地理志 / 京都漢城府
◎ 경도 한성부(京都漢城府)
본래 고구려의 남평양성(南平壤城)이니, 일명(一名) 북한산군(北漢山郡)이다.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동진(東晉) 간문제(簡文帝) 함안(咸安) 2년(372) 임신에 남한산(南漢山)으로부터 와서 도읍을 정하여 【남한산은 지금의 광주(廣州). 】 1백 5년을 지내고, 문주왕(文周王)이 고구려의 난을 피하여 고마나루[熊津]001) 로 옮겨 도읍하였고, 고려 초에 양주(楊州)로 고쳤다. 숙종(肅宗) 때 술사(術士) 사의령(司儀令) 김위제(金謂磾)가 옥룡 선사(玉龍禪師)의 《도선밀기(道詵密記)》를 증거로 하여 아뢰기를,
"양주(楊州)에 목멱양(木覓壤)이 있는데, 가히 도읍을 세울 만합니다."
하고, 일자(日者) 소부감(少府監) 문상(文象)이 따라서 그 말대로 아뢰니, 4년 기묘 9월에 임금이 친히 거둥하여 땅을 살펴보고, 평장사(平章事) 최사추(崔思諏)와 지주사(知奏事) 윤관(尹瓘)에게 명하여 그 역사를 감독하게 해서, 5년 신사에 시작하여 9년 갑신에 역사를 마치니, 곧 송(宋)나라 휘종(徽宗) 숭녕(崇寧) 3년(1104)이다. 8월에 임금이 와서 살펴보고 남경 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승격시켰다. 이로부터 인종(仁宗)·의종(毅宗)·충렬왕(忠烈王)·공민왕(恭愍王)·공양왕(恭讓王)이 모두 순행하여 이곳에 머물렀다. 충렬왕 34년 무신에 【곧 원(元)나라 무종(武宗) 지대(至大) 원년(元年). 】 한양부(漢陽府)로 고쳐서 부윤(府尹)·판관(判官)을 두었고, 본조(本朝)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憲大王) 3년 갑술 【곧 명(明)나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홍무(洪武) 27년. 】 10월 갑오에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한성부(漢城府)로 고쳐서, 판사(判事)·윤(尹)·소윤(少尹)·판관(判官)·참군(參軍)을 두고, 을해002) 2월에 비로소 종묘(宗廟)와 궁실(宮室)을 경영하여 9월에 모두 낙성되었다.
도성(都城)의 둘레가 9천 9백 75보(步)인데, 북쪽 백악사(白嶽祠)로부터 남쪽 목멱사(木覓祠)에 이르는 지름이 6천 63보요, 동쪽 흥인문(興仁門)으로부터 서쪽 돈의문(敦義門)003) 에 이른 지름이 4천 3백 86보가 되며, 정동(正東)을 흥인문, 정서(正西)를 돈의문, 정북(正北)을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을 홍화문(弘化門) 【곧 동소문(東小門). 】 , 동남(東南)을 광희문(光熙門) 【곧 수구문(水口門). 】 , 서남(西南)을 숭례문(崇禮門) 【곧 남대문. 】 , 소북(小北)을 소덕문(昭德門) 【곧 서소문(西小門). 】 , 서북(西北)을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 【태조(太祖) 5년 병자 봄에 각도의 민정(民丁) 11만 8천 76명을 모아 도성을 쌓기 시작하였는데,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니, 번와(燔瓦) 및 석회군(石灰軍)이 또 1천 7백 59명이었다. 가을에 이르러 또 민정 7만 9천 4백 31명을 모아서 8월 13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9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였으며, 금상(今上) 4년 임인에 태종의 명으로 성을 수축하여 토성(土城)을 모두 돌로 바꾸었는데, 8도의 군사 총 32만 2천 4백 명을 모아,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에 마치었다. 성 동쪽에, 처음에 수문(水門) 3을 열었는데, 장마를 만나면 〈문이〉 막히는 것을 없애기 위하여 2문을 더 만들었다. 】
