 이에 대해 당시의 대유(大儒) 장식(張栻)도 이는 난세를 평정하고 질서를 회복하는 큰 근본이 된다고 하였으니, 국가가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중요한 일임이 분명합니다.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나라의 문물이 구비되고 인재가 많았던 때는 선묘(宣廟)의 시대보다 더 성한 적이 없었습니다. 비록 의(義)를 지키다가 난을 만나 이미 높아졌던 것이 무너지긴 하였으나 천심(天心)의 향우(享祐)함을 입고 방역(邦域)이 다시 안정된 것은 모두 성인(聖人)의 깊은 우려가 계발한 바로서 사기(事機)를 변화시키고 체구(締搆)하여 효력을 발휘하는 등 모두가 후세에 전해야만 할 것들이었으니, 이 시대에 대해서는 역사에 상세히 기록되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폐조(廢朝)가 그 사이에 끼어들어 간얼(姦孽)이 왕명을 독단함으로써 기자헌(奇自獻)이 총재(摠裁)가 되고 이이첨(李爾瞻)·박건(朴楗) 등이 찬수(撰修)를 전적으로 담당하여 옛 기록을 몰래 깎고 스스로 무필(誣筆)을 가해서 시비(是非)와 명실(名實)을 모두 뒤바꿔버리고 말았습니다. 무릇 이이첨에게 잘 보인 자 5, 6인에 대해서는 거짓으로 꾸미고 헛되게 미화하여 성현에 비견시켰지만 기타 명신(名臣)·석보(碩輔)나 도학(道學)의 선비로서 그와 평소 사이가 나빴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분사(憤辭)로 추하게 매도하면서 대부분 궁기(窮奇)나 도올(擣扤)의 죄를 덮어 씌웠습니다.
그 말년에 쓴 유영경·정인홍 등의 일에 이르러서는 감히 일월(日月)의 밝음을 더럽히고 천지의 위대함을 가리는 격이 되었으니, 바로 장채(章蔡)004) 가 선인(宣仁)을 무고(誣告)한 것과 동일한 간인(姦人)의 행적으로서 더욱 신자가 차마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겠습니다. 사고(史庫)의 장서는 외인(外人)이 두루 엿볼 수 없었으나 전후로 《실록》을 상고해 볼 때의 사신(史臣)들이 눈으로 보고 서로 전한 것이 숨길 수 없는 점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사가(史家)에 있어 천고의 일대 변고라 하겠습니다.
신은 삼가 상고하건대 계해년 반정(反正) 초에 연신(筵臣) 이수광(李睟光)·임숙영(任叔英) 등이 곧 수정(修正)하기를 청하여 이미 성지(聖旨)의 윤허를 받았고, 이듬해 봄에 상신(相臣) 윤방(尹昉)과 재신(宰臣) 서성(徐渻) 등이 연달아 거듭 청하자, 모두 윤허하여 속히 거행토록 하셨으니, 이 일을 중하게 여기시는 성의가 이에 더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라에 일이 많고 유사(有司)가 비용을 아낀 나머지 《광해일기(光海日記)》조차 일을 하다 말다 하여 초솔(草率)한 상태로 겨우 끝마쳤으며, 관각(館閣)의 대소 신료들도 시무(時務)에 얽매여 문사(文事)에 힘을 쏟을 겨를이 없어 우물쭈물하며 잊어버린 상태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매번 변란을 겪으면서 사고의 유문(遺文)과 야록(野錄) 및 가전(家傳)의 서책들이 거의 모두 인멸되었는가 하면 지금은 또 노성(老成)하여 고사를 아는 신하들이 죽거나 폐산(廢散)한 나머지 조정에 있는 자는 한두 명도 안 됩니다. 만약 다시 수년을 지나고 보면 신들과 같은 무리들도 점차 죽게 될 것이니, 이목(耳目)으로 듣고 본 것이 문득 시대를 달리하게 되어 무사(誣史)가 마침내 행해지고 말 것입니다. 대저 나라는 망할 수 있어도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고금의 지론(至論)인데, 지금은 나라가 망하지도 않았는데 역사가 먼저 망하였습니다. 게다가 무망(誣罔)한 붓이 성미(盛美)함을 더럽혀 놓아 천 년 후에까지 영영 씻겨질 희망이 없으니, 어찌 이 나라 신자로서 죽어도 끝이 없을 아픔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일찍이 한두 상신(相臣)과 이 일을 논급(論及)하면서 ‘서울에 개국(開局)하고 장본(藏本)을 모두 모아 일시에 수정한다면 불과 몇 달이면 완료될 것이다.’고 하였는데, 어렵게 여기는 이는 말하기를, ‘시국이 어려운 때에 재정적인 소비가 엄청나며, 허다한 《실록》을 오래도록 서울에 두었다가 만일 뜻밖의 일이라도 생기면 모두 잃을까 두렵다.’ 하였습니다. 신은 또 말하기를, ‘야언(野言)과 가록(家錄)를 수습하여 절충하고 필삭(筆削)해서 사고(史庫)에 함께 보관하는 것도 주묵(朱墨)의 유의(遺意)이다.’고 하였으나, 어렵게 여기는 이는 또, 말끔히 씻어내지 못하고 조금 보완하는데 그치는 것을 혐의롭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신도 부질없이 말만 하고 생각만 한 채 감히 스스로 맡아 힘써 돕지는 못하고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나이는 노쇠하고 의지는 상실되어 만사가 망연(茫然)하나 그래도 오직 이 일념만은 마음에 새겨 잊지 않은 채 항상 홀연히 먼저 아침 이슬이 되어 한을 머금고 땅속에 들어갈까 두려워하였으므로,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이렇게 아뢰는 것입니다.
