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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1권, 총서 1번째기사

명종 대왕의 훙서

대명(大明) 융경(隆慶) 원년(元年) 명종 대왕(明宗大王) 22년 정묘 6월 28일 신해에 명종 대왕경복궁(景福宮)의 침전(寢殿)에서 훙서하였다. 앞서 27일에 상의 질환이 갑자기 더하였고 한낮이 되자 더욱 위독하였는데, 그때 우의정 권철(權轍)은 중국으로 사신 가고 없었고 대신(大臣)으로는 영의정 이준경(李浚慶), 좌의정 이명(李蓂), 그리고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심통원(沈通源) 세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우승지 윤두수(尹斗壽)가 옛날 송조(宋朝)의 문언박(文彦博)이 금중(禁中)에 입숙(入宿)했던 고사를 써서 이준경에게 보이니, 준경이 궐내(闕內)에 입숙했고 밤이 깊어지자 병세는 더욱 위중하였다.

왕비(王妃) 심씨(沈氏)가 대신인 준경통원을 급히 불러 침전으로 입대(入對)하게 했을 때는 상은 이미 인사 불성 상태였다. 준경이 앞으로 나아가 큰 소리로 ‘신들이 왔습니다.’ 하였으나 상은 반응이 없었고, 준경이 또 사관(史官)을 시켜 두 사람 이름을 써서 올리게 하였으나 상은 역시 살피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리하여 준경이 왕비에게 아뢰기를,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마땅히 사직(社稷)의 대계(大計)를 정해야 합니다. 주상께서 고명(顧命)을 못하실 입장이니, 당연히 중전(中殿)께서 지휘가 있으셔야겠습니다.’ 하니, 왕비가 답하기를, ‘지난 을축년001) 에 주상으로부터 받아 둔 전지가 있으니, 모름지기 그 사람을 사군(嗣君)으로 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는 을축년 9월 상의 병세가 위독했을 때 중전이 봉서(封書) 하나를 대신에게 내린 바 있었는데, 하성군(河城君) 이균(李鈞)을 사군으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준경 등은 배사(拜謝)하며 아뢰기를, ‘사직의 대계는 정해졌습니다.’ 하였다.

새벽에 상이 승하하였다. 대신이, 도승지 이양원(李楊元)·동부승지 박소립(朴素立), 주서(注書) 황대수(黃大受) 그리고 병조 판서 원혼(元混)으로 하여금 시위 장사(侍衛將士)를 영솔하고 덕흥군(德興君) 사제에 가서 상을 맞아오게 하였다. 이때 대수양원의 띠를 붙들고 말하기를, ‘어느 군(君)을 맞아올 것인지 왜 그것을 묻지 않는가?’ 하자, 양원은 말하기를, ‘이미 정해진 일인만큼 물어볼 필요가 없다.’ 하였다. 대수가 말하기를, ‘비록 이미 정해진 일이라고 하더라도 이 일만은 그렇게 서둘러서는 안 된다.’ 하였는데, 대신이 하성군이라고 말하자 대수가 그것을 종이에다 써서 대신에게 들어 보인 다음 옷소매에다 넣고 나갔다. 그런데 그때는 창졸간의 일이라서 복마(僕馬)가 없었으므로 양원이 도보로 가려고 하였다. 그러자 대수가 말하기를, ‘지금 이 시기에 위의를 잃어서 보는 이의 이목을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 하고, 즉시 기종(騎從)을 갖추어 그 사제로 갔다. 가서 보니 시위(侍衛)는 아직 오지 않았는데 잡인(雜人)들만 들이닥치고 있었다. 양원은 어느 군을 맞으러 왔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지 않고 다만 상의 외삼촌인 정창서(鄭昌瑞)를 불러내어 통알(通謁)할 뿐이었다. 대수가 말하기를, ‘이러한 대사(大事)를 그렇게 흐리멍덩하게 해서는 안 된다. 궁 안에는 3명의 왕손(王孫)이 있는데, 말을 분명히 하지 않아서 될 일인가. 마땅히 세 왕손을 다 나오라고 하여 직접 확인한 다음 호위(扈衛)해야 할 것이다.’ 하였으나, 양원은 그 말을 들으려 않고 다만 창서에게, 어느 군이 장속(粧束)을 하고 있느냐고 묻기만 하니, 창서가 대답하기를, ‘전일에 정했던 하성군(河城君)이다.’ 하였다.

그때 상은 하동 군부인(河東郡夫人)의 상(喪)을 입고 있는 중이어서 영좌(靈座)에 나아가 곡으로 하직을 한 다음 백의(白衣)에 오사모(烏紗帽) 차림으로 나왔다. 연(輦)을 타려 할 즈음 대수는 또 발(簾)을 걷어올리고 자세히 확인할 것을 청하여, 양원 등이 연 앞으로 나아가 살펴본 다음 둘러서서 절을 올리고 출발하였다. 그리고 광화문(光化門)으로 들어와 근정전(勤政殿) 동쪽 뜰을 거쳐 상차(喪次)에 나아갔다.