동부(東部) 12방(坊) 【숭신(崇信)·연화(蓮花)·서운(瑞雲)·덕성(德成)·숭교(崇敎)·연희(燕喜)·관덕(觀德)·천달(泉達)·흥성(興盛)·창선(彰善)·건덕(建德)·인창(仁昌). 】
남부(南部) 11방(坊) 【광통(廣通)·호현(好賢)·명례(明禮)·대평(大平)·훈도(薰陶)·성명(誠明)·낙선(樂善)·정심(貞心)·명철(明哲)·성신(誠身)·예성(禮成). 】
서부(西部) 8방(坊) 【인달(仁達)·적선(積善)·여경(餘慶)·황화(皇華)·양생(養生)·신화(神化)·반석(盤石)·반송(盤松). 】
북부(北部) 10방(坊) 【광화(廣化)·양덕(陽德)·가회(嘉會)·안국(安國)·관광(觀光)·진장(鎭長)·명통(明通)·준수(俊秀)·순화(順化)·의통(義通). 】
중부(中部) 8방(坊) 【징청(澄淸)·서린(瑞麟)·수진(壽進)·견평(堅平)·관인(寬仁)·경행(慶幸)·정선(貞善)·장통(長通). 】
종묘(宗廟) 【중부 정선방(貞善坊)과 동부 연화방(蓮花坊) 중앙에 있으니, 담 둘레에 소나무를 심었다. 】 영녕전(永寧殿) 【종묘의 담 안 서쪽에 있다. 태조(太祖)가 하늘의 명[天命]을 받아 〈왕이 되매〉 왕(王)으로 목(穆)·익(翼)·도(度)·환(桓)의 네 조상을 추존하고, 종묘를 세워 제사를 받들다가, 태종(太宗)을 부묘(祔廟)하게 되매, 목조(穆祖)를 체천(遞遷)해야 하므로, 따로 이 전각을 세우고 목조의 신주를 옮겨 모시었으며, 익(翼)·도(度)·환(桓)의 세 조상도 또한 이곳에 차례로 옮겨 모시었다. 】 사직(社稷) 【인달방(仁達坊)에 있으니, 둘레의 담에 소나무를 심었다. 】 문소전(文昭殿) 【처음에 문소전을 창덕궁 서북쪽에 세우고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憲大王)과 신의 왕후(神懿王后)의 화상[神御]을 모시고, 또 광효전(廣孝殿)을 창덕궁 동북쪽에 세우고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과 원경 왕후(元敬王后)의 화상을 모시었다가, 그 후에 송(宋)나라 경령궁(景靈宮)의 제도에 의하여 원묘(原廟)를 경복궁 성안 동북쪽에 고쳐 지었는데, 앞에는 묘(廟), 뒤에는 침(寢)으로 하여 한결같이 고례(古禮)를 따르고, 이름을 문소전이라 하여, 두 임금(태조·태종)의 화상을 옮겨 모시었다. 】 문묘(文廟) 【숭교방(崇敎坊)에 있고, 뜰에 비(碑)가 있다. 성균관 학관(成均館學官)을 두어 선비를 가르치는데, 2백 사람으로써 액수를 정하였다. 옆에 양현고(養賢庫)를 두어 섬학전(贍學田) 1천 35결(結)을 주었고, 금상(今上) 13년(1431) 신해에 9백 65결을 더 주었다. 】
경복궁(景福宮) 【백악산(白岳山) 남쪽에 있다. 】 연침(燕寢)을 강녕전(康寧殿), 동쪽 작은 침전(寢殿)을 연생전(延生殿), 서쪽 작은 침전을 경성전(慶成殿), 또 그 남쪽을 사정전(思政殿) 【정사를 보는 곳. 】 , 또 그 남쪽을 근정전(勤政殿) 【조회를 받는 곳. 】 , 안문[內門]을 근정(勤政), 안 동문(東門)을 일화(日華), 동각루(東閣樓)를 융문(隆文), 서각루(西閣樓)를 융무(隆武)라 한다.
영제교(永濟橋) 【근정문 밖에 있다. 】 홍례문(弘禮門) 【영제교 남쪽에 있다. 】 경회루(慶會樓) 【궁 서쪽 담안에 있는데, 둘레가 못으로 되어 있다. 】 동궁(東宮) 【건춘문(建春門) 안에 있다. 】
궁성(宮城) 【둘레가 1천 8백 13보(步)이다. 】 동문(東門)을 건춘(建春), 서문(西門)을 영추(迎秋), 남문(南門)을 광화(光化)라 한다. 【문루(門樓)가 2층이요, 누 위에 종고(鍾鼓)를 달고 새벽과 저녁에 울리어 때알림을 엄하게 한다. 문 남쪽 좌우에 의정부(議政府)·중추원(中樞院)·육조(六曹)·사헌부(司憲府) 등 각사(各司)의 공해(公廨)를 벌려 놓았다. 】
창덕궁(昌德宮) 【정선방(貞善坊)에 있다. 태종(太宗) 5년(1405) 을유에 세워서 이궁(離宮)으로 삼았다. 】 인정전(仁政殿) 【조회를 받는 곳. 】 안문을 인정(仁政), 중문을 진선(進善), 바깥문을 돈화(敦化)라 한다.
