地理志 / 舊都開城留後司
◎ 구도 개성 유후사(舊都開城留後司)
본래 고구려의 부소갑(扶蘇岬)이다. 신라가 고구려를 합친 후 송악군(松岳郡)으로 고쳤고, 고려 태조(太祖) 2년 기묘 【양(梁)나라 말제(末帝) 정명(貞明) 5년. 】 정월에 도읍을 송악(松岳) 남쪽에 정하고 개주(開州)로 승격시켰다. 성종(成宗) 14년 을미에 【송(宋)나라 태종(太宗) 지도(至道) 원년(元年). 】 개성부(開城府)로 고쳤고, 현종(顯宗) 원년 경술에 【송나라 진종(眞宗) 대중상부(大中祥符) 3년. 】 글안(契丹) 성종 황제(聖宗皇帝)가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개경(開京)에 들어와서 궁궐과 시민의 집을 불태워 거의 다 없어지게 되었다. 〈현종〉 9년 무오에 개성부를 파하고 현령(縣令)을 두어, 정주(貞州)·덕수(德水)·강음(江陰)의 3현(縣)을 관할하게 하고, 상서도성(尙書都省)에 직속시켰다. 〈현종〉 20년 기사에 【송나라 인종(仁宗) 천성(天聖) 7년. 】 시중(侍中) 강감찬(姜邯贊)이 서울에 성(城) 쌓기를 청하니, 임금이 참지정사(參知政事) 이가도(李可道) 등에게 명하여, 정부(丁夫) 23만 8천 9백 38인과 공장(工匠) 8천 4백 50인을 모아 나성(羅城)018) 을 쌓으니, 둘레가 1만 6천 60보(步), 높이가 27척이며, 대문(大門)이 4이니, 동문(東門)을 숭인(崇仁), 남문(南門)을 회빈(會賓), 서문(西門)을 선의(宣義), 동남문(東南門)을 보정(保定)이라 한다. 문종(文宗) 16년 임인에 【송나라 인종(仁宗) 가우(嘉祐) 7년. 】 다시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로 승격하고,【김지(金沚)가 지은 《주관육익(周官六翼)》에 이르기를, " 임인019) 3월에 이름을 고쳤고, 우봉군(牛峯郡)·덕수(德水)·강음현(江陰縣)·정주(貞州)·장단(長湍)·임강(臨江)·토산(兎山)·임진(臨津)·송림(松林)·마전(麻田)·적성(積城)·파평현(坡平縣)을 관할하였다." 하였다. 】 충렬왕(忠烈王) 34년 무신에 개성부(開城府)로 승격시켜 부윤(府尹) 이하를 두어 도성(都城) 안을 관장하고, 따로 개성 현령(開城縣令)을 두어 도성 밖을 관장하게 하였다. 우리 태조(太祖) 2년 계유에 【명나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홍무(洪武) 26년. 】 내성(內城)을 쌓았으니, 둘레가 20리 42보이다. 3년 갑술에 도읍을 한양(漢陽)에 옮기고, 4년 을해에 옛 서울을 고쳐서 개성 유후사(開城留後司)로 하고 유후(留後)·부유후(副留後)·단사관(斷事官)·경력(經歷)·도사(都事)를 각각 1인씩 두고, 개성 현령(開城縣令)을 파하였다. 【속칭 송도(松都) 또는 개경(開京)이라 한다. 】 그 후 의학 교유(醫學敎諭)와 검률(檢律) 각 1인씩을 갖추어 두었다.