그때 잡인들 입에서는, 이번에 호종(扈從)한 자들은 녹공(錄功)할 것이라는 허튼 소리들이 나돌아, 조사(朝士)에서 유생(儒生)과 이서(吏胥)의 무리들까지 모두 이름을 적어 궁노(宮奴)에게 준 자들이 많았는데, 궁노가 그 적은 것을 대수에게 주면서 ‘사군(嗣君)의 명령이니 잘 간수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수는 그것을 받지 않으면서 ‘사군이 지금 이 시기에 무슨 명령이 있을 것인가?’ 하였으나, 박소립(朴素立)은 그것을 받아 정원(政院)에 전달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비난하였다. 그후 대간(臺諫)은 그 적은 것을 불태워 없앨 것을 아뢰었으며, 양원 등을 탄핵하여 파직하였다.

그런데 그때 양원이 어느 군을 맞이한다고 말을 분명히 하지 않았던 것은 당시로서는 고명(顧命)이 겉으로 나타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혹시 뜻 밖의 변이라도 생겨 맞으러 갔던 자들이 도리어 큰 화난을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였던 것이다. 이준경은 평소 중망(重望)이 있어 나라 사람들이 그를 믿고 의지하였으며 그에게 마음을 기울여 모두 하는 말들이 ‘이때에 이 사람이 있으니 나라가 안정될 것이다.’ 하였다. 사위(嗣位)가 정해지자 인심이 그대로 안정을 유지했던 것은 다 준경이 사람들을 진정시킨 공로였던 것이다. 대수도 그 경황 속에서 확실하고 투철한 소신을 가졌기 때문에 이름이 많이 알려졌었는데, 미처 현달해지기 전에 죽고 말았다.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403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인물(人物)

大明 隆慶元年。 明宗大王二十二年丁卯六月二十八日辛亥, 明宗大王薨于景福宮之寢殿。 前二十七日, 上疾猝重, 日午尤篤。 時, 右議政權轍朝京, 大臣只有領議政李浚慶、左議政李蓂及藥房都提調沈通源三人而已。 右承旨尹斗壽, 手書宋朝 文彦博入宿禁中故事, 示李浚慶, 浚慶入宿闕內, 夜半大漸。 王妃沈氏急召大臣浚慶通源, 入對于寢殿, 上已不省事。 浚慶進前大聲曰: "臣等來。" 上不應。 浚慶使史官書進二人名, 上亦不能視。 浚慶仍啓王妃曰: "事已至此, 當定社稷之計。 主上不能顧命, 中殿須有指揮。" 王妃答曰: "乙丑年曾得上旨, 須以其人爲嗣。" 蓋於乙丑九月, 上疾篤, 中殿下一封書于大臣, 以河城君 爲嗣。 浚慶等拜謝曰: "社稷之計定矣。" 是曉上薨。 大臣使都承旨李陽元、同副承旨朴素立、注書黃大受及兵曹判書元混, 領侍衛將士, 迎上于德興君第。 大受陽元帶曰: "何以不問當迎某君?" 陽元曰: "已定之事, 不須問也。" 大受曰: "雖已定, 此事不可草草。" 大臣曰: "河城君也。" 大受書于紙, 擧示大臣, 而袖出。 時, 倉卒無僕馬, 陽元欲步往, 大受曰: "此時不可失儀, 以駭人視。" 卽求得騎從, 旣至第則侍衛未及至, 而雜人已闌入矣。 陽元不明言迎某君, 只呼出上舅鄭昌瑞, 通謁而已。 大受曰: "此大事不可糊塗。 宮中有王孫三人, 豈可不明言乎? 當請三王孫, 皆出親見然後, 乃可扈衛。" 陽元不肯, 但問昌瑞曰: "何君粧束?" 昌瑞曰: "前日所定河城君也。" 時, 上方居河東郡夫人之喪, 哭辭靈座, 着白衣、烏紗帽以出。 將乘輦, 大受又請擧簾諦視, 陽元等遂進輦前, 審視環拜而行。 入自光化門, 由勤政殿東庭, 卽喪次。 時, 雜人妄言: "扈從者當錄功。" 於是, 朝士、儒生、吏胥輩, 多記名以授宮奴, 宮奴以授大受曰: "嗣君命, 藏之。" 大受不受曰: "嗣君此時, 豈有命令耶?" 朴素立受之, 傳于政院, 人多譏誚。 後, 臺諫啓焚其錄, 劾罷陽元等。 陽元之不明言迎某君, 蓋是時, 顧命未顯, 恐變生意外, 往迎者反獲大禍也。 李浚慶素有重望, 國人倚信, 傾想皆曰: "此時有此人, 國必賴之。" 嗣位纔定, 人情大安者, 浚慶鎭物之功也。 大受造次之際, 卓有所守, 由此知名, 未及顯而歿。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403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