광연루(廣延樓) 【궁 동쪽에 있다. 】 수강궁(壽康宮) 【연화방(蓮花坊)에 있다. 태종(太宗) 18년(1418) 무술에 왕위를 물려주고, 따로 이 궁을 지어 거처하였다. 】 선양정(善養亭) 【궁 남쪽 언덕에 있다. 】
혜정교(惠政橋) 【중부 서린방(瑞麟坊) 북쪽에 있다. 】 운종가(雲從街) 【곧 서린방과 수진방(壽進坊)의 중앙이다. 】 통운교(通雲橋) 【관인방(寬仁坊) 남쪽에 있다. 】 북광통교(北廣通橋) 【광통방 북쪽에 있다. 】 남광통교(南廣通橋) 【태평방(太平防)에 있다. 】
큰 저자[大市] 【중부 장통방(長通坊)과 경행방(慶幸坊) 중앙에 있다. 】 종루(鍾樓) 【도성 중앙에 있다. 2층으로 되어 있고, 누 위에 종을 달아서 새벽과 저녁을 깨우쳐 준다. 】 도성 좌우 행랑(都城左右行廊) 【대략 2천 27간이다. 】
태평관(太平館) 【숭례문(崇禮門) 안 황화방(皇華坊)에 있다. 이곳에서 중국 사신(使臣)을 접대하는데, 옆에다 별전(別殿)을 지어서 임금이 쉬는 곳으로 삼았다. 】 모화관(慕華館) 【돈의문(敦義門) 밖 서북쪽에 있다. 본이름은 모화루(慕華樓)이니, 중국 사신(使臣)을 영접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금상(今上) 12년(1430) 경술에 고쳐 짓고 관(館)으로 하였다. 남쪽에 네모진 못이 있는데, 낮은 담을 쌓고 버들을 심었다. 】
오부(五部)의 호수(戶數)는 1만 7천 15호, 성저십리(城底十里)의【동쪽은 양주(楊州) 송계원(松溪院) 및 대현(大峴)004) 에 이르고, 서쪽은 양화도(楊花渡) 및 고양(高陽) 덕수원(德水院)에 이르고, 남쪽은 한강 및 노도(露渡)005) 에 이른다. 】 호수는 1천 7백 79호이다.
간전(墾田)은 1천 4백 15결(結)이다.
삼각산(三角山) 【도성 밖 정북(正北)에 있으니, 일명(一名)은 화산(華山)이다. 신라 때에는 부아악(負兒岳)이라 일컬었다. 】 도성(都城)의 진산(鎭山)은 백악(白岳)이다. 【산정(山頂)에 사당[祠宇]이 있어서 삼각산의 신을 제사 지내는데, 백악을 붙여서 지낸다. 중사(中祀)로 한다. 】
목멱사(木覓祠) 【도성 남산 꼭대기에 있으니, 소사(小祀)이다. 봉화(烽火)가 5곳이 있으니, 제일(第一)은 함길도(咸吉道)와 강원도(江原道)로부터 온 양주(楊州) 아차산(峨嵯山) 봉화에 응하고, 제이(第二)는 경상도로부터 온 광주(廣州) 천천산(穿川山) 봉화에 응하고, 제삼(第三)은 평안도·황해도로부터 육로(陸路)로 온 무악(毋岳) 동쪽 봉우리의 봉화에 응하고, 제사(第四)는 평안도와 황해도로부터 해로(海路)로 온 무악 서쪽 봉우리의 봉화에 응하고, 제오(第五)는 전라도와 충청도로부터 온 양천(陽川) 개화산(開花山) 봉화와 아차산(峨嵯山) 봉화에 응하고, 또 함길도(咸吉道)와 강원도로부터 온 풍양(豐壤) 대이산(大伊山) 봉화에 응한다. 】 무악(毋岳) 【모화관 서쪽에 있다. 위에 봉화가 두곳이 있으니, 동쪽 봉우리는 평안도와 황해도로부터 육로로 온 고양(高陽) 소달산(所達山) 봉화에 응하고, 서쪽 봉우리는 평안도와 황해도로부터 해로로 온 영서역(迎曙驛) 서산(西山) 봉화에 응한다. 】