지금 국력이 고갈되고 시세(時勢)가 불안하여 구본(舊本)을 수정하는 일은 참으로 착수하기가 어려우나 편리한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 야언·가록이 모두 흩어져 없어지지 않은 때에 미쳐 문학이나 고사를 널리 아는 신하들 중 당상 당하 3, 4원을 위촉하여 모두 실직(實職)으로 춘추관(春秋館)의 직을 겸대시키고 특히 대신(大臣) 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게 하소서. 그리고 어느 한가로운 장소에 개국(開局) 설고(設庫)하고 해조로 하여금 지필(紙筆)을 계산하여 내주게 하는 한편, 산원(算員)을 정하고 매일 매일 적실하게 계산하여 비용을 낭비하지 말게 하소서. 또 각사(各司)의 남아도는 서리(書吏)와 사령(使令)을 뽑아 교대로 수를 정하여 사환(使喚)과 수직(守直)에 대비케 하여 늠료(廩料)의 비용을 별도로 첨가함이 없도록 하소서. 이 일은 비밀히 써서 간직해야 할 사필(史筆)에 비할 것은 못 되니, 무릇 서사(書寫)의 역(役)도 이속(吏屬)들 중 글씨 잘 쓰는 사람을 뽑아 나누어 쓰게 하면 역시 비용을 보탤 것이 없습니다.
그 편집 범례에 관해서는 우선 사대부 집에 소장된 기록을 구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외방(外方)의 경우에는 도사(都事)가 춘추관의 직책을 겸대하여 널리 민가를 방문하여 수집해 올려 보내게 하소서. 그런 뒤에 대신(大臣)에게 품재(稟裁)하여 시비와 명실에 어긋나지 않은 것을 뽑아 한 유(類)로 삼게 하고, 또 명신(名臣) 선사(善士)의 비(碑)·지(誌)·장(狀)·전(傳)을 취하여 사마광(司馬光)의 백관표(百官表)나 주자(朱子)의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을 대략 모방하여 한 유로 삼게 하소서. 수집하는 기간만은 시일이 좀 걸리겠지만 산정(刪定)하는 일은 수개월이 지나지 않아 정해지리라고 헤아려집니다. 또 선조(先朝)의 명신과 대유들의 문집 가운데 전장(典章)에 관계된 것이 있을 경우, 조종조에서 당시 저술을 사고(史庫)에 아울러 간수하던 예에 의거하여 다같이 간수하여 전한다면 일대(一代)의 전형(典刑)으로서 오히려 훗날에 징험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옛날 저술하는 선비 중에는 필부(匹夫)의 힘으로써 수백 권을 완성시킨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고(前古)의 사지(史志)들 중에는 전란 중에 나온 것이 더 자세하고 분명하였으니, 오직 범씨(范氏)의 사서(史書)만이 그러했을 뿐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중원(中原)에서는 오로지 문헌만을 일삼았으며 군상(君上) 또한 이를 중하게 여겨 반드시 한두 사신(史臣)에게 위촉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 뜻을 펴게 하고, 그 사업을 마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대의 사기(史記)가 그토록 성대한 것이니, 이는 다른 나라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다만 이 선조(先朝)의 무사(誣史)만은 대의(大義)와 관계되는 까닭에 그것을 범범하게 놔두었다가 망극한 욕됨이 있게 해서는 결코 안 되겠기에 신이 비방이나 혐의받을 것을 피하지 않고 외람되게 성심(誠心)을 아뢰는 것입니다. 삼가 원컨대 성명께서 이 점을 자세히 살피고 유념하시어 묘당에 자문하신 뒤 속히 재가(裁可)해 주신다면 그만한 다행이 없겠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8책 42권 3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705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 / 역사-고사(故事)
- [註 004]장채(章蔡) : 장돈(章惇)·채경(蔡京)·채변(蔡卞).