진산(鎭山)은 송악(松岳)이다. 【일명(一名) 숭악(崧岳)이다. 송나라 서긍(徐兢)의 《봉사도경(奉使圖經)》에 이르되, "경성(京城)의 진산은 숭산(崧山)이라 하는데, 꼭대기에 사당 셋이 있으니, 봄·가을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낸다. 중사(中祀)에 실려 있다. 첫째는 성황당(城隍堂)이요, 둘째는 대왕당(大王堂)이요, 세째는 국사당(國師堂)이다." 하였다. 】
개성(開城) 한우물[大井] 【선의문(宣義門) 밖 11리에 있다. 물이 솟아나오는데, 그 깊이가 2척 남짓하다. 봄·가을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며, 가뭄을 만나면 박연(朴淵)·덕진(德津)과 함께 기우제를 지내며, 세 곳 용왕(龍王)이라 한다. 속설에 "우물물이 붉게 흐리면 반드시 병란(兵亂)이 있다."고 한다. 】 경덕궁(敬德宮) 【중부(中部) 남계방(南溪坊)에 있다. 속칭 추동(楸洞)이라 하는데, 곧 우리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의 잠저(潛邸) 때 옛집이다. 왕위에 오르게 되매 더 넓혀서 지었다. 】 목청전(穆淸殿) 【숭인문(崇仁門) 안쪽 안정방(安定坊)에 있다. 속칭 어배동(於背洞)이라 하는데, 곧 우리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憲大王)의 잠저(潛邸) 때 옛집이다. 태종(太宗) 18년 무술에 구도[개성]에 거둥하여 전우(殿宇)를 짓도록 하고, 태조의 화상을 모시고 전직(殿直) 2인을 두며, 전우 옆에 숭효사(崇孝寺)를 세우고 명복을 빌게 하며, 교종(敎宗)에 붙이고 밭 2백 결과 노비 35명을 주었다. 】
연경궁 옛터[延慶宮舊基] 【송악 남쪽에 있는데, 지금 서울 사람들이 본대궐(本大闕)이라 일컫는다. 】 수창궁 옛터[壽昌宮舊基] 【도성(都城) 북판에 있다. 】 고려(高麗) 태조(太祖) 현릉(顯陵) 【선의문(宣義門) 밖 서쪽의 보통사(普通寺) 서쪽 오동방(梧桐坊)에 있는데, 수릉(守陵) 8호를 두었다. 】 문묘(文廟) 【송악 동쪽의 마암(馬巖) 북쪽에 있다. 제전(祭田) 6결 및 섬학전(贍學田) 1백 50결을 두고, 또 교수관(敎授官) 1인을 두어 생도(生徒)들을 가르치는데, 액수를 50명으로 정하였다. 】
사방 경계[四方界域] 【동쪽으로 송림(松林) 판적천(板積川)에 이르기 15리, 서쪽으로 벽란도(碧瀾渡)에 이르기 30리, 남쪽으로 해풍(海豐) 후근석(朽斤石)에 이르기 25리, 북쪽으로 왕흥산동(王興山洞)에 이르기 31리이다. 】
도성(都城) 호수는 4천 8백 19호, 인구는 8천 3백 72명이요, 순작패 군정(巡綽牌軍丁)이 1천명이며, 속현(屬縣) 개성(開城)의 호수는 8백 44호, 인구는 2천 21명이요, 마군(馬軍)이 68명, 보군(步軍)이 5명, 선군(船軍)이 좌·우령(左右領) 아울러 20명이다.
토성(土姓)이 5이니, 고(高)·김(金)·왕(王)·강(康)·전(田)이요, 내접성(來接姓)이 1이니, 이(李)이다.
간전(墾田)이 5천 3백 57결이다. 【논[水田]이 10분의 3이 된다. 】
서적전(西籍田) 【보정문(保定門) 밖 시루못[甑池] 동쪽에 있다. 】
역(驛)이 2이니, 청교(靑郊)와 산예(狻猊)이다. 봉화(烽火)가 3곳이니, 송악(松岳) 【남쪽으로 해풍(海豐) 덕적산(德積山)의 봉화에 응한다. 】 ·수갑산(首岬山) 【북쪽으로 송악의 봉화에 응하고, 남쪽으로 해풍(海豐) 둔민달(芚民達)에 봉화에 응한다. 】 ·개성 신당(開城神堂)이다. 【서쪽으로 수갑산의 봉화에 응한다. 】