연희궁(衍禧宮) 【무악 남쪽에 있다.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이 일찍이 "이 땅이 무악의 명당(明堂)이 되어 가히 도읍을 세울 만하다."고 하였는데, 세종 3년(1421) 신축에 태종이 그 말을 생각하고 이궁(離宮)을 짓게 하였다. 】
우사단(雩祀壇)·동방 토룡단(東方土龍壇)·선농단(先農壇)【모두 흥인문(興仁門) 밖 평촌(坪村)006) 에 있다. 】 마보단(馬步壇)·마조단(馬祖壇)·선목단(先牧壇)·마사단(馬社壇)【모두 흥인문 밖 사근사리(沙斤寺里)007) 에 있다. 】 선잠단(先蠶壇)【동소문 밖 사한이(沙閑伊)008) 에 있다. 】 노인성단(老人星壇)·원단(圓壇)·영성단(靈星壇)·풍운뢰우단(風雲雷雨壇)【모두 숭례문 밖 둔지산(屯地山)009) 에 있다. 】 남방 토룡단(南方土龍壇) 【한강 북쪽에 있다. 】 서방 토룡단(西方土龍壇)【 가을두(加乙頭)010) 에 있다. 】 북교단(北郊壇)·북방 토룡단(北方土龍壇)·여제단(厲祭壇) 【모두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다. 】
동적전(東籍田) 【흥인문 밖에 있다. 종묘·사직·산천(山川) 백신(百神)의 제미[棄盛]를 제공한다. 또 구도(舊都)의 문교(門郊)에 서적전(西籍田)이 있다. 】
한강도(漢江渡) 【목멱산 남쪽에 있다. 너비 2백 보. 예전에는 사평도(沙平渡)011) 또는 사리진도(沙里津渡)012) 라 하였다. 북쪽에 단(壇)이 있는데, 봄·가을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며, 중사(中祀)로 한다. 도승(渡丞) 1인을 두어서 드나드는 사람을 조사한다. 나루 머리[渡頭]에 제천정(濟川亭)이 있다. 】 용산강(龍山江) 【숭례문 밖 서남쪽 9리에 있다. 배로 실어 온 세곡(稅穀)을 거둬들이는 곳으로서, 군자 강감(軍資江監)과 풍저 강창(豐儲江倉)이 있다. 】 서강(西江) 【서소문 밖 11리에 있다. 또한 배로 실어 온 세곡(稅穀)을 거둬들이는 곳으로서, 광흥 강창(廣興江倉)과 풍저 강창(豐儲江倉)이 있다. 】 가을두(加乙頭)013) 【서소문 밖 12리에 있다. 오똑하고 기이하게 빼어났고, 남쪽으로 큰 강을 임하여 벽처럼 서서, 백 길이나 되는데, 나무를 휘어잡고 아래를 굽어보면 터럭끝이 오싹해진다. 】
빙고(氷庫) 2【곧 예전의 얼음집[淩陰]이다. 하나는 두모포(豆毛浦)014) 에 있으니, 나라 제향에 쓸 얼음을 바치고, 하나는 한강 아래 백목동(栢木洞)015) 에 있으니, 어선(御膳), 나라 손님 접대 또는 백관(百官)에게 나누어 줄 얼음을 바친다. 】
조지소(造紙所) 【장의사동(壯義寺洞)에 있다. 처음에는 사대(事大)의 표(表)·전(箋)·주(奏)·계(啓)·자문(咨文)에 쓸 종이를, 전라도 전주(全州)와 남원부(南原府)에서 해마다 세밑에 바쳤는데, 많이 쓰는 것을 대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금상 2년에 특명으로 조지소를 두어 종이를 만들었는데, 품질이 옛것에 견주어 훨씬 곱고 좋았다. 이로 말미암아 전주와 남원 두 부(府)의 세공(歲貢) 독촉의 폐단이 비로소 없어졌다. 】 물방아[水輾] 【장의사(壯義寺) 동구(洞口)에 있다. 】
