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강에 나아가니 민수천이 대신의 상사에 거애를, 이희민이 초치한 선비의 친람을 청하다
조강에 나아갔다. 장령 민수천(閔壽千)이 아뢰기를,
"임금이 신하를 접대할 때에는 마땅히 성의(誠意)를 가지고 친근하게 해야 합니다. 임금은 신하에게 명령만 하고 신하는 그 명령에 따르기만 하면 뜻이 서로 통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신이 병이 있으면 혹 친히 그 집에 거둥하고 죽으면 혹 친히 가셔서 조상하는 것이 모두 제왕이 하는 일입니다. 송(宋)나라 때에 대신이 죽자 황제가 친히 거둥한 일이 있었는데, 마을의 골목길이 좁아서 연(輦)이 들어갈 수 없어 황제가 걸어서 그 집으로 갔습니다. 이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법령이 있습니다. 《대전(大典)》에 대신이 죽으면 거애(擧哀)하는 의식이 있으나, 예문(禮文)만 있을 뿐 거행하지를 않습니다. 임금이 신하를 위해서 거애하면 신하의 마음을 더욱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신이 직접 본 일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재상이라 해도 상사(喪事)는 매우 번잡한 것이어서 자손이 있는 사람은 장비(葬費)를 마련할 수가 있지마는 자손이 없는 사람은 삼공(三公)이라도 반드시 군색하기 마련입니다. 지난번에 영상(領相) 김수동(金壽童)이 죽었을 때 자손이 없기 때문에 상사에 군색한 일이 많았습니다. 삼공으로서 의식대로 장례를 치를 수 없다면 조정으로서도 면목이 없는 일입니다. 고례(古例)가 없다 해도 부의(賻儀)를 후하게 하여야 하거든, 하물며 나라에 법령이 있음에리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의 상사에 친히 가서 조상하는 일에 대해 전에 이미 의논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모두 행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대간이 이희보(李希輔) 등의 일을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이희민이 아뢰기를,
"요즈음 안으로는 경사(京師)로부터 밖으로는 팔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어진 선비를 천거하고, 그 중에 치덕(齒德)114) 이 있는 사람은 역마(驛馬)를 타고 오도록 명하였는데 듣건대 이미 서울에 온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이들이 모두 초야에 묻혀 있으면서 포부도 많을 것이니, 경연(經筵)이 끝난 뒤에 혹 특별히 그 의견을 물어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천거한 사람들을 어찌 다 볼 수가 있겠느냐? 역마를 타고 올라오게 한 사람은 내가 직접 그 회포를 듣고자 하는데, 그가 벌써 왔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희보(李希輔)는 오천정(烏川正)의 사위이다. 오천정은 폐주(廢主)의 총희(寵姬) 녹수(綠水)에게 붙였던 사람이니, 녹수는 이른바 장씨(張氏)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천정은 계제를 뛰어 군(君)에 봉하게 되고, 이희보 역시 여러 차례 직질(職秩)이 올랐었다. 폐주가 일찍이, 무제는 가버리고 미인들도 흩어지니 꽃 나비만이 봄바람 차지하네 하는 글귀를 좋아하여 이를 매양 읊조리더니, 어떤 날 이희보에게 이 시(詩)가 어떠냐고 물은 일이 있었다. 이희보가 대답하기를 ‘이 시가 좋기는 합니다만 태평 성덕(太平盛德)을 기리는 임금으로서 어찌 이렇게 적막한 시를 좋아하십니까?’ 하니, 폐주가 무척 기뻐하였다. 어떤 총희(寵姬)가 죽자 폐주가 이희보로 하여금 만사(挽辭)를 짓게 하매 희보가 지어 올리기를, 달빛 아래 대궐문은 깊이깊이 닫혔는데 홀연히 가 버릴 줄 내 어이 알았으랴 어느 곳 풀잎 속에 옥골을 묻을 거냐 추풍 낙엽 소리 차마 듣지 못할레라 하였더니, 폐주가 울면서 이르기를 ‘당대의 시인으로서 이희보보다 나은 자는 없겠다.’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때문에 사랑을 받았다.
- 【태백산사고본】 17책 33권 6장 B면【국편영인본】 15책 431면
- 【분류】인사-선발(選拔) / 왕실-경연(經筵) / 왕실-의식(儀式) / 역사-사학(史學) / 역사-고사(故事) / 정론-간쟁(諫諍) / 교통-육운(陸運) / 어문학-문학(文學)
- [註 114]치덕(齒德) : 나이와 덕행.
○丙午/御朝講。 掌令閔壽千曰: "人君接對臣下, 當以誠意而使之親近。 若君唯命臣, 而臣但報命而已, 則情不得相通也。 如大臣有病, 或親幸其第, 死則或親臨弔喪, 皆帝王事也。 宋之時, 有大臣死者, 帝親幸, 閭巷隘不容輦, 帝爲步進。 此甚盛事也。 我國家亦有著令, 《大典》有大臣死而擧哀之儀, 徒有禮文, 而不擧行也。 人主爲臣擧哀, 則尤感動臣子之情也。 臣以親見之事言之, 雖宰相, 喪事甚繁, 故有子孫者, 則能辦之, 無子孫者, 則雖三公, 必爲窘乏。 向者領相金壽童之卒, 無子孫, 故喪事多窘。 以三公而不能辦喪如儀, 於朝廷亦無光彩矣。 雖無古例, 猶可厚賻。 況國有著令乎?" 上曰: "大臣之卒, 親往弔喪, 前已議之, 皆以爲難行, 故果不擧行也。" 臺諫啓李希輔等事, 皆不允。 希閔曰: "近者內自京師, 外及八道, 咸薦擧賢士, 其中有齒德者, 已命乘馹上來, 臣聞之, 多有來京者。 此人在巖穴之間, 抱負亦多, 或於經筵之後, 別加訪問甚當。" 上曰: "其薦擧之人, 豈皆見之? 使之乘馹上來者, 欲親聽其懷抱, 而予未知已來也。"
【史臣曰: "希輔, 烏川正之女壻也。 烏川附托廢主之幸姬綠水, 卽所謂張氏也。 烏川超封君, 希輔亦屢陞秩。 廢主嘗愛 ‘武帝去來紅袖盡, 野花黃蝶領春風’ 之句, 每吟誦之, 一日問希輔以此詩何如, 希輔曰: ‘此詩固好。 然太平盛德之主, 何爲好此寂寞之詩乎?’ 廢主大悅。 有幸姬死, 廢主使希輔作挽辭, 希輔製進曰: ‘金門深鎖月黃昏, 一夕那知背主恩。 何許黃茅埋玉骨, 秋風落葉不堪聞。’ 廢主泣曰: ‘當時之能詩者, 無出希輔之右者。’ 以此寵之。"】
- 【태백산사고본】 17책 33권 6장 B면【국편영인본】 15책 431면
- 【분류】인사-선발(選拔) / 왕실-경연(經筵) / 왕실-의식(儀式) / 역사-사학(史學) / 역사-고사(故事) / 정론-간쟁(諫諍) / 교통-육운(陸運) / 어문학-문학(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