용수산(龍岫山) 【도성 정남쪽에 있다. 】 진봉산(進鳳山) 【도성 동남쪽에 있다. 】 자하동(紫霞洞) 【곧 송악 남쪽의 골짜기이니, 세상 사람들이 연하동(烟霞洞)으로서 신선(神仙)이 살고 있다고 한다. 지금 악부(樂府)에 자하동곡(紫霞洞曲)이 있다. 】 동강(東江) 【보정문(保定門) 남쪽 30리에 있다. 해풍군(海豐郡) 경계에 남도(藍島)020) 가 있다. 】 서강(西江) 【곧 예성강(禮成江)이니, 선의문(宣義門) 서남쪽 17리에 있다. 모두 예전에 배로 실어 온 곡식을 내리던 곳이다. 】 벽란도(碧瀾渡) 【선의문 서쪽 30리에 있다. 도승(渡丞)이 있으니, 우도 수참 전운 판관(右道水站轉運判官)이 겸한다. 】
광명사(廣明寺) 【연경궁(延慶宮) 서쪽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고려 태조의 옛집인데,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 교종(敎宗)에 붙이고, 밭 2백 결을 주었다. 】 연복사(演福寺) 【도성 복판에 있다. 선종(禪宗)에 붙이고, 밭 1백 65결을 주었다. 】 신암사(神岩寺) 【도성 정동쪽에 있다. 교종(敎宗)에 붙이고, 밭 1백 50결을 주었다. 】 감로사(甘露寺) 【벽란도(碧瀾渡) 동쪽에 있는데, 강물이 내려다 보이어 매우 절경이다. 교종(敎宗)에 붙이고, 밭 2백 결을 주었다. 】 관음굴(觀音屈) 【성밖 동북쪽에 있다. 선종에 붙이고, 밭 2백 50결을 주었다. 】 운암사(雲岩寺) 【비(碑)가 있고, 옛 이름을 광암(光岩)이라 하는데, 선의문 밖에 있다.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비(妃) 노국 공주(魯國公主)를 절 동쪽에 장사지내고, 이 절을 중창하였는데, 극히 장엄하고 화려하게 해서, 이른바 운암(雲岩)의 금벽(金碧)021) 이 산골짜기를 환하게 비친다고 할 수 있다. 】
송도 팔경(松都八景) 【자하동의 중 찾기[紫洞尋僧], 청교의 손님 보내기[靑郊送客], 북산의 연기와 비[北山烟雨], 서강의 바람과 눈[西江風雪], 백악의 갠구름[白岳晴雲], 황교의 저녁노을[黃橋晩照], 장단의 돌벽[長湍石壁], 박연 폭포(朴淵瀑布). 】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靈異]. 고려의 선대 아간(阿干) 강충(康忠)이 집을 송악산(松岳山) 남쪽 기슭에 정하고 살았다. 그 증손 작제건(作帝建)이 서해(西海) 용왕(龍王)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곳에 살면서 아들 넷, 딸 하나를 낳았는데, 용녀(龍女)가 집 가운데 우물을 파고 늘 우물 가운데를 통하여 서해에 왕래하며, 그 남편에게 경계하기를,
"내가 장차 우물에 들어갈 터이니, 절대로 보지 마시오."
하였다. 그 후에 작제건이 창틈으로 엿보니, 용녀가 딸을 거느리고 우물 가에 이르러 함께 황룡(黃龍)으로 화하여 구름을 일으키고 우물에 들어갔다가 돌아와서, 남편을 꾸짖기를,
"어째서 언약을 어기시오. 내가 여기에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드디어 딸과 더불어 용으로 변하여 우물로 들어가서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태조가 왕위에 오르매, 추존(追尊)하여 작제건을 의조(懿祖)로, 용녀를 경헌 왕후(景獻王后)로 하고, 그 집을 희사하여 광명사(廣明寺)를 만들었다.
- 【태백산사고본】 52책 148권 2장 B면【국편영인본】 5책 613면
- [註 018]나성(羅城) : 외성(外城).
- [註 019]