동활인원(東活人院) 【동소문 밖에 있다. 】 서활인원(西活人院) 【서소문 밖에 있다. 옛 이름은 대비원(大悲院)이다. 제조(提調)와 별좌(別坐)를 두고, 또 의원과 무당을 두어서, 서울 안에 병들고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을 모두 이곳에 모아 놓고, 죽·밥·국·약을 주며, 아울러 옷·이불·자리를 주어 편하도록 보호해 주고, 만일 죽는 이가 있으면 잘 묻어 준다. 】
귀후소(歸厚所) 【용산강 가에 있다. 제조(提調)와 별좌(別坐)를 두고, 또 중들로 일을 주장하게 하여, 관(棺)·곽(槨)을 만들어 팔아서 초상집의 급작스럽게 당한 일을 예비하게 한다. 】
흥천사(興天寺) 【황화방(皇華坊)에 있는데, 선종(禪宗)에 속한다. 3층탑이 있고, 〈그 속에〉 석가여래(釋迦如來)의 사리(舍利)를 안치하였다. 태조가 세우고 밭 2백 50결(結)을 주었다. 】 흥덕사(興德寺) 【연희방(燕喜坊)에 있는데, 교종(敎宗)에 속한다. 태조가 궁(宮)을 버리고 절을 만들어서 밭 2백 50결(結)을 주었다. 】 장의사(壯義寺)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는데, 교종(敎宗)에 속한다. 밭 2백 50결을 주었다. 】
봉경(封境)【동쪽으로 양양(襄陽)에 이르기 5백 40리, 서쪽으로 풍천(豐川)에 이르기 6백 리, 남쪽으로 해진(海珍)016) 에 이르기 9백 80리, 북쪽으로 여연(閭延)017) 에 이르기 1천 4백 70리, 동북쪽으로 경원(慶源)에 이르고, 동남쪽으로 동래(東萊)에 이르기 8백 70리, 서남쪽으로 태안(泰安)에 이르기 3백 90리, 서북쪽으로 의주(義州)에 이르기 1천 1백 40리이다. 】
- 【태백산사고본】 52책 148권 1장 A면【국편영인본】 5책 613면
- [註 001]고마나루[熊津] : 공주.
- [註 002]
을해 : 4년.- [註 003]
돈의문(敦義門) : 서대문.- [註 004]
대현(大峴) : 큰고개.- [註 005]
노도(露渡) : 노량진.- [註 006]
평촌(坪村) : 벌말.- [註 007]
사근사리(沙斤寺里) : 사근절.- [註 008]
사한이(沙閑伊) : 성북동.- [註 009]
둔지산(屯地山) : 둔지미.- [註 010]
가을두(加乙頭) : 갈머리.- [註 011]
사평도(沙平渡) : 모래벌나루.- [註 012]
사리진도(沙里津渡) : 모래말나루.- [註 013]
가을두(加乙頭) : 갈머리.- [註 014]
두모포(豆毛浦) : 두뭇개.- [註 015]