○大提學李植上疏曰:
史者, 一代之典章, 萬世之龜鑑, 是天敍、天秩之所寓; 民心、士論之攸繫, 國而無史, 非國也, 史而不公, 非史也。 昔宋 高宗之南渡也, 行都未定, 和戰未決, 搶攘甚矣, 而元祐太后首請改修國史, 以辨宣仁之誣, 高宗卽命史官范冲, 因舊改修, 謂之朱墨史。 當時大儒張栻以爲: "此撥亂反正之大本。" 其非國家第二件事明矣。 臣竊惟, 我東文物之備、人材之萃, 莫盛於宣廟之世。 雖守義遘難, 旣崇而圮, 天心克享, 邦域再奠, 斯莫非聖人殷憂之所啓, 而事機之變, 締搆之效, 無非可傳於後世者, 則簡冊所載, 宜莫詳於此時也, 而不幸廢朝間之, 姦孽擅命, 奇自獻爲摠裁, 而李爾瞻、朴楗等, 專任撰修, 陰削舊錄, 自加誣筆, 是非、名實一切倒置。 凡爲爾瞻所右者五六人, 則飾僞虛美, 擬諸聖賢, 此外名臣ㆍ碩輔、道學之士, 與其所素睚眦牴牾之人, 則憤辭醜罵, 擧加以窮奇、擣扤之罪。 至其末年所書柳永慶、鄭仁弘等事, 則敢爾滓穢日月之明, 掩蔽天地之大, 正與章蔡之誣宣仁, 同一姦軌, 尤非臣子可忍言者。 史庫之藏, 外人雖不能遍窺, 而前後實錄考見之時, 史臣目見相傳, 有不可諱者, 誠千古史家之一大變也。 臣謹稽, 癸亥反正之初, 筵臣李睟光、任叔英等, 卽請修正, 聖旨已兪, 翌年春, 相臣尹昉、宰臣徐渻等相繼申請, 皆蒙允許, 俾速擧行。 伏惟聖意, 委重此事, 無以加矣, 而國家多故, 有司惜費, 《光海日紀》亦經作輟, 踈率僅就。 館閣大小臣僚, 牽掣時務, 未遑文事, 因循忽忘, 以至于今, 而每經變亂, 則史庫遺文及野錄、家傳之書, 堙沒殆盡。 今又老成掌故之臣, 死亡廢散, 在朝者無一二, 若更數年, 則如臣等輩, 亦必漸次就木, 耳目聞覩, 便成異代, 而誣史遂行矣。 夫惟國可滅, 史不可滅者, 古今之至論, 而今也國未亡而史先亡, 加而誣罔之筆, 汚衊盛美, 千載之後, 永無湔洗之望, 豈非我國臣子, 沒世無涯之痛乎? 臣曾與二三相臣, 論及此事以爲: "開局京師, 聚集藏本, 一時修正, 計不過數月可了。" 云則難者以爲: "時艱之際, 財費重大, 許多實錄, 久置京中, 脫有不虞, 恐歸全失。" 臣又以爲: "收拾野言、家錄, 折衷筆削, 附藏史庫, 亦是朱墨之遺意。" 而難者又以不大湔洗, 止於小補爲歉。 臣亦空言妄想而已, 不敢自任力贊, 到此地頭, 年衰志喪, 萬事茫昧, 而惟此一念, 刻心未忘, 常恐倐先朝露, 呑恨入地, 敢冒萬死, 復陳一得焉。 目今國力蕩竭, 時勢扤捏, 修正舊本之擧, 則誠難措手, 惟有便宜可爲者。 及此野言、家錄未盡散亡, 委定文學博故之臣堂上、堂下三四員, 皆以實職兼春秋, 而特以一大臣領其事, 就一閑處, 開局設庫, 令該曹計支紙筆, 而仍定算員, 逐日計的, 勿令濫費。 抽出各司剩濫書吏、使令, 輪回定數, 以備使喚ㆍ守直, 俾無別添廩料之費。 且此非史筆藏秘之比, 凡書寫之役, 亦以吏輩善寫者, 抄定分書, 則亦無加費矣。 其編緝凡例, 則首先求訪士夫家所藏記錄, 而外方則以都事兼春秋, 博訪民間, 聚集上送。 然後稟裁于大臣, 取其不謬于是非、名實者, 以爲一類, 又取名臣、善士碑、誌、狀、傳, 略倣司馬光 《百官表》、朱子 《名臣言行錄》, 以爲一類。 雖其收集之間, 當費時月, 刪定之役, 則計不過數月可定。 又取先朝名臣大儒文集, 有關於典章者, 依祖宗朝當時著述, 幷藏史庫之例, 一體付傳, 則庶幾一代典刑, 尙有徵於來許矣。 古之著述之士, 能以匹夫之力, 完就數百卷者有之; 前古史志, 出於干戈搶攘之際者, 尤詳且明, 不惟范氏史爲然者。 無他焉, 中原專事文獻, 君上亦重之, 必委屬一二史臣, 俾伸其志, 卒其業, 故歷代史記, 如彼其盛, 此非外國之所企及也。 惟此先朝誣史, 關係大義, 決不可付之悠泛, 致有罔極之玷辱, 故臣不避譏嫌, 冒陳誠素。 伏願聖明, 垂察惕念, 下詢廟堂, 速賜裁處, 不勝幸甚。
宣祖大王修正實錄卷之四十二
- 【태백산사고본】 8책 42권 3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705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