◎ 舊都開城留後司: 本高句麗 扶蘇岬, 新羅旣幷高句麗, 改爲松嶽郡。 高麗 太祖二年己卯 【梁 末帝 貞明五年。】 正月, 定都于松嶽之陽, 陞爲開州。 成宗十四年乙未, 【宋 太宗 至道元年。】 改爲開城府。 顯宗元年庚戌, 【宋 眞宗 大中祥符三年。】 契丹 聖宗皇帝自將入開京, 焚宮闕民屋幾盡。 九年戊午, 罷開城府, 置縣令, 管貞州、德水、江陰三縣, 直隷尙書都省。 二十年己巳, 【宋 仁宗 天望七年。】 侍中姜邯賛請城京都, 王乃命參知政事李可道等, 徵丁夫二十三萬八千九百三十八人、工匠八千四百五十人築羅城, 周回一萬六千六十步, 高二十七尺。 大門四, 東曰崇仁, 南曰會賓, 西曰宣義, 東南曰保定。 文宗十六年壬寅, 【宋 仁宗 嘉祐七年。】 復陞爲知開城府事。 【金沚所撰《周官六翼》云: "壬寅三月, 改號, 所管牛峯郡德水江陰燕貞州長湍臨江兔山臨津松林麻田積城坡平縣。"】 忠烈王三十四年戊申, 陞爲開城府, 置府尹以下官, 掌都城之內, 別置開城縣令, 掌都城之外。 我太祖二年癸酉, 【大明 太祖高皇帝 洪武二十六年】 築內城, 周回二十里四十二步。 三年甲戌, 遷都漢湯。 四年乙亥, 改舊京爲開城留後司, 置留後副留後斷事官經歷都事各一員, 罷開城縣令。 【俗號松都, 亦曰開京。】 厥後備置醫學敎諭檢律各一人。 鎭山曰松嶽。 【一名崧嶽。 宋徐兢奉使圖經云: "京城之鎭曰崧山, 巓有祠宇三, 春秋行國祭, 載中祀, 一曰城隍堂, 二曰大王堂, 三曰國師堂。"】 開城 大井、 【在宣義門外十一里, 有泉湧出, 滿深二尺許, 春秋行固祭, 遇旱則禱。 與朴淵、德津號三所龍王。 諺云: "井水赤面, 則後必有兵變。"】 敬德宮、 【在中部南溪坊, 俗號楸洞, 卽我太宗恭定大王潛邸舊宅也。 及卽位, 增廣修營。】 穆淸殿、 【在崇仁門內安定坊, 俗號於背洞, 卽我太祖康獻大王潛邸舊宅也。 太宗十八年戊戌, 駕至舊都, 命營殿宇, 奉安太祖神御, 置殿直二人。 殿旁建崇孝寺, 以薦冥福, 屬敎宗, 給田二百結、奴婢三十五口。】 延慶宮舊基、 【在松嶽南, 至今都人稱爲本大闕。】 壽昌宮舊基、 【在都城中央。】 高麗 太祖 顯陵、 【在宣義門外西普通寺西梧桐坊, 置守陵八戶。】 文廟。 【在松嶽東馬巖北, 置祭田六結及贍學田一百五十結。 又置敎授官一人, 敎養生徒, 以五十爲額。】 四方界域 【東至松林板積川十五里, 西至碧瀾渡三十里, 南至海豐朽斤石二十五里, 北至王興山洞三十一里。】 都城戶四千八百十九, 口八千三百七十二, 巡綽牌軍丁摠一千名。 屬縣開城, 戶八百四十四, 口二千二十一, 馬軍六十八, 步軍五, 舡軍左右領, 幷二十。 土姓五, 高、金、王、康、田; 來接姓一, 李。 墾田五千三百五十七結, 【水田居十分之三。】 西籍田。 【在保定門外甑池之東。】 驛二, 靑郊、狻猊。 烽火三處, 松嶽、 【南準海豐、德積山。】 首岬山、 【北準松嶽, 南準海豐芚民達。】 開城神堂。 【西準首岬山。】 龍岫山、 【在都城正南。】 進鳳山、 【在都城東南。】 紫霞洞、 【卽松嶽南洞, 世以謂烟霞洞仙眞所居, 今樂部, 有紫霞洞曲。】 東江、 【在保定門南三十里海豐郡界藍島。】 西江、 【卽禮成江, 在宣義門西南十七里, 皆古漕運下泊之處。】 碧瀾渡、 【在宣義門西三十里, 有渡丞, 右道水站轉運判官兼之。】 廣明寺、 【在延慶宮西, 世傳高麗太祖舊宅, 捨家爲寺。 今屬敎宗, 給田二百結。】 演福寺、 【在都城中央, 屬禪宗, 給田一百六十五結。】 神岩寺、 【在都城正東, 屬敎宗, 給田一百五十結。】 甘露寺、 【在碧瀾渡東, 俯臨江水, 最爲奇絶。 屬敎宗, 給田二百結。】 觀音屈、 【在城外東北, 屬禪宗, 給田二百五十結。】 雲岩寺、 【有碑, 舊名光岩, 在宣義門外。 高麗恭愍王葬妃魯國公主于寺東, 爲之重創, 極其壯麗, 所謂雲岩之金碧輝映山谷者。】 松都八景。 【紫洞尋僧, 靑郊送客, 北山烟雨, 西江風雪, 白嶽晴雲, 黃橋晩照, 長湍石壁, 朴淵瀑布。】 靈異: 高麗之先阿干康忠卜宅於松嶽南麓以居, 其曾孫作帝建娶西海龍王女, 又居於此, 生四男一女。 龍女於宅中堀井, 常由井中往來西海, 戒夫曰: "我將入井, 愼勿見之。" 作帝建後從窓隙窺之, 龍女率女子至井邊, 俱化爲黃龍, 興雲入井。 及還, 責夫曰: "何負約爲? 吾不得在此矣。" 遂與女變爲龍, 入井不還。 太祖卽位, 追尊作帝建爲懿祖, 龍女爲景獻王后, 捨其宅爲廣明寺。
- 【태백산사고본】 52책 148권 2장 B면【국편영인본】 5책 613면
- [註 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