◎ 京都漢城府: 本高句麗南平壤城, 一名北漢山郡。 百濟 近肖古王以東晋 簡文帝 咸安二年壬申, 自南漢山來都, 【南漢山, 卽今廣州。】 歷一百五年, 文周王避高句麗之難, 移都熊津。 高麗初, 改爲楊州。 肅宗時, 有術士司儀令金謂磾者, 據玉龍禪師 《道詵密記》上言: "楊州有木覓壤, 可立城。" 日者少府監文象從而和之。 四年己卯九日, 王親幸相地, 命平章事崔思諏、知奏事尹瓘董其役, 經始于五年辛巳, 訖功于九年甲申, 卽宋 徽宗 崇寧三年也。 八月, 王來遠觀, 陞爲南京留守官。 自是仁宗、毅宗、忠烈王、恭愍王、恭讓王, 皆巡駐于此。 忠烈王三十四年戊申, 改爲漢陽府, 置府尹判官。 【卽元 武宗 至大元年。】 本朝太祖康獻大王三年甲戌十月甲午, 定都于此, 改爲漢城府, 置判事尹少尹判官參軍。 【卽大明 太祖高皇帝 洪武二十七年。】 乙亥二月, 始營宗廟宮室, 九月, 皆告成。 都城周回九千九百七十五步。 北自白嶽祠, 南至木覓祠, 徑六千六十三步。 東自興仁, 西至敦義門, 徑四千三百八十六步。 正東曰興仁門, 正西曰敦義門, 正北曰肅淸門, 東北曰弘化門, 【卽東小門】 東南曰光熙門, 【卽水口門】 西南曰崇禮門, 小北曰昭德門, 【卽西小門】 西北曰彰義門。 【我太祖五年丙子春, 徵各道民丁一萬八千七十六, 始築都城, 以正月十五日起役, 至二月晦日罷役。 燔瓦及石灰軍, 又一千七百五十九。 至秋, 又徵民丁七萬九千四百三十一, 以八月十三日始役, 至九月晦日罷役。 今上四年壬寅, 太宗命修築之, 其土城, 皆易以石。 徵八道軍摠三十二萬二千四百名, 以正月十五日始役, 二月而畢。 城東初開水門三, 每遇霖潦, 或致壅遏, 故增作二門。】 東部凡十二坊, 【崇信、蓮花、瑞雲、德成、崇敎、燕喜、觀德、泉達、興盛、彰善、建德、仁昌。】 南部凡十一坊, 【廣通、好賢、明禮、大平、薰陶、誠明、樂善、貞心、明哲、誠身、禮成。】 西部凡八坊, 【仁達、積善、餘慶、皇華、養生、神化、盤石、盤松。】 北部凡十坊, 【廣化、陽德、嘉會、安國、觀光、鎭長、明通、俊秀、順化、義通。】 中部凡八坊。 【澄淸、瑞麟、壽進、堅平、寬仁、慶幸、貞善、長通。】 宗廟 【在中部貞善坊、東部蓮花坊中央。 周樹之以松。】 永寧殿 【在宗廟周垣內西。 太祖受命, 追王穆、翼、度、桓四祖, 立宗廟以奉享祀。 及太宗祔廟, 穆祖當遷, 乃別建是殿, 移安穆祖之主。 翼、度、桓三祖, 亦當遽遷于此也。】 社稷 【在仁達坊, 周垣樹之以松。】 文昭殿 【初建文昭殿於昌德宮西北, 奉安太祖康獻大王、神懿王后神御。 又建廣孝殿於昌德宮東北, 奉安太宗恭定大王、元敬王后神御。 後依宋景靈宮之制, 改營原廟于景福宮城內之東北, 前廟後寢, 一遵古禮, 因名文昭殿, 移安兩殿神御。】 文廟 【在崇敎坊, 廟庭有碑。置成均館學官, 敎養士子, 以二百人爲額。 旁置養賢庫, 給贍學田一千三十五結。 今上十三年辛亥, 加給九百六十五結。】 景福宮。 【在白嶽山南。】 燕寢曰康寧殿, 東小寢曰延生殿, 西小寢曰慶成殿, 又其南曰思政殿, 【視事之所】 又其南曰勤政殿, 【受朝之所】 內門曰勤政內, 東門曰日華, 東閣樓曰隆文, 西閣〔樓〕曰隆武。 永濟橋 【在勤政門外。】 、弘禮門 【在永濟橋南。】 、慶會樓 【在宮西垣內, 環樓爲池。】 、東宮 【在建春門之內】 、宮城。 【周回一千八百十三步。】 東門曰建春, 西曰迎秋, 南曰光化。 【門樓二層, 樓上懸鍾皷, 以限晨夕, 警中嚴。 門南左右分列議政府、中樞院、六曹、司憲府等各司公廨。】 昌德宮 【在貞善坊。 太宗五年乙酉, 始建以爲離宮。】 、仁政殿。 【受朝之所】 內門曰仁政, 中門曰進善, 外門曰敦化。 廣延樓 【在宮東。】 、壽康宮 【在蓮花坊。 太宗十八年戊戌, 內禪, 別作此宮以御之。】 、善養亭 【在宮南岡。】 、惠政橋 【在中部瑞麟坊北。】 、雲從街 【卽瑞麟壽進坊中央。】 、通雲橋 【在寬仁坊南。】 、北廣通橋 【在廣通坊此。】 、南廣通橋 【在太平坊。】 、大市 【在中部長通、慶幸坊中央。】 、鐘樓 【在都城中央, 構爲二層, 樓上懸鐘, 以警晨昏。】 、都城左右行廊 【凡二千二十七間。】 、太平館 【在崇禮門內皇華防, 以館待朝廷使臣。 旁作別殿, 以爲殿下歇次。】 、慕華館。 【在敦義門外西北, 本名慕華樓。 以爲朝廷使臣迎接之所。 今上十二年庚戌, 改創爲館, 南有方池, 築垣種柳。】 五部戶一萬七千一十五。 城底十里 【東至楊州松溪院及大峴, 西至楊花渡及高陽德水院, 南至漢江及露渡。】 戶一千七百七十九, 墾田一千四百一十五結。 三角山、 【在都城外正北, 一名華山。 新羅時, 稱負兒嶽。】 都城鎭山曰白嶽、 【山頂有祠宇, 祀三角之神, 附以白嶽爲中祀。】 木覓祠、 【在都城南山之頂, 小祀。 有烽火五處, 第一所準咸吉、江原道來楊州峩嵯山烽火。 第二所準慶尙道來廣州穿川山烽火。 第三所準平安、黃海道陸路來毋嶽東峯火〔烽火〕。 第四所, 準平安、黃海道海路來毋嶽西峯烽火。 第五所, 準全羅、忠淸道海路來陽川開花烽火。峩嵯山烽火, 準咸吉、江原道來豐壤大伊山烽火。】 毋嶽、 【在慕華館之西, 上有烽火二處。 東峯準平安、黃海道陸路來高陽所達山烽火, 西峯準平安、黃海道海路來迎曙驛西山烽火。】 衍禧宮、 【在母嶽之南。 晉山府院君河崙嘗以此地爲毋嶽明堂, 可建都邑。 歲辛丑, 太宗思其言, 爲營離宮。】 雩祀壇、東方土龍壇、先農壇、 【皆在興仁門外坪村】 馬步壇、馬祖壇、先牧壇、馬社壇、 【皆在興仁門外沙斤寺里】 先蠶壇、 【在東小門外沙閑伊】 老人星壇、圖壇、靈星壇、風雲雷雨壇、 【皆在崇禮門外屯地山。】 南方土龍壇、 【在漢江北。】 西方土龍壇、 【在加乙頭】 北郊壇、北方土龍壇、厲祭壇、 【皆在彰義門外。】 東籍田、 【在興仁門外, 以供宗廟社稷山川智神之粢盛。 又於薦都門郊, 有西籍田。】 漢江渡、 【在木覓山南, 廣二百步。 古稱沙平渡, 俗號沙里津渡。 北有壇, 春秋行國祭, 爲中祀。 置渡丞一人, 譏察出入, 渡頭有濟川亭。】 龍山江、 【在崇禮門外西南九里, 收貯漕運之所。 有軍資江監、豐儲江倉。】 西江、 【在西小門外十一里, 亦收貯漕運之所。 有廣興江倉、豐儲江倉。】 加乙頭、 【在西小門外十二里, 突兀奇秀, 南臨大江, 壁立百仞, 攀木俯視, 毛髮竪然。】 冰庫二、 【卽古之凌陰。 一在豆毛浦, 以供祭享; 一在漢江下栢木洞, 以供御膳賓食, 且頒百官。】 造紙所、 【在壯義寺洞。 在先事大表箋奏啓咨文所用紙箚, 全羅道全州南原府歲貢之, 多不中用。 今上二年, 特命置所, 抄造工善支良, 紙品比舊甚精。 由是全南二府責貢之弊始除。】 水輾、 【在壯義寺洞口】 東活人院、 【在東小門外。】 西活人院、 【在西小門外, 古名大悲院。 有提調及別坐。 又置醫巫, 凡都內病人之無歸者, 皆令聚此, 給粥飯湯醬藥餌, 幷給衣被薦席, 隨宜調護。 如有物故, 使仵作埋之。】 歸厚所、 【在龍山江。 有提調別坐, 且使僧徒之有志者幹事。 造棺槨以鬻之, 以備喪家之倉卒。】 興天寺、 【在皇華坊, 屬禪宗。 寺有三層塔, 安釋迦如來舍利, 乃太祖所建, 給田二百五十結。】 興德寺、 【在燕喜坊, 屬敎宗。 太祖捨宮爲寺, 給田二百五十結。】 壯義寺。 【在彰義門外, 屬敎宗。 給田二百五十結。】 封境 【東至襄陽五百四十里, 西至豐川六百里, 南至海珍九百八十里, 北至閭延一千四百七十里, 東北至慶源, 東南至東萊八百七十里, 西南至泰安三百九十里, 西北至義州一千一百四十里。】
- 【태백산사고본】 52책 148권 1장 A면【국편영인본】 5책 613면
- [